非命橫死 ; 어린 양, 아벨 그리고 예수 - 창세기 4:1~10에 대한 묵상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아벨은 단순한 소품이나 배경으로 읽혀지곤한다. 가인의 살해사건을 전개해 나가는데 필요한 피살자일 뿐이다. 그러나 아벨의 자리에서 그 사건을 바라보면 우리의 삶에서 부딪히는 중요한 문제와 공명하고 있는 또 다른 이야기가 스며나온다. 우리의 일상 도처에 널려있는 비명횡사의 부조리함이 바로 아벨이 서있는 자리인 것이다.
불치의 병으로 태어나 가족과 세상의 따듯한 눈길과 축복은 맛보지도 못하고, 고통 속을 헤메다가 죽어가는 아기들, 불특정 다수에 대한 증오심으로 지나가던 어린 아이에게 황산을 뿌려 상상도 못할 고통 속에 죽어간 아이. 유태인 대학살과 마루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죽어갔고, 지금도 고통 속을 헤메고 있다.
아벨은 하나님께 양의 첫새끼를 제물로 드리고 그것을 받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기뻤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곁에서 제물을 드리던 형이 어느 날 불러내서 자신을 죽인다. 남도 아닌 형제의 손에 죽어가면서 아벨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니 무엇인가를 생각할 틈이나 있었을까?
이런 아벨을 비중있게 이야기하고 있는 히브리서에선 훌륭한 제물을 바친 아벨의 믿음과 그것을 받아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이 역시 그의 죽음이 담고 있는 부조리함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도 아벨은 보이지 않는 손길을 바라보는 시선인 믿음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일뿐이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훌륭한 제물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런 제물을 바침으로 말미암아 그는 의인이라는 증언을 받았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을 두고 증언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는 죽었지만, 그 믿음을 매개로 해서 아직도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4(표준새번역)]
아벨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나 간략하기 때문에 그가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죽었을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만이 가능하다. 그런데, 시선을 붙들어 계속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어린 양의 죽음과 아벨의 죽음이 서로 공명하고 있는 점이다.
세상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자신을 바라보며 너무나 기뻐하던 청년, 그리고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주며 들짐승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주던 그의 따듯한 손길이 어느 날 자신의 배를 가르는 시퍼런 칼날로 변했던 것이다. 어린 양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너무나 부조리했을 것이다. 물론 아벨도 자신이 돌보던 양이 처음 낳은 새끼였기 때문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을 것이다. 아마도 가장 소중하게 여겼을 그 새끼 양의 배를 가르는 그의 손길이 그 당황스럽고 고통스러워 하는 맑고 검은 양의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아벨은 그 부조리함에 직면했을 것이다. "도대체 왜?"라는 존재의 비명소리를....
바로 그 충격적인 조우, 존재의 비명소리가 자신의 부조리한 죽음 속에서도 아벨이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해주는 대답을 주었을까? 아니면 그렇게 죽어가는 순간 어린 양의 고통과 하나가 되면서 그 대답을 얻었을까? 어쩌면 예수처럼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처절한 고통과 버림받음 속에서 외마디 비명만으로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의 일상에 널려있는 비명횡사들은 대부분 마지막 경우처럼 그 부조리함에 짖이겨져 압사당하곤 한다.
나는 아벨이 어린 양의 배를 가르면서 생명과 죽음의 부조리한 관계에 대한 대답을 얻었기를 바란다. 그러지 못했다면 그 비명횡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라도 그 대답을 얻어 자유로워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그 모든 부조리한 죽음들을 거름으로 자라난 우리가 그들을 향한 작은 위로와 추모사라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곤 억지로 떠밀려 죽어가면서 절규와 비명으로 죽어가지 않고, 생명의 텃밭인 죽음의 바다에 설레임으로 멋지게 뛰어들 수 있는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에만 우리 형제와 이웃들을 고통속에 짖누르고 있는 그 모든 부조리함의 족쇄들을 깨트려 줄 수 있을 것이다.
동학의 창시자였던가? 그 분은 이 세상 모든 것에 하날님이 계시다고 가르쳤다. 그의 아들이 게가 조개를 잡아먹는 것을 보면서, "그럼 아버지, 하날님이 하날님을 죽여서 먹네요."라고 했단다. 그러자 "아니란다. 하날님이 자신을 먹여 하날님을 살리는 것이란다."라고 대답했단다. 첫번째 시선은 비명횡사의 부조리함에 붙들려 생존의 논리로 살아가는 주검의 삶을 바라본다. 허나 두번째 시선은 생명의 논리로 기꺼이 죽어주는 죽음의 삶을 깨닫는다. 그 갈래길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