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묵상2. 1:2b


"하나님의 영(바람, 강한 바람)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창조를 시작하기 전의 하나님은 물 위에 불어오는 강한 바람으로 묘사되어있다. 무풍지대에 떠있는 배는 움직이지 못하고 주검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바람 한 점 없는 유리같은 수면은 안정되어 있는 듯 싶지만, 사실 그것은 모든 것이 멈춰버린 주검이 될 수 있다. 주역에서는 물 위의 바람을 상징하는 괘가 가능성과 잠재력을 상징한다. 이처럼 그 주검 위를 불어오는 세찬 바람은 커친 파도의 두려움을 안겨주지만, 그것은 무한한 가능성과 변화의 시작을 잉태한 태반이 된다.

우리의 일상에 맺힌 욕망은 뱃전의 울렁이는 멀미나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결보다는 맑고 잔잔한 편안을 향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모든 것이 몸춰버린 주검일 뿐이다. 그 주검 위를 불어오는 바람은 주검을 새로운 생명의 잉태가 이뤄질 죽음으로 부활케 한다.

예수는 바로 그 일렁이는 물결 위를 걷는 하나님의 바람이었다. 빨리 건너편 육지에 도착하여 안정을 취하려는 제자들의 욕망, 바람을 거슬러 오르려는 그 욕망은 휘청이는 뱃전 위에서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는 바람의 결을 따라 물 위를 유유히 걸어간다. 하나님 곧 물 위를 불어오는 강한 바람의 결따라 노니는 예수.

우리의 삶을 엄습해오는, 일상의 어려움과 고통스런 사건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검푸른 바다 위에 맨 몸으로 허우적 거리는 순간처럼 우리를 힘겹게 한다. 그러나 이젠 육지에만 머물려하거나 배 밑바닥으로만 숨으려 하지 말고, 물결 위를 불어오는 바람의 결 따라 노니는 예수의 춤사위를 가만히 따라가 보자. 그러면 두려움은 사라지고, 우리의 표류는 오히려 자유로운 유영이 될 것이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그 흥겨움이 이 거친 물결 위에서 두려움에 절망하고 있는 수많은 생명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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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묵상1, 1:1,2a


["태초에∼창조하다" vs "태초에 창조할 때,∼"]


창세기 1:1은 "태초에 하나님이∼창조하셨다."와 "하나님이 ∼창조하기 시작하셨을 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로 해석이 가능하다. 첫 번째에는 무(無)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존재론적 궁극성"이 나타나 있다. 이와 달리 두 번째는 '혼돈과 공허의 땅'과 '깊음 위의 어둠', '물' 등의 배경 위에서 창조가 이뤄졌음을 이야기한다. 이 경우에는 혼돈과 공허, 깊은 어둠에 새로운 질서와 아름다움, 생명을 불어넣는 "실천적·경험적 근원성"의 모습으로 체험된 하나님이 그려진 것이다.


'무에서의 창조'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절대적 근원임을 강조하는 존재론적 해석이다.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관한 지적 호기심이나, 모든 존재의 근원이 무엇인가 등과 같은 "앎을 향한 집착". 확실하고 투명한 앎이 참된 삶을 보장한다는 강박관념. 그 집착의 뿌리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이 무엇인지는 감춰진채, 진위여부에만 시선을 빼앗기기 쉽다. 일상의 복잡성과는 괴리된 진리가 욕망의 촉수를 따라 삶을 유린하고 겁탈하는 경우들이 너무나 많이 있어왔다. 게다가 그 절대성이 어떻게든 인정되면, 그것은 이성적 비판의 가능성을 제거하고, 그것을 근거로한 그 어떤 파괴도 성화시킬 수 있다. 권력과 폭력에 의해서 진리가 변해가는 인류사의 경험들이 '그런 절대성으로는 그 어떤 욕망도 미화시킬 수 있음'을 절절히 보여주었다. 사실 이런 해석의 문제는 그 해석 자체보다는 그것만을 절대화하려는 욕망에 있다.

이와 달리 혼돈과 공허라는 배경에서 펼쳐지는 창조는 궁극적 시작을 하나의 체계적 설명 속에 가둬두려 안달하지 않는다. '주검의 흑암'이 어떻게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났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주검에서 생명으로 도약해간 체험, 그 절절한 환희의 노래가 터져나올 뿐이다. 인간의 인식이 접근할 수 없는, 그 너머의 세계는 겸손히 흑암과 혼돈과 공허 속에 남겨둔다. 그렇기 때문에 그 혼돈을 향한 새로운 창조의 노래와 해석이 끊임없이 변주될 수 있는 여백이 광활히 펼쳐져 있다. 또한 모든 생명의 뿌리는 극한 고통과 눈물, 혼돈과 절망의 주검임을 겸허히 인정하고 있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선과 악, 위와 아래, 안과 밖....그에 대한 차별, 아니 구별조차 불가능한 한 덩어리 혼돈과 허무가 이 모든 질서와 생명의 근원이고, 한 존재의 생명이 살아가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주검이 산산히 부서져 거름이 되어있는, '생명과 죽음의 진솔한 모습'이 그대로 비춰져 있다. 우리 삶의 아픔과 절망이 실은 무한한 가능성의 텃밭임을 깨닫게 하는 희망이 서려있는 해석인 것이다.

이런 해석은 회의나 맹목에 빠지기 쉬운, 절대적 진리에 대한 질문에서 벗어나게 하고, 우리 일상의 아픔과 절망에서 시작해서 새로운 생명과 가능성으로 도약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며, 이웃의 상처에 대한 치유의 손길을 잉태하게 한다. 또한 참된 자유를 맛보게 한다. 삶의 어두운 그늘과 썩어가는 우리의 자화상에 대한 정죄와 '성장, 밝음, 생존 등의 밝은 측면'에만 집착하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주검을 생명의 태반인 죽음으로 끌어안는 해방"에 도달하게 한다.

이런 시선은 이어지는 이야기들에서도 마주친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1:5, 표준새번역)." 또는 "밤과 낮이 함께 하루를 만들었다(1:5, N.L.T.)." 이 구절은 하루를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근원적 차이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보통 아침에 눈을 뜨면서 맞이하는 낮에서 하루가 시작되어 밤에 잠드는 시간에 끝나는 것으로 여긴다. 잠들어 있는 시간에 대해서는 부지불식간에 제외시켜버리곤 한다. 그러나 이 구절들에서 하루는 밤에서 시작된다. 낮의 시작, 낮의 잉태가 밤에 시작되는 것이다. 생명이 죽음에서 시작되듯이. 그리고 하루가 밤과 낮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밤, 죽음, 어두움을 터부시하고 파괴하려는 우리 일상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관점인 것이다. 이런 사소한 차이는 너무나 커서 그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근원적인 차이에서 뻣어나온 작은 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소함이 엄청난 차이를 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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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 6:45-52 [산에 비친 하나님 ; 폭풍과 폭발의 힘]

"그들과 헤어지신 뒤에,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46절)

남자 어른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인 예수는 그들과 헤어져 기도하러 산에 홀로 올라간다. 어떤 대단한 업적을 이루거나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절정의 순간, 그 직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자아도취의 망아적 쾌감에 취한 현실도피적 휘청임? 아니면, 절정에 오른 속도와 높이 만큼 빠르게 내리꽂을 추락의 아찔함? 다 채웠어도 만족되지 않는, 공허하고 허탈한 마음의 끈질긴 목마름, 더해만 가는 갈증? 군중이 우러러보는 자신의 모습과 너무나 다른 자화상을 부정하고 싶어 고개젖는 자괴감? 자신의 솔직한 모습이 받아들여 지기보다는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킬 도구로만 이용되는 자기 소외감?

어떤 것이든 절정의 폭발은 그 불꽃이 사그러들면 분명 무엇인가 혼란스운 파편들로 흩어진 흔적을 남긴다. 그 파편에는 자신의 살과 피도 섞여있을 수밖에 없다. 망아의 순간에서 벗어나면서 살점이 찢겨나간 상처의 아픔들도 강하게 밀려올 것이다.

결국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폭발, 빅뱅이 되기 위해서는 주변의 모든 것과 함께 자신의 존재가 찢겨져 흩어지는 고통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내 존재의 파괴가 단순한 삭제가 아니라 실은 내가 모든 존재와 하나이기 때문에 새로운 변화의 과정일 뿐임을 온 몸으로 깨닫고 있어야 한다.

어쩌면 예수의 그 절정은 폭발이 아니라 폭풍이었지도 모른다. 폭풍은 폭발과 달리 그 중심에 평화와 고요가 깃들어 중심의 핵에서 주변의 모든 것이 하나되어 회전하는 춤을 지켜보고 즐길 수 있다. 그러나 폭풍의 중심이었다고 해도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지러움과 현기증에 몸을 가누기 어려워지고, 자칫 주변의 폭풍에 휩쓸려 들기 쉽다. 그래서 폭풍의 중심에 흔들림 없이 서려면 보고 즐기려는 욕망의 눈을 질끈 감고, 온몸으로 그 흐름을 듣고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결국 새로운 변화와 생명의 시작이 될 폭발과 폭풍을 일으킬 수 있고, 그 절정의 순간이 지난 후에 엄습하는 혼란과 소외감 앞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깊은 뿌리가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예수는 그 절정의 시간이 지나고 모두들 돌아간 빈 시간에 그는 산으로 간다. 그렇게 머무는 시간과 공간이 지난 후에 그 쉼의 힘으로 다시금 자신이 가야할 가시밭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어고, 그 앞을 가로막는 폭풍치는 물결 위를 걷는 힘을 보여준다. 예수에겐 이렇게 그 뿌리가 바로 산에 혼자 머무는 시간 속에 든든하게 뻗어있는 것 같다.

산! 주역에서 산을 상징하는 괴는 양으로 둘러싸인 음으로 표현된다. 그 상징에서 "산이 겉보기에는 험란하고 크며 무섭게 보이는 양이지만, 그 속에는 다가오는 누구도 물리치지 않고 모든 생명을 감싸안아 키워주는 어머니의 기운인 음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읽어낼 수 있다. 그렇다 산은 언제나 무겁고 듬직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숨어드는 들짐승과 새들의 둥지가 되어주며 생명을 움트려는 모든 씨앗들에게 살과 피를 내어준다. 생명을 키우고 살리는 이런 산의 기운은 죽음에 도달한 생명들이 돌아갈 자리가 되어 그 죽음이 주검에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생명으로 영원히 거듭나게 하는 부활의 태반이 되어주기도 한다.

얼음장 밑의 물소리를 귀를 담궈 듣는다는 법정 스님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런 귀기울임은 모든 존재마다 각기 다른 신의 지문을 쓰다듬는 기도요, 명상이다. 이런 산의 모습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잠잠히 귀기울이는 예수님의 기도. 그것이 절정을 담담히 타고 넘을 수 있고 기적을 일으키면서도 흔들림없이 겸손할 수 있는 예수의 힘이 울려나오는 근원이 아닐까? 어머니되는 산의 모습 속에서 자신이 일으키는 폭풍과 폭발의 근원이 자기 힘이 아니라 키우고 기르는 하나님의 힘이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산산히 흩어지는 주검이 끝이 아니라 산 전체가 하나되어 영원을 향해 흘러가고 있음을 발견할 때 자신이 폭발하여 흩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잔잔해 질 것이다. 또한 산 전체가 실은 저 구석에 이름없는 들풀을 위해서 함께 숨쉰다는 것을 발견할 때, 절정에 서서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해갈될 것이다.

이렇게 산에 비춰진 어머니되신 하나님의 품에 안겨 그 오묘한 사랑을 느끼고 쉴 때, 그 어떤 두려움과 공허함, 착각이나 교만함도 잠잠해 지고, 흔들리지않는 뿌리의 신선한 물줄기를 맛본 후 다시금 산 아래로 돌아가 가야할 길을 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 힘으로 너무나 불안하게 출렁이는 파도 위를 유유히 걸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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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밭이 되어야 할 삶


"유다는 그 은돈을 성전에 내던지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다.
대제사장들은 그 은돈들을 거두어서 "이것은 피값이니, 성전 금고에 넣으면 안 되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의논한 끝에,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들의 묘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 밭은 오늘날까지 피밭이라고 한다." ( 마태복음 27장 5-8장 )


가장 소중한 사람을 배신하여 얻은 핏값. 그 핏값은 결국 자신도 죽게 하고 나그네들의 묘지값이 된다.

이 이야기는 배신자의 당연한 최후나 자살이 옳으냐 그르냐하는 논쟁, 또는 유다처럼 자살하지 않고 회개하여 주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들과는 다른 차원으로 읽힐 수 있다. 상징과 시로 읽혀질 때 우리 삶의 다른 차원을 드러내 준다.

일상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모든 존재자들은 사실 다른 존재자들의 희생과 죽음을 거름으로 자라갈 수밖에 없다. 예수를 배신한 유다의 삶은 사실 모든 존재자들의 삶을 비춰준다. 다른 존재를 위해서 죽어주기 보다는 살기 위해 다른 존재자를 죽여야만 하는 존재의 실상.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나의 편안함과 즐거움은 사실 이 지구상 어딘가에서 고통받는 누군가가 내 몫의 아픔까지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밟고 선 이 땅과 호흡하는 공기는 앞서 죽어간 수많은 생명의 시체들이다.

그 핏값을 당연한 것으로, 나만의 것으로 움켜잡으려고만 하면 결국 나 자신이 그 핏값에 팔려갈 때, 그 죽음이 자유롭게 기꺼이 내어주는 십자가의 그것이 아니라, 공포에 질려 버둥거리거나 자신의 존재를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처참한 자살이 되고 말 것이다.

사실 우리 삶은 모두 핏값으로 연명하는 것이기에 일상의 자리는 나그네들의 묘지, 그 영원한 안식터가 되어야 한다. 성전에 쌓여 있어서는 않된다. 일상의 모든 존재와 모든 시간은 이미 충분히 거룩하다. 그러나 오직 하나의 중심만을 차별적으로 집착하고, 일상의 시간을 목졸라 멈추게 한 예배만이 최고의 가치라고 고집하곤 한다. 이런 거짓과 허상에 핏값을 맺혀있게 해서는 않된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성전에 모은 돈은 모든 존재들에게로 해체되어 스며드는 십자가의 죽음, 그 내어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유일한 중심에 높게 쌓아올린 욕망의 바벨탑이다. 교회에 내는 헌금이 이런 욕망의 바벨탑이 아닌지..? 내가 나그네의 묘지로 읽궈지고 있는지....?

마태복음 27장 60절에서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 무덤을 예수의, 모든 나그네의 상징인 그분의 무덤으로 쓴다. 그렇게 자신의 소유와 터를 피밭으로 내어준다. 바로 지금 여기 내 삶을 피밭으로 내어주는 마음의 결을 타고 흘러나오는 발걸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일 것이다.

 

* Ennio Morricone, "Gabriel's Ob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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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스 2004-04-13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시아문... 멋진 제목입니다. 신학 공부하시는 분을 알라딘에서 만나다니, 여느 때와는 또다른 반가움과 감사함이네요.

아라비스 2004-04-13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게다가 지금 게다가 쿠폰까지 받았습니다.^^;;;;;;;;;; 첫만남이 아주 좋습니다.^^;

물무늬 2004-04-14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반가운 흔적이 남아있을 줄이야....님께서 신학 공부하는 사람을 만난 것에 반가워하는 것 못지 않게 저 역시 무척 반가우니까요. 알라딘에서 신학에 대해서 나눌 수 있는 분이 그리 많지 않아서 더더욱 반갑습니다. 게다가 개신교의 관점에서 열린 신앙은 더더욱 흔치 않아서요.
여시아문은 불교 경전의 시작 문구에서 따온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보는 것이 절대 유일의 관점이라고 보지 않고, 각자 자기가 들은 대로, 이해한 대로의 자리를 그리고 그 독특한 개성에 깃든 생명력을 보여주는 문구인 것 같습니다. 성서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정확히 읽어가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힘겨운 문제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성서의 구절 구절을 묵상하는 것은 제가 들은 대로 새겨나가는 설레임때문이었죠. 그런 의미에서 여시아문이라는 제목을 달아봤습니다^^
 

非命橫死 ; 어린 양, 아벨 그리고 예수 - 창세기 4:1~10에 대한 묵상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아벨은 단순한 소품이나 배경으로 읽혀지곤한다. 가인의 살해사건을 전개해 나가는데 필요한 피살자일 뿐이다. 그러나 아벨의 자리에서 그 사건을 바라보면 우리의 삶에서 부딪히는 중요한 문제와 공명하고 있는 또 다른 이야기가 스며나온다. 우리의 일상 도처에 널려있는 비명횡사의 부조리함이 바로 아벨이 서있는 자리인 것이다.


불치의 병으로 태어나 가족과 세상의 따듯한 눈길과 축복은 맛보지도 못하고, 고통 속을 헤메다가 죽어가는 아기들, 불특정 다수에 대한 증오심으로 지나가던 어린 아이에게 황산을 뿌려 상상도 못할 고통 속에 죽어간 아이. 유태인 대학살과 마루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죽어갔고, 지금도 고통 속을 헤메고 있다.

아벨은 하나님께 양의 첫새끼를 제물로 드리고 그것을 받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기뻤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곁에서 제물을 드리던 형이 어느 날 불러내서 자신을 죽인다. 남도 아닌 형제의 손에 죽어가면서 아벨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니 무엇인가를 생각할 틈이나 있었을까?

이런 아벨을 비중있게 이야기하고 있는 히브리서에선 훌륭한 제물을 바친 아벨의 믿음과 그것을 받아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이 역시 그의 죽음이 담고 있는 부조리함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도 아벨은 보이지 않는 손길을 바라보는 시선인 믿음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일뿐이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훌륭한 제물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런 제물을 바침으로 말미암아 그는 의인이라는 증언을 받았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을 두고 증언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는 죽었지만, 그 믿음을 매개로 해서 아직도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4(표준새번역)]

아벨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나 간략하기 때문에 그가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죽었을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만이 가능하다. 그런데, 시선을 붙들어 계속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어린 양의 죽음과 아벨의 죽음이 서로 공명하고 있는 점이다.

세상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자신을 바라보며 너무나 기뻐하던 청년, 그리고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주며 들짐승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주던 그의 따듯한 손길이 어느 날 자신의 배를 가르는 시퍼런 칼날로 변했던 것이다. 어린 양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너무나 부조리했을 것이다. 물론 아벨도 자신이 돌보던 양이 처음 낳은 새끼였기 때문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을 것이다. 아마도 가장 소중하게 여겼을 그 새끼 양의 배를 가르는 그의 손길이 그 당황스럽고 고통스러워 하는 맑고 검은 양의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아벨은 그 부조리함에 직면했을 것이다. "도대체 왜?"라는 존재의 비명소리를....

바로 그 충격적인 조우, 존재의 비명소리가 자신의 부조리한 죽음 속에서도 아벨이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해주는 대답을 주었을까? 아니면 그렇게 죽어가는 순간 어린 양의 고통과 하나가 되면서 그 대답을 얻었을까? 어쩌면 예수처럼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처절한 고통과 버림받음 속에서 외마디 비명만으로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의 일상에 널려있는 비명횡사들은 대부분 마지막 경우처럼 그 부조리함에 짖이겨져 압사당하곤 한다.

나는 아벨이 어린 양의 배를 가르면서 생명과 죽음의 부조리한 관계에 대한 대답을 얻었기를 바란다. 그러지 못했다면 그 비명횡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라도 그 대답을 얻어 자유로워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그 모든 부조리한 죽음들을 거름으로 자라난 우리가 그들을 향한 작은 위로와 추모사라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곤 억지로 떠밀려 죽어가면서 절규와 비명으로 죽어가지 않고, 생명의 텃밭인 죽음의 바다에 설레임으로 멋지게 뛰어들 수 있는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에만 우리 형제와 이웃들을 고통속에 짖누르고 있는 그 모든 부조리함의 족쇄들을 깨트려 줄 수 있을 것이다.

동학의 창시자였던가? 그 분은 이 세상 모든 것에 하날님이 계시다고 가르쳤다. 그의 아들이 게가 조개를 잡아먹는 것을 보면서, "그럼 아버지, 하날님이 하날님을 죽여서 먹네요."라고 했단다. 그러자 "아니란다. 하날님이 자신을 먹여 하날님을 살리는 것이란다."라고 대답했단다. 첫번째 시선은 비명횡사의 부조리함에 붙들려 생존의 논리로 살아가는 주검의 삶을 바라본다. 허나 두번째 시선은 생명의 논리로 기꺼이 죽어주는 죽음의 삶을 깨닫는다. 그 갈래길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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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13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4-13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멘트에는 누구에게만 보이기 같은게 없을까요....
님의 글을 몇 번씩 곱씹어 읽으면서 스쳐가는 상념들과 마주쳤습니다.

글 속에 베어있는 맺힘에 저도 모르게 공명하는데
뭐라고 말을 건네기가 어려운 마음의 서성임..

십여년을 전신마비로 서서히 죽어가신 아버지의 모습들...

깊은 상처에 힘겨워하는 친구에게 어렵게 건낸 말이
별 도움이 되지 못하고, 그래서 계속 안절부절 못하고 말을 이어가는데
그럴 수록 말의 무력함만 분명해지던 기억들...

그렇게 어찌할바를 몰라 한동안 서성이던 저의 마음짓이 멈칫하는 순간
마지막 글귀가 눈에 와서 박혔습니다.

"제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전 목사가 되겠다고 이곳에 왔군요."

어쩌면 무엇도 할 수 없는 절망의 끝, 그 주검의 끝에 가 닿은 사람만이,
그 부조리함의 수면 깊이 침몰하여 바닥에 닿은 후 다시 차고 올라오는 사람만이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아닐까하는
상념에서 서성임이 멈춰섰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2004-04-13 2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4-14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카페에 그 얘기를 살짝 비췄던 것 같군요.
저의 맑은(?) 얼굴과 웃음이 자꾸 걸리셨군요....넘 예리하신 것 같아요.
오해인지 아닌지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슬픔이 가득할 것 같은데 아닌때가 있고
다 잊혀진 것 같은데 불현듯 솟아오를 때도 있어서...
스스로는 그런대로 덤덤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닐지도 모르죠..
저도 오늘은 다음주 시험 준비를 시작해보려 했는데
여기 들어와서 놀고 여동생과 수다떨고...그냥 자야겠네요.....
글솜씨라...처음 보시는 분은 그렇게 보기 쉽지만
조금만 더 저를 알게 되면
말만 번지르르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미리 자수해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