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묵상1, 1:1,2a |
["태초에∼창조하다" vs "태초에 창조할 때,∼"]
창세기 1:1은 "태초에 하나님이∼창조하셨다."와 "하나님이 ∼창조하기 시작하셨을 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로 해석이 가능하다. 첫 번째에는 무(無)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존재론적 궁극성"이 나타나 있다. 이와 달리 두 번째는 '혼돈과 공허의 땅'과 '깊음 위의 어둠', '물' 등의 배경 위에서 창조가 이뤄졌음을 이야기한다. 이 경우에는 혼돈과 공허, 깊은 어둠에 새로운 질서와 아름다움, 생명을 불어넣는 "실천적·경험적 근원성"의 모습으로 체험된 하나님이 그려진 것이다.
'무에서의 창조'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절대적 근원임을 강조하는 존재론적 해석이다.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관한 지적 호기심이나, 모든 존재의 근원이 무엇인가 등과 같은 "앎을 향한 집착". 확실하고 투명한 앎이 참된 삶을 보장한다는 강박관념. 그 집착의 뿌리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이 무엇인지는 감춰진채, 진위여부에만 시선을 빼앗기기 쉽다. 일상의 복잡성과는 괴리된 진리가 욕망의 촉수를 따라 삶을 유린하고 겁탈하는 경우들이 너무나 많이 있어왔다. 게다가 그 절대성이 어떻게든 인정되면, 그것은 이성적 비판의 가능성을 제거하고, 그것을 근거로한 그 어떤 파괴도 성화시킬 수 있다. 권력과 폭력에 의해서 진리가 변해가는 인류사의 경험들이 '그런 절대성으로는 그 어떤 욕망도 미화시킬 수 있음'을 절절히 보여주었다. 사실 이런 해석의 문제는 그 해석 자체보다는 그것만을 절대화하려는 욕망에 있다.
이와 달리 혼돈과 공허라는 배경에서 펼쳐지는 창조는 궁극적 시작을 하나의 체계적 설명 속에 가둬두려 안달하지 않는다. '주검의 흑암'이 어떻게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났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주검에서 생명으로 도약해간 체험, 그 절절한 환희의 노래가 터져나올 뿐이다. 인간의 인식이 접근할 수 없는, 그 너머의 세계는 겸손히 흑암과 혼돈과 공허 속에 남겨둔다. 그렇기 때문에 그 혼돈을 향한 새로운 창조의 노래와 해석이 끊임없이 변주될 수 있는 여백이 광활히 펼쳐져 있다. 또한 모든 생명의 뿌리는 극한 고통과 눈물, 혼돈과 절망의 주검임을 겸허히 인정하고 있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선과 악, 위와 아래, 안과 밖....그에 대한 차별, 아니 구별조차 불가능한 한 덩어리 혼돈과 허무가 이 모든 질서와 생명의 근원이고, 한 존재의 생명이 살아가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주검이 산산히 부서져 거름이 되어있는, '생명과 죽음의 진솔한 모습'이 그대로 비춰져 있다. 우리 삶의 아픔과 절망이 실은 무한한 가능성의 텃밭임을 깨닫게 하는 희망이 서려있는 해석인 것이다.
이런 해석은 회의나 맹목에 빠지기 쉬운, 절대적 진리에 대한 질문에서 벗어나게 하고, 우리 일상의 아픔과 절망에서 시작해서 새로운 생명과 가능성으로 도약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며, 이웃의 상처에 대한 치유의 손길을 잉태하게 한다. 또한 참된 자유를 맛보게 한다. 삶의 어두운 그늘과 썩어가는 우리의 자화상에 대한 정죄와 '성장, 밝음, 생존 등의 밝은 측면'에만 집착하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주검을 생명의 태반인 죽음으로 끌어안는 해방"에 도달하게 한다.
이런 시선은 이어지는 이야기들에서도 마주친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1:5, 표준새번역)." 또는 "밤과 낮이 함께 하루를 만들었다(1:5, N.L.T.)." 이 구절은 하루를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근원적 차이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보통 아침에 눈을 뜨면서 맞이하는 낮에서 하루가 시작되어 밤에 잠드는 시간에 끝나는 것으로 여긴다. 잠들어 있는 시간에 대해서는 부지불식간에 제외시켜버리곤 한다. 그러나 이 구절들에서 하루는 밤에서 시작된다. 낮의 시작, 낮의 잉태가 밤에 시작되는 것이다. 생명이 죽음에서 시작되듯이. 그리고 하루가 밤과 낮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밤, 죽음, 어두움을 터부시하고 파괴하려는 우리 일상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관점인 것이다. 이런 사소한 차이는 너무나 커서 그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근원적인 차이에서 뻣어나온 작은 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소함이 엄청난 차이를 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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