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밭이 되어야 할 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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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는 그 은돈을 성전에 내던지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다. 대제사장들은 그 은돈들을 거두어서 "이것은 피값이니, 성전 금고에 넣으면 안 되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의논한 끝에,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들의 묘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 밭은 오늘날까지 피밭이라고 한다." ( 마태복음 27장 5-8장 )
가장 소중한 사람을 배신하여 얻은 핏값. 그 핏값은 결국 자신도 죽게 하고 나그네들의 묘지값이 된다.
이 이야기는 배신자의 당연한 최후나 자살이 옳으냐 그르냐하는 논쟁, 또는 유다처럼 자살하지 않고 회개하여 주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들과는 다른 차원으로 읽힐 수 있다. 상징과 시로 읽혀질 때 우리 삶의 다른 차원을 드러내 준다.
일상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모든 존재자들은 사실 다른 존재자들의 희생과 죽음을 거름으로 자라갈 수밖에 없다. 예수를 배신한 유다의 삶은 사실 모든 존재자들의 삶을 비춰준다. 다른 존재를 위해서 죽어주기 보다는 살기 위해 다른 존재자를 죽여야만 하는 존재의 실상.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나의 편안함과 즐거움은 사실 이 지구상 어딘가에서 고통받는 누군가가 내 몫의 아픔까지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밟고 선 이 땅과 호흡하는 공기는 앞서 죽어간 수많은 생명의 시체들이다.
그 핏값을 당연한 것으로, 나만의 것으로 움켜잡으려고만 하면 결국 나 자신이 그 핏값에 팔려갈 때, 그 죽음이 자유롭게 기꺼이 내어주는 십자가의 그것이 아니라, 공포에 질려 버둥거리거나 자신의 존재를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처참한 자살이 되고 말 것이다.
사실 우리 삶은 모두 핏값으로 연명하는 것이기에 일상의 자리는 나그네들의 묘지, 그 영원한 안식터가 되어야 한다. 성전에 쌓여 있어서는 않된다. 일상의 모든 존재와 모든 시간은 이미 충분히 거룩하다. 그러나 오직 하나의 중심만을 차별적으로 집착하고, 일상의 시간을 목졸라 멈추게 한 예배만이 최고의 가치라고 고집하곤 한다. 이런 거짓과 허상에 핏값을 맺혀있게 해서는 않된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성전에 모은 돈은 모든 존재들에게로 해체되어 스며드는 십자가의 죽음, 그 내어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유일한 중심에 높게 쌓아올린 욕망의 바벨탑이다. 교회에 내는 헌금이 이런 욕망의 바벨탑이 아닌지..? 내가 나그네의 묘지로 읽궈지고 있는지....?
마태복음 27장 60절에서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 무덤을 예수의, 모든 나그네의 상징인 그분의 무덤으로 쓴다. 그렇게 자신의 소유와 터를 피밭으로 내어준다. 바로 지금 여기 내 삶을 피밭으로 내어주는 마음의 결을 타고 흘러나오는 발걸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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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nio Morricone, "Gabriel's Obo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