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의 흔적: 진실과 사실의 긴장

-이 글은 저의 신앙이 성장하던 과정에 부딪혔던 고민과 그에 대한 김진목사님(크리스챤 아카데미)의 깊은 통찰력이 담긴 대답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무엇보다 김진 목사님께 가득한 감사의 마음이 있습니다.

1.물무늬: 진실과 사실의 긴장
안녕하세요. 저는 하나님 앞에서 붙들린 한 가지 문제로 고민하는 신학도 입니다. 누군가의 말 처럼 너무 늦은 고민인지도 모르지만 전 요 근래에 예수의 부활에 대한 고민에 붙들렸습니다.
제 삶에서 예수의 존재는 궁극적 의미의 기원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 분은 제 일상의 사소한 사건에서 조차 부활하시죠. 그런데 문제는 성서에 기록된 부활이 어떤 사실인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죠. 그것을 객관적인 사실로 믿거나 아니면 내면적 차원의 부활로 보는 관점에서 그 양극단이 아니라 어떤 새로운 차원의 사실로 보려는 관점을 접해봅니다. 그러나 어느 것도 개연성의 차원을 넘을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예수의 삶과 죽음에서 이어진 부활이란 것이 그 어떤, 고정된 이미지나 개념 혹은 서술로 정해지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단지 그렇게 열려진 비밀이 각 개인의 삶에서 각각의 절대적 의미로 부활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결국 이런 결론은 예수의 부활을 어떤 객관적 사실로 보는 관점(개신교회의 교의에서 처럼)으로 고정하는 것도 부정하죠. 단지 각자의 삶에서 체험된 각자의 의미로 믿어지고 그런 서로의 충만함을 나누는, 여백의 대화만이 가능한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저의 생각에 대한 선생님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제게는 아주 급하고 매 순간을 짖누르는 고민인데..... 앞의 글들을 보니까 아마도 요즘은 이곳을 잘 확인해보지 못하시는 듯하군요.
그래도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너무 쉬운 답변보다는 어떤 새로운 사유의 길을 제시해주시거나 또는 책을 소개 해주시는 것도 환영합니다. 제 삶의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한 것인데 쉽게 그 답을 얻는다는 것도 그리 마음에 드는 일은 아니군요.

2. 김진 Re: 진실의 깨달음으로 사실에 메인 인식을 극복하십시요.
귀한 질문 주셔서 고맙습니다. 부활을 생각함이'짖누르는 고민'이라면 그것은 부활을 '깨닫지' 못함이 분명합니다. 부활을 '아는 것'과 '믿는 것' 그리고 '깨닫는 것'은 각기 다른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서에 나타난 부활을 아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 그것 또한 교리적인 것으로 끝날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내가 '깨닫는 것'은 그것은 부활을 실제로 나의 삶에서 체험하고 사는것입니다. 님의 글 속에서 이미 부활의 현재성에 대한 고민이 담겨져 있습니다만, 부활은 예수의 부활에서 끝나는 사건도, 또 그렇다고 내면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서 표현되고 경험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증명할 수 도 없고, 또 증명한다고해서 그 부활의 실재성이 우리의 신앙으로 자동적으로 전이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부활을 증명하려는 노력은 허사입니다. 그것 보다는 우리의 삶에서 부활체험을 통해 예수부활의 실재를 체험하는 것(물론 그 역도 중요합니다)이 중요합니다.그것은 죽임에 대한 살림의 경험이고,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의 환희를 체험하는 길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이 자연가운데, 역사 속에서, 그리고 자신의 개인의 삶에서 볼 수 있을때 비로소 우리는 부활을 '깨닫는 자'가 될 것입니다. 만약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은 살아갈 힘도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3. 물무늬 Re: 진실의 깨달음으로 사실에 메인 인식을 극복하십시요.

우선 무엇보다 진지하고 성실한 답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대답은 제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떤 도움인지는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몇가지 답변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싶군요.

>귀한 질문 주셔서 고맙습니다. 부활을 생각함이'짖누르는 고민'이라면 그것은 부활을 '깨닫지' 못함이 분명합니다.
[글쎄요. 적어도 제게는 그 둘이 분리된 것이 사실입니다. 제 일상에서 전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하게 확인합니다. 제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에게서 들려오는 음성과 다른 이들 안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나에게서, 그렇게 또 다른 나인 이웃의 얼굴 뒤에 부끄러운 듯 숨어 사랑으로 부활하시는 모습을 느끼고, 풀한 포기의 상처에서 예수님의 못자욱을 만지죠. 그러나 그것이 동시에 성서에 "표현"되어있는 부활이 fact임을 보장하지는 않더군요. 오히려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그득함으로 다가오시는 모습을 봅니다.
제 고민은 제가 목회자나 혹은 교회의 다른 직분을 맡을 때, 교회의 교의가 고백하는 것과 동일하게 고백할 근거가 없다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부활을 '아는 것'과 '믿는 것' 그리고 '깨닫는 것'은 각기 다른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서에 나타난 부활을 아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군요. 쉽게 알 수 있는 부활이 무엇인지?]

우리의 삶에서 부활체험을 통해 예수부활의 실재를 체험하는 것(물론 그 역도 중요합니다)이 중요합니다.
[앞서의 언급에서 처럼 이런 체험이 예수님 당시에 어떤 일(fact)이 일어났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 제 질문과 고민의 요지입니다.]

제가 점점다가가고 있는 대답은 그 사실은 단지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으로써 그 역할이 다하면 사라질 뿐이기에 그 규명이 일차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 제자에게 당신의 진실을 일상의 사건 속에서 경험케 하시고 난 후에 그들이 진리에 이르자 사라지시는 그 그득한 넘침과 부끄러운 미소의 얼굴에서 이런 자유와 평화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 손가락은 자신을 무엇으로 규정하느냐에 집착하지 않을 만큼 그득하죠. 그리고 그 손가락은 언제나 열려있어서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늘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하는 무한한 생명이란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가지 방식으로 단정적으로 규정하는 일은 불필요하고 위험한 일이죠. 단지 각각의 자리에서 그려낸 풍경이 서로의 세계를 풍요롭게 하기위한 긴장에서 성숙으로 익어가는 것이죠.

4. 김진 Re: 부활체험을 향해 정진합시다.
29번의 글을 읽고 좀 더 언급할 부분이 있다고는 생각했는데 저의 말을 다시 듣고 싶으신지는 몰랐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제자들의 부활경험이 단지 손가락에 비유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오늘의 실재로 현존하는데 어떻게 그 당시 제자들이 경험한 예수에 대한 부활 경험을 인정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에 매인 인식을 극복하라는 저의 표현은 그 부활경험을 언어로 표현 성서에서 다시 교리적인 사실로 전환되어 우리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는 "사실"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경험한 예수부활 경험은 우리가 지금 생각할때 가장 생생하다고 여겨지는 몸의 부활경험 그것보다 더 생생하고 실재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겨우 몸의 부활의 실재성만을 가지고 아웅다웅 합니다. 만약 우리가 오늘 그리스도의 부활과 현존을 경험한다면 조금씩 제자들의 경험과 공유하는부분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fact 이상의 것이고, fact 보다 더 실재적인 부활의 기쁨입니다. 저의 말이 이해가 되셨는지 모르겠군요. 그러니까 성서에 표현 부활 사실을 검증할 방법도 없고, 필요도
없습니다. 검증이 되어야 부활을 믿겠다고 하는 사람은 어짜피 검증되어도 믿지못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어떤일이 일어났는지"는 그 경험의 전체를 알수 없지만 그들의 삶은 180도 바꾸게 한 경험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우리가 한다면 우리의 삶도 그렇게 변화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종교적 경험이 어떻게 언어로 다 설명될 수 있겠습니다.
부활을 안다는 것은 성서의 내용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활신앙으로 곧바로 연결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호하게 삶과 언어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는 부활하셨다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려하기 보다 그들이 체험한 부활을 체험하려고 정진합시다.

5. 물무늬 Re: 진실의 깨달음으로 사실에 메인 인식을 극복하십시요.
아래의 글은 제가 답멜로 먼저 띄운 것입니다. 멜 주소가 없다는 것을 몰랐죠. 그래서 다시 돌아온 것을 이곳에 올립니다.
비슷한 시기에 다른 곳에도 이런 질문을 남기고 토론 중이어서 님께서 보내신 것을 알지 못했군요. 무엇보다 진지하시고 진정어린 답변을 보내주신 바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님의 대답에는 일상에서 부활하신 분의 향내가 깊이 베어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로 제 일상에서 부활하신 그 분의 향내가요.

요몇일 동안에 제가 도착한 곳에서 만나 깨달은 바와도 뜻이 통하는 군요. 그 깨달음이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아는 것도 또한 기쁨입니다. 예수님을,하나님을, 뭐라 말할 수 없는 그 분을 만나는 만남에는 유사점이 있더군요. 그것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일상의 행동 속에서 깨달아졌죠. 그리고 깨닫는 순간 그 분은 사라지시죠. 그 분의 그득함은 우리의 영원한 신성을 가리키시는 손가락입을 직감합니다. 그 손가락은 우리가 깨닫는 순간 이미 충분함으로인해 자리를 비우시고, 제 홀로 그득해 넘치는 일상이 깨달은 자의 앞에 놓여있음을.
주관과 객관을 나누고 그 앞에 사실(fact)만이 진리이고 진실이라는 어리석은 이데올로기에 메어 스스로를 기만했음을 발견합니다. 그런 추구는 하나의 유희일 뿐이고 허공에 떠있는 지구만이 절대적이고 단단한 기반이라고 믿는 것같은 어리석음이며 동시에 소유와 지배의 논리임을 발견합니다. 진실은 삶의 긴장을 견디는 묵힘에 있음을....
이제 그 손가락이 무한한 비유로 열려 새로운 세계를 제 일상에 그려주고 그 풍경에 -설명이나 증명이 아닌- 하나로 감흥하는 삶을 기대합니다. 평화롭고 자유롭게.....

앞으로도 여쭤보고 나누는 만남이 서로 안에 있는 하나님을 나누는 것이길 기대하고 또한 그런 맛일 것을 믿게 됩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6. 김진 Re: 손가락 안에도 그리스도가...
견지명월의 의미를 매우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그것은 불교의 실재관이나 인식론을 설명하는 중요한 틀인 것이 분명하고 또 매우 유용한 틀이지만 기독교의 실재관 특히 기독교의 신비주의 영성(제가 판단하기 가장 올바른 영성이해입니다)의 빛에서 보면 반쪽의 진리만을 담고 있지요. 내식으로 표현하면 "손가락 안"에도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많이 명상하시기 바랍니다.

7. 김진 Re: 답변을 저 아래에 해 놓았습니다.
답변이 별로 필요치 않은 것 같았는데 저의 의견을 듣고 싶다고 하셔서 아래에 답변을 해 놓았으니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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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베르너 H. 켈버 저, 마가의 예수 이야기, 서중석 역 (한국신학연구소, 1991)

베르너 켈버가 해석하는 마가의 이야기는 그 스스로가 언급하는 것처럼 대단히 독특한 것이다. "마가복음서 전체를 '복음의 시작'으로 보는 점", "예수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서는 마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따라가는 과정이 필요하고 이런 과정 전체가 그것을 보여준다는 점", "예수의 부활보다는 그의 희생과 죽음에 강조점을 둔다는 점", 그리고 "예수와 독자를 매개하는 어떤 권위도 부정하고 오직 예수의 삶 전체와 독자를 직접 연결하여 그 의미를 만나게 하는 점" 등. 이런 해석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기 힘든 마가만의 독특함을 드러내주고, 이전에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매력적이고 생명력 있는 의미로 마가복음을 탈은폐시킨다.

이렇게 마가복음을 내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게 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는 이 책의 서론에 나타나는 기본적인 접근방식이다. 즉, 복음서를 단편적인 이야기들의 묶음 정도로 보지 않고 하나의 일관된 관점을 지닌 이야기로 보고, 다른 문학작품처럼 저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문학적으로 구성한 것으로 해석하며, 동시에 각 복음서는 각각의 독립적인 독특한 이야기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쓰여진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보수적인 혹은 근본주의적인 신앙의 전통에서 그리 많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개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이나 성경공부의 과정에서는 복음서를 문학적인 구성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이런 해석은 성경을 일반적인 문학 작품처럼 보는 것이기에 그 절대적 권위를 떨어 뜨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성경이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보도하고 있다는 믿음을 고수하여 서로 다른 복음서를 섞어서 읽고 해석한다. 그리고 설교에서 역시 이런 기본적인 관점을 근거로 하여 구속적인 해석의 관점이나 기타 전통적으로 내려온 해석의 관점을 지지하는 특정본문을 집중적으로 반복해서 사용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의 방식은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그 저자가 처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관계들이 역동적으로 반영된 복음서의 생명력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다. 사실 복음서의 저자는 자신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 그 시대를 지배했던 사상의 범위를 크게 벗어날 수 없는 것이고, 그 세계 안에서 복음이 생명을 지닐 수 있도록 재해석한 것이다. 그러므로 또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독자는 이런 점을 유념하여 복음서를 해석하고 또한 그 저자가 행한 것처럼 현재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되고 생명력을 지닐 수 있도록 재해석해야 힌다. 이것을 부정하고 문자적이고 전통적인 해석의 틀만을 교의적으로 고집할 때 성경은 그 생명을 잃고 왜곡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방식이 지닌 몇 가지 위험 요소가 있다. 이런 해석은 복음서를 객관적 사실들에 대한 기록으로 보기보다는 의미를 전하기 위한 문학적인 글로 본다. 그 결과 복음서들 간에 존재하는 불일치점들을 이해할 수 있고,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의 비판으로부터 복음서의 가치를 보존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이런 장점에도 있지만 사실과 의미 사이의 경계선을 분명히 할 수 없기 때문에 잘못하면 의미가 사실을 지배하고 사실을 상실하게 할 수 위험을 지니고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복음서의 내용이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허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현실의 문제에서 복음서가 의미를 지니게 하는 노력이 극단으로 가면 현실문제의 해결을 위해 복음의 참된 의미와 그 내용을 이데올로기화하고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의미의 근원이 단순한 상징일 수 있게 되면 객관적 사실일 때 보다 그 진리의 절대적 권위가 상실되서 신자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약해질 수 있다.

이런 문제들을 지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복음서들 간에 그리고 한 복음서 내에 존재하는 불일치점이 있다는 것과 각 저자가 하나님이 아니고 한계를 지닌 역사적 존재라는 점이다. 결국 복음서를 오늘 만나는 우리는 이런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면서 자신의 삶을 걸 만큼의 책임있는 해석으로 복음의 생명력을 되살려야만 하게 된다. 이런 책임감있는 해석과 적용일 때 우린 어린아이처럼 무조건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권위에 우리의 할 일을 맡기고 안일하게 살아가는 것에서 벗어나 성숙한 기독교인될 수 있다. 사실 절대적이지 않은 어떤 해석을 절대화하는 것이 바로 우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우상화는 하나님께서 우리에 주신 복음의 의미들 중에 어느 하나에만 집착하게 함으로써 그 풍요로움을 상실케 하고, 다른 관점을 지닌 이들에 대한 억압과 폭력의 근원이 될 위험을 지닌다.

그리고 이렇게 책임감을 지니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기준은 예수의 전생애를 관통하는 의미를 늘 새롭게 관찰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 고통과 단절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는 것인가에 달려있다. 즉, 그 열매를 통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는 말씀처럼 그 현실적 결과를 통해 판단해야 한다. 물론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런 열매에 만 치우칠 때 진리를 왜곡시키고 다양성을 상실케할 수도 있다는 것은 유념하고 그 둘 사이의 긴장과 균형을 유지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사실 이렇게 열매를 통해 진리임을 검증하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쉽게 교회의 권위나 학문적 권위에만 그리고 어떤 종교적 분위기에 압도되는 감정에만 의존하는 잘못도 고쳐주는 중요한 기준이다.

다음으로 이 책을 통해 중요한 배움을 얻은 것은 현재 우리 기독교가 안고 있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그 첫 번째는 기독교 신학이 희랍철학의 영향으로 인해 학문적인 체계를 중요시 하게 된 전통의 문제이다. 사실 신학은 희랍의 철학이 진리를 탐구하고 표현하는 방식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 때 '거의' 라는 것은 신학이 철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전제인 신앙 위에 존재하기 때문에 사용한 단어다. 그러나 이런 전제를 인정하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나 복음의 진리를 어떤 대상을 관찰하여 개념화하고 그것을 통해 얻는 체계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표현하려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방식은 기독교의 근본적인 모습을 왜곡시켰다. 사실 하나님이나 진리는 이런 접근방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진리는 담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객체화된 대상으로써 분석한 것이기에 그 유기적인 변화와 풍부한 의미를 상실케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신학과 교회의 전통은 이런 방식으로 얻은 어떤 교의적 결론을 그것이 다인양 집착하고 그것과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하려 하였다. 예를 들면 하나님에 대해 인격적인 면을 지닌 전능자와 같이 표현하는 신학의 표현은 그분의 무한하심의 영역을 비인격적인 것 밖으로 축소시키고 만 것이나 하나님을 남성적 이미지에 국한 시킨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표현은 하나님을 추상적 개념으로 표현하기에 우리의 역사와 삶 가운데 오셔서 함께 하시고 고난 받으심 구체적인 모습을 소홀히 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마가가 표현하는 방식은 이런 희랍철학적 방식과는 전혀 다르면서 그것이 담고 있는 문제를 잘 극복하고 있다. 마가는 자신의 글에서 예수의 정체성을 어떤 정제된 개념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의 구체적인 삶 전체를 기술하며 그 전체를 통해 예수를 전하려 한다. 그리고 어떤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예수의 구체적인 삶의 연장선 상으로 들어옴으로써 적극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알고 실천하며 완성해 가도록 한다. 이런 표현 방식은 예수의 삶과 죽음이 지닌 무한한 의미와 생명력을 어떤 철학적, 학문적 개념으로 서술하여 완결함으로써 박제화하는 것을 막는다. 오히려 막연해 보이는 이 방식은 살아있는 의미와 그 풍부한 다양성을 늘 새롭게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을 어떤 지적인 도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체험적으로 알 수 있도록 돕는다.

두 번째는 저자가 마가 이야기에서 가장 독특한 점으로 지적하는 것으로써 마가가 예수와 독자 사이에 어떤 권위적 매개도 용납하지 않고 오직 가장 근본적인 진리의 원형에 독자를 초대한 것이다. 사실 나에게도 역시 마가가 예수 주변의 내부인을 끝까지 실패하고 외부인의 자리로 밀려난 존재로 표현하고 열 두 제자와 그밖에 다른 중심적 인물들이 모두 예수의 궁극적인 의도를 자신의 이기적 욕망으로 왜곡시켰다는 것은 인상적이었다.

사실 우리의 교회는 이천년이라는 세월 동안 쌓아온 교회의 전통과 그것이 해석한 기독교의 의미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면 이단이고 대단히 큰 오류를 범하는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이런 전통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일으켜 왔는지는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사실 이런 문제들은 마가가 예수의 주변 인물들이 자신의 욕망에 의해 예수의 의도를 오해했다고 한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예를 들면 기독교의 역사에서 기독교가 기득권자들의 논리에 영합하여 그들을 옹호하고 합리화한 수많은 예, 예수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정죄하고 자신의 이익을 정당화하는 일들, 자신들이 믿는 어떤 교리적 해석을 절대화하여 무수히 나뉜 교단들. 마가가 당시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있었던 교회의 문제로 비판한 것은 오늘의 우리 모습과 그리 많은 차이를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본토친척 아비집의 안정으로부터 떠나 하나님의 뜻을 쫓으라한 것과 같이 마가는 우리가 쉽게 그 권위에 의지해서 맹종하는 수많은 세력들이 제공하는 안정을 무조건적으로 따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궁극적으로 전해주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늘 깨어서 바라보고 실천하라고 하는 것이다.

마가의 이야기가 전해준 중요한 충격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도 있다.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어떤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개념으로 배운다. 즉, 이 세계가 종말에 이르고 새하늘과 새땅이 열리면 이뤄지는 완성된 세계로 배운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교역자는 부활과 내세의 천국이 없으면 믿음도 소용없다고 단호하게 말할 만큼 하나님의 나라는 내세적인 것이다. 물론 오늘에 이미 이뤄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혀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일반적으로는 전자의 개념이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고 강조점이 되고 있다. 사실 이런 내세적이고 시공간적인 개념의 하나님 나라는 현실의 고통과 문제들로부터 안식을 얻을 도피처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한국에서 사회의 문제를 보고 방관하고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는 이기적인 모습의 기독교가 계속돼 온 것이다.

그러나 마가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의 부활이 아니라 그 죽음에서 구현되는 나라이고, 오늘 우리의 삶에 이미 임한 나라다. 그리고 어떤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개념이라기 보다는 예수가 사랑과 희생으로 살아가고 기꺼이 죽어간 삶을 통해 드러났고 십자가에서 완성된 인격이 곧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고 바라볼 때 현실의 문제들과 이웃의 아픔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도 현세의 이익과 해결에 너무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현실의 부조리나 문제에 집착하다보면 희생적인 사랑보다는 증오를 키우고 현세에 어떤 완성을 이루는 데만 집착하여 절망하게 되고 때론 이웃의 아픔 그 자체는 외면하게 만들게 된다. 게다가 누군가에게 정학한 비판과 해결책을 준다고 그 사람의 문제가 해결되고 그 사람의 삶이 변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이런 증오나 비판 만으로는 이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왕권과 영광이 십자가에서의 희생적인 사랑이었음을 본받을 때 즉, 그 인격으로써의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 구현되고 내 주변에 실천될 때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 이뤄질 터전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 나라는 지금 우리의 구체적인 문제에도 중요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모든 것을 경제적 이윤 추구에 집중하게 만드는 I.M.F가 가져다 주는 절망과 슬픔이다. 한껏 쏟아지는 함박눈은 노숙자들의 고통을 한껏 늘려주는 현실이고 돈 문제로 아들이 부모의 집을 털고, 아버지가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고 혹은 독약을 먹이고, 돈을 갚지 않는다고 어린아이를 납치하는 현실인 것이다. 이런 현실 가운데 고통당하는 당사자들에게 희망을 그리고 위로를 주는 것은 현실적인 대책만은 아니다. 물론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도움이 가장 기본적이라는 것과 이런 당장의 문제와 동시에 근본적인 사회의 구조를 개혁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도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현실적인 해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가 절대적인 고독 가운데 십자가에서 버려지고 죽임을 당한 것이 영광의 완성이었던 것처럼 그런 사랑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이웃의 사랑이다.

왜냐하면 한끼를 굶는 것 보다 그들을 더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더 많은 돈을 벌고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의 이기심 앞에 더욱 초라해지는 자신의 모습이고 그렇게 무가치해져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가치의 상실이 가장 큰 절망이고 가장 깊은 아픔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절망은 결국 일어설 힘을 앗아가기에 더 근본적인 문제인 것이다. 사랑과 희생에서 기원하는 섬김이 문제 해결의 궁극적인 힘이 되는 자기가치의 회복과 희망을 되찾아주고 당장의 표면적인 문제뿐 아니라 그 문제의 뿌리에 존재하는 구조를 개혁하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인격적인 구현으로써의 하나님 나라가 가장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며 근원적인 문제해결의 방식임을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마가의 증언을 통해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삶으로 나를 부르는 사랑과 섬김의 초대를 듣게 한다.

(학부 2학년 때 즈음에 썼던 어설픈 흔적,

고치다가 넘 길어서 포기하고 부끄러움 무릎쓰고 그냥 올립니다)

cf) Godpeople의 Preview 펌(http://mall.godpeople.com/)

저자 베르너 H. 켈버는 편집비평 및 구성비평을 사용하여 마가의 문학적 구조, 이야기의 전개 과정, 그리고 극화시키는 기술 등의 특징들을 밝히고 이런 것들 배후에 숨겨진 마가의 신학적 의도를 추적한다. 즉, 그는 예수와 제자들을 대립관계로 설정하여 고난당하는 예수와는 대조적으로 제자들을 권력지향적인 인물들로 부각시킨 마가의 의도를 묻고, 이어서 내부인(제자들)을 외부인으로 교체시키는 마가의 고안을 밝혀내고, 예루살렘을 중심지로 삼았던 제자들과는 대립적으로 갈릴리를 근거지로 삼았던 마가의 입장을 밝힌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 통념이나 오늘날의 독자들의 희망과는 달리, 제자들과 예수살렘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외부인과 갈릴리를 부각시킴으로써 마가는 유다 전쟁을 전후로 한 시기에 그리스도교가 당면했던 위기상황에 대한 신학적 해석과 방향제시를 시도했다는 것이 켈버의 주장이다. 아울러 이러한 마가의 신학작업은 전통의 거부와 근원으로의 복귀를 강조하는 종교개혁 신학과 흡사함을 저자는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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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14 21: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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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무늬 2004-04-14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가의 예수 이야기]는 학부때 공관복음서를 공부하면서 붙잡혔던 의문에 대한 한 가지 대답을 얻게 해준 책이었습니다. 한 학기 동안 고민하고 고민해서 찾았던 대답인데, 지금 보니 참 어설프고 그 사이에 또 여러가지 변화가 있었군요....오늘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관점과 무척 유사한 해석 방식이 그 책에 담겨 있습니다. 멋진 책이죠. 일독을 권합니다. 얇고 작은 책이니까 그렇게 부담되지는 않으실거예요. / 저도 작은 실수에 오래동안 마음을 빼앗기는 편이라 님의 마음에 공감이 됩니다. / 사실 저도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몇 년간 공부해놓고도요.../ 참 그런데 교수님과 개인적으로 아시는 사이인가요? 자연스럽게 부르시던데...

/ 학부때를 돌아보면 누구나 그렇듯이 아쉬움이 남는 것 같습니다. 전 오히려 님께서 공부하신 영역에 대해서 넘 아는게 없어서 실은 부러워하고있었는데...사실 전 너무 개인적인 질문과 고민에 빠져있었던 시기라서 정치 사회적인 영역과 넘 단절되었었던 문제가 있거든요.../ 밀란쿤데라의 참을 수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그 책을 고등학교 때 사서 뭔소린지도 모르면서 읽었었던 기억납니다. 하루에 한 두 페이지 읽기도 힘들어하면서도 결국 일년인가 걸려서 다 읽어버렸죠. 그리고 군대시절이나 그 이후까지 한 다섯번은 읽었던 것 같아요. 추억이 있는 책이죠. 그런데 그렇게 봐놓고도 뭔 소린지 모르겠더군요...ㅜ.ㅜ::

성경이나 교리의 절대적 권위가 허상임을 알게되면서 처음에는 힘들어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몇 걸음 먼저 발을 뗀 제 경험에 비춰볼 때 오히려 더욱 깊고 풍성한 기쁨을 맛보실 수 있을거예요. 넘 걱정마시고 오히려 기대해보세요...그 한 걸음 한 걸음에 도와드릴 수 있는게 있다면 기꺼이 도와드릴께요.

그 책들이 도움이 되실 수 있다면 저 역시 넘 기쁠거예요. 아마 기초적인 책이기 때문에 어떤 기쁨이나 감동을 주는 책은 아닐것입니다. 단지 사전처럼 필요할 때 뒤적여야할 그런 종류의 책인 것 같습니다. / 님께서 주신 어둠과 빛의 명상 자료 한 번 읽어봤는데 넘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흥미 진진..^^. 안내해주신 자료도 감사드려요. 앞으로 맛보신 체험들에 대해서도 알려주세요. 저도 빨리 해보고 싶어요....

이제 첫 시험이 몇 일 않남았군요. 이런 저런 일로 준비하시기 쉽지 않으시겠네요. 그래도 잘 해내실 거란 믿음이 생기네요...그럼 다음주에 뵐께요...


2004-04-14 2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Akoustic Band
유니버설(Universal) / 1989년 1월
평점 :
품절


추락과 비상

숨막히는 여린 떨림을 견디지 못하고 매일밤 바위산을 오르던 시절의 이 있었다. 그렇게 오래동안 벼랑끝을 서성이던 그 시절 세 번의 우연이 칙 코리아의 음악 만나게 했다. 

라디오 공개방송에서 어느 가수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뮤지션의 이름으로 칙 코리아를 이야기했을 때 스치듯 들었던 첫 번째 우연. 답답한 마음의 바닥에 가닿을 때면 무작정 레코드 가게에 가서 처음 보는 앨범 중에 아무렇게나 끌리는 음반을 사고는 그 우연에서 만나는 설레이는 의미를 기대했던 습관이 있었다. 그렇게 목마름을 달래려 레코드 가게에 들렸다가 칙코리아 앨범을 만났던 두 번째 우연. 그런데 친구를 사귀듯 조심스럽게 틀어본 칙코리아의 음악은 피아노와 드럼과 베이스가 난잡하게 뒤엉킨 선율을 토해내는 것만 같았다. 이번엔 완전히 잘못 선택했구나 하는 실망이 있었지만 왠일인지 그 뒤로 가끔씩 별 생각없이 그 음반을 틀어놨던 세 번째 우연.

그렇게 무심결에 틀어놨던 칙코리아의 음악이 어느 순간 내게 너무나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난잡함과 복잡함이 중력의 힘을 받아들이면서도 오히려 그 힘을 타고 자유롭게 노니는 나비의 날개짓 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해진 코드와 선율의 틀이 있지만 그것에 고착되지 않고 각 악기마다 자신들만의 자유로운 감정을 따라 노닐며 다른 악기의 날개짓과 함께 어울어지는 자유가 어느 순간 내 가슴 깊이 스며들어버렸다. 그렇게 Jazz에 대한 나의 첫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칙 코리아의 연주는 내게 추락의 틈을 뚫고 도약해나가는 비상의 이미지를 그리게 했다. 추락하는 존재자들은 중력의 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허나 그 절대적 힘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지만 추락의 절망에 함몰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도약할 수도 있다. 떨어지는 속도가 불러들인 바람을 타고 획일적인 직선에서 일탈하며 자신만의 곡선을 그려낼 수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는 추락의 절망을 타고 노니는 역설적인 자유와 자신만의 영혼이 깃들 수 있다. 이렇게 칙 코리아의 음악을 통해 만난 Jazz는 추락 속에서 비상하는 도약의 미학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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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과 비상

숨막히는 여린 떨림을 견디지 못하고 매일밤 바위산을 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오래동안 벼랑끝을 서성이던 그 시절 세 번의 우연이 칙 코리아의 음악 만나게 했다. 

라디오 공개방송에서 어느 가수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뮤지션의 이름으로 칙 코리아를 이야기했을 때 스치듯 들었던 첫 번째 우연. 답답한 마음의 바닥에 가닿을 때면 무작정 레코드 가게에 가서 처음 보는 앨범 중에 아무렇게나 끌리는 음반을 사고는 그 우연에서 만나는 설레이는 의미를 기대했던 습관이 있었다. 그렇게 목마름을 달래려 레코드 가게에 들렸다가 칙코리아 앨범을 만났던 두 번째 우연. 그런데 친구를 사귀듯 조심스럽게 틀어본 칙코리아의 음악은 피아노와 드럼과 베이스가 난잡하게 뒤엉킨 선율을 토해내는 것만 같았다. 이번엔 완전히 잘못 선택했구나 하는 실망이 있었지만 왠일인지 그 뒤로 가끔씩 별 생각없이 그 음반을 틀어놨던 세 번째 우연.

그렇게 무심결에 틀어놨던 칙코리아의 음악이 어느 순간 내게 너무나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난잡함과 복잡함이 중력의 힘을 받아들이면서도 오히려 그 힘을 타고 자유롭게 노니는 나비의 날개짓 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해진 코드와 선율의 틀이 있지만 그것에 고착되지 않고 각 악기마다 자신들만의 자유로운 감정을 따라 노닐며 다른 악기의 날개짓과 함께 어울어지는 자유가 어느 순간 내 가슴 깊이 스며들어버렸다. 그렇게 Jazz에 대한 나의 첫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칙 코리아의 연주는 내게 추락의 틈을 뚫고 도약해나가는 비상의 이미지를 그리게 했다. 추락하는 존재자들은 중력의 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허나 그 절대적 힘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지만 추락의 절망에 함몰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도약할 수도 있다. 떨어지는 속도가 불러들인 바람을 타고 획일적인 직선에서 일탈하며 자신만의 곡선을 그려낼 수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는 추락의 절망을 타고 노니는 역설적인 자유와 자신만의 영혼이 깃들 수 있다. 이렇게 칙 코리아의 음악을 통해 만난 Jazz는 추락 속에서 비상하는 도약의 미학이 아니었을까?

 

# 그 때 들었던 음반을 찾을 수 없어서 다른 곡을 링크시킵니다.

# Chick Corea, "Now He Sings, Now He Sobs"(1968)에서 [My One and Only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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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13 2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4-14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도 오래도록 제 안에 도사리고 있는 비슷한 욕망이 있습니다. 뛰어난 교수나 학자, 혹은 그들의 깊이 있는 글을 보노라면 그런 깊이에 빨리 도달하고 싶은 집착이 꿈틀댑니다. 다행인지 제겐 그럴만한 능력이 없기에 스스로의 정직한 문제에 집중하는 자기 만족만으로도 나에겐 그나마 다행이라고 달래곤 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길 앞에서는 고민하고 서성이는 부자청년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죠. 가진 것도 없지만 어머니와 아내, 장래의 자식들에 대한 두려움이 저를 붙들고 있습니다. 저 역시 너무 안달 복달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익어가도록 맡겨두려 합니다. "어디까지 가나 보자..."처럼,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만큼의 모습이 드러나게 하시겠지, 지금까지 그렇게 해주셨던 것처럼..."
여성 목회자만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아픔에 대해서 입을 여는 것은 정말 중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님께서 그려보시는 설교의 모습에도 역시 동감이 됩니다. 성차별에 대한 설교에 너무 갖히는 듯한 여성설교자들의 모습에서 벗어나 오히려 남성처럼 당당하게 설교하고 싶은 바램. 그것이 더욱 성숙한 여성신학자의 모습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재미있는 것은 님께서 남자가 되고 싶었던 것과는 반대로 전 어릴적에 남자라는 사실에 절망하고 여자가 되고 싶은 간절한 바램이 있었죠. 반대로 여자가 되길 바라는 남자의 마음 역시 죄가 되네요....^^
발제 준비 열심히 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기대되고요. 화이팅^^
 

창세기 묵상3 (1:31a)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았다"(1:31a)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1:31a)"
이렇게 자신의 땀과 노력이 들어가 만들어진 모든 것이 보시기에 흡족했던 하나님은 그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신다. 이 장면은 보통 두 가지 측면에서 강조된다. 하나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가 타락 이전에는 완벽했다는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일곱 째 날의 안식을 지켜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는 관점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연결하는 다른 시선도 가능하다. 특히, "타락 이전과 이후의 완전한 단절"이라는 전제를 제거하면, 새로운 치유와 가능성의 세계가 열린다.

1. 타락; 경계와 단절?

타락을 경계로 하는 단절은 변증신학의 영역에서 '악의 문제'로 논란의 주제였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에 어떻게 악이 끼어들 수 있는가? 하나님의 허락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무능이고, 허락이라면 하나님이 악한 것이 되는 모순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서의 양자택일에서 벗어나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완벽하다는 것이 어떤 그늘이나 어두움, 죽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즉, 창조하신 모든 것이 보기 좋다고 하실 때, 그 모든 것에는 밝음과 어두움이 함께 포함되어 있고, 그 양자의 조화가 자체가 아름답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아담의 죄는 완전한 창조세계에 갑자기 생긴 결함이나 흠집이 아니다. 그것은 간난 아기가 아직은 미숙하지만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한 생명으로써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시작이자 가능성인 것과 같은 것이다. 아기는 연약하고 도움이 필요하지만 아기로써 완전한 존재이다. 즉, 아담의 첫 번째 죄는 성숙으로 가는 여정의 첫 걸음이자 필연적 과정이지, 창조 세계의 불순물이 아니라 것이다.

이런 시각은 대상을 개별자로 보지 않고, 전체로 보는 것이다. 즉, 아기가 혼자만으로 보면 불완전하지만, 부모와 함께하는 하나의 우주 속에서 한 몸 이룬 한 부분으로 보면 완전하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사람의 잘못이 단순히 그 사람만의 책임과 곤란함이 아니라는 유기체적 사고와도 연결된다.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사회적 구조 등의 전체적 그림 속에서 한 몸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생존, 기쁨, 밝음 만이 추구해야할 대상이고, 타자를 위한 죽음, 고통, 어두움은 외면되어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난 참된 자유의 시선이다. 생명의 근원인 죽음, 창조의 시작인 흑암과 공허, 모두 일관되게 모든 것이 하나되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창조의 아름다움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기쁨과 생존에만 집착하여 잃어버리기 쉬웠던 생명의 뿌리들을 기억케하는 시선이다. 물론 악의 문제라는 모순에서 벗어나게 하는 자유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문제는 논의의 여지가 남아있지만, 아담의 타락 부분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2. 보기에 좋았다; 차별에서 구별로, 지배에서 쉼으로

당연히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세계를 아름답게 보신 것은 우리가 보통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우리가 보통 좋다 아름답다고 할 경우에는 다른 것과의 차별에 기초한 소유와 향유의 욕망에 기초해 있기 쉽다. 다른 어떤 것과의 차이를 기초로 구별해내고, 그것을 기준으로 더 좋아보이는 것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아담의 시선에 나타난 차이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하나님은 창조한 모든 것-어두움과 고통까지-이 보기 좋았다고 하고는 있는 그대로 두고 참된 쉼을 취한다. 그러나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다(2:6a)"고 한 후에 그것을 소유하려 먹는다.

창조한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는 시선은 그 다양한 차이들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각각의 자리와 그것을 통한 조화를 아름답게 본다. 여기엔 어떤 차별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너무나 기뻐하지만 그것을 도구로 이용해 무엇인가를 소유하려는 욕망이 없다.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기 때문에 넉넉하고 자유로우며 마음껏 고독한 쉼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아담의 시선은 모든 것들 간의 하나됨을 보지 못하고, 그 중에 어느 한 부분만을 구별하여 집착하는 차별의 마음에의해 지배된다. 그것은 더욱 지혜로워지고 더욱 강해지길 바라는 욕망의 소유욕에 가리운 시선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선은 있는 그대로 좋다는 기쁨에 머물지 못하고 먹을 수밖에 없다. 거기엔 충만한 고독도 쉼도 없이 끊임없는 비교와 소유의 악순환만이 목을 더욱더 죄어온다.

예수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시선을 역사 속에서 드러내 주었다. 삶과 죽음이 하나이고 모든 것이 조화된 하나 속에서 아름답게 보이는 그에게 폭풍과 풍랑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어떤 기적과 선한 행동을 그 누구에게도 알리려 하지 않고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려고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참된 고독과 쉼을 향해 자유롭게 물러날 수 있는 자유가 그득했다. 우리도 그런 어리석은 시선을 깨끗이 비울 때 그 투명한 몸에 모든 것을 아름답게 바라보며, 그대로 충만하여 물러날 때 조용히 쉴 수 있는 자유가 빛날 것이다. 또한 바로 이런 시선이 손끝으로 전해질 때, 차별과 지배에 상처난 억눌린 존재들에 대한 치유와 사랑이 나타날 것이다. 덧없는 소유에 공허해 하고, 외로움을 두려워하는 마음에 그윽한 평화가 깃들며, 누군가를 착취한 손의 검붉은 상처가 아물어 갈 것이다. 이것이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며, 유유히 그것만으로도 넉넉한 쉼에 머물수 있는 마음과 삶이 지닌 치유와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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