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과 비상

숨막히는 여린 떨림을 견디지 못하고 매일밤 바위산을 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오래동안 벼랑끝을 서성이던 그 시절 세 번의 우연이 칙 코리아의 음악 만나게 했다. 

라디오 공개방송에서 어느 가수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뮤지션의 이름으로 칙 코리아를 이야기했을 때 스치듯 들었던 첫 번째 우연. 답답한 마음의 바닥에 가닿을 때면 무작정 레코드 가게에 가서 처음 보는 앨범 중에 아무렇게나 끌리는 음반을 사고는 그 우연에서 만나는 설레이는 의미를 기대했던 습관이 있었다. 그렇게 목마름을 달래려 레코드 가게에 들렸다가 칙코리아 앨범을 만났던 두 번째 우연. 그런데 친구를 사귀듯 조심스럽게 틀어본 칙코리아의 음악은 피아노와 드럼과 베이스가 난잡하게 뒤엉킨 선율을 토해내는 것만 같았다. 이번엔 완전히 잘못 선택했구나 하는 실망이 있었지만 왠일인지 그 뒤로 가끔씩 별 생각없이 그 음반을 틀어놨던 세 번째 우연.

그렇게 무심결에 틀어놨던 칙코리아의 음악이 어느 순간 내게 너무나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난잡함과 복잡함이 중력의 힘을 받아들이면서도 오히려 그 힘을 타고 자유롭게 노니는 나비의 날개짓 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해진 코드와 선율의 틀이 있지만 그것에 고착되지 않고 각 악기마다 자신들만의 자유로운 감정을 따라 노닐며 다른 악기의 날개짓과 함께 어울어지는 자유가 어느 순간 내 가슴 깊이 스며들어버렸다. 그렇게 Jazz에 대한 나의 첫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칙 코리아의 연주는 내게 추락의 틈을 뚫고 도약해나가는 비상의 이미지를 그리게 했다. 추락하는 존재자들은 중력의 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허나 그 절대적 힘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지만 추락의 절망에 함몰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도약할 수도 있다. 떨어지는 속도가 불러들인 바람을 타고 획일적인 직선에서 일탈하며 자신만의 곡선을 그려낼 수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는 추락의 절망을 타고 노니는 역설적인 자유와 자신만의 영혼이 깃들 수 있다. 이렇게 칙 코리아의 음악을 통해 만난 Jazz는 추락 속에서 비상하는 도약의 미학이 아니었을까?

 

# 그 때 들었던 음반을 찾을 수 없어서 다른 곡을 링크시킵니다.

# Chick Corea, "Now He Sings, Now He Sobs"(1968)에서 [My One and Only Love]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4-04-13 2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4-14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도 오래도록 제 안에 도사리고 있는 비슷한 욕망이 있습니다. 뛰어난 교수나 학자, 혹은 그들의 깊이 있는 글을 보노라면 그런 깊이에 빨리 도달하고 싶은 집착이 꿈틀댑니다. 다행인지 제겐 그럴만한 능력이 없기에 스스로의 정직한 문제에 집중하는 자기 만족만으로도 나에겐 그나마 다행이라고 달래곤 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길 앞에서는 고민하고 서성이는 부자청년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죠. 가진 것도 없지만 어머니와 아내, 장래의 자식들에 대한 두려움이 저를 붙들고 있습니다. 저 역시 너무 안달 복달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익어가도록 맡겨두려 합니다. "어디까지 가나 보자..."처럼,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만큼의 모습이 드러나게 하시겠지, 지금까지 그렇게 해주셨던 것처럼..."
여성 목회자만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아픔에 대해서 입을 여는 것은 정말 중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님께서 그려보시는 설교의 모습에도 역시 동감이 됩니다. 성차별에 대한 설교에 너무 갖히는 듯한 여성설교자들의 모습에서 벗어나 오히려 남성처럼 당당하게 설교하고 싶은 바램. 그것이 더욱 성숙한 여성신학자의 모습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재미있는 것은 님께서 남자가 되고 싶었던 것과는 반대로 전 어릴적에 남자라는 사실에 절망하고 여자가 되고 싶은 간절한 바램이 있었죠. 반대로 여자가 되길 바라는 남자의 마음 역시 죄가 되네요....^^
발제 준비 열심히 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기대되고요.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