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베르너 H. 켈버 저, 마가의 예수 이야기, 서중석 역 (한국신학연구소, 1991)
베르너 켈버가 해석하는 마가의 이야기는 그 스스로가 언급하는 것처럼 대단히 독특한 것이다. "마가복음서 전체를 '복음의 시작'으로 보는 점", "예수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서는 마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따라가는 과정이 필요하고 이런 과정 전체가 그것을 보여준다는 점", "예수의 부활보다는 그의 희생과 죽음에 강조점을 둔다는 점", 그리고 "예수와 독자를 매개하는 어떤 권위도 부정하고 오직 예수의 삶 전체와 독자를 직접 연결하여 그 의미를 만나게 하는 점" 등. 이런 해석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기 힘든 마가만의 독특함을 드러내주고, 이전에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매력적이고 생명력 있는 의미로 마가복음을 탈은폐시킨다.
이렇게 마가복음을 내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게 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는 이 책의 서론에 나타나는 기본적인 접근방식이다. 즉, 복음서를 단편적인 이야기들의 묶음 정도로 보지 않고 하나의 일관된 관점을 지닌 이야기로 보고, 다른 문학작품처럼 저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문학적으로 구성한 것으로 해석하며, 동시에 각 복음서는 각각의 독립적인 독특한 이야기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쓰여진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보수적인 혹은 근본주의적인 신앙의 전통에서 그리 많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개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이나 성경공부의 과정에서는 복음서를 문학적인 구성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이런 해석은 성경을 일반적인 문학 작품처럼 보는 것이기에 그 절대적 권위를 떨어 뜨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성경이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보도하고 있다는 믿음을 고수하여 서로 다른 복음서를 섞어서 읽고 해석한다. 그리고 설교에서 역시 이런 기본적인 관점을 근거로 하여 구속적인 해석의 관점이나 기타 전통적으로 내려온 해석의 관점을 지지하는 특정본문을 집중적으로 반복해서 사용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의 방식은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그 저자가 처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관계들이 역동적으로 반영된 복음서의 생명력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다. 사실 복음서의 저자는 자신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 그 시대를 지배했던 사상의 범위를 크게 벗어날 수 없는 것이고, 그 세계 안에서 복음이 생명을 지닐 수 있도록 재해석한 것이다. 그러므로 또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독자는 이런 점을 유념하여 복음서를 해석하고 또한 그 저자가 행한 것처럼 현재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되고 생명력을 지닐 수 있도록 재해석해야 힌다. 이것을 부정하고 문자적이고 전통적인 해석의 틀만을 교의적으로 고집할 때 성경은 그 생명을 잃고 왜곡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방식이 지닌 몇 가지 위험 요소가 있다. 이런 해석은 복음서를 객관적 사실들에 대한 기록으로 보기보다는 의미를 전하기 위한 문학적인 글로 본다. 그 결과 복음서들 간에 존재하는 불일치점들을 이해할 수 있고,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의 비판으로부터 복음서의 가치를 보존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이런 장점에도 있지만 사실과 의미 사이의 경계선을 분명히 할 수 없기 때문에 잘못하면 의미가 사실을 지배하고 사실을 상실하게 할 수 위험을 지니고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복음서의 내용이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허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현실의 문제에서 복음서가 의미를 지니게 하는 노력이 극단으로 가면 현실문제의 해결을 위해 복음의 참된 의미와 그 내용을 이데올로기화하고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의미의 근원이 단순한 상징일 수 있게 되면 객관적 사실일 때 보다 그 진리의 절대적 권위가 상실되서 신자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약해질 수 있다.
이런 문제들을 지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복음서들 간에 그리고 한 복음서 내에 존재하는 불일치점이 있다는 것과 각 저자가 하나님이 아니고 한계를 지닌 역사적 존재라는 점이다. 결국 복음서를 오늘 만나는 우리는 이런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면서 자신의 삶을 걸 만큼의 책임있는 해석으로 복음의 생명력을 되살려야만 하게 된다. 이런 책임감있는 해석과 적용일 때 우린 어린아이처럼 무조건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권위에 우리의 할 일을 맡기고 안일하게 살아가는 것에서 벗어나 성숙한 기독교인될 수 있다. 사실 절대적이지 않은 어떤 해석을 절대화하는 것이 바로 우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우상화는 하나님께서 우리에 주신 복음의 의미들 중에 어느 하나에만 집착하게 함으로써 그 풍요로움을 상실케 하고, 다른 관점을 지닌 이들에 대한 억압과 폭력의 근원이 될 위험을 지닌다.
그리고 이렇게 책임감을 지니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기준은 예수의 전생애를 관통하는 의미를 늘 새롭게 관찰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 고통과 단절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는 것인가에 달려있다. 즉, 그 열매를 통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는 말씀처럼 그 현실적 결과를 통해 판단해야 한다. 물론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런 열매에 만 치우칠 때 진리를 왜곡시키고 다양성을 상실케할 수도 있다는 것은 유념하고 그 둘 사이의 긴장과 균형을 유지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사실 이렇게 열매를 통해 진리임을 검증하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쉽게 교회의 권위나 학문적 권위에만 그리고 어떤 종교적 분위기에 압도되는 감정에만 의존하는 잘못도 고쳐주는 중요한 기준이다.
다음으로 이 책을 통해 중요한 배움을 얻은 것은 현재 우리 기독교가 안고 있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그 첫 번째는 기독교 신학이 희랍철학의 영향으로 인해 학문적인 체계를 중요시 하게 된 전통의 문제이다. 사실 신학은 희랍의 철학이 진리를 탐구하고 표현하는 방식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 때 '거의' 라는 것은 신학이 철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전제인 신앙 위에 존재하기 때문에 사용한 단어다. 그러나 이런 전제를 인정하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나 복음의 진리를 어떤 대상을 관찰하여 개념화하고 그것을 통해 얻는 체계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표현하려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방식은 기독교의 근본적인 모습을 왜곡시켰다. 사실 하나님이나 진리는 이런 접근방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진리는 담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객체화된 대상으로써 분석한 것이기에 그 유기적인 변화와 풍부한 의미를 상실케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신학과 교회의 전통은 이런 방식으로 얻은 어떤 교의적 결론을 그것이 다인양 집착하고 그것과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하려 하였다. 예를 들면 하나님에 대해 인격적인 면을 지닌 전능자와 같이 표현하는 신학의 표현은 그분의 무한하심의 영역을 비인격적인 것 밖으로 축소시키고 만 것이나 하나님을 남성적 이미지에 국한 시킨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표현은 하나님을 추상적 개념으로 표현하기에 우리의 역사와 삶 가운데 오셔서 함께 하시고 고난 받으심 구체적인 모습을 소홀히 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마가가 표현하는 방식은 이런 희랍철학적 방식과는 전혀 다르면서 그것이 담고 있는 문제를 잘 극복하고 있다. 마가는 자신의 글에서 예수의 정체성을 어떤 정제된 개념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의 구체적인 삶 전체를 기술하며 그 전체를 통해 예수를 전하려 한다. 그리고 어떤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예수의 구체적인 삶의 연장선 상으로 들어옴으로써 적극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알고 실천하며 완성해 가도록 한다. 이런 표현 방식은 예수의 삶과 죽음이 지닌 무한한 의미와 생명력을 어떤 철학적, 학문적 개념으로 서술하여 완결함으로써 박제화하는 것을 막는다. 오히려 막연해 보이는 이 방식은 살아있는 의미와 그 풍부한 다양성을 늘 새롭게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을 어떤 지적인 도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체험적으로 알 수 있도록 돕는다.
두 번째는 저자가 마가 이야기에서 가장 독특한 점으로 지적하는 것으로써 마가가 예수와 독자 사이에 어떤 권위적 매개도 용납하지 않고 오직 가장 근본적인 진리의 원형에 독자를 초대한 것이다. 사실 나에게도 역시 마가가 예수 주변의 내부인을 끝까지 실패하고 외부인의 자리로 밀려난 존재로 표현하고 열 두 제자와 그밖에 다른 중심적 인물들이 모두 예수의 궁극적인 의도를 자신의 이기적 욕망으로 왜곡시켰다는 것은 인상적이었다.
사실 우리의 교회는 이천년이라는 세월 동안 쌓아온 교회의 전통과 그것이 해석한 기독교의 의미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면 이단이고 대단히 큰 오류를 범하는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이런 전통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일으켜 왔는지는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사실 이런 문제들은 마가가 예수의 주변 인물들이 자신의 욕망에 의해 예수의 의도를 오해했다고 한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예를 들면 기독교의 역사에서 기독교가 기득권자들의 논리에 영합하여 그들을 옹호하고 합리화한 수많은 예, 예수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정죄하고 자신의 이익을 정당화하는 일들, 자신들이 믿는 어떤 교리적 해석을 절대화하여 무수히 나뉜 교단들. 마가가 당시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있었던 교회의 문제로 비판한 것은 오늘의 우리 모습과 그리 많은 차이를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본토친척 아비집의 안정으로부터 떠나 하나님의 뜻을 쫓으라한 것과 같이 마가는 우리가 쉽게 그 권위에 의지해서 맹종하는 수많은 세력들이 제공하는 안정을 무조건적으로 따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궁극적으로 전해주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늘 깨어서 바라보고 실천하라고 하는 것이다.
마가의 이야기가 전해준 중요한 충격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도 있다.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어떤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개념으로 배운다. 즉, 이 세계가 종말에 이르고 새하늘과 새땅이 열리면 이뤄지는 완성된 세계로 배운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교역자는 부활과 내세의 천국이 없으면 믿음도 소용없다고 단호하게 말할 만큼 하나님의 나라는 내세적인 것이다. 물론 오늘에 이미 이뤄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혀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일반적으로는 전자의 개념이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고 강조점이 되고 있다. 사실 이런 내세적이고 시공간적인 개념의 하나님 나라는 현실의 고통과 문제들로부터 안식을 얻을 도피처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한국에서 사회의 문제를 보고 방관하고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는 이기적인 모습의 기독교가 계속돼 온 것이다.
그러나 마가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의 부활이 아니라 그 죽음에서 구현되는 나라이고, 오늘 우리의 삶에 이미 임한 나라다. 그리고 어떤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개념이라기 보다는 예수가 사랑과 희생으로 살아가고 기꺼이 죽어간 삶을 통해 드러났고 십자가에서 완성된 인격이 곧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고 바라볼 때 현실의 문제들과 이웃의 아픔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도 현세의 이익과 해결에 너무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현실의 부조리나 문제에 집착하다보면 희생적인 사랑보다는 증오를 키우고 현세에 어떤 완성을 이루는 데만 집착하여 절망하게 되고 때론 이웃의 아픔 그 자체는 외면하게 만들게 된다. 게다가 누군가에게 정학한 비판과 해결책을 준다고 그 사람의 문제가 해결되고 그 사람의 삶이 변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이런 증오나 비판 만으로는 이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왕권과 영광이 십자가에서의 희생적인 사랑이었음을 본받을 때 즉, 그 인격으로써의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 구현되고 내 주변에 실천될 때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 이뤄질 터전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 나라는 지금 우리의 구체적인 문제에도 중요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모든 것을 경제적 이윤 추구에 집중하게 만드는 I.M.F가 가져다 주는 절망과 슬픔이다. 한껏 쏟아지는 함박눈은 노숙자들의 고통을 한껏 늘려주는 현실이고 돈 문제로 아들이 부모의 집을 털고, 아버지가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고 혹은 독약을 먹이고, 돈을 갚지 않는다고 어린아이를 납치하는 현실인 것이다. 이런 현실 가운데 고통당하는 당사자들에게 희망을 그리고 위로를 주는 것은 현실적인 대책만은 아니다. 물론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도움이 가장 기본적이라는 것과 이런 당장의 문제와 동시에 근본적인 사회의 구조를 개혁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도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현실적인 해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가 절대적인 고독 가운데 십자가에서 버려지고 죽임을 당한 것이 영광의 완성이었던 것처럼 그런 사랑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이웃의 사랑이다.
왜냐하면 한끼를 굶는 것 보다 그들을 더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더 많은 돈을 벌고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의 이기심 앞에 더욱 초라해지는 자신의 모습이고 그렇게 무가치해져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가치의 상실이 가장 큰 절망이고 가장 깊은 아픔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절망은 결국 일어설 힘을 앗아가기에 더 근본적인 문제인 것이다. 사랑과 희생에서 기원하는 섬김이 문제 해결의 궁극적인 힘이 되는 자기가치의 회복과 희망을 되찾아주고 당장의 표면적인 문제뿐 아니라 그 문제의 뿌리에 존재하는 구조를 개혁하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인격적인 구현으로써의 하나님 나라가 가장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며 근원적인 문제해결의 방식임을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마가의 증언을 통해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삶으로 나를 부르는 사랑과 섬김의 초대를 듣게 한다.
(학부 2학년 때 즈음에 썼던 어설픈 흔적,
고치다가 넘 길어서 포기하고 부끄러움 무릎쓰고 그냥 올립니다)
cf) Godpeople의 Preview 펌(http://mall.godpeople.com/)
저자 베르너 H. 켈버는 편집비평 및 구성비평을 사용하여 마가의 문학적 구조, 이야기의 전개 과정, 그리고 극화시키는 기술 등의 특징들을 밝히고 이런 것들 배후에 숨겨진 마가의 신학적 의도를 추적한다. 즉, 그는 예수와 제자들을 대립관계로 설정하여 고난당하는 예수와는 대조적으로 제자들을 권력지향적인 인물들로 부각시킨 마가의 의도를 묻고, 이어서 내부인(제자들)을 외부인으로 교체시키는 마가의 고안을 밝혀내고, 예루살렘을 중심지로 삼았던 제자들과는 대립적으로 갈릴리를 근거지로 삼았던 마가의 입장을 밝힌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 통념이나 오늘날의 독자들의 희망과는 달리, 제자들과 예수살렘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외부인과 갈릴리를 부각시킴으로써 마가는 유다 전쟁을 전후로 한 시기에 그리스도교가 당면했던 위기상황에 대한 신학적 해석과 방향제시를 시도했다는 것이 켈버의 주장이다. 아울러 이러한 마가의 신학작업은 전통의 거부와 근원으로의 복귀를 강조하는 종교개혁 신학과 흡사함을 저자는 역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