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세기 묵상3 (1:31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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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았다"(1:31a)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1:31a)" 이렇게 자신의 땀과 노력이 들어가 만들어진 모든 것이 보시기에 흡족했던 하나님은 그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신다. 이 장면은 보통 두 가지 측면에서 강조된다. 하나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가 타락 이전에는 완벽했다는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일곱 째 날의 안식을 지켜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는 관점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연결하는 다른 시선도 가능하다. 특히, "타락 이전과 이후의 완전한 단절"이라는 전제를 제거하면, 새로운 치유와 가능성의 세계가 열린다.
1. 타락; 경계와 단절?
타락을 경계로 하는 단절은 변증신학의 영역에서 '악의 문제'로 논란의 주제였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에 어떻게 악이 끼어들 수 있는가? 하나님의 허락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무능이고, 허락이라면 하나님이 악한 것이 되는 모순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서의 양자택일에서 벗어나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완벽하다는 것이 어떤 그늘이나 어두움, 죽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즉, 창조하신 모든 것이 보기 좋다고 하실 때, 그 모든 것에는 밝음과 어두움이 함께 포함되어 있고, 그 양자의 조화가 자체가 아름답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아담의 죄는 완전한 창조세계에 갑자기 생긴 결함이나 흠집이 아니다. 그것은 간난 아기가 아직은 미숙하지만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한 생명으로써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시작이자 가능성인 것과 같은 것이다. 아기는 연약하고 도움이 필요하지만 아기로써 완전한 존재이다. 즉, 아담의 첫 번째 죄는 성숙으로 가는 여정의 첫 걸음이자 필연적 과정이지, 창조 세계의 불순물이 아니라 것이다.
이런 시각은 대상을 개별자로 보지 않고, 전체로 보는 것이다. 즉, 아기가 혼자만으로 보면 불완전하지만, 부모와 함께하는 하나의 우주 속에서 한 몸 이룬 한 부분으로 보면 완전하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사람의 잘못이 단순히 그 사람만의 책임과 곤란함이 아니라는 유기체적 사고와도 연결된다.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사회적 구조 등의 전체적 그림 속에서 한 몸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생존, 기쁨, 밝음 만이 추구해야할 대상이고, 타자를 위한 죽음, 고통, 어두움은 외면되어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난 참된 자유의 시선이다. 생명의 근원인 죽음, 창조의 시작인 흑암과 공허, 모두 일관되게 모든 것이 하나되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창조의 아름다움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기쁨과 생존에만 집착하여 잃어버리기 쉬웠던 생명의 뿌리들을 기억케하는 시선이다. 물론 악의 문제라는 모순에서 벗어나게 하는 자유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문제는 논의의 여지가 남아있지만, 아담의 타락 부분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2. 보기에 좋았다; 차별에서 구별로, 지배에서 쉼으로
당연히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세계를 아름답게 보신 것은 우리가 보통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우리가 보통 좋다 아름답다고 할 경우에는 다른 것과의 차별에 기초한 소유와 향유의 욕망에 기초해 있기 쉽다. 다른 어떤 것과의 차이를 기초로 구별해내고, 그것을 기준으로 더 좋아보이는 것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아담의 시선에 나타난 차이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하나님은 창조한 모든 것-어두움과 고통까지-이 보기 좋았다고 하고는 있는 그대로 두고 참된 쉼을 취한다. 그러나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다(2:6a)"고 한 후에 그것을 소유하려 먹는다.
창조한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는 시선은 그 다양한 차이들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각각의 자리와 그것을 통한 조화를 아름답게 본다. 여기엔 어떤 차별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너무나 기뻐하지만 그것을 도구로 이용해 무엇인가를 소유하려는 욕망이 없다.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기 때문에 넉넉하고 자유로우며 마음껏 고독한 쉼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아담의 시선은 모든 것들 간의 하나됨을 보지 못하고, 그 중에 어느 한 부분만을 구별하여 집착하는 차별의 마음에의해 지배된다. 그것은 더욱 지혜로워지고 더욱 강해지길 바라는 욕망의 소유욕에 가리운 시선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선은 있는 그대로 좋다는 기쁨에 머물지 못하고 먹을 수밖에 없다. 거기엔 충만한 고독도 쉼도 없이 끊임없는 비교와 소유의 악순환만이 목을 더욱더 죄어온다.
예수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시선을 역사 속에서 드러내 주었다. 삶과 죽음이 하나이고 모든 것이 조화된 하나 속에서 아름답게 보이는 그에게 폭풍과 풍랑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어떤 기적과 선한 행동을 그 누구에게도 알리려 하지 않고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려고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참된 고독과 쉼을 향해 자유롭게 물러날 수 있는 자유가 그득했다. 우리도 그런 어리석은 시선을 깨끗이 비울 때 그 투명한 몸에 모든 것을 아름답게 바라보며, 그대로 충만하여 물러날 때 조용히 쉴 수 있는 자유가 빛날 것이다. 또한 바로 이런 시선이 손끝으로 전해질 때, 차별과 지배에 상처난 억눌린 존재들에 대한 치유와 사랑이 나타날 것이다. 덧없는 소유에 공허해 하고, 외로움을 두려워하는 마음에 그윽한 평화가 깃들며, 누군가를 착취한 손의 검붉은 상처가 아물어 갈 것이다. 이것이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며, 유유히 그것만으로도 넉넉한 쉼에 머물수 있는 마음과 삶이 지닌 치유와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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