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의 흔적: 진실과 사실의 긴장

-이 글은 저의 신앙이 성장하던 과정에 부딪혔던 고민과 그에 대한 김진목사님(크리스챤 아카데미)의 깊은 통찰력이 담긴 대답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무엇보다 김진 목사님께 가득한 감사의 마음이 있습니다.

1.물무늬: 진실과 사실의 긴장
안녕하세요. 저는 하나님 앞에서 붙들린 한 가지 문제로 고민하는 신학도 입니다. 누군가의 말 처럼 너무 늦은 고민인지도 모르지만 전 요 근래에 예수의 부활에 대한 고민에 붙들렸습니다.
제 삶에서 예수의 존재는 궁극적 의미의 기원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 분은 제 일상의 사소한 사건에서 조차 부활하시죠. 그런데 문제는 성서에 기록된 부활이 어떤 사실인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죠. 그것을 객관적인 사실로 믿거나 아니면 내면적 차원의 부활로 보는 관점에서 그 양극단이 아니라 어떤 새로운 차원의 사실로 보려는 관점을 접해봅니다. 그러나 어느 것도 개연성의 차원을 넘을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예수의 삶과 죽음에서 이어진 부활이란 것이 그 어떤, 고정된 이미지나 개념 혹은 서술로 정해지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단지 그렇게 열려진 비밀이 각 개인의 삶에서 각각의 절대적 의미로 부활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결국 이런 결론은 예수의 부활을 어떤 객관적 사실로 보는 관점(개신교회의 교의에서 처럼)으로 고정하는 것도 부정하죠. 단지 각자의 삶에서 체험된 각자의 의미로 믿어지고 그런 서로의 충만함을 나누는, 여백의 대화만이 가능한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저의 생각에 대한 선생님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제게는 아주 급하고 매 순간을 짖누르는 고민인데..... 앞의 글들을 보니까 아마도 요즘은 이곳을 잘 확인해보지 못하시는 듯하군요.
그래도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너무 쉬운 답변보다는 어떤 새로운 사유의 길을 제시해주시거나 또는 책을 소개 해주시는 것도 환영합니다. 제 삶의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한 것인데 쉽게 그 답을 얻는다는 것도 그리 마음에 드는 일은 아니군요.

2. 김진 Re: 진실의 깨달음으로 사실에 메인 인식을 극복하십시요.
귀한 질문 주셔서 고맙습니다. 부활을 생각함이'짖누르는 고민'이라면 그것은 부활을 '깨닫지' 못함이 분명합니다. 부활을 '아는 것'과 '믿는 것' 그리고 '깨닫는 것'은 각기 다른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서에 나타난 부활을 아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 그것 또한 교리적인 것으로 끝날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내가 '깨닫는 것'은 그것은 부활을 실제로 나의 삶에서 체험하고 사는것입니다. 님의 글 속에서 이미 부활의 현재성에 대한 고민이 담겨져 있습니다만, 부활은 예수의 부활에서 끝나는 사건도, 또 그렇다고 내면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서 표현되고 경험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증명할 수 도 없고, 또 증명한다고해서 그 부활의 실재성이 우리의 신앙으로 자동적으로 전이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부활을 증명하려는 노력은 허사입니다. 그것 보다는 우리의 삶에서 부활체험을 통해 예수부활의 실재를 체험하는 것(물론 그 역도 중요합니다)이 중요합니다.그것은 죽임에 대한 살림의 경험이고,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의 환희를 체험하는 길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이 자연가운데, 역사 속에서, 그리고 자신의 개인의 삶에서 볼 수 있을때 비로소 우리는 부활을 '깨닫는 자'가 될 것입니다. 만약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은 살아갈 힘도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3. 물무늬 Re: 진실의 깨달음으로 사실에 메인 인식을 극복하십시요.

우선 무엇보다 진지하고 성실한 답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대답은 제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떤 도움인지는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몇가지 답변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싶군요.

>귀한 질문 주셔서 고맙습니다. 부활을 생각함이'짖누르는 고민'이라면 그것은 부활을 '깨닫지' 못함이 분명합니다.
[글쎄요. 적어도 제게는 그 둘이 분리된 것이 사실입니다. 제 일상에서 전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하게 확인합니다. 제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에게서 들려오는 음성과 다른 이들 안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나에게서, 그렇게 또 다른 나인 이웃의 얼굴 뒤에 부끄러운 듯 숨어 사랑으로 부활하시는 모습을 느끼고, 풀한 포기의 상처에서 예수님의 못자욱을 만지죠. 그러나 그것이 동시에 성서에 "표현"되어있는 부활이 fact임을 보장하지는 않더군요. 오히려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그득함으로 다가오시는 모습을 봅니다.
제 고민은 제가 목회자나 혹은 교회의 다른 직분을 맡을 때, 교회의 교의가 고백하는 것과 동일하게 고백할 근거가 없다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부활을 '아는 것'과 '믿는 것' 그리고 '깨닫는 것'은 각기 다른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서에 나타난 부활을 아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군요. 쉽게 알 수 있는 부활이 무엇인지?]

우리의 삶에서 부활체험을 통해 예수부활의 실재를 체험하는 것(물론 그 역도 중요합니다)이 중요합니다.
[앞서의 언급에서 처럼 이런 체험이 예수님 당시에 어떤 일(fact)이 일어났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 제 질문과 고민의 요지입니다.]

제가 점점다가가고 있는 대답은 그 사실은 단지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으로써 그 역할이 다하면 사라질 뿐이기에 그 규명이 일차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 제자에게 당신의 진실을 일상의 사건 속에서 경험케 하시고 난 후에 그들이 진리에 이르자 사라지시는 그 그득한 넘침과 부끄러운 미소의 얼굴에서 이런 자유와 평화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 손가락은 자신을 무엇으로 규정하느냐에 집착하지 않을 만큼 그득하죠. 그리고 그 손가락은 언제나 열려있어서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늘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하는 무한한 생명이란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가지 방식으로 단정적으로 규정하는 일은 불필요하고 위험한 일이죠. 단지 각각의 자리에서 그려낸 풍경이 서로의 세계를 풍요롭게 하기위한 긴장에서 성숙으로 익어가는 것이죠.

4. 김진 Re: 부활체험을 향해 정진합시다.
29번의 글을 읽고 좀 더 언급할 부분이 있다고는 생각했는데 저의 말을 다시 듣고 싶으신지는 몰랐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제자들의 부활경험이 단지 손가락에 비유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오늘의 실재로 현존하는데 어떻게 그 당시 제자들이 경험한 예수에 대한 부활 경험을 인정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에 매인 인식을 극복하라는 저의 표현은 그 부활경험을 언어로 표현 성서에서 다시 교리적인 사실로 전환되어 우리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는 "사실"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경험한 예수부활 경험은 우리가 지금 생각할때 가장 생생하다고 여겨지는 몸의 부활경험 그것보다 더 생생하고 실재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겨우 몸의 부활의 실재성만을 가지고 아웅다웅 합니다. 만약 우리가 오늘 그리스도의 부활과 현존을 경험한다면 조금씩 제자들의 경험과 공유하는부분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fact 이상의 것이고, fact 보다 더 실재적인 부활의 기쁨입니다. 저의 말이 이해가 되셨는지 모르겠군요. 그러니까 성서에 표현 부활 사실을 검증할 방법도 없고, 필요도
없습니다. 검증이 되어야 부활을 믿겠다고 하는 사람은 어짜피 검증되어도 믿지못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어떤일이 일어났는지"는 그 경험의 전체를 알수 없지만 그들의 삶은 180도 바꾸게 한 경험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우리가 한다면 우리의 삶도 그렇게 변화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종교적 경험이 어떻게 언어로 다 설명될 수 있겠습니다.
부활을 안다는 것은 성서의 내용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활신앙으로 곧바로 연결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호하게 삶과 언어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는 부활하셨다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려하기 보다 그들이 체험한 부활을 체험하려고 정진합시다.

5. 물무늬 Re: 진실의 깨달음으로 사실에 메인 인식을 극복하십시요.
아래의 글은 제가 답멜로 먼저 띄운 것입니다. 멜 주소가 없다는 것을 몰랐죠. 그래서 다시 돌아온 것을 이곳에 올립니다.
비슷한 시기에 다른 곳에도 이런 질문을 남기고 토론 중이어서 님께서 보내신 것을 알지 못했군요. 무엇보다 진지하시고 진정어린 답변을 보내주신 바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님의 대답에는 일상에서 부활하신 분의 향내가 깊이 베어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로 제 일상에서 부활하신 그 분의 향내가요.

요몇일 동안에 제가 도착한 곳에서 만나 깨달은 바와도 뜻이 통하는 군요. 그 깨달음이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아는 것도 또한 기쁨입니다. 예수님을,하나님을, 뭐라 말할 수 없는 그 분을 만나는 만남에는 유사점이 있더군요. 그것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일상의 행동 속에서 깨달아졌죠. 그리고 깨닫는 순간 그 분은 사라지시죠. 그 분의 그득함은 우리의 영원한 신성을 가리키시는 손가락입을 직감합니다. 그 손가락은 우리가 깨닫는 순간 이미 충분함으로인해 자리를 비우시고, 제 홀로 그득해 넘치는 일상이 깨달은 자의 앞에 놓여있음을.
주관과 객관을 나누고 그 앞에 사실(fact)만이 진리이고 진실이라는 어리석은 이데올로기에 메어 스스로를 기만했음을 발견합니다. 그런 추구는 하나의 유희일 뿐이고 허공에 떠있는 지구만이 절대적이고 단단한 기반이라고 믿는 것같은 어리석음이며 동시에 소유와 지배의 논리임을 발견합니다. 진실은 삶의 긴장을 견디는 묵힘에 있음을....
이제 그 손가락이 무한한 비유로 열려 새로운 세계를 제 일상에 그려주고 그 풍경에 -설명이나 증명이 아닌- 하나로 감흥하는 삶을 기대합니다. 평화롭고 자유롭게.....

앞으로도 여쭤보고 나누는 만남이 서로 안에 있는 하나님을 나누는 것이길 기대하고 또한 그런 맛일 것을 믿게 됩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6. 김진 Re: 손가락 안에도 그리스도가...
견지명월의 의미를 매우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그것은 불교의 실재관이나 인식론을 설명하는 중요한 틀인 것이 분명하고 또 매우 유용한 틀이지만 기독교의 실재관 특히 기독교의 신비주의 영성(제가 판단하기 가장 올바른 영성이해입니다)의 빛에서 보면 반쪽의 진리만을 담고 있지요. 내식으로 표현하면 "손가락 안"에도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많이 명상하시기 바랍니다.

7. 김진 Re: 답변을 저 아래에 해 놓았습니다.
답변이 별로 필요치 않은 것 같았는데 저의 의견을 듣고 싶다고 하셔서 아래에 답변을 해 놓았으니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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