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은 이해가 어려운 비밀을 머금고 있는 것같다. 규칙적인 것이나 예상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비껴감", 또는 압도하는 철벽 앞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순간에 그 벽의 원자 사이를 유연히 뚫고 지나가게 하는 "부드러운 스며듦", 또는 절벽 앞에서 한 걸음을 더 내딛고도 허공을 가볍게 날아로는 "이완의 날래". 비껴가고 스며들고 나풀거리는 웃음은 수많은 역설과 틈새를 자유롭게 넘나들기 때문에 더욱 아련하게 잡히지 않는 듯하다.


가끔씩 도대체 왜 웃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칠 때가 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웃을 일이 아닌데 웃음이 터져나오는 때 그런 의문이 스친다. 웃음 역시 존재가 존재자를 통해서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한 길이 아닐까? 다양한 상황에 따라 터져나오는 웃음들은 제각기 다른 의미와 영향을 낳는다.


절망적인 자신의 모습이나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 앞에서 힘을 잃고 흘리는 자조적 웃음, 때론 그 절망을 향해 미친 듯이 퍼붓는 웃음이 되기도 한다. 이런 웃음은 극단적인 한계 상황 앞에서 어떻게 할 바를 모르는 당혹스러움과 분노를 분출시켜 그 긴장을 풀어주는 것같다. 아름다운 날들이란 영화에서 유태인 수용소에 끌려간 아버지가 아들에게 선사하는 웃음도 이와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말뚝을 박다가 그 밑에 있는 대전차 지뢰를 눌러서 죽음 사병의 이야기를 들으며 폭소를 터뜨리는 중대원들을 본적이 있다. 사람이 죽었는데, 그 상황이 우습다는 이유로 웃는 그 소름끼치는 상황. 이런 면은 누군가 넘어지거나 바보같은 모습이 되면 터지는 웃음과도 그 맥이 통하고 있다. 이런 웃음은 가학적인 본능이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공격하기엔 너무 강한 상대거나 공격이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공격본능을 해소하는 장치와도 비슷한 듯하다.


공공의 적이란 영화는 웃기는 영화다. 그런데 웃기려는 제스추어를 보여주지 않고 너무나 심각한 상황들로 이어가는데, 그럼에도 너무나 웃기는 영화다.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목숨을 걸고 사건을 해결하는 강력계 형사들의 삶, 돈 때문에 자식이 부모를 무참히 살해하고 아무런 죄없는 사람들을 장난처럼 죽이는 살인마가 등장한다. 대부분의 장면이 심각하고 절망적이다. 과장된 면이 있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런 사건들이 있어왔고, 경찰의 삶이 힘겹다는 것도 알려진 바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것으로 공감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심각한 장면들의 육중한 무게가 자꾸만 폭소로 흩어져 버린다. 압력과 긴장의 답답함이 일순간 가볍게 날아오르기 때문에 계속 시선을 붙잡지만 동시에 씁씁한 현실에도 눈길을 머물게 한다. 주인공의 마쵸맨적 힘으로 악당을 물리치는 장면이나 희망적으로 변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실은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악당을 물리치는 그 통쾌한 모습을 기대하는 관객의 욕망을 충족시키면서도 그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이라는 허탈함을 뒤에 숨겨둔 것만 같다.

그리고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그 무거운 짐을 조금은 가볍게, 조금은 희망적으로 다시 바라보게 한다. 외면하기만 하는 현실에 작은 틈을 만들어내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틈은 너무나 작고 농담처럼 욕하고 마는 무력한 것이지만. 하지만 어쩌랴 정면을 돌파해서 부딪히기엔 너무나 역부족이고 그냥 두자니 너무나 절망적인 것을. 이렇게 라도 절망의 벽에 흠집을 내고 비웃어 주면서 새로운 희망을 품어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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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기뻐하는 때....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고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오히려 더많은 고난이 엄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피해가는 곡예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을 경험하면서
그 고난의 의미를 찾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당하여도 오히려 고난을 기뻐하며
그 가운데서 소망을 찾습니다.

고난의 의미라는 김진홍 목사님의 책에 실린 글입니다.
오히려 고난을 기뻐하며, 고난 가운데서 소망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요...
고난을 기뻐하는 모습은 언제나 제게 있어질까요...
고난 가운데 있는 의미와 소망을 찾기위해 노력하면서도
정작 그 고난의 가운데서 기뻐하기란 여간해서 쉬운 일이 아닌것을 느낍니다. 내 안에 참된 평화가 없을때는 더더욱 그런것 같구요.
.................................................

{기분 좋은 때만 성령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기쁠때나, 슬플때나, 망했을 때도, 흥했을 때도 언제든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좋은 일을 맞이하든지, 나쁜일을 맞이하든지, 칭찬을 들을때나, 잘못하여 욕을 듣고 실패하게 될 때에도 언제든지 임마누엘 되신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것을 가르쳐 지키게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28:50
세상 끝날까지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신다는 것.!!} -고난의 의미 중에서-

lovevision

[답글]고난을 기뻐하는 때....

힘겨운 시간들이 가끔씩은 우리 삶을 엄습하곤 합니다.
그 무게에 짖눌리다 너무나 버거워지면 분노와 절망에 빠져들기도 하죠.

하지만, 그 주검의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생명을 부여잡는 불굴의 욕망이 솟아나는 것을 느낍니다. 주검 앞에서 삶의 열망을 느끼듯이. 내 속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생명에 대한, 무섭도록 끊질긴 목마름을 느낍니다.

그러나 정작 그 생명이 움트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마지막 열망의 불꽃마져 사그러드는 순간입니다. 살려는 버둥거림마져 짙밟혀 포기되 버린 절대 고요의 순간, 그 때 조용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곤 하죠. 나의 온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지는 그 체험의 순간, 그 절망의 끝은 잔잔하게 희망과 생명의 서곡을 들려주기 시작하죠.
그 순간은 자기 안에서 버둥거리던 생존에 대한 집착이 자기 것만이 아님을 깨닫게 하는 첫 걸음이 되죠. 그러면 나와 너가, 나와 모든 존재가 하나임을 깨달아, 짙밟혀 죽어가는 모든 존재의 비명 소리가 자신의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것을 듣게 됩니다. 그 열망이 모든 생명의 근원에서 울려오는 것이고, 내 안과 밖 사이의 그 높은 벽이 허상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달음은 더 이상 나만의 생존에 붙들리지 않는 자유를 선사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포기하고 칼로 찌르려던 순간, 하갈이 브엘세바 빈들에서 죽어가는 이스마엘을 포기하고 울기만 하던 순간(창21), 아합에게 쫓기던 엘리야가 광야에 홀로 들어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하나님께 죽기를 간청하며 자책하다가 지쳐 잠들었던 순간(왕상19)....

절망의 절벽 끝까지 내몰려 허공으로 발을 내딛어야 하는 순간, 그렇게 마지막 희망마져 찢겨나간 순간에 하나님의 미세한 음성이 들려오죠. 허공에 발을 내딛는 순간은 그 동안 자신의 온몸을 받쳐주던 땅의 실체를 오히려 그 절대적 부재를 통해서 발견하는 깨달음의 때입니다. 앞만 보며, 높은 정상에만 집착하면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순간들에는 자신이 딛고 선 땅이 자기 존재의 터전이자 근원임을 망각하곤 합니다. 자신이 의지하고 서는 것이 아니라 밟고 서서 군림한다고 착각하곤 합니다. 그렇게 자신이 존재할 수 있도록 모든 존재들이 희생해주고 있고, 그 속에 깃든 근원적 생명이 사랑스럽게 바라봐주고 있다는 진리를 보지 못하죠. 그런 오만과 착각은 그 땅의 부재에 맞닥드리는 순간, 절벽에서 한 걸음 더 내딛어야 하는 순간 산산히 부서지고 말죠.

그 절대절명의 고비 속에서 살려고 발버둥치는 집착마져 끊어질 때 만나는 고요,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와 음성을 느낄 수 있는 깨달음의 순간입니다. 그 깨달음이 몸 속 깊이 스며들면, 허공에 온 몸을 맞기는 것이 단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죠. 그렇게 되면 끝없는 추락에 내몰린 그 절망이 오히려 자신에게 생명을 선사한 모든 존재들에게 다시금 자신을 되돌려 주는 자유로운 도약의 기쁨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 그윽한 기쁨이 짙밟혀 포기당하는 궁지에서 피눈물 쏟는 기도를 통해서라도 스스로 이웃의 십자가를 지게 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의 잔을 물리려 애타게 기도했던 그 밤처럼.

그렇게 고난을 기뻐하는 감정....
그것은 아마도 그 고비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힘겨움이 잦아드는 평화로운 시기에나 되돌아보면서 맛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 무엇보다 절망 속에 죽어가는 모든 생명들의 피눈물이 내 눈시울을 통해서 뜨겁게 흘러내리고, 그래서 자신의 생명으로 그 눈물 닦아주며, 그의 눈가에 짙은 기쁨의 미소 한 조각 잔잔히 번져오는 것을 볼 때에나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한 번쯤, 아니 몇 번쯤은 이런 절박한 고비들을 맛본 후에야, 고난의 거센 파도에 찢기는 순간에도 향기 깊은 미소 머금고 감사 기도 한조각 올릴 수 있지 않을까요? 맑은 눈물 머금은 호탕한 웃음 터뜨릴 수 있지 않을까요?
내 안에 너와 함께, 내 안에 그 분과 함께....


덧붙임;
절망 끝을 박차오르는 생명의 거듭남, 그 체험에는 두 가지 다른 모습이 있는 듯하다. 이 글에는 그 두 모양이 뒤엉켜 있다. 하나는 자기 실존의 고통에 붙들려 힘겨워 하는 상처가 치유되는 경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궁극적 생명과 자유를 체험하기에 충분하지만, 그 중심이 자기에게 집중되어 있는 한계가 있다. 이웃과 형제에 대한 희생이라는 요구 앞에서 무력해지는 한계에 갖히기 쉽다.

그러나, 이런 절망의 극복은 타인의 절망과 상처를 치유하는데 결정적인 힘이되고, 그 과정에서 그 누구의 잘못도 정죄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해준다. 그리고, 그의 아픔이 내 것으로 깊이 다가와 공명하는 절규를 맛볼수 있고, 그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 애쓸 수 있는 맑은 마음으로 정화시켜준다. 그리고 이렇게 누군가를 치유해주는 경험 속에서 자기 중심적이던 한계는 극복되어 간다. 타자의 절망이 내 가슴에 가득할 때, 내 상처와 허무함은 사라지고, 그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순간 느껴지는 자신과 타인의 충만한 합일, 그 기쁨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고통 속에서 두렵고 절망해도 그 고통의 이유가 나의 이웃, 곧 '다른 나' 속의 내 상처일 때 오히려 행복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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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雨期의 노래, 탁류濁流의 통곡

아침에 귀가 밝아오면, 이젠 그쳤겠지라는 기대를 여지없이 깨버리는 잔잔한 빗소리에 놀라곤 합니다. 하루를 보내면서도 정말 비가 많이 온다는 말을 몇 번은 하는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우기가 생긴게 아닌가 싶고, 열대지방이나 팔레스틴 지역의 우기가 이런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스쳐갑니다.

오늘 아침 출근하면서는 이렇게 많은 비가 땅으로 다 스며드는게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많이 오는데, 고인 빗물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늘 잠잠하던 땅에 그렇게 깊은 목마름이 있을줄이야. 더욱 놀라운 것은 긴 가뭄의 끔찍한 목마름에 말없이 기다릴 줄 알고, 이렇게 긴 비의 지루함에도 담담한 줄 아는 땅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동경하게 됩니다.

늘 흔들리지 않고 잠잠할 줄 아는 마음(평상심平常心)이 풀과 나무를 품어 길러내고 모든 동물의 집이 되어주며, 모든 생명이 죽어서 돌아갈 고향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랑이란 생각이 깃들었습니다. 그 사랑이 모든 생명의 주검을 품어주기에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날 수 있는 영원함이 끊이지 않는 것이겠죠.

박재순님이 주역 계사(繫辭)편에 "하늘은 확연(確然)하니 사람에게 쉬움을 보여주고, 땅은 퇴연( 然:부드러움)하니 사람에게 간단함을 보여준다."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깊이 묵상해볼 말-씀입니다. 우리 안 어딘가에서 솟아난 '말(logos)'을 받아쓴 "말-씀", 그 결에서 하늘향이 풍깁니다.

이렇게 우기의 길고 단순한 곡조가 차분해진 마음의 귀를 깨웁니다. 땅을 촉촉히 울려 그 마음을 살며시 보여주는군요. 함께 들어보실래요?^^

땅은 낮고 흙은 부서진다. 예수는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
한다고 했는데 낮고 부서지는 땅이야말로 온유하다. 그런데
이상하지. 낮은데서 깨지고 부서져야 아름다운 빛이 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흙에서 얼마나 눈부시게 빛이 피어나
는가! 봄이 오면 흙 밭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빛이 솟아나는
가!


원자 알갱이가 깨지고 부서질 때 엄청난 힘과 빛이 나오듯,
인간의 자아도 깨지고 부서질 때 엄청난 힘과 빛이 나온다.
빛 날려면 흙처럼 깨질 줄 알아야 한다. 흙처럼 부서질 줄
알면 모든 일이 간단하고 단순해진다. '내'가 부서지는 판에
복잡하고 어려울 게 없다.


단순하면 힘있고 아름답다. 물질의 신비와 힘을 드러내는
'탄소나노튜브'(나노: 10억분 1m)의 분자구조는 놀랄 만큼
단순하다. 놀랄 만큼 단순한 구조가 바로 '꿈의 신소재'가
될 수 있는 '뛰어난 물질특성의 원천'이라고 한다. 그렇지.
어린아이처럼 단순해야 하늘나라의 힘과 신비가 드러날 것
이다.


그런데, 땅과 하늘이 비로 만나는 이 잔잔한 곡조가 통곡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길고 긴 비에 물이 범람하여 집이 침수되고, 산사태가 일어나며, 농작물이 물에 잠겨버리고.....너무나 가슴 아프고 안쓰러운 일이 일어나고 있죠. 그 통곡마져 지쳐버린 사람들에게 이 비가 얼마나 원망스러울지....그 상처난 마음은 하늘을 원망의 눈길로 쏘아보기 쉽습니다.

하지만, 스며들고 흘러갈 자리에 물이 고여 넘치고, 평화로울 수 있는 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하늘과 땅이 만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눈먼 욕심과 집착이 땅을 콘크리트로 생매장하고, 산의 생살을 찢어내서 길을 트며, 하늘에 욕정의 배설물을 가득 싸갈겼죠. 그렇게 땅과 하늘을 할퀴어 놓은 상처가 덫나고 곪아 터진 게 아닐까요?

"최근 지구촌이 유례없는 기상이변으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가운데 남아시아를 뒤덮고 있는 거대한 오염구름층이 발견되는 등 지구환경 파괴의 악영향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 지구촌 유례없는 가뭄…홍수재앙- 한겨레 신문2002년8월12일자 국제면, 정재권 기자 jjk@hani.co.kr
http://www.hani.co.kr/section-007000000/2002/08/007000000200208122029736.html

범람하는 흙탕물의 거센 물결엔 하늘이 비치지 않습니다. 그 거친 수면과 탁한 물 소리는 하늘과 땅의 부당함을 비춰주지 않죠. 오히려 그 격한 노래는 통곡하는 수재민들의 아픔과 함께 울면서, 인간이 스스로에게 낸 자해自害의 아픔을 슬퍼하고 있지 않을까요? 인간이 또 다른 자신인 자연에, 자신의 어머니인 하늘과 땅에 깊이 찔러넣은 자해自害의 처참한 아픔으로 인한 통곡으로 들려옵니다. 그리고 이대로 우리의 욕망이 정화되지 않을 때, 일어날 수밖에 없는 더 큰 주검의 그림자를 예언하는 안타까운 외침으로 울려옵니다.
그렇게 범람하는 탁류는 하늘이 아니라 인간의 악취나는 욕망을 비추고, 그것이 낳을 처참한 주검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힘겨운 사람들은 하늘을 탓하고, 남을 비난하기 쉽습니다. 반복되는 수해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고, 고쳐나가야할 일이죠. 하지만, 어리석은 자해自害의 광기를 잠재우고, 스스로 깨달아 덫에서 벗어나는 자해自解의 구원이 없다면 헛일이 되기 쉽습니다. 정치가, 공무원, 건설업자 등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은 사람들의 게으름과 욕심에서, 그리고 재해민들 자신의 상처 위를 흐러는 탁류에서 우리 모두의 욕망을 발견하는 깨달음,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들이 재해민들의 통곡에 함께 우는 깨달음이 없이는 헛일이 되기 쉽습니다.

너와 나, 우리와 자연, 우리와 하늘을 나누는 어리석은 무명無明에서 벗어나는 깨달음으로 자해自解하지 않으면 헛일입니다. 홍수와 수해의 아픔이 바로 땅과 하늘과 우리 모두의 아픔으로 공명共鳴하는 예수님의 눈물이 우리 모두의 눈시울과 뺨에도 범람해야 합니다. 이런 일은 너무나 멀리 있는, 불가능할 것 같은 기적으로 보이지만, 예수님처럼 단 한 사람이 그 아픔에 시선을 주고, 함께 울리면 그 십자가 위에서처럼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단 한 사람의 눈시울에 범람하는 따뜻한 공명의 눈물.

바로 그 눈시울이 바로 내 얼굴에 있죠. 그런데 아직도 건조하기만 하기에 마음이 답답하고 무거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 모든 생각이 유희요, 기만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어두운 상념이 스쳐갑니다. 그러나 내 안 깊은 곳에 그분의 눈물이 가득하다는 것을, 그것이 솟아오를 것이라고 속삭이는 음성이 있습니다. 모세처럼 가냘픈 지팡이로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은 마음 내리치기만 하면 솟아날 것이라고, 이미 내 안에 시작한 착한 일을 꼭 이룰 것이라는 위로와 격려의 음성이, 그 포근한 곡조가 들려옵니다. 탁류의 통곡을 내 안에 울려오게 할 곡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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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순님의 글 : 너는 거기 있고 나는 여기 있구나

박재순님의 글을 퍼다 놓는다. 마지막 구절이 가슴에 박힌다. 글의 힘을 느끼고 말았다.


강릉에는 하루에 비가 800mm나 왔다. 온 마을이 물에 잠겼
고 길이 끊어졌다. 경남 지역에도 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에 자동차가 휴지처럼 구겨져 처박히고 집은 무너지고 살림
살이도 며느리와 손자도 물에 쓸려 내려갔다며, 며느리를
부르며 우는 할머니의 일그러진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살림
의 터전을 짓밟은 물이 잔인하다.


나는 북한산 자락 아래 높은 곳에 산다. 물난리 걱정이 없
는 곳이다. 저 아래서 살자고 몸부림치며 정성과 힘을 다해
일구어 온 살림을 하루아침에 잃고 몸도 마음도 지친 이들
의 마음을 나는 헤아리기 어렵다. 이들의 아픔과 절망을 함
께 느껴보려고 하나 느낄 수 없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서로 멀리 있듯이 너는 거기 있고 나는 여기 있구나. 너는
거기서 아픔과 절망으로 죽고 나는 여기서 사랑이 없어 말
라죽겠구나.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를 떠나갈 때에, 예수께서는 시장하셨다.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가서 보셨는데, 잎사귀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 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이른 아침에 그들이 지나가다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버린 것을 보았다. (마가복음 11: 12-14, 20)

잎이 풍성했지만, 아직 열매를 맺을 시기가 않되서 열매가 없던 무화과 나무...
처음 이 말씀을 보면서는 참 이상했다. 아직 열매 맺을 시기도 아닌데, 왜 저주를 하는지...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열매는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한 선물이다. 필요한 누군가를 위한. 이웃이나 친구가 뭔가 간절히 필요한데, 내 줄기의 잎만 가득 키우고, 줄 것은 준비하지 않는다면.....그건 나 자신에 대한 저주가 아닐까?

얼마전 홍수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았었다. 사실 대전에는 홍수피해가 없어서 그렇게 깊이 다가오는 아픔은 아니었다. 홍수 피해를 받은 사람이 서있는 자리와 내가 선 자리가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거리감 때문에 내 마음에는 그들의 아픔이 깊이 느껴지지 않고, 그러니 당연히 뭘 도와주거나 하려는 마음도 없었을 것이다...열매맺을 때가 않된 나무처럼.
결국 홍수 피해에 고통 받는 사람들은 그 절망 때문에 죽어가고, 난 그들의 아픔과의 거리감 때문에, 사랑이 없어서 말라죽어가는 것이다.

우리 삶에 자주 일어나는 사건이 아닐까?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그렇게 사랑이 없어 말라죽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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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아문如是我聞, 여시아설如是我說

금강경 첫 구절인 여시아문(如是我聞, 나는 이와같이 들었다)은 마태복음 5장의 한 부분을 떠오르게 한다. "~한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말하자면 여시아설(如是我說, 나는 이렇게 말한다)인 환기식독법. 여시아문은 겸손히 들은 바를 전하는 듯하고, 여시아설은 자신의 생각을 더 강하게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서로 대조적인 어투로 느껴지기 쉽다.

하지만 여시아문은 어떤 절대적인 권위자나 위대한 성인인 누군가가 말한 것을 녹음기처럼 그대로 외우는 것이 아니다. 화자의 말에 청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공명하고, 허공을 울리던 말은 이미 청자 안에서 살아움직이는 진리로 변이한다. 그가 어떻게 말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들었는가가 중요하다. 내가 듣고 이해한 방식이 내 삶과 온생명을 해방하게하는 열매를 맺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예수 역시 여시아문으로 경전을 대하고 있다. 당시 유대인의 경전에 "~라고 써있는 가르침"을 들었는데, 그것 그대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내용을 자신이 속한 삶의 자리, 하나님에 대한 경험과 깨달음에 비춰서 듣고 있는 것이다. 그리곤 "들었다"에서 그치지 않고 과감하게 고쳐버린다. 그렇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고. 바로 여시아설如是我說인 것이다.

내가 곧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라고 선언하는 예수. 이런 선언이 예수가 직접한 말인가에 대해서 회의적인 관점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구약의 하나님이 "나는~이다"라고 선언했던 것처럼 신현양식(에고 에이미)으로 즉, 신적인 권위로써 자신을 선포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여시아문如是我聞"과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如是我說"에서 말하고 있는 "나"는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에서처럼 바로 구약에서 자신을 선포하는 하나님이 아닐까? 이 "나"는 우리 안으로부터 일상의 주검을 생명으로 부활시키는 참나가 깨어난 것이 아닐까? 계시는 경전만이 아니라 우리 삶 도처에 나뒹구는 주검이 부활하는 기적을 통해서도 주어진다. 이미 우리 안에는 그 부활을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는 "나"가 주어져 있다. 우리가 억눌려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것은 그 참나가 스스로에게 자신의 참된 자유를 계시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그 참나가 모든 존재의 고통과 주검을 치유하는 진리를 깨닫는 순간 신현양식의 나(하나님)로써 나는 이렇게 들었고 이렇게 말한다고 선언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 하나님처럼 되기를 바라고 있는 기독교 하나님의 바람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런 참나가 깨어나, 에고에이미로써 선포할 수 있는 것, 내가 이렇게 들었고 나는 이렇게 말한다고 내 안의 참(된 신적인)나로서 선포할 수 있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에베소서 14,13)

"그러므로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마태복음 5, 48)

그런데 여시아문은 그냥 어떻게 들렸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들은 것이다. 즉, 적극적인 참여의 들음이다. 또한 여시아설은 내가 적극적으로 말하는 듯하지만 그 '나'는 자기집착에 얽메인 일상의 나가 아니라 하나의 신성이 투명하게 드러난 '참나'의 말인 것이다. 이런 참나의 능동적 선언을 일상의 나가 스스로의 목소리를 비움으로써 오히려 수동적으로 울려낸 것이다. 또한 다른 측면에서 보면 여시아문 즉, 적극적 참여의 들음 역시 참나의 목소리를 받아들인 수동적 울림이고, 여시아설 역시 그렇게 대언하는 수동적 울림으로써 참나에 대한 적극적 참여인 것이다.

둘 다 하는듯 아니하고 아니하는듯 하는 것이다. 대조적인 듯이 보이는 이 두 가지 태도가 실은 이와 같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두 가지 다 참나의 자리에서 보면 적극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고, 일상적 나의 자리에서 보면 수동적인 측면을 니지고 있다. 두 가지가 실은 나뉠 수 없는 하나가 아닐까?

2004. 1. 20. 불의 날
'이아무개 목사의 금강경 읽기'를
묵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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