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기뻐하는 때.... |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고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오히려 더많은 고난이 엄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피해가는 곡예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을 경험하면서 그 고난의 의미를 찾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당하여도 오히려 고난을 기뻐하며 그 가운데서 소망을 찾습니다.
고난의 의미라는 김진홍 목사님의 책에 실린 글입니다. 오히려 고난을 기뻐하며, 고난 가운데서 소망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요... 고난을 기뻐하는 모습은 언제나 제게 있어질까요... 고난 가운데 있는 의미와 소망을 찾기위해 노력하면서도 정작 그 고난의 가운데서 기뻐하기란 여간해서 쉬운 일이 아닌것을 느낍니다. 내 안에 참된 평화가 없을때는 더더욱 그런것 같구요. .................................................
{기분 좋은 때만 성령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기쁠때나, 슬플때나, 망했을 때도, 흥했을 때도 언제든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좋은 일을 맞이하든지, 나쁜일을 맞이하든지, 칭찬을 들을때나, 잘못하여 욕을 듣고 실패하게 될 때에도 언제든지 임마누엘 되신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것을 가르쳐 지키게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28:50 세상 끝날까지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신다는 것.!!} -고난의 의미 중에서-
lovevision
[답글]고난을 기뻐하는 때....
힘겨운 시간들이 가끔씩은 우리 삶을 엄습하곤 합니다. 그 무게에 짖눌리다 너무나 버거워지면 분노와 절망에 빠져들기도 하죠.
하지만, 그 주검의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생명을 부여잡는 불굴의 욕망이 솟아나는 것을 느낍니다. 주검 앞에서 삶의 열망을 느끼듯이. 내 속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생명에 대한, 무섭도록 끊질긴 목마름을 느낍니다.
그러나 정작 그 생명이 움트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마지막 열망의 불꽃마져 사그러드는 순간입니다. 살려는 버둥거림마져 짙밟혀 포기되 버린 절대 고요의 순간, 그 때 조용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곤 하죠. 나의 온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지는 그 체험의 순간, 그 절망의 끝은 잔잔하게 희망과 생명의 서곡을 들려주기 시작하죠. 그 순간은 자기 안에서 버둥거리던 생존에 대한 집착이 자기 것만이 아님을 깨닫게 하는 첫 걸음이 되죠. 그러면 나와 너가, 나와 모든 존재가 하나임을 깨달아, 짙밟혀 죽어가는 모든 존재의 비명 소리가 자신의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것을 듣게 됩니다. 그 열망이 모든 생명의 근원에서 울려오는 것이고, 내 안과 밖 사이의 그 높은 벽이 허상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달음은 더 이상 나만의 생존에 붙들리지 않는 자유를 선사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포기하고 칼로 찌르려던 순간, 하갈이 브엘세바 빈들에서 죽어가는 이스마엘을 포기하고 울기만 하던 순간(창21), 아합에게 쫓기던 엘리야가 광야에 홀로 들어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하나님께 죽기를 간청하며 자책하다가 지쳐 잠들었던 순간(왕상19)....
절망의 절벽 끝까지 내몰려 허공으로 발을 내딛어야 하는 순간, 그렇게 마지막 희망마져 찢겨나간 순간에 하나님의 미세한 음성이 들려오죠. 허공에 발을 내딛는 순간은 그 동안 자신의 온몸을 받쳐주던 땅의 실체를 오히려 그 절대적 부재를 통해서 발견하는 깨달음의 때입니다. 앞만 보며, 높은 정상에만 집착하면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순간들에는 자신이 딛고 선 땅이 자기 존재의 터전이자 근원임을 망각하곤 합니다. 자신이 의지하고 서는 것이 아니라 밟고 서서 군림한다고 착각하곤 합니다. 그렇게 자신이 존재할 수 있도록 모든 존재들이 희생해주고 있고, 그 속에 깃든 근원적 생명이 사랑스럽게 바라봐주고 있다는 진리를 보지 못하죠. 그런 오만과 착각은 그 땅의 부재에 맞닥드리는 순간, 절벽에서 한 걸음 더 내딛어야 하는 순간 산산히 부서지고 말죠.
그 절대절명의 고비 속에서 살려고 발버둥치는 집착마져 끊어질 때 만나는 고요,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와 음성을 느낄 수 있는 깨달음의 순간입니다. 그 깨달음이 몸 속 깊이 스며들면, 허공에 온 몸을 맞기는 것이 단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죠. 그렇게 되면 끝없는 추락에 내몰린 그 절망이 오히려 자신에게 생명을 선사한 모든 존재들에게 다시금 자신을 되돌려 주는 자유로운 도약의 기쁨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 그윽한 기쁨이 짙밟혀 포기당하는 궁지에서 피눈물 쏟는 기도를 통해서라도 스스로 이웃의 십자가를 지게 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의 잔을 물리려 애타게 기도했던 그 밤처럼.
그렇게 고난을 기뻐하는 감정.... 그것은 아마도 그 고비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힘겨움이 잦아드는 평화로운 시기에나 되돌아보면서 맛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 무엇보다 절망 속에 죽어가는 모든 생명들의 피눈물이 내 눈시울을 통해서 뜨겁게 흘러내리고, 그래서 자신의 생명으로 그 눈물 닦아주며, 그의 눈가에 짙은 기쁨의 미소 한 조각 잔잔히 번져오는 것을 볼 때에나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한 번쯤, 아니 몇 번쯤은 이런 절박한 고비들을 맛본 후에야, 고난의 거센 파도에 찢기는 순간에도 향기 깊은 미소 머금고 감사 기도 한조각 올릴 수 있지 않을까요? 맑은 눈물 머금은 호탕한 웃음 터뜨릴 수 있지 않을까요? 내 안에 너와 함께, 내 안에 그 분과 함께....
덧붙임; 절망 끝을 박차오르는 생명의 거듭남, 그 체험에는 두 가지 다른 모습이 있는 듯하다. 이 글에는 그 두 모양이 뒤엉켜 있다. 하나는 자기 실존의 고통에 붙들려 힘겨워 하는 상처가 치유되는 경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궁극적 생명과 자유를 체험하기에 충분하지만, 그 중심이 자기에게 집중되어 있는 한계가 있다. 이웃과 형제에 대한 희생이라는 요구 앞에서 무력해지는 한계에 갖히기 쉽다.
그러나, 이런 절망의 극복은 타인의 절망과 상처를 치유하는데 결정적인 힘이되고, 그 과정에서 그 누구의 잘못도 정죄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해준다. 그리고, 그의 아픔이 내 것으로 깊이 다가와 공명하는 절규를 맛볼수 있고, 그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 애쓸 수 있는 맑은 마음으로 정화시켜준다. 그리고 이렇게 누군가를 치유해주는 경험 속에서 자기 중심적이던 한계는 극복되어 간다. 타자의 절망이 내 가슴에 가득할 때, 내 상처와 허무함은 사라지고, 그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순간 느껴지는 자신과 타인의 충만한 합일, 그 기쁨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고통 속에서 두렵고 절망해도 그 고통의 이유가 나의 이웃, 곧 '다른 나' 속의 내 상처일 때 오히려 행복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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