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시아문如是我聞, 여시아설如是我說 |
금강경 첫 구절인 여시아문(如是我聞, 나는 이와같이 들었다)은 마태복음 5장의 한 부분을 떠오르게 한다. "~한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말하자면 여시아설(如是我說, 나는 이렇게 말한다)인 환기식독법. 여시아문은 겸손히 들은 바를 전하는 듯하고, 여시아설은 자신의 생각을 더 강하게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서로 대조적인 어투로 느껴지기 쉽다.
하지만 여시아문은 어떤 절대적인 권위자나 위대한 성인인 누군가가 말한 것을 녹음기처럼 그대로 외우는 것이 아니다. 화자의 말에 청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공명하고, 허공을 울리던 말은 이미 청자 안에서 살아움직이는 진리로 변이한다. 그가 어떻게 말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들었는가가 중요하다. 내가 듣고 이해한 방식이 내 삶과 온생명을 해방하게하는 열매를 맺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예수 역시 여시아문으로 경전을 대하고 있다. 당시 유대인의 경전에 "~라고 써있는 가르침"을 들었는데, 그것 그대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내용을 자신이 속한 삶의 자리, 하나님에 대한 경험과 깨달음에 비춰서 듣고 있는 것이다. 그리곤 "들었다"에서 그치지 않고 과감하게 고쳐버린다. 그렇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고. 바로 여시아설如是我說인 것이다.
내가 곧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라고 선언하는 예수. 이런 선언이 예수가 직접한 말인가에 대해서 회의적인 관점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구약의 하나님이 "나는~이다"라고 선언했던 것처럼 신현양식(에고 에이미)으로 즉, 신적인 권위로써 자신을 선포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여시아문如是我聞"과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如是我說"에서 말하고 있는 "나"는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에서처럼 바로 구약에서 자신을 선포하는 하나님이 아닐까? 이 "나"는 우리 안으로부터 일상의 주검을 생명으로 부활시키는 참나가 깨어난 것이 아닐까? 계시는 경전만이 아니라 우리 삶 도처에 나뒹구는 주검이 부활하는 기적을 통해서도 주어진다. 이미 우리 안에는 그 부활을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는 "나"가 주어져 있다. 우리가 억눌려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것은 그 참나가 스스로에게 자신의 참된 자유를 계시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그 참나가 모든 존재의 고통과 주검을 치유하는 진리를 깨닫는 순간 신현양식의 나(하나님)로써 나는 이렇게 들었고 이렇게 말한다고 선언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 하나님처럼 되기를 바라고 있는 기독교 하나님의 바람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런 참나가 깨어나, 에고에이미로써 선포할 수 있는 것, 내가 이렇게 들었고 나는 이렇게 말한다고 내 안의 참(된 신적인)나로서 선포할 수 있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에베소서 14,13)
"그러므로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마태복음 5, 48)
그런데 여시아문은 그냥 어떻게 들렸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들은 것이다. 즉, 적극적인 참여의 들음이다. 또한 여시아설은 내가 적극적으로 말하는 듯하지만 그 '나'는 자기집착에 얽메인 일상의 나가 아니라 하나의 신성이 투명하게 드러난 '참나'의 말인 것이다. 이런 참나의 능동적 선언을 일상의 나가 스스로의 목소리를 비움으로써 오히려 수동적으로 울려낸 것이다. 또한 다른 측면에서 보면 여시아문 즉, 적극적 참여의 들음 역시 참나의 목소리를 받아들인 수동적 울림이고, 여시아설 역시 그렇게 대언하는 수동적 울림으로써 참나에 대한 적극적 참여인 것이다.
둘 다 하는듯 아니하고 아니하는듯 하는 것이다. 대조적인 듯이 보이는 이 두 가지 태도가 실은 이와 같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두 가지 다 참나의 자리에서 보면 적극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고, 일상적 나의 자리에서 보면 수동적인 측면을 니지고 있다. 두 가지가 실은 나뉠 수 없는 하나가 아닐까?
2004. 1. 20. 불의 날 '이아무개 목사의 금강경 읽기'를 묵상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