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적어도 내게는 흥미나 재미를 주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기타노 특유의 유머"라고 하는 것이나 "그만의 스타일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했다"는 등으로 긍정적인 평을 하는 것이 나와는 거리가 있었다. 지루하고 밋밋한 줄거리, 유머같지도 않은 썰렁함, 검술장면에 사용된 어색한 컴퓨터 그래픽....

하지만 이 영화에는 마음에 남는 요소들이 있었다. 우선 이제까지 접했던 무술영화와는 전혀 다른 검술장면. 다른 영화들은 화려하고 멋지게 짜여진 검술 대결을 보여주었지만,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전광석화처럼 단칼에 베어버리고 사람의 살이 베어지고 피가 솟구치는 모습을 정나라하게 보여준다. 물론 실제와 다른, 또 다른 과장의 요소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실제로 검으로 싸우면 저럴 것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투사와 황소의 대결에서 그 화려한 복장으로 최후의 일격 직전까지 이어지는, 황소와 투우사의 춤은 사라져 있었다. 짧은 침묵의 순간으로 압축된 대결 구도와 단칼에 솟구치는 핏줄기 속에 화려하게 과장된 긴장감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 늘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는 주인공 자토이치. 이런 새로운 형식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잔혹함과 그것이 일어나는 풍경의 냉혹한 무심함을 보여주는 듯했다.

다른 요소는 이런 냉혹함과는 대조적으로 사소하고 비천한, 약한 존재들이 중심으로 옮겨지는 전복의 표현들이었다. 사무라이들의 행렬과 스쳐가는 자토이치의 장면은 줌아웃되면서 배경 구석에 있던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중심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들의 괭이질 소리는 배경 음악의 리듬을 형성한다. 또 길가에 세워진 허수아비(사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가 뽑혀 굴러다니자 자토이치는 적을 죽이러 가다가도 길을 멈추고 원래 자리에 꼽아둔 후에 다시 길을 간다 .

마지막 장면에서 탭댄스로 표현된 마을 축제에는 이런 전복의 상징이 집약되어 있다. 주인공 자토이치와 악당들을 제외한 조연들이 함께 추는 탭댄스에서는 조연들이 중심으로 등극한다. 동시에 영화 전체의 배경 속에 감춰졌던 발걸음 소리, 그 나막신 소리가 축제의 리듬을 엮어간다. 배경에 억눌려있던 미세한 소리가 축제의 흥을 돋우는 주인공이 된 것이다. 이렇게 영화의 소품과 배경이 중심으로 등극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맹인 검객의 보지못함은 이런 전복의 강한 상징성을 압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보지 못하기에 오히려 더 많이 볼 수 있는 역설. 볼 수 있다는 교만이 놓쳐버리고 억압해 버리는 세미한 소리와 감각들이 오히려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게다가 이 새로운 자토이치는 못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보지 않는다. 영화의 끝장면에서는 오히려 눈을 뜨고 걷다가 길가의 작은 돌맹에 걸려 넘어지면서 자토이치 스스로 "이러니까 장님이라는 소릴 듣지"라는 자조 섞인 독백으로 영화를 끝낸다. 본다는, 아니 "다 보고 있고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자기 기만이 오히려 장님이라는 자조.

그리고 이 영화에서 악당 두목은 배후의 인물에 조정을 받은 것이었고, 그 배후의 악당 조차도 더 깊이 감춰진 뜻밖의 인물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자토이치는 이중으로 감춰진 배후의 두목을 찾아내지만 단지 그의 눈만을 베어버린다. 모든 악행의 배후이자 근원은 바로 눈으로 상징되는, 시각적 세계에 붙들린 욕망과 집착이었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너와 나를 나누고 보이는 것에만 그리고 그 중에서 더 좋은 것에만 집착하며 연약하고 무가치하게 "보이는" 너를 억누르는 차별지(差別知)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보지 않음으로 인해 보이는 "새로운 세계"는 쾌검의 현실성과 함께 '해체와 재구성의 한 흐름'을 형성한다. 검술의 화려한 치장을 해체하여 현실의 잔혹함을 드러내주고, 교만한 시선(모든 걸 볼 수 있다는)이 놓친 주변을 중심으로 등극시키는 흐름은 중심을 주변으로, 주변을 중심으로 전복시키는 새로운 재구성의 미학이다.

또한 그 잔혹함과 배경의 침묵에 속에 방치되있던 일상의 소품들이 중심으로 등극하면서 그 냉혹한 침묵을 잔혹함으로 보는 것이 편견임을 드러내준다. 우리의 삶이 살아가는 현실이 잔혹함으로 가득하지만 그 잔혹함을 무정하게 방관하는 듯한 주변의 풍경이 오히려 자기 살을 내어주며 그 모두를 살려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주변의 침묵은 냉혹한 방관이 아니라 고통과 눈물을 삼키며 모두를 살려내고 새로운 생명을 싹틔우는 인고의 신음소리인 것이다. 봄이 피어나는 소리, 숲이 숨쉬는 소리, 지구가 우주의 공간을 춤추는 소리.... 그 거대한 신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을 본다는 어리석은 욕망이 귀를 닫고 그 소리를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영화는 배경으로 깔려있는 소품의 소리를 역동적인 리듬으로 전면에 내세운다. 발바닥에 깔려있던 나막신 소리가 함께 어울어져 축제를 이루듯 냉혹한 침묵 속에는 엄청난 생명의 박동소리가 깔려있었던 것이다.

현실의 참된 생명과 변방의 다양한 중심들은 자토이치처럼 두 눈을 질끈 감고 억눌렸던 세미한 소리와 감각을 되찾고, 중심의 권력을 독점한 모든 허상과 자신도 그 중심에 편입되어야만 살 수 있다는 무명(無明)의 두려움을 단칼에 베어버릴 때만 복권될 수 있을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르듯 욕망과 차별의 눈을 단칼에 베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설사 그것이 자신의 눈일지라도...

이 영화는 감독과 관객의 관계성에서도 전복의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타노 타케시의 "자토이치"는 전통적인 자토이치 영화와는 단절적인 거리를 두고 있다. 금발머리, 장님이 아닐 수도 있다는 설정, 잘 짜여진 검술 장면의 전통성보다는 단칼에 끝나버리는 잔인함, 탭댄스로 표현된 마을 축제 장면...등.

기타노 다케시의 독특한 시대극 자토이치는 "무엇을 이야기 하는가?"보다는 "어떻게 이야기하는가?"에,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만의 독특함 새로움으로 이야기하려는 집착이 드러나 있다. 감독 스스로도 "영화를 만들되, 검술에 달인이고 주사위 노름의 천재인 맹인 안마사 자토이치라는 주요 캐릭터만 남기고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겠다"는 의도를 인터뷰를 통해서 밝혔었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관객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지를 읽어내려면 그 줄거리가 아니라 그 스타일을 느껴야 할 것이다. "새로움에 대한 집착"

내용보다는 형식이, 줄거리보다는 표현방식을 중심에 놓는 변화는 그 무게 중심을 전통적인 관점에서 감독의 창조성으로 옮겨온다. 이런 창조적 해체와 재구성은 관객에게도 감상의 새로운 틈을 열어준다. 영화가 보여주려던 것보다는 관객이 느끼고 읽어내고 싶은 것이 중심에 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전통적 자토이치에 대한 해체가 오해가 아니라 창조이듯이 관객이 자유롭게 오해하는 것 역시 창조적 감상일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이 영화의 스타일에는 보여주는 대로 봐야했던 관객이 보고 싶은 대로 볼 수 있는 자유를 내포하고 있는게 아닐까? 그렇지 않아도 이미 그렇게 보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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