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이주의 책'을 골라놓는다. 지난해 마지막 '이주의 책'을 정수복의 <책에 대해 던지는 7가지 질문>(로도스, 2013)으로 마무리했으니 올해 시작도 책에 대한 책으로 골랐다. 강명관의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천년의상상, 2014)다. '조선의 책과 지식은 조선사회와 어떻게 만나고 헤어졌을까?'가 부제. 소개는 이렇다.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가 다루는 구체적인 질문들은 이것이다. 조선시대의 책의 인쇄와 유통 양상은 어떠했는가? 국가와 사회의 틀을 설계하고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책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지식인이 국가와 사회의 지배층이던 조선시대에는 어떤 방식으로 책이 유통되었는가? 발행하는 책은 어떻게 선별되었는가? 그것을 결정한 사람은 누구인가? 조선시대의 책값은 얼마였을까? 책값은 지식의 확산과 어떤 관계에 있었나? 책을 만드는 종이는 또 어떻게 생산되었는가? 중요한 서적의 탄생과 소멸은 어떠했는가? 즉 조선의 책과 지식생산의 문제를 둘러싸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주제를 망라하는 한편, 그 이면에 놓인 '지식'과 '체제' 문제를 본격적으로 파고들어간다. 이러한 문화적 탐사를 통해 조선시대 책의 역사를 구성함으로써 조선시대의 역사를 새롭게 읽어내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책에 관한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 책 한 권으로 해결할 수 있다니 미덥고 든든하다. 대답과 함께 새로운 질문도 이끌어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시작을 조선시대에 관한 책으로 끊었으니 나머지 네 권도 조선시대 최근 한달 사이에 나온 관련서로 채운다.

 

두번째 책은 전경목의 <고문서, 조선의 역사를 말하다>(휴머니스트, 2013)이다. 책은 두 주 전쯤 나왔지만 조선시대를 다룬 책이기에 이번 주에 같이 다룬다. '케케묵은 고문서 한 장으로 추척하는 조선의 일상사'란 부제가 내용을 어림하게 해주는 책. "저자는 아내의 재혼을 허락하는 남편의 수기 한 장, 노름빚 갚았다는 사실을 증빙해달라는 탄원서 한 장을 실마리 삼아 문서를 작성한 사람, 그가 속한 공동체, 당시 시대상을 추적하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마치 탐정이 추리를 하듯 관련된 인물과 사회적 네트워크 속에서 고문서를 깊이 읽고, 뒤집어 보고, 의심하는 해석 과정은 놀랍고 경이롭다. 이 해석이 찾아낸 이야기는 거대 역사 속에 가려진 조선의 일상을 한 장면 한 장면 복원한다.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대부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겪었던 이혼, 노름, 재산 분배 같은 소소한 일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책을 통한 시간여행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겠다.

 

 

세번째 책은 이덕일의 <정도전과 그의 시대>(옥당, 2014)다. <불씨잡변>(아카넷, 2013)이 재번역돼 나와서 정도전에 대해 다시 관심을 갖게 됐다고 얼마 전에 적었는데, '이덕일의 역사특강' 첫 권이 마침 정도전을 다룬다. "조선 개국의 이념과 조선 왕조 500년의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 그가 원한 세상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를 다시 생각해본다. 그리고 네번째 책은 한국국학진흥원의 교양총서로 나온 <500년 공동체를 움직인 유교의 힘>(글항아리, 2013)이다. "각 분야에서 유교를 연구해온 중진 연구자들이 수차례에 걸쳐 글을 발표하고 토론하고 수정하여 조선사회를 움직인 유교의 공동체 원리를 철학적·역사적·정치사회학적 차원에서 재조명했다." 나는 유교의 힘보다는 한계에 더 관심이 있지만, 유교의 힘을 말하는 행간에서 혹 그 한계를 찾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다섯번째 책은 박희병 교수가 엮은 <선인들의 공부법>(창비, 2013)이다. 1998년에 나온 책의 개정판이 15년만에 나왔다. "멀리 공자로부터 맹자·주자·이이·이황·최한기에 이르기까지 선인들의 깊은 사색과 체험에서 우러나온 공부에 관한 주옥 같은 명구들을 가려 뽑았다. 이 책은 일상생활의 언행,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 독서의 방법, 마음을 다스리는 법, 사물을 궁구하는 방법 등 세계와 우주 내의 모든 일이 공부의 대상이자 공부의 과정임을 조목조목 들려준다." 공부가 새해 결심인 이들에겐 '보감'이 될 만한 책이다...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조선의 책과 지식은 조선사회와 어떻게 만나고 헤어졌을까?
강명관 지음 / 천년의상상 / 2014년 1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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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8일 (수)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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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조선의 역사를 말하다- 케케묵은 고문서 한 장으로 추척하는 조선의 일상사
전경목 지음 / 휴머니스트 / 2013년 12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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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8일 (수)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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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과 그의 시대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4년 1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2014년 01월 03일에 저장
절판

500년 공동체를 움직인 유교의 힘
한형조 외 지음, 한국국학진흥원 기획 / 글항아리 / 2013년 12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540원(3% 적립)
2014년 01월 03일에 저장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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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러시아문학 강의>(현암사, 2014) 표지 최종판을 옮겨놓는다. 책은 어제 인쇄가 끝났고 오늘 제본에 들어갔을 듯싶다. 서점에서는 다음 주중이나 주말부터 구입이 가능하다고 들었다. 띠지 문구는 편집자가 고른 것이다. 책이 그런 걸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

14. 01.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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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첫 주의 '이주의 저자'를 고른다. 물론 책은 대부분 '작년'에 나온 것이다. 제일 먼저 다섯 권으로 기획된 '고종석 선집'의 첫 권으로 그의 단편소설을 묶은 <플루트의 골짜기>(알마, 2013)가 출간됐다.

 

 

 

"고종석은 그간 두 권의 단편소설집을 단행본으로 펴낸 바 있다. <제망매>(1997)와 <엘리아의 제야>(2003)가 그것이다. 두 단행본 모두 현재 절판 상태로 시중에서 만나볼 수 없다." 그러니 고종석의 고정 독자와 새내기 독자는 그의 소설들을 이 책을 통해서만 만나볼 수 있다. 사실 나는 <제망매>도 <엘리아의 제야>도 다 갖고 있지만 당장은 찾을 수가 없길래 요긴한 선집이다. 지난해 고종석은 개정판들 외에도 인터뷰집 <고종석의 낭만 미래>(곰, 2013)과 소설 <해피 패밀리>(문학동네, 2013)를 펴냈다. 전집성 선집을 묶기엔 일러 보이는 나이지만, 절필을 선언한 마당인지라 '정산'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차분하게.

 

 

다재다능한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도 그 둘째 권이 나왔다.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그 영화의 시간>(예담, 2014)이다.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그 영화의 비밀>(예담, 2009)을 좀 뜸을 들이다가 구입한 바 있는데, <필름 속을 걷다>(예담, 2007)처럼 따로 나오는 게 아니고 시리즈로 나오니 또 구색을 맞추지 않을 수 없다. 소개는 이렇다.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확고한 자신의 색깔을 지니고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한국 대표 영화감독 박찬욱, 최동훈, 이명세 감독과 나눈 특별한 인터뷰를 모은 책이다. 영화 속 대사들에서 끌어낸 질문을 통해 감독들의 삶과 작품세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보는 독특한 형식을 갖고 있는 이 책은 한 감독당 대여섯 번씩, 길게는 한 번에 열 시간씩 인터뷰한 결과, 원고지 약 3,000여 매에 달하는 방대한 양을 통해 어느 곳에서도 접할 수 없었던 깊고 내밀한 내용을 선보인다.

이른바 '심층 인터뷰'다. 언젠가 작가 김연수도 비슷한 말을 했는데, 이런 인터뷰 기획이 문학판에서도 이뤄지면 좋겠다는,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갖고 있다('장면'들이 약해서 재미 없으려나?). 참고로 2009년에 나온 <부메랑 인터뷰>에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홍상수, <마더>의 봉준호, <다찌마와 리>의 류승완, <쌍화점>의 유하,<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임순례, <가족의 탄생>의 김태용 등 현재 우리 영화계에서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고 있는 대표 감독들과의 인터뷰를 담았다."

 

  

 

프랑스의 철학자, 더 좁게는 현상학자 미셸 앙리의 <야만>(자음과모음, 2013)도 눈길을 끄는 책이다. 앙리의 책으론 <물질 현상학>(자음과모음, 2012), <육화, 살의 철학>(자음과모음, 2012)에 이어서 세번째로 나온 책. 주제로는 가장 흥미를 끈다. 그는 무엇을 야만이라고 보는가.

미셸 앙리에게 문화는 '삶의 자기 변화'이자 '자기 성취'다. 그리고 미셸 앙리는 우리 시대를 야만의 시대로 규정한다. 야만의 시대, 곧 우리 시대에 가능한 문화란 없다. 야만은 문화가 싹트기 전이 아닌 문화가 죽기 시작하는 바로 거기에 그 얼굴을 내민다. 야만에 관한 미셸 앙리의 진단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문화의 '폐허'로서 야만이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이미 빠르게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중 성형과 자살은 야만이 낳은 많은 폭력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으며, 자본과 기술 이데올로기에 잠식당한 '대학의 파괴'’를 예로 들 수 있다. 미셸 앙리에 따르면 모든 폭력의 기원에는 문화의 원천이자 야만의 원천으로서 삶의 본래적 에너지가 있다. 야만은 그 에너지의 제거가 아니다. 에너지의 억압이고 억압된 에너지의 방출로 이해된다. 미셸 앙리의 분석과 진단에서 더욱 놀라운 것은 근대 과학을 통한 삶의 배제가 종국에는 삶의 자기 부정이란 점이다.

 

자세한 건 책을 읽어봐야 알겠다. 다행히 크게 부담스럽진 않은 분량이다. 게다가 영어본도 나와 있어서 바로 주문해놓았다(2012년 여름에 나왔으니 한국어판과 별로 차이 나지 않는다).

 

이로써 소설과 영화와 철학, 3종 세트로 새해 첫주를 시작할 수 있게 됐다. 나쁘지 않다...

 

14. 0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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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발견'은 독일의 방송인이자 기자 후안 모레노의 <날것의 인생 매혹의 요리사>(반비, 2013)로 고른다. 제목이 말해주듯, 요리사들에 관한 책이다. '파격와 야성의 요리사 열전'이 부제. 식칼을 들고 있는 요리사의 모습만으로도 '포스'가 느껴지는 책.

 

 

독어 제목 'Teufelskoche'은 'Devil Cook'으로 옮겨진다. 악마의 요리사? 요리의 거장을 독일에선 그렇게도 부르나 보다. 번역본 표지는 원서의 표지를 그대로 따랐다.

 

저자 후안 모레노는 전 세계 곳곳에 있는, 세상에서 가장 독특한 이야기를 간직한 개성 넘치는 요리사들을 직접 찾아 나섰다. 미국,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나이지리아, 에티오피아, 우간다 등 나라와 국적을 불문하고 저자가 발굴한 요리사의 리스트는 화려하다. 텍사스 교도소에서 200명의 사형수에게 마지막 식사를 만들어준 요리사가 있는가 하면, 알프스의 두메산골에 있는 700년 된 게스트하우스에서 요리하는 할머니도 있고, 반핵 시위 현장을 찾아다니며 시위자들이 먹을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도 있다. 이들이 쏟아내는 이야기는 세상의 어느 화려한 요리보다도 더욱 흥미진진하다.(...) 이 책은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주방에서 최선의 음식을 만들어내는 요리사에 관한 책이자, 그들이 주방에서 완성해낸 인생의 깊이에 관한 책이다.

'요리책'과 마찬가지로 '요리사책'에도 사진은 빠질 수 없으며 책에 실린 건 미르코 탈리에르초가 찍은 사진들이다. 아쉽다면 아시아 쪽 요리사가 들어 있지 않은 것. 책에 등장하는 17인의 요리사가 모두 유럽과 미국, 그리고 아프리카의 요리사다.

 

 

 

책에 추천사를 쓴 성석제 작가의 <칼과 황홀>(문학동네, 2011)과 박찬일 셰프의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푸른숲, 2012), <어쨌든, 잇태리>(난다, 2011) 등으로 미진한 맛을 보충해도 좋겠다. 요리보다도 요리사들의 인생 이야기를 담은 책이 국내서로도 출간되길 기대해본다...

 

14. 0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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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시사IN(329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플라밍고의 미소>(현암사, 2013)가 출간된 걸 계기로 그의 자연학 에세이가 갖는 의의를 짚어봤다. 지면 기사에서는 자연학 에세이 가운데 여섯 번째로 출간된 책이라고 적었지만,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가 근간 예정인 걸 깜박했다. 정정하자면 다섯번째 책이다. 절판된 <판다의 엄지>도 조만간 나오길 기대한다.  

 

 

 

시사IN(14. 01. 04) 과학 글쓰기의 계관시인이 오다

 

진화생물학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스티븐 제이 굴드란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비록 국내에서 리처드 도킨스만큼은 독자층을 거느리고 있지 않을지라도 필력으로 따지면 결코 도킨스에 뒤지지 않는, 심지어 ‘과학 글쓰기의 계관시인’이란 평판까지 얻은 이가 하버드대학의 지질학 및 동물학 교수로 재직했던 굴드다.


‘스티븐 제이 굴드 자연학 에세이’ 선집의 하나로 출간된 <플라밍고의 미소>(현암사)는 지난해에 나온 <여덟 마리 새끼 돼지>와 마찬가지로 <내추럴 히스토리>에 연재한 에세이 모음집이다. 미국 자연사 박물관이 펴내는 이 월간지에 굴드는 무려 27년간 글을 연재했고 과학 에세이의 전범을 보여준 에세이 300여 편은 책 열 권으로 묶여서 차례로 출간됐다. <플라밍고의 미소>까지 포함하면 국내에는 이제 다섯 권이 번역됐다.  

 

 


개인적으로 제일 먼저 읽은 굴드의 책은 <다윈 이후>였는데, 바로 굴드의 자연학 에세이 가운데 첫째 권이었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눈먼 시계공>과 함께 다윈주의와 진화생물학에 눈을 뜨게 해준 책이다. 그 이후에는 자연스레 ‘굴드의 모든 책’이 수집과 독서의 대상이다. 둘째 권 <판다의 엄지>와 넷째 권 <플라밍고의 미소> 사이에 낀 셋째 권 <닭의 이빨과 말의 발가락>도 마저 번역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는 건 그 때문이다.

 

각각의 선집은 책을 묶은 시점과 관련해 통일된 주제가 관통한다. <플라밍고의 미소>의 경우에는 생명사의 패턴이 갖는 의미와 서구 사상에 만연한 편향에 대한 비판이다. 이를 포괄해서 굴드는 ‘역사의 본성’이 책의 주제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플라밍고의 미소>는 “생명은 우연적인 과거의 산물이지 시간을 초월하는 단순한 자연법칙의 불가피하고 예측 가능한 결과가 아니라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관한 책”이다.


굴드가 ‘서구의 편향’이라고 특별히 지목하는 건 '진보, 결정론, 점진주의, 적응주의'다. 이들 ‘4대 기수’에 대한 그의 비판은 때로 동료 진화생물학자들을 겨냥하기도 한다. 굴드는 전통적인 다윈주의 이론과는 다르게 진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단속적으로 갑작스럽게 일어난다는 ‘단속평형설’을 주창해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그가 평생 강조한 것은 진화가 진보를 뜻하는 건 아니며 진화의 역사는 우연에 지배된다는 사실이다. 사회진화론자가 아닌 이상 진화를 진보와 동일시하는 진화생물학자는 드물기에 굴드의 비판은 과도한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런 흠이 그의 에세이들이 주는 지적 즐거움을 만끽하는 데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굴드는 과학은 매혹적인 결론들의 목록이 아니라 결실이 많은 탐구의 한 방법으로 정의한다. 공룡의 멸종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세 가지 가설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고환설이다. 백악기 말에 지구의 기온이 상승하면서 공룡의 고환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돼 수컷이 생식력을 잃음으로써 공룡이 멸종했다는 설이다. 둘째는 약물설이다. 공룡시대 말기 속씨식물이 진화했고 이들 다수가 향정신성 물질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공룡의 간이 이를 해독시키지 못해 결국 약물 과다 복용으로 멸종했다는 설이다. 셋째는 많이 알려진 견해로 재난설이다. 약 6500만 년 전에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면서 생긴 먼지구름이 햇빛을 차단하는 바람에 공룡을 비롯한 수많은 생물이 멸종했다는 설이다. 모두 흥미를 끌기는 하지만 고환설과 약물설은 검증을 할 수 없는 반면에 재난설은 검증될 수 있고 반증도 가능하다. 유효한 과학적 가설로서의 자격요건이다. 그렇게 과학적 탐구의 과정을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도, 굴드의 자연학 에세이는 과학을 좋아하는 독자들의 훌륭한 수련장이다.

 

13. 0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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