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출간된 장 폴 브리겔리의 <불멸의 에로티스트, 사드>(해냄, 2006)는 사드의 독자라면 탐을 낼 만한 전기이다. 이미 모리스 르베의 전기가 <사랑, 자유 그리고 거짓말>(창, 2001)이란 제목으로 번역돼 있지만, 왠지 더 믿음이 가는 것은 브리겔리의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프랑스 혁명기 몰락귀족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은 데다 당대와 이후에 수많은 전기 작가들에 의해 왜곡된 사드의 일생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했"는데, "1부에서 사드의 일대기를, 2부에서는 사드가 영향을 미친 분야와 그 기록들을 담았다. 58컷의 도판과 함께 바타이유, 보들레르, 바르트 등의 사드 연구 저작들이 수록되었다."

스튜어트 후드의 <사드>(김영사, 2005)와 함께, 그리고 기네스 기비 감독의 영화 <사드>(1996)와 함께 마르키 드 사드 후작의 세계를 여행하기 위한 지도이자 매뉴얼로서 갖춰둘 만한 책이다. 아직 재정형편상 구해놓지 못했는데, 마침 오마이뉴스(06. 05. 26)에 자세한 서평이 게재되었기에 옮겨다놓고 '예고편'으로 읽어보도록 한다. 필자는 지용진 기자이며, 타이틀은 "탐미주의자? 자유주의자? '사드'를 다시 보자"이다.

-이탈리아 감독 빠졸리니(*파졸리니 혹은 파솔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일>은 불쾌할 정도로 적나라하다(*오래전에 영화 전공자로부터 빌려본 적이 있는데, 요즘은 영화를 구해보는 일이 어렵지 않을 듯하다). 영화는 거친 영상을 통해 사도마조히즘의 직접적인 재현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현실 자체를 무마시킬 정도로 뇌를 얼얼하게 만든다. 영화에 녹아있는 사디즘의 정의(定義)는 가학과 피학의 ‘관계의 권력’을 통해 규정되면서 복종의 미학을 정당화시킨다. 사도마조히즘은 그렇게 (어떤 의미에서는) 역겨운 대상으로만 기능하고, 그 의미는 제한된 영역에서만 발휘된다.

 

 

 

 


-우리가 소비하는 사디즘의 실체는 무엇일까?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채 비정상적인 행위에 의한 쾌락과 음탕함 그리고 강제적인 유린을 추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본질을 벗어난 그야말로 편의적인 접근이다. ‘쾌락과 불쾌’의 단순한 구도 안에 ‘사디즘’의 의미를 가둬두는 것은 그래서 옳지 못하다.

-<불멸의 에로티스트, 사드>(장 폴 브리겔리 지음 / 성귀수 옮김)는 그러한 박제된 통념을 거두기 위해 인간 사드(1740∼1814)의 인생을 장황하게 서술했다. 사드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부터 사랑통 정신병원에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의 시간을 객관적인 자료와 역사적 근거를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630페이지에 육박하는 이 긴 서적에서 느껴지는 방대함은 사드에 의한, 사드를 위한, 사드의 이야기로 촘촘히 매워져 스펙터클 함마저 감돈다. ‘집대성’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되는 이유다.

-크게 2개의 카테고리로 분류된 이 책은 제 1부에서는 그의 불꽃같은 인생을 다뤘고, 제 2부에서는 균형 있는 시각에 근거해 그를 에워싼 통설을 세세히 드러냈다.

-수많은 정부(情婦)를 둔 외교관 아버지와 폭군의 노리갯감이 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 아래서 사드는 아버지의 성적 괴벽이 적힌 일기를 보며 성장했다. 어린 시절 그의 의식을 점령한 성(性)은 그로테스하게 변질되면서 애초부터 정상적인 성적 의식을 형성할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아버지에 의한 강제 정략결혼으로 인해 사드는 ‘사랑’이란 감정을 싹 틔우기 전에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그 ‘사랑’의 본질을 오늘날 우리가 멋대로 해석하는 ‘사디즘’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사드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면 어린 시절은 ‘불행’으로 점철된 시기였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영역에 한해서만 유효하다. 그의 불행을 밖으로 끄집어내 재해석하고 의미를 갖다 붙이는 것은 결론을 미리 고정시켜 놓고 이유를 들이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실패한 사랑과 그에 이은 정략결혼. 사드는 점점 알 수 없는 혼란에 침잠하게 되면서 그 안에 잠재돼 있던 성욕과 변태성을 긍정하기 시작한다. 젊은 시절 광란한 방탕함과 예수상(像) 모독으로 감옥에 가게 된 사드는 아버지가 남긴 원고를 꼼꼼히 읽으며 자신만의 세상을 조금씩 갖춰가면서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분야에서 인용되는 인물로 거듭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아버지에 대한 사드의 기억이다. 그는 억압과 괴벽의 아버지를 분노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애정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신화화를 이룩해냈다. 반면, 그의 작품 속에 드러난 것처럼 어머니에 대한 평가는 관대하지 못하다. 이른바 전복(顚覆)된 오이디푸스를 반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다양한 저서를 활용해 이를 입증하면서 사드의 삶에 관해 철저히 객관적으로 접근한다. 이 책의 의도가 바로 객관성에 근거한 ‘사드읽기’라는 점을 헤아린다면 저자의 자료수집과 인용이 얼마나 절실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사드(Sade)’의 인생을 책 속에 옮겨와 그를 둘러싼 여러 가지 오해의 매듭을 하나씩 풀어가지만 의도를 강요하거나 인위적인 결론을 맺지 않는다. 다만 수백 년 간 누적된 거대한 담론을 제시하면서 천재로 살다간 한 인간의 파란만장했던 삶 자체에 무게를 둔다.

-인류의 역사에서 사드 만큼이나 포괄적으로 인용되는 인물도 드물다. 종교, 풍습, 철학, 예술 심지어 정치까지도 ‘사드’를 안으로 끌어들여 고정된 영역 안에서 재활용시키며 번식시켰다. 문제는 하나의 통일된 개념적 활용이 아니라 각각의 분야에서 차별적으로 해석됐다는 데 있다. 사드의 불행은 여기서 출발한다. 그를 경배의 대상으로 삼은 추종자들은 자신의 영역에 맞게 사드를 활용했다. 하나의 사드가 여러 의미로 분열돼 다양한 색깔을 지니게 된 것. 저자가 가장 무게를 두고 이야기하는 문제점이다. 사드는 악마적인 천재였다. 동시대에서는 미처 포용 할 수 없을 정도로 사악하게 비쳐졌지만 그가 후세에 끼친 정신적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자연의 정상상태로서의 사디즘은 ‘도착적인 자연주의’를 표방하지만 동시에 자연주의 문제 안에 머무름으로써 자연에 기댄다. 자연을 부정하면서 자연의 이름으로 사회의 인위성을 부정하는 이러한 모순구조는 ‘사드’라는 개념을 더 모호하게 만든다. 이렇듯‘사드’의 모호성은 그를 종교로 삼는 탕아들에게는 그 자체로 매혹적이었다. 이제는 하나의 개념이 돼버린 ‘사드’의 전설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프랑스 대혁명 동안, 무차별적인 살인과 폭동을 목격한 사드는 인간에 내재한 폭력성에 대해 고찰한다. 그는 인간에게는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폭력적 성향이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탐구하게 되고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정당화한다. 이후 나폴레옹 시절에는 반혁명분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남은 일생을 사랑통 정신병원에서 보내게 되면서 <쥘리에트> 등의 불후의 명저를 남긴다.

-사드를 거론하는 것은 음담패설에서는 유용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저자는 왜곡된 사디즘에 경도된 나머지 전체를 보지 않고 작위적인 해석을 강제로 주입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저자가 <사드>에 천착하는 목적은 ‘바로 알리기’다. 저자의 전방위적인 탐구는 사드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과 맞물리면서 진정성으로 독자들을 포섭한다. 다분히 다큐멘터리 적인 시각에서 그의 인생을 쫓으며 ‘사드’의 오용(誤用)을 걱정하는 저자의 노력이 눈부신 건 일차적으로는 방대한 분량에 있겠고, 그 다음으로는 진정성을 들 수 있다. 지면 곳곳에 묻어 있는 저자의 어법은 사드에 대한 몰이해의 실태를 지적하면서 동시에 안타까움이 스며있기 때문에 와 닿는다.



-사드의 실험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근원적인 자각이었다는 사실은 스스로 내린 정의에 의해 타당성을 인정받는다. “인간은 혼자이고, 악은 필연적으로 만연한다.”소름끼치도록 자기 희열에 충실했던 한 인간의 고뇌는 절대본능을 추구한 방탕한 탐미주의자인가? 욕망의 충족을 선도한 희대의 성적 자유자인가? 선택은 온전히 ‘사드’를 읽는 독자의 관점에서 갈린다.

06. 0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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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9 12: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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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06. 05. 27)에 게재된 김학이 교수(동아대)의 문화비평을 옮겨온다. 타이틀이 '자학은 자만보다 진실되다'이고, '과거의 청산과 이해?'과 부제이다. 지젝의 논의를 끌어오고 있기에 '로쟈의 지젝' 카테고리로 분류해 넣었다. 강조와 군말은 나의 것이다.

-과거청산에 대한 논의가 되풀이되고 있다. 얼마 전 교수신문에서도 학진지원사업에 대한 평가와 맞물려 이 문제가 논의된 바 있다. 과거를 대면하는 방식이 거듭해서 논해지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입증해주는 반가운 현상이다. 물론 역사가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어느 역사가는 정부가 지원하는 과거청산 작업에 정치성이 개입되는 것을 경계하고, 다른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에 대한 엄밀한 확증과 이에 따른 상징 차원의 조치들을 주장하기도 하며, 또 다른 역사가는 과거 사실의 규명이 과거에 대한 내면적 성찰로 이어지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과거청산의 방법에서는 의견이 서로 다른 역사가들이, 과거청산의 목표에서는 똑같은 입장을 취한다는 점이다. 상처의 치유와 사회적 화해가 그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상처 치유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정신분석학자의 말을 들어보자. 슬라보예 지젝은 영화에서 홀로코스트가 표현되는 양상을 분석한 적이 있다. 두 가지 유형이 구분된다. 하나는 홀로코스트라는 절대악 속에서도 인간적 가치가 견지되는 비극적 양상을 그려내는 영화들이다. 반드시 비극적이지는 않지만 그 대표적인 경우가 스필버그의 <쉰들러의 리스트>이다. 다른 하나는 그 절대악에 희극적으로 접근하는 영화들이다.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가 대표적인 경우로, 그 영화에서 아버지는 수용소의 현실을 놀이로 변형시키고, 그렇게 아들을 구한다. 물론 비극이 첨가된다. 아들은 생존하지만 아버지는 죽는다. 지젝은 덧붙인다. 베니니가 일관성을 유지했다면, 다가오는 미군 탱크가 아이를 나치 저격수로 오인하여 사살하도록 했을 것이라고.

-지젝이 주목한 것은 그러나 비극과 희극의 피안에 있던 사람들이다. 나치 수용소에는 당시 “무젤만(Muselmann)”으로 불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말하자면 영화 <소피의 선택>에서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모두를 죽이겠다는 나치의 협박에 직면하여, 딸을 죽도록 하고 아들을 살린 소피 같은 이가 바로 그런 존재이다. 무젤만은 삶의 이유가 남김없이 파괴된, 먹고 마시는 것이 허기와 갈증과 무관하게 그저 맹목적인 습관에서 이루어지는, 사람 아닌 사람, 그야말로 “인간의 영도(零度)”이다.

-무젤만은 미학화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를 희극으로 표현하면 비극이 되어버리고, 비극으로 표현하면 희극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듯 미학화가 실패하는 존재는 인간의 상징질서의 피안에 있는 존재다. 언제나 그렇듯 지젝은 여기에서도 라캉의 “실재(the real)”을 발견한다. 실재는 치유의 대상이 아니다. 치유란 과거를 기성의 상징질서에 포섭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실재는 오히려 새로운 상징질서를 구성해내기 위한 초석으로 삼아야 할 그런 어떤 것이다. 실재는 사회적 화해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사회에 난 구멍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어두운 과거에 “무젤만”이 득실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비교와 적용은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특정한 과거가 현재에 유의미해지기 위해서는 그 과거를 현재의 기성 가치 속에 통합시키는 작업에 멈추어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과거는 새로운 미래를 위한 초석이 될 때 비로소 유의미한 것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를 치유와 화해의 통로로만 삼아서는 안 된다. 치유와 화해는 오히려 과거를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작업 과정의 출발점으로 삼을 때, 그 과정의 부산물로 얻어지는 것일지 모른다.

 

 

 

 

-치유와 화해를 과거청산의 목표로 삼는 순간, 기억의 적절한 정도와 가해자와 피해자의 엄격한 구분이 문제로 부상할 수밖에 없다. 이는 과거청산을 새로운 갈등의 원인으로 만들어버린다. 막말로 그렇다. 피해자는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가해자인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다. 모두가 가해자는 아니라고? 맞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실재”와 연관된다. 자학이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학은 자만보다 얼마나 더 진실된가.(*필자의 주장이 단평이 아닌 책 한권, 적어도 논문 한편 정도의 분량을 얻었으면 좋겠다.)   

06. 0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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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세계적인 안무가 보리스 에이프만의 내한공연이 내주에 예정돼 있다. 이런저런 형편상 아쉽게도 공연을 관람하지 못할 듯하지만, 관련기사 정도는 옮겨다 놓는다.

한국일보(06. 05. 16) 2001, 2002년 내한공연에서 기립박수를 받았던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이 다시 온다. 최근작 ‘돈 주앙과 몰리에르’(2001년 작), ‘ Who’s Who’(2003년 작), 관객 설문조사에서 다시 보고 싶은 작품 1위로 꼽힌 ‘차이코프스키’(1993년 작)로 25, 26일 대전 문화예술의 전당과 30일~6월4일 서울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한다.



-보리스 에이프만(60)은 오늘날 가장 성공한 러시아 안무가이자 현대 발레의 거장이다. 러시아의 방대한 문화유산을 뿌리 삼고, 고전발레의 테크닉과 현대무용의 표현력을 결합한 그의 작품은 문학성과 철학성이 두드러진다. 두 차례 내한 무대에서 선보였던 ‘붉은 지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차이코프스키’ ‘러시안 햄릿’ ‘돈키호테’ 는 대문호의 걸작이나 예술가의 삶을 춤으로 옮긴 것이었다. 극적인 구성과 웅장하고 박진감 넘치는 군무, 문학적 향기와 철학적 깊이는 무용을 처음 보는 관객들까지 단번에 팬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번에 갖고 오는 세 편 중 ‘돈 주앙과 몰리에르’는 17세기 프랑스 희곡작가 몰리에르와 그의 대표작 속 주인공 돈 주앙을 나란히 대비시켜 예술가의 삶, 특히 창조자로서 겪는 고뇌와 투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희대의 바람둥이 돈 주앙과, 스무 살 연하의 어린 아내 때문에 늘 질투하고 괴로워했던 몰리에르의 삶이 대조를 이루며 장대한 철학적 드라마를 연출한다.

-‘Who’s Who’는 에이프만의 기존 작품과는 많이 다르다. 러시아혁명 이후 예술적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간 러시아 발레 댄서의 이야기다. 갱단과 나이트클럽이 있는 1920년대 뉴욕의 뒷골목을 배경으로 재즈와 스윙 음악, 쇼걸, 탭 댄스와 재즈 댄스, 서커스 등 화려하고 다채로운 볼거리로 ‘발레 뮤지컬’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차이코프스키’는 예술가로서, 또 동성애자로서 내면의 분열을 겪었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의 극명한 초상이다. 2001년 내한 무대에서 이 작품을 본 관객들에게 차이코프스키와 그의 분신의 격렬한 2인무는 잊지 못할 장면으로 남아있다.

세계일보(06. 05. 23) 보리스 에이프만(60·사진)이 왔다. 옛 소련 시절 예술가 최고 영예인 ‘러시아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은 러시아 안무가 보리스 에이프만이 4년 만에 다시 LG아트센터를 찾는다. 수차례 내한 공연으로 국내에도 상당수의 팬을 확보한 그는 그동안 끊임없이 앙코르 공연 요청을 받아왔다. 이번에는 ‘돈 주앙과 몰리에르’(30, 31일 오후 8시) ‘차이콥스키―미스터리한 삶과 죽음’(6월 1, 2일 오후 8시) ‘후스 후’(Who’s Who·3일 오후 7시, 4일 오후 3시)를 연속 감상할 수 있다. 서울에 앞서 대전(25, 26일) 전주(27일)에서도 공연이 있다.

 

 

 

 

 

 



-‘돈 주앙과 몰리에르’(2001년 초연) ‘후스 후’(2003년)는 한국 초연작. ‘차이콥스키…’(1993년)는 LG아트센터 설문조사에서 ‘다시 보고 싶은 작품’ 1위로 뽑힌 걸작이다. 내한 공연에서 이미 보여주었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붉은 지젤’ ‘러시안 햄릿’ ‘돈키호테' 등에서처럼 에이프만의 작품들은 대개 극적인 구성, 웅장하고 박진감 넘치는 군무, 드높은 문학적 향기, 폭넓은 예술세계가 담겨 있어 당당히 자기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돈 주앙과 몰리에르’는 늘 고뇌에 시달렸던 천재 작가 몰리에르가 희대의 바람둥이 돈 주앙을 주인공으로 작품을 써 나가면서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 하는 생각을 표현한 것이다. 현실과 환상 속에서 상반되는 두 인물의 모습이 시시각각 대조되고 교차한다.

-‘차이콥스키…’는 이 위대한 작곡가의 창작과 고뇌, 그리고 내적 갈등의 요인이자 창조력의 원천이었던 동성연애자로서의 욕망이 그와 분신 간의 대립을 통해 긴장감 넘치게 표출된다. 차이콥스키의 음악 만큼이나 극적이라는 평을 받은 이 작품에서 차이콥스키는 10분의 9는 고통으로, 나머지 10분의 1은 천재성으로 채워진 인물로 묘사된다.

-‘후스 후’는 마릴린 먼로 주연의 코미디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의 줄거리를 차용한 작품.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예술적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이주한 러시아 무용가들의 아메리칸 드림을 그린다. 1920년대 뉴욕 뒷골목의 모습과 다양한 춤을 보여주며 듀크 엘링턴의 익숙한 재즈 넘버들, 루이스 프리마의 스윙 음악이 귀를 즐겁게 한다.

-77년 자신의 발레단을 창단한 보리스 에이프만은 방대한 러시아의 문화유산을 뿌리로 하여 고전발레의 테크닉과 현대무용의 표현력을 결합하는 혁신적인 방식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우리 무용단에서 10년 일찍 시작됐다”, “이제 곧 나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라는 선언만큼이나 혁신적이고 대담한 그의 현대발레 작품은 러시아에서는 물론 뉴욕, 파리 등 서방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06. 0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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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미처 다루지 못한 책들을 마저 다루기로 한다. 어느새 '가정의 달'도 다 지나가버렸는데, 지난 토요일에는 아이의 유치원에서 준비한 '가족의 날' 행사가 우천으로 취소되는 바람에(우리 가족은 아침, 점심을 김밥으로 때웠다) 본의 아니게(!) 번듯하게 아이에게 뭐 하나 해준 것 없이 보내게 되어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걸 좀 만회하기 위해서 제일 처음 고른 책은 아동 정신분석에 관한 것이다(이게 아이가 좋아할 만한 책인가?). 

 

 

 

 

프랑스의 저명한 정신분석가 프랑수아즈 돌토의 <도미니크 이야기>(동문선, 2006)이 그것인데, 그녀에 관한 전기 <프랑수아즈 돌토>(도서출판 숲, 2003)는 이전에 한번 소개한 바 있다(돌토에 관한 보다 간랸한 설명은 <위대한 7인의 정신분석가>(백의, 1999)를 참조할 수 있다). 그리고 알고보니 그 사이에 돌토의 책이 몇 권 더 출간되었다. 한데, 기독교에 관한 책 두 권을 빼면, <어린이는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도서출판 숲, 2004)가 <도미니크 이야기>와 함께 아동 정신분석에 관한 책으로 분류될 수 있겠다(그 책에 주목하지 못했던 것은 내가 '부재중'에 출간된 탓이다).

해서, 이 세 권 정도를 좀 읽어주는 계획도 세워봄 직하다. 아이가 당장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지는 않는다손 치더라도 아이에게 무관심했던 부모라면 한번쯤 읽어보면서 자기반성의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더불어, 아이들을 좀더 섬세하게 관찰하고 이해할 수 있는 '습관'을 기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두번째 책은 스티븐 컨의 <사랑의 문화사>(말글빛냄, 2006)이다. 원제는 'The Culture of Love'(1992)인데, '빅토리아 시대부터 현대까지'란 부제를 달고 있기에 '사랑의 문화'가 됐다.  일단 책이 눈에 띄는 건 (번역서라 좀 부풀려졌다 하더라도) 768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 그리고 저자가 이미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 1880~1918>, <문학과 예술의 문화사 1840~1900> 등 인상깊은 문화사 서적을 써낸" 전력을 갖고 있기에 신뢰할 만하다는 것. 문화사 방면으론 '서양 문화사 500년'이라는 큼직한 부제를 달고 있는 자크 버전의 <새벽에서 황혼까지 1500-2000)도 눈에 띄는 신간이다. 두 권 합해서 1,500쪽이 넘는다. 하긴 500년의 문화사를 정리한다고 하니까 그만한 분량은 필요했을 법하다. 스티븐 컨의 책들과 함께 '교양 문화사 사전' 정도의 쓰임을 가질 수 있다. 

책은 "빅토리아 시대부터 현대까지 여러 문학 작품과 예술 작품에 나타나는 사랑의 역사를 추적해 본다. 정확히는 <제인 에어>가 출간된 1847년부터 <채털리 부인의 연인>의 1934년까지 87년간의 시기를 무대로 삼고 있다. 기다림을 시작으로 만남, 사랑의 언어, 입맞춤, 질투, 결혼식을 거쳐 종말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하면서 마주치는 기본 요소들을 키워드로 삼고, 이러한 특정한 상황이 문학/예술 작품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살펴보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당장은 특별히 사랑할 사람이 없는 이들도 애완견 돌보는 시간을 쪼개서 한번쯤 읽어볼 만하겠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1500년 서양사를 네 가지 혁명으로 구분한다. 종교혁명과 군주혁명, 자유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이 그것. 책은 각 부마다 각 혁명이 일으킨 인간관의 변화가 문화사를 이끌어온 원동력임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르네상스·바로크 미술·낭만주의·사실주의·모더니즘 등의 예술 사조와 마키아벨리와 스위프트·바흐와 모차르트 등의 세기를 주름잡은 인물들이 다채롭게 묘사된다. 지은이는 500년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인간의 욕망, 즉 인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의 문제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욕망의 요소로 해방, 개인주의, 원시주의, 추상, 분석, 세속주의, 과학만능주의 등의 키워드를 든다. 그래서 이 책이 풀어내는 서양 문화사는 이들 요소의 다양한 비율에 따른 배합 결과이다." 그러니까 단순한 '통사'는 아니고 그걸 저자 나름대로 꿰는 틀을 갖고 있다는 얘기이다.

 
 
 
 
 
 
 

세번째 책은 히틀러를 사랑한 여인, 혹은 히틀러가 사랑했던 여인, 어느쪽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20세기 최고의 다큐멘터리 감독이란 평과 나치의 핀업걸이라는 혹평이 교차하는 걸출한 여성 감독 겸 사진작가 레니 리펜슈탈(1902-2003)의 전기,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마티, 2006)이다. 650쪽 정도 되니까 이 또한 전기로서 듬직하다.

사실은 나도 수잔 손택의 <우울한 열정>을 통해서 리펜슈탈을 알게 됐을 만큼 별로 주목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만들었나는 기록영화의 목록들은 '아!'라는 감탄사를 자연스레 유도한다(그녀의 영화는 <죽기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에 포함돼 있으며, '미디어미학'의 중요한 탐구 대상이다). 알라딘에 전기에 관한 소개가 생략돼 있기에, 간단히 사전적인 인물 소개를 옮겨온다.

-나치 운동을 힘차고 화려하게 극화한 1930년대 기록영화로 유명하다. 베를린에서 그림과 발레를 배웠고 1923~26년 유럽순회 무용공연을 가졌다. 자연, 특히 산악의 경관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독일영화의 한 형태인 '산악영화'에 출연하면서 영화와 관련을 맺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 방면의 영화감독이 되었다. 1931년 레니리펜슈탈영화사를 만들었고, 1932년 <푸른 불빛 Das blaue Licht>의 각본을 쓰고 감독·제작·주연을 맡았다.

 

 

-나치당의 지원을 받아 신체의 아름다움과 아리안족의 우월성을 찬양하는 영화들을 감독했다. <신념의 승리 Sieg des Glaubens>(1933)는 아돌프 히틀러가 주문해 제작한 단편 영화이며 <의지의 승리 Triumph des Willens>는 1934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 전당대회를 주의깊게 관찰한 중요한 기록영화로서 나치당의 결속을 강조하고 독일민족에게 당의 지도자들을 소개했으며 나치의 힘을 세계에 과시했다. 그리고 <올림픽 경기 Olympische Spiele>(1938)는 1936년에 열린 올림픽 경기를 <민족의 축제 Fest der Völker>와 <아름다움의 축제 Fast der Schönheit>라는 2부로 편성해 영화화한 것으로 스튜디오에서 만든 감명깊은 음악과 음향효과를 만들어 찬사를 받았다.
 
-리펜슈탈의 영화는 풍부한 음향 효과, 뛰어난 편집, 새벽의 아름다운 정경이나 산악지대, 독일의 전원생활 등을 영화에 아름답게 담아냈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녀가 만든 영화가 나치를 돕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뒤 블랙리스트에 올랐지만 나치와의 전쟁공범죄가 공식적으로 씻겨진 뒤인 1952년 다시 영화에 복귀하여 일찍이 전쟁 때문에 제작을 중단했던 영화 <저지대 Tiefland>를 완성했다. 1973년 그녀의 아프리카 사진집 <누바족의 최후 Die Nuba>가 출간되었다.(*손택의 리페슈탈론은 이 사진집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책에 대한 동아일보(06. 05. 27) 이기우 기자의 리뷰.

-그녀는 언제나 흰옷을 입고 있었다. 어디에 있든 바로 눈에 띄었다. 정열적이었고 자신감에 넘쳤다. 도도함과 오만함은 그녀의 성격이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을 원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했다. 화려한 외모로 거장들을 ‘손에 넣었다’. 요제프 괴벨스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그녀의 작업에는 수상한 냄새가 난다….”

-당시 독일 여자들은 나치의 규율에 따라 비스마르크가 격찬한 3K, 아이(Kinder) 교회(Kirche) 부엌(K¨uche)에 만족해야 했으나 그녀만은 예외였다. 사전 약속 없이도 히틀러를 둘러싼 두꺼운 호위망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녀와 히틀러는 둘 다 몽상가였다. 신화를 사랑했다. 둘은 의기투합했다. 그리고 마침내 전쟁이 끝났을 때, 히틀러를 지지하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을 때 그녀만은 법정에서 이렇게 외친다. “나는 히틀러를 믿었어요. 마음대로 하세요! 날 죽여요!”

-이 책은 극단의 세기였던 20세기를 ‘금지된 열정’으로 살았던 레니 리펜슈탈의 일대기다. 유망한 무용가이자 매혹적인 영화배우였고 20세기 최고의 천재감독이었던 여인, 그러나 ‘악마(히틀러)의 감독’이자 ‘나치 핀업걸’로 기억되는 한 여인의 처연한 삶의 초상이다. 리펜슈탈이 히틀러의 요청으로 만든 베를린 올림픽 다큐멘터리 영화는 20세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낭만적인 동시에 서사적이고, 신비로우면서도 현실감 넘치는 이 영화는 당시의 카메라 기술로 촬영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다.

-영화비평가들은 신음하듯 뱉었다. “서정의 적(敵)으로부터 나온 이 서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리펜슈탈은 영화를 통해서 정말 히틀러의 사악한 제국을 선전했는가? 그녀의 예술적 삶을 ‘우울한 열정’이라고 표현했던 수전 손택은 그녀의 다큐멘터리가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저항할 수 없는 지도자에 대한 숭배를 통해 육체와 공동체의 재탄생을 찬양하고 있다며 ‘파시스트 미학’이라고 규정했다(*손택은 <올림픽 경기>와 <누마족> 사이의 '연속성'을 지적한다). 리펜슈탈은 전쟁이 끝난 뒤 법정에서 “처벌할 수 있는 범죄가 없다”는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고독하게 버려진다. 그녀는 비공식적인 블랙리스트에 올려졌고 다시는 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



-물론 그녀의 책임도 있었다. 리펜슈탈은 존재 자체가 너무나 현란해서 그녀의 등장은 마치 파시스트의 악령이 되살아온 것과 같았다. 자신을 비난하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는 와중에 열린 재판정에 그녀는 몸에 착 달라붙는 관능적인 승마복에 굽이 15cm가 넘는 샌들을 신고 요염하게 걸어 들어서기 일쑤였다. 그녀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온건한 견해가 불가능했다. 끔찍하거나 위대하거나! 천재이거나 악마이거나!

-그녀는 정치적으로 순진했다. 아니, 백치였다. 그녀의 삶을 좇으며 시종 그녀에 대해, 인간의 나약함에 대해 진한 연민을 드러내온 저자는 독백하듯 읊조린다. “그 광란의 파시즘 시대에 정치적 무지야말로 가장 큰 범죄는 아니었을까….”

해서 파시즘 미학을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서도 그녀의 전기는 일독의 가치를 충분히 갖는다(파시즘의 '우울한 열정'은 '원시적 열정'이기도 하다는 그녀는 생생하게 보여주는 게 아닐까? 그녀가 갖고 있었던 건 '정치적 무지'가 아니라 그러한 '정치적 무의식'으로서의 '정치적 예지'가 아니었을까?). 

 
 
 
 
 
 

 

네번째 책은 '세계화 시대 라틴 아메리카 영화'를 다룬 임호준의 <시네마, 슬픈 대륙을 품다>(현실문화연구, 2006)이다. 영화의 변방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활기차고 진보적인 영화운동의 산지, 라틴 아메리카의 영화에 대해서 이만한 규모로 다룬 책이 더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도 일단 주목에 값하는 책. 소개에 따르면, "세계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1950년대 중반 신영화운동 이후, 독창적인 미학으로 치열하게 현실을 담아내 온 라틴아메리카 영화에 대한 안내서. 현대라틴아메리카영화의 화제작들을 총망라하여 그 속에 담긴 사회적 무의식을 추적했다."



조금 부연하면, "브라질, 멕시코, 쿠바, 아르헨티나, 칠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등 라틴아메리카 영화 60여 편에 대한 소개와 130여 장의 사진이 함께 실려 있다. <루시아>, <오피셜 스토리>,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이 투 마마>,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등 각각의 영화들이 나오게 된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상황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책의 표지로 사용되고 있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이미지처럼, 영화를 타고 가는 라틴 아메리카 대륙 일주기 정도로 생각하면 좋겠다. 가는 김에 라틴 아메리카에 관한 책 몇 권도 같이 끼고 가면 더 좋을 듯.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아이리스 장의 난징대학살에 관한 기록 <역사는 힘 있는 자가 쓰는가>(미다스북스, 2006)이다. 이전에 <난징대학살>(이끌리오, 1999)로 한번 출간된 적이 있는데,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듯하다. 아무튼 새로이 출간된 이 끔찍한 기록을 나는 바로 주문해서 입수했지만 두 달이 지난 지금도 펼쳐보지 못하고 있다(이 거리낌은 이 페이퍼가 늦춰지는 데도 한몫했다). 해서 일단은 동아일보 김희경 기자의 리뷰를 옮겨놓는다.

동아일보(06. 05. 20) 1937년 12월 중국 난징(南京)은 ‘살아 있음이 불길하게만 여겨지는 곳’이었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7주간 학살한 중국인은 26만∼35만 명. 눕혀 놓으면 난징에서 항저우(杭州)까지 35km나 이어질 숫자이고 위로 쌓는다면 빌딩 74층 높이다. 더 끔찍한 것은 일본군이 희생자들에게 최대한의 고통과 수치를 주면서 학살했다는 사실이다. 남성은 총검술 연습, 목 베기 시합의 대상이었고 2만 명이 넘는 여성이 강간당했다. 중국계 미국인으로 다큐멘터리 작가인 저자는 1997년 이 책을 펴낸 뒤 일본 우익세력의 끝없는 협박으로 우울증에 시달리다 2004년 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난징 대학살이 규모와 잔혹함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2차 대전 후의 냉전적 상황 때문이다. 미국은 소련에 맞서기 위해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이어갔고, 일본은 다른 패전국이 받은 조사를 피할 수 있었다. 중국과 대만은 일본과 교역 물꼬를 트려고 경쟁하느라 전쟁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일본 역시 자신의 과거와 대면하기를 거부했다.



-책에 실린 사진과 학살의 사실적 묘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참혹하다. 그러나 이 책의 장점은 실상을 알리는 것을 뛰어넘어 처참한 사건을 통해 드러난 인간의 본성과 아이러니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일본의 만행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추적하면서 인간의 문명이 얼마나 종잇장처럼 얇은지, 권력이 얼마나 쉽게 10대 소년들의 천성을 변질시켜 살인 병기로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나는 이러한 야만성이 '그들'만의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과연 우리는 절대적인 무능력/불가항력에 처해 있는 타자를 학대/살해하는 대신에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반복하자면, 우리의 문명이란 얼마나 얇은 것인가!).

-드라마틱한 사람들의 인생 유전도 책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다. 난징에서 중국인을 살리기 위해 헌신했던 ‘중국의 오스카 쉰들러’ 욘 라베는 난징의 나치당 리더였다. 그는 독일에 돌아가 난징의 실상을 알리다 게슈타포에게 체포됐고 전후에는 나치 전력 조사를 받으며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로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난징 대학살은 내년이면 70주년을 맞는다(*나는 책을 내년쯤에나 읽어야겠다). 저자가 책을 쓰는 동안 마음 깊이 새겨 두었다는 경고는 이 책의 존재 이유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과거를 되풀이한다.”

평범한 인간들의 비범한 잔악성을 상기시켜주는 책으로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 루돌프 헤스의 회고록이 있다. 한국일보의 리뷰를 옮겨온다.

한국일보(06. 05. 20) 헤스의 고백록 "나는 악마가 아니였다"

-헝가리 40만명, 프랑스 11만명, 네덜란드 9만5,000명, 슬로바키아 9만명…. 아우슈비츠 소장 루돌프 헤스(1940~1947)가 기억하는 학살 유대인 숫자다. 그러나 “나 자신은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죽었는지 알지 못하며 심지어 어림짐작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한 것을 보면 그가 죽인 유대인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실제 1940년 5월부터 나치가 망할 때까지 살인공장 아우슈비츠에서 죽어 나간 유대인, 소련군 포로, 집시 등은 250만명을 넘는다. 그러니 아우슈비츠를 만들고 가스 살상법을 개발해 집행한 헤스를 악마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가 남긴<헤스의 고백록>을 읽으면 그는 악마 같지가 않다. 정신 이상자도, 성격 파탄자도 아니다. 어려서는 아버지로부터 누구에게라도 정중하게 대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간호사와 나눈 첫사랑은 전 생애에 걸쳐 그를 인도해준 싹이 됐다. 가정에서는 훌륭한 아버지요 착한 남편이었다. 직무에 충실했고 술, 담배를 하지 않았으며 교양 수준도 높았다. 그 때문인지 그는 수기의 끝에서 자신이 “악인은 아니었다”고 적었다.

-그래서 놀랍다. 광인이나 정신 착란자였다면 특이한 예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이 그 같은 대량 학살을 해치웠다는 점이 더 무섭다. 나치 독일이 단지 폭력적 강제 만이 아니라 헤스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자발적 참가와 행동에 의해 존재했다면, 나치 독일에서 행해진 그 끔찍한 일은 언제든 재발할 수 있지 않을까.

이건, 아렌트의 표현을 빌면, '악의 평범성' 혹은 '악의 진부성' 문제이다. 인간이 어쩌면 그럴 수가 있을까, 란 경악은 이 문제를 숙고하는 데 더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수가 있다는 가정하에 다시 생각해야 한다. 더불어 우리가 정말 인간일까? 라고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다. 넌 네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니?

한겨레(06. 05. 19) ‘그래, 넌 네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니?’(So You Think You’re Human?) 원제는 이처럼 다소 도발적이다. 도발적이지 않다면, 당혹스럽다. <우리가 정말 인간일까?>(아카넷 펴냄)라는 번역본의 제목은 원제를 상당히 점잖게 누그러뜨린 셈이다. 인간답지 않은 인간, 그러니까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을 향해 질책하듯 던지는 말은 아니다(아니, 사실은 그런 질책의 뜻을 담은 질문인 것일까).

-런던대 지리학 교수인 역사가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가 쓴 이 책은 ‘인간’이라는 개념의 정의와 범주, 그 정합성과 타당성을 따져 묻고자 한다. ‘인간’의 실체에 접근하는 방식은 다종다기하겠지만, 역사학자인 지은이가 동원하는 방법론은 역시 역사적 접근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정의되어 왔는지를 돌이켜 보면서 그 타당성과 설득력 여부를 점검하는 것이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의심하거나, 자기가 혹시라도 인간 아닌 다른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해 본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인간이다’라는 것은, 인간들 사이에서는, 너무도 자명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의 진술일 터이다. 그런데도 지은이는 왜 새삼스럽게 인간의 정의를 문제 삼고 나섰는가. 자명한 것 속에 함정이 있으며, 자명한 것이 왜 자명한지를 따져 묻는 것이야말로 진정 학문적 태도임을 그가 믿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을 바탕에 깔고 그는 인간에 관한 역사적 정의의 타당성을 점검한다.

-인간을 동물과 구분짓는 전통적인 요소 중 대표적인 것으로 도구와 언어, 문화 등이 있다. 그러나 영장류 동물학의 최근 연구 성과들은 이런 특징들이 인간만의 몫이 아님을 속속 밝혀 내고 있다. 침팬지가 나뭇가지를 개미집에 집어 넣어 거기에 달라 붙은 개미를 떼어 먹는 유명한 사례는 제인 구달의 선구적 연구 덕택에 보편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단단한 나무 열매를 쪼개기 위해 두 개의 돌을 이용하는 원숭이는 물론, 조개 껍질을 깨기 위해 돌을 이용하는 수달을 보더라도 도구 사용에 관한 인간의 독점권은 인정하기 어렵다.

-언어 역시 인간만의 몫으로 주장하기 어렵다. 벌·개미와 돌고래, 박쥐 등의 고유한 의사전달체계는 인간과 다른 방식의 ‘언어’로 볼 수 있으며, 영장류들을 훈련시켜 얻은 결과는 그들이 인간의 언어를 습득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말을 알아듣는 개와 앵무새의 사례 역시 참조할 만하다.

-언어와 도구가 아닌 ‘문화’라는 고급스러운 현상으로써 인간의 고유성을 주장한다는 것은 매력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려 할 때 수컷 침팬지들이 모여 똑같은 방식으로 몸을 흔들고 발을 구르는 ‘비 춤’의 사례 보고라든가, 죽은 토끼나 바퀴벌레를 종일 머리에 얹어 두고 만족스러워하는 암컷 보노보들의 행위는 영장류들에게도 나름의 문화가 있다는 강력한 반증이 된다.

-일본 코시마 섬의 짧은꼬리원숭이 집단에서 목격된 행동의 혁신과 보편화 과정은 특히 놀랍다. 관찰자들이 ‘이모’라는 이름을 붙인 천재 암컷 원숭이가 농부에게서 얻은 고구마를 개울물에 헹구어 흙을 씻어 내고 먹기 시작하자 그 방법은 이내 다른 동료 원숭이들에게 확산되었다. 이모는 또 인간들이 해변에 뿌려 주는 밀에 모래가 묻어 먹기에 힘들자 밀과 모래를 함께 물에 뿌리고는 물 위에 떠오르는 밀만을 건져 먹는 방법을 개발해서 역시 무리들에게 전파시켰다.

-이런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지은이는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일종의 ‘복권’을 주창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현생 인류의 조상과 상당 기간 동안 공존하다가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수준의 물질문명을 이루었으며 죽은 이를 매장하고 그 위에 꽃을 뿌리는 식의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도 일부 학자들은 네안데르탈인이 현생인류의 조상에 비해 여러 모로 열등했다는 주장을 하며 그에 어울리는 증거를 찾기에 열을 올린다.

-지은이는 이런 태도에서 흑인을 ‘인간과 원숭이의 중간적 존재’로 보고자 했던 19세기 인종주의의 그림자를 본다. “과거에 인간과 사실상 구분되지 않는 인간 아닌 종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인간’이라는 것이 고정된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게다가 생명공학과 로봇공학의 눈부신 발전은 인간에 대한 기존 관념의 불가피한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변화는 그야말로 ‘인간적 가치라는 신화’를 보존하고 확산하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것이 지은이의 간곡한 제언이다. 그야말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우리가 애써서 기왕의 인간 개념의 타당성 여부를 따지는 것은 인간적 겸손와 위엄을 잃지 않으면서 ‘이웃 동물’들의 권리와 행복 역시 침해하지 않는 평화적 공존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다. 가령 동물들 역시 자기 영역에서 쫓겨나지 않을 권리, 잡히거나 괴롭힘을 당하거나 고통을 당하거나 무언가를 빼앗기는 실험을 당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 권리를 지닌다는 동물 권리운동가들의 주장에도 새겨 들을 바가 있다는 것이 지은이의 생각이다. 인간은 모든 생명체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것이며 다른 모든 생명을 자기 목적에 맞게 이용하거나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식의 인간 중심주의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인간 개념의 경계는 분명하지도 보편적이지도 않다(…) 그 개념은 아직도 놀랄 만큼 확장될 여지가 있다”는 지은이의 결론은 인간과 다른 생명체들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에 대한 이같은 염원을 바탕에 깔고 있다.(최재봉 기자)

06. 05. 28 - 0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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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4 2006-06-09 13:33   좋아요 0 | URL
아... 이 페이퍼는 언제 완료 되나요? 계속해서 뒤페이지로 밀려나는군요.^^;;

로쟈 2006-06-10 02:00   좋아요 0 | URL
죄송합니다. 부득이한 개인사정까지 겹쳐서 계속 미뤄지고 있습니다. 79나 80회 정도는 정리하고 있어야 하는데, 워낙에 실속이 없는 일이라 보니(--;)...

GoNgo 2006-08-07 17:22   좋아요 0 | URL
로쟈님 덕에 보관함에 책이 자꾸 늘어만 갑니다. 보관함 비우면서 5권 감사의 표시를 했습니다. '워낙 실속이 없는 일이라'시기에 보잘것없는 답을 해봅니다.^^;

로쟈 2006-08-07 19:49   좋아요 0 | URL
별 실속 없는 얘기를 다 마음에 담으시네요.^^ 그저 피로감 정도입니다. 끝이 안 보이는 일이라!..
 

모스크바 통신을 꼼꼼하게 읽으신 분이라면 이 글의 제목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재작년 7월말에 나는 지젝의 <이라크> 읽기 한 대목을 "유럽은 무엇을 원하는가?"란 제목으로 올린 적이 있다. 이 글은 그 이미지-버전이다. 한편으론 지젝에 관한 글들을 한 데 모으기 위한 정리이기도 한데, 모스크바 통신에서는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있어서 읽기에 불편한 점이 있었다. 다시 읽으면서 일부 곁가지들을 제거했고, 몇 마디 새로 집어넣기도 했다(이런 글을 다시 읽는 건 개인적으로 회고적인 정서에 물들게 한다).

오늘 서울에서 보낸 온 책 소포를 받았다. 점심을 먹고, 인터넷카페에 산책 삼아 가려는 참이었는데, 7층 경비 할아버지 책상에 우편물 수령안내장이 놓여져 있는 걸 우연히 봤다. 그런데, 수신자가 나였다! 안내장을 들고 찾아간 곳은 1층의 허름한 방이었는데(그런 곳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소포우편물들이 잔뜩 쌓여 있고, 우편 행낭이 여럿 놓여 있는 방에서 나를 맞이한 여직원은 그래도 상당히 친절한 태도로 안내장을 확인하고 여권을 보여달라고 했다. 출입증만 갖고 있던 나는 다시 7층의 방으로 올라서 여권을 챙겨가지고 내려왔다. 여직원이 안내장 뒷면에다 필요한 기재내용을 적고, 나는 서명을 했다. 그리고는 행낭에서 ‘우체국택배’라고 한국어로 씌어진 소포박스를 하나 꺼내서 저울에다 무게를 달았다. 1.92kg이라는 저울의 눈금을 나에게 확인시키더니 역시나 확인 서명을 하도록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받아온 것이, 이달 초순에 지인(知人)에게 부탁했던 세 권의 책인바, 지젝의 <이라크>와 들뢰즈의 <비평과 진단>, 그리고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이란 무엇인가>이다. 우편물의 경우 보통 서울에서 모스크바까지 3주 정도가 소요되는데, 나는 다음주에나 받아보지 않을까 생각하던 참이어서 다소 뜻밖이었다(물론 좋은 쪽으로). 이 세 권의 책을 부탁한 건 물론 세 권의 러시아어본을 내가 모두 갖고 있기 때문이고, 그런 참에 좀 읽어보고자 해서이다. 지젝의 신간에 대한 관심은 물론 그의 ‘독자(혹은 수신자)’로서 당연한 것이고, 들뢰즈의 책 두 권은 내가 이전에 국역본은 물론이거니와 영역본으로도 ‘재미를 못 본’ 책들이라, 러시아어본이라면 사정이 혹 다를까 해서 ‘주문’한 책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좀 읽어본 건 적어도 6년 전의 일이고, <비평과 진단>은 올 연초엔가도 잠시 들춰봤는데, 첫 에세이인 '문학과 삶'을 넘기기가 힘들었다(이런 건 누가 해설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 *결국엔 귀국 후에 <비평과 진단> 읽기를 한동안 진행한 바 있다. 언제 끝날지 가늠할 수 없지만). 몇 줄로 요약하는 건 나도 할 수 있지만, ‘읽어 내려가는 건’ 쉽지 않다(누가 들뢰즈를, 특히 <비평과 진단> 같은 걸 쉽게 읽어 내려가는지 궁금하다). 국역본만을 술술 읽어서 이해할 수 있다면, 굳이 두 종의 번역본을 참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물론 나는 그런 경우에도 여러 개의 번역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하지만, 이미 여러 차례 지적한 바대로 (부정적으로는) 우리 번역들이 대개는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으며(<비평과 진단> 같은 건 나로선 완독이 불가능한데, 거기엔 물론 부정확한 번역 외에도 아직 한국어가 서구의 철학/이론을 번역하기에는 덜 조밀하다는 것이 한몫할 터이다), 다른 한편으로 (긍정적으로는) 다른 번역, 다른 언어의 ‘바꿔 말하면-효과’를 통해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두 가지 언어의 번역본을 읽는다. 들뢰즈가 <비평과 진단>의 서두에서 인용하고 있는 프루스트에 따르면, “훌륭한 책들은 일종의 외국어로 씌어져 있다”고도 하고(그러니까 훌륭한 책들은 아예 외국어로 읽어볼 필요도 있다!).

물론 국역본으로만 읽고 이해할 수 있고 마음 놓고 인용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바람직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러시아어 등의 외국어로 읽는 것보다는 ‘빨리’ 그리고 ‘편하게’ 읽을 수 있고, 또 인용할 때 따로 번역해야 하는 수고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정확성’이다. 지젝의 <믿음에 대하여> 같은 부도덕한 번역서(라기보다는 오역서)들이 양산되는 한, 결코 안심하고 읽거나 인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제나 마음 놓고 읽을 수 있을까?

번역도 ‘문화’인 한에서, 좋은 번역서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를 고대할 수만은 없다. 해서, 좋은 번역서들을 장려하는 한편, 나쁜 번역서들이 발붙이지는 못하도록 하는 독서문화, 번역문화, 출판문화가 우리에겐 필요한 것이다. 책에 묻혀 사는 나에게 좋은 세상이란 좋은 책들이 나오는 세상이며, 내가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보탤 수 있는 힘은 그런 책들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고 감시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이리라.

서두가 길어졌는데, 오늘 받아본 세 권의 책 중에서 일단 제일 먼저 읽기 시작한 것은 <이라크>이다. 물론 주업(번역)에 대한 부담 때문에(요즘 계속 할당량을 못 채우고 있다. 옛날 같으면 ‘시베리아 유형’ 감이다) 중간에서 책읽기를 끊어야 했는데, 내가 읽은 건 1장의 “유럽은 무엇을 원하는가?”란 절까지이다(52쪽까지). 그러니까 1/4이 좀 못 되게 읽은 셈이며, 조금 자제하면서 읽으려고 하지만 잘 될지는 미지수이다.

Славой Жижек Ирак. История про чайник Iraq: The Borrowed Kettle

이미 이전에 언급한바 있지만, 지난달에 나온 러시아어본은 프락시스란 출판사에서 출간된 것인데, 포켓북 사이즈이고, 가격은 3,500원 정도였다(2,000부 발행). 발행부수가 적은 것은 러시아에서 지젝의 지명도가 상대적으로, 그러니까 한국보다도 훨씬 낮기 때문이다. 영어본의 원제가 (Verso, 2004)인 <이라크: 빌려온 항아리>(도서출판b, 2004)의 러시아어본 제목은 <이라크: 주전자에 관한 이야기>이며 오렌지색 겉표지에는 작업복 차림에 미군 헬멧을 쓰고 걸어가고 있는 부시 미대통령의 사진이 박혀 있다.



사소한 것이긴 하지만, 원제의 ‘kettle’이 우리말로는 왜 ‘주전자’가 아닌 ‘항아리’가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직접적으로는 아마도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의 한 일화(‘농담’)에 나오는 것이고, 짐작에는 거기서도 ‘항아리’가 아니라 ‘주전자’였을 거 같은데 말이다(항아리를 빌려주었다가 돌려받는 건 드문 일이지 않을까?). 단서가 없는 건 아니다. 국역본 8쪽에 보면, 후세인 정권 붕괴 이후에 이라크의 박물관이나 유적지에서 도난당한 ‘고대의 항아리’ 얘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아마도 영어본에서는 이 ‘항아리’도 (흔히 ‘항아리’를 가리키는 ‘urn’이란 단어 대신에) ‘kettle’로 표기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kettle’은 무엇을 보관해두는 ‘항아리’가 아니라, 무엇을 끓이는 데 사용되는 도구이다. 미심쩍어서 찾아본 영한사전에는 ‘솥’이나 ‘탕관’ 혹은 ‘주전자’를 뜻하는 걸로 나와 있다. 그러니까 만약에 이라크에서 도난당한 것이 ‘kettle’이라면 엄밀한 의미에서 ‘항아리’는 아닌 셈이다.



러시아어본에는 ‘관’이나 ‘용기’를 나타내는 단어가 쓰이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라면 ‘항아리’라고 옮겨도 무방하겠다. 다만, 러시아어본에서는 ‘다른 항아리’로서 얘기하는 ‘주전자’에 대해서는 그와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항아리’와 ‘주전자’를 구별하고 있다는 얘기다. 국역본에서는 ‘일관성’을 고려해서인지 ‘항아리’로 통일하고 있다. 하지만, 지젝이 말하고 있는바, “이 책의 제목은 고대의 항아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므로, ‘주전자’가 ‘항아리’로 탈바꿈한 것은 ‘시적 허용’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국역본 <이라크>는 부제답게 ‘주전자’라기보다는 ‘항아리’에 가깝다. 촘스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9.11 관련 촘스키의 책들은 대부분 러시아어로 번역돼 있다), 현실에 대한 긴급하고도 현실적인(=액츄얼한) 비평을 담고 있는 이런 류의 ‘시사적인’ 책이 하다카바에 ‘학술적인’ 서적처럼 포장돼 나오는 건 너무 ‘무거운’ 감이 있다(실제 원서 중 하드카바로 나온 지젝의 책이 얼마나 있던가?). 항아리처럼 말이다.

지젝의 한 독자로서 나는 그의 책들이 보다 많이 읽히기를 바라는바, 적어도 <이라크> 같은 책만큼은 소프트카바에 재생용지를 써서라도 보다 저렴한 판형으로 출간되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책이 좀 팔린다면, ‘보급판’을 고려해봄 직하다는 것이 나의 제안이기도 하다). 그랬더라면 15,000원이라는 정가가 3,500원까지 다운되지는 않더라도, 대학생들이 아무런 부담 없이 사볼 수 있는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이라크에 3,000명의 한국군이 파병될 예정으로 있지만, 그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3,000명 정도는 이 책을 읽어야 하겠기 때문이다(나의 바람은 적어도 3만 명은 읽는 것이지만).

인간사랑에서 나오는 지젝 번역서들도 그렇지만, 나는 ‘하드카바’ 지젝은 反지젝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읽고 이해하는 한, 지젝은 고상하거나 귀족적이지 않으며 아카데믹한 것도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대중적이며 보편-지향적이다(그는 라캉=예수의 ‘바울’이고자 한다). 다만, 그가 구사하는 담론의 모태가 헤겔과 라캉이기 때문에 다소 어렵게 느껴질 따름이다(더구나 우리에겐 헤겔도 라캉도 제대로 번역돼 있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걸 중화시키기 위해서 그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 것인지(반복해서 말하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일지 모른다)!

헐리우드 영화 등의 대중문화들을 주로 참조하는 다른 책들에서도 그렇지만, <이라크>를 말하기 위해서 주전자(‘항아리’) 일화를 끌어올 만큼 ‘서민적’이며 ‘대담한’(더불어 ‘비학술적인’) 지식인(그는 말의 본래적 의미에서 전형적인 ‘인텔리겐치아’이다)이 우리 시대에 과연 몇이나 되는가? 거기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면, 지젝은 보다 대중화될 필요가 있다. ‘주전자’처럼 헤프게 빌려주고 받으며 ‘상식적으로’ 읽힐 필요가 있다. 지젝이 원하는바, 세상이 조금이라도 바뀌려면 말이다.

국역본 <이라크>가 다소 ‘무겁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건 번역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제대로 된 번역이 오히려 ‘이상한’ 지젝 번역 시장에서 읽기에 무난한 번역서가 나온 것만으로도 다행스런 일이긴 하지만, (보다 많은 독자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좀더 쉽게 읽히는 번역이었으면 하는 욕심을 가져본다. 예컨대, 10쪽에 “라캉의 ISR 삼항조”라는 얘기가 나오는바(몇 군데 더 나온다), 역자들은 ISR이 CIA만큼 독자들에게 친숙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심지어 매스컴에서 자주 나오는 WMD조차도 처음 나올 때, ‘대량살상무기’라고 풀어준 것에 비하면, ‘ISR’은 좀 불친절하다. “상상계-상징계-실재의 삼항조”라고 풀어주던가, 아니면 역자들이 쓰는바, “상상적인 것-상징적인 것-실재의 삼항조”라고 풀어줄 수 있지 않았을까? ISR에서 책을 덮어버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런 게 농담만은 아닌 것이, 한때 인문서적에서는 ‘기표’란 말조차도 금기시 됐었다. 소위 교양 있는 독자들조차도 기호학(記號學)이 기호(嗜好)에 관한 학문이 아닌가라고 짐작하는 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령, “기표 ‘유럽’에 되살려야 할 어떠한 차원이 있다면, 이 행위는 그 용어의 가장 감동적인 의미에서 ‘유럽적’이었다.”(45쪽)라고 할 때도 굳이 ‘기표 ‘유럽’’이란 말을 고집하느니 그냥 ‘‘유럽’이란 말’이라고 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덧붙여 ‘용어’도 그냥 ‘말’로 충분하다. 이런 건 물론 오역의 사례가 아니다. 다만, 번역에서 ‘발신자’ 지젝뿐만 아니라 ‘수신자’ 독자까지도 더 고려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피력하는 것뿐이다...

제목과 관련한 얘기로부터 지젝은 현 이라크 정세(이건 세계 정세의 축약본이기도 한데)에 대한 자신의 개입/발언을 시작한다. 항아리 얘기를 보다 가벼운 주전자 버전으로 바꾸면, 프로이트의 ‘농담’은 이렇게 된다: (1)나는 당신의 주전자를 빌린 적이 없다. (2)나는 당신의 주전자를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3)내가 당신에게서 주전자를 빌려왔을 때, 주전자는 이미 구멍이 나 있었다. 자연스런 삼단논법처럼 보이지만, 여기서 (2)는 (1)을 뒤집고(씹고), (3)은 다시 (2)를 뒤집는다(씹는다). 결과만을 놓고 보자면, 주전자의 ‘망가짐’을 ‘부정을 통해’(per negationem) 승인하는 대신에, 그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시키는 궤변이다.

이러한 궤변적 사례를 통해서 프로이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기묘한(‘이상한’) ‘꿈의 논리’이며(이건 동시에 ‘부조리한 논리’이다), 이라크 공격에 대한 정당화 논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동시에 전쟁 반대론자들의 논리이기도 했다(9쪽의 각주2). 이 비일관적인(=부조리한) 논리에 일관성(=정합성)을 부여해주는 건, 즉 그러한 비일관성을 ‘봉합’하는 건 이데올로기인바, 지젝은 ‘전쟁의 얼굴’ 제시카 린치 일병의 사례를 통해서 이 이데올로기의 상상적, 상징적, 실재적 차원이 어떻게 얽혀있는가, 라캉식의 ‘매듭’을 구성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가 아닌 (전쟁의) 진리는 무엇인가?

추상적-기술적 비디오게임식 접근으로 요약되는 걸프전(1991)과 병사의 관점에서 ‘인간적 촉감’을 제공하는 종군기자들의 구체적 묘사로 특징지어지는 이라크전(2003), 즉 “추상적 디지털적 층위”와 “인간적 접촉이라는 층위” 사이의 ‘분리 자체’가 그 ‘진리’이다. 두 가지 층위(=차원)는 모두 ‘구체적 총체성’을 포착해내는 데 실패했다는 점에서 똑같이 추상적이며, 사실 지젝이 자신의 이론적/실천적 개입을 통해서 구성/구축해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라크전의 ‘구체적 총체성’이다.

그러한 ‘구체적 총체성’에 이르기 위한 여정에서 지젝이 먼저 짚고 있는 것은 이 전쟁의 실재적인 이유이며, 그는 그것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1)미국이 다른 나라에 민주주의와 번역을 가져다 주고 있다는 진지한 이데올로기적 믿음. 즉 서구 민주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믿음. (2)미국의 헤게모니(=미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질서)를 단언하고자 하는 필요성(국역본에서는 ‘추동’). (3)이라크 석유에 대한 통제. 즉 경제적 이해관계. 이 세 가지 동기는 ‘상대적 자율성’을 갖고 있지만, 지젝은 그런 가운데에서도 핵심적인 건 (2)라고 본다.

즉 (국역본의 뒷표지에도 박혀 있지만) “새로운 세계질서의 좌표들에 말뚝을 박기 위해서, 예방적 차원에 대한 미국이 권리를 주장하고 그리하여 미국의 지위를 유일무이한 세계경찰의 지위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이라크를 구실이나 본보기로 사용하는 것.”(14쪽) 말하자면, ‘시범-케이스’라는 것이다(미국은 시범케이스로서의 이라크가 없었더라면 이라크를 만들어내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메시지는 이라크 국민에게 보내진 것이 아니었으며, 우리 모두가 그 메시지의 “진정한 이데올로기적, 정치적인 표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라크>를 읽으며 나는 한국의 이라크 파병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는 유사-쟁점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본론인 1장에서 지젝이 프랑스와 독일의 행태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기도 하지만, “전쟁 반대, 파병 반대”라는 슬로건만이 도덕적인 선과 진보적 정치의식을 담보하는 건 아니다. 그건, 만약에 우리가 파병을 철회할 경우 ‘우리는’ 이 ‘더러운’ 전쟁에 손을 담그지 않는 것이며, 도덕적 자존심을 보존하는 거라는 ‘민족의식’만을 일시적으로 만족시켜줄 따름이다. 미국 헤게모니라는 우산 아래 있는 한 우리는 이미 손에 구정물을 흠뻑 묻히고 있는 것이며 충분히 ‘더러워져 있다.’(지젝도 반복하는 것이지만, “우리 모두는 이미 미국인이다!”) 그걸 망각/은폐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도덕적인 선이나 진보와는 거리가 멀다.

“유럽은 무엇을 원하는가?”란 절에서 지젝이 페미니즘(‘여성주의’)의 교훈으로 끌어내고 있는 바는, 앞당겨 얘기하자면,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여성을 위한 첫걸음은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황을 부당하고 굴욕적인 것으로, 자신의 수동성을 행위에의 실패(러시아어는 ‘무능력’)로서 경험하는 것이다.”(51쪽)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혹은 가능한 것은 어쩌면 ‘대항’이 아니라 ‘굴욕’인지도 모른다.

한국이란 약소국의 자존/자립의 가능성은 강대국에 대한 대항의 ‘제스처’를 통해서가 아니라(‘反美’라는 구호는 전형적인 정치적 슬로건이다. 사자 우리에서 “나는 사자가 싫어!”라고 외치는 건 얼마만큼 ‘현실적’일 수 있을까?) ‘굴욕’을 통해서 얻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파병이 강행된다면, 우리는 좀더 빨리 한미동맹관계의 굴욕적인 ‘더러움’을 깨닫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거꾸로 파병을 철회함으로써 혹 한미관계가 악화된다면, 오히려 한미동맹 강화에 대한 요구가 더 강해질지도 모를 일이고). 그런 게 변증법 아닌가?

다시 서론. 지젝은 자신의 책이 점진적인 ‘추상’의 길, ‘구체적 총체성’을 향한 길을 따른다고 미리 안내하는바(그 ‘구체적 총체성’의 대척관계에 있는 것이 ‘거짓 구체성’이다), 그 문학적 모델로 닥터로우(1931- , 사진)의 걸작(국역본은 ‘대작’이라고 옮겼는데, 정확하지 않은 번역이다. 6편의 단편과 1편의 중편을 ‘대작’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시인의 생애>(1984)를 들고 있는데, 그의 설명을 듣자면, 읽고 싶은 작품이다(닥터로우의 책이 번역돼 있는가?).

여하튼, 지젝이 반복해서 강조하는바, <이라크>는 이라크에 대한 책이 아니며, 이라크 위기와 전쟁 역시 이라크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건 우리 모두에 관한 것이다(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이미 이라크인이다!”). 우리가 거기에 발을 넣고 빼고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세계화(globalization) 시대의 철학자, 지젝이 보기에 순진한 환상, 혹은 자기기만에 불과하다(그는 어쩌면 유마경의 지혜를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이야말로, 인식론이면서 동시에 무한책임의 윤리학이 아닌가!).

거듭 지젝이 강조하는 것은 이라크전의 ‘세계적 맥락’(=전지구적 컨텍스트)이다(‘세계적’이란 말은 ‘global’의 역어로 보이는데, 역자들이 이전의 ‘범역적’이란 역어를 고집하지 않은 것은 다행스럽다). 사실 이 점만을 독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지젝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독자의 목록에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사람들은 ‘미국의 정치엘리트들’이지만(그리고 한국의 정치엘리트들), 그들이 이 책을 참조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어제(이미 어제이다) 낮에 모스크바에 와서 처음으로 ‘아마존’에서 '지젝'을 검색해보니까 <이라크>에 대한 독자리뷰가 한 편 떠 있었는데, 혹평에 가까웠다(별 2개). 지젝의 ‘빈곤한 어휘’(마이클 무어보다 빈곤한?)와 논증이 결여된 단언들에 대한 비판으로 읽혔는데, 그렇듯 (계몽적인) 지젝을 안 읽어도 되는 (이미 계몽된) 독자들이 미국민의 다수였다면, 사실 <이라크> 같은 책 자체가 불필요하며 아예 씌어지지도 않았을 텐데 안타까운 노릇이다.

그리고 1장. '이라크와 그 너머'인데, 첫번째 절은 “이라크 맥거핀”, 즉 맥거핀으로서의 이라크이고, 내용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23쪽에서 “나는 그들이 다음 백 년 동안 사담 후세인 제국의 유물을 파묻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23쪽)라는 CIA분석가 데이비드 케이의 말은 오역인 듯싶다. 문맥상 앞으로도 후세인의 유물(=WMD)를 찾는 데는 백 년의 세월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 뜻이라면, “유물을 파묻고 있을 것”이 아니라, “유물을 파헤치고 있을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논리상 말이다.

부시와 마찬가지로 그의 ‘푸들’ 블레어 역시 열렬한 크리스천인 모양인데, “부조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라는 ‘진정한 기독교인’들의 슬로건이야말로, 내가 혐오해 마지 않는 것이다. (파병 찬성론자들의) 이라크 파병도 하나님의 뜻이고, (파병 반대론자들의) 파병 반대도 하나님의 뜻이지만, 이 ‘진지한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부조리함’ 때문에 더더욱 열심히 기도를 드리는 모양이니 ‘불경한’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따름이다(나는 차라리 '주전자'나 믿어야 할 모양이다). 가령, 부시의 “자유는 다른 나라에 선사하는 미국의 선물이 아니라 인류에게 내린 신의 선물이다”(39쪽)라고 말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지젝은 이러한 독실한 ‘신성모독’에 대해서도 분석/비판하고 있지만, 그와 별도로 나는 이런 족속들(=우리 인간들)을 신이 창조했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가장 ‘가공할 만한’ 신성모독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반 카라마조프식으로 말하자면, 혹 인간을 창조한 신이 있다 하더라도 그는 그 ‘수치심’ 때문에 진작에 자결하고 말았을 것이다(어디다 얼굴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 해서, 생각건대, 모든 ‘진지한 신앙’은 ‘진지한 이데올로기’일 따름이다. 민족에 대한 신앙도, 진보에 대한 신앙도. 그리고 유토피아에 대한 신앙도(그 점에서 나는 지젝의 ‘유토피아주의’에 대해서도 유보적이다. 이건 3부를 읽고 나서 얘기해 보기로 한다)…

세계 정세, 특히 아랍권 정세에 눈과 귀가 밝지 않은 나로서는 지젝을 읽으면서 ‘정보’를 얻기도 한다. 그 중 하나는 “이라크에서의 사람 후세인 체제는 궁극적으로 세속적 민족주의 체제였으며 이슬람 원리주의적 포퓰리즘과는 거리가 멀었다.”(29쪽)거나(그래서 오히려, 미국이 이라크 공격은 이슬람 원리주의를 전쟁 명분과는 다르게 오히려 조장하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에서 아라파트의 지배적 영향력을 잠식하려는 마키아벨리적 목표를 지닌 이스라엘이 최근까지도 재정적으로 지원했던 것이 바로 그 하마스다.”(33쪽, 각주2)라는 것이 그런 정보들이다(反아라파트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통적인 태도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한마디로 배울 게 많은 나라들이다!

 

 

 



새로운 세계 제국으로서의 미국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미국의 ‘제국-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국-덜됨’에 있다. “오늘날 미국에 대한 문제는, 그것이 새로운 세계 제국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다는 것, 즉 그런 척하면서도 무자비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민족국가로서 계속 행동한다는 것이다.”(32쪽)라는 게 핵심이다(*그러니까 문제는 '제국'이 아니라 '민족주의'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세계화를 비판하는데, 그것은 세계화의 실상이 그 명칭에 걸맞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최근에 유럽연합의 한 불길한 결정이 거의 주목받지 못한 채 통과되었다. 유럽연합 영토의 격리를 보증하고 따라서 이주자들의 유입을 방지하는 전유럽적 국경 경찰력을 창설하는 계획. 이것이 세계화의 진실이다.”(50쪽) 즉 상품들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순환하지만, 인간들의 순환은 점점 통제되는 것이 그 진실이다(물론 이런 건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지나친’ 세계화가 아니라 ‘모자란’ 세계화이다(그런 의미에서 지젝은 反세계화에 반대한다. 反세계화는 ‘모자란 세계화’와 공모적이다).

해서, ‘세계 제국’이니 ‘세계화’니 하는 것은 듣기 좋은 슬로건들에 불과하다(그러니 거기에 반대하는 슬로건들도 듣기 좋을 건 당연하다. 즉 그들은 공모적이다). ‘신자유주의’라고 얘기하지만, 그 경우에도 문제는 ‘넘쳐나는 자유주의’가 아니라 ‘부족한 자유주의’이다. 자유무역을 내세우지만, 그때 자유무역이라는 건 자국의 비교우위가 확실한 분야에 한정된다. 거꾸로, 조금이라도 불리한 분야의 경우에는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다(지젝은 의약품과 면화의 사례를 드는데, 덧붙여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은 철강 또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민주주의’ 또한 마찬가지인데, 후세인의 독재를 타도하고 이라크의 민주화를 위해서 이라크전을 벌였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미국이 우려하는 것은 이라크의 진짜 민주화이며, 민주선거이다. 이러한 사정이 거꾸로 입증하는 바는, “사담의 이라크야말로 공식적으로 이미 세속국가였다는 점”이고, “반면 민주적 선거는 이슬람을 특권화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36쪽).

‘구유럽’(럼스펠드의 표현) 독일과 프랑스 같은 “2순위 열강”의 이라크전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지젝은 매우 비판적인데, 이 역시 궁극적으로는 세계화에 대한 그의 시각과 맥락을 같이 한다. “따라서 프랑스에서 많은 좌파들과 우익 민족주의자들이 공유하는 ‘미국화’에 대한 거부는, 궁극적으로는, 프랑스 자신이 유럽에서의 헤게모니적 역할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크고 작은 민족국가들 사이에서의 비중의 평준화는 세계화의 유익한 효과를 가운데 포함시켜야 한다.”(41쪽) 그가 보기에, 독일과 프랑스가 두려워하는 것은 유럽공동체의 ‘이원적 헤게모니’를 꿈꾸는 자신들이 세계 제국의 일원으로 서 “오스트리아, 벨기에, 혹은 룩셈부르크 수준”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리스가 우승을 차지한 ‘유로2004’에서처럼 축구로 치자면, 결승은커녕 8강의 문턱에도 오를지 못하게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젝은 암시적으로 한 “영웅과 겁쟁이의 이야기”를 드는바, 이러한 이야기의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은 구공산주의 국가들의 복잡한 정세, 아이러니컬하면서도 비극적인 정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민족주의적 보수주의자들이 한탄하고 있는 새롭게 출현하는 사회-이데올로기적 질서는 ‘억압적 관용’과 부자유의 현상 양태로서의 자본주의적 자유라는 오래된 신좌파의 묘사처럼 읽힌다.”(44쪽)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야 뜻을 짐작할 수 있는데(즉 명쾌한 번역은 아닌데), 러시아어본을 참조해서 다시 옮기면 이렇다: “민족주의적 보수주의자들이 불평해대는, 새로운 사회적-이데올로기적 질서를 잘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이 신좌파들이 과거에 이름붙인바 ‘억압적 관용’과, 부자유를 은폐하는 수단으로서의 자본주의적 자유라는 점은 운명의 아이러니이다.”(인용부호로 봐서는 ‘신좌파의 묘사’가 ‘억압적 관용’에만 걸리는 것인데, 확실치는 않다.) 아이러니라고 한 것은 ‘억압적 관용’과 ‘자본주의적 자유’라는 것이 대개는 보수주의 이념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즉 보수주의자들이 보수주의에 대해서 불평하고 있는 것!

그런 상황 속에서 크로아티아의 겸손한 판사 이카 사리치(Ika Saric을 ‘이카 사릭’으로 음역하는 것은 오류이다. 대개의 동구어에서 ‘c’는 ‘ch’로 발음된다)는 대중적 지지 없이도, 그리고 생명에 대한 위협 속에서도 1992년 유고 내전시의 범죄와 관련하여 미르코 노라치(역시 Mirko Norac는 ‘미르코 노락’이 아니라 ‘미르코 노라치’로 읽어야 한다) 장군과 그의 동료들(전우들!)에게 12년 형을 선고했다. 그가 지젝이 꼽은 ‘윤리적 영웅’이다. 반면에 ‘겁쟁이’의 사례는 이라크전 발발 이후에 슬로베니아 정부가 보여준 행태이다.

슬로베니아는 빌니어스(Vilnius) 선언에 서명함으로써 ‘신유럽’의 일부로서, 그리고 ‘의지의 연합coalition of the willing’(‘willing’은 ‘의지’란 뜻이 아니라 ‘자발적’이란 뜻이다. 군사용어로는 ‘의용군’이라고 할 때의 ‘의용’이다. 해서 ‘자발적 연합’이란 뜻이겠다. ‘자발적’이란 것은 미국의 공식적인 요청 이전에 미국을 ‘알아서’ 지지하고 나섰다는 의미이다)의 일부로서 행동했다. 처음엔.

하지만, 외무부(‘외무성’) 장관이 서명한 이후, 곧바로 부인하는 코미디가 일어났는데, “대통령과 다른 권위자들에게”(‘권위자’란 말도 적절한 역어가 아니다. ‘고위층 인물들’ 정도의 뜻이겠다) 자문을 구한 걸로 돼 있지만(‘자문을 구하다’는 ‘협의하다’란 뜻이겠다), 모두가 부인하고 나선 것이다. 해서 미국은 지속적으로 사의를 표하는 공문을 보내오고 슬로베니아는 그러한 감사 표시에 매번 ‘저항’하는 코미디가 연출된 것. “미국의 압력과 전쟁을 지지하지 않는 슬로베니아 국민 다수 사이에서 절박하게 줄타기를 시도”한 결과였다(우리의 경우도 ‘영웅’보다는 ‘겁쟁이’의 사례에 곧 등록되지 않을까 싶지만).

 

 

 



이제 “유럽은 무엇을 원하는가?”(“여성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프로이트적 질문의 패러디)에 대해서 간단하게 정리하기로 하자. 구공산주의권(‘후-공산주의 동유럽 국가’) 출신의 지식인으로서 지젝은 ‘중산계급 서구 좌파’ 혹은 ‘강단좌파’의 행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며(그는 관념적인 좌파가 아니다), 이 절에서 그러한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는 것은 하머바스(독일)와 데리다(프랑스) 등 대표적인 서유럽 지식인/철학자들의 ‘시국선언’이다(이 내용은 우리 언론에도 번역/소개된바 있다). 그 선언에서 그들은 유럽이 자신의 “윤리-정치적 유산”을 재단언할 힘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바, 지젝은 그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비판한다. 왜나면, “우리가 미국 정치와 문명 속에서 비난받아야 하는 것으로 그리고 위험한 것으로 발견하는 것은 유럽 자체의 일부이며, 유럽적 기획의 가능한 결과들 중 하나”(50쪽)이기 때문이다.

즉 “미국은 유럽 자체의 왜곡된 거울이다.”(즉 미국이란 거울에 비쳐지고 있는 것은 유럽 자신의 얼굴이다) 해서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은 자기비판이다. “유럽 자체에 대해 비판적으로 개입하기를 원치 않는 이들은 미국에 대해서도 침묵해야 한다.”(51쪽) 그것이 지젝의 단언이며, 이는 새로운 주장으로 이어진다. “유럽적 유산의 방어가 연대와 인권이라는 위협받는 유럽적 민주주의 전통의 방어에 국한된다면 전투는 이미 패배한 것이다. 유럽의 유산이 방어되기 위해서는 유럽이 스스로를 재창안해야 한다. 방어의 행위 속에서 우리는 방어해야만 하는 그 무엇을 재창안해야 한다.”(51쪽)

즉 한쪽에서는 우리의 ‘금송아지’를 보호/방어하기 위해서 피 흘리는 가운데, 한쪽에서는 그 ‘금송아지’를 열심히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유럽으로서는 자신의 ‘외설적 이면’으로서의 미국과 결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 할 일이지만, 현재로선 가망이 없어 보이는 일이다.

지젝이 유럽에 대한 기대와 환멸을 표시하고 있는 것은 현 세계정세 속에서 미국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유럽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오늘의 진정한 대립은 제1세계와 제3세계의 대립이 아니라, 제1, 3세계 전체와 남아있는 제2세계(유럽)의 대립이다.” 즉 미국이라는 제1세계(‘후근대적인 세계적 자본주의’)와 중국을 포함한 제3세계(‘전근대적 사회’)의 연합, 지하드(Jihad)와 맥월드(McWorld)의 연합으로서의 맥지하드(Mcjihad)에 저항할 수 있는, 그것에 “유효하게 동화시킬 수 없는 외래적 신체”는 “유럽적 근대성”이다(48쪽).

지젝이 기대하는 것은 미국(=초자아)과 제3세계(=이드) 사이의 합작이라는 현재의 ‘억압적 탈승화’ 국면에 대항하기 위해서 유럽이라는 자아(Ich)의 역량을 회복/확장하는 것이다. 자아, 코기토적 주체성, 근대성. 때문에 그는 미국-이라크 전쟁이 “미국과 유럽 사이의 최초의 전쟁”(52쪽)이라고 본다. 더불어 “오늘날 통합 유럽은 미국이 부과하길 원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의 주요한 장애물이다.” 그렇다면, 현 시국의 관건은 장애물이 장애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이겠다. 적어도 지젝이 판단하기에는…

06. 0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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