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프랑스의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의 두툼한 평전이 출간되어 살짝 흥분시키는 가운데 '프랑수아 트뤼포 특별전'까지 열린다고 한다. 그를 좋아하는 시네필들이라면 '신경안정제'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영화제를 소개하는 기사를 옮겨놓고 뒤이어 평전에 관한 정보들을 이어붙이도록 하겠다.  

 

국민일보(06. 06. 28) 누벨바그의 거장 프랑수아 트뤼포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다. 프랑스문화원과 동숭아트센터가 ‘시네 프랑스’ 네번째 시리즈로 ‘프랑수아 트뤼포 특별전 -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을 연다. 다음달 4일∼8월29일 매주 화요일 저녁 서울 대학로 하이퍼텍 나다에서 트뤼포 감독의 대표작 9편을 만날 수 있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196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를 이끈 세계적인 거장이다. 누벨바그는 ‘새로운 물결’이란 뜻으로 전형적인 영화 문법에서 탈피해 줄거리보다 표현에 중점을 두는 ‘작가주의 영화’를 주창했던 흐름이다. 누벨바그 이후 영화의 개념이 바뀔 정도로 세계 영화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트뤼포는 1940년대 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Cinematheque Francaise)’에서 장 뤽 고다르, 에릭 로메르, 자크 리베트, 클로드 샤브롤 등 영화 동지들을 만나 영화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아래 사진에서 앞줄 왼쪽이 트뤼포. 맨뒷줄에는 안경을 쓰고 있는 고다르와 샤브롤의 모습이 보인다.) 

 



-1954년 영화평론지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ema)’에 발표한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Une Certaine Tendance du Cinema Francais)’은 프랑스 전역에 누벨바그를 불러 일으키는 토대가 됐다. 이 글에서 그는 이전까지의 프랑스 영화를 독창성이 결여된 미적 침체상태로 보고 비판함으로써 새로운 미적 가치기준을 마련했다. ‘작가주의 영화’의 탄생에 이론적 뒷받침이 됐다는 점에서도 영화사적 의의가 있다.

-트뤼포는 1959년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시절을 그린 자전적 영화 <400번의 구타(Les 400 coups)>로 장편영화에 데뷔했다. 장인이자 영화제작자였던 이냐스 모르겐스턴이 “그렇게 잘났으면 영화를 만들어보라”고 하자 직접 영화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트뤼포는 이 영화로 그해 칸 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영화 역시 예술적으로는 물론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둬 세계 영화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았다.

 

 

 

 


 

 

 

 

-트뤼포는 이후 <400번의 구타>의 주인공 ‘앙트완 두아넬’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연작 시리즈 <앙트완과 콜레트> <훔친 키스> <부부의 거처> 등을 연달아 발표하는 등 20여년간 열정적인 영화작업을 계속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그의 대표작 <400번의 구타> <피아니스트를 쏴라> <이웃집 여인>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 외에도 <마지막 지하철> <부부의 거처> <두 영국 여인과 대륙> 등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도 선보인다(*대표작 중 하나인 <쥘과 짐>이 빠진 것이 특이하다. 다들 봤을 만한 영화라서인가?). 


<상영작 목록>
- 7월4일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1977)’ / 15세 이상 관람가
- 7월11일 ‘400번의 구타(1954)’ / 전체 관람가
- 7월18일 ‘이웃집 여인(1981)’ / 15세 이상 관람가
- 7월25일 ‘마지막 지하철(1980)’ / 15세 이상 관람가
- 8월1일 ‘훔친 키스(1968)’ / 15세 이상 관람가
- 8월8일 ‘부부의 거처(1970)’ / 15세 이상 관람가
- 8월15일 ‘두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1971)’ / 15세 이상 관람가
- 8월22일 ‘피아니스트를 쏴라(1960)’ / 15세 이상 관람가
- 8월29일 ‘사랑의 도피(1978)’ / 15세 이상 관람가

 

그리고 '현대예술의 거장' 시리즈의 10번째 책으로 출간된, 세르주 투비아나, 앙트완 드 베크의 평전 <트뤼포>(을유문화사, 2006). 원저는 1996년에 출간된 'Francois Truffaut'(갈리마르, 1996)이다. 번역본의 분량이 796쪽이니까 현재로선 결정판이 아닐까 싶다. 소개에 따르면, "트뤼포는 생전에 여러 차례 자서전을 기획했으나, 본격적인 자서전 집필은 끝내 실현되지 못하고 그가 수집해 둔 자료만 보존되어 있는 상황이다. <트뤼포 -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은 52세의 길지 않은 생애 동안 그가 남긴 52편의 작품, 동료들의 증언과 트뤼포의 일기, 메모, 개인 문집 등 방대한 사적 자료를 토대로, 트뤼포의 후배 영화인들이 집필한 책이다."

 

"부모로부터 외면당하면서 비행 소년으로 낙인찍혀 불행한 성장기를 보냈던 트뤼포는 단절된 외부 세계로부터의 탈주를 위해 영화에 모든 것을 걸었다. 수백 편의 영화를 반복해서 보고, <카이에 뒤 시네마>를 통해 예술가들의 오만함에 조소를 보냈으며, '400번의 구타', '훔친 키스', '쥘과 짐', '아메리카의 밤',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와 같이 '나'에 대한 영화, '삶을 찍는' 영화를 만들며 세계영화사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 하면, 이 전기는 그의 '입지전'이기도 하겠다.

 

 

 

 


 

 

 

 

"상처를 남긴 성장 과정, 히치콕, 혹스, 르누아르 같은 거장들에 대한 숭배와 교류, 영화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연출의 비밀들, 시네필들의 우정, 연애와 불륜, 성공과 실패 사이에서의 방황을 비롯하여, 트뤼포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사회의 지적인 분위기, 누벨바그 세대의 형성 발전 과정, 1968년 5월의 칸영화제 풍경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풍부한 사진과 트뤼포의 모든 영화 작품에 대한 상세한 필모그래피가 함께 실려 있다."

 

국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시네필 평론가 정성일은 "이 책만은 정말 번역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었다. 왜냐하면 매일 밤 나만 몰래 침을 발라가면서 페이지를 넘기며 트뤼포에 대한 사랑을 음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라고 추천의 글에 적었는데, 그의 기도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로선 유감스럽겠지만, 애호가 수준의 독자들에겐 다행스런 일이다. 우리도 몰래 침을 발라가며 얼른 읽어보도록 하자...

 

06. 06. 28.

 

P.S.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관련칼럼을 보충하는 의미로 옮겨온다. 내가 가보지 못한 트뤼포 영화제의 후일담도 곁들이고 있어서 읽어봄 직하다.

 

필름2.0(06. 07. 21) 트뤼포, 영화광의 초상

-7월 4일 오후 7시 대학로의 하이퍼텍 나다에서는 ‘프랑수아 트뤼포-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영화제의 개막행사가 열렸다. 8월 29일까지 매주 화요일 저녁 상영될 9편의 트뤼포 영화 가운데 첫 번째로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가 상영됐다. 이 개막행사는 최근 출간된 <트뤼포-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앙트안 드 바에크, 세르주 투비아나 공저, 한상준 역, 을유문화사)의 출판기념회를 겸한 것이었다.

 

 

-영화 상영에 앞서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역자 한상준 씨가 스크린 앞에 나섰다. 인사말 대신 그는 모 월간 음악잡지 기자로 일했던 1984년 당시 트뤼포의 부음 소식을 듣고 썼던 편집후기를 떨리는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한 젊은 영화광이 선배 영화광의 삶과 죽음에 바치는 감동적인 헌사 성격을 띤 그 글의 마지막은 트뤼포의 죽음과 더불어 영화광의 청춘기도 흔적 없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상실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날 그 자리에 있던 관객들이 모두 한상준 씨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존경하는 감독의 평전 번역을 손수 맡은 외국의 영화광이 보여준 헌정의 표시로는 최상의 것이었음을 누구나 인정했을 것이다.

 

 

 

 

 

 

 

 

 

-한상준 씨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저널리즘과 학계, 영화제 프로그래머로서 꾸준히 활동했으며 우리끼리 영화 내공을 따지면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인물이다. 그는 <트뤼포-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을 번역하기 위해 프랑스판과 영어판, 일어판을 두루 참고했는데 역자의 완벽주의는 출판사 측에서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의 손을 거쳐 깔끔하게 번역된 책은 8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세부적인 구성과 묘사력 면에서 혀를 내두르게 한다.

 

-저자들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트뤼포의 삶은 영화에 비해 덜 존경받을 수 있는 것일지는 모르지만 훨씬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는 감옥 같은 학교와 학교 같은 집을 왕래하며 부모의 정을 거의 받지 못한 성장기를 보냈고 결핍된 애정을 스크린에 투사해 거기에 자기 삶을 바쳤다. 그의 구원은 오로지 영화에만 있었다. 그는 인생보다 영화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영화를 만드는 일과 영화를 비평하는 일과 영화인에 관해 말하는 일에 자기 삶의 상당수를 바쳤다.

 

-대체로 이런 영화광의 삶은 경멸을 받기 마련이다. 영화광이야말로 인생의 실상을 모르는 바보라는 경구도 그런 맥락에서 나왔을 것이다. 영화광은 인생의 모든 것을 영화관에서 배우지만 영화관은 인생을 정직하게 가르쳐주는 장소가 아니다. 영화는 환상이며 꿈이며 도피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관은 현실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해방구이며 실제 삶의 이상적인 대안이 될 수도 있다. 프랑수아 트뤼포 평전에 실린 실제 트뤼포의 삶이 보여주는 것도 바로 그런 고통스런 긴장이다. 이를테면 연애에 관해서도 트뤼포는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연애와 자신의 실제 삶에서 추구하는 연애의 경계를 곧잘 허물고자 했다. 영화에 빠져 살면서 실제 인생을 영화의 그것과 닮은꼴로 만들려 시도했던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경계 허물기는 쉽지 않은 것이어서 이는 트뤼포의 전체 삶에 예기치 않은 긴장과 혼란을 초래했다.

 

-프랑수아 트뤼포 영화제의 첫 번째 작품으로 상영된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는 그런 트뤼포의 삶의 형식을 잘 요약해주는 영화였다. 아주 오래전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전성기를 지난 감독의 주책스런 상상력의 발현이라고만 여겼던 영화가 이번에 다시 보니 특별한 정취와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이 영화는 결혼하지 않은 채 숱한 여자들과 연애하는 것에 전력하는 한 중년남자의 이야기다.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자서전을 쓸 때 다른 특별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책의 제목을 바람둥이라고 쓸 만큼 이 남자의 삶은 부도덕하다. 특별히 잘나서 주목할 만한 매력이 없는데도 숱한 여자들을 매혹시킨 이 남자의 비밀이 영화 속에서 명쾌하게 밝혀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유형의 삶이 주는 긴장의 중독성이랄까, 하는 것에는 어렴풋이 공감하게 된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베르트랑 모란은 각양각색의 여자들에게 신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돌진한다. 백화점에서, 세탁소에서, 렌터카 사무실에서, 카페에서, 영화관에서, 집 근처 상점에서 자신의 눈길을 뺏는 다리를 지닌 여성에게 돌진하는 것이다. 영화 속 대사에 따르면 '여자들의 다리는 지구의 모든 방향을 측정하면서 평형과 조화의 상태로 유지하게 만드는 컴퍼스'다.

 

 

-한 정신 나간 남자의 일대기를 다룬 듯한 이 영화는 기묘한 종교적 열정으로 승화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죽어가면서도 간호사의 아름다운 다리를 보고 억제할 수 없는 상태로 침대에서 일어나려 애쓰다가 쓰러지는 베르트랑 모란의 모습을 담고 있다. <트뤼포-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의 이 영화에 관한 대목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이는 발자크의 <외제니 그랑데>에서 외제니의 아버지가 사망 직전에 사제의 금제 십자가를 낚아채려 애쓰는 묘사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 속에서 베르트랑 모란의 자전적 소설의 가치를 알아본 책 편집자이자 마지막 애인이었던 주느비에브는 베르트랑이 자기도취에 빠진 구제불능의 남자가 아니라 상대방의 가치를 알아보는 데 비상한 혜안을 지닌 사람임을 인정한다. 이는 베르트랑의 영혼이 어떤 관습의 고정성이나 일상의 무감각에도 갇히지 않았던 열정의 소유자라는 뜻이기도 하다.

 

-주느비에브는 베르트랑과 짧은 연애를 즐기면서 그가 자신의 가슴을 만질 권리는 있지만 의무는 없다고 말한다. 권리는 있지만 의무는 없는 관계의 긴장을 버텨내는 열정은 이 책에 따르면 프랑수아 트뤼포의 삶에서 줄곧 염원하던 가치와 통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그의 삶이 마냥 행복할 리는 없었다. 성장기의 자전적 체험을 다룬 <400번의 구타>로 성공하면서 겪은 부모와의 불화에서부터 아내와 딸들과 누린 일시적인 평화와 장기적인 부조화의 갈등도 그렇고 영화를 찍을 때 누린 공동체적 친밀감과 영화가 끝난 후에 느끼는 이별의 상실감 같은 것들이 그의 삶과 영화에선 늘 반복된다.

 

-이번 영화제에서도 상영되는 트뤼포의 또 다른 후기작 <이웃집 여인>에서 오랜만에 이웃으로 재회한 남녀 주인공은 젊은 시절 뜨거운 사랑에 빠졌던 자신들의 열정을 되살릴까 말까 한동안 고민하는 시간을 보낸다. 그들이 마침내 억제할 수 없는 열정을 분출시켜 그들의 사랑을 다시 시작하는 순간 여자는 남자의 머리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긴다. 사랑의 절정기에 죽음을 맞는 이 돌연한 결말은 인생의 충만한 행복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지극한 절망의 표현이다(*언젠가 TV에서 본 영화이다. 제라르 드파르디유 주연). 영화라는 것도 결국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일종의 시체애호증처럼 필름이 마모될 때까지 우리는 스크린 속 꿈의 실체를 거듭 음미하고자 영화관을 찾는다. 비디오와 DVD로 매체가 호환되는 현대에 그런 영화광의 매혹은 점점 과거의 것이 돼가고 있지만 유한한 실제 삶과 달리 실제 삶을 모방한 이미지는 불멸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트뤼포의 영화적 스승이기도 한 평론가 앙드레 바쟁의 명제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영화는 현실에서 되살릴 수 없는 일종의 시체와 같은 것이지만 동시에 영원히 마모되지 않는 불멸성의 화신이기도 한 것이다. 트뤼포의 삶과 영화는 바로 그런 삶의 불가능한 충만함에 대한 거듭된 시도이고 열정이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트뤼포는 프랑스 영화계의 기린아가 되기 위해 엄청난 야심을 불살랐던 젊은 시절부터 영화계의 중심부에 오르게 된 장년에 이르기까지 숱한 권력적 행보를 서슴지 않았으면서도 그의 스승 앙드레 바쟁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았고 그 때문에 극적인 삶을 살았다. <트뤼포-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에 그 모든 과정이 상세하게 기술돼 있다. 흥미로운 영화세계를 펼쳤으며 그것 이상으로 굴곡 많은 삶의 궤적을 보여준 한 영화광의 삶을, 스크린 안과 밖이 겹치면서 생기는 긴장과 열정의 충돌을 통해 상세히 묘사하는 역저로 누구에나 일독을 권하고 싶다.

 

06. 0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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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6-28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잘났으면 영화를 만들어보라”...그래서 만든 영화가 걸작이었으니 그 장인의 표정이 어떻했을까 심히 궁금해지네요^^

로쟈 2006-06-29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떨떠름했다면 좀 모자란 인격이고 그래도 부듯해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어제 구내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하고서 반갑고 놀라웠던 책은 데이비드 로웬덜의 <과거는 낯선 나라다>(개마고원, 2006)이다. 기분상으론 '횡재'한 느낌이었지만, 거저 책을 얻은 것도 아니고 다음을 기약하면서 얌전하게 두고온 책이니 야단스레 떠들 일은 아니겠다. 그럼에도 반가운 마음이 다 가시지 않는 것은 재작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어본이 나온 걸 눈여겨보았고, 연말에는 즐겨읽던 일간지의 '엑스 리브리스'에서 역사부문 '올해의 책'으로 꼽기도 했었기 때문에(<치즈와 구더기>의 저자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책과 함께)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어둔 까닭이다. 아래가 러시아어본이다.

Cover. Прошлое - чужая страна. Пер. с англ. Лоуэнталь Д.

 

 

 

 

 

 

 

해서 저자나 책의 지명도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하면서도 내겐 읽어볼 만한 '대단한 책'으로 각인됐고, 귀국한 이후에 원서를 구해볼 생각을 했었다. 그게 어쩐 일로 흐지부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아마도 책의 두께와 만만찮은 가격이 걸림돌이었을까? 하드카바의 러시아어본도 상당한 고가의 책이다). 그러던 차였으니까 아무런 예고없이 출간된 국역본이 조금 과장하자면 잃었던 혈육을 되찾은 것 같은 '감동'을 전해준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어정쩡하게 시중에 깔린 탓에 지난주 리뷰들에는 다 빠졌지만, 아마도 이번 주말 북리뷰란들에는 큼지막한 서평들이 실린 것이다.  

하지만, 책에 관해서라면 그다지 여유로운 성격이 못되는 나는 이곳저곳에서 책에 관한 정보들을 수집하려고 했고, 아직 알라딘에 충분한 책소개가 제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다른 곳에 있는 책소개라도 여기에 옮겨놓는다(출판사측 리뷰인 듯한데, 알라딘에는 왜 빠져 있는지 모르겠다). 나로선 코젤렉의 <지나간 미래>(문학동네, 1998)와 함께 올여름의 끝무렵에 읽어볼 책으로 꼽아두고 있는 책이다(좀 여유가 있다면,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을 대출해서 읽어보아도 좋겠다).

 

 

 

 

-과거는 왜 낯선 나라인가? 19세기까지만 해도 서구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거를 현재와 유사하다는 가정 아래 규정하고 판단했다. 즉 인간의 본성은 항상 불변하는 것으로 가정되었고, 중요한 사건들도 항상 유사한 동기나 열정에 의해 촉발되는 것으로 가정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사실 과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낯선’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과거의 삶은 지금의 삶과는 아주 다른 존재방식과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가 낯선 나라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과거에 대한 인식이 확대됨에 따라 사실상 과거가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이다. 즉 각 시대의 요구에 따라 과거가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는 사실상 있는 그대로의 과거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과거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낯선 나라이기 때문에 인지될 수도 판단될 수도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불변하고 고정된 과거가 아니라 우리와 상호작용하며, 과거와 현재가 융합하는 유산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과거는 실재하지만 실제로는 있는 그대로 알려질 수 없으며’ ‘현재에 의해 끊임없이 재해석된다’고 말한 관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더 나아가 그는 재해석된 과거가 과거의 진실을 전복시키기보다는 과거의 의미를 이해하고 과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과거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재로 부활한다. 이 책의 1부에서 논의되었듯이 과거는 우선 선택적으로 이용된다. 과거는 현재를 비옥하게 하는 유산으로서 혜택을 주기도 하지만 현재를 억압하거나 과거의 악행이라는 족쇄를 현재에 채우기도 한다. 따라서 현재의 우리는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과거는 과장하고 확대하기도 하며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고 해를 주는 과거는 축소하거나 삭제하기도 한다.

-이렇듯 과거 인식과 이용의 기본 태도에서부터 우리는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과거의 개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2부에서 논의된 것처럼 기억에만 의존하던 시대와 달리 역사가 씌어진 이후부터는 과거가 훨씬 믿을 만하고 확실해진 것처럼 보였지만, 역사 역시 해석자의 주관과 실제 일어난 일 사이의 간극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여기에는 현재의 필요라는 요구의 개입뿐만 아니라 과거의 사건 이후 연달아 일어난 이후의 새로운 사건을 모두 인지하고 있는 현재 서술자의 지적 혜택이라는 문제도 개입되어 있다. 또한 기억과 역사는 모두 과거로부터 살아남은 물질적 흔적들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데, 유물 역시 그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과거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끊임없이 개조하고 변형시키는 것일까? 이는 기본적으로 3부에서 논의된 것처럼 과거가 현재에 가져다주는 분명한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과거가 ‘합의된다’고 느껴진다고 말한다. 과거는 아주 일차원적으로는 개인의 향수를 달래주고 안정감을 제공하기 위해, 더 나아가서는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이나 우월성을 담보하기 위해, 그 목적에 맞게 합의되고 개조되는 것이다. 게다가 훼손된 과거를 원형 그대로 복원하고 보존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주장할 때조차도 사실상 현재의 방법론으로 과거를 조작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렇듯 재해석된 과거는 조금의 진실도 담고 있지 않은 것으로 폄하되어야 하는 것일까. 저자의 결론부터 언급하자면 ‘아니다’이다. 저자는 역사가 다시 기록되듯이 과거가 현재의 지식과 가치가 변함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피한 일이라고 결론짓는다. 왜냐하면 그에게 과거는 불변하는 전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되는 기억, 역사, 유물의 누적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누적물이라는 개념은 그것들이 시간을 관통해오면서 사람들에 의해 변화되고 개조된 부분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과거가 그것을 만들어낸 자들뿐 아니라 이를 물려받은 사람들의 증거이며, 과거의 정신뿐 아니라 현재의 전망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과거는 낯선 나라다. 현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낯선 나라이기도 하며, 또한 현재에 의해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부활하기 때문에 낯선 나라이기도 하다. 과거가 변화한다는 사실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역으로 그러한 과거는 또한 우리를 구속하는 과거의 신화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도 있다.

-이는 단지 과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주장처럼 현재와 미래의 전망을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이렇듯 끊임없이 변화하며 현재로 부활하는 과거는 과거에 대한 일방적인 의존을 떨쳐내는 데 이바지하며 자유롭게 선택된 미래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결론 부분을 저자는 이렇게 끝맺는다. “우리가 물려받은 것도 결국 변형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만 비로소 과거를 풍성하게 사용할 수 있다. 선조들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지만, 단순히 보존되기만 하는 세습된 유산은 견딜 수 없는 부담이 된다. 과거는 길들여짐으로써―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을 용인하고 기뻐함으로써―가장 잘 이용된다.”

06. 06. 28.

P.S. 주말 북리뷰들을 훑어봤는데, 국민일보와 한국일보 등만이 <과거는 낯선 나라다>에 대한 서평을 싣고 있다. 이 중 한국일보 안준현 기자의 리뷰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6. 07. 01) 과거는 낯선 나라다 '변화하는 과거 자유로운 미래'

-이승만, 박정희 시대는 우리에게 어떤 과거인가. 공산 독재를 막은 ‘자유민주’ 국가의 수립기이자 숙명 같은 가난을 떨쳐낸 경제 건설의 눈물 나는 여정이었을까. 아니면 친일파와 손잡고 분단을 이끈 원통한 세월이자 장기 집권을 위해 인권과 노동을 짓밟은 암흑 같은 독재의 시기였을까.

-미래는 불확실한 것이지만 과거는 이미 실재했던 확실한 대상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미래는 다양한 예측의 영역인 반면, 과거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고정불변의 객관적 실체를 가진 확실한 기록으로서, 단 하나의 올바른 해석이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이승만 박정희 시대를 평가하는 우리 사회의 날선 대립도 이런‘고정불변의 과거, 올바른 진리’라는 사고의 맥락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과거는 곧잘 이용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과거에서 현재를 비옥하게 하는 유산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현재를 억압하는 족쇄를 얻기도 했으며, 이익이 되는 과거는 과장 확대하고, 해를 주는 과거는 축소 삭제해 왔다.

-하지만 과거 역시 미래처럼 변화의 가능성이 늘 열려 있는‘낯선 나라’라는 게 저명한 지리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방대한 인문학 지식과 깊은 성찰로‘그리워하고, 돌아보고, 변형시키는’, 인류와 과거의 관계 맺기를 탐구한다. “과거는 아주 다른 존재 방식과 사고와 믿음의 세계이며, 우리가 걸어온 길이되 현재와 단절된 세계이다.”

-특히 향수(노스탤지어)가 일종의 소비산업이 되고, 박물관, 역사테마공원, 유적 등이 관광지가 된 현대에서 과거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저자는 ‘과거 바라기, 과거 알기, 과거 변화시키기’의 세 주제로 과거에 접근한다. ‘과거 바라기’는 소설과 영화, 17~18세기 영국 프랑스, 빅토리아시대 영국, 남북전쟁 전후 미국 등의 구체적 예를 들어가며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심리를 파고든다. “과거는 어떻게 우리를 풍요롭게 혹은 빈곤하게 하는가.

-우리는 왜 과거를 포용하기도 하고 멀리하기도 하는가.”‘과거 알기’는 과거에 대한 지식과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기억, 역사, 유물’이라는 세 경로를 통해 고찰한다. ‘과거 변화시키기’는 과거를 인지하는 행위 그 자체가 과거를 변화시킨다는 묘한 역설을 얘기한다. 현대 미국 영국에서의 과거 유산 복원이나 개조 움직임 등을 통해 인간이 과거를 어떻게, 왜 변화시키며, 그런 변화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핀다.

-저자의 결론은 과거는 계속 변화한다는 것이다. 과거는 각 시대의 요구에 따라 변한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과거는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도, 미래에 볼 과거도 아니다. 과거는 어떤 시기 특정한 사건을 넘어서는 연속적인 기억과 역사와 유물의 누적물이며, 이 점에서 우리를 ‘구속하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대한 선택 가능한 전망을 제공하는 ‘자유롭게 하는’과거가 된다. “과거라는 누적물은 그것들이 시간을 관통해 오면서 사람들에 의해 변화 개조된 부분까지 포함한다. 과거는 그것을 만든 자들뿐 아니라 물려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증거이며, 과거의 정신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전망의 증거다.”

-1985년 출간된 이 책은 국내 책에도 여러 번 인용되는 등 명저로 통했지만 방대한 분량과 쉽지 않은 내용 탓인지 지금까지 번역에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경희대 인문학연구원 전임연구원인 역자들은 후기에서 “다양한 자료와 지식에 매혹되어 논점을 잃는 경우도 허다할 것”이라며, “끝도 없이 고유명사를 제시하며 새로운 지식을 강요하는”이 책을 다 읽는 것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긴 여정’이 될 것이라고 했다(*아무도 나서지 않는 번역으로의 긴 여정에서 돌아온 역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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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과거라는 이름의 외국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5-17 08:17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선생의 비평에세이집이 출간됐다. <과거라는 이름의 외국>(현대문학, 2011). 제목이 좀 낯익은데, 역사학자 데이비드 로웬덜의 <과거는 낯선 나라다>(개마고원, 2006)를 떠올려주기 때문이다. 둘다'The Past is a Foreign Country'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기사를 보니 L. P.하틀리의 소설 <중개인>에 나오는문장이라고(로웬덜의 책은 장서용으로 구입만 해놓고 읽진 않았다). 이

최근에 나온 국내 철학서들 가운데 가장 묵직한 책은 아마도 이상인 교수의 <플라톤과 유럽의 전통>(이제이북스, 2006)일 것이다. 지난주 대부분의 언론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책인데, 여기서는 경향신문에 게재된 김재홍 연구원의 서평을 옮겨놓도록 한다. 예전 같으면 언론사 리뷰들을 알라딘에서도 읽고 참조할 수 있었는데, 새삼스럽지만 그게 법적으로 불가능하게 된 모양이고 이젠 손품을 좀 팔아야 한다. 리뷰/서평의 유익이란 그 책이 읽을 만한가, 읽을 만하다면 언제쯤 읽을 것인가 등을 가늠하도록 해준다는 데 있다. 그건 '프리뷰'의 가장 중요한 취지이기도 하다.  

 

 

 

 

경향신문(06. 06. 24) 고대철학의 오해-왜곡-재해석

-‘플라톤 이래로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脚註)다.’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말이다. 에머슨이란 시인은 단적으로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서양 사상이나 철학 관련 책을 펴놓고 읽다 보면 ‘플라톤’이란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책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어쩌면 유럽 철학 전통 자체가 ‘플라톤적’인지도 모른다. 유럽적 사유의 전통에서 플라톤이 차지하는 위치는 그만큼 중요하고, 그를 통하지 않고는 서양 사상을 논할 수조차 없다. 정작 문제는 그렇게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플라톤이라는 거대한 봉우리를 오른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서양을 바라볼 때, 유럽적 사유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는 오늘날 우리 문화 전반에 깔려 있는 유럽적 사유의 본질적 현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과연 유럽적 사유의 실체는 무엇일까?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본래의 사고 토양을 고대 그리스·로마로 놓고 그들의 사유의 뿌리를 찾으려 했다. 서양을 극복하려면 유럽적 사유체계를 이해해야만 한다. 오늘의 유럽인을 유럽인으로 만든 유럽적 사유의 전통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적으로 플라톤을 봐야 한다(*즉, 유럽적 사유 -> 그리스/로마 -> 플라톤으로 수렵된다는 것).

-지금까지 우리는 늘 유럽적 사유의 뿌리를 유럽인의 근대적 시각을 통해서 바라봐야만 했다. 우리의 ‘고유한’ 시각은 어디에 있었나? 이제는 플라톤을 해석한 근대의 철학자들의 관점을 넘어 ‘플라톤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플라톤을 ‘전근대’라는 전통 속에 가두지 않고 우리의 눈으로 플라톤 그 자체를 보기 시작하는 것이며, 우리의 시선으로 플라톤을 해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유럽인의 눈을 통해 플라톤을 해석하는 작업도 멈춰야 한다. 이제는 우리의 ‘고유한’ 시각으로 플라톤을 바라 볼 때가 됐다.

-누군가 우리와 같은 고전 학자들을 향해 “가라사대 철학”이라고 평가절하하는 발언을 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이라고 하지 않고도 철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플라톤을 말하지 않고 어떻게 서양 철학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 고전을 전공하는 어느 선생님은 “고전을 공부하기 위해선 10년가량 면벽(面壁)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만큼 어려움이 있다는 얘기이다.

 

 

 



-서구적 사고의 원천인 고전 그리스 사유의 중심에 선 플라톤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저서를 읽는 것이다. 아직 플라톤 원전에 대한 온전한 우리말 번역이 다 나와 있지 않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몇몇 작품만이 제대로 번역돼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플라톤 원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가 등장하기란 어렵다. 그렇다고 고전 전문가들이 원전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했다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근대의 자기이해와 고대의 해석’이라는 프로젝트의 영향 아래 구상되고 저술됐다. 이 책은 거대한 학문적 꿈을 가지고 있다. 고전을 지난 시대의 ‘전근대’라는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고, 오늘의 관점으로 동시적으로 바라보려는 태도가 그것이다. 저자의 원대한 학문적 꿈은, “고전학자는 과거의 대양에서 현재의 ‘그물’만으로 작업해서도 안 되고, 현재의 ‘그물’과 구별되는 과거의 ‘그물’을 찾아내고, 그것을 이후에 짜인 ‘그물’과 더불어 미래의 철학의 법정에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 학문적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저자는 그리스인들이 큰 축으로 삼았던 ‘지각과 이성’ ‘인식과 방법’ ‘경험과 과학’ ‘개인과 국가’라는 네 가지 얼개를 제시한다. 이를 바탕으로 현상을 구제하고, 세계를 해석하는 방법을 플라톤 철학의 문제 제기와 해결 방식을 통해 해명하고자 한다. 이런 연구 작업을 통하여 근대의 ‘역사적’ 고대 해석 경향을 넘어 고대의 ‘철학적’ 자기 이해를 규명하려는 학적 야심을 전개해 가고 있다. 네 얼개로 구성되는 일련의 작업이 5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제1장인 고대와 근대로부터 출발해서 각 장에서 별도로 논의되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논의를 통해 유럽적 사유의 전통을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고대 철학에서 찾고자 시도한다. 고대의 관점에 따라 재단된 ‘고대 철학 고유의 모습’을 드러내고, 역사적 연속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려진 잘못된 규정을 통해 고대가 어떻게 오해되고 왜곡됐는지를 밝혀내고 있다. 저자는 이 연구를 통해 ‘서양 고대’를 도식적인 해석으로부터 구제하고, 고대 철학을 다시 현대의 철학으로 만날 수 있는 방식을 제기하고자 한다.

-저자의 학적 능력이 되는 독서는 플라톤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 이전부터 시작해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신피타고라스주의, 히포크라테스, 그리고 근대 헤겔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영역에 학적 역량이 미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책의 부피도 만만치 않다. ‘큰 책은 큰 악(惡)’이란 말이 있지만, 저자의 작업에는 큰 책만큼 큰 악은 없고, 작은 악만이 있을 뿐이다. 독서하기가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저자의 날렵한 필치가 유럽적 사유를 좇는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머물도록 독자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김재홍|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선임연구원)

06. 0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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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 이메일로 배달된 '창비주간논평'에서 문학평론가 김영찬의 '괴물의 정치학이 문학에 들려주는 이야기'를 옮겨온다. 페이퍼의 제목은 '괴물의 정치학'으로 줄였다. 처음 타이틀만 보고서는 봉준호 감독의 신작 <괴물>을 떠올렸지만, 그건 아니었다. 하긴 아직 개봉하지도 않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일 리는 만무하다. 아무튼 2000년대 중반 한국문학과 문화의 한 트렌드를 읽는 데 도움을 주는 유익한 논평이다.

 

 

 

 

-박찬욱의 영화 <올드보이>에서 우리의 오대수는 말한다. "나는 이미 괴물이 되었다." 비단 오대수뿐인가. 이것은 최근 파괴적인 욕망과 충동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리거나 파국으로 치달아가는 한국영화 주인공들의 공통된 자기선언이다. 그러고 보면 일찍이 "괴물은 되지 말자"고 반복해 다짐하던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 주인공의 호소는 이들에겐 전혀 먹혀들지 않았던 듯하다. 과연 그렇다. 최근 한국영화의 일각에는 괴물들이(혹은 괴물이 되어가는 자들이) 성업 중이다.



-가령 <올드보이>를 포함한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은 모두 복수의 괴물이 출연하는 비극이고, 김지운의 <장화, 홍련>과 <달콤한 인생>은 저도 몰래 우연히 맞닥뜨린 불가항력적인 절망의 고통에 죄의식과 분노를 토해내며 괴물이 되어가는 자들의 이야기다.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과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의 인물들 또한 치유되지 않은 80년대의 상처를 짊어지고 편집증적 괴물이 되어간다. 그러니 이쯤에서 물어보자. 대체 이 난데없는 괴물들의 출현은 어찌된 일인가?

-일단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모두 상업적 대중영화의 상상력과 문법을 빌려 작가의식을 실현했다는 데 있다. 최근 한국영화 속의 괴물은 그렇게 작가주의가 호러와 범죄물 같은 대중적 장르영화의 과잉의 상상력을 끌어들여 빚어낸 형상이다. 더욱이 그 괴물의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것이 스크린 가득 흘러넘치는 피와 폭력, 화면구도를 과격하게 일그러뜨리는 불안과 공포, 격렬한 심리적 갈등과 분노의 분출이라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당연하다. 통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일면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그런 측면에서 상업적 코드에 붙들려 있는 것이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여기에서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그 속에 은밀히 잠재한 정치적 환기력이다.

-정치적이라니. 뜬금없는 얘기 같지만 그렇지 않다. 따져보면 분노와 죄의식이 뒤범벅된 운명론적 비극의 드라마와 그것을 장식하는 과도하고 현란한 스타일을 통해 이들 영화가 은연중 헤집으며 건드리는 것은 최근 한국사회 현실의 모순 속에서 배태된 대중적 (무)의식과 공통감각의 성감대다. 저 괴물의 이야기를 통해 나름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한국영화의 새로운 형태의 정치-윤리학 또한 저 자신의 방식으로 그에 대처하는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는 이른바 비판적 작가주의 영화의 정치성이 이제 <박하사탕>이 대표하는 이창동식 리얼리즘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 영화의 정치적 함의는 역설적이게도 너무도 비현실적이고 그래서 당연히 탈정치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극단적이고 파국적인 상황(예컨대 근친상간이나 우주인의 침공)에서 분출하는 폭력과 뒤틀린 정념 속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너무도 극단적이기에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그 사건의 파국을 몸소 떠안고 파멸로 치달아가는 괴물들의 일그러진 정념과 무력한 몸부림을, 이들 영화는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중요한 것은 저 사건들의 치명적인 파장과 갈등은 불가항력적이고, 해결할 수도 없으며, 화해는 더더구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러니 당연히 감정은 격해지고, 파국은 숙명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것이 이와 반대로 역사와 현실의 계기들을 이야기에 끌어들이면서도 그 속의 위기와 갈등을 결국은 낭만적인 화해를 통해 봉합해버리는 <웰컴 투 동막골>이나 <태풍>류의 영화언어와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 것인지도 여기서 함께 기억해두자. 여하튼 그럼으로써 이들 영화가 은유적으로 드러내놓는 것은, 지금 한국사회의 근원에 숨어 가로놓여 있지만 지배질서와 지배언어 속에서는 결코 포섭할 수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적대적인 갈등과 결여, 절망적인 심리적 위기와 교착이다.

-이 근저에 있는 것이 포스트-IMF시대의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심리적 불안과 위기라는 점은 필히 덧붙일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이를테면 희망과 가능성이 질식된 시대의 심리적 풍경이다. 한국사회의 일상과 씨스템을 재구조화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지배와 그로 인한 양극화의 고착과 심화는 가령 독재나 IMF위기의 시기에 그러했듯 그렇게 눈에 보이는 장애를 극복하면 무언가 나아지리라는 역설적인 희망을 갖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 듯하다. 독재는 사라졌고 경제위기는 극복했음에도 무언가 나아지기는커녕 삶의 조건은 한없이 악화되어가고 나날의 삶을 옥죄는 자본의 지배와 모순은 더욱 심화되어간다는 실감이 지금의 공통감각이다. 하물며 그것이 대중들이 막연히 민주주의세력 혹은 '진보'라고 생각했던 집단에 의해 가속화되고 있음에랴. 미래는 여기서 결코 더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숙명론과 체념적인 인식은 그런 가운데 나오는 것이다.



-한국 작가주의 영화의 비판적 정치의식이 그렇게 극단적인 과잉의 상상력을 통해 표출되는 것은 정확히 이런 현실에 조응한다. 불가항력적이고 해결할 수도 없는 절망적 상황에 휩쓸려 괴물이 되어가는 인물이 맞닥뜨리는 치명적인 위기와 곤경은, 해결될 가망이 보이기는커녕 근원에서 악화되어가는 한국사회의 실패와 결여, 적대의 지점을 헤집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비극적인 우연과 불확실함이 지배하는 폐쇄된 세계, 그 속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악순환, 스스로 괴물이 되어 파멸로 치달아가는 인물들의 절망적인 심리, 치명적인 죄의식과 원한 등은 그런 실패와 적대 속의 주체의 불안과 위기를 응축하고 전시하는 영화적 증상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조금 다르긴 해도 최근 한국문학에서 부각되는 탈현실적인 허구 속에 스며 있는 신경증적 불안과 폐소공포, 절망적인 파국과 죽음의 이미지, 극단적인 환상의 문법 등을 그와 방불한 맥락에서 읽고픈 유혹을 느낀다. 물론 여기에는 똑같은 시각에서 볼 수만은 없는 장르와 세대의 차이, 정치의식의 편차 등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현재 한국문학에는 현실에 대한 민감한 감각에 뒷받침된 문학의 정치적·윤리적 책임의식과는 무관하게 자아에 고착된 자폐적인 실험에 안주하는 소설이 일부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그렇다면 예컨대 편혜영의 죽음과 악취의 미학이나 박민규의 장편 <핑퐁>이 보여주는 놀랍도록 음울한 종말의 환상은 어떤가?

-이 물음에는 짐작하다시피 얼마간의 긍정과 부정이 섞여 있다. 하지만 친절한 대답과 해명은 이 짧은 글에서는 불가능하니 일단은 뒤로 미루고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우리가 이들 한국영화에서 적극적으로 읽어야 하는 것은 이런 물음이다. 결코 일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저 끔찍한 상황을, 결국은 나 자신일지도 모를 저 괴물-타자들을 대체 어찌할 것인가?

 

 

 



-이런 물음이 일깨우는 것은 다름아닌 이를 제대로 사유하고 감당할 수 있는 정치와 윤리의 언어가 우리에겐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다. 물론 앞서 본 한국영화의 정치-윤리학은 아직은 모호하고 또 일면 타협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 영화가 그런 불안과 위기를 봉합하거나 섣불리 화해시키지 않는 한, 그것은 바로 그 속에서 새로운 정치와 윤리의 지점을 새로운 언어로 숙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한국문학에서도 그것은 아직 잠재적인 가능성일 뿐이다. 하지만 기왕에 탈현실의 허구를 끝까지 밀고 나가기로 작정한 문학이라면, 그 점은 한국문학이 한켠에서 열어가야 할 또다른 방식의 새로운 정치와 윤리의 언어를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함께 기억하고 탐구해야 할 지점이다.

06. 0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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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06-28 08:49   좋아요 0 | URL
울며 겨자먹기이든 자발절 동의이든 우리 사회가 탈출구가 없는 강박의 벽에 휩싸여 있다는 생각에 공감이 갑니다.불안과 위기의식,분노 등이 영화에서 어떤 형태로 외연화되고 있는 지 생각해 볼 내용인 듯 합니다.영화적 상상력이 실생활에서 그대로 구현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강박과 불안이 이미 우리 안에도 자리잡고 있음을.....

로쟈 2006-06-28 15:19   좋아요 0 | URL
개별 텍스트를 들여다볼 때는 잘 드러나지 않는 점들이 좀 거리를 두고 모아놓으면 보일 때가 있는 듯합니다. 비평은 그렇게 좀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지요...

비자림 2006-07-01 21:59   좋아요 0 | URL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더 희망적인 영화, 더 긍정적인 영화를 기다려 본답니다. 우리 사회의 최근 세태, 한국인의 심리 기저를 반영한 것이 영화로 탄생되었겠지만 영화가 다시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도 큰 것 같아요. 특히 조폭이 많이 등장하고 더 화끈한 장면을 연출하다 보니 더 잔혹한 장면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 어떨 땐 이걸 보는 십대들의 정서가 걱정된답니다.

기사와 다른 생뚱한 이야기 늘어놓아 죄송합니다. ^^

로쟈 2006-07-01 22:13   좋아요 0 | URL
기사를 보니 <가족의 탄생>이 영화담당 기자들에게 상반기 최고작으로 꼽혔더군요. 말씀하신, '더 희망적인 영화, 더 긍정적인' 영화에 속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십대들의 정서'를 걱정하시는 모습에서 비자림님의 연배가 얼추 짐작되는데요.^^

비자림 2006-07-01 22:39   좋아요 0 | URL
앗, 저는 왜 이렇게 잘 들키는 지 모르겠어요.
제 나이는 스물아홉인데 로쟈님은 서재이미지로만 봐서는 알 수가 없군요. 끌끌
(정서연령 스물아홉, 정신연령 열아홉, 지식 연령 아홉, 호호호 이 지적이고 진지한 로쟈님 서재에서 까불어서 죄송합니다.)

로쟈 2006-07-01 23:41   좋아요 0 | URL
'호호호'라고 웃으시니까 확실히 여성이시고, '스물아홉'이라고 하시니까 최소 열살 이상 더 얹으면 되겠군요.^^
 

안토니오 네그리와 조르지오 아감벤, 두 이탈리아 철학자의 책들을 읽어보는 것도 올해 내가 갖고 있는 계획 중의 하나이다(그들의 모든 책들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주요 저작들은 구해놓은 지 오래다). 언제나처럼 이 계획도 '계획서'라는 평면을 넘어서는 게 쉽지 않겠지만, 여하튼 나는 내 여력이란 그물망 너머로 일단은 집어던져 보고자 한다(걸리면 하는 수 없는 것이고).

일단 네그리와 관련하여 내가 책상에 올려놓은 책은 아래의 다섯 권이다. 윤수종 교수의 소개서 <안토니오 네그리>(살림, 2005)를 제외하면 모두 번역서이고 이 책들의 영역본들도 최근에 모두 구했다(<제국>은 원저가 영어본이며 이 원서는 번역본이 나오기 전에 마스터본이 돌아다녔고 나도 그때 구했다. 참고로, <제국>의 러시아어본은 재작년에 출간됐다).

 

 

 

 

'네그리가 말하는 네그리', <귀환>과 <안토니오 네그리>를 읽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고, <혁명의 시간>(갈무리, 2004)부터는 좀 공을 들여야 할 듯하다. 여기서는 워밍업 차원에서 출간 당시의 서평만을 일단 먼저 읽어보기로 한다. 홍철기씨의 "'가난한 사람'들의 혁명적인 유물론을 위하여"가 그것인데, 월간 <말>(2004년 7월호)에 실려 있으며 나는 자율평론 홈피에서 옮겨온다('자율평론'은 국내 네그리언들의 '아지트'이며 네그리 관련자료들을 다수 참조할 수 있다).  

자율평론 제9호(2004. 07. 07)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이 전쟁과 평화라는 이분법을 넘어서 전지구적 자본주의에서 인류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가? 이것이 <제국>(마이클 하트/안토니오 네그리, 윤수종 옮김, 서울: 이학사, 2001)의 공저자 중 한 사람인 이탈리아의 유물론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가 그의 새로운 책, <혁명의 시간>을 통해 대답하고자 시도하는 질문이다. 저자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유물론 자체가 관념론에 의해 오염된 상황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유물론 속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있는 관념론의 언어들로부터 분리되어 유물론이 자신만의 언어로 이루어진 논리학과 인식론, 그리고 존재론을 획득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네그리의 주장은 관념론과 뒤섞여있는 정통 맑스주의의 유물론으로부터 맑스의 유물론를 구하고자 하였던 알튀세르의 작업의 연장선상 속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알튀세르는 그의 이론적인 작업을 통해 진정한 유물론은 기계론적인 경험주의와 목적론적 관념론과의 연속성 속에서, 즉 동일한 척도와 언어, 방법론을 가지고 보다 우월한 형태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들과는 필연적으로 불연속적이며 단절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그의 후기 사상에서 알튀세르가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에 대한 독해를 통해 발전시킨 “우발성의 유물론”은 네그리가 말하려는 “유물론적 목적론”과 여러 모로 닮아 보인다.

-유물론적 목적론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유물론적 목적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는 형용모순이거나, 이율배반이 아닐까? 세계가 물질로만 이루어져있다는 유물론과 세계가 미리 정해진 방향과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는 목적론이 어떻게 화해되고 종합될 수 있을까? 네그리에 따르면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유물론과 목적론에 대한 기계론적이고 초월적인 정의에만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유물론은 사실 진정으로 유물론적인 것이 아니라 다만 기계론적 유물론의 후예이며, 또한 목적론이라는 것도 다름아니라 초월적이고 관념론적인 목적론이라는 것이 네그리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기계론적 유물론과 초월적 목적론은 명시적으로는 상호배타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결국 서로를 필요로 한다.

-일찍이 파스칼은 데카르트의 완벽한 기계론적 세계는 “항상 신이 ‘살짝 등을 떠밀어주는 것’이 필요”(p.216)하다고 비꼬았는데, 이는 초월적인 목적론과 기계론적 유물론의 암묵적이지만 또한 필연적인 ‘담합’의 관계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담합’관계는 근대의 시작과 함께 자본주의와 주권을 신비화하고 찬양하는 논리로, 그리고 나아가 권력작용의 일정한 부분을 담당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근대 혁명사상과 유물론 자체까지도 오염되는 데까지 이르는데, 네그리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바로 이러한 관념론에 의한 유물론의 오염의 증거라고 본다. 이는 유물론자에게는 ‘실어증적 상황’인 것이다(p.14).

-사실 기계론과 목적론간의 담합, 혹은 조화로운 관계를 지적한 것은 네그리나 알튀세르가 처음은 아니다. 이미 맑스 또한 고전 경제학파의 경험주의와 헤겔의 관념론을 동시에 비판했으며, 철학과 사회과학의 외부에서는 생물학자들이 이 문제에 몰두하였다. 왜냐하면 진화와 같은 생명계의 특유한 현상은 기계론과 목적론 모두에 의해 그에 대한 합리적 설명이 봉쇄되기 때문이다.

-특히 고전적 물리학의 모델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기계론적 세계관은 여러 가지 변형을 낳으면서 20세기에 들어서도 자연과학의 정체성을 규정해왔으며, 과학철학의 모든 논의를 진행하는데 있어서 모범적인 모델로 받아들여져 왔다는 것에 생물학자들은 비판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물질세계가 기계론적이며 무력하다는 생각과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물질세계에 창조성을 부여하는 목적론적 힘이 ‘요청’되어야 한다는 생각 모두를 거부하면서 물질세계 자체에 존재하는 가변성과 창조성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물질개념을 혁신함으로써, 물질세계를 초월한 창조성의 근원을 찾을 이유가 결코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생물학자들은 생물학의 경험과학으로서의 지위의 문제에 자신들의 발견의 성과를 제한함으로써 다른 가능성들을 봉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생물학자들의 에피소드는 최소한 두 가지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첫째 기계론(실증주의)과 목적론(보편적 진리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탈근대주의적 ‘담론 이론’이라는 유행의 산물이라고 간단히 기각될 수 없다. 이는 물질세계 자체의 문제이며, 그렇기 때문에 유물론적으로 정식화되어야한다. 둘째, 물질개념의 혁신, 즉 유물론의 재정식화는 바로 정치적이고 철학적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유물론은 단지 우주론적인 문제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카이로스, 시간의 측정불가능성
-이러한 유물론의 재정식화를 위해 네그리가 중요시하는 것은 바로 시간의 개념이다. 시간 개념의 정의는 물질 개념의 혁신에 선행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기계론적 유물론이 그랬듯이 물질에 대한 ‘연장’적 사고가 바로 시간에 대한 외연적이고 공간적인 표상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을 ‘길이’로 표상하는데 익숙하다. 하지만 시간에 대한 외연적 사고는 우연히도 자본주의의 작동방식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유명한 말처럼 자본주의에서 “시간은 돈이다”. 그러나 사실 문제는 “시간이 어떻게 자본주의하에서 돈인가?”이다.

-맑스는 자신의 잉여가치 이론을 통해 이 질문에 정교한 답변을 내놓으려 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가 바로 네그리를 맑스주의의 논쟁 한가운데 위치시켰다. 네그리에 따르면 정통 맑스주의는 프랭클린의 정식을 단지 “시간은 가치이다”, 혹은 “가치는 측정되는 시간이다”로 바꿔 놓았을 뿐이다. 이는 맑스 자신의 설명 방식으로부터 유래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맑스는 가치를 외연적 시간인 ‘척도로서의 시간’에 의해 측정되는 것으로 설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니어에 대한 비판을 포함한 <자본론>의 여러 구절들에서 시간이라는 ‘양’으로 표현되는 가치에 대한 외연적 접근은 잉여가치의 본질과 그 기원을 보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있다.

-‘척도로서의 시간’은 이른바 과학적인 지위를 얻음으로써 자본의 착취에 대한 권리의 객관성을 보장해준다. 즉 1시간의 길이동안 타인의 노동력을 사용할 권리를 얻는 것의 객관성이 보장된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잉여가치는 그렇게 설명될 수 없다. 자본주의하에서는 원리상으로는 단 1초의 노동에 의해 생산된 가치도 잉여가치율에 의해 분할된다. 시간의 길이에 의해 이 분할을 설명하는 것은 단지 편의를 위한 것일 뿐이며, 이것을 본질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맑스 자신이 비판한 시니어의 사고방식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오히려 잉여가치는 매순간 추출된다. 그리고 ‘척도’, 혹은 ‘연장’으로서의 시간 개념은 시간을 균일하게 분할함으로써 그것을 넘어서는 창조성을 잉여가치의 신비한 몫으로만 돌린다. 이는 ‘시간에 의한 공간의 절멸’이라고 이해되는 탈근대적 자본주의에서는 훨씬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연장으로 이루어진 시간에서는 창조적 사건이 발견”될 수 없다(p.62).

-이런 관점에서 시간은 단순한 길이와 지속으로서만 정의되기 때문에 그 내적인 논리라는 것은 제거되어 버리고, 시간을 지배하는 논리는 언제나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결국 외연적으로 정의된 시간 개념은 자본주의판 ‘제논의 역설’을 만들어 낸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물질적 생산의 창조성은 척도로서의 시간을 넘어설 수 없다. 하지만 이 ‘역설’은 외연적인 시간관을 가능한 한 가장 비현실적인 형태로 그 극단까지 밀고 나간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어떤 진실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 즉 “순간만이 존재론적으로 현실적”이고 또한 생산적이라는 것이다(p.58).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필연적으로 “시간의 유물론”, 혹은 “물질의 시간성”이라는 개념에 도달하도록 만든다. 이때 시간은 ‘길이’가 아니며 물질은 시간성에 의해 ‘운동’으로만 이해되어야 한다.

-네그리가 자신의 고유한 ‘시간의 유물론’을 구성하기 위해 발견한 것은 서양 철학 전통에서의 ‘카이로스’라는 시간 개념이다. ‘카이로스’의 관점에서 시간은 화살을 쏘는 것이며 순간으로서의 현재는 바로 이러한 비가역적인 궤적을 그리는 화살촉의 끝이다. 이 화살촉의 끝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불연속적인 순간을 지칭한다. 즉 이러한 시간관에서 미래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으로, 과거는 이미 실현된 것과 같이 봄으로써 과거와 미래를 동질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만일 과거와 미래가 하나의 연속된 흐름이고 현재(순간)는 이 둘 사이의 단순한 가교라면, 이 흐름은 이미 목적이 그 기원에서 정해진 것이거나, 기원에 대한 동어반복, 둘 중에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와 달리 카이로스는 “순간의 목적론”이며 “사건의 텔로스”이다(p.53).

 

 

 

 

-이렇게 이해될 때, 시간은 곧 ‘이전’과 ‘이후’ 사이의 “생산의 측정불가능성”이다(p.74). 이 ‘측정불가능성’은 ‘측정가능성’의 부정으로서의 ‘막연하거나 불확정적인 것’이 아니며, 그런 점에서는 진정으로 측정자체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의 잉여가치의 존재는 이 순간의 ‘측정불가능성’과 ‘측정가능성’ 모두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잉여가치는 생산이 반드시 ‘측정가능성’에 종속되었을 때에만 추출될 수 있는 것이지만, 또한 척도로서의 시간을 넘어서는 ‘측정불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생산 자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 혹은 다중
-이 단계에서 네그리의 유물론적 목적론은 아직은 충분히 정치적인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바로 그것을 실천하고 구성하는 주체성으로서의 ‘가난한 사람들’이 이야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그리에 따르면 자본주의, 특히 그것의 탈근대적 단계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바로 유물론적 목적론을 실천하는 ‘전위’이다(*개인적으론 이 대목이 눈길을 끌어서 <혁명의 시간>을 읽어볼 생각을 갖게 되었다. 지난 2004년 모스크바에서부터). ‘가난한 사람들’은 대중의 자생성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며, 그들을 ‘전위’라고 부를 때에도 그들이 레닌주의적 당에 부여되는 ‘의식성’을 표상하기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 전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한나 아렌트가 1943년에 망명자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인민의 ‘전위’라고 말했던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일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자본주의적 폭력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러한 폭력에 노출된 ‘벌거벗은 삶’이기 때문에 그들이 전위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들은 전위이기 때문에 이러한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아렌트가 말했듯이 국가로부터 탈출하는 망명자들이 국민으로서 주권에 종속된 인민들의 전위인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노동자로서 자본주의의 부에 종속된 대중의 전위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위란 공간적인 의미에서의 ‘외부’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국가의 내부적인 망명자들(국민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했으나 여전히 공간적으로는 그 국가 내부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존재가 증명하는 것처럼, 그리고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망명한 사람이 ‘국가’ 자체의 외부에 도달한 것은 아닌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자본주의 내부의 ‘망명자’들이다. 탈근대적 자본주의하에서 빈자는 배제되기는 하지만 “이 배제는 세계의 생산 ‘내부에서’ 일어난다”(p.138).

-네그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혁명적인 주체성으로 제시하는 것은 그들이 ‘곤궁, 무지, 질병’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완전한 의미에서의 삶정치적 주체”(p.130)이며, 그렇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이미 죽음을 극복한 사람”(p.135)들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네그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집합적 실천과 구성의 테크놀로지를 통해 ‘공통적인 것’의 생산에 참여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삶의 가치와 공통적인 것의 부정은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이며 자본주의적 폭력이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자본주의와 실질적인 적대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거꾸로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러한 '적대관계'를 얘기하는 건 겉멋이거나 자기모순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전위로서 선언하는 것은 정치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들은 주권 이론의 역사에서는 바로 ‘다중’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자본주의적 부의 외부와 너머의 주체성을 지칭하는 것처럼, ‘다중’은 근대적 주권의 초월성과 마찬가지의 관계를 가지는 주체성을 지칭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권과 그 이론의 역사에서 네그리가 비판의 초점을 맞추는 것은 홉스나 루소, 혹은 헤겔이 아니라 베버와 슈미트이다. 홉스, 루소, 헤겔은 이미 지나가 버린 주권 역사의 이론가들이다.

-이들과 달리 20세기초의 베버와 슈미트는 모두 국가가 경제적이고 법적인 합리성에 종속됨으로써, 19세기의 자유주의적 사회에 상응하는 헤겔적인 국가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으며, 그런 이유에서 국가 자체가 이제 진정으로 ‘주권의 초월성’의 장소가 될 수 없다는데 생각을 같이 하였다. 이러한 주권의 위기에서 이들이 탈출구로 생각한 것은 바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이다. ‘정치적인 것’은 경제적인 것, 혹은 법적인 것과 구분되는 고유성을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고유성에 근거해서만 순수하게 자율적인 정치적 결정이 가능하다. 즉 정치적 결정의 초월적 근거가 보장되는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경제주의, 즉 자본주의적 합리성에의 종속으로부터의 탈출구를 찾던 동시대의 혁명이론과 실천은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이라는 것을 매우 결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른바 외부의 의식성, 혹은 자율적인 상부구조는 바로 이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의 다른 이름이다. 레닌주의는 경제의 외부만을 생각하고 주권의 외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결국 경제적인 종속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과제를 주권에의 참여로 돌려놓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전위로서의 ‘가난한 사람들’이 자본주의적 부로부터의 탈출의 방향을 지시하며 또한 그것을 구성하듯이, 다중은 주권에의 참여와 “복종으로부터의 탈출, 즉 척도에의 참여로부터의 탈출”(p.195)이라는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

-네그리의 <혁명의 시간>은 생소한 철학적 개념들과 언어로만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현재의 자본주의에 대한 현상적인 기술에 치중했던 <제국>과는 달리 독해와 이해가 쉽지 않은 책이다. 게다가 저자의 말처럼 우리가 유물론자의 ‘실어증적 상황’에 빠져 있다는 것이 현실이라면 문제의 해결은 훨씬 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의 타개가 절실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분명 읽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06. 0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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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6-27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사이 로쟈님 페이퍼는 일단 제목들이 죽이네요:) 즐겁게 낚이고 갑니다.

로쟈 2006-06-28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고안해낸 제목들도 아닙니다. 옮겨오는 입장에서는 필자들의 뜻을 존중해야 하는지라...

꿈꾸는돌 2006-10-27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고맙습니다 ^^ 네그리에 관심은 많은데 책 읽기가 쉽지 않네요. 내공이 워낙 부족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