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북리뷰를 훑어보다가 지난달에 미처 챙기지 못한 기사를 뒤늦게 옮겨놓는다. 한국의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다룬 두 권의 책을 다룬 기사다. 자본주의 비판서와 마르크스주의 설명서가 이주의 책들인 걸 고려하면 요즘의 한 트렌드가 보인다. 지주형의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책세상, 2011)과 문지영의 <지배와 저항 - 한국 자유주의의 두 얼굴>(후마니타스, 2011)도 그런 배경하에서 같이 읽어봄직하다.

 

한겨레(11. 11. 30) 한국판 신자유주의·자유주의의 두 얼굴

 

‘자유주의’가 새삼스럽게 화두다. 역사교과서를 두고서는 ‘자유주의’가 앞에 붙은 자유민주주의가 민주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따져봐야 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두고서는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흘러오고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특히 ‘서구로부터 이식된 것’이라는 피상적인 인식을 넘어, 그것이 우리 사회에 어떻게 자리잡았는지 적극적으로 풀이해내는 것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때마침 신자유주의와 자유주의라는 개념의 ‘한국적 맥락’을 파헤친 책이 각각 나왔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지주형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가 최근 써낸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책세상 펴냄)은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에 정착한 과정을 총체적으로 추적해 정리한 책이다.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는 ‘달러-월스트리트’ 체제와 국제통화기금(IMF)과 같은 지배 블록 등으로 뒷받침되며, ‘금융화’를 그 핵심으로 삼는다고 알려져 있다. 지은이는 이런 밑그림에다 ‘위기 관리의 과두적 지배’라는 한국적 맥락을 연결시켰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이미 1970년대 말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도했던 엘리트 관료들이 있었고, 이들이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정책을 펼치게 됐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한국의 지배적인 자본축적 전략이었던 ‘개발국가’ 모델이 그 생명력을 다해가는 과정에서, 소수의 관료가 주축이 되어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1979년 ‘경제안정화 시책’ 등에서 볼 수 있듯, 당시 강경식 경제기획부 기획차관보, 김재익 경제기획원 기획국장, 김기환 경제기획원 장관 보좌역 등은 물가안정 및 시장개발을 중심에 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추구했다. 당시 여러가지 이유로 좌절된 그들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민주화 뒤 ‘전문 관료’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서서히 부활했고,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아 주도권을 쥐게 됐다고 한다. 강경식씨는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으로 복귀했고, 김기환씨는 대외경제협력담당 특별대사로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에 핵심적 구실을 했다.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낸 신자유주의적 전환은 오늘날 ‘한-미 자유무역협정’에까지 이르고 있다.

지은이는 “한국 경제의 모습을 현재와 같이 만들고,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를 심화하고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방해하는 각종 자유무역협정과 동북아 금융허브 정책을 추진한 것은 바로 이들 소수 권위체의 폐쇄적이고 독단적인 결정과 행위”라고 비판한다.

곧 개발국가의 한계를 넘어서는 대목에서 관료-재벌-초국적 자본으로 이뤄진 ‘과두 권력’이 신자유주의라는 카드만을 내밀고 관철시켰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경제적 의사결정에 있어서의 독과점 폐지와 민주주의의 확대”라고 강조한다. 현재 거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 반대 집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로 봐야 한다는 관점이다.

 



문지영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이 쓴 <지배와 저항-한국 자유주의의 두 얼굴>(후마니타스 펴냄)은 자유주의의 한국적 맥락을 밝힌 책이다. 지은이는 그동안 자유주의를 ‘부르주아 계급 이념’ 정도로만 치부했던 경향을 비판하며, 한국 자유주의에는 ‘지배와 저항’ 양면적 성격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지배층의 공식적인 지배 이념이기도 했지만, 이에 대항하는 ‘저항적 자유주의’로 발전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개화기 때부터 근대국가 수립 등을 목표로 투쟁했던 지식인들의 주체적인 노력들 속에서 한국 자유주의의 흐름을 꿰어본 지은이는 “자유와 권리에 대한 사유가 개인보다는 민족·민중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국가를 중시하고 안보의 가치에 민감한 것 등 서구 자유주의와 구분되는 한국적 자유주의의 특징이 있다”고 정리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함께 복지·분배 정의를 요구하는 ‘경제적 민주주의’가 나란히 설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이런 분석에 따르면, 정치적 자유주의를 극단적으로 배제하고 경제적 자유주의만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는 한국적 자유주의의 흐름과 성과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거부하는, ‘맞지 않는 이념’이 된다. “단순한 경제적 자유주의나 서구적 개인주의는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강화가 아니라 변질 내지는 퇴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는 저항적 자유주의를 반공주의에 기댄 지배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로부터 분리시키고, 앞으로 더욱 발전시켜가야 한다고 주장했다.(최원형 기자)

 

11. 12. 16.

 

P.S. 신자유주의에 대해선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과 같은 글로벌정치경제(GPE) 시리즈로 나온 장석준의 <신자유주의의 탄생>(책세상, 2011)도 읽을 거리다. 데이비드 하비의 <신자유주의>(한울, 2010)은 신자유주의의 간략한 역사를 다루며, <신자유주의 이후의 한국경제>(시대의창, 2009)는 '절망으로 가는 한국경제'에 대한 진단과 전망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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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책&(401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세계 인구` 문제를 주제로 다뤘다. 2011년 세계인구가 70억을 톨파한 해로도 기억되기에 마지막 달력을 넘기며 이 `유례없는 시대`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봄직하다.

 

 

 

책&(11년 12월호) 지구는 늙어 가는가?

 

2011년도 ‘마지막 잎새’ 같은 달력 한 장만을 남겨놓고 있다. 2011년이 갖는 여러 가지 의의가 있겠지만 인구학자들에겐 단연 세계인구 70억을 돌파한 해로 기억됨직하다. 하지만 ‘70억’이 비단 인구학자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수치는 아닐 것이다. 200년 전인 1800년에서 지금까지 세계인구가 약 10억에서 70억으로 늘어났다고 하면 ‘세계인구’ 문제에도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의 발단과 성격, 그리고 전망에 대해 알아둔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이해도 한 뼘쯤 늘어날 것이다.


이탈리아의 인구학자 마시모 리비-바치의 <세계인구의 역사>(해남)는 ‘간략한 역사’다. 하지만 전문학자의 책답게 인구문제에 대한 이론적‧통계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가령 “오늘날의 인구는 어째서 60억 명이 된 것일까? 왜 1,000억이나 1억 명이 되지 않았는가?”라는 게 그가 묻는 질문 가운데 하나다. 이유는 인구증가 경로의 방향이 다양한 원동력과 장애물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생물학자들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두 가지 전략을 구분하는데, 곤충과 어류 및 작은 포유류는 불안정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다산(多産) 전략을 취한다. “생명은 복권과 같은 것이고 따라서 복권을 많이 사는 게 의미가 있다”는 게 이러한 전략의 모토다. 반면에 중간 크기 이상의 포유류나 몇몇 조류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환경 속에서 서식한다. 생존경쟁을 향한 압력 때문에 새끼를 기르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 하고, 이런 투자는 새끼의 수가 적을 때 가능하다. 즉 생존가능성이 높을 경우에는 출산에 승부를 거는 것이 아니라 보호와 양육에 초점을 맞춘다. 인간이란 생물종의 기본전략도 마찬가지다. 원론적으로 인구의 잠재적 증가는 한 여성당 출산의 수, 그리고 출산시의 기대수명이라는 두 가지 변수에 의해 결정된다.


‘라루스 세계지식사전’ 시리즈의 하나로 나온 카트린 롤레의 <세계의 인구>(현실문화)는 좀더 쉽게 세계인구 문제의 전체적인 윤곽을 잡아준다. 저자에 따르면 인류가 지구에 출현한 이후로 인구가 갑자기 증가한 시기는 이전에도 몇 차례 있었다. 따라서 위생관념의 발달만으로는 급속한 인구증가를 해명할 수 없다. 또한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한 과도기가 지나면 한동안 안정기를 맞게 된다는 사실도 인구사는 말해준다. 하지만 그 안정기에 도달할 때까지 세계인구는 100억-110억에 이를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전망이다. ‘인구혁명’이란 말까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무엇이 인구 변천을 가져오는가. 인구의 이동은 아니다. 지구인이 다른 행성으로 이주해가지 않는 이상 세계인구의 변화는 출생률과 사망률에 달려 있다. 특히 중요한 요인은 사망률이다. 18세기 인구의 평균수명은 25세였고 오늘날은 67세이다. 18세기에는 25세 이전에 모두 죽었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당시에는 영아사망률이 높아서 인구의 절반 이상이 20세가 되기 전에 사망했다. 영유아 사망률이 본격적으로 감소한 것은 예방접종을 실시하면서부터인데, 200년 전에는 1세 이하의 여아 다섯 명 가운데 하나 꼴로 목숨을 잃었지만 지금은 1,000명에 3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듯 영아 생존율이 낮아지면서, 그리고 피임법이 발달하면서 선진국에서는 출산에 대한 인식도 변화하게 됐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가난한 후진국, 특히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이남에서 출생률이 높은 것은 에이즈의 확산으로 영아사망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우리는 체감하기 어렵지만 에이즈는 세계인구 전망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큰 변수 가운데 하나다.


20세기 들어서 세계인구 변화와 관련하여 가장 두드러진 추세는 도시화와 고령화이다. 현재 세계인구의 절반가량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2050년에는 10명 중 7명이 도시에 살게 될 전망이고, 인구증가율이 높은 지역 또한 모두 도시권이 될 것이다. 급속하게 진행중인 고령화는 도시화 이상으로 세계의 모습을 바꿔놓고 있는데 ‘고령화, 쇼크인가 축복인가’란 부제를 달고 있는 테드 피시먼의 <회색쇼크>(반비)는 이 문제에 대한 종합보고서이다. 세계 각지의 고령화 현장에 대한 르포와 인터뷰를 전하면서 고령화와 관련한 여러 가지 지식과 정보를 간추려준다. 그에 따르면 고령화는 도시화와 무관하지 않다. 현대화된 도시가 인간의 수명을 늘린 한 요인이기 때문이다. 농촌에서는 누릴 수 없는 서비스를 도시에서는 가난한 사람도 누릴 수 있다는 게 이유다.

 

장수의 요건에 관한 지적이 흥미로운데, 그것은 20세기 이후에 태어나는 것과 가능하다면 부유한 선진국에서 태어나는 것, 두 가지다. “이것에 필적할 만한 다른 요인은 전혀 없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20세기 중반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한 현대의학이 인간의 기대수명을 늘리는 데 공헌했고 선진국은 포괄적인 공중보건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서이다. 덧붙여 과거에 비해 훨씬 많은 의학정보를 접할 수 있게끔 했기 때문에 문자해독율의 상승은 가장 중요한 생명연장 요인 중 하나다. 경제발전 수준과 공중보건 인프라만큼 중요한 요인이 교육이기 때문에 낙후된 지역에 대한 교육지원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은 음미해볼 만하다.

 

11.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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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매경이코노미(1636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마르틴 부르크하르트의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의 철학>(알마, 2011)를 거리로 삼았는데, 가벼운 마음으로 손에 들었지만 의외의 재미를 안겨준 유익한 책이다. 원제는 '위대한 사상의 사소한 역사'이고, '위대한 생각들의 소사전' 정도로 규모에 맞는 제목이다. 독립적인 항목들이 연대기적으로 배열돼 있는데, 쓰다 보니 첫 항목인 'A. B. C. D.' 소개에 그치고 말았다. 그래도 어떤 용도의 책인지는 말해줄 듯싶다.

 

 

 

매경이코노미(11. 12. 21)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꼭 필요한 나만의 철학

 

철학은 어떤 쓸모가 있을까? 프랑스 인기 만화 ‘아스테릭스와 오벨릭스’의 주인공 오벨릭스는 철학이라면 코웃음을 치는 캐릭터다. 로마군과 싸우는 갈리아족의 덩치 큰 장사인 그의 관심사는 맛있는 것 아니면 로마군에게 던질 바위 따위다. 한데 어느 날 연극 무대에 서게 됐다.

 


관객이 놀랄 만한 메시지를 던져보라는 감독 주문에 오벨릭스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머리가 지끈거렸다. 생각나는 건 이 한마디뿐이었다. “로마, 이 허튼 개자식들아!” 이것이 말하자면 오벨릭스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고 그의 ‘철학’이다. 보통 사람들이 저마다 갖고 있는 ‘개똥철학’이다. 사실 평소라면 그걸로 충분하다. 하지만 요즘 같은 연말에 오벨릭스처럼 갑자기 조명을 받는 자리에 서게 돼 뭔가 의미 있는 말을 해야 한다면, 이마에서 진땀이 흐르고 입술이 바짝 마를 지경이라면 어떨까.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의 철학’의 저자 마르틴 부르크하르트는 철학이 바로 그럴 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책은 딱 그런 도움을 주기 위한 용도로 읽힌다. 가볍지만은 않은 성찰을 담고 있으면서도 재미있고 유쾌하다. ‘위대한 사상의 사소한 역사’라는 원제가 비밀을 암시해주는 듯싶은데, 저자는 일단 사상가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접어두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위대한 사상’들은 사정이 좀 다르다. 저작권자가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어도 우리 인생을 좌우하는 사상들의 목록을 떠올려볼 수 있다. 그것을 저자는 ‘위대한 사상’이라 부른다. 이 사상들의 ‘사소한 역사’가 비록 ‘쓸모 있는 물건’들과 경쟁이 되진 않겠지만 ‘정신’과 ‘생각’이란 것이 얼마나 괜찮은 것인지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은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 그의 기대다.

위대한 사상에 대한 저자의 독창적인 ‘연대기’는 알파벳에서 시작한다. 알파벳이란 말 자체가 첫 두 글자인 알파(α)와 베타(β)에 따라 지어진 점에서 알 수 있듯 알파벳이란 사상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알파벳만큼 인류에 큰 영향을 미친 것도 없다. 외계인이 인간에게 선물했다는 설도 있지만 저자가 밝혀주는 ‘사소한 역사’에 따르면, 알파벳의 A는 거꾸로 세워보면 알 수 있듯이 멍에를 쓰고 있는 황소를 그린 글자다. 그리고 B는 여성의 젖가슴을 모방한 글자다. C에 해당하는 감마(γ)는 남성과 여성의 결합, 곧 결혼(가미, Gamie)을 뜻한다. ‘기초’를 뜻하는 ABC는 곧 가정을 꾸미고픈 희망을 나타내는 말이 된다.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8세기경에 알파벳이 널리 퍼졌는데, 그리스인들에게 알파벳 배우기 운동은 평등을 지향하는 민주화 운동이었다. 24개의 알파벳으로 모든 것을 읽고 쓸 수 있게 됐기에 학식은 더 이상 부유층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었다. 더 나아가 알파벳은 그리스의 자연철학도 가능하게 했다. 몇 개의 철자가 모여 단어를 이루는 것처럼 자연도 더 근본이 되는 요소들로 이뤄져 있다고 보게 된 것이다.

알파벳 원리를 자연에도 적용한 것인데 이것이 말하자면 ‘알파벳의 사상’이다. 서양철학의 기원이 그리스 자연철학에서 비롯됐다면 알파벳은 그런 기원을 가능하게 한 ‘기원의 기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회적으로도 알파벳은 혁명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다. 법이 성문화되면서 독재자라도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없게 됐다. 비록 소크라테스 같은 경우는 철자를 맹신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그런 경고조차도 알파벳의 위력을 보여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말도 문장으로 기록되지 않았다면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철자로 고정된 기록으로서 철학은 영원이라는 환상마저 일깨워준다.

대략 이런 것이 알파벳의 ‘사소한 역사’다. ‘동전’과 ‘하느님 아버지’로 이어지는 저자의 성찰 목록이 30여가지의 주제를 탐색한 끝에 의도적으로 ‘DNA’를 마지막에 다루는 것은 ‘ABC(알파벳)’와 절묘한 상응을 이룬다. 저자는 DNA 또한 일종의 사상이며 ‘믿음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이 허튼 개자식들아!”에서 좀 벗어나고픈 독자들의 상상을 한껏 활성화해준다.

 

11.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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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2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2 2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는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를 주제로 장기 강의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시즌1'은 '네트워크와 칵테일로서의 한국 문학사'란 제목으로 다섯 차례의 강의가 준비돼 있는데, 지난 28일 1강이 시작됐고 나도 마지막 주에 한 꼭지를 맡아 참여한다.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바라보는 한국문학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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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11. 11. 30) '민족문학'의 궤도로 서술돼 온 문학사… 억압되거나 저평가된 작품은 없었나

 

중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되풀이 교육되는 한국 근현대 문학사는 김현, 김윤식, 조동일 등 4ㆍ19 세대가 정립한 문학사다. 이를 테면 1900년대 애국 계몽의 신소설, 1910년대 이광수와 최남선의 계몽주의를 거쳐 20년대는 동인지를 중심으로 낭만주의 자연주의 상징주의 등 여러 사조가 나오다 20년대 후반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등장한다는 식. 해방 이후 50년대는 전쟁 체험에 가위 눌린 실존주의, 60년대는 소시민적 감각, 70, 80년대는 민중적 계급적 지향, 90년대는 개인화 경향 등으로 시대별 특징을 꼽고 각 시기 대표 작품을 정전화한다. 이런 문학사 서술 밑엔 민족의식이 시대적 역경 속에서 꾸준히 발전해왔다는 '자생적 근대화론'이 깔려 있다.

하지만 한국 문학이 민족문학이란 하나의 이름 아래서 필연적 궤도를 밟아 진화해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까. 이 서술 속에서 배제되고 억압되거나 저평가된 작가나 작품은 없을까. 이는 4ㆍ19 세대의 문학사를 극복하려는 소장 학자들이 지난 10여년간 끊임없이 던져 온 질문이다.

푸른역사아카데미가 소장 학자들의 이런 문제 제기를 망라한 한국 근현대 문학사 연속 강좌를 마련했다. 28일 첫 강의를 시작으로 매주 월요일 총 25회 진행되는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다. 권보드래 천정환 권명아 이혜령 소영현 정여울 이현우 임태훈 등 문학계 신진 학자들이 강사로 참여했다. 강좌를 기획한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는 "1990년대 이후 탈 담론의 영향 아래서 문학을 풍속론이나 문화사적으로 접근하는 등 문학사를 재구성하는 작업이 지속돼 왔지만, 산발적으로 진행됐던 것도 사실이다"며 "그간의 연구 성과를 한자리에 모아서 새로운 문학과 문학사의 가능성을 탐색하자는 취지다"고 말했다.

28일 오후 서울 필운동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열린 첫 강의에서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과 교수는 새로운 문학사 서술의 문제의식 전반을 짚었다. 그는 기존 문학사 서술에서 1910년대 번안소설에서 시작된 대중소설의 계보, 즉 최독견 김말봉 정비석 최인호 등은 무시되곤 했고, 식민지 시대 한문학이 활발하게 창작 유통되고 고전 소설이 최고의 판매부수를 올린 사실은 외면됐다고 지적했다. 일제 말기의 일본어 작품이나 시ㆍ소설ㆍ희곡 이외의 다양한 글쓰기 역시 배제돼왔다.

권 교수는 특히 1905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된 개화기 소설 '소경과 앉은뱅이의 문답'이 정말 기존 문학사 서술처럼 애국 의식을 고취시키는 민족주의 텍스트인지, 20년대 초 낭만주의 사조 또는 데카당스(퇴폐주의)가 정말 3ㆍ1운동 실패에 따른 좌절감의 소산인지 등 다양한 물음을 던지며 기존 문학사의 이면을 탐색했다. 그는 "1920년대 초 장발을 한 문학 청년들이 함께 몰려다니며 거나한 술판을 벌이는 낭만적 분위기는 10년대 조선인들의 자족적 성공 모델인 중절모의 '신사'를 거부하려는 의지로 봐야 한다"며 "현실 부정의 퇴폐적 세계로 함몰됐다기보다는 오히려 3ㆍ1운동을 통해서 세계와 맞장을 뜰 수 있다는 의식이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동안 4ㆍ19 세대의 문학론ㆍ역사론에 대해 문제제기가 많았으나 그에 비길 만한 문학사와 대안적 역사인식은 나오지 않은 상황"이라며 새로운 문학사 서술이 진행형의 과제임을 강조했다.

이어지는 강좌에서 권명아 동아대 교수는 1990년대 장정일 작가의 작품을 중심으로 '풍기문란의 문학사'를 돌아본다. 또 인터넷 필명 '로쟈'로 잘 알려진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는 지젝이란 프리즘으로 1990년대 한국문학을 탐색하는 등 다양한 담론으로 문학사를 가로지르고 '한국문학사의 저주받은 걸작'이란 이름으로 구체적인 작품도 재발견한다는 계획이다. 문의 070-7539-4822. www.bluehistory.net (송용창기자)

 

11. 12. 11.

 

 

P.S. '지젝이라는 프리즘으로 본 1990년대 한국문학'이란 주제는 주최측의 제안에 따른 것인데,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와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을 다시 읽어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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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에 세명 저널리즘스쿨대학원에서 '교양이란 무엇인가'와 '서평이란 무엇인가'란 주제로 속강을 한 적이 있다. 이중 '교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강의내용이 먼저 기사화돼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http://www.danb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61).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에 실린 '교양이란 무엇인가'의 내용을 풀어주는 형식의 강의였다.

 

 

단비뉴스(11. 12. 10) 당신이 몰랐던 ‘교양’의 비밀

 

모든 질문이 누구에게나 중요한 건 아니다

“어우, 저 사람 교양 없어.” “나, 교양 있는 여자에요.” 우리는 누군가와 개인적인 친분을 맺을 때 ‘교양’의 유무를 중요한 잣대로 사용한다. ‘교양’은 한 사람의 지적 취향을 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욕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처럼 익숙하게 사용하는 개념인 ‘교양’이란 과연 무엇일까? ‘로쟈’라는 인터넷 서평꾼으로 유명한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인문교양특강’에서 ‘교양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 자체에 의문을 던지며 강의를 시작했다.

 

“모든 질문이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건 아닙니다. 보통은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넘어가기 쉬운데, 질문 자체에 머물러서 숙고하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교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언제, 어느 자리에서나 혹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질문은 아닙니다. 어떤 물음에는 그것이 던져지는 맥락이 있고, 장소성이 있기 때문이죠.”

 

‘교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명료한 답변을 구하려는 심리를 꼬집는 말이었다. 특히 인문학이 일종의 ‘교양’으로 자리잡고 있는 최근 한국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 교수는 불편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장소와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모든 질문에 보편성이 있다고 여기는 학자들의 버릇 혹은 관례를 지적하는 말이다.

 

“가령 칸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이를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질문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왜 여기에 관심 없어’라고 이야기하죠. 하지만 모두에게 절실한 물음은 아닙니다.”

    
그는 아예 ‘What is X?(무엇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형식 자체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했다. 희랍어적 기원을 갖고 있는 이러한 질문형식은 어느 문화권에서나 사용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플라톤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가 이러한 형식의 질문을 빈번하게 던지지만, 이는 어떤 개별 사안에 대한 판단을 ‘일반화’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여기에는 비약이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나’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는 중요한 질문이지만, ‘사람들’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물론 몇몇 철학자는 일반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겠지만.”

 

 

"책 안 읽고 살아도 문제없지만……"

강의는 ‘책의 속임수’를 들춰내는 쪽으로 이어졌다. 서평을 전문으로 하는 그가 “책 안 읽고 살아도 문제없다”는 말을 할 때는 의아하기도 했다. 정말 그럴까?

    
“책은 읽은 사람은 소수지만, 쓴 사람은 더 소수지요. 책에는 책 읽은 사람 사이에 전수되어온 고정된 편견 같은 게 있습니다. 의미 없는 삶, 성찰 없는 삶에 대해서는 격하하고, 직접적인 삶에 대해 거리를 두는 ‘theoria’ (‘이론’의 어원)를 더 높이 치는 것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너는 어떻게 생각 없이 인생을 사냐’ 같은 질문이 나오지만, 솔직히 안 될 건 없어요. 책 안 읽고 살아도 문제없습니다.”

 

이 말은 책을 읽고 교양을 쌓는 일이 누구에게나 중요한 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대학에 개설된 수많은 ‘교양과목’들은 다 무엇인가? 그는 이 문제를 교양과목 교수들의 이해관계, 그리고 시대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교양이란 게 정말 보편적이고 중요하다면 변화하지 않아야 하는데, 왜 달라질까요? 담당교수들의 이해관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세력판도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힘 있는 학과의 교양과목, 예를 들면 중국이 잘 나가면 중국 관련 교양과목이 늘어나는 거죠. 이런 면에서 ‘보편성’이란 허울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니체 책을 필수도서로 여기는 ‘교양주의’

그렇다면 한국에 ‘교양’이란 개념이 들어온 것은 언제일까? 저자는 그 시작을 일본의 '다이쇼오 교양주의'에서 찾는다. 다이쇼오 시대(1912~1926년)에 등장한 ‘교양주의'는, 일본 동경제국대학이나 제1고교 등 최고 엘리트 학생들이 공유했던 일련의 ‘서양 고전’ 리스트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이런 엘리트 중심적 뿌리가 한국에 전해져 지금까지도 우리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필수 도서로 여긴다. 하지만 이 책은 니체의 저작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책으로, 이는 ‘교양’이라기보다 ‘교양주의’가 만들어낸 거품이라 볼 수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동경제대 학생들은 엄청난 사회적 프리미엄과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 근거가 ‘우리는 이런 교양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양주의가 만들어낸 기능이지요.”

 

이것이 교양이 가진 두 가지 기능 중 국가 엘리트에 대한 차별적 보상을 정당화하는 기능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교양은 부르주아의 사회적 부와 지위를 정당화하는 기능도 갖는다. 이러한 기능은 경제불황에도 미술품 시장이 초호황을 누리는 경향에서 발견할 수 있다. 최근 등장한 ‘초고가 서가’ 또한 같은 맥락에 속한다.

 

“최고급 서가 컬렉션을 짜주는 전문 플래너가 있다고 합니다. 내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싸다는 게 중요합니다. 미술품의 최대 메리트이기도 하죠. 보통 사람들은 가질 수 없다는 것. 과거에는 교양이 그런 기능을 했습니다. 예술이나 문학에 대한 조예가 있으면 ‘저 사람 잘 살아’라고 생각했지요.”

 

 

 

‘교양전쟁’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지만 교양은 변화한다. 일본에서는 70년대에 지식과 교양이 대중화하는 일명 ‘대중사회’로 진입한 뒤 더 이상 교양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진학률이 높아지면서 교양이라는 게 의미가 없어졌다. 이러한 패러다임 변화는 교양이 대학에서 어떻게 교육되어 왔는가를 보면 이해하기 쉽다. ‘교양주의’ 등장 이후 거의 6,70년 간 지속된 형태다.

 

“<서양음악의 이해> 라는 과목을 들었다면 시험을 어떻게 봤죠? 음악 짧게 들려주고 누구의 무슨 곡인지 알아맞히는 식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교양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딱 제시간에, 1분 안에 제목과 작곡가를 알아 맞히는 게 교양이라면 자기 자신을 위한 교양이 아니라 상대방의 질문에 응답하기 위한 교양이지요.”

 

대학 내에서도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이 90년대에 일어났다. ‘문학연구’에서 ‘문화연구’로 전환한 것이다. 이를 서구에서는 ‘교양전쟁(culture war)’이라 불렀다. 이는 대학에서 무엇을 교양으로 가르칠 것인가, 그리고 서양문명사, 서양문학사를 강의할 때 어떤 작품을 가르칠 것인가의 문제였다. 정전(canon), 곧 문학의 필수 작품 리스트에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와 같은 사조들이 비판적으로 ‘도전’하면서, 기존 정전 리스트에 지속적으로 개편이 일어난다. ‘교양’에 대한 패권 다툼이 일어난 것이다.

 

 

 

‘곁다리 인문학’의 균형감각

“교양은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역동적인 장입니다. 권력 엘리트와 부르주아의 부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지요. 고전 텍스트를 읽더라도 이런 것을 인식하고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교수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인문교양 강의, 서평쓰기 활동 등을 '곁다리 인문학’이라 표현했다. 인문학 옆에 있으되 어깃장을 놓고 브레이크를 거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인문학 전도사지만 인문학을 욕하기도 하는 그는 교양에 대해서도 비슷한 균형감을 강조했다.

 

“교양을 알고 습득하는 것은 좋지만 역사적인 맥락에서 가져온 부정적 기능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게 중요합니다.”

 

11.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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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1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1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꾸때리다 2011-12-13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왜 저렇게 잘생기신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