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매경이코노미(1636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마르틴 부르크하르트의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의 철학>(알마, 2011)를 거리로 삼았는데, 가벼운 마음으로 손에 들었지만 의외의 재미를 안겨준 유익한 책이다. 원제는 '위대한 사상의 사소한 역사'이고, '위대한 생각들의 소사전' 정도로 규모에 맞는 제목이다. 독립적인 항목들이 연대기적으로 배열돼 있는데, 쓰다 보니 첫 항목인 'A. B. C. D.' 소개에 그치고 말았다. 그래도 어떤 용도의 책인지는 말해줄 듯싶다.

 

 

 

매경이코노미(11. 12. 21)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꼭 필요한 나만의 철학

 

철학은 어떤 쓸모가 있을까? 프랑스 인기 만화 ‘아스테릭스와 오벨릭스’의 주인공 오벨릭스는 철학이라면 코웃음을 치는 캐릭터다. 로마군과 싸우는 갈리아족의 덩치 큰 장사인 그의 관심사는 맛있는 것 아니면 로마군에게 던질 바위 따위다. 한데 어느 날 연극 무대에 서게 됐다.

 


관객이 놀랄 만한 메시지를 던져보라는 감독 주문에 오벨릭스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머리가 지끈거렸다. 생각나는 건 이 한마디뿐이었다. “로마, 이 허튼 개자식들아!” 이것이 말하자면 오벨릭스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고 그의 ‘철학’이다. 보통 사람들이 저마다 갖고 있는 ‘개똥철학’이다. 사실 평소라면 그걸로 충분하다. 하지만 요즘 같은 연말에 오벨릭스처럼 갑자기 조명을 받는 자리에 서게 돼 뭔가 의미 있는 말을 해야 한다면, 이마에서 진땀이 흐르고 입술이 바짝 마를 지경이라면 어떨까.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의 철학’의 저자 마르틴 부르크하르트는 철학이 바로 그럴 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책은 딱 그런 도움을 주기 위한 용도로 읽힌다. 가볍지만은 않은 성찰을 담고 있으면서도 재미있고 유쾌하다. ‘위대한 사상의 사소한 역사’라는 원제가 비밀을 암시해주는 듯싶은데, 저자는 일단 사상가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접어두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위대한 사상’들은 사정이 좀 다르다. 저작권자가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어도 우리 인생을 좌우하는 사상들의 목록을 떠올려볼 수 있다. 그것을 저자는 ‘위대한 사상’이라 부른다. 이 사상들의 ‘사소한 역사’가 비록 ‘쓸모 있는 물건’들과 경쟁이 되진 않겠지만 ‘정신’과 ‘생각’이란 것이 얼마나 괜찮은 것인지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은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 그의 기대다.

위대한 사상에 대한 저자의 독창적인 ‘연대기’는 알파벳에서 시작한다. 알파벳이란 말 자체가 첫 두 글자인 알파(α)와 베타(β)에 따라 지어진 점에서 알 수 있듯 알파벳이란 사상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알파벳만큼 인류에 큰 영향을 미친 것도 없다. 외계인이 인간에게 선물했다는 설도 있지만 저자가 밝혀주는 ‘사소한 역사’에 따르면, 알파벳의 A는 거꾸로 세워보면 알 수 있듯이 멍에를 쓰고 있는 황소를 그린 글자다. 그리고 B는 여성의 젖가슴을 모방한 글자다. C에 해당하는 감마(γ)는 남성과 여성의 결합, 곧 결혼(가미, Gamie)을 뜻한다. ‘기초’를 뜻하는 ABC는 곧 가정을 꾸미고픈 희망을 나타내는 말이 된다.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8세기경에 알파벳이 널리 퍼졌는데, 그리스인들에게 알파벳 배우기 운동은 평등을 지향하는 민주화 운동이었다. 24개의 알파벳으로 모든 것을 읽고 쓸 수 있게 됐기에 학식은 더 이상 부유층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었다. 더 나아가 알파벳은 그리스의 자연철학도 가능하게 했다. 몇 개의 철자가 모여 단어를 이루는 것처럼 자연도 더 근본이 되는 요소들로 이뤄져 있다고 보게 된 것이다.

알파벳 원리를 자연에도 적용한 것인데 이것이 말하자면 ‘알파벳의 사상’이다. 서양철학의 기원이 그리스 자연철학에서 비롯됐다면 알파벳은 그런 기원을 가능하게 한 ‘기원의 기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회적으로도 알파벳은 혁명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다. 법이 성문화되면서 독재자라도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없게 됐다. 비록 소크라테스 같은 경우는 철자를 맹신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그런 경고조차도 알파벳의 위력을 보여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말도 문장으로 기록되지 않았다면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철자로 고정된 기록으로서 철학은 영원이라는 환상마저 일깨워준다.

대략 이런 것이 알파벳의 ‘사소한 역사’다. ‘동전’과 ‘하느님 아버지’로 이어지는 저자의 성찰 목록이 30여가지의 주제를 탐색한 끝에 의도적으로 ‘DNA’를 마지막에 다루는 것은 ‘ABC(알파벳)’와 절묘한 상응을 이룬다. 저자는 DNA 또한 일종의 사상이며 ‘믿음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이 허튼 개자식들아!”에서 좀 벗어나고픈 독자들의 상상을 한껏 활성화해준다.

 

11.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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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2 23: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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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2 23: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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