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갑작스레 제기된 신경숙 작가의 표절 시비가 더 확산될 조짐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오늘은 나한테까지 두 곳의 언론사에서 전화가 와서 간략하게라도 내 입장을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 KBS 기자의 질문에 답한 내용은 이렇게 나갔다(http://news.kbs.co.kr/news/NewsView.do?SEARCH_NEWS_CODE=3097051&ref=A).

 

이현우 문학평론가는 “많은 작가와 작가 지망생이 롤모델이 되는 유명 작가나 그들의 작품을 베끼면서 습작을 한다”며 “신경숙 작가 역시 이런 방식으로 연습했던 만큼, 표절에 대해 둔감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습작과정에서 베끼기가 만연한 만큼, 신 작가뿐 아니라 문학계 전반적으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번에 시비거리가 된 작품은 <감자 먹는 사람들>(창비, 2005)에 수록된 단편 '전설'과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이란 단편이다(이응준 작가의 표절 문제 제기는 http://www.huffingtonpost.kr/eungjun-lee/story_b_7583798.html?utm_hp_ref=tw). 미시마의 '우국'은 주우 세계문학전집에 김후란 번역으로 수록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이문열 세계문학산책2>(살림, 2003)에서만 읽어볼 수 있다(나는 수년 전에 미시마 유키오에 대해 강의하면서 '우국'을 읽었더랬지만 신경숙의 '전설'은 읽지 않아서 두 작품의 관계는 이번에 알게 됐다). 표절 논란을 불러온 대목은 이렇다.

‘두 사람 다 실로 건강한 젊은 육체의 소유자였던 탓으로 그들의 밤은 격렬했다. 밤뿐만 아니라 훈련을 마치고 흙먼지투성이의 군복을 벗는 동안마저 안타까와하면서 집에 오자마자 아내를 그 자리에 쓰러뜨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레이코도 잘 응했다. 첫날밤을 지낸 지 한 달이 넘었을까 말까 할 때 벌써 레이코는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고, 중위도 그런 레이코의 변화를 기뻐하였다.’ (미시마 유키오)

 

‘두 사람 다 건강한 육체의 주인들이었다. 그들의 밤은 격렬하였다. 남자는 바깥에서 돌아와 흙먼지 묻은 얼굴을 씻다가도 뭔가를 안타까워하며 서둘러 여자를 쓰러뜨리는 일이 매번이었다. 첫날밤을 가진 뒤 두 달 남짓, 여자는 벌써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 여자의 청일한 아름다움 속으로 관능은 향기롭고 풍요롭게 배어들었다. 그 무르익음은 노래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 속으로도 기름지게 스며들어 이젠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노래가 여자에게 빨려오는 듯했다. 여자의 변화를 가장 기뻐한 건 물론 남자였다.’ (신경숙)

누가 보더라도 베껴온 부분이고, 에둘러 말할 것도 없이 이런 행위를 가리켜서 표절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런 결과가 빚어진 게 작가가 산문집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롤모델이 되는 작품을 베껴쓰면서 오랜 기간 습작을 해온 탓이라고 생각했다. 정상 참작의 여지는 있지만(의도적인 표절이라면 좀더 교묘하게 했을 것이기에), 명백한 잘못이고 이에 대한 인정과 사과는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내가 너무 순진하게 생각했다.  

 

인터뷰에 응했던 때만 하더라도 신경숙 작가의 반응이 나오지 않았었는데, 오후 늦게 보니 작가의 입장과 함께 창비의 입장이 나왔다. 예상과 전혀 달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금 침묵하더라도, 나는 작가가 표절에 대해 사과하고(실수나 불찰을 이유로) 출판사에서는 해당 작품을 작품집에서 빼는 수순을 밟으리라고 짐작했는데, 내가 한국 문단을 전혀 몰랐다는 게 돼버렸다. 작가와 출판사의 대응은 예상 밖일 뿐더러 상식 밖이다. 어떤 입장인가.

신경숙 표절 의혹 제기에 창비 측과 함께 해명을 했다17일 신경숙은 출판사 창비에 이메일을 통해 "오래전 '금각사' 외엔 읽어본 적 없는 작가로 해당 작품('우국')은 알지 못한다. 이런 소란을 겪게 해 내 독자분들께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풍파를 함께 해왔듯이 나를 믿어주시길 바랄뿐이다"라고 밝혔다이어 신경숙은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일은 작가에겐 상처만 남는 일이라 대응하지 않겠다고 입장을 전했다이에 출판사 창비 측도 "표절로 판단할 근거가 부족하다""일상적인 소재인데다 작품 전체를 좌우할 만큼 비중도 크지 않다"고 주장하며 논란을 일축하려 했다.(세계일보) 

나는 작가나 출판사가 오판, 내지 상식 이하의 판단을 했다고 생각한다. 우선 작가의 예기치 않은 반응에서 도출할 수 있는 것은 다음 둘 중 하나다. ('우국'을 읽어본 적이 없다고 하므로) (1)작가가 미시마의 작품을 베낀 것이 아니라 미시마를 베낀 누군가의 글을 다시 베꼈거나, (2) '전설'이란 작품을 아예 작가가 쓰지 않았거나(곧 그 자체가 다른 이의 글이거나). 어느 쪽이건 면책 사유는 되지 못한다(작가의 반응은 어쩌면 이런 표절이 신경숙 문학의 주변이 아니라 핵심이지 않을까라는 새로운 의혹을 낳는다. 이응준 작가가 먼저 제기한 의혹이지만). 더불어 출판사의 판단을 그대로 되돌려주자면, 이젠 이 정도 베끼기는 얼마든지 허용 가능하며, 신경숙 소설뿐 아니라 창비에서 나온 허다한 문학 작품도 다 그렇고 그런 작품이라는 뜻으로 이해해도 될는지?

 

메르스 사태에서 우리가 확인했듯이, 초기 대응이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식 문화는 늘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는 일로 만들어버린다. 결국 '신경숙 사태'가 빚어진다. 도대체 작가나 출판사는 문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15. 06. 17.

 

 

P.S. 과거에 표절을 '패스티쉬(혼성모방)'라고 우겨댄 몰염치한 사례도 갖고 있는 터라 이 참에 문단이나 출판계에서는 표절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하고 이에 대한 처리 관행도 새롭게 마련하는 게 좋겠다. 다들 알면서도 쉬쉬할 뿐 표절이 만연하다는 게 내부의 증언이고 보면 사태는 자못 심각하다. 문학의 몰락 이유를 다른 데서 찾을 것도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3년에 세상을 떠난 미국의 철학자이자 미술비평가 아서 단토의 유작이 번역돼 나왔다. <무엇이 예술인가>(은행나무, 2015). 그간에 소개된 책이 다소 어려웠던 독자라도 그의 예술론을 압축하고 있는 이번 책은 수월하게 읽어볼 수 있을 듯싶다. 해제를 붙일 기회가 있어서 나는 이렇게 적었다.

 

<무엇이 예술인가>는 서양미술사에 대한 단토식의 개관이자 그 귀결로 얻게 되는 새로운 예술 개념에 대한 성찰이다. 압축해서 말하면, 그것은 예술 개념에 대한 뒤샹과 워홀의 도전에 맞서는 철학적 응전이다. 미학의 가두리에서 벗어난 예술을 단토는 ‘구현된 의미’라는 정의를 통해서 다시 포획하려고 한다. 새로운 예술작품이 갖는 의미와 의의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보기 드문 강력한 그의 해명과 함께 예술에 대한 우리의 이해 급수도 한 단계 올라선 느낌이다.

겸사겸사 단토의 책들을 리스트로 묶어놓는다. 단토의 책이라지만 엉터리 편역서라 단토와 무관한 <앤디 워홀 이야기>(명진출판사, 2010)은 제외했다. 번역에 문제가 많은 것으로 지적된 <철학하는 예술>(미술문화, 2007)은 절판된 상태다. 개정된 번역본이 나오면 좋겠다...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무엇이 예술인가
아서 단토 지음, 김한영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6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15년 06월 16일에 저장

예술의 종말 이후- 컨템퍼러리 미술과 역사의 울타리
아서 단토 지음, 이성훈 외 옮김 / 미술문화 / 2004년 5월
25,000원 → 25,000원(0%할인) / 마일리지 750원(3%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15년 06월 16일에 저장

일상적인 것의 변용
아서 단토 지음, 김혜련 옮김 / 한길사 / 2008년 5월
27,000원 → 24,300원(10%할인) / 마일리지 1,35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15년 06월 16일에 저장

예술과 미학
아서 단토 지음, 김지원 옮김 / 종문화사 / 2007년 4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2015년 06월 16일에 저장
품절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점심을 먹기 전에 '이주의 책'을 골라놓는다. 타이틀북은 모처럼 '가벼운' 책을 골랐다. 좀 식상한 표현이지만 '신세대 출판'의 한 모델이 되고 있는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의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어크로스, 2015). "출간비용 마련을 위한 '독자 북펀딩', 이웃 출판사와의 공동 출간, 자체 제작 장르문학 소식지 발행까지. 독특한 마케팅 실험과 독자들과의 연대로 주목받아온 북스피어 출판사의 김홍민 대표가 10년간의 출판 시장 횡단기를 책으로 담아냈다."

 

 

두번째 책은 정반대의 주제를 다룬 책으로 앤 윌슨 섀프 등의 <중독 조직>(이후, 2015). 사회학자 강수돌 교수가 우리말로 옮겼다. 부제는 ' 조직은 어떻게 우리를 속이고 병들게 하는가?'.

오랫동안 <포춘> 선정 500대 기업을 비롯해 종교단체, 시민단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직을 컨설팅 해 온 저자들은 오늘날 광범위한 조직이 공통된 질병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 질병이 직접적으로 조직 구성원의 삶뿐 아니라 전체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 질병은 다름 아닌 ‘중독’이다. <중독 조직>은 중독이라는 병리적 현상을 통해 조직, 더 나아가 이 사회를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하는 책이다.

조직의 구성원이 아니어서(그 점은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나로선 실감이 덜하지만 조직 구성원으로서 일상이 힘겨운 이들이라면 심각하게 읽어봄 직하다. 

 

 

세번째 책은 <중독 조직>과 짝이 될 만한 책으로 브리짓 슐트의 <타임 푸어>(더퀘스트, 2015)다. 제목은 우리가 입버릇처럼 내뱉는 "시간이 없어서"에 해당한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워싱턴포스트' 기자 브리짓 슐트의 책. 이 책은 스트레스가 우리의 삶을 조각조각 찢어 놓았음을 보여주고 그 찢어진 조각들을 어떻게 하면 다시 붙일 수 있는지 알려주는 지침서이며 ‘사람답게 사는 법’에 대한 힌트를 주는 책이다." ' 항상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을 위한 일 가사 휴식 균형 잡기'가 부제로 특히 직장 여성 독자들에게 어필할 만하다.

 

네번째 책은 정진아의 <스물다섯 청춘의 워킹홀리데이 분투기>(후마니타스, 2015). 일종의 참여관찰 보고서인데, 저자의 사례는 이렇다.

"스물다섯 살, 대학 졸업을 앞두고 워킹홀리데이를 가기로 결심했다. 휴학 기간 1년을 합쳐 5년 동안 대학을 다녔다. 생활비와 매년 훌쩍 오르는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학에 입학해 졸업하는 그날까지 나는 한시도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언어 연수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때 '무한한 가능성의 나라' 호주가 내게 다가왔다. 저렇게 아름다운 나라에서 돈도 벌면서, 영어도 배우고, 여행도 다닐 수 있다니. 듣기만 해도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떠났다. 그리고 나처럼 매년 3만여 명이 호주로 떠난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한 독자들을 위한 책.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교육학자 헨리 지루의 <일회용 청년>(킹콩북, 2015). '누가 그들을 쓰레기로 만드는가'가 부제다. "저자는 1970년대 말 이후 세계를 점령한 신자유주의를 경제적·정치적·사회적·문화적·교육적 측면에서 구조적으로 조망하고, 그것이 오늘날 청년 문제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분석하며 이에 대한 대안이 무엇인지 특히 대중교육의 관점에서 전망한다."

복지 후퇴와 함께 교육에 대한 공적 투자가 감소하면서 공교육은 후퇴하고 있으며 ‘교육’이 아니라 감옥을 모방한 ‘훈육’ 기관으로 변했다. 또한 대학교육은 비판적인 시민과 지식인을 양성하는 공적 기능을 포기하고 기업과 체제가 요구하는 인력 공급기관이 되었다. 이런 적자생존의 신자유주의는 경쟁에서 도태된 사람을 일회용 쓰레기로 취급한다. 그들은 기득권층의 동정과 자선의 대상이 되거나 불안정 노동을 전전하거나 감옥산업의 원료로 투입되거나 해외전쟁의 소모품으로 취급된다.

번역서이긴 하지만 우리의 현실 자체이기도 하다...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 다르거나, 튀거나, 어쨌거나
김홍민 지음 / 어크로스 / 2015년 6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19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5년 06월 14일에 저장

중독 조직- 조직은 어떻게 우리를 속이고 병들게 하는가?
앤 윌슨 섀프 & 다이앤 패설 지음, 강수돌 옮김 / 이후 / 2015년 6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2015년 06월 14일에 저장
절판

타임 푸어- 항상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을 위한 일 가사 휴식 균형 잡기
브리짓 슐트 지음, 안진이 옮김 / 더퀘스트 / 2015년 6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15년 06월 14일에 저장
품절

스물다섯 청춘의 워킹홀리데이 분투기
정진아 지음, 정인선 그림 / 후마니타스 / 2015년 6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19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5년 06월 14일에 저장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이주의 저자'를 골라놓는다. 역사학자, 정신분석가, 소설가, 3인이다. 먼저 <서울은 깊다>(돌베개, 2008)의 저자 전우용의 <우리 역사는 깊다>(푸른역사, 2015)가 2권으로 출간되었다. '역사학자 전우용의 한국 근대 읽기 3부작' 가운데 첫 권에 해당한다.

 

무의미한 듯한 '오늘'들의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역사'들을 되살려 '2015년 대한민국'을 곱씹는다. <서울은 깊다>, <현대인의 탄생> 등 여러 저서를 통해 말해지지 않은 역사를 소개하고 그것을 통해 현재를 성찰하는 데 힘써온 역사학자 전우용이 '역사학자 전우용의 한국 근대 읽기 3부작' 중 첫 번째인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바로 '오늘들의 역사'다. 저자는 귀성 풍습의 기원, 예방 접종의 시작, 전등 시대의 개막, 위생 관념의 확산, 대중교통 수단의 도입 등 주로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오늘'의 작은 사건들을 소개하고, 성찰의 재료로 삼을 만한 요소들에 대해 나름의 의견을 덧붙인다.

"주로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오늘'의 작은 사건들을 소개하고, 성찰의 재료로 삼을 만한 요소들에 대해 나름의 의견을 덧붙인" 책이라는 건데, 말 그대로 역사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다는 느낌을 준다. 더불어 역사의 기억과 흔적이 지워진 오늘의 현실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신랄하다. 동대문시장의 기원에 대해 소개한 후에 저자는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새로 들어선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건물을 볼 때마다 속이 쓰리다. 그 장소의 역사적 맥락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에게, 그 역사에 대한 기초적 정보도 주지 않고 설계를 맡겨버린 당시 서울시정 담당자들의 무소견과 무지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자국민도 모르는 '명품시장'의 역사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 건물의 역사성을 담아내고, 동대문시장의 역사를 제대로만 알려도 시장의 국제적 가치를 더 끌어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역사와 문화의 흔적을 지우는 개발이 아니라 그 자취와 함께하는 개발이어야 '국격'이든 '도시 디자인의 품격'이든 살릴 수 있는 법이다. 그렇게 세계 여행을 많이 하면서도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 그저 한심할 따름이다.

한심함도 오래 축적되면 우리의 문화가 될지 모른다.

 

 

라캉 정신분석 전공자로 활발한 임상과 강의 활동을 하고 있는 맹정현의 신작이 나왔다. <멜랑꼴리의 검은 마술>(책담, 2015)과 마찬가지로 서울정신분석포럼(SFP)의 강연을 엮은 <프로이트 패러다임>(위고, 2015)이다. '프로이트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가 부제.

무의식, 억압, 성욕,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환상, 나르시시즘, 죽음 충동 등 프로이트가 제시한 모든 정신분석 개념들은 완결된 개념이 아니라 그의 사유를 구성하는 패러다임의 구성 요소들이다. 따라서 프로이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념들에 현혹될 것이 아니라 프로이트의 저술을 구성하는 다양한 패러다임들, 그리고 그 패러다임 속 개념들의 네트워크를 이해해야 한다. 저자는 프로이트의 사유에 존재하는 ‘도약’과 ‘단절’의 지점에 주목하면서 프로이트를 네 개의 패러다임으로 설명한다

저자는 프로이트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읽기'를 제안하는데, 읽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보다 안 읽고도 이해하는 것이 최악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프로이트를 읽는다는 것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지점까지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읽으려는 독자에게 가이드가 되는 책이다.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작가 편혜영의 세번째 장편이 출간됐다. <선의 법칙>(문학동네, 2015).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의 수다한 수상 경력들과 십오 년간의 작품활동을 통해 더할나위없이 충분하게 자신의 소설세계를 보여준 작가 편혜영의 장편소설. 아버지의 죽음과 동생의 죽음을 시작으로 엇갈리듯 만나는 두 주인공의 생의 곡선을 추적하는 소설이다.

빼어난 단편을 발표한 젊은 작가들이 장편에도 안착할 것인가가 한때 문단의 관심사였는데(그건 지금도 새로 등단한 작가들에게 공통적이다. 대개 단편을 통해 데뷔하고서 장편으로 넘어가므로), 세번째 장편이라면 '편혜영 스타일'이란 게 어떤 것인지 가늠해볼 수 있겠다.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을까란 관심을 갖고서 읽어봐도 좋겠다. 

 

15. 06. 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전소설을 주로 강의하다 보니 동시대 소설에 대해선 둔감한 편인데, 그래도 화제작이나 화제의 작가들에 대해서는 이미지라도 그려두는 것이 서평가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주의 '미션'처럼 새로운 두 작가와 안면을 트기로 한다. 톰 롭 스미스와 도나 타트가 그 두 작가다.

 

 

먼저 1979년생 영국 작가 톰 롭 스미스. 2008년 29세에 발표한 데뷔작 <차일드 44>로 맨 부커상 후보에 올랐고 이언 플레밍상을 수상했다. 구소련에서 실제로 있었던 52명 연쇄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 그래서 스릴러 혹은 범죄소설로 분류된다. 올해 영화로 만들어졌는데(현재 개봉중이다), 때맞춰 후속작 <시크릿 스피치>와 <에이전트6>까지 포함해 '차일드 44 시리즈' 3부작이 완결판으로 나왔다.

 

 

영화가 소설보다 못하다는 평이지만 아무려나 소련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 영화나 소설 모두 흥미를 끈다. 분량상 소설보다는 영화를 먼저 보게 될 듯하지만.

 

 

그리고 1963년생 미국 작가 도나 타트. 톰 롭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데뷔작부터 '천재 작가'의 출현으로 화제를 모았다고 한다. 역시나 19세에 발표한 <비밀의 계절>(1992)이고 국내에서는 작고한 이윤기 선생의 번역으로 <비밀의 계절>(문학동네, 2007)이라고 나왔다가 지금은 절판된 상태다(뒤늦은 발견이지만 다시 나오면 좋겠다 싶다).

 

 

이어서 10년만에 펴낸 작품이 <작은 친구>(2002)이고(번역본이 근간 예정이다), 이번에 나온 건 다시 11년만에 펴낸 세번째 소설로 지난해 퓰리처상을 수상한 <황금방울새>(은행나무, 2015)다. 원서는 퓰리처상 수상 기념 보급판이 나와 있는데, 970쪽이 넘는 대작이다(번역본을 두 권 합계 1,050쪽에 이른다). 그럼에도 높은 완독율을 자랑한다니까 한번 손에 들면 놓지 못한다는 의미(그게 문제점일 수도 있겠다). 어떤 소설인가.

유려한 수사와 강박적일 정도로 세밀한 설정으로 천재 작가라고 수식되는 도나 타트가 11년 만에 신작을 선보인다. 카렐 파브리티우스의 실제 그림을 소재로 한 이 책은 미술관 폭탄 테러에서 엄마를 잃고 홀로 살아남은 소년이 우연히 명화를 손에 넣게 되면서 시작한다. 상실과 집착, 운명이라는 까다로운 주제를 적나라한 대도시의 현실과 예술 암시장 등 흥미진진한 리얼리티로 돌파해나가는 작가의 저력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스티븐 킹의 추천사는 이렇다.

읽는 내내 투수가 한 점도 내주지 않고 끝까지 이끌어가는 경기를 보는 것처럼 놀라고 흥분했다. 실수가 나길 기대하고 있다면, 이 책에서는 헛수고다. 도나 타트는 ‘중독적이며 삶의 버거운 슬픔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예술’이라는 주제를 과감히 돌파하면서 문학작품으로서 큰 성공을 거뒀다.

 

작가의 사진을 보니 어떤 소설일지 짐작이 간다. 더불어 이제까지 단 세 편의 소설만을 발표한 과작의 작가라는 점도 이해가 된다. <비밀의 계절>과 <작은 친구>까지 한데 모아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

 

15. 06. 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