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지들의 북리뷰가 주로 주말에 몰려 있기 때문에 내일 아침 온라인 기사가 미리 뜨는 금요일 밤시간이면 할일이 좀 늘어난다. 내일이면 어느새 날짜가 10일로 접어드는구나, 란 생각에 경악(!)을 하면서(주말의 빨래감처럼 밀려 있는 일들이여!) 또 하던 일 안할 수는 없는지라 '작가와 문학사이'의 연재도 옮겨놓는다. 이번 주는 진은영 시인 편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철학전공자로서(아래의 기사를 읽으니 어느새 학위도 받았다) <순수이성비판>의 '리라이팅'을 쓰기도 했다. 그녀의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문학과지성사, 2003)을 나는 사두지는 않았지만 개성적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보다 더 미더운 촉수를 가진 신형철 평론가의 감식의견을 들어보기로 한다.

 

경향신문(07. 02. 10) [작가와 문학사이](6) 진은영-청신한 몸·유연한 머리의 언어

그녀의 첫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2003)은 명품이다. 재료도 고급이고 만듦새도 정통이며 외장도 우아하다. 열혈독자가 많다는 소문이다. 그녀는 나가르주나와 니체를 비교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철학도이기도 하다. 그녀가 철학적인 시를 쓰고 시적인 철학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게 있다는 생각은 거의 오해에 가깝다. 반쯤은 호메로스이고 반쯤은 플라톤인 사람은 호메로스도 플라톤도 되지 못한다. 시는 시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때 철학의 문으로 나올 수 있고, 철학은 철학의 계단을 더 높이 올라갈 때 시의 문으로 나올 수 있다. 횔덜린의 시와 하이데거의 철학이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 단호히 제 길을 갈 때 그 둘은 궁극에서 만난다. 시인 진은영은 시만 생각한다.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슬픔/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자본주의/형형색색의 어둠 혹은/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문학/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시인의 독백/“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혁명/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가로등 밑에서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전문)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서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묻는다. 시란 무엇입니까. 시인 왈, 시는 메타포다. 시 조갈증에 걸린 우편배달부에게 이 시를 처방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이 시는 고급 메타포의 일대 향연이다. 무릇 메타포는 수혈(輸血)이다. 봄 슬픔 자본주의 문학 시인 혁명 시 등과 같은 혼수상태의 단어들이 젊은 피를 받아 막 살아난다. 뛰어난 메타포는 감각의 문으로 들어가 사유의 문으로 나온다. 특히 ‘혁명’을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로 혹은 “가로등 밑에서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로 규정한 대목은 곱씹을수록 아득해진다. 사유를 건너 뛴 감각은 가슴만 물들이지만 사유를 관통한 감각은 머리까지 흔든다. 그녀의 좋은 시들이 대개 그러하다.

혹자는 그녀를 최승자의 후계자라 칭한다.(시인 김정환의 말대로라면 이 후계책봉은 어느 술자리에서 최승자 본인의 기꺼운 재가를 이미 받았다고 한다.) 최승자가 누구인가? 한국 여성시의 발성법을 혁신한 시인이다. 발명이라고 해도 좋다. 최승자의 언어는 격렬한 액체의 언어다. 그녀는 시에서 오줌 싸고 똥 누고 생리혈을 흘린 최초의 여성이었다. 생의 막장에서 자존심 내던지고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청파동을 기억하는가’) 너에게 가겠다고 매달리는 여자의 발화다. 참혹하고 두렵고 아름답다. 이 몸의 언어가 머리의 언어와 연동해 지진을 일으킬 때 그녀의 시는 더욱 위력적이었다. 역사·정치·문명의 허위를 사유하는 강인한 지성이 또한 그녀의 것이었다. 덕분에 ‘여류’라는 수상쩍은 말이 척결될 수 있었다.

“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죽을 때까지 기억난다”(‘서른 살’)는 식의 발성은 확실히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서른 살은 온다”(‘삼십세’)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데가 있다. 더 깊이 앓는 몸과 더 깊이 사유하는 머리가 최승자 이후에 없지 않았으나 그 둘의 뜨거운 합선(合線)은 이후에도 드물었다. 후계 운운하는 사람들의 저의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젊은 시인이 몸의 언어와 머리의 언어 모두에 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자신이 사숙한 선배와는 또 달라 보인다. 덜 뜨겁지만 더 청신한 몸의 언어, 덜 치열하지만 더 유연한 머리의 언어가 그녀의 것이다. 그 차이가 더 소중하다. 그녀는 그녀만의 또 다른 혁신으로 선배에게 진 빚을 탕감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두 번째 시집이 나올 때가 되었는데 소식이 없다. 시인은 시만 생각하지 말고 기다리는 사람 생각도 해야 한다.(신형철|문학평론가)  

07. 02. 09.

P.S. 알라딘의 소개에 따르면,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은 "2000년 「문학과사회」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진은영의 첫 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하는 마음가짐으로 시를 짓는다. 허나 '모든 표정이 사라진 세상'에 '너'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막 심어진 묘목이 파란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치듯, 조심스레 손가락을 내어밀어 적은 시편들이 담겼다."

긴 손가락의 詩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평론가 이광호의 해설도 그렇지만, 대개 이 시인의 키워드로 꼽는 단어(그러니까 '일곱 개의 단어' 중 하나이겠다)가 '손가락'이다. 손가락에 주의를 두는 사람들은 주로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들이다. 시인의 표현을 빌면 그녀의 시들은 '긴 손가락'으로 씌어진 시들이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고 시인은 적었다. 듣기에 두번째 시집이 늦어지는 건 시인이 건강과도 무관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시간의 잎들'이 더 풍성하게 피어나기를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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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ournelle 2007-02-09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오자입니다. 리라이틸 -> 리라이팅

로쟈 2007-02-09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기인 2007-02-10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저도 진은영 시인 이 시집 잘 읽었는데, 어느새 박사학위도 받았다니! 역시 공부하느라 창작하기 힘들다는 것은 변명이군요.
 

작년 여름에 근간 목록에 올라와 있던 파스칼 키냐르의 에세이 <섹스와 공포>에 대한 기대를 표명한 바 있는데, 반년이 지나서 드디어 책이 출간됐다. 이 겨울이 가기 전에 중후한 에세이 한 권을 읽을 수 있게 되어 반갑다. 발빠른 리뷰도 올라와 있어서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7. 02. 10) 쾌락 뒤에 숨겨진 공포 '섹스와 공포'

사회적인 공인을 통과하지 않은 섹스에 대한 현대인들의 끈질긴 공포감은 어디서 연유된 것일까. 이 같은 공포감의 연원으로 기독교의 엄격한 청교도주의를 꼽는 것이 정설처럼 굳어져있지만,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의 원작자인 프랑스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는 이에 의구심을 품었다. 특히 1980년대 에이즈의 등장으로 인한 청교도적 윤리의 확산은 키냐르의 의구심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됐다.

섹스에 대한 현대인의 공포감의 뿌리를 찾아가던 키냐르의 눈길이 멎은 곳은 폼페이의 회화였다. 통음난무의 자유분방한 풍조를 반영하듯 폼페이의 벽화들은 에로틱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벽화에 그려진 인물들의 시선은 수줍고 심각했다. 즐겁고 쾌활해야 할 그림 속의 여인들은 정면을 바라보지 못했고 겁에 질려있었다.

키냐르는 <섹스와 공포>에서 자유로웠던 초기 로마의 성윤리가 공포감에 짓눌리게 되는 시기는 공화정이 제국의 형태로 정비되던 아우구스투스 황제기(BC 18~AD 14)라고 지적한다. 황제는 간통 처벌법인 ‘율리아의 법’ 제정 등 성의 억압을 통해 시민들을 통제하고 이를 기반으로 황제권을 강화하려 했다. 여자를 유혹, 밀애를 즐기는 내용을 노래한 당대의 인기시인 오비디우스는 당장 ‘불온시인’으로 낙인 찍혀 다뉴브 강변으로 쫓겨나 그곳에서 생을 마쳐야 했다.

성에 대한 억압과 금기가 없었던 기독교가 ‘로마의 윤리’를 따르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온다’ ‘음행하는 자는 제 몸에 죄를 짓는 것이다’라며 기독교인의 윤리를 설파하는 신약의 로마서는 바로 이 때에 쓰여졌다. 로마인들이 알몸을 가리기 위해 팬티를 착용하게 된 것도 이 시기의 변화된 성 모럴을 반영한 풍속이라는 것.

키냐르는 아우구스투스가 재위하던 32년이 단지 로마역사의 변곡점과 같은 시기가 아니라 세계사의 ‘지진’과도 같은 기간이었다고 과감하게 결론내린다. 디오니소스적이었던 로마의 에로티시즘이 이 시기 불안과 공포감에 가득찬 우수로 변질됐고, 이 공포감은 적대감으로 탈바꿈하면서 기독교 원죄의식의 질료가 됐다는 것이다. 섹스를 지옥으로 보내버린 중세의 청교도적 윤리가 이 시기에 뿌리 내리고 있고 현대의 성 윤리 역시 일정 부분 중세 윤리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기는 신대륙 발견기보다도 더 큰 변혁기라는 것이다.

역자 송의경씨는 “탄생이 죽음으로의 출발을 의미하는 양면성이 있듯이 섹스에는 쾌락과 공포가 본질적으로 혼재돼 있다”며 “섹스에서 공포만을 분리해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현대인들이 쾌활함이라는 에로티시즘의 또 다른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책”이라고 말했다.(이왕구 기자) 

07. 0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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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2-10 00:01   좋아요 0 | URL
성병에 대한 두려움에 떨면서도 사창가를 드나드는 심리가 바로 그것일테지요.

승주나무 2007-02-10 02:53   좋아요 0 | URL
저는 욕구불만의 공포는 좀 알고 있습니다만..그러고 보니 이것도 섹스의 공포 중 하나겠군요.^^

기인 2007-02-10 07:08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

stella.K 2007-02-10 11:14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참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사실 알고보면 문화의 탄생과 발전이란 게 에로티시즘을 발전시킨 것과 그 맥을 같이하는 것이 아닌가요?

다락방 2007-02-10 23:25   좋아요 0 | URL
아, 오늘 신문에서 이 책을 봤는데 여기서 또 보네요. 반갑게스리.
 

'비평이론 총서 01'로 <들뢰즈와 그 적들>(우물이있는집>이 출간됐다(처음에 '들쥐와 그 적들'로 읽었다). 정정호 교수 편의 논문집인데, 11명의 필자 모두가 국내의 어문학, 철학 전공자들이다. (재)작년인가 영미문학회인가의 학술발표회 주제가 '들뢰즈와 그 적들'이었고 아마도 이번에 묶인 논문들은 그때 발표된 것들인 듯하다. 몇년 전에 <들뢰즈 철학과 영미문학 읽기>(동인, 2003)가 같은 편자에 의해서 나온 적이 있는데, 그간에 보다 확장되고 심화된 연구 성과들을 열람해볼 수 있을지 기대된다(이진경의 <노마디즘>과 이정우의 몇몇 저작을 제외하고도 국내 저자가 쓴 들뢰즈 관련서들은 댓 종 이상 출간돼 있다).  

 

 

 

 

아직 아무런 리뷰기사가 뜨지 않아서 소개를 옮겨오면, "철학사 교수에서 철학자로, 예술이론가에서 영화이론으로, 정치경제이론가로, 문학이론가로 종횡무진 횡단하는 인문 지식인인 들뢰즈의 폭넓은 연구 영역을 각 분야별로 고찰했다. 들뢰즈의 문학예술론 및 몸철학, '중간'문학론, 언어와 문화론, 영화론, 윤리론, 정치론, 유목주의와 자율주의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들뢰즈에 대해서 다양하고 종합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목차로 보아 좀 아쉬운 건 지젝의 들뢰즈론 <신체 없는 기관>에 대한 참조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 커플의 작업을 맹비판하면서, 가타리야말로 들뢰즈의 적임을 주장한 이가 지젝 아닌가?(내부의 적!) 그런 관점에서 들뢰즈/가타리를 다시 읽는다면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연말에 나온 걸로 돼 있는(하지만 알라딘에는 꽤 늦게 올라온) 책이 로널드 보그의 '들뢰즈 3부작' 중 마지막 책 <들뢰즈와 시네마>(동문선, 2006)이다. 따져보니까 작년 한해 동안 세 권이 모두 출간됐다(역자들의 부지런함을 치하할 일이다). 사던 책이니만큼 이미 구색을 다 맞춰놨는데(원서로도 진작에 맞춰놨었다), 완독하는 건 아마도 역순이 될 듯싶다. 그건 들뢰즈의 영화론에 대해서 숙지해야 할 필요 때문이다.

 

 

 

 

이번에 나온 <들뢰즈와 시네마>는 "<시네마1>과 <시네마2>에 대해 영어로 쓴 최초의, 최상의 해설이다"란 평도 듣는 만큼 한번 도전해봄 직하다. 물론 '들뢰즈와 영화'란 주제에 한정하더라도 읽을 책은 차고 넘친다. 책읽기에만도 거의 '진화적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거기에다 보그는 "시네마에 대한 들뢰즈의 접근에는 베르그송으로부터 그가 받은 영감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시간에 관한 베르그송의 개념을 확실히 이해하지 않으면 <시네마1>과 <시네마2>의 많은 부분이 애매하게 된다."(11쪽) 협박해놓고 있으니 견적은 더 불어난다(물론 저자가 베르그송에 대해선 잘 정리해놓고 있지만).

지난 1월에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을 읽고 또 들뢰즈의 <푸코>까지 읽어보겠다던 계획이 입에 침만 묻히고 무산돼 버렸는데, 어느새 스테이지는 '들뢰즈'로 바뀌었다. 이 숨가쁘게 반복되는 차이 속에서 잠시 넋을 놓는다...

07. 0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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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02-09 22:15   좋아요 0 | URL
<들뢰즈와 시네마>일단 주문해 놓긴 했는데 워낙 악명높은 동문선이라. 번역이 어떨지 심히 걱정되는군요. 로날드보그의 다른 들뢰즈책도 그래서 구입을 안했다는..원서대조작업으로 읽어야하는 공을 다시 들여야 하는건지..-_-

로쟈 2007-02-09 22:17   좋아요 0 | URL
역자인 정형철 교수가 보그의 제자라는군요. '전력투구'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yoonta 2007-02-09 22:20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그렇다면 일단 믿고 읽어봐야겠네요. 이상한 부분은 로쟈님이 검열해 주시리라 기대해 봅니다..^^
 

작년 4월에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두레, 1997)를 몇 페이지 들춰보면서 '도스토예프스키와 타르코프스키'란 페이퍼를 쓴 적이 있다. 이후에 타르코프스키에 대한 자료들을 나는 더 긁어모았고(그에 관한 논문이나 책을 쓰는 것이 나의 목표이자 핑계이다), 어제는 <순교일기>의 영역본 <시간 속의 시간(Time within time)>(1994)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도서관에 주문한 책을 얼마전에 대출해서 복사한 것이다.  

집에까지 들고 온 김에 몇 페이지만 다시 읽어보았다. 영역본은 국역본과 마찬가지로 지난 1989년에 나온 독어판 <순교일기(Martyrolog)>를 대본으로 한 것인데, 이 책의 러시아어본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짐작엔 아직 출간되지 않은 듯하다. 좀더 검색을 해보니 출간은 이미 기획돼 있고 원래는 작년말 정도를 목표로 했다고 한다. 적어도 올해는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독어본 일기는 1권(1970-1986), 2권(1981-1986) 두 권으로 돼 있는데, '편집자의 말'에 보면 "1권이 출간되고 난 뒤 그의 부인조차도 몰랐던 많은 양의 일기와 방대한 자료가 새롭게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기적으론 1권과 부분적으로 중복되는 2권이 다시 출간되었던 것. 아래가 그 2권이다.
 
 
짐작할 수 있지만 독어본 두 권은 716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본문 370쪽이 되지 않는 국역본은 당연히 발췌본이고 이에 대해서는 역자가 해명해 놓았었다. "이 일기를 모두 우리말로 옮겨 출판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겠으나 그것은 너무 벅찬 일이어서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부분만을 골라서 책을 엮게 되었다. 일기의 선택기준은 타르코프스키의 인생관, 세계관과 관련되어 있는 것들, 그가 어떤 사람인가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의 영화예술론, 작품의 구상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그의 예술이 소련의 이데올로기 및 영화당국, 관졔예술과 어떤 충돌을 빚어내고 그래서 어떻게 박해받았는가를 보여주는 것, 그가 즐겨 읽었던 작가, 예술가, 사상가는 누구이며, 가장 많은 감명을 받은 글은 어떤 것인가를 나타내주는 것 등을 중심으로 하여 글을 골랐다."(400쪽)
 
<봉인된 시간(Sculpting in Time)>과 마찬가지로 키티 헌터-블레어(Kitty Hunter-Blair)가 옮긴 영역본은 색인까지 포함해서 407쪽 분량이니까 국역본과 큰 차이는 나지 않으며 짐작에는 독어본의 제1권(만)을 번역한 듯하다. 부제가 '일기 1970-1986'라고만 붙어 있는 것도 그런 심증을 갖게 한다. 하지만 조금 읽어보니까 국역본에 누락된 대목들도 군데군데 포함하고 있다. 국역본보다는 조금 자세한 게 아닐까란 짐작을 해보게 된다. 겸사겸사 국역본에 몇 가지 교정사항(의문사항)이 있어서 적어둔다. 현재 품절되었다고 하니까 혹 재출간시(완역본이 나오면 더 좋겠고) 교정사항이 반영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지난번에도 인용한 바 있지만, <순교일기>의 첫문장은 1970년 4월 30일 일기의 것으로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우리는 다시 한번 <도스토예프스키>를 영화화하는 작업에 관해 사샤 마사린과 이야기했다."이다. 여기에 나는 "역주에도 있지만, 마사린은 영화 <거울>의 시나리오 작업을 타르코프스키와 함께 했었다"라고 덧붙였었는데, 영역본을 보니까 '사샤 마샤린'이 아니라 '사샤 미슈린(Sasha Mishurin)'이다. 사샤가 '알렉산드르'의 애칭이므로 공식 이름은 '알렉산드르 미슈린'이다. 국역본의 '등장인물해설'에는 또 '알렉세이 미샤린(Aleksei Mischarin)'이라고 표기돼 있다(374쪽). 이게 왜 이리 왔다갔다 하는 건지.
 
 
나타샤 시네씨오스가 쓴 작품해설 <거울>(2001)을 보니까 각본은 타르코프스키와 함께 'Alexander Misharin'이 맡은 것으로 기재돼 있다. 그래서 나의 결론은 '알렉산드르 미샤린'(사샤 미샤린)이라 해둔다('미샤린'이 '미슈린'으로도 불릴 수 있나?). 국역본의 '알렉세이 미슈린(1912-1982)'은 다른 러시아 영화감독의 이름이다.
 
'편집자의 말'에 보면 "등장인물의 표기는 독어판과 영어판을 대조해가면서 정확을 기하려 했으나 러시아어판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곳이 적지 않을 것이다."(403쪽)라고 했는데, 첫문장에서부터 그런 사례가 나오고 있는 것. 재판이 나온다면 <봉인된 시간>처럼 그냥 다시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류들을 정정하여 보다 정확한 번역본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어지는 대목. 타르코프스키는 어쨌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이 아닌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에 관한 영화를 찍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적는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성격, 그의 신, 그의 악령들, 그가 이룩한 일들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톨야 솔로니친은 도스토예프스키 역할을 훌륭하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지난번에 지적한 대로 '톨야 솔로니친'은 '톨랴 솔로니친'라고 표기하는 게 맞다. '톨랴'는 '아나톨리'의 애칭이며 아나톨리 솔로니친(1934-1982)은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주역을 맡았던 그 배우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이 솔로니친을 도스토예프스키의 배역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 아래 사진은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솔로니친과 도스토예프스키. 타르코프스키는 그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배역을 훌륭하게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보는 것.  

"이제 나는 우선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쓴 글을 모조리 읽어야만 하겠다. 그리고 그에 관해 쓴 모든 글들 그리고 러시아 종교철학자들인 솔로비요프, 베르쟈예프, 레온체프의 글들도 모두 읽어야겠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내가 영화 속에서 실현시키고자 하는 이 모든 것들의 총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25쪽)

여기서도 표기 하나. 레온체프는 영어로 'Leontiev'이며 러시아 철학자 콘스탄틴 레온티예프(1831-1891)를 가리킨다(러시아 출신의 저명한 경제학자는 바실리 레온티예프이다). 발음대로 하면 '레온찌예프'가 되지만, 관행에 따라 '레온티예프'라고 해둔다. 여기까지가 4월 30일의 일기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5월 10일자 일기. "1970년 4월 24일 우리는 므야스노예에 집 한 채를 구입했다"(26쪽)고 나오는데, '므야스노예(Myasnoye)'의 바른 표기는 '먀스노예'이고 타르코프스키 가족의 별장이 있던 곳이다. 아래의 사진들은 타르코프스키의 아들 안드레이가 찍은 먀스노예의 사진들이며 영어본 폴라로이드 사진첩 <순간의 빛(Instant Light)>(2004)에 들어 있다.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분위기가 사진들에서도 묻어난다. 아래사진에 나오는 여인이 타르코프스키의 아내이자 안드레이의 어머니 라리사이다.  

아들 안드레이는 1970년 8월 15일 일기에 보면 "라리사가 8월 7일 6시 25분 아들을 낳았다. 안드류슈카(안드레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라는 구절에서 처음 이름이 등장한다. 아버지의 이름도 안드레이여서, 이 부자는 둘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유작 <희생>에서 자신의 영화를 아들 '안드류슈카에게 바친다'라고 나중에 적게 될 것이다. 

여하튼 그런 식으로 러시아 고유명사의 표기는 거의 매 페이지마다 문제가 된다. 가령 5월25일 일기에서는 "바스카코프 집에 갔었다."라고 시작하지만, 영역본을 보면 "바자노프 집에 갔었다"고 돼 있다. 둘다 일기에 등장하는 이름들이서 오타 문제도 아니다(러시아본이 빨리 출간됐으면 싶다!). 한 가지 덧붙이지면, 같은 날짜 일기에서 "점차 일이 진행되고 있다"로 시작되는 문단은 영역본에 6월 4일 일기로 돼 있다. 국역본이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지만 타르코프스키의 독자로서 '정독'하려고 하면 아쉬운 부분들이 많다...

07. 0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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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유치원 차에 태워보내고 편의점에 가서 '한겨레'를 사들고 왔다. 금요일자 '18도'를 챙겨두기 위해서인데 몇 안되는 일간지가 편의점에는 딱 한 부씩만 들어와 있기 때문에 오후에 가보면 간혹 없을 때가 있다(물론 이런 수고를 하는 건 오늘 '재택근무'를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출판 칼럼니스트' 표정훈씨 이야기가 '한국의 글쟁이'의 18번째 연재로 실려 있다. 언론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이 대표적인 '탐서주의자'에 대해선 굳이 부연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그의 궁리닷컴을 방문한 지가 꽤 오래됐군). 나도 간혹 '책벌레'란 소리를 듣긴 하지만, 이 '국민 책벌레'에 견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우리 시대에 책벌레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그를 통해서 엿보기로 한다. 한겨레의 기사와 함께 지난달 중앙일보에 게재한 표정훈의 칼럼을 같이 옮겨놓는다(아래 작업실 사진을 내 방구석이 지저분하다고 구박하는 아이나 아이엄마가 봐야 하는데!.. 둘러보니 내가 더 나은 것 같지도 않군^^;).

한겨레(07. 02. 08) 출판 칼럼니스트 표정훈

아주 아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읽고 싶은 책을 사달라 부모를 조르는 게 일이었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참고서보다 교양서를 즐겨 읽었으며, 대학에 들어간 뒤에는 아예 학교 도서관을 구획 나눠 차례대로 정복해 들어가는 사람. 심지어 우리말 책만으로는 성이 안차 궁금한 책이 있으면 원서라도 사서 읽고(물론 자기 전공도 아닌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가 좋아서 독후감을 쓰고 책을 분류하고 읽고 싶은 책의 모습을 그리는 사람. 책 읽는 게 세상에서 가장 좋으니 책만 읽고 살아가고 싶어하는 이런 책벌레는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까?

표정훈(38)씨는 그 답을 보여주는 책벌레다. 10여년 전만해도 표씨 같은 책벌레들을 위한 똑떨어지는 직업은 없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책벌레들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직업이 생겼으니, 바로 ‘출판 칼럼니스트’ 또는 ‘출판 평론가’란 직종이다(*내가 궁금한 것 중 하나는 '출판평론가'나 '도서평론가' 등의 직함이 어떻게 구별되는지이다. 같은 지면에 나란히 실린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에서 가령 이권우씨는 언제나 '도서평론가'라고 자신을 소개하기 때문이다. 범위의 문제인가?).

취미가 직업이 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책벌레들에겐 가장 이상적인 직업이다. 물론 책벌레가 아니면서 출판 평론가가 될 수는 없겠지만, 출판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표씨는 알아주는 책벌레다. 또한 이권우, 박천홍, 최성일씨 등 요즘 활발히 글을 쓰는 다른 출판 칼럼니스트들이 대부분 출판관련 저널리스트 출신인데 견줘 표씨는 거의 유일하게 오로지 책벌레로만 지내다가 자연스럽게 출판 글쟁이가 된 이다.

학창시절을 책과 보낸 표씨는 대학 졸업 후 새내기 번역가가 된다. 때마침 불어온 인터넷 바람 속에서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홈페이지를 만들었는데,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생생한 책 이야기로 입소문을 탔다(*그게 궁리닷컴이다 http://www.kungree.com/). 한 일간지에서 가볼만한 사이트로 그 홈페이지를 소개했고, 이어 책관련 칼럼을 써보라는 제안을 해왔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표씨는 물만난 고기처럼 책벌레다운 글솜씨를 보여주었다. 그 뒤 여러 매체에서 책과 출판에 대한 글요청이 몰려들면서 표씨는 자연스럽게 이른바 ‘출판칼럼니스트’란 직업을 갖게 되었다.

표씨는 여러 책을 쓰고 번역했지만 저술가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글쟁이에 가깝다. 책이란 보편적인 주제를 글로 쓰기 때문에 <한겨레>부터 <조선일보>까지, 매체의 분야에 상관없이 글 부탁을 받는다(*'한국의 글쟁이'로 이미 소개됐던 역사학자 이덕일씨도 그러하다). 쓰는 글은 서평이 주류를 이루지만 책, 그리고 독서문화를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를 넘나든다. 또한 우리 출판계에서 책문화 전도사로도 활동해왔다. 책과 출판 관련 전시회를 기획하는 일도 여러차례 맡았다. 삼성출판박물관, 아단문고 전시회를 기획했고, 2005년 우리나라가 주빈국으로 참가한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한국관 기획위원으로 힘을 보탰다. 여기에 꾸준히 번역을 하는 동시에 여러가지 책 기획에 참여해왔다(*해서 들은 바로는 표씨가 언제나 큰 배낭을 메고 다닌다는 것. 출판사들에서 얻은 책들을 잔뜩 담아서).

이 넓은 활동폭이 가능한 것은 모두 그가 ‘책벌레’인 덕분이다. 표씨가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는 책은 일주일에 3~4권, 3분의 1 정도 읽는 책이 대여섯권이다. 1만여권의 책을 가지고 있고, 월 50만원 정도를 책 구입에 쓴다(*같은 책벌레로서 잠시 견주어보니, 나보다 많이 읽지만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다. 그가 주로 많이 읽는 역사서들을 나는 그다지 읽지 않는다. 아니 읽을 시간을 내기 어렵다. 그리고, 1만여권의 책을 갖고 있다면 나보다는 약간 많은 수치일 듯하다. 도서구입비 월 50만원은 비슷한 듯하다).

책벌레들의 특징이 ‘박람강기’(博覽强記)라는 점을 감안해도 표씨의 지식은 넓이 면에서 도드라진다. 교수도 아니고 박사도 아닌 그가 이런 지식을 갖게 된 비결은 꼬리를 물며 책을 이어가는 독서습관이다. “책을 읽으면 참고문헌에 있는 책이나 관련있는 책, 거론된 책을 찾아서 읽거나 체크를 해놔요. 저자가 마음에 들면 그 사람 다른 책을 조사해서 알아놓아요. ‘이 짓’을 한 10년 넘게 했어요. 그렇게 하니까 책의 그물이 지어지는 거죠. 외국에 가서 책을 보다가도 참고도서 목록이 충실하면 정작 그 책 내용은 별로라도 사는 경우도 있어요.” 이런 모든 조사과정이 지식으로 쌓이는 셈인데,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고 이런 과정 자체를 즐기기 때문에 하는 일이다(*적어도 대학원생 이상이면 이 정도는 해줘야 한다. 최소한 자기 전공에 대해서는). “책이 전경이라면 그 전경을 둘러싼 배경을 조사하고 알아가는 것, 그게 즐겁기도 하고 그렇게 하면 더 잘 볼 수 있으니까요.”

여기에 그가 가장 자신 있어하는 장기인 인터넷 검색능력이 더해진다. 그런데 이 검색의 노하우에는 특별한 비결이 없다. 어떻게 해야 잘 찾느냐고 묻자 답은 맥빠지게도 “책을 읽어라”였다. 그 다음이 표씨가 ‘열쇳말 그물짓기’라고 부르는 검색과정이다. 역시 대단할 것은 없지만 대신 집요한 추적 의지의 중요성을 엿보게 한다. 니콜라스 루만이란 독일 사회학자를 찾은 과정을 예로 들어보자. 루만은 사회학 석학이지만 동시에 지식과 정보를 잘 관리, 편집해서 많은 책을 쓴 것으로도 유명한 학자다. 표씨가 찾고자 한 것은 이 사람의 지식관리법. 문제는 단순히 루만의 이름만 검색어로 치면 사회학 업적만 건조하게 화면에 뜰 뿐이다(*나의 관심은 보다 고리타분해서 루만의 '지식관리법'보다는 그의 대저 <사회체계들>에 가 있다. 아직까지 번역/소개되지 않는 게 사회학자들의 직무유기가 아닌가, 의혹을 품으면서).

표씨는 흔히 다작하는 저술가들이 활용하는 도구인 ‘인덱스 카드’ 등을 독일어로 추가해 다시 검색한다. 그래도 역시 원하는 지식관리법은 여전히 안나온다. 다음은 영어로 ‘지식’을 뜻하는 ‘knowledge’와 ‘관리’란 뜻의 ‘management’를 검색어로 보탠다. 이런 식으로 계속 검색어를 더해가며 찾아가면 결국은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 표씨의 지론이다. 이렇게 찾아낸 정보들 가운데 원하는 항목들을 모아가며 계속 연관개념을 찾아낸다. 이런 작업을 오랜 세월 규칙적으로 해오면서 쌓인 지식량, 그리고 노하우가 아니라 정보가 어디에 있을지 알고 유추해내는 ‘노웨어’(know-where)가 표씨 스스로 꼽는 자산이자 강점이다(*그의 책들을 아직 안 읽어봐서 얼만큼의 '강점'인지는 잘 모르겠다. <탐서주의자의 책> 정도는 읽어둘 법한데, 책은 '당신이 없는 사이에' 출간됐었다).

이는 글을 쓰는 원칙에도 적용된다. 최대한 많이 조사하는 것, 그리고 그 자신이 연구자가 아니고 독자의 연장선에서 글을 쓰는 것이니만큼 독자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쓰는 것이다. “글 쓰는 것도 일종의 서비스업”이라고 믿는다. 지식이 담겨 있으면서도 어렵지 않은 글이 그의 지향점이자 특징으로 갖춰진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표씨는 2000년대 초반 등장과 동시에 출판계에서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인터넷이란 새로운 도구를 가장 잘 활용해서 다양한 정보를 찾아내고 조합하는 능력, 그리고 원서를 직접 읽고 기획할 수 있는 외국어실력과 기획력으로 새로운 시대에 가장 적합한 필자로 꼽혀왔다.

그동안 표씨가 펴낸 책은 크게 두가지.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2003)나 <탐서주의자의 책>(2004) 같은 책과 독서에 대한 지적인 교양 에세이, 그리고 <하룻밤에 읽는 동양사상> 류의 가벼운 실용교양서다. 저술한 책은 그닥 양이 많지는 않다. 주된 분야는 역시 방대한 독서량에서 나오는 지식으로 맛깔스럽게 쓰는 고급스러운 에세이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표씨는 그동안 다양한 여러가지 활동을 해오는 대신 저술의 측면에서는 받아온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책에 대한 에세이 <탐서주의자…>와 <책은 나름의…>가 고급 에세이로 호평을 받았지만, 두 책 모두 짧은 글모음이란 점에서 이제는 표씨가 한 단계 더 뛰어넘는 책을 내주기를 출판계는 기대하고 있다. 여기저기 이것저것 분산되게 쓰고 있는 재능을 이제는 한 분야에 집중할 단계라는 충고도 나온다.

표씨 역시 스스로도 이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해 하반기부터 활동 폭을 줄이고 출판평론성 글, 각종 에세이 등 토막글을 고사하면서 단행본을 쓰는 데 집중하기로 승부수를 걸고 있다. “당장은 딜레마죠. 들어오는 정기 수입이 토막글이고, 이런 글들이 시간도 적게 들구요. 하지만 글쟁이로서 제가 생산적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기간이 앞으로 길어야 15년 정도일 것을 감안하면 에너지를 집중해서 호흡이 긴 책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출판평론가의 정년은 55세인가?) 

그래서 표씨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주제를 가리지 않고 실용서도 써보려구요. 독자들과 비슷한 비전공자이지만 교양 분야에 대해 연구가 아니라 공부를 하는 거죠. 그래서 공부한 것을 정리해서 소개하고 흥미를 느끼게 해주는 일을 하려는 겁니다.”(글 구본준 기자)

 

중앙일보(07. 01. 12) 자성의 목소리 없는 출판계

불철주야 책 만들기에 여념 없는 출판인들에게 출판계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지만, 일반 독자들이 바깥에서 보기에는 대체로 심심하다. 각종 사건들로 바람 잘 날 없는 정치권이나 연예계와 비교해보라. 그런데 이 심심한 동네가 '내일은 또 무슨 일이?'라는 걱정을 해야 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정지영씨의 '마시멜로 이야기' 대리 번역 의혹, 한젬마씨 저서 대필 논란, 마광수 교수의 제자 시(詩) 도용 혹은 표절 파문, '인생수업' 표지 사진 표절 혐의, 독서단체를 빙자한 책 사재기 대행 웹사이트 의혹….

책에 표시된 저자 혹은 번역자, 대리번역자와 대필작가, 출판사, 그리고 독자에 대한 다음과 같은 책임론이 사뭇 분분하다. 관행을 방패 삼거나 수단을 가리지 않고 책을 많이 팔려는 출판사의 상략(商略)이 문제다. 번역과 저술에서 실제로 맡은 구실이 미미하거나 사실상 없으면서도 제 이름을 걸어놓은 사람들이 문제다. 대리번역자나 대필작가가 지금 와서 나서는 게 볼썽사납다. 유명인이 쓴 책이나 베스트셀러에만 몰리는 독자들이 문제다.

그런 책임론에 대해 출판계 차원의 솔직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게 아쉽다. 출판인도 아닌 필자가 결례를 무릅쓰고 대신 자성하고 싶다. 첫째, 다매체 환경에서 출판의 위상 문제다. 정지영씨는 방송인으로서의 명성을 발판 삼아 번역자(?)가 되고 한젬마씨는 저자(?)로서의 권위와 유명세에 힘입어 방송인으로 입신했다는 차이는 있지만, 두 사람 모두 영상매체 친화적인 브랜드다. 책이라는 매체 자체의 완결성보다는, 더 인기 있는 다른 매체에 기대려는 출판의 초라해진 자화상을 반성하고 싶다.

둘째, 출판기획의 본말(本末) 문제다. 책도 치밀한 '기획'을 거쳐 시장에 내놓는 '상품'이며 출판업은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활동이다. 그러나 영리 추구 목적의 출판기획에도 본과 말이 있다. 오로지 팔릴 것만을 생각하는 게 그 근본인 것 같지만 책의 존엄에 대한, 어떤 의미에서는 시대착오적인 존중이야말로 진정한 근본이다. 근본을 살피지 못한 점을 반성하고 싶다.

셋째, 베스트셀러의 맹점이다. 베스트셀러 집계의 기술적 공정성과는 별도로 애당초 저자나 번역자 자체가 거짓이거나 교묘한 사재기 상술이 개입할 여지가 있는 한, 베스트셀러 순위는 신뢰하기 힘들다. 고백하건대 필자는 베스트셀러의 요인을 분석하는 글을 쓰곤 했다. 그러나 만일 저자나 번역자 자체가 거짓이거나 사재기로 만들어진 베스트셀러라면 그 요인 분석은 고의가 아니었을지라도 거짓의 공범 구실을 한 셈이니, 이 자리를 빌려 사과드리고 반성하는 바이다.

넷째, 겉으로는 고급 문화인 행세를 하면서 속으로는 진작부터 고쳤어야 할 해묵은 관행을 계속 끌고 가는 이중성을 반성하고 싶다. 출판은 마땅히 지원받아야 할 부문이라며 물적.제도적 지원을 요구할 때는 한껏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정작 출판인과 출판계가 먼저 스스로 개선해야 할 것들을 과감하게 고치는 노력에는 인색하지 않았는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진리를 새삼 떠올릴 때다.

'삼국지'의 한 대목을 떠올려 본다(이하 황석영 '삼국지'(창비)에 바탕을 둠). "이 책은 우리 촉땅에서는 삼척동자도 다 외우고 있는데, 새로 지은 책이라니 무슨 소리요? 이 책은 전국시대에 어느 무명씨가 지은 것이오. 조 승상은 도적질에 능하니 그를 표절해 자신이 지은 것처럼 그대를 속인 것이오." 사신으로 파견된 장송이 조조가 지었다는 '맹덕신서'를 한 번 훑어보고 외운 뒤 조조의 신하 양수에게 한 말이다. 이 일을 전해 들은 조조는 언성을 높여 "옛 사람 생각이 나와 우연히 들어맞았던 게지!"하고 즉시 '맹덕신서'를 찢어 불살라버리라 명했다. 저자이자 발행인인 조조가 보여 준 최소한의 자존심이 차라리 그립다.(표정훈 출판평론가)

07. 02. 09.

P.S. 참고로, '출판평론가'의 자녀교육법이 궁금하신 분들은 '여성동아'(2006년 5월호)의 기사를 참조해보시길(http://www.donga.com/docs/magazine/woman/2006/05/08/200605080500037/200605080500037_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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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007-02-09 10:52   좋아요 0 | URL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글 읽다가 생각한 건데요, 혹시 로쟈님은 저서가 있으신지요? 아니면 곧 쓰실 계획이 있으신지요? 제가 잘 몰라서.. 죄송 ^^

로쟈 2007-02-09 11:02   좋아요 0 | URL
아직 저서랄 게 없구요, 번역서들을 포함해서 올해나 내년부터는 많이(?) 내려고 합니다.^^;

외로운 발바닥 2007-02-09 11:18   좋아요 0 | URL
정말 '달인'의 경지에 이르신 분이네요. 머지 않아 로쟈님도 이런 기사가 나지 않을까요? ^^ 책 내시면 꼭 알려주세요. 페이퍼 통해서라도...^^;; 그리고 살짝~ 퍼갑니다.

yoonta 2007-02-09 12:04   좋아요 0 | URL
근데 "출판평론가"나 "도서평론가"가 아닌 "인터넷서평꾼"은 언제쯤 인터넷서평만으로 먹고살수있을까요? 로쟈님같은 알라딘대표 "인터넷서평꾼"도 땡스투같은것만으로는 책한권사기도 벅찬 정도의 수입이 가능한 구조에서는 당분간 자력 갱생하기 힘들것 같은데..이 기회에 님도 아예 공인"도서평론가"로 나서시는것이 어떠신지..

짱꿀라 2007-02-09 12:23   좋아요 0 | URL
yoonta님, 로쟈님, 열심히 밀어드리자구요. 언능 로쟈님 책한권 나오시게 만들어야죠. 로쟈님, 이제는 출판계쪽으로 나서시는 것이.......
저희가 적극 밀어 드리겠습니다. 실력도 좋으신데 말이죠.

로쟈 2007-02-09 12:35   좋아요 0 | URL
성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데 그렇게 자꾸 등떠미시면 곤란합니다. 출판계도 먹고 살기 어렵구요, 발밑이 절벽입니다!..

나비80 2007-02-09 13:46   좋아요 0 | URL
저는 표정훈 씨 작업실의 봉투 그대로 뜯어보지도 않은 책들에 눈이 가는걸요^^

로쟈 2007-02-09 14:26   좋아요 0 | URL
저도 봉투나 박스는 많이 받는데 대부분 제가 값을 치러서 온다는 점이 차이죠.--;

기인 2007-02-09 15:01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에효. 저도 제 미모를 이용해서 뭔가 해보고 싶어요! ㅋㅋ -_-;
정지영 아나운서 누군지 모르고 있었는데, 이 사태 터진 후에 볼수록 미모가 뛰어나서 팬이 될 지경입니다 -_-;;;; ㅎㅎ
국문학의 경우는 전공에 대한 참고문헌을 확보하는 것이 비교적 쉬운 일이라서 적어도 자신의 '전공'관련은 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전공'이라는 것이 '현대시'라기 보다는, 식민지 시기 현대시, 라기 보다는, 식민지 시기 국민문학파, 라기 보다는, 식민지 시기 주요한 -_-; 이라는 것이 문제겠지요 ^^; 그런데 또 파다보면 다 연결되어 있으니, 주요한에 대한 모든 연구들의 '목록'은 적어도 알고 있다고 하기도 어렵네요;;

비로그인 2007-02-09 15:04   좋아요 0 | URL
이 분 TV 책을 말하다에서도 '책 벌레' 대표(?)로 출현하신적 있는 거 같은데..그 분 맞나? ㅎ

이네파벨 2007-02-09 18:53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번역한 책이 궁금하네요.....................
열성팬인데 좀 알려주심 안되남요? ^________^

로쟈 2007-02-09 20:27   좋아요 0 | URL
기인님/ '미모'요? 중요한 게 미모긴 하죠.^^
테츠님/ 벌레라서 '출연'이 아니라 '출현'인가 보군요.^^
이네파벨님/ 나오면 다 '광고'합니다요.^^

그린브라운 2007-02-10 10:49   좋아요 0 | URL
잘읽었습니다 퍼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