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 일이 겹쳐서 가장 바쁜 학기가 되고 있다. 차라리 학위논문을 쓰던 때가 한가했던 것으로 여겨진다(실제로 한가지 일에 몰입할 경우에 '바쁘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바쁘다'는 '멀티-태스킹'과 관련되는 말이다. 일정 때문이 아니라 '이것저것'으로 바쁜 경우). 덕분에 앞으로도 한동안은 (한 후배의 표현을 빌면) '로쟈질'이 예전보다 줄어들 것이다. 벤치에 앉아 구경하는 재미도 나쁘진 않지 않을까? 물론 하던 일은 계속해야겠는데, '작가와 문학사이'를 옮겨오는 일이 그 '하던 일'의 한 가지이다. 이 연재가 연말까지 계속된다면 어지간한 2000년대 시인/작가들은 대부분 다루어지지 않을까 싶다. '작가사전' 역할도 기대해볼 수 있겠다. 이번주는 '나쁜 취향'의 시인 강정이다. 평론가 신형철의 능란한 수사학도 에너지에 있어서 시인 못지 않다.

경향신문(07. 03. 17) [작가와 문학사이](10)강정-펜으로 生을 연주하다

본명이 ‘강정’이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그 이름 과연 임자 만났구나 싶어진다. 필력강정(筆力扛鼎)이라는 말이 있거니와, 그의 문장은 솥(鼎)을 들어 올리는(扛) 혹은 들어 올리고야 말겠다는 무모한 에너지로 넘친다. 그러나 다시 읽어보면 이름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의 기분이 되어버린다. 죽고 싶다는 욕망과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내전(內戰)을 벌이는 시를 쓰는 사람에게 이름이야 별무소용일 것이다. 그는 그저 끊임없이 흩어졌다 모이는 몸, 부단히 죽었다가 살아나는 혼의 이름 없는 주인 같다. 첫 번째 시집 ‘처형극장’(1996)에서 한 편 옮긴다.

“나의 음악이 아름다운 까닭은/남자들이 모두 전쟁에 나가 죽었기 때문이다/살아남은 여인들이 헌 담요를 햇볕에 넌다/어디선가 짧게 아이들이 운다 용케 죽지 않은 남자인 나는,/전쟁을 모르는 남자인 나는 그러나/매일 밤 조용히 전쟁을 치른다(…)/터져나오는 노래의 홍수를 담을 새로운 집을 위해/새롭게 전쟁을 일으킬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모든 죽은 남자들의 힘줄로 살아나는/나의 아름다운 음악을 위해/나는 지금 죽어야 하나?”(‘나의 음악이 나를’ 중에서)

그의 첫 시집은 폭발적이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말들이 음악과 경전(經典) 사이에서 좌충우돌한다. 전언이 명료하지만 에너지가 없는 문장이 있고, 종잡을 수 없지만 뭔가를 자꾸 폭발시키는 문장들이 있다. 그는 “나의 아름다운 음악을 위해 나는 지금 죽어야 하나?”라고 묻거나 “나의 아름다운 음악을 위해 너는 죽어야 한다”(‘아름다운 적(敵)’)라고 명령한다. 이것은 무지막지한 탐미주의다. 목숨을 담보로 미(美)를 얻겠다는 무모한 낭만주의를 설득할 수 있는 이념은 세상에 없다. “망신(亡身)을 무릅쓴 진짜배기 탐미주의를 보기 위해서 한국 문단은 강정의 ‘처형극장’을 기다려야 했다”라고 고종석은 썼다(‘모국어의 속살’). 두 번째 시집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2006)에서 한 편 옮긴다.



“몸 안의 뼈들이 문득, 분진(粉塵)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가루로 흩어진 내 몸이 저만치 앞질러 미래의 풍경들을 장악한다/(보아라, 시간이 한꺼번에 늘씬하게 드러눕지 않는가)/이 숨막히는 질주는 자기 자신의 출생지점으로 되돌아가는 별의 행로와 다를 바 없다/내 몸에서 가장 먼 풍경들을 통하지 않고서는/나는 내 심장박동을 느낄 수 없다/(…)모든 풍경을 절해의 고도로 바꾸는 이 늘씬한 음탕함/정직하게 얼어붙어 시간을 냉각시키는 이 열망은 반성 이전의 자유, 미친 사유의 폭거”(‘한 밤의 모터사이클’에서)

첫 번째 시집이 죽음 쪽에 가까이 가 있다면 두 번째 시집은 신생 쪽에 가까이 가 있다. 더러 철학적인 SF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는 이미지들을 몰고 다니면서 그는 몸을 바꾸고 목소리를 바꿔야 한다고 선동한다. 변종(變種)과 변성(變聲)의 프로젝트를 위해 가동되는 이 미학에다 우리는 ‘테크놀로지 시대의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적이 있다. 발성법도 차분해 졌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첫 번째 시집이 ‘데쓰메탈’이라면 두 번째 시집은 ‘프로그레시브락’이다. 계시하는 자의 당당함 혹은 계시 받는 자의 숭고함이 그의 엔진이고, ‘욕망’(하고 싶다)을 ‘당위’(해야 한다)의 형식으로 바꿔치기하는 특유의 수사학이 그의 핸들이다.



1971년에 태어나 스물둘에 시인이 되었다. 시인이 뮤즈에게 바치는 세금은 시간이다. 질풍노도의 몇 년을 시의 신에게 헌납하여 스물여섯에 첫 시집을 되돌려 받았고, 풍찬노숙의 10년을 다시 봉헌한 뒤 서른여섯에 두 번째 시집을 얻었다. 시는 물이 올랐고 지난해부터 록밴드 ‘비행선’에서 노래도 한다. 그는 펜과 기타 사이를 오가면서 생(生)을 연주하는 퍼포머다. 그는 하고 싶을 때 하고, 최선을 다해 하고, 빠른 속도로 한다. 이 멋진 무분별의 에너지를 ‘강정’이라고 부르자. 강정은 동사다. 벗들아, 춘몽이 창궐하는 봄이구나, 우리도 강정하자.(신형철|문학평론가)

07. 03. 17.

P.S. <루트와 코드>(샘터사, 2004)까지 포함하면 시인은 대략 두 권의 시집과 두 권의 문화론집을 낸 듯하다(그는 한때 온라인 서점 리브로의 웹진 부커스 팀장을 역임했던 것으로 돼 있다). 평론가의 지적대로, 그는 "하고 싶을 때 하고, 최선을 다해 하고, 빠른 속도로 하"는 이 시대의 문화게릴라이다(나는 두번재 시집을 읽지 않았지만 첫시집과 신문의 연재들은 절반 이상 읽은 듯하다). 봄기운에 뻗친 에너지를 '강정하다'란 동사로 명명한 평론가도 봄기운을 주체하지 못한 경우라 흥겹다.

나는 해마다 목련이 만발하는 한 시절에 그런 들뜸과 아찔함을 경험한다(그러니 나의 흥은 아직 초반부이다). '아, 살아있구나!'라는 환희와 슬픔이 촉발된다. 그럴 때면 '요즘 강정하신가요?'라고 서로의 안부를 물어봄 직하다. 참고로, "우리도 강정하자"의 배경에서 내가 읽는 캐치프레이즈는 장정일의 "우리는 장정간다"이다. '장정가던' 시대/세대가 있었다. 지금은 '강정하는' 시대/세대인 듯하다. 목련의 나이를 문득 묻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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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3-18 0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글을 읽고 오래된 강정의 시집 <처형극장>과 두번째 시집을 사가지고 들왔답니다. 또 반성을 했지요.. <처형극장>은 예전에 구입했던 것 같은데 집에 없었습니다...좀더 새로운 시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듯...좋은 안내 늘 해주시길..

로쟈 2007-03-18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내야 제가 하는 게 아니고 저는 화살표 역할만 하고 있습니다.^^;

2007-03-25 0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