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서가에서 생각없이 빼어든 책이 안광복의 <처음 읽는 서양철학사>(웅진지식하우스, 2007)이다. 아마도 새해초라는 '시간의식'이 '처음 읽는'이란 제목에 눈길이 가도록 하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는 대학에서 소크라테스 대화법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면서 '즐겁게 철학하기'를 실천하고 있다고.

 

 

 

 

내가 처음 읽은 철학사는 예전에 적은 대로 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문예출판사)였는데, 그게 고3 겨울방학 때였으니 21년 전 이맘때이다. 아마도 대학의 논술시험을 앞두고 있었던 듯한데, 합격자 발표 이전인지 이후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그런 와중에 읽은 책이 <철학이야기>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었다(<중국철학 이야기>란 얇은 책도 있었다). 지금의 고3 혹은 예비 대학생이라면 어떤 책을 '처음 읽는 철학책'으로 고를 수 있을까 생각해보다가 지난 달인가 검토해보려고 했던 책이 바로 안광복의 <처음 읽는 서양철학사>와 남경태의 <철학>(들녘, 2007) 등이었다(김민철의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그린비, 2007)는 아직 구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검토는 나중의 일이더라도 잠깐 펼쳐든 김에 두 권에 대한 간략한 인상을 적는다. 빌미가 된 건 얼핏 발견한 오류들이다. 별로 좋은 습관은 아니지만 여하튼 어떤 책을 읽든지 간에 오탈자와 오류들에 눈길이 가는 게 거의 습관이 돼 버렸다. 이걸로 밥벌이를 하는 건 아니지만 일종의 '직업병'이다(직간접적으로 책을 만드는 일에 관여해온 탓이다).   

"철학은 정신의 체조"라고 정의하는 저자는 <처음 읽는 서양철학사>에서 모두 38명의 철학자를 다루고 있다. 체조의 38개 동작쯤 될까?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개별 철학자들에 대한 소개는 너무 소략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나 같은 독자를 염두에 둔 책은 아니니 나의 투정은 군소리에 불과하겠지만. 저자가 밝힌 바에 따르면, 책은 <고교독서평설>에 연재한 '인물철학사'를 묶은 것이다. 거기서 초점은 '철학'보다는 '인물'에 더 맞춰져 있어서 각 꼭지는 대부분 개별 철학자들의 삶에 대한 요약으로 채워져 있다. "철학 사상을 이해하고 싶다면 철학자들의 삶을 먼저 꼼꼼하게 살펴보자"(5쪽)는 게 저자의 기본 입장.

나는 책의 마지막 꼭지부터 잠시 읽기 시작했는데 '이해는 역사적이다'란 장이 다루고 있는 철학자는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1900-2002)이다. 첫문단은 이렇다.

"가다머는 학생들의 질문에 답변할 때면 언제나 '그건 내가 잘 모르는 것'이라는 말을 먼저 했단다. 그는 우호적이고 개방적이며 관대했을 뿐 아니라, 더 알고 싶어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여든 살이 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을 때도, 당시에는 피라미 대학 강사에 지나지 않았던 로티의 강의를 열심히 청강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436쪽)

여기에 무슨 오류가 있는가? 마지막 문장이다. 가다머가 여든 살이 넘었을 때면 1980년대인데, 그때 작년에 세상을 떠난 철학자 리처드 로티(1931-2007)가 고작 '피라미 대학 강사'에 지나지 않았다는 건 또 다른 로티가 있지 않는 한 잘못된 정보다. 이미 50년대 말에 대학강단에 선 로티는 1961년부터 1982년까지 프린스턴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고 이후엔 버지니아대학의 인문학 석좌교수, 그리고 스탠포드대학의 비교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피라미 강사'란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가다머의 말버릇처럼 "그건 내가 잘 모르는 것"이라고 전제한다면 모를까.

 

 

 

 

알다시피 가다머는 2002년에 백두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주저인 <진리와 방법>이 국내에서는 완역되고 있지 않은 게 유감스럽다. 올해엔 그의 책이나 연구서라도 더 출간되면 좋겠다(국내 필자의 연구서 한 권은 예정돼 있는 듯하지만). 가다머의 책이라면 그의 자서전은 어떨까?

"가다머는 자신의 자서전이나 마찬가지였던 <철학적 수업시대>에서 배움에는 끝이 없음을 강조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대화하고 반성하여 철학적 깨달음을 얻는 삶은 지적이면서도 유쾌하다. 그러나 이는 충고하기는 쉬워도 자신이 하기는 어려운 인생훈이다."(444쪽)

이 <철학적 수업시대>와 함께 소개되었으면 싶은 책은 가다머의 예술론이다. 영역본으로는 <미적인 것의 현실 관여성과 그밖의 에세이>란 제목.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이기에 조만간 소개될 수도 있지 않을까란 기대를 가져본다.

한편, 번역가와 저술가로 종횡무진 활동하고 있는 남경태의 <철학>은 <처음 읽는 서양철학사>와는 레벨이 좀 다르다. '사유의 예술'로서의 철학을 즐기자고 제안하는 저자는 역사를 '현실의 역사'와 '생각의 역사'로 크게 나누고 이 '생각의 역사'를 철학사로 규정한다. "서양 철학사를 다룬 이 책은 서양 문명사를 구성하는 절반의 역사, 즉 생각의 역사를 일관성의 측면에서 정리하고 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이 책 또한 '철학 전문가'를 위한 책은 아니라서 "철학자나 철학의 갈래"를 깊이 파고 들지는 않지만, "구슬을 꿰듯 철학사의 '재료'들을 꿰어 맞추었다는 데" 미덕이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상당한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하겠다(책의 부제가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다!)

이러한 자신감은 참고문헌은 물론 단 한 개의 각주도 달고 있지 않으면서도 인명의 경우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1951)' '라캉(Jacques Marie Émile Lacan, 1901-1981)'하는 식으로 장황하게 표기해주는 데서도 드러난다. 물론 인명사전을 들추거나 잠깐만 인터넷 검색을 해보아도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이긴 하지만.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경우다. 저자는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1908-1991)'(478쪽)라고 적어놓은 것. 올해로 탄생 100년을 맞은 레비스트로스가 이미 17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말 그대로 생사람 잡는 오류이다(그가 죽을 때도 되었다는 것과 죽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물론 기원전 3000년경부터 훑어내려오는 저자의 통큰 철학사 서술의 유창함에 견주어보면 '옥에 티' 정도라고 해야겠지만.

 

 

 

 

레비스트로스 얘기가 나온 김에 올해는 그의 주저들도 마저 소개되었으면 싶다. 대저 <신화학>이야 계속 나올 예정이라고 쳐도 "비록 소쉬르에게 선구자의 명예는 양보했으나 그의 언어학적 사상을 이어받아 구조주의의 기틀을 확립한 사람은 레비스트로스다."(478쪽)라고 할 때 근거가 되는 책, 곧 <구조인류학> 정도는 완역돼 나왔으면 싶은 것이다.

두 권 분량의 이 책은 예전에 <구조인류학>(종로서적, 1987)이라고 절반 정도만 소개됐었다. 이 거장이 타계하기 전에 한국어로 다시 읽어볼 수 있을는지?..

07. 01.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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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03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03 1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엔리꼬 2008-01-03 18:25   좋아요 0 | URL
네이버 레비스트로스 쳐보니 1991년 사망으로 되어 있네요. 네이버는 두산백과사전을 인용했고. 아마도 백과사전 자체가 잘못된 모양입니다.
네이버 만능주의라는 마수의 손길이 여기까지 미친 걸까요? 안그래도 아는 교수님께 전해들었는데, 교수님이 학생의 답변이 틀렸다고 지적했더니 학생 왈 "이거 맞는데요. 이거 네이버에 있는 건데요?' 라고 항변해서 쓴웃음을 지었다는 씁쓸한 이야기가 있네요..

로쟈 2008-01-03 23:26   좋아요 0 | URL
못 믿을 사전이로군요. 레비스트로스가 또 있나 봅니다.^^;

caline 2008-01-04 01:22   좋아요 0 | URL
네이버만이 아니라 의외로 레비스트로스가 91년에 사망했다고 표기한 책이 제법 되는것 같같군요.....일례로 시공 로고스총서 레비스트로서도 그렇게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레이트 한길사에서 나온책에서는 현재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있다라고 만 표기되어 있었던걸로 기억하는데..전 오히려 후자가 잘못된 정보인줄 알았다는...^^;

로쟈 2008-01-04 01:27   좋아요 0 | URL
제가 더 신뢰하는 쪽은 위키피디아입니다. 어디에서 사망했다는 얘기는 없는데, '사망설'의 출처가 어딘지 모르겠네요...

caline 2008-01-04 01:33   좋아요 0 | URL
어쨋든 구조주의 빠돌이로서 레비스트로스 영감님이 살아게시다니 괜히 흐뭇하네요..(웃음) 덕분에 러셀경은 장수랭킹 3위로 밀려버렸지만...

로쟈 2008-01-04 16:19   좋아요 0 | URL
'구빠'신가요? 요즘은 '포구빠'들만 워낙에 많아서.^^

테렌티우스 2008-01-05 01:16   좋아요 0 | URL
프랑스판 위키페디아에 1908년 11월 28일 출생 백세 생일을 앞두고 있다고 나오는 걸 보면 아직 안 죽은 거 확실합니다. 프랑스 사람이니 만치 죽었다면 최소한 지성계에선 난리날테고 그렇다면 위키페디아 불어판에 반영이 안 되었을리가 없으니까요...

(잠시후) 르 몽드 사이트에도 죽었다는 기사가 없는 거 보면 레비-스트로스 안 죽은 건 백 프로 확실합니다...^^

근데...철학자들은 좀 오래사는 경향이 있죠? 저도 철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될라나...^^(썰렁~)

로쟈 2008-01-05 01:56   좋아요 0 | URL
요절한 철학자들도 있지 않나요?^^

테렌티우스 2008-01-06 00:47   좋아요 0 | URL
^^
 

교수신문에서 '2008년 학술출판 전망' 기사를 옮겨놓는다. 올해의 '수확'을 미리 훑어볼 수 있어서 유익하다. 이미 예고돼 있던 책들도 있고 처음 소식을 접하는 책들도 있다. 돌이켜보면 작년에 학술서나 이론번역서 출간이 '빈곤'했다는 인상을 갖게 되는데, 라인업을 보니 올해는 사정이 훨씬 나이질 수도 있겠다.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와서 '행복한 고민'(어쩌면 고난!)에 빠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교수신문(07. 12. 31) 실증적 역사·한국철학 계보·한국사회 방향 등 ‘기대주’

2008년 학술 출판의 동향을 전망하고자 총 31개 출판사의 출간예정 주요 도서 500여종의 목록을 받았다. 이미 계획되고 있는 책들만 조사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2008년 출판되는 분량은 두 배 이상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서들을 중심으로 그간의 연구 성과들이 집약되고 있다면, 해외서들은 새로운 학자들과 이론들을 소개하면서 연구의 지평을 확장할 것으로 기대가 모아진다. 한국학술진흥재단(학진)의 출판지원 사업에 힘입어 출간계에 뜸했던 신진연구자들도 소개될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서와 해외서의 비중을 살펴보면, 국내서가 270여종으로 해외서 260여종에 비해 약간 앞섰다. 비등한 비율이지만, 해외 학자들의 유명세에 기대던 이전의 출판 경향에 빗대면 국내 학술서의 괄목할 만한 성장세다. 인문서 중에는 국내로 시선을 맞춘 한국사 연구서들이 두드러진다. 특히 기존의 역사연구가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사건사를 중심으로 이뤄져왔다면, 이들은 문화적·인류학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화여대 출판부가 준비하는 ‘이화한국학총서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올해 소개되는 2차분은 이혜순 등이 『조선중기 예학사상의 사회적 수용과 일상문화의 변화』로, 김영미 등이 『고려시대의 일상문화』로, 이배용 등이 『일제시대의 일상문화』로 한국의 일상사를 연구했다.

이화여대출판부의 시리즈가 고대부터 일제까지를 집약했다면, 서울대출판부와 권태억 등은 근대 시기를 『한국 근대사회와 문화』(서울대출판부)로 준비하고 있다. 전우용은 서울이라는 공간을 철학적, 역사적, 인류학적 관점에서 기술하는 『서울이야기』(돌베개)로 문화사를 그려내고, 『청년의 역사』(이기훈, 역사비평사)도 출간된다.



조선시기 일상민중의 삶을 고스란히 복원했다는 평가를 받은 『조선의 뒷골목 풍경』(강명관 지음)에 뒤이어 당대의 특정 풍속으로 시대를 들여다보는 저작들도 밀려올 예정이다. 전봉관이 『경성자살클럽』(살림), 이민주가 『조선의 패셔니스타』(살림)에 초점을 맞췄다면, 강명관은 조선시대 열녀(『열녀의 탄생』, 돌베개)에 내포된 역사적 의미와 모순 등을 설명한다.

실증(實證)을 표방하는 흐름에서 정치사회학적 역사연구서들로는 지난해에 시작된 역사비평사의 ‘20세기 한국사 시리즈’가 『전두환과 제5공화국』(정해구 지음), 『한국전쟁』(박명림 지음), 『식민지배정책사』(이승렬 지음) 등을 준비하고 있다. 물론 관점에 도전하는 역사서도 나온다. 정일준은 『대한민국 만들기』(새물결)로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넘어서는 건국사 서술을 시도해 주목된다.

한국철학·사회철학 세우기
철학계는 ‘서양철학 되풀이’라는 자성을 반영하듯 한국철학사와 사회철학 연구서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이제이북스는 신남철의 『역사철학』의 재출간을 준비했다. 월북철학자로 국내에서 비교적 조망 받지 못해온 그는 서양철학을 수용하면서 ‘신체적 인식론’이라는 독특한 실천적 역사철학을 정립한 바 있다. 한국 철학사의 단절을 조금이나마 메울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된다.

이정우는 『소운 박홍규와 서양철학사』(그린비)로 한국철학계의 거두인 故박홍규의 사상을 탐색했다. 이밖에도 한국 철학계를 달궜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이진경, 그린비)과 『한국철학에세이』(김교빈, 동녘), 『삶과 철학』(한국철학사상연구회, 동녘)이 재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한편, 사회철학의 필요성을 강조해온 김상봉과 홍윤기를 중심으로한 철학자앙가주망 네트워크는 잡지 <철학의 전선>(돌베개)을 창간, 철학이 상아탑의 공리공담이 아니라 현실의 변화를 견인하고 주도하는 담론임을 선포하고, 1970~80년대 『창작과 비평』이나 1960년대 프랑스 『텔켈』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생존해 있는 우리 학자의 학문세계를 논하는 책들도 새롭게 다가온다. 생각의 나무에서 출간하는 『김우창 전집』(전20권)과 함께 한국학술협의회는 아카넷과 ‘석학 연속강좌 연구서’를 시리즈로 기획, 그 첫 권으로 『김재권과 물리주의』(하종호 외)를 내놓는다. ‘한국의 학자’라는 이름이 자리매김하길 기대한다.

사회과학계는 2007년을 달궜던 한국사회 진단과 새로운 진로 모색이 흐름을 이어갈 전망이다. 먼저 서울대출판부가 출간할 『외환위기 10년, 한국사회 얼마나 달라졌나』(정운찬 외 지음), 『외환위기 10년, 한국 금융의 변화와 전망』(김광억 엮음)은 IMF 외환위기 이후 10년 동안의 한국사회의 경제적 변화를 분석했다.

창비에서 출간예정인 『민주화 이후의 한국자본주의』(이병천 지음)는 87년 민주화 운동을, 후마니타스에서 나오는 『금융세계화, 자본주의 모델, 그리고 한국경제』(전창환 지음)는 세계화를 기점으로 한국사회의 경제적 변화를 천착한다. 성공회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연구소는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를 비교연구로 접근했다.

한울에서 펴낸 ‘아시아 민주주의 비교연구 시리즈’는 2008년 1차분으로 『민주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와 ‘정치적 독점’의 변형과정』(조희연·김동춘 엮음), 『민주화 이후 아시아 민주주의와 ‘정치적 독점’의 변형과정』(조희연 엮음)을 선보인다. 대안의 빈약함이 2007년을 마무리한 가운데 아르케는 ‘대안발전모델 시리즈’를 기획했다. 먼저 ‘생태사회학적 발전모델’을 모색(『생태·사회적 발전을 위하여』, 구도완 외 지음)하고, 귀감이 되는 해외 사례들(『생태·사회적 발전의 해외 현장을 찾아서』, 오용선 외 지음)을 찾는다.

오늘날 한국사회 지식인의 성찰도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에 경향신문 특별취재팀이 마련한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기획 시리즈는 후마니타스를 통해 『한국지식인의 초상』으로 나올 예정이다.

학진의 저술지원사업들 책으로
올해는 학진의 저술지원사업들이 구체적 성과를 쏟아낼 예정이다. 학진의 지원정책을 둘러싸고 평가가 엇갈리고 있긴 하지만, 신진연구자들이 소개되고 있어 반갑다. 아카넷은 올해부터 학진의 박사논문출판지원사업 선정작을 ‘한국인문사회과학의 미래 시리즈’로 기획, 출판한다.

『가다머에서 변증법적 윤리와 해석학』(정연재 지음), 『호남지역 풍물굿의 잡색놀음 연구』(이영배 지음) 등 학문후속세대들의 사유와 함께 꼼꼼히 정리된 자료들도 도움될 만하다. 명저번역지원 사업의 경우 서양사는 나남에서, 동양사는 소명출판에서 집중적으로 나온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요강』(박승찬 옮김), 헤겔의 『철학백과전서 강요 제2부 자연철학』(김성호 옮김),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김도형 역주) 등을 만나볼 수 있다.



번역, 묵직한 사상가들부터 최신이론까지
2008년 출간되는 번역서는 저명한 사상가들의 저작과 함께 새로운 학자들과 최신이론의 도입도 두드러진다. 생각의 나무는 영국의 지성사학자 이사야 벌린의 『러시아지성사』를 처음으로 완역한다. 새물결은 현대사상가들을 조망하는 ‘What’s up 총서’를 기획, 슬라보예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고』(한보희 옮김), 알랭 바디우의 『사도바울』(현성환 옮김), 지오르지오 아감벤의 『호모사케르 1』을 내놓는다.



시리즈는 아니지만 자끄 라깡의 『에크리』(이종영 외 옮김), 『세미나 11』(맹정현 옮김)도 준비했다. 그린비는 ‘모리스 블랑쇼 선집’을 역작으로 준비 중이다. 올 하반기 『기다림, 망각』(박준상 옮김), 『우정』(박규현 옮김)을 시작으로 블랑쇼 컬렉션을 만들 계획이다. 도서출판 길은 독일어본으로 마르크스의 『자본론』(강신준 옮김)을 번역해 5권으로 출간한다.

에티엔 발리바르와 함께 프랑스 철학계에서 ‘알튀세르의 후예’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비교적 국내에 소개되지 못했던 자끄 랑시에르의 책들, 『정치의 가장자리에서』(양창렬 옮김), 『불화』(진태원 옮김) 도 도서출판 길이 소개하며, 에릭 홉스봄의 『혁명가들』(김정한 외 옮김), 프레드릭 제임슨의 『미래의 고고학』(이경덕 옮김), 베네딕트 앤더슨의 『새 깃발 아래서』(서지원 옮김)도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창비는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유럽의 보편주의』(김재오 옮김)를 선보일 예정이다. 이매진은 지난 달 출간해 화제를 모았던 스타즈터클 시리즈 『일』을 올해 『희망은 마지막까지 남는다』로 이어간다. 을유문화사의 ‘현대예술의 거장 시리즈’는 『스트라빈스키』(장준호 지음), 『뭉크』(수프리도 지음), 『프랭크 시네트라』(앤써니 써머스 외)를 준비했다.

이제이북스는 정암학당과 그리스 고전을 계속 번역해 출간한다. 플라톤 전집 중 올해 소개될 책들은 『에우티데모스』, 『메넥세노스』, 『고르기아스』 등 6권, 아리스토텔레스 선집은 『자연학』이다. 지난해까지 22종의 현대사상의 모험 시리즈를 내놓은 민음사는 줄리아 크리스테바(『사랑의 역사』 재번역, 김인환 옮김), 레이몬드 윌리엄스(『키워드』, 김성기 옮김), 미셀 푸코(『말과 사물』 재번역, 이규현 옮김), 자끄 데리다(『그라마톨로지』, 김성도 옮김)의 책들로 관심을 기다리고 있다. 이밖에도 동양경전류의 주해서들이 열풍을 이어가고, 『바쿠닌 평전』(하승우 지음, 이매진), 『뿌쉬킨 평전』(손유택, 소명출판), 『여운형 평전2』(역사비평사) 등의 묵직한 평전들도 눈에 띤다. 2008년 ‘주요학술서’는 이제 연구자들의 관심과 논쟁의 몫으로 남았다.(김혜진 기자)

 
08. 0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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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1-02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르주 바타이유의 사진이 모리스 블랑쇼의 것으로 잘못 소개되어 있네요.^^

로쟈 2008-01-02 17:49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교수신문에서 착오를 일으켰네요.^^; 블랑쇼는 워낙에 은둔적이어서 사진이 별로 없을 텐데요...

람혼 2008-01-02 23:29   좋아요 0 | URL
네. 블랑쇼의 사진은 젊은 시절의 것을 제외하고는 아마 파파라치가 찍은 사진밖에 없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블랑쇼를 대상으로 하는 파파라치라니, '인문학적' 파파라치인지도...^^

로쟈 2008-01-03 11:20   좋아요 0 | URL
'블랑쇼'가 잘려나갔네요.^^. '모리스'만 남았습니다...

사량 2008-01-02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박규현 씨... 레비나스의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동문선) 번역을 생각하니 걱정만 앞섭니다.;; 부디 기우이길..ㅜㅜ

로쟈 2008-01-02 23:05   좋아요 0 | URL
역자 풀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아마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을 것 같아요...

Ritournelle 2008-01-02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랑시에르의 책 두 권 이외에 이미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가 출간 예정으로 되어 있어요. 인터넷 교보문고에 출간 예정으로 되어 있어 곧 출간될 것 같습니다.

로쟈 2008-01-02 23:05   좋아요 0 | URL
네, 인간사랑에서 나오더군요. 안 그래도 지난주에 복사한 책이라 번역본이 나오면 곧바로 읽어볼 참입니다...

드팀전 2008-01-04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책들이네요..잡지<철학의 전선>과 이름만 들어 유명한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그리고 재작년에 한번 뵌 적이 있었던 강신준 교수의 <자본>이 기대가 됩니다.강 교수님 그 때 뭔가 작업이 있어서요 라고 했는데..그게 <자본> 재번역이었던 것으로 추측되었습니다.2007년에 나올 지 알았는데 늦어진 건지 ..

로쟈 2008-01-04 18:34   좋아요 0 | URL
저도 기대하는 타이틀이 몇 개 되는데, 사실 이 리스트의 서너 배는 나와줘야 할 텐데요.^^;
 

<그리스 비극>에 대한 서평을 옮겨오기 위해서 교수신문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챙기게 된 기사는 샹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후마니타스, 2007)에 대한 '확대서평'이다(확대서평? 아마도 자세한 서평이란 취지인 듯하다). 필자는 지난달에 '노무현과 탈정치 리더십'(http://blog.aladin.co.kr/mramor/1751979)이란 페이퍼를 올리면서 알게 된 안병진 교수다. 그는 '합의주의적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무페의 이론적 입장을 정리하고 지난 대선 결과와 연관짓고 있다. 초점이 민주주의가 아닌 자유주의에만 너무 맞춰진 게 아닌가 싶지만(게다가 국역본에 대한 서평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여하튼 자료로 스크랩해놓는다.

교수신문(07. 12. 31) 헤이! 리버럴리스트,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서시지

무페의 책 서평 청탁 전화를 받으면서 번역의 적절한 타이밍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1993년에 출간된 이 철학서적은 바로 2007년 한국의 선거 과정 및 더 나아가서는 참여정부 5년 실패의 핵심을 마치 예언하듯이 시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2007년 대통령 선거의 특징에 대해 많은 평론가들이 지적하는 것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ABR’(Anything But Roh)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다수의 유권자들이 노무현 정부를 심판하는 이른바 ‘회고적 투표’ 양태를 보였다는 점에서 이는 그리 틀린 평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이명박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2007년의 노무현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단지 그가 상고출신이거나 자수성가 스타일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그가 여의도 바깥의 아웃사이더로서 한나라당을 접수해, 이후 열린우리당 혹은 386으로 상징되는 ‘여의도 특권층’과 선명한 대립각을 형성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관점이 잘 농축된 ‘욕쟁이 할머니’ 등의 일련의 정치광고들은 2002년 노무현 후보의 ‘눈물’ 광고만큼이나 감동적이었다.

1993년 출간된 책이 2007년을 예언하다
반면 이른바 개혁파의 대표주자인 정동영 후보의 ‘가족 행복 시대’나 ‘개성 동영’은 대립각이 불분명하고 분노를 조직하지 못하는 ‘합의주의적 정치’ 방식의 구현이었다. 그는 이후 뒤늦게 전투적인 리버럴인 문국현 후보의 ‘진짜 경제 대 가짜 경제’ 프레임을 차용했지만 어울리지 않은 옷처럼 어색한 캠페인에 그치고 말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정동영 후보의 이러한 미적지근한 합의주의적 정치는 어떤 측면에서는 그간 5년간 노무현 정부의 부분적 특성을 징후적으로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정부 초기에 필자가 경악했던 것은 대통령의 대화와 타협의 정치에 대한 천진난만한 기대와 발상이었다. 이는 이후 합의주의적 관점이 강한 울리히 벡에 대한 대통령의 열광, 합의주의 기대의 절정으로서 대연정 프로젝트로 나타났다. 반면에 그 강요된 합의주의적 정치의 틈새를 뚫고 홍준표 의원의 부동산 정책 같은 보수적 포퓰리즘이 득세한 바 있다. 

바로 위의 정치지형이 무페가 이 책에서 핵심적으로 고민하는 문제의식이다. 무페는 하버마스적인 합의의 정치를 꿈꾸었던 노 대통령이나 정책에서 정치의 적출 수술을 꿈꾸는 매니페스토 운동을 비웃기나 하듯 정치적인 것에서 적대성은 영원히 제거가 불가능한 존재조건임을 강조한다. 그의 문제의식이 빛나는 것은 놀랍게도 파시즘의 이론가 슈미트의 인생에 대한 비관적 통찰을 회피하지 않고 수용하면서도 이를 역으로 자유주의 정치의 활력소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점 때문이다. 그에게 정치의 진정한 역할은 이런 적대적 힘들 간의 헤게모니 투쟁을 자유주의 정치의 틀 자체를 붕괴시키지 않는 활력 있는 ‘경합적 민주주의’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급진 민주주의자인 그의 자유주의 틀에 대한  존중이 많은 이들을 혼돈스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자유주의가 때로는 모욕적으로까지 들릴 수도 있는 한국의 기이한 맥락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예를 들어 필자는 한 학술회의에서 참여정부를 자유주의적이라고 지적했다가 한 정부인사가 보수적 집단으로 매도라도 당한 듯이 정색을 하고 항의를 해서 당황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급진적 민주주의자인 무페조차 스스로 자유주의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다만 자유주의의 경계를 부단히 넓히는 혁신의 관점에서 자유주의를 수용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더 급진적인 스펙트럼의 지젝 같은 학자는 무페의 시도가 자유주의의 헤게모니에 결국 포섭된다는 의구심을 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주의의 스펙트럼 넓히기 시도는 자유주의에 대한 제한된 상상력에 갇혀있는 서구나 한국의 자유주의나 좌파 정치진영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페가 하버마스나 롤즈 등의 합의주의적 정치관에 의구심을 표시하는 것은 그가 대화와 타협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그는 집단적 정체성간의 투쟁과, 사실은 냉정한 배제에 기초한 ‘구성된 합의’를 마치 ‘포괄적인 합리적 합의’로 포장하려는 관점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합리주의적 탈정치관의 지배는 의도하지 않는 부작용을 양산한다는 점이 무페의 중요한 통찰이다. 왜냐하면 이들 탈정치적 관점은 적대적 힘들을 건강한 방식으로 표출시킬 통로를 제시하기보다는 합의주의적 외관 하에 회피하고 억눌러 결과적으로는 의도와 정반대로 다양한 근본주의적 정체성의 정치를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무페는 현재 서구에서 예외라기보다는 흔한 현상으로 등장하고 있는 우익 포퓰리즘이나 파시즘의 만연을 그 대표적 징후로 들고 있다.



합의주의적 자유주의에 비판적
우익 포퓰리즘이나 파시즘은 지젝의 표현처럼 단조롭고 무기력한 합의주의적 자유주의 정치가 결코 제공할 수 없는 ‘향락’(jouissance)을 시민들에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비록 뒤틀린 형태이지만 어쨌든 정치의 본래적 힘을 잘 이해하는 담론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무페는 이 책에서 자유주의 이론들이 대중적 욕망에 근거한 파시즘의 현상을 단지 병리적인 예외로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을 정치의 본질에 대한 몰이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무페의 이론은 개인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자유주의 이론에 대해서만 의미 있는 비판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와 한국에서 그 대안으로서 인기를 끌기 시작하는 공동체주의 이론에 대해서도 의미를 제공한다. 즉 미국의 에치오니의 공동체주의 운동이나 한국의 공동체 자유주의 운동은 모두의 합의를 선험적으로 전제한 특정한 공동선의 관념을 주창한다.

하지만 무페가 보기에 이는 경합적 민주주의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지 못한 탈정치적 관점의 변종들이다. 반대로 그는 선험적 공동선의 존재 대신에 상호 헤게모니의 충돌 속에서 일시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경향에 의해 ‘갈등적 합의’(conflictual consensus)를 이루고, 이는 곧 부단히 도전받아 새로운 갈등적 합의로 이어지는 민주주의적 과정을 중시한다. 다시 말해 그에게 있어 공동선이란 부단히 추구하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하나의 소실점”에 불과하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최근 한국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하는 진보적 공화주의 철학의 공공선 개념과 수렴될 수 있는 지점이다. 호노한 등의 현대적 공화주의 이론은 공동체주의나 전통적인 시민공화주의와 달리 공동선의 선험적 규정이 아닌 민주적 구성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 호노한은 무페의 구성적 외부의 두려움에 대항하는 시민 공동체의 문제의식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상호 의존된 시민 간의 동료관계 같은 보다 포괄적 규정으로 한 발 더 이론적으로 진전하고 있다.

결국 이 책에서 무페의 자유주의에 대한 고민들은 서구나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새로운 이론적, 실천적 혁신을 풍부하게 고민할 수 있는 무기들을 제공해준다. 특히 최근 자유주의 정치진영이 선거에서 참패한 한국의 맥락은 더 큰 적실성을 가진다. 현실 자유주의의 위기가 역설적으로는 자유주의 사상의 이론적, 실천적 혁신의 장기적 계기가 될 수 있다. 더구나 탈정치적인 CEO 정치론의 지배력이 갈수록 커지는 한국의 상황은 새로운 이론적 고민의 과제를 던져준다. 무페의 책은 그 성찰의 여정으로의 좋은 입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안병진/ 경희 사이버대·정치학)

08. 0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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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8-01-02 16:20   좋아요 0 | URL
아래 홍기빈 박사의 칼럼과 더불어 새 해를 맞는 포스트로써 적절해보입니다. 어떤 방향타처럼 말입니다.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계신 로쟈님께도 2008년이 좋은 한 해 되시길 빌어드립니다.

로쟈 2008-01-02 17:50   좋아요 0 | URL
네, 섬나무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krinein 2008-01-03 09:52   좋아요 0 | URL
글 가져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로쟈 2008-01-03 11:22   좋아요 0 | URL
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한동안 뜸했던 영화소식이다. 연말에 개봉된 영화들에 별로 눈길이 가지 않았는데(나는 판타지류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예외적인 영화라면 리들리 스콧의 신작 <아메리칸 갱스터>가 있다. 안 건드린 장르가 없는 감독이지만 '갱스터 무비'는 그가 처음 손대는 것이며 그만의 독특한 갱스터의 얼굴을 그려냈다는 평을 읽은 바 있다. <아메리칸 갱스터>를 계기로 대표적인 갱스터 영화들을 짚어보는 기사를 옮겨놓는다. 드라마 <소프라노스>에 대해서는 평으로만 접했는데, 이것도 '미드'로 수입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 

한겨레(07. 12. 31) 갱스터, 바로 당신의 두 얼굴

제목부터 과감한 <아메리칸 갱스터>는 지극히 미국적인 갱의 초상을 그려낸다. 흑인 갱단 보스 프랭크 루카스는 모든 것을 ‘비즈니스 마인드’로 생각하는 갱이다. 단지 이익을 내기 위해 폭력을 쓰는 것이 아니라, 구조의 혁신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새로운 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이야말로 가히 ‘미국의 갱스터’라고 부를 만하다. 혹은 아무것도 없었던 사막에, 몽상가의 꿈을 현실의 라스베이거스로 만들어낸 벅시 같은 갱은 어떨까? 그것이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성공의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진다는 점에서, 갱단의 세계야말로 가장 비열하면서도 공정한 게임의 법칙이 관철되는 곳일 것이다. 프랜시스 코폴라의 <대부>나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등의 걸작 갱스터 영화들이 갱단의 흥망성쇠를 통해 미국 사회의 내적 변화를 탁월하게 그려낸 이유도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갱스터의 캐릭터는 우리와는 다른 악인이면서, 폭력적인 인간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인 동시에 우리 자신의 얼굴이기도 했다. 하나의 장르로 완벽하게 정착한 갱스터 영화는 현실을 예리하게 담아내는 거울로서 훌륭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갱스터 영화의 고전이 된 <대부>(1972)의 마이클 콜레오네는 삼형제의 막내였기에, 자신이 보스가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하지만 큰형이 죽고, 아버지가 위기에 처하자 마이클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히고 ‘대부’가 된다. 극한 상황에 몰리기 전까지, 마이클은 그저 선량한 중산층이었다. 누구나 마이클이 착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이클이 조직의 보스가 된 뒤에는, 모든 것이 바뀐다. ‘패밀리’를 지키기 위해서 마이클은 냉혈한이 된다. 그것이 마치 그의 본성이었던 것처럼, 마이클은 완벽하게 탈바꿈을 한다.

<대부>의 마이클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타락이다. 마이클은 가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모든 거짓과 폭력 그리고 음모를 이용한다. 거기에는 한 치의 후회나 망설임도 없다. 그에게는 가족이라는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가족을 구원하는 대부가 되기 위해서, 마이클은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되어야만 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그것은 바로 성공을 위해 인간성을 방기하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반면 <좋은 친구들>(1990)의 헨리 힐은 마피아 동네에서 심부름을 하며 자라 자연스럽게 갱단 일원이 된다. 헨리에게 가장 성공적인 미래는 마피아 간부가 되는 것이었다. 트럭 화물을 훔치고, 마약 거래를 하는 등 악행을 일삼던 헨리는 마침내 마피아 일원이 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탈리아인이 아니라 아일랜드계였던 헨리가 간부가 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헨리는 그저 동네 양아치일 뿐이다. 남의 물건과 돈을 훔쳐 흥청망청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향락을 즐기는 보통의 인간이었다.

애초에 위대한 갱스터가 되기에는, 헨리의 그릇이 너무 작았다. 에프비아이에게 잡힌 헨리는, 조직의 비밀을 증언하는 대신 증인보호 프로그램에 들어간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낯선 동네에서, 이제 헨리는 그냥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멋진 인생’을 꿈꾸었지만, 헨리에게 주어진 인생은 결국 그 정도였던 것이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 누구나 화려한 스타를 꿈꾸지만, 대부분의 종착점은 소박한 시골역인 것이다.

가장 현실적인 갱은, 영화가 아니라 미국 드라마 <소프라노스>(1999~2007)에서 찾을 수 있다. 토니 소프라노는 뉴저지 북부를 관장하는 조그만 조직의 보스다. 그의 고민은 가정과 조직, 즉 두 개의 패밀리다. ‘급격한 클라이맥스나 사건 없이, 보편적인 삶의 리듬과 맞아 떨어진다’는 분석처럼, <소프라노스>는 우리의 일상과 다르지 않은 마피아의 일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가족과 함께 외식도 해야 하고, 아이들의 진로 문제도 고민해야 하고, 한편으론 애인도 돌봐야 한다. 합법적인 사업에 끼어들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서, 여전히 도둑질이나 도박 사업에도 손을 댄다.

일과 가족 때문에 고민을 하는 여느 가장과 마찬가지로 토니 소프라노 역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결국은 발작을 일으키고 정신 상담까지 받는 소프라노는 그저 친근한 우리의 이웃일 뿐이다. 때로 다정하고, 때로 폭력적이고, 때로 우스꽝스러운. 그들에게는 단지 우리와 같은 일상에 ‘범죄’라는 사업이 하나 더 끼어들어 있는 것뿐이다. 냉정하게 사람을 죽이거나 태연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그게 사업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비즈니스의 영역에서는 냉혹하고 잔인해지는 것처럼.

<아메리칸 갱스터>의 프랭크 루카스 역시 가족을 위해서, 성공적인 사업을 한 것이다. 원산지에서 직접 마약을 입수해 시중에서 파는 것보다 순도는 두 배 높고 가격은 절반인 제품을 팔아 시장을 장악한다. 그것만 본다면 프랭크는 탁월한 사업가다. 미국에서 가장 칭송받는, 혁신적인 사업가인 것이다. 그리고 토니 소프라노의 고민이 두 개의 패밀리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이었던 것처럼, 프랭크의 고민은 어떻게 시장을 장악하여 ‘가족’을 부유하게 만들 것인가, 였다. 프랭크야말로 전형적인 미국인이었다. 갱스터나 보통 사람들이나 목적은 하나다. 단지 그 방법이 조금 다를 뿐, 성공을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하는 태도는 하나인 것이다. 갱스터 영화를 볼 때, 폭력과 범죄의 향연 속에서 결국 우리는, 우리의 얼굴과 만나게 된다.(김봉석/대중문화평론가)

08. 01. 02.

P.S. 역시나 '가족'과 '사업'을 다룬 '코리안 갱스터'로 <우아한 세계>를 떠올려볼 수 있겠다.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만 없었다면 더 좋은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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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1-02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묵직하고 심각한 갱스터 영화관련 페이퍼를 보면서 저는 에널라이즈 댓과 디스라는 꽤 코믹스럽게 만든 갱스터 영화 생각하면서 혼자 킥킥거리고 있습니다.^^

로쟈 2008-01-02 14:31   좋아요 0 | URL
'가족'만 아니면 얼마든지 코믹해질 수 있는 장르죠.^^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도입한 가장 유명한 개념은 아마도 '아우라(Aura)'가 아닌가 싶다. 이 개념은 2절에서 예술작품이 갖는 원작으로서의 '진품성'과 관련하여 처음 제시되는데, 벤야민에 따르면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이다." 그러니까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란 논제 자체가 이 아우라와 상관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니 아우라는 이 논문에서 핵심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우라란 개념이 보다 상세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3절에 가서인데, 여기서는 그 한 문단을 읽어보려고 한다(이 문제적 텍스트를 완독하는 일은 얼마나 많은 견적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 그건 이 대목이 오래 전에 이 텍스트를 읽으면서 궁금해하던 구절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이 참에 그에 대한 이해를 좀더 분명하게 해두고 싶어서이다. 읽을 부분은 최성만 역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의 108-110쪽이며 반성완 역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에서는 203-4쪽이다. 거기에 덧붙여 강유원 등이 옮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http://www.armarius.net/ 에서 참조할 수 있다)도 필요에 따라 인용할 것이다(서너 종의 국역본이 더 나와 있으나 모두를 참조하거나 인용하는 건 번거롭기에 이 세 종에 국한하기로 한다). 내가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은 두번째 문단이다.

"(...) 이러한 아우라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연적 대상의 아우라 개념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자연적 대상의 아우라를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의 일회적인 현상이라고 정의 내릴 수가 있다.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 상태에 있는 자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따라갈 때 - 이것은 우리가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를 숨 쉰다는 뜻이다."(최성만, 108-9쪽)

여기서 벤야민은 아우라를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의 일회적인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반성완 역에서는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어떤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 강유원 역에서는 "먼 것 - 그것이 아무리 가까이 가까이 있다 해도 - 의 일회적 현상"으로 옮겨졌다. 내겐 반성완 역의 정의가 더 친숙하지만 정의 자체는 대동소이하다. 영역본에서는 "the unique apparition of a distance, however near it may be'로 옮겨졌고, 독어 원문은 "Einmalige Erscheinung einer Ferne, so nah sie sein mag"이다. 우리말 '현상(나타남)'에 상응하는 영역본의 단어로 'apparition'이 쓰인 게 눈에 띄는데, '환영'이나 '(뜻밖의) 출현'을 뜻하는 단어다.

원래 '아우라'는 그리스어로 '공기(air)'나 '숨결(breath)'을 뜻한다고 하고 반성완은 이에 따라 처음에 원어를 병기한 이후에는 '분위기'라고 옮겼지만 '아우라'란 원어 자체가 이미 상용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아우라'로 고쳐서 인용하겠다. 내가 궁금해 하던 것은 이어서 벤야민이 들고 있는 아우라의 예이다(처음 읽을 때부터 좀 뜻밖의 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우라'에 대해서 나는 좀더 드라마틱한 예를 기대했던 것일까?).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 상태에 있는 자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따라갈 때 - 이것은 우리가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를 숨 쉰다는 뜻이다."(최성만)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의 상태에 있는 자에게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이 순간 이 산, 이 나뭇가지가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가 숨을 쉬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반성완)

"어느 여름날 오후에 휴식을 취하면서 지평선 너머의 산의 능선 또는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 위로 그늘을 드리우는 어느 나뭇가지를 바라보는 것 — 이것은 이 산의 아우라, 이 나뭇가지의 아우라를 호흡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강유원)

비교해서 읽어보면 세 번역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데, 먼저 반성완본은 직역이라기보다는 역자가 적극적으로 의역하면서 윤색한 경우이다. 일단 이 대목만 한정하면 가장 정확한 번역은 강유원본이다. 그것은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먼저, 최성만본과 반성완본에서는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것이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 모두로 돼 있지만 일단 액면으로 잘 이해되지 않는다(문법적으로는 둘 다 가능한가?). 여름날 오후면 그림자도 길지 않을 때인데 먼 지평선의 산맥의 그림자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자에까지 그늘을 드리울 수 있는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영어본과 러시아본 모두 강유원본과 마찬가지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것은 나뭇가지로만 돼 있다.

그리고 최성만본에서는 '따라갈 때'라고만 돼 있는데, 의미상 모호한, 불충분한 번역이다. 똑같이 독어본을 번역한 반성완본과 강유원본이 보여주듯이 그런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바라보는 것'이라고 해야 의미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영어본과 러시아어본 모두 '시선'이 번역에 포함돼 있다(영역으로는 "To follow with the eye"로 돼 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강유원본에서처럼 '바라보는 것=숨쉬는 것"이 등가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영어본과 러시아어본 모두 그렇게 돼 있다). '따라갈 때'나 '바라볼 때'란 표현보다 직접적인 것이다.

벤야민은 "이러한 묘사의 예를 통하여 우리는 오늘날의 아우라의 붕괴를 초래하는 사회적 조건이 무엇인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라고 하여 화제를 다시 대중과 기술복제 문제로 전환하는데, 사실 나는 '이러한 묘사의 예'에서 무엇이 쉽게 이해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보다 정확하게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나로선 벤야민이 들고 있는 예가 어떤 경험적 '직접성'과 관련되는 것으로만 이해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벤야민은 아우라의 붕괴를 초래하는 사회적 조건으로 두 가지를 들면서 이 두 가지가 모두 "오늘날의 삶에서 날로 커가는 대중의 중요성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가 강조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즉 사물을 공간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자신에게 보다 더 '가까이 끌어 오려고' 하는 것은 오늘날 대중이 지닌 열렬한 관심사이며 모든 주어진 것의 일회성을 그것의 복제를 수용함으로써 극복하려고 하는 경향이 바로 그 관심을 나타낸다."(최성만)

"즉 사물을 공간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보다 자신에게 가까이 끌어 오고자 하는 것은 현대의 대중이 바라 마지 않는 열렬한 욕구이다. 또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의 대중은 복제를 통하여 모든 사물의 일회적 성격을 극복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반성완)

"즉 사물을 공간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더 가까이 가져오는 것'이 현대 대중의 충분히 열정적인 갈망이고, 또한 그것의 복제의 수용을 통해 모든 소재의 일회성을 극복하려는 경향이 현대 대중의 갈망이다."(강유원)

이 대목의 번역은 세 종 모두 대동소이하다. 다만 문체상으로 최성만본과 강유원본이 보다 직역에 가깝고 반성완본이 우리말로는 가장 자연스럽다. 이어서 그러한 대중의 성향/갈망을 부연 설명해주는 대목에서는 다시금 번역본들간의 차이가 나타난다.

"대중이 바로 자기 옆에 가까이 있는 대상을 상(像) 속에, 아니 모사(模寫) 속에, 복제를 통하여 전유하고자 하는 욕구는 나날이 제어할 수 없이 증가하고 있다. 화보가 들어 있는 신문이나 주간 뉴스영화가 제공해주는 복제영상들은 상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상에서는 일회성과 지속성이 밀접하게 서로 엉켜 있는 데 반해, 복제물에서는 일시성과 반복성이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최성만)

"대중은 바로 자기 옆에 가까이 있는 대상들을 그림을 통하여, 아니 모사와 복제를 통하여 소유하고자 하는 간절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은 날로 켜져 가고 있다. 화보가 들어 있는 신문이나 주간뉴스 영화가 제공해 주고 있는 복제사진들은 그림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그림에서는 일회성과 지속성이 밀접하게 서로 엉켜 있는 데 반하여 복제사진에서는 일시성과 반복성이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반성완)

"대상을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림으로, 오히려 모사로, 복제로 소유하려는 욕구는 날마다 거부하기 어렵게 일어난다. 그리고 화보가 [많이] 실린 신문과 주간 뉴스[영화]가 마련해주는 복제는 분명 그림과는 다르다. 일시성과 반복성이 전자[복제]에 아주 긴밀하게 얽혀있듯이 후자[그림]에는 일회성과 지속이 아주 긴밀하게 얽혀 있다."(강유원)

가장 큰 차이는 '자기 옆에 가까이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최성만/반성완본에서는 "바로 자기 옆에 가까이 있는 대상"을 모사나 복제를 통해 전유/소유하려는 것이 대중의 욕구/욕망이라고 옮기고 있는 반면에 강유원본은 대상을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림" 등으로 소유하려는 것이 대중의 욕구라고 옮겼다. 어느 쪽이 맞는 번역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후자 아닌가. 그림/모사/복제를 통해서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 '가까이에 있는 대상"뿐일 리는 없는 것이니까(바로 곁에 있다면 왜 아이돌 스타들의 브로마이드를 굳이 벽에다 붙여놓겠는가?!). 이 점은 영어본이나 러시아본을 대조해봐도 확인할 수 있다(비록 텍스트의 제2판까지 수록해놓고 있어서 유익하긴 하지만 가장 최근의 번역에서 이런 오류들이 나오는 것은 유감스럽다).  

그리고 또 다른 차이는 독어의 'Bild'를 어떻게 옮기느냐인데, 최성만본은 '상(像)'이라고 옮겼고, 반성완/강유원본은 '그림'이라고 옮겼다(참고로, 영역본은 'image'라고 옮기고 'Bild'를 병기했다). 'Bild'는 물론 사전적으로 '형상'이란 뜻을 갖기 때문에 '상'이라고 옮기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의 우리말 쓰임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적합한 번역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상'은 독자적으로 사용되는 일이 아주 드물다). 여기서는 대중들의 소유 대상이기도 하므로('전유'라는 어려운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비록 'Bild'가 '그림'보다 광의의 뜻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그냥 그런 정도로 옮겨지지 않을까 싶다. 나머지는 대동소이하다. 이 절의 결론은 이렇게 된다.

"대상을 그것을 감싸고 있는 껍질에서 떼어내는 일, 다시 말해 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오늘날의 지각이 갖는 특징이다. 이 지각은 '세상에 있는 동질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너무나 커진 나머지 복제를 통해 일회적인 것에서도 동질적인 것을 찾아낼 정도이다. 이론의 영역에서 통계가 나날이 그 중요성을 더해가는 현상이 직관(Anschauung, 표상)의 영역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현실이 대중에 맞추고(정향하고) 대중이 현실에 맞추는 현상은 사고의 면에서는 물론이고 직관의 면에서도 무한한 중요성을 지니게 될 하나의 발전과정이다."(최성만, 109-10쪽)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 후반부는 반성완본과 일치한다. 둘다 'ein Vorgang'(영어로는 'process')을 '발전과정'이라고 옮긴 점이 특이한데 내가 참고한 다른 모든 번역본들에서는 그냥 '과정' 정도로만 번역하고 있다. 이 문단에 대한 검토는 몇 해 전에 자세하게 다룬 바 있으므로 참조하시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지각과 직관의 문제'(http://blog.aladin.co.kr/mramor/706805)라고 좀 거창한 타이틀이 붙어 있는 페이퍼이다...

08. 0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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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 2008-01-02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아이돌스타는 소피 마르소이군요 ^^ 그나저나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아우라에 대해...." 이 문구로 시작하는 직접적인 3줄 남짓한 대목을 적어둔 노트가 보이지 않네요. ㅠㅠ 지금 찾아 보니 '산책자', 나 '인식론에 관해, 진보 이론' 중에 있는 줄 알았는데 보이지도 않고, 그 장들이 아닌가??ㅠㅠ 잘 읽고 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로쟈 2008-01-02 23:04   좋아요 0 | URL
브로마이드 스타의 원조이기도 하죠.^^ 덧붙이자면, 영화 <구름 저편에>에는 세잔의 생트-빅투아르산 그림에 대한 오마주 장면도 들어가 있습니다. 재현의 (불)가능성 문제를 생각해보게 하는. 해서 겸사겸사 엮어넣었습니다...

어부 2008-01-03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첫번째 인용문에 대한 질문인데요. '숨을 쉰다'의 주체가 번역문마다 조금씩 다른것 같습니다. 반성완본에선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가 숨을 쉬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된다는 의미인데 최성만본에선 우리가 숨을 쉬고 있는 것으로 바뀌어 있는데요. 제가 알기론 아우라가 대상과의 관계를 통한 주체의 체험적 의미가 핵심이기 때문에 이부분에 있어 반성완본은 부적절한 번역인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강유원본은 숨을 쉰다는 술어에 대한 주어가 생략되어서 오문까지는 아니지만 문장 자체가 모호하게 읽히구요. 아우라에 대한 첫번째 사례의 핵심적 분위기를 옮기는데는 최성만본이 오히려 더 정확히 보이기도 하는데 어떤가요?

로쟈 2008-01-03 23:20   좋아요 0 | URL
강유원본이나 영어본, 러시아어본을 보건대, "-바라본다는 것은 아우라를 호흡한다는 것이다, 정도입니다." 모호하진 않구요, 우리가 -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 아우아를 숨쉬는 것이다, 가 제가 이해하는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