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에 교수신문 지면에서 벌어진 촘스키 논쟁을 옮겨놓는다. 소쉬르 전공자인 김성도 교수의 촘스키 비판에 대해서 촘스키 전공자인 장영준 교수가 반박하면서 논쟁이 오고갔다. 개인적으론 논쟁의 내용보다는 스타일에 관심이 있어서 읽어보게 된 글들이다. 자료 삼아 모아놓는다.   

교수신문(06. 06. 05) 학문비평 : 촘스키 혁명의 진정성을 묻는다

언어학 및 인지 과학 분야에서 촘스키 혁명의 실체에 대한 비판의 매스를 가하는 작업은 아직도 시기상조인 것으로 보인다. 촘스키라는 지성의 아우라가 여전히 심오하고 그가 쌓아올린 상징권력의 보루가 요새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언어 이론을 한 때의 유행이나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치부하는 사람들은 촘스키의 언어학 혁명이란 것이 도대체 존재한 적이 있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72년 ‘촘스키 혁명’을 외쳤던 언어철학자 존 썰(J. Searl)은 2002년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서평 논문에서 촘스키 혁명의 애초의 목적은 변질되고 포기되었다는 점에서 실패한 혁명이라는 진단을 내린바 있다.

지난 30여년 동안 지식 사회학자(Murray), 언어학사가(Koerner), 과학 철학자(Itkonen), 언어 철학자(Katz), 이론 언어학자(Botha) 등 촘스키 언어학 혁명의 역사적, 인식론적 토대에 대한 다양한 시각의 비판적 연구가 전개되었으나, 문제는 정작 이같은 비판에 귀를 기울이고 생산적 대화를 촉진시켜야 할 촘스키와 그의 추종자들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였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지식 사회학의 관점에서 촘스키 패러다임의 성공 요인은 그의 언어학 이론의 내재적 설명력과 과학적 우월성에 기인하기보다는 당시 언어학의 급속한 제도적 팽창, 재정지원, 생성 언어학 학술지의 창간 및 편집권 독점 등 외적 요인도 큰 몫을 차지하였음을 실증적으로 밝혀내었고, 과학 철학의 시각에서는 촘스키가 주장한 언어학의 자연과학적 경험성이 근거가 없다는 점을 꾸준히 제기해왔다.



촘스키 언어학은 ‘셀프 프로모션 마케팅’ 결과?
촘스키는 생성문법이라는 새로운 언어학 패러다임을 제시하면서 인지과학의 혁명을 주도한 장본인이자, 맹렬한 정치 평론가와 사회운동가로서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닌다(그는 마침내 내년도에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내년이면 '작년'이었는데, 한국 방문이 무산된 모양이다). 하지만 촘스키에 대한 이같은 중간적 평가를 기축으로 그의 언어학에서의 업적에 대해서 국한시켜보더라도, 지극히 폄훼적인 입장에서 가장 예찬적인 담론에 이르기까지 촘스키 언어 사상의 평가는 다양한 평가의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비교적 객관적 자료에 기초하여 서술하고 있는 최근의 부정적 평가에 따르면, 언어학 분야에서의 촘스키의 업적은 희소하고 위대한 창조적 정신의 업적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상아탑의 ‘해킹’의 생산물로 치부된다. 즉, 그가 누리는 과도한 평판과 명성은 인간의 이해에 대한 의미심장한 공헌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약간의 셀프 프로모션 마케팅과 기존의 언어 이론에 대한 비방의 남용,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의 학문적 발견물의 침소봉대 또는 날조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라는 독설이 가해진다.

실제로 그가 현대 언어학의 판도를 변화시키면서 촘스키의 혁명이라는 공표가 발설된 지 올해로 정확히 반세기가 흘렀는데, 이 기간 동안 다른 학문 분야에서는 엄청난 진보가 이루어졌다. 과학의 발전으로 우주 탐사를, 컴퓨터의 발명을 통한 정보 혁명을 경험하였다. 흔히, 열성 촘스키주의자들이 비교 대상으로 삼는 아인슈타인은 실제로 그의 물리학 이론을 통해서 수많은 물리적 현상을 설명할 수 있었으며, 실생활의 변화를 초래했다.

반면, 촘스키 언어학에서 성취된 결과물은 그에 비하면 너무나 하찮은 것일 뿐만 아니라, 과학사의 의미에서 진정한 독창적 패러다임이라고 보기도 힘들다는 것이 부정적 평가의 시각이다. 하지만 보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의 이론적 정당성과 과학적 타당성이 입증되기도 전에, 그는 절대 다수의 언어학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론적 토대에 기초하여 생성 언어학이라는 동일한 연구 프로그램을 수행하도록 직간접적으로 자극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지식 사회학적 관점에서 지난 50년 동안 단일 인물이 한 학문 분야의 지적 생산 방식을 독점한 것을 현대 언어학의 큰 손실로 보기도 한다. 실제로 ‘Beyond Chomsky’라는 웹 사이트에서 이런 글을 읽을 수 있다. “우리가 오늘날 언어의 본질과 기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직면한 주요 장벽은 촘스키 패러다임의 지나친 형식주의적, 반경험적, 반역사적 영향이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촘스키 이론의 진화는 정확히 10년을 주기로 새로운 이론들이 창발되는 행태를 보여주었다. 10년마다 종합된 새로운 연구 프로그램을 발표하고 거의 종교적 신앙을 연상시킬 정도의 맹목성에 기대어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와 추진력으로 세계 언어학계에 자신의 이론을 유포 확산시켜왔다. 하지만 이 과정은 거의 예외 없이 극도의 복잡화와 추상화를 보여주고, 이어서 모순이 동반되고, 작은 과학적 ‘아노말리’와 파란들을 일으키면서 다시 해명에 나서고 침체기로 접어드는 패턴을 반복하였다.

특히, 언어를 포함하는 인간의 행동 양식과 정신 활동의 모든 양상들에 대해서 그가 시종일관 적용하는 생물학적 결정주의는 언어와 관련된 일체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차원들을 주변화하거나 아예 소거한다는 점에서 언어학을 포함하는 인문과학에 부적절한 토대이다. 인간 언어가 내재적, 심리적 차원과 더불어 외재적이며 문화적 양상들을 엄연히 갖고 있다는 보편적 사실과 어긋나서, 촘스키 전통의 현대 언어학은 주로 내재적 차원(I-language)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생물학적 언어학의 시각에 따르면, 생성 문법은 ‘언어 기관’의 추상적 기술로서 간주되고, 인간 정신과 두뇌는 일정 수준에서 동일할 수밖에 없으며, 이 같은 이유에서 촘스키와 그의 추종자들의 공식에서는 정신/두뇌와 같은 표기법이 사용된다.

“생물학적 결정론을 향해 돌진”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는 특정 문법 현상의 보편성을 찾아내어, 인간의 두뇌가 특정한 문법적 구조를 선호한다는 증거로 삼는다. 그것이 바로 그의 유명한 가설, 보편 문법은 생득적이라는 것과 인간들은 문법에 대해서 생물학적으로 ‘하드와이어’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언어 능력의 생물학적 토대를 대중들에게 유포시킨 사람은 그의 추종자이며 베스트셀러 심리학자인 핑커이다(주저 ‘언어 본능’에서 보편 언어의 생물학적 토대를 강조하기 위해서 워프와 사피어의 언어 상대성 가설을 무력화시키는 논증 과정을 살펴보면서, 진정 이들 언어학자들의 문화 수준과 지적 양심에 강한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생물언어학적 시각에서 궁극적으로 I-언어의 연구는, 최소한 원칙적으로 자연과학과 더불어 통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자연주의적 환원주의는 물리적 현실에 대한 이론들과, 우리의 정신적 능력들에 대한 이론들을 통일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물리과학과 인지과학의 완전한 통일은 여전히 금시초문이며 언어와 인지에 대한 일방적 자연주의는 도그마적 일원주의의 형식이며 증명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입장일 뿐이다. 그래서 과학 철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촘스키 언어학이 물리학과 생물학과 같은 진짜 과학이었다면 과학적 성과의 미비로 이미 수 십 년 전에 재정적 지원을 상실하였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미 실패한 이론, 대중에게 팔아먹어
중반기까지 촘스키 언어 이론의 추종자였던 레빈과 포스탈은 2004년 발표한 ‘타락한 언어학’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의 글에서 촘스키의 부풀려진 기대와 희망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그들에 따르면 촘스키의 업적 위에 쌓아올려진 저속한 찬양은 빈번하게 그의 초기 활동에서 이루어진 주장과 약속에 대한 비언어학자들의 무비판적 수용에 의해서 추동된 것이라는 것이다. 촘스키의 대부분의 주장들은 그릇되거나,  과학적 검증이 될 수 없거나, 아니면 그의 기대와 약속들은 전혀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 불과하다고 몰아붙였다. 이들 언어학자들이 제시하는 구체적인 예들과 에피소드들을 명시할 수 없지만, 학문적 진리 탐구 규준에 대한 무시, 자기 선전, 비판자들에 대한 무지막지한 언어 남용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촘스키의 비양심적 속임수 가운데서 최악의 것은 이미 실패한 이론을 마치 천재적인 발견인 것처럼 판별 능력이 없는 비언어학 청중들에게 열심히 팔아 넘겼다는 것이다. 또한 최근의 촘스키 계열의 언어학은 물리학의 용어를 빌려와 동사와 형용사의 행동 양식을 설명하기 위한 시도 속에서, ‘가벼운’, ‘무거운’ 문장 또는 ‘약한’, ‘강한’ 유인력 따위의 술어들을 사용하여 언어학의 과학성을 과시하려 한다. 이같은 제스처는 촘스키가 노출하는 또 다른 위선이다.

결국 필자가 이 짧은 글을 통해서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물음이다. 학문적으로 윤리적으로 결정적 문제점을 노출한 이력의 소유자이면서도 너무나 과도한 지적 영향력을 행사해 온 인물에 대해서 그에 상응하는 정당한 비판을 회피해왔다는 점에서 이제 한국 학계에서도 맹목적 찬양이 아닌 균형 잡힌 평가를 준비할 계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촘스키 혁명이라는 신화가 기정사실로 고착화되기 전에 말이다.(김성도 고려대교수)

교수신문(06. 07. 02) "촘스키의 보편문법, 생물학적 증거 있다”

촘스키 혁명에 대한 김성도 교수의 비판(교수신문 제401호)에 대해 장영준 중앙대 교수가 반론을 제기했다. 김성도 교수는 촘스키 언어학이 과학사의 차원에서 독창적 패러다임이 아닌데다가, 촘스키의 생물학적 결정주의는 일체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차원들을 주변화하거나 소거해 인문과학에 부적절한 토대이고, 자연주의적 환원주의는 도그마적 일원주의의 형식이며 증명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입장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이러한 주장과 함께 촘스키에 대한 맹목적 찬양에서 벗어나 균형잡힌 평가를 제안하고 있다. 이에 장영준 중앙대 교수의 글과 그에 대한 김성도 교수의 답변을 함께 싣는다.(편집자주)

어떤 강연회에서 촘스키는 자신을 “생존하는 가장 중요한 지식인”이라고 소개하는 사회자의 말에 대해 매스미디어를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촘스키는 자신에 대해 이러한 평가를 내린 뉴욕타임즈가 바로 같은 글에서 “그가 근거 없는 주장들을 일삼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어떤 부분을 인용하는가에 따라 한 인간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타당성 있는 지적으로 성찰 계기돼
촘스키 혁명의 진정성을 묻는 김성도 교수의 글은 타당한 측면이 있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성찰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참으로 반가운 글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글을 대하면서 떠오르는 첫 생각은 모든 언론의 본질적 위험에 대한 촘스키의 지적이 역시 일리있다는 것이다. 제목으로 뽑은 “침소봉대와 날조”, “비언어학자의 무비판적 수용”만 보면, 촘스키는 “학문적으로, 윤리적으로 결정적 문제점을 노출한 이력의 소유자”임이 틀림없다. 짧은 글이기 때문에 그러한 판단의 근거들을 김 교수가 낱낱이, 충분히 밝힐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날조”가 있었다면 이미 윤리적 차원을 떠나 실정법적 문제까지 초래되었을 것임은 명백하다. 매우 격렬한 단어들이 ‘남용’되었다는 소회와 더불어, 김 교수의 비판이 떠올리는 몇 가지 문제들을 생각해보자.

첫째, 촘스키 언어학은 ‘셀프 프로모션 마케팅’의 결과인가. 김 교수는 촘스키 패러다임의 성공 요인이 “그의 언어학 이론의 내재적 설명력과 과학적 우월성에 기인하기보다는 당시 언어학의 급속한 제도적 팽창, 재정지원, 생성 언어학 학술지의 창간 및 편집권 독점 등 외적 요인도 큰 몫을 차지”하였다는 평가를 인용한다. 촘스키 언어학의 전 세계적 파급과 영향력을 외적 요인의 결과로 보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이론의 우월성과 생명력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의 언어학이 전 세계적으로 팽창하고, 재정지원을 받고, 학술지들이 대거 창간될 수 있었겠는가. 김 교수는 또 “언어학 분야에서의 촘스키의 업적은 희소하고 위대한 창조적 정신의 업적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상아탑의 ‘해킹’의 생산물로 … (중략) … 기존의 언어 이론에 대한 비방의 남용,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의 학문적 발견물의 침소봉대 또는 날조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라는 독설을 인용한다.

이것은 한 마디로 독설이자 한 자연인에 대한 ‘독살’이다. 이러한 독설은 전적으로 촘스키 언어학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판관의 실수로 보여진다. 잘 알려졌다시피, 촘스키는 기존의 언어이론 자체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그런 점에서는 그는 매우 독선적이고 오만하다). 때문에 기존의 언어이론에 대한 ‘비방의 남용’이란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연구가 데카르트, 훔볼트, 예스페르센, 전통문법 등의 연구성과들에 그 모태를 두고 젖줄을 대고 있음을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현대 언어학의 판도를 바꾼 지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그는 수많은 당대의 반대자들로부터 제기되는 비판을 수용하면서 이론을 보강해왔다. 비판자들과 생산적 대화를 게을리 했다는 김 교수의 말은 일면 수긍할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사실이 아니다.

둘째, 김 교수는 촘스키 언어학이 꽃피어온 지난 반세기 동안 다른 학문 분야에서는 엄청난 진보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가령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물리학 이론을 통해서 수많은 물리적 현상을 설명했을 뿐 아니라 실생활의 변화를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맞는 말이다. 실용인문학을 추구하는 김 교수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평가에 동의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실생활의 변화’를 초래하는 학문이 훌륭한 학문이라는 의미는 물론 아닐 것이다. 언어학과 같은 연성과학(soft science)과 물리학 등의 경성과학(hard science)의 유용성을 비교하는 것은 아무래도 촘스키 언어학 자체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사하로프의 물리학 이론이 수소폭탄으로 이어지며 엄청난 실생활의 변화를 초래했을 때 우리가 그를 훌륭한 학자로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셋째, 촘스키 언어학의 이론 내적인 문제에 대한 김 교수의 지적을 보자. 그는 촘스키의 이론이 “거의 예외 없이 극도의 복잡화와 추상화를 보여주고, 이어서 모순이 동반되고, 작은 과학적 ‘아노말리’와 파란들을 일으키면서 다시 해명에 나서고 침체기로 접어드는 패턴을 반복하였다”고 말한다. 역시 맞는 말이다. 그러나 복잡화와 추상화가 이론의 약점인가? 옳은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옳은 것은 옳은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물리법칙들은 그쪽 분야 사람들에게 너무나 명료하고 간단할지 모르지만 범인들에게는 너무나 복잡하고 추상적일 것이다. 문제는 촘스키의 이론이 옳은 것인가 아닌가에 있지 복잡하냐, 추상적이냐에 있지 않다. 이 점은 김 교수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복잡화와 추상화가 이론의 약점인가?
넷째, 김 교수는 촘스키 언어학이 시종일관 생물학적 결정주의에 빠져 “언어와 관련된 일체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차원들을 주변화하거나 아예 소거한다”고 지적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 뿐 아니라 촘스키 자신도 동의하는 것이다. 이에 관해 촘스키는 언어를 내재언어와 외재언어로 구분하여, 자신의 연구가 내재언어를 대상으로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리하여 촘스키에게 있어서 내재언어의 연구는 한 개인에 국한되는 ‘언어기관’의 연구이고 정신/두뇌의 연구이다. 언어학이 인지과학이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언어자료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전통적, 고전적 의미에서의 언어학자들로 하여금 생성문법이 더 이상 언어학이기를 포기했다고 비판하게 만드는 지점도 바로 여기이다. 언어학이 생물학으로 환원 내지 포섭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코퍼스 언어학이 주목을 끌게 된 것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도 보인다.

다섯째, 김 교수는 촘스키 언어학이 “생물학적 결정론을 향해 돌진”했다고 지적한다. 같은 맥락에서 생물언어학(bio-linguistics)이란 용어가 회자된 지도 꽤 오래 되었다. 보편문법은 생득적이라는 주장, 인간의 문법은 생물학적으로 ‘하드와이어’되어 있다는 주장은 촘스키 언어학의 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주장의 검증을 위해 많은 심리학자, 생물학자, 언어습득학자들이 노력을 기울여온 결과, 일부는 근거를 얻은 것으로 보이고 일부는 실패한 가설로 폐기되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촘스키의 언어학은 기존의 어떠한 이론보다도 강력한 학문적 역동성(dynamism)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각론에 대한 정밀한 검증 필요
마지막으로 촘스키가 “이미 실패한 이론을 대중에게 팔아먹었다”는 김 교수의 비판을 살펴보자. 서두에 언급된 존 썰(Searle)의 비판을 촘스키 혹은 그의 ‘추종자’들이 개의치 않는, 혹은 무시하는 듯한, 이유는 자명하다. 도대체 촘스키의 어떤 이론이 실패했다는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 교수에 의하면 포스탈(Postal)은 2004년 발표한 ‘타락한 언어학’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의 글에서 촘스키의 부풀려진 기대와 희망을 맹렬하게 비판했다고 하지만, 막상 그는 여전히 생성문법의 틀 안에서 논문들을 발표하고 있다(포스탈은 1995년 이후의 촘스키 이론 모델에 대해 반대한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모르긴 몰라도 결국 그 분야의 전문가들일 것이다. 물론 전문가만이 어떤 사안에 대해 비판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김 교수가 언급한 인접 학문의 교수들이 과연 촘스키 언어학의 핵심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김 교수가 우려하고 있듯이 “비언어학자들의 무비판적 수용”이 문제의 핵심이라면 그것은 분명 반성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전 세계의 수많은 언어학자들이 “그릇되거나,  과학적 검증이 될 수 없거나” 한 촘스키의 기대와 약속들에 현혹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촘스키 자신의 말대로 그는 과학자들을 훈련시키거나 기대해왔지 추종자(followers)를 양육한 것은 아니다.

촘스키의 업적에 대한 저속한 찬양은 금물이다. 그러나 그의 이론에 대한 각론적이고 정밀한 검증이 없이 총체적으로 진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특히 “실패한 이론을 천재적 발견인 것처럼 비언어학 청중들에게 팔아넘겼다”는 공격은 얼마나 비과학적인가. 이러한 공격은 촘스키뿐만 아니라, 그가 제시한 언어학의 진정성을 지금까지 점검, 보완, 반박해온 전 세계 수많은 언어학자들을 싸잡아서 비언어학자로 몰아붙이는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총론적 비판이나 단죄에 앞서 각론적인 점검이 수행되어야 한다.

필자는 촘스키가 “학문적, 윤리적으로 결정적 문제점을 노출한 이력의 소유자”란 평가에 결코 동의할 수 없지만, 전대미문의 어마어마한 지적 영향력을 행사해 온 한 인물에 대해서 이제 “맹목적 찬양이 아닌 균형 잡힌 평가”를 해야 한다는 김 교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좀 더 구체적인 논쟁이 양산되기를 기대한다.(장영준 중앙대 교수)

교수신문(06. 07. 02) “구체적 증거 보여달라” … 비판적 언어학 수용사 필요

장영준 교수의 반론을 읽고 난 후 필자의 비평이 최소한 절반은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 교수는 필자가 제기한 촘스키 언어 사상의 균형 잡힌 평가의 필요성을 수긍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평소 존경하던 국내 촘스키 언어학 이론의 권위자 가운데 한 분인 장 교수가 자신이 수십년 동안 꾸준하게 연구해온 이론적 패러다임의 창시자에 대한 다소 자극적인 수사와 가파른 언어에  대해서 비교적 차분하게 반박 논리를 전개해준 것에 대해서 감사한다.

하지만 그 짧은 글을 통해서 필자가 궁긍적으로 던진 물음의 본질은 거의 전혀 감지되지 못했고, 대부분의 문제 제기는 필자가 사용한 표현들에 함몰되어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실상, 장 교수가 강조 표시를 하면서 심기가 불편함을 드러낸  자극적 독설들은 필자의 것이 아닌, 反촘스키 진영에서 피력된 표현들이다. 더구나 이같이 거친 표현들을 사용한 학자들은 촘스키 언어학을 수십년 동안 추종하고 전파했던 그의 직계 제자들이었다.

“비판의 본질 접수되지 않아 아쉽다”
필자는 다만, 지금까지 예찬 일변도나 백과사전식 상투어들을 지양하고, 기존의 찬동 일변도의 태도에 경종을 울리고 보다 균형 잡힌 시각의 필요성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논증 전략의 차원에서 그같은 반대 주장을 先텍스트로서 사용했을 뿐이다. 촘스키가 어떤 절대적 신화가 아닌 이상, 그가 지난 50년 동안 받아온 온갖 찬양과 흠모의 수사에 못지않게, 그의 학문적 성취의 진정성과 의미에 대한 비판적 태도와 논의는 원칙적으로 장려되어야 할 것이다. 

독자들의 따분함을 피하기 위해서 필자는 장 교수가 반론으로 제시한 사항들에 대해서 조목조목 역반박을 가하는 수순을 밟는 대신 장 교수가 제기한 내용을 재해석하고 이어서 이 짧은 지면에서 필자가 제기하려 했던 본질적 문제를 다시 환기시킬 생각이다.

먼저 장 교수는 물론, 독자들에게 분명히 할 것이 있다. 장 교수의 비평을 보면, 필자가 反촘스키 진영에 서서 그의 지적 성취의 모든 것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려는 것처럼 비춰질 소지가 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필자가 처음 언어학을 접한 80년대 초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도 촘스키는 필자를 포함한 모든 언어학자들에게 넘어야 할 높은 산이요, ‘문제’ 그 자체이다. 아울러 그가 20세기의 인지과학 혁명을 촉발시킨 사유의 원천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정한다. 기실, 그가 제기한 세 가지 언어학의 과제, 언어의 기원, 언어 능력, 그리고 언어의 사용은 언어 연구의 본령이요, 정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현대 언어학의 창립자이자 문화과학의 패러다임을 창발시킨 소쉬르가 제시했던 언어학의 3대 과제인 언어의 관찰과 기술, 일반 법칙 추론, 언어학 자체의 한계 설정 및 본질 규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또 다른 시각에서 이들 세 가지 과제들은 섣부른 보편주의에 빠지지 않고 현상의 기술과 설명, 보편과 특수의 미묘한 변증법을 예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촘스키 연구 프로그램에서는 찾을 수 없는 또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세 번째, 과제는 바로 언어학 이론 자체의 인식론적 토대에 대한 철학적 메타적 성찰과 자기 반성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필자가 시도한 언어학 이론의 비평 작업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지면 관계상 장 교수가 제기하는 문제를 모두 답할 수 없어 몇 가지 문제만을 재론한다.  첫째, 장 교수는 필자가 제기한 촘스키 언어학 이론의 성공 요인으로 제시한 제도적 사회적 요인들을 지적한 것에 대해서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이것은 과학 지식의 성공 요인이 이론 내재적 내용과 제도적 여건들 사이의 상호 종속적 관계에 있다는 지식 사회학의 매우 기본적인 상식을 무시한 데에서 기인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근대 언어학의 제도화 과정을 지식사회학 관점에서 고증한 암스테르담스카(Amsterdamska)의 노작을 참조하기 바란다). 예컨대, 촘스키가 MIT에서 언어학과를 창립하고 초기에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받은 것은 촘스키 이론 그 자체의 과학적 탁월성 때문만이 아니라, 2차 대전 이후, 정보 처리의 중요성을 간파한 미국방성이 자연언어의 자동 번역이라는 국가적 사업에 대대적인 투자를 했기 때문이었다.

미 국방성에서 연구비 받은 촘스키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의 본산지로 그렇게 맹렬하게 비난했던 미국방성으로부터 그 자신은 물론 생성 언어학 연구의 상당수가 재정 지원을 받으면서 성장했다는 아이러니이다. 심지어 최근의 한 인터뷰에서 촘스키는 교수 초기 시절 보수의 절반 가량을 국방성으로부터 받았으며, 실제로 군사적 연구와 거리가 먼 언어학의 성격을 변질시켜 가면서까지 연구비를 수주하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였음을 스스로 발설한 바 있다.

둘째, 장 교수는 필자가 인용한 ‘인접학문의 교수들’이 촘스키 언어학에 대해서 정통하지 못했다는 혐의를 두면서 그 비판의 적효성을 단숨에 무력화시킨다. 이것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이들 언어학사가, 과학철학자, 전문 언어학자, 언어철학자들이 촘스키 비판의 자격이 없다면, 누가 촘스키의 비판자 역할을 맡을 수 있단 말인가. (이들 가운데서는 초기 변형 문법의 창시부터 70년대 초까지 촘스키의 가장 가까운 동반자였던 카츠 교수도 있다) 촘스키 저작은 크게 전문적인 언어학(technical linguistics) 이론서와 언어 이론의 철학적 토대를 다루는 철학적 언어학(philosophical linguistics)으로 크게 양분된다.

그런데 문제는 촘스키 계열의 언어학자들 가운데 이 양자에 대해서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면서 연구하는 학자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촘스키 생성 언어학의 핵심 학자들 가운데 그 누구도 촘스키 언어 이론의 인식론적 구조와 정당성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을 제시하는 학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저 모국어 화자의 직관에 의존하여 생성 문법 이론을 데이터에 적용하고 그것의 적합성을 따져 묻는 작업만이 중시된 것이다.

끝으로, 촘스키 언어학의 생물학주의에 대해서 한 마디. 지난 30년 동안 촘스키는 시종일관 인간 정신의 외부에 있는 언어 개념의 혼란성을 이유로, 언어 연구는 언어 지식을 구성하는 정신적 구성체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리고 인간 언어는 궁극적으로 생물학적 대상이며 자연 과학의 방법을 사용하면서 분석되어야 한다는 당위적 필요성만을 반복해왔다. 이제, 이같은 촘스키 언어학의 생물학적 토대에 대해서 순수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보편 문법 과학성을 입증할 수 있는 생물학적 증거가 현재 얼마나 확보되었으며, 아울러 인간의 언어 구사 능력을 설명할 수 있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장 교수를 비롯한 생성언어학자들이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가.

필자가 제기하려 했던 문제는 무엇보다 지난 50년 동안 세계의 언어학계를 평정하고 그 지적 헤게모니를 휘둘러 온 촘스키의 언어 사상에 대한 총체적 비판의 시점에 임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문제의식은, 하나의 특정 언어학 이론이 과도한 독점적 주류를 형성하여 다른 언어학 이론들을 소외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점에서 학문의 다양성 정신을 훼손시키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언어학 자체의 건강한 지식 생태계를 교란시켰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자연과학적 방법을 실제로 사용하느냐가 중요
그리고 이 문제는 다시 세 개의 하위 주제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그의 이론의 과학성과 진정성의 문제이며, 또 하나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대로, 과연 그가 행동 하는 양심의 선구자인지, 그리고 그가 자신의 언어학 이론을 구축하면서 타자의 비판에 대해 얼마나 성실하고 진지하게 소통했는지 점검하면서, 그의 학문적 윤리성을 따져 보자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지난 40년 동안 촘스키 가라사대 식의 맹목적 수용과 추종을 당연시한 한국의 언어학자들(여기에는 애석하게도 일군의 국어학자들 역시 포함된다)에게 그의 언어 모델의 획일적 적용을 통해 과연 한국어의 본질과 구조가 얼마나 해명되었는지 점검해, 비판적 서구 언어학 수용사를 진작시키려는 암묵적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같은 문제의식을 장 교수가 동감하고 그 취지에 찬동한다면, 필자의 글과 장 교수의 반론에서 제기될 수 있는 사소한 오해나 곡해는 부차적인 문제이다.(김성도 고려대 교수)

08. 0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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