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파국적 재앙을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 출간됐다. 데이비드 맥낼리의 <글로벌 슬럼프>(그린비, 2011).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자음과모음, 2011)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창비, 2010)와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세상에서 새로 나오고 있는 GPE(지구정치경제) 시리즈의 첫 두 권도 맥락을 같이하는 책들이다. 홍기빈의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책세상, 2011)와 장석준의 <신자유주의의 탄생>(책세상, 2011)이 그 두 권이다.

  

경향신문(11. 11. 19) 신자유주의 붕괴, 자본과 타협보다는 저항을

“우리의 가난은 그들의 풍요로움의 원천이고, 우리의 고통은 그들에겐 이득이다.” 셰익스피어의 <코리올라누스>에 등장하는 대사다. 신자유주의 30년의 팡파르가 끝난 지금, 99%의 사람들이 처한 현실은 400년 전의 연극 대사와 극적으로 맞아 떨어진다. 이 책의 저자인 데이비드 맥낼리(58)에 따르자면, 2008~2009년의 위기를 촉발한 악성 은행 채무는 “주권국가의 채무로 형태가 바뀌어” 사람들의 목줄을 죄고 있다. 많은 국가들이 채무의 증가를 막고자 “긴축시대를 선포”했다. “연금, 교육예산, 사회복지, 공공 부문의 임금과 일자리를 대폭 삭감”하면서 버티기 작전에 돌입한 것이다. 물론 그 압박은 99%의 몫이다. “세계적 은행들이 받은 구제금융 비용을 노동대중과 가난한 사람들이 대신 지불”하고 있다는 얘기다. 저자는 이 책을 쓰던 2010년에 벌어진 몇몇 사례를 거론한다. “라트비아는 교사의 3분의 1을 해고했고, 아일랜드는 공무원 연금을 22% 축소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90만 빈곤아동의 건강보험을 하루아침에 없애버렸다.”

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본주의 지켜내기”다. 자본주의 엘리트들의 부와 권력을 어떻게든 보호하려는 것이다. 물론 “정부 개입을 배제한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를 기치로 삼았던 신자유주의자들은 “정부로부터 역사상 가장 많은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당혹감으로 위세가 약간 꺾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정부 지출의 대폭적 삭감”이라는 “가혹한 필연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논리를 바꿨다. “이데올로기의 정당화 방식”을 변경함으로써 “위풍당당하게 경기후퇴를 견뎌내려는 것”이다. 여기에도 물론 음흉한 속내가 숨었다. 저자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부의 지출을 줄이는 것은 부자들에게 매우 이롭다”면서 “지출삭감은 가난한 이들로부터 부자에게로 엄청난 부를 이전하는 장치”라고 강조한다. 그리하여 99%의 비참한 삶을 담보로 “통계상 회복”이 겉으로나마 이뤄진다. 그것은 당연히 “대대적 해고와 임금 삭감, 사회 서비스의 대폭 축소를 통해 노동대중이 대가를 치른 결과”다. 

캐나다 토론토의 요크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저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가 걸어온 길을 책의 두번째 장에서 잠시 일람한다. 그는 1948년부터 1973년까지를 “유럽·일본·북미 등 세계를 지배하는 경제주체들의 경기가 급상승하면서, 서구 자본주의가 황금기를 구가했던 시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생산량을 3배로 키운 서구 자본주의”는 1970년대 초에 이르러 “이윤율 하락과 과잉축적이라는, 친숙한 패턴에 따른 호황의 둔화”와 필연적으로 직면했다. 이어진 “위기의 10년”을 거치며 “자본주의를 지켜내려는” 새로운 돌파구로 등장한 것이 신자유주의라는 얘기다.

저자는 그것을 “자본에 의한 노동의 패배, 새로운 불평등의 도래”라고 규정한다. 각국 정부는 “노동 유연화”를 부추기면서 “고용주들이 노동자들과 노조를 공격하는 것을 지원하고 격려”했다. 대량 해고와 공공부문 일자리 축소, 비정규직 확대 등으로 고용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구사하는 음흉한 전략이라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영국 대처 정부의 수석 경제자문이었던 앨런 버드는 “실업 상승은 노동계급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매우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고용 불안정은 “규율과 처벌에 의한 통제를 강화”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조에 따라 1980년대 초 북미와 유럽 각국에서 일어났던 노동자 파업은 차례로 분쇄됐다. “칠레, 페루, 볼리비아, 에콰도르 등 남미 국가들의 노조 조직률도 어처구니없이 하락”했다.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가 열성적으로 추진했던 “자본주의의 지리적 재편”은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요약된다. 약자의 입장에 선 국가의 노동자들이 더 열악한 삶으로 내몰렸음은 물론이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실험장이었던 칠레”의 국민소득에서 노동자 소득이 차지하는 몫이 “1970년대에는 47%였지만 1989년에는 19%로 급락했다”고 예시한다. “유사한 사태는 에콰도르, 페루, 아르헨티나, 멕시코에서도 발생”했다. 캐나다·미국과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으로 혜택을 봤다는 멕시코에서는 “NAFTA가 체결된 지 15년 만에 인구의 80%가 빈곤 상태에 빠졌고, 상위 0.3%의 사람들이 전체 부의 50%를 차지”했다.

세계경제를 파국으로 몰고간 주범이 금융 부문이라는 것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저자는 “1973년 미국 경제에서 금융 수익은 전체 이윤의 16%였지만, 2007년에는 무려 41%를 차지했다”면서 “급증하는 부채의 부담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핵심적 특징”이라고 말한다. “백인과 유색인종 간 차별과 분리에 근거한 종전까지의 대출관행으로는 이윤 창출에 한계가 있음”을 깨달은 은행들은 “보다 약탈적인 편입 방식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빈곤층 유색인종들은 과거에 받지 못했던 금융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됐지만, 그 대가로 터무니없는 조건들을 감수”해야 했다. “피부색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금융 수탈의 새로운 차원을 경험하는 와중에, 유색인종 노동자들은 더욱 강탈적인 착취”의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얘기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중요한 특성으로 “노동자 계급의 점진적인 소득 감소”를 꼽으면서 “인종차별을 받는 노동자 집단이 가장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고 잘라 말한다. 

  

신자유주의의 전 지구적 확산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의 역할은 막강했다. IMF 관리들이 구조조정 대상국의 재무장관에게 들이미는 전형적 조항들은 “혹독한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포함”한다. 예컨대 “공공 부문을 민영화할 것, 사회복지 서비스를 대폭 줄일 것, 수천명의 교사·간호사·사회복지사를 해고할 것, 생필품에 대한 정부 지원을 철폐할 것, 금융 부문을 해외시장에 개방할 것, 최저임금을 인하하고 연금을 축소하며 노동조합을 약화시킬 것” 등이 그것이다. 19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겪은 나라들은 “100여개 국”이다. 그 결과는 이미 확연하게 드러났다.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고용은 더 불안해졌다. 다국적 기업들은 공공 자산을 더 싼값에 구매할 수 있게 됐고, 해외 은행들이 금융을 통제하게 됐다. 지역과 세계 엘리트들은 그 나라 바깥으로 재산을 손쉽게 이동시킬 수 있게 됐으며, 경제성장은 하향 곡선을 그렸다. 교육과 보건 의료 수준은 급격히 추락했고 유아사망률은 증가했다.”

저자는 신자유주의로 인한 작금의 파탄이 “단순한 주기적 불황이나 체제의 일시적 일탈이 아니다”라고 진단한다. 그가 말하는 “글로벌 슬럼프”는 “만성화한 전 지구적 경기침체”를 뜻한다. 그것은 ‘더블딥’과도 다르다. “(서로 연관된) 다차원적인 위기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부동산 거품이 꺼졌다가 국가 부채 위기가 터지고, 사회복지가 후퇴하고 실업률이 솟구치는 등 여러 종류 위기들이 장기간에 걸쳐 터져 나오는 것”이다. 결국 한계에 봉착한 자본주의가 중환자실에서 보여주는 위태로운 증세들인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저자가 앞으로의 변화와 관련해 주시하는 것은 “소위 서발턴(subaltern)이라 불리는 하위계급의 움직임”이다. “실업자, 비정규직, 여성, 이주민, 소수자, 사회적 약자들이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따라 세상이 어떻게 변화할지가 결정될 것이라는 얘기다.

논리적으로 보자면 우리 앞에는 세가지 길이 있다. “(하위계급이)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위기에 처한 체제를 구하는 데 협조”한다면 “신-신자유주의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자본에 의해 잠식되지 않은 공유지와 틈새시장, 사유화할 수 있는 공공 부문 등 “착취의 소재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하위 주체들이 파시즘적 자본주의에 포섭된다면 “앞으로도 50~100년간 착취 구조가 건재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또 다른 하나의 길은 “좀더 인간적인 자본주의”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유지하되, 국가가 공공서비스를 시민들에게 직접 제공하는 사회복지국가 모델”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모델은 이제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국가는 부채더미에 오르고 사적 자본이 막강해진” 현재의 상황에서 “공공 부문은 계속 축소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이 먼저인가 이윤이 먼저인가 하는 근원적인 문제” 앞에서 “둘 다 추구하겠다는 절충은 모순”일 뿐이며 “이분법 속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얘기다.

저자가 결론적으로 제시하는 ‘길’은 책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한 6장 ‘거대한 저항의 물결’에서 드러난다. 그는 신자유주의적 착취에 반기를 든 전 세계의 대항운동에 주목한다. 볼리비아의 코차밤바 주, 카리브해의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섬, 멕시코 오아하카 주에서 일어났던 대중봉기를 차례로 소개한다. 그리스의 급진좌파연맹(SYRIZA)과 프랑스의 반자본주의 신당(NPA), 남미의 신좌파 운동, 점점 급진화 경향을 보이는 미국 각지의 노동운동도 상세히 거론한다. 그 모든 대항운동의 공통점은 “노동자 대중의 직접적 이해에 기반을 둔, 급진적이고 조직화된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국가가 통제하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민중과 노동자의 공동체가 통제하는 새로운 형식의 사회주의를 고민할 때”라고 강조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저자는 ‘민주주의에 기반한 사회주의’를 강조했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계승자다.

그는 바야흐로 세계 곳곳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하는 대항운동들을 “급진적 참여 민주주의”로 명명하면서 “새로운 진보 좌파 운동은 과거의 방식을 답습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좌파의 역사는 항상 새로운 좌파의 역사였다”는 것이다. 결국, 자본과의 절충이나 타협을 거부하고 “민중과 노동자의 직접 참여를 통해 정치와 경제를 재구성하는 새로운 사회주의”를 상상하라는 것이 저자의 주문이다. 책의 말미에는 번역자들이 캐나다에 있는 저자의 집에서 나눈 대담을 수록했다.(문학수 선임기자) 

11.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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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1 15: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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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1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상맡에 있는 책의 하나는 김유동 교수의 <충적세 문명>(길, 2011)이다. 독문학, 특히 아도르노 사상을 전공한 저자의 학술적 에세이로 부제는 '1만년 인간문화의 비교문화구조학적 성찰'. 같은 독문학자인 임홍배 교수는 추천사에서 "김유동 교수의 <충적세 문명>은 한국 근대학문의 역사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역작이자 대작이다.(...) 인류 문명사 1만 년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이 지적 모험은 요컨대 소유와 지배의 전일적 체제가 '악마의 맷돌'처럼 작동하는 자본의 시대를 과연 어떻게 견디고 넘어설 것인가 하는 치열한 문제의식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평했다. 인문학자의 거시적 문명론이 놀랍기도 하면서 다소 생경한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전체는 비진리'라고 말한 아도르노 연구자가 '전체를 위한 사유'를 제안한 것도 이채롭다. 전체를 읽어봐야 의문점을 풀 수 있을까?.. 일부 오타는 원문 그대로이다.

    

교수신문(11. 11. 14) 문명의 잔해 위에서‘전체를 위한 사유’를 가동하다  

은둔형 학자 김유동 경상대 교수(56세·독어독문학과)가 문제작을 들고 돌아왔다. 『충적세 문명-1만 년 인간문화의 비교문화구조학적 성찰』(길, 2011.10)이 그가 새롭게 내놓은 책이다. 아도르노 전문가로 통하는 그의 新作제목이 독특하기만 하다. 그래서일까, 임홍배 서울대 교수(독어독문학과)는 이 책을 가리켜“문명사를 백과전서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근대 이래 섣부른 발전사관의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다”라고 평가한다.

십수 년 동안 지리산 자락에서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해온 김유동 교수가『반야심경』,『 도덕경』에서부터『백년의 고독』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지적 자산을 섭렵해서 일궈낸 이 책의 핵심은 무엇일까. ‘소유와 지배’의 문명을 넘어‘조화와 균형’의 문명으로 나가기 위한 사유의 모험으로 압축할 수 있다. “‘소유와 지배’에 기초한 人爲의 문명은 그‘타자’인 자연 또는‘원시문화’와의 대비 속에서 그 의미와 무의미(덧없음)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기본 단초에서 논의를 전개해‘전체’에 대한 하나의‘그림’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다. A.N.화이트헤드의‘관념의 모험’과 같은 사유의 모험과 실험, 사유의 놀이가 이 책 전체를 이끌고 있다.  

충적세, 즉 신생대 제4기의 마지막 시기인 약 1만 년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명사의 광활한 공간을 그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던 데는 그의 병약한 신체 조건이 한몫한다. 그는 사실 이 책을 들고 세상에 나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책을 출간함으로써 “노출기피적인 은둔적인 생활이‘노출’될 때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도 컸다. 그는 痛風을 심하게 앓고 있다.

눈도 잘 보이지 않는다. 몸을 활발하게 움직여서 어떤 대안과 비전을 모색하는 일보다 모더니티에 의해 추동된 서구 현대문명의 위기를 읽어내고, 이를 사유의 지평에서 곰삭혀보는 일이 수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충적세문명’이란 말의 이면에는, 그래서 無와 같은 深淵의 바람소리가 휭휭 지나간다. 그에게 사유의 모험, 사유의 놀이는 과잉된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직시하고, 거듭 자신을 만날 수 있는 세계다.

그가 지식인의 책무를 변혁에서 찾기보다는‘사유의 재가동’에서 찾는 것도 일리 있는 접근이다. 그러나‘1만 년의 인간문화’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얼핏 보기에도 풍차를 향해 달려드는‘라만차의 騎士’처럼 무모하게 비쳐질 수 있다. 그가 방법론으로 제시하고 있는‘비교문화구조학’도 정교한 개념의 세례를 거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징후 읽기’라는 예술작품 읽기 방식의 주관적 접근도 모호함을 증폭시킬 수 있다. 김유동 교수를 書面으로 만났다.

△ 문명의 위기로 진행된 인류 역사 1만 년을 조망하기 위해‘비교문화구조학’적 성찰을 제안했는데, 이것은 문학-예술 연구로부터 발상을 얻은,‘ 비평(에세이)’에 가깝지 않습니까?

"네,‘ 비평(에세이)’의 영역에 가깝다는 지적은 맞습니다. 서론에서 언급했듯 에세이로서의 문학비평을 문화비평으로 확장시킨 것입니다. ‘비교문화구조학’의 정밀한 개념화가 가능한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정밀한 학문(exakt Wissenschaft)을 지향하는 것은 과학의 굊想일지 모르지만 불확실한 삶과 현실에 다가가려는 에세이의 방법은 규정과 판단보다는 뉘앙스가 많고 어설플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비교문화구조학이라는 용어를 새롭게 만들었는지는‘방법’의 문제를 다룬 서론 전체가 이 질문에 대한 저의 변명이 되겠지만, 간단히 요약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문화’라는 것이 우리가 숨 쉬는 공기 같은 ‘전체’를 지시하는 용어지만 너무나 남용되면서 닳아빠진 동전처럼 액면가가 마모돼 새로운 용어를 만들 필요를 느꼈고 그래서 문화구조라는 용어가 나왔다면, 문화구조에 대한 연구는 내재적 방법으로 구조의 틀을 드러내보려는 시도지만, 문화구조의 의미는 다른 문화구조와의 비교 속에서 얻어진다는 생각에서 비교문화구조학이라는 용어를 만든 것입니다.”

△ 모더니티가 추동한 현대문명의 위기를 ‘징후적 읽기’로써 진단하겠다는 구상입니다. 어쩌면 이런 접근 자체가 ‘현대문명의 위기’로부터의 결과론적 해석은 아닌지, 그래서 마땅한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않아도 그렇게 비난 받지 않아도 되는, 관념의 과잉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징후 읽기’가 그렇게 새로운 독법도 아니고요.

“정교한 개념화를 거부하는, 아니면 못하는 이유는, 학문이라는 것이 ‘개념’을 통해 대상을 파악하는 행위지만 파악한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생각과 함께, 파악한다는 것 자체를 음미해보면 포섭하고 장악하는 것은 언어를 통해 대상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행위로 문명의 常겤로 설정한‘소유와 지배’를 되풀이하고 강화하는 것이라는‘반성’이 기본 전제로 깔려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대문명의 위기’로부터의 결과론적 해석이 아니냐는 지적은 적절한 지적이라고 인정합니다. 현대문명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모든 학문의 전제로 깔려있는‘진보’와‘서구중심주의’를 반성하면서‘타락의 역사’를 말하는 동서양의 고전과 종교사상을 새로운 척도로 부활하게 만들었겠지요. 『충적세 문명』이 만든 것은 암울한 그림으로‘구원적 비평’에 기대어 지난 세월과 삶을 어루만지는 작업인데요, 그런 고통을 만든 요소들이 객관적으로 극복된 실질적 희망이 보이거나, ‘이론’이 다른 전망을 제시한다면 전혀 다른 별자리를 만들어 밝고 긍정적인 그림을 만들 수 있겠죠.

‘징후 읽기’가 그렇게 새로운 독법이 아니라는 지적에도 동의합니다. 사실 나는‘논리’라는 것은 별것 아니고, 경험하고 인식한다는 것 또는 보고 느낀 것을 음미하고 분별하는 행위는, 단순한 知覺작용에 머물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나‘전체’나‘삶’,‘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징후읽기’라고 생각해요.‘ 징후 읽기’를 부각시킨 것은 이런 맥락보다는,‘ 전체’,‘ 신’,‘ 진리’,‘법’등은 알 수 없다는 것, 인간의 인식행위라는 것은‘부분’을‘전체’의 징후로 해석함으로써‘전체의 그림’을 잠정적으로 만들어 보는 놀이라는 맥락입니다.”

△ 선생님의‘전체에 대한 인식’욕망은 어딘가 헤겔적인 냄새가 납니다. 학자의 고유한 학문전통에서 비롯되는 것이겠지만, 어쩌면 아도르노 전공자로서 독일적 정신의 흔적이겠죠. 이번 책에서 아도르노에게 많은 부분 의존한 것은 그의 사상이 현재적 의미를 지닌다는 판단인가요?

“근대 문화구조의 후발주자로 세 차례 대전의 중심이며 희생자인‘독일사의 비극’은 독일 지성들에게‘전체’를 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했습니다. 독문학도이지만 독일 철학을 공부하고 논문을 쓴 제게 독일의 변증법적 이론은 당연히 배여있을 테지요. 독일정신을 공부하면서 아도르노, 하버마스, 심지어는 프랑스 포스트구조주의, 프레드릭 제임슨 등을 연구했지만, 2차 대전 중 미국이라는 망명지에서 파국의 구세계를 지켜보는 아도르노의 치열한 글쓰기나 그 뒤에 행한 세상에 대한 진단은, 파국에 이르렀던 20세기 전반기 유럽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위험사회자 전 세계적 보편성을 얻은 상태에서는 지금 다시 설득력을 얻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도르노의 현재성은 전후의 황금시대보다 오늘날에 더 절실한 현재성을 갖는다고 봅니다.”

△ 앞으로의 연구, 저술 계획이 궁금합니다.

“미래는 모르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세상뿐 아니라 저 자신의 실존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현재의 삶속에서 어떤 침전물이 생기고 어떤 욕구가 일어날지 두고 봐야겠네요. 20년 전에 쓴『아도르노와 현대사상』에서는 19세기의 낙관주의적 문화 구조에서 나온 마르크스의 ‘실천이론’이 20세기 전반 ‘파국’의 과정 속에서 어떻게 아도르노의 ‘패배주의적 이성’으로 바뀌었는가가 기본적인 단초였는데, 책 출간 후의 세상을 살면서는‘문화산업’부분(지금 세상에서는 이것이 가장 절실한 문제인데)이 너무 빈약해, 이걸 보충할 책은 내야 할텐데라는 책무는 느낍니다만, 열려있는 미래는 한치 앞을 알 수 없지요.” 



김유동 교수는 서울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베를린자유대와 프레드릭제임슨의 초청으로 미국 듀크대에서 연구하기도 했다. 『아도르노 사상』(문예출판사, 1993), 『아도르노와 현대사상』(문학과지성사, 1997) 등을 저술했으며, 프레드릭 제임슨의 『후기마르 크스주의』(한길사, 2000),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계몽의 변증법』(문학과지성사, 2001), 아도르노의 문제작『미니마 모랄리아』(길, 2005) 등을 번역했다. 이번 신작에서 전체를 사유하려는 독일 정신의 흔적, 특히 아도르노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은 이러한 지적 편력과도 관련 있다.(최익현 기자)  

11.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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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이 계속 쌓이다 보니 주기적으로 정리를 해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실천방안 중 하나가 '로쟈의 컬렉션'을 정기적으로 써두는 것인데, 가능하면 한 주에 한번씩은 '점검'을 해볼 참이다. 점검이란 게 그주에 혹은 2-3일간 입수한 책들과 안면을 터두는 일이다. 써야 할 원고가 산더미이긴 하지만 원고-기계도 아닌 이상 잠시 바람 쐬는 기분으로 몇자 적는다.   

그래봐야 몇 걸음 못간다는 생각이 드는데, 제일 먼저 꼽을 책이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부채 그 첫 5,000년>(부글북스, 2011)이다.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부채'란 제목에 끌린 게 아니다. 부채(대출)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채'란 말에 눈이 커지진 않는다. 신간검색을 하다가 무심결에 저자를 클릭해보니 이런, 데이비드 글레이버, 아는 저자다!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그린비, 2009)에 대해 서평을 쓴 적이 있으니 어찌 모르는 저자랴(그레이버는 자칭 '아나키스트 인류학자'다). 다시 보니 <부채>의 부제가 '인류학자가 다시 쓴 경제의 역사'다. 전작만큼 두툼한 책인데, 사실 아침에 책을 발견하고 바로 주문해 오후에 받았다(알라딘은 당일배송이 아니어서 교보에 주문했다. 어쩔 수 없게도). 일정과 분량 때문에 빨리 읽진 못하겠지만 재미있다면 이 또한 서평거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부채>에서 넘어가기 전에 곁가지로 덧붙이자면, 책을 펴낸 부글북스란 출판사가 흥미롭다. 대충 훑어보니 이제까지 내가 산 책이 세 권쯤 되는데, 모두 역자가 정명진 씨다. 바로 부글북스의 대표다. 중알일보 기자출신으로 출판기획자와 전문번역가로 활동한다고 나와 있는데, 자신의 출판사에서 내는 책 대부분을 직접 번역하고 있어서 이채롭다(이건 <정의의 역사>가 나왔을 때 이미 눈치를 챈 사실이지만). 이 정도면 출판계에서 드문 '원맨쇼'가 아닐까. 아니 '1인출판'의 말 그대로 최대치? 아무려나 눈 밝게도 <부채>같은 책을 찾아서 직접 옮기고 펴내준 데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독자로서는 말이다.   

 

<부채>와 같이 배송받은 책은 칸트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아카넷, 2011)다. 백종현 교수의 칸트 번역이 3대 비판서에 이어 '종교비판'에까지 이르렀다. 당장 눈에 보이진 않지만(다 어디에 둔 것일까?) 3대 비판서를 구입해놓은 김에 컬렉션 차원에서 마저 구입했다. 예전 번역본으로 이대출판부판을 갖고 있었는데, 1984년에 나온 것이니 이미 한 세대 전이다. 새 번역본을 '재정의 한계 안에서' 구입해 책장에 꽂아둘 만하다.    

어제부터 당일주문으로 받아보려고 애썼던 책은 대리언 리더의 <우리는 왜 우울할까>(동녘사이언스, 2011)이다. 개인적으론 반가운 일이지만 대리언 리더의 책이 계속 소개되고 있는데, 공저인 <우리는 왜 아플까>(동녘사이언스, 2011) 외에도 <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문학동네, 2010), <모나리자 훔치기>(새물결, 2010) 등이 그의 책이다(<모나리자 훔치기>는 저자가 '다리안 리더'로 표기돼 같이 검색되지 않는다).  

 

우울증에 관한 책으론 엘리자베스 워첼의 <프로작 네이션>(민음인, 2011)도 장바구니에 들어가 있는 신간이다. 내주에나 주문하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 정신의학에 관심이 생겨서 어제는 <정신의학의 역사>(바다출판사, 2009)를 구입했다. 관련서들이 많지만 크리스토퍼 레인<만들어진 우울증>(한겨레출판, 2010)도 같이 읽어볼까 한다. 소장도서이긴 하지만 이 역시 어디에 있는지는 신만이 아실 듯싶다.   

오늘 배송받은 또 다른 책은 서경식의 <나의 서양음악 순례>(창비, 2011)이다. 추천사를 청탁받고 쓴 인연 때문에 편집자가 보내준 것인데 나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왜 음악에 빠지는가. 불가해한 여성과 같은 존재가 음악이라고 서경식은 말한다. 신분이 다른 연인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오페라 주인공처럼 그는 음악에 매혹되어 빨려들어간다. <나의 서양음악 순례>는 순례라기보다는 치열한 연애의 기록이다. 그 기록 또한 불가해한 마력을 품고 있어서 놀랍다. 음악에 대한 사랑은 치명적인 사랑인가보다!

내가 저자의 책으로 처음 읽은 게 <나의 서양미술 순례>(창비, 1992)였기 때문에(어즈버 20년 전이다!) <나의 서양음악 순례>에 추천사까지 쓰게 된 건 개인적으로 영광스럽다. 클래식 음악에 친숙하지 않은 독자라도 저자의 순례는 편안하면서도 흥미진진하게 따라가볼 수 있다. 나부터도 그랬는데, 그래서 '불가해한 마력'을 품고 있다고 적었다.  

음 그리고 또 둘러보니 건축 관련 책들이 있다. 폴 골드버거의 <건축은 왜 중요한가>(미메시스, 2011)는 건축 입문서가 되지 않을까 싶어 구입했다. 건축은 개인적으론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은 분야라서 주섬주섬 사놓은 책들이 없진 않지만 열독해본 기억이 없다. <행복의 건축> 저자이기도 한 알랭 드 보통은 추천사에서 이렇게 적었다. "예술을 소개하는 수많은 책들이 있지만 건축의 세계를 알려주는 책은 드물다. 이 책은 그중 최고의 책이다." 국내서로는 김성홍 교수의 <길모퉁이 건축>(현암사, 2011)이 눈길을 끈다. 표지만 보고 고르는 건 아니지만 표지가 가장 마음에 드는 책 가운데 하나다.

우연찮게도 이야기가 부채에서 시작해서 건축으로 끝났다. 사실 한국인의 부채(대출) 대부분은 집(건축) 때문에 짊어진 것이니(나도 예외가 아니고) 어쩌면 필연인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널찍한 서재 공간이 있어서 방바닥에 책을 쌓아두지 않아도 된다면 이런 페이퍼는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책들에 대한 대접이 소홀한 듯싶어서 인사치레로 적은 페이퍼이기도 하기에... 

11. 11. 19.  

P.S. 페이퍼를 쓴 다음에 배송받은 책은 미셀 옹프레의 <사회적 행복주의>(인간사랑, 2011)다. 옹프레의 '반철학사' 5권으로(전체 6권이다), 3권 <바로크의 자유사상가들>(인간사랑, 2011)과 4권 <계몽주의 시대의 급진철학자들>(인간사랑, 2010)에 이어지는 책이다. 앞으로 세 권 더 남은 셈. <사회적 행복주의>는 공리주의자들과 공상적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바쿠닌까지를 다루고 있어서 특히나 관심을 끈다. 아마도 이 시리즈에서는 가장 먼저 읽게 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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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demian 2011-11-20 11:09   좋아요 0 | URL
뭔가 좋은 계획이라는 생각이 듭니다..제가 제대로 이해한지는 모르겠지만 로쟈의 책 중 로쟈의 책이라는 생각이..암튼 좋은 책들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2011-11-20 23:18   좋아요 0 | URL
소개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책정리'입니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 2011)에 대한 리뷰기사를 몇개 모아놓는다. 중복 인용되는 대목이 있는 건 주중에 기자간담회를 가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젝 읽기에 대한 제안이 어느 정도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한국일보(11. 11. 18) "한국 사회 이대론 곤란하다 느끼면 지젝 읽기라는 저항과 함께 해보길"

"자신이 가진 게 많다고 믿는 '대한민국 1%'는 지젝을 읽을 필요가 없다. 자신이 세상을 너무나 잘 안다고 생각하는 '도인'들도 읽을 필요가 없다. '이대로!'가 생활 신념이자 정치적 신념인 위인들도 지젝을 읽을 필요가 없다."

'로쟈'라는 필명으로 잘 알려진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는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 발행)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이 도발적인 '선언'은 거꾸로 누가, 왜, 어떻게 지젝을 읽어야 하는지를 읽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제목이 함축하듯 이 책은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사상을 쉽게 풀어 전하는 대중교양서다. 

이 교수는 17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지젝은 현실의 해석보다 현실의 변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학자"라고 강조하며, "국내에서 지젝에 관한 '진입장벽'이 더 낮아져야 한다"는 바람에서 책을 썼다고 말했다. "모두 '지젝거린다'고 할 만큼 국내 학계에서 지젝에 관한 논의가 많지만, 실제 지젝의 저서 판매량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강의를 하다 보면 학계와 대중의 괴리가 크다는 걸 실감하는데, 지젝이 대표적이죠. 사실 지젝은 재미있는 학자예요. 영화 '지젝!'의 아르헨티나 강연 실황을 보면, 나꼼수 콘서트를 연상시킬 만큼 청중 반응이 대단해요." 

지젝은 철학적 주제를 SF소설, 할리우드 영화, 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을 통해 변주해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나꼼수만큼 만만하지 않다. 지젝은 라캉과 헤겔에 관한 독특한 해석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헤겔의 변증법을 '정반합'의 완성된 사유가 아니라 '끝없이 분열하는 사유'로 읽어낸다. 영화 '에일리언'에서 에일리언을 몸에 품은 사람이 사람도 에일리언도 아니지만 동시에 사람이면서 에일리언인 것처럼, 지젝이 읽은 헤겔의 변증법은 정(正)도 반(反)도 아니면서 동시에 정과 반인 이상한 괴물을 만들어 내는 사유다. 라캉도 비슷하다. 주체란 언제나 분열된 채로 자기정체성을 구성해나가는 존재라는 것이 지젝이 라캉을 읽는 방식이다. 이 교수는 이런 지젝의 독창적 해석을 "학문적 업적"이라고 평가하면서 "지젝 읽기는 자기 자신의 타성과 기득권과 편의주의와 무사안일주의에 대한 저항"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번에 지젝의 저서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원제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 자음과모음 발행)도 김희진씨와 함께 번역, 출간했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은 이 책을 한 줄 한 줄 읽어가며 지젝의 지적 여정을 소개하는 식으로 쓰여졌다.

지젝은 얼마 전 월가 점령 시위를 지지하는 연설을 한 것처럼 현실정치에도 기민하게 대응하며 자신의 논지를 설파한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작금의 자본주의가 파국을 맞게 될 것이라며 '다시 레닌'으로 돌아가 새로운 코뮤니즘을 만들자고 말해왔다. 그가 강성 좌파로 분류되는 이유다.

<실재의 사막…>은 지젝이 정치에 관한 책을 본격적으로 쓰게 된 계기가 된 9ㆍ11테러 관련 5편의 논문을 엮은 책이다. 9ㆍ11테러는 자본주의의 한계를 드러내는 사건이었지만, 미국은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 지젝의 평가다. 지젝은 9ㆍ11테러가 상징하는 승자독식의 자본주의체제의 균열을 예의 복잡다단한 사유로 설명하며 사람들에게 자본주의 매트릭스의 삶에서 빠져나올 용기를 가지라고 말한다. 이 교수는 "지젝의 사유를 통해 한국사회에 생산적인 담론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이대로는 곤란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지젝 읽기라는 저항을 함께 할 것을 권했다.(이윤주기자)  

 

경향신문(11. 11. 19) “지젝 읽기는 타성과 기득권, 편의주의에 대한 저항”

영화 <매트릭스>는 인간이 컴퓨터가 만든 가상현실 속에 갇히는 미래 세계를 그렸다. 영화에서 진짜 현실에 눈뜬 주인공에게 저항군 지도자 모피어스는 이렇게 말한다.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세계적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이를 본떠 같은 제목의 책을 썼다. 책에서 지젝은 “9월11일 뉴욕에서 일어난 사건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라고 묻는다.

인터넷 서평꾼 ‘로쟈’로 이름을 알린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43·사진)가 지젝의 이 문제의식을 담은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를 전문번역가 김희진씨와 함께 새로 번역해 내놓았다. 이 책을 중심으로 지젝을 풀이한 해설서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도 함께 출간했다.

책 출간을 맞아 17일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이 교수는 “<지젝!>이란 다큐멘터리를 보면 지젝의 아르헨티나 강연 모습이 나오는데 마치 ‘나는 꼼수다’를 연상케 할 만큼 웃고 즐기는 분위기였다”며 “우리가 지젝에 대해 느끼는 장벽을 낮추고 싶었다”고 말했다. 특히 지젝의 책은 “현실을 바꾸자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책이니 더 많이 읽혀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지젝은 9·11테러 사건이야말로 우리가 믿고 있는 ‘현실’을 무너뜨린 계기라고 본다. 마치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폐허가 된 실제의 시카고를 보며 느꼈던 것처럼, 사람들은 이 영화 같은 실제 장면을 보고는 “도대체 우리는 어떤 시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현실’(reality)이 무너지자 진짜 ‘실재’(the real)가 무엇인지를 보는 불편함을 감수하기보다 환상을 믿는 쪽을 택했다. <매트릭스>로 말하면 빨간 약이 아니라 파란 약을 먹은 셈이다. 그 환상은 바로 “공격받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테러와의 전쟁에 나서야 한다”는 믿음이다.

이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세계 경제위기를 맞아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핵심인 ‘실물경제’를 되살려야 한다고 말한다. 지젝은 이것도 우리가 믿는 ‘현실’에 불과하다고 본다. 자본주의의 ‘실재’ 그 자체가 오히려 경제위기를 불러온 금융순환이라고 분석한다. 이 교수는 “지젝은 현재 자본주의 위기의 처방으로 나오는 일명 ‘박애적 자본주의’, 워런 버핏이나 안철수와 같은 사회환원식이 아니라 공산주의를 추구한다”고 말했다.

그 ‘공산주의’는 역사적으로 실패했던 현실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발명해야 할 대안적 경제체제”다. 지젝은 월가 점거 시위에 참가해 이렇게 연설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진정 원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고 있다. 정말로 욕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 교수가 책에서 “자신이 가진 게 많다고 믿는 대한민국 1%는 지젝을 읽을 필요가 없다”며 “지젝 읽기는 자기 자신의 타성과 기득권과 편의주의와 무사안일주의에 대한 저항”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자크 라캉은 “동물들은 가짜를 진짜로 속일 수 있지만 유일하게도 인간은 진짜를 가짜로 속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지젝을 빌려 “중요한 것은 진짜 속에서 가짜를 가려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인문학 전도사’로 불리며 대중적 강의와 저술에 힘쓰고 있는 그는 “학술 논문을 쓰거나 비평에 그럴듯한 문구를 가져오기 위해서 지젝을 읽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지젝은 실제로 현실을 바꾸고 싶어했습니다. 지젝의 문제의식을 얼마나 많이 공유하는가가 변화를 불러온다고 믿습니다. 가급적 모두가 지식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나는 ‘지식 전체주의자’입니다.”(황경상기자)   

한겨레(11. 11. 19) 진짜 삶을 살고 싶다면, 쫄지 말고 ‘지젝’ 읽어라

슬로베니아 출신으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고 불리는 슬라보이 지젝은 우리나라에도 번역서가 30종 가까이 나왔을 정도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렇지만 지젝의 생각은 과연 우리에게 얼마나 잘 알려져 있는가? 공부깨나 했다는 사람들은 ‘지젝은 그저 어릿광대’라거나 ‘이론만 현란하지 별것 없더라’ 등으로 평한다. 한편에선 ‘너무 어렵고 무슨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도 있다.

번역과 평론을 통해 지젝의 책과 생각을 다뤄왔던 ‘인터넷 서평꾼 로쟈’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는 이를 ‘지젝과 거리두기’라고 부른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게 많다고 믿는 ‘대한민국 1%’, 자신이 세상을 너무도 잘 안다고 생각하는 ‘도인’들은 지젝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뭔가 제대로 알고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분들은 한번쯤 지젝을 읽으셔도 좋겠다”고 한다. 지젝과 거리를 둬서는, 자기 자신의 타성과 기득권, 편의주의, 무사안일주의 등에 대한 저항인 ‘지젝 읽기’를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최근 그가 펴낸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은 ‘대중을 위한 지젝 입문서’다. 17일 만난 지은이는 “지젝을 소개하는 입문서들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꼼수다>처럼 좀더 독자들에게 와닿게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젝의 사상은 현실을 바꾸려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에, 지젝과 독자들 사이의 벽을 낮춰 더 많이 공유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오늘날 지젝의 사상이 위치하는 맥락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사회주의가 실패하고 자본주의 체제마저 휘청거리고 있는 지금, 한편에선 자본주의를 다듬어 살길을 찾으려는 ‘박애 자본주의’라 부를 수 있는 흐름이 나온다. 그러나 공산주의자인 지젝은 ‘레닌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며 이런 흐름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 물론 옛 소련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지은이는 “박애와 자선에 기댄 자본주의 극복은 근본적 해결이 아니기 때문에 지젝은 레닌이 사회주의를 현실화했던 그때의 문제의식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도’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젝의 이런 생각의 출발점이 되는 책이 9·11 테러를 계기로 삼아 ‘자본주의적 재앙이냐 공산주의적 구제냐’의 선택지를 제시한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다.

지젝 사상의 바탕인 라캉, 헤겔과의 연관성을 짚어내며 책을 분석한 지은이는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허위적인 종언 뒤의 ‘그저 그런 삶’과 ‘진정한 삶’을 대비시킨다”고 말한다. 그저 그런 삶은 자기 삶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는 삶이고, 그 정치적 비전이 바로 자유민주주의라 한다. 이런 ‘강요된 선택’을 넘어서기 위해 지젝은 현실주의에 입각한 정치적 기획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지은이는 지젝의 사유 속에 담긴 ‘포퓰리즘에 대한 엘리트주의의 비판에 대한 비판’을 강조했다. 지젝은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들은 바로 우리다”라는 속담을 인용하며, 대중의 집단성에 과도하게 ‘파시즘’ 딱지를 붙이는 것을 비판한다. 총체성·집단·규율 등은 원래 창조적인 노동자들의 움직임에 속하는데, 탈정치화된 자유민주주의 중도파가 이 모두를 파시즘으로 규정해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무기력하고 온건한 탈정치적 태도보다는 대의를 향한 열망을 실질적인 정치로 묶어내는 ‘급진적인 정치화’만이 새로운 삶의 비전을 열 수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우리 사회에서 <나는 꼼수다> 인기의 의미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풀이한다.(최원형 기자)   

서울신문(11. 11. 19) 위험한 철학자 지젝 전도사로 나선 ‘로쟈’ 이현우-번역·서평서 출간 

“그들은 우리가 모두 루저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루저들은 저곳 월 스트리트에 있다. 우리가 낸 돈으로 수십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받은 것은 그들이 아닌가. 그들은 우리가 사회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는 언제나 존재해 왔다. 그들은 우리가 사유재산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밤낮으로 몇 주 동안 사유재산을 파괴한다 해도, 2008년 금융 시장 붕괴 당시 파괴된 사유재산의 양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피땀 흘려 이룬 그 사유재산 말이다.”

‘이 시대의 가장 위험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62)이 지난달 10일 미국 월가 시위에서 위와 같이 시작한 연설을 한마디 할 때마다 사람들이 따라서 외쳤다. 뉴욕시가 확성기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젝의 연설은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로 퍼졌지만, 현장의 육성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확장됐다. 틱 증상이 있는 지젝은 월가 시위 연설에서 한마디를 할 때마다 티셔츠를 잡아당겼고, 보통은 끊임없이 코를 문지른다.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나 라캉과 헤겔의 철학을 크로스오버하는 시도를 처음으로 한 지젝은 공산주의자이자 행동가다. 워낙 많은 사람이 그의 책과 철학을 언급해 ‘지젝거린다’(지젝을 인용한다)는 조어가 있을 정도다. 70여권의 책을 썼고 이 가운데 30권 정도가 한국에서 번역됐다.

인터넷에서 필명 ‘로쟈’로 유명한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가 번역서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9·11 테러 이후의 세계’와 직접 쓴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9·11 이후 달라진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이상 자음과 모음 펴냄)를 통해 지젝 전도에 나섰다. ‘실재의 사막’에서 지젝은 9·11 테러를 통해 진정으로 읽어내야 했던 것은 “승자 독식의 안온한 자본주의 체제(지젝은 이것을 매트릭스에 비유했다)의 균열 그 자체”라고 강조한다.

지젝은 공산주의 시절에 나돌던 구닥다리지만 매력적인 농담 하나를 소개한다. 한 동독 인민이 시베리아에 파견되어 일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보내는 우편물이 검열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두었다.

“암호를 정해 두세나. 만일 내가 파란색 잉크로 편지를 써 보낸다면, 그건 내가 쓴 내용이 사실이라는 뜻일세. 만일 빨간색 잉크로 씌어 있다면, 편지 내용은 거짓일세.” 그가 떠난 지 한 달 뒤에, 그의 친구는 시베리아에서 온 첫 편지를 받았다. 파란색으로만 쓰인 편지였다. 편지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굉장하다네. 상점은 질 좋은 음식으로 가득 차 있고, 극장에서는 서방에서 만든 유명한 영화가 상영되지. 아파트는 널찍하고 고급스럽다네. 여기서 구할 수 없는 것이라고는 빨간색 잉크뿐이라네.”

그는 월가 시위 연설에서도 언급했던 이 농담을 영화 ‘매트릭스’와 연결해 메시지를 던진다. ‘당신은 지금의 안전하지만 통제되는 삶에서 한걸음 밖으로 빠져나올 용기가 있는가? 아니면 자본주의 매트릭스의 안온한 삶에 머물면서 ‘최후의 인간’으로 살아가겠는가?’

지젝은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처럼 빨간 알약을 삼키고 밖으로 걸어나와 자신이 주인인 삶을 살라고 선동한다. 이현우 교수는 “지젝만큼 진보적인 좌파 철학자는 있지만 지젝만큼 이해하기 쉽진 않다.”며 “지젝은 재미있고 공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지젝!’이란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의 강연 분위기는 ‘나꼼수’(나는 꼼수다) 콘서트처럼 열광적”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인터넷 방송 ‘나꼼수’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으로 정권의 실체를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있다.”며 지지했다. 지젝이란 이 시대의 철학자를 ‘나꼼수’처럼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는 방식으로 알리는 것이 서평꾼 ‘로쟈’의 역할이라는 이야기다. 소수 지식인이 지젝의 철학을 이해하기보다는 대중이 그의 문제의식을 공유할 때 세상이 바뀐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지젝 읽기는 타성과 기득권과 편의주의와 무사안일주의에 대한 저항이다. ‘좋은 게 좋은 거지’나 ‘우리 집안만 빼고 다 망해라!’와 같은 유구한 심보에 대한 저항이다. 가진 게 많다고 믿는 ‘대한민국 1%’는 지젝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윤창수기자) 

11.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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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1-11-19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오. 정말 잘생기셨네요'''

로쟈 2011-11-20 23:18   좋아요 0 | URL
지젝 말인가요?

park6 2011-11-21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훗 바로 샀습니다ㅋㅋㅋ읽다가 이해 못하는 부분은 메일로 물어봐도 될까요?ㅠ

로쟈 2011-11-21 23:58   좋아요 0 | URL
네, 질문주세요.^^
 

작년 하반기부터 올초까지 알라딘에 연재한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의 단행본판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 2011)이 출간됐다. 새로 번역된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자음과모음, 2011)와 같이 작업을 진행하느라 예상보다 다소 늦어졌다. 연재시에는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인간사랑, 2003)을 강독 대본으로 사용했는데, 이번에 인용문을 교체하면서 분량을 좀 덜어내고 단행본 구성으로 바꾼 것 정도가 변화이며 내용 자체는 크게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럼에도 뭔가 책다운 모양새가 됐다면 편집부의 노고 덕분이다. 겸사겸사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에서 주로 언급하거나 내가 관여한 책들의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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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9.11 이후 달라진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현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1월
13,500원 → 12,150원(10%할인) / 마일리지 67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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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9.11테러 이후의 세계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1월
19,000원 → 17,100원(10%할인) / 마일리지 9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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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라크: 빌려온 항아리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대진.박제철.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4년 4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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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성호 옮김 / 창비 / 2010년 6월
15,000원 → 14,250원(5%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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