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에 첫눈까지 내렸으니 오늘의 발견은 단연 '겨울'일 테지만(체감으론 겨울보다 더 춥다), '이주의 발견'은 스티븐 트롬블리의 <인문학 지도>(지식갤러리, 2013)다. '한눈에 펼쳐보는 위대한 생각의 계보'가 부제. 원서가 어떤 책인지 찾아보니 <현대 세계를 만든 50인의 사상가>(2012)다(표지를 봐도 그렇다). 소개는 간략하게만 뜬다.

 

 

위대한 생각의 계보가 한눈에 펼쳐진다. 철학· 심리· 문학· 정치· 미학· 사회· 윤리· 과학 등 그 분야도 다채롭다. 영국의 <가디언>은 “지혜의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길잡이”라며 이 책을 추천했다. 책에는 생각의 거인들이 전 생애를 바쳤던 치열한 자기 모색과 고민, 그리고 삶의 도처에서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되는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이 담겨 있다.

유사한 종류의 책으론 존 레흐트의 <한권으로 보는 현대사상가 50>(현실문화연구, 2003/1996)이 떠오른다. 일종의 사상가 사전으로 요긴했던 책. <인문학 지도>도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싶다. 사전이건 지도이건 간에.

 

 

 

저자의 이력이 소개돼 있지 않은데, 찾아보니 스티븐 트롬블리는 저술가이면서 영화감독이자 제작자이다.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인데, 다른 책으론 <간략한 서양사상사>란 얇은 저서와 <노튼 현대사상 사전>이란 두꺼운 공편저가 있다. 암튼 레흐트의 책과 함께 요긴한 현대사상 가이드북이 나온 듯싶어 반갑다...

 

13.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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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철학자이자 미술 비평가 아서 단토(1924-2013)가 지난달에 세상을 떠났다(흠, 200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도리스 레싱도 어제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군). 우리 나이로 향년 90세. 개인적으로는 그의 책들을 흥미롭게 읽고 많이 배웠기에 애도의 의미로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 그의 마지막 저작은 <예술이란 무엇인가>(2013)이다. 번역서들과 함께 <예술이란 무엇인가>도 포함시켰다. 사실 몇달 전에 하드카바로 구입한 책인데, 부고를 접하니 한번 더 쓰다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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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Art Is (Hardcover)
Danto, Arthur C. / Yale Univ Pr / 2013년 3월
73,000원 → 59,860원(18%할인) / 마일리지 3,0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9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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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 이야기- 일상과 예술과 상업 사이의 경계를 허문 앤디 워홀의 창조적 인생
아서 단토 지음, 이혜경 엮음, 박선령 옮김 / 명진출판사 / 2010년 8월
6,500원 → 5,850원(10%할인) / 마일리지 32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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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토의 책이라곤 하지만 거의 무관하게 편역된 책.
일상적인 것의 변용
아서 단토 지음, 김혜련 옮김 / 한길사 / 2008년 5월
27,000원 → 24,300원(10%할인) / 마일리지 1,3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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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미학
아서 단토 지음, 김지원 옮김 / 종문화사 / 2007년 4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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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쌀쌀해졌다. 하긴 겨울도 두 주밖에 안 남았고, 이번주에 첫눈이 내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몸도 계절을 따라가는지 조금만 움직여도 피로하다. 겨울에는 동면이라도 해야 할 모양이다. 돌이켜보니 훨씬 더 젊은 시절에도 11월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달이다. 마치 월요일 출근을 앞둔 일요일 저녁을 떠올려주는 달이라고 할까.

 

 

 

잠시 감상을 접어두고, '이주의 고전'을 고른다(이건 그때그때 고른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 작가 엘리자베스 개스켈(풀네임으론 엘리자베스 클래그헌 개스켈)의 사회소설 <남과 북>(문학과지성사, 2013)이 출간됐다. 제목이 <남과 북>이어서 미국소설인 줄 알았더니 19세기 중반 영국사회의 그늘을 조명한 사회소설로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1854)과 같은 해에 디킨스가 주관하던 주간 문예지에 발표됐다. 단행본 출간은 1855년으로 <메리 바턴>에 이은 작가의 두번째 '사회소설'이다(국내에 먼저 소개된 <크랜포드>는 1853년에 출판한 소설. 이건 사회소설로는 분류되지 않는 모양이다). 원래는 주인공의 이름을 따 제목을 <마거릿 헤일>이라고 지으려고 했지만 편집자 디킨스의 의견을 좇아 <남과 북>이 됐다고 한다. 어떤 소설인가.   

빅토리아 시대의 제인 오스틴이라 불리는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소설. 개스켈은 작품 속 인물의 관찰에 유머와 도덕적 판단을 혼합시킨다는 점에서 한 세대 앞선 영국의 대표적 여성 작가 제인 오스틴과 자주 비교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산업화의 어두운 그늘을 조명하는 사회적 시각에서 차별성을 가진다. < 남과 북>은 19세기 영국 산업혁명 시기를 배경으로 남부의 전통적인 토지 귀족과 북부의 신흥 공장지대 사람들, 그리고 자본가와 임금노동자들 사이에서 빚어지던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갈등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개스켈은 로맨스의 갈등구조를 통해 신흥 자본가와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대조적인 삶을 보여주고 산업화가 만들어낸 노동문제를 고발한다. 뿐만 아니라 진취적인 마거릿을 내세워 여성의 권익 문제, 사랑과 종교적 신념, 대립 구도를 초월하는 인간애 등 우리가 살아가며 피할 수 없는 삶의 모습들을 포괄적으로 보여준다.

내년에 디킨스의 소설들을 강의차 읽을 계획을 갖고 있는데, 그때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 싶다. '빅토리아 시대의 제인 오스틴'으로 불린다지만, 개스켈은 '샬럿 브론테의 친구'로도 알려져 있고, 실제로 <샬럿 브론테의 전기>를 쓴 걸로 유명하다.

 

 

 

그밖에 <실비아의 연인들>, <사촌 필리스> 등의 장편소설과 수십 편의 중단편을 갖고 있으니 당대의 대표적 작가였겠다.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개스켈의 소설들은 다수가 영화화됐다. 영화 <남과 북>도 구해봐야겠다...

 

 

13.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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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일정을 시작하기 전에 '이주의 책'을 골라놓는다. 타이틀은 백영서 교수의 <핵심현장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묻다>(창비, 2013)에서 가져왔다. "전작 <동아시아의 귀환> 출간 이후 10여 년이 지나 펴낸 이번 책은 ‘동아시아란 무엇인가’라는 여전히 논쟁적인 질문을 던진다." 

 

 

<동아시아의 귀환>의 부제가 '중국의 근대성을 묻는다'였다면 이번 책의 부제는 '공생사회를 위한 실천과제'로 돼 있다. 한일간의 외교적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하는 시점이라 '공생사회'에 대한 구상이 멀게만 느껴지지만, 그럴수록 문제의식과 질문은 더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다. 10여 년간 무엇이 달라진 것인지 확인해볼 수 있는 책이다.

 

 

두번째 책은 대니얼 R. 헤드릭의 <과학기술과 제국주의>(모티브북, 2013)이다. 저자는 전작 <정보화 혁명의 세계사>(너머북스, 2011)로 먼저 소개됐던 역사학자로 '기술사, 환경사, 국제관계사'가 주 전공분야라 한다. <과학기술과 제국주의>는 제목만으로 대략적인 내용을 어림하게 해주는데, "19세기 유럽 제국주의와 기술의 관계를 다루는 책이다. 저자는 그동안의 제국주의 논의에서 기술이라는 요소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것에 문제 제기를 한다. 유럽 제국주의 논의에서 기술이 다루어져 온 과정을 일별한 후 기술 변화라는 수단과 제국주의라는 동기가 상호 작용하는 과정을 통해서 과학기술과 제국주의의 관계를 새롭게 볼 것을 제안한다."

 

 

세번째 책은 '분석적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적 학자 제럴드 앨런 코헨의 <이 세상이 백명이 놀러온 캠핑장이라면>(이숲, 2013)이다. 부제는 '어느 사회주의자의 유언'. 저자의 마지막 책이란 뜻이겠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수였던 저자는 죽기 전 남긴 한 편의 우화와 같은 이 캠핑장 이야기를 통해 사회주의는 정치경제적 이념이나 수단이기에 앞서 ‘평등과 공동체 정신’의 사회 윤리가 되어야 하고, 돈의 지배를 막는 마지막 양심이 되어야 하며, 우리 모두 선한 삶, 서로 나누고 돌보는 삶의 가능성을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저자가 먼저 소개됐던 <카를 마르크스의 역사이론>(한길사, 20111)과 같이 묵직한 책만 쓴 건 아니란 걸 알려준다. 사실 이번 책도 원제는 <사회주의가 왜 안돼?(Why Not Socialism?)>이다.

 

 

네번째 책은 박재선의 <100명의 특별한 유대인>(메디치, 2013)이다. 전직 외교부 대사인 저자는 '유대인 연구의 선구자'라고도 일컬어진다. <세계를 지배하는 유대인 파워>(해누리, 2010)에 이어서 유대인 인명사전으로도 읽을 수 있는 책을 펴냈다. 책은 "익숙한 유대인과 낯선 유대인, 착한 유대인과 나쁜 유대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영역을 망라하여 총 100명의 유대인을 엄선했다. 노스트라다무스에서 르윈스키에 이르기까지 유대인 역사를 인물 중심으로 흥미롭게 조명했다. 저자는 유대인을 일방적으로 칭송하거나 폄하하지 않는, 균형감 있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유대인을 바라본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에드워드 B. 고든의 <베를린을 그리다>(북노마드, 2013). 일단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고른 책인데, 저자가 특이하다. "에드워드 B. 고든, 그는 매일 베를린을 그린다. 2006년 가을부터 ‘하루에 하나의 그림’이라는 자신만의 프로젝트로 15x15cm의 캔버스에 매일 베를린을 그려왔다. 자신의 블로그에 매일 새로운 작품을 올려 사람들이 감상하고 구매할 수 있게 했다. 이 책 <베를린을 그리다>에는 지난 7년간 쌓인 수많은 작품 중 에드워드 B. 고든 본인이 직접 선별한 그림들을 담았다." 오랜만에 손에 들고픈 화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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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현장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묻다- 공생사회를 위한 실천과제
백영서 지음 / 창비 / 2013년 11월
16,000원 → 15,200원(5%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5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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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과 제국주의
대니얼 R. 헤드릭 지음, 김우민 옮김 / 모티브북 / 2013년 11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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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세상이 백 명이 놀러 온 캠핑장이라면- 어느 사회주의자의 유언
제럴드 앨런 코헨 지음, 조승래 옮김 / 이숲 / 2013년 11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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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00명의 특별한 유대인- 희생자인가, 지배자인가?
박재선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3년 11월
21,000원 → 18,9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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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중앙선데이에 실은 '로쟈가 푸는 '문학을 낳은 문학''을 옮겨놓는다(편집부의 손을 거친 원고다). 이번에 다룬 작품은 '체호프판 <햄릿>'으로서의 <갈매기>이다.

 

 

 

중앙선데이(13. 11. 17) 비극보다 더 잔혹한 희극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된 희곡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다. 놀랍진 않다. 다들 그럴 만하다고 생각할 테니까. 심지어 햄릿은 셰익스피어보다도 더 유명하다는 주인공 아닌가.

 

 



그럼 두 번째로 많이 공연된 작품은? 이건 정확한 통계가 필요할지 모르겠지만,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라고 한다. 아마도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유명한 극작가의 대표작이니만큼 의외라곤 할 순 없다. 흥미로운 것은 『갈매기』가 ‘체호프 판 『햄릿』’이라는 점이다. 『햄릿』의 핵심 테마를 체호프적으로 다룬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럼 무엇이 『햄릿』의 테마인가? 읽으면 읽을수록 복잡한 작품이지만, 보통 시해당한 부왕 햄릿에 대한 아들 햄릿의 복수를 계속 지연시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이 비극의 무게중심에 있다. 흔한 ‘복수극’이면서 동시에 이례적인 ‘복수 지연극’인 것이다. 부왕 햄릿이 살해당하자 왕위는 그 동생 클로디어스에게 넘어간다. 클로디어스는 국정을 정상화한다는 명분으로 형수인 거트루드와 곧바로 결혼식을 올린다. 졸지에 숙부를 계부로 갖게 된 햄릿은 어머니 거트루드의 처신이 못마땅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라는 햄릿의 유명한 대사는 그런 어머니를 비난하는 독백에 나온다. 햄릿에게 어머니는 애증의 대상인 것이다.

체호프의 『갈매기』에는 부왕의 유령도 등장하지 않으며 아버지의 복수도 펼쳐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햄릿』을 떠올리는 건 주인공 트레플료프와 그의 어머니 아르카지나의 관계 때문이다. 아르카지나는 한때 유명했던 여배우로 중년이 된 지금은 연하의 소설가 트리고린을 정부로 두고 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던 트레플료프이지만 성인이 돼서도 그 갈구는 충족되지 않는다. 1막에서 아마추어 극작가인 자신이 쓴 희곡에 대해 어머니가 맘에 들어 하지 않을 거라고 트레플료프가 투덜거리자 옆에서 듣던 숙부가 그렇지 않다고 위로의 말을 건넨다. 그때 트레플료프는 꽃잎을 하나씩 뜯어내면서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중얼거리며 어머니의 사랑을 점친다. 아들의 핵심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관심인 것이다.

트레플료프는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건 나르시시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스물다섯의 장성한 아들이 옆에 있으면 아르카지나는 아직도 서른둘로 보이는 ‘여배우’가 아니라 마흔셋의 ‘어머니’가 된다. 여전히 여배우로서의 존재감을 누리고 싶어 하는 아르카지나에게 아들은 거추장스러운 존재다. 차라리 어머니가 평범한 여자였다면 아들은 더 행복했을 것을, 트레플료프는 비참하기만 하다.

 

 



그런 아들과 어머니가 『갈매기』에서 주고받는 첫 대사가 바로 『햄릿』의 3막에 나오는 햄릿과 거트루드의 대사다. 어머니의 침소를 찾아와 부왕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수준이 떨어지는 숙부와 결혼한 행실을 맹비난하는 햄릿에게 거트루드는 말한다. “내 아들아! 너의 눈이 내 영혼 깊은 곳을 보고 있구나. 내 영혼이 상처 입고 피범벅이 되어 있는 모습이 나에게도 보이니 구원받을 길은 없구나!”

아르카지나가 이 대사를 반복하는 것은 아들의 시선에서 트리고린과 거리낌 없이 동행하는 자신에 대한 비난을 읽었기 때문이리라. 이에 대해 트레플료프는 역시나 햄릿의 대사로 받는다. “어찌하여 당신은 악덕에 몸을 맡기셨나요? 어째서 그런 죄악의 심연에서 사랑을 찾았나요?”

어머니에 대한 트레플료프의 원망은 과연 어떤 행동으로 이어질까? 『햄릿』을 닮았다면 『갈매기』 역시 비장한 결말로 끝나야 할 테지만 정반대다. 체호프는 『갈매기』가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라고 못 박았다. 그런데 희극으로 공연했을 때 성공한 사례가 드물어서 『갈매기』의 희극성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는 난제이지만, 햄릿과 트레플료프의 비교는 시사해 주는 바가 적지 않다. 햄릿은 우유부단함이라는 꼬리표가 달린 인물이지만 결국엔 부왕의 복수를 결행한다. 그러나 트레플료프는 자살 시도도 처음엔 실패하고 트리고린과 결투하겠다는 의지도 말로만 떠벌리다 만다. 오히려 그가 사랑하는 이웃 처녀 니나마저 트리고린에게 빼앗기는 처지가 된다.

배우 지망생인 니나는 트레플료프가 쓴 연극의 주연으로 등장하는데, 처음부터 그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니나는 유명 작가에 대한 선망 때문에 트리고린을 사랑하게 되고 그와 동거하여 아이까지 낳는다. 하지만 아이는 죽고, 사랑이 식은 트리고린은 옛 애인 아르카지나에게 다시 돌아간다. 그럼에도 지방 공연을 전전하던 무명배우 니나는 2년 만에 다시 만난 트레플료프에게 배우로서의 자부심을 토로함과 동시에 트리고린에 대한 여전한 사랑을 고백한다. 잔인한 일이지만 트레플료프는 어머니의 사랑과 애인의 사랑 모두를 트리고린에게 빼앗긴 셈이다. 그것도 완벽하게.

결국 트레플료프는 자살한다. 그의 자살은 무대 위에서가 아니라 무대 뒤에서 총성만 울리는 것으로 처리된다. 이렇게 체호프의 희극은 셰익스피어의 비극보다도 더 잔혹하다.

 

13.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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