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에 실린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독일 작가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열린책들, 2011)를 읽고 적었다. 전혜린의 유고 에세이집 제목으로도 유명한 작품이지만 현재는 번역본이 한 종밖에 나와 있지 않다. 영어본도 절판된 상황이어서 구해본 건 시사영어사에서 나온 대역본인데, 발췌본이다. 열린책들판 번역에 아쉬운 대목이 있어서 전혜린 번역의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백만사, 1980)도 도서관에서 빌려 참고했다. 전혜린본은 동민문화사(1967)판이 최초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14. 04. 21) 폐허 속 희망을 본 하인리히 뵐
 
전후 독일문학의 양심으로도 불린 하인리히 뵐의 초기 대표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53)를 읽었다. 어떤 독자에게는 전혜린의 유고 에세이집 제목으로도 친숙할지 모르겠다. 전혜린은 뵐의 작품을 유고 번역으로 남겨놓았기에 인연이 없지 않다. 법과대학에 재학중이던 전혜린이 ‘새로운 땅’ 독일로 유학을 떠난 해가 1955년이었다. 한국전쟁의 상흔을 뒤로하고 떠난 독일에서 전후문학의 기수가 쓴 ‘폐허문학’과 조우한 것이라고 할까. 
 
1952년이 시간적 배경이지만 2차 대전 패전국의 상처는 다 아물지 않았고 주인공 프레드와 캐테 보그너 부부의 삶은 여전히 고달프다. 무엇보다도 가난이 일상을 짓누르며 이웃의 편견이 고통을 배가시킨다. 가톨릭교회의 유력한 신자이자 주택위원회 회장이기도 한 집주인 프랑케 부인이 프레드가 술주정뱅이이고 캐테가 성당의 단체 행사에 적극 참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부부의 주택 신청을 거부하는 바람에 사정은 더 나빠졌다. 
 
프레드는 성당의 전화교환수로 일하지만 박봉이어서 부업으로 과외까지 병행한다. 그는 폭력을 본능적으로 혐오하지만 다섯 식구가 단칸방에 살면서 마음이 여유를 잃다 보니 사소한 일로 아이들에게 손찌검까지 한다. 그는 더 참지 못하고 두 달째 가족과 떨어져 지낸다. 아이들과 남은 캐테의 일상은 더러움과의 투쟁으로 채워진다. 장롱을 조금만 움직여도 회칠한 벽에서는 석회 덩어리가 우수수 떨어지기에 하루에도 몇 번씩 걸레질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구역질나는 현실 속에서 ‘신’이라는 단어만이 자신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여기는 캐테야말로 진정한 신자다. 캐테는 프랑케 부인과 같은 사람들이 ‘하느님 장사’를 하는 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부부라고는 하지만 한 집에 살지 않으므로 프레드와 캐테는 가끔씩 바깥에서 만나 밤을 보낸다. 값싼 호텔에라도 하룻밤 묵으려면 프레드는 여기저기 돈을 빌리러 다녀야 하는 형편이다. 이들에게 희망이 있을까. 오랜만에 만난 주말에 아내는 헤어지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말을 꺼낸다. 가난은 그렇게 부부의 사랑까지 파괴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작가 뵐은 냉정한 현실을 과장 없이 묘사하면서도 동시에 회복의 길도 제시한다. 
 
상이군인인 아버지, 바보 동생과 같이 살아가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이웃에게 친절을 베푸는 간이식당의 소녀에게서 프레드가 감동을 받았다고 하자 캐테는 자신도 그런 감동을 준 적이 있는지 묻는다. “그런 적은 없지만 내 마음을 돌린 적은 있어. 내가 아주 심하게 아플 때였지.”(열린책들) 오래전 전혜린의 번역본에서는 “당신은 내 심장을 건드리질 않고 뒤집어엎어 버렸어. 나는 그때 아주 병이 나 있었어, 그 때문에.”라고 옮긴 대목이다.
 
프레드의 나이가 썩 젊지 않았던 때였음에도 캐테는 프레드의 마음을 뒤집어엎은 전력이 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결혼한 것이기도 하다. 그때의 감정을 상기하면서 가난에 무뎌진 프레드의 열정은 다시 회복된다. 이튿날 길거리에서 어떤 여자의 모습을 보고 심장이 멎는 듯한 감동과 흥분을 느끼며 뒤쫓아 가는 게 그 증거다. 한데 놀랍게도 그 여자는 아내 캐테였다. “15년간 결혼생활을 해온 내 아내는 여전히 내게 낯선 동시에 또 무척 낯익게 생각되었다.” 이 소설이 프레드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아주 당연해 보인다. 뵐이 암울한 폐허 속에서 발견한 은총인지도 모른다. 
 
14. 04. 20.
 
P.S. 인용한 대목에 대해 좀더 자세히 적으면 보그너 부부의 대화장면을 열린책들판은 이렇게 옮겼다. 

"나도 당신 마음을 감동시킨 적이 있나요?"
"그런 적은 없지만 내 마음을 돌린 적은 있어. 내가 아주 심하게 아플 때였지. 그리 젊지 않을 때였고." 나는 말했다.(191쪽)

시사영어사에서 나온 대역판은 이렇게 옮긴 대목이다. 

"Did I also touch your heart?"
"You didn't touch my heart, you turned it upside down. It made me quite ill at the time. I wasn't young any more," I said.
"나도 당신을 감동시켰어요?"
"당신은 날 감동시킨 게 아니라 내 가슴을 발칵 뒤집어 놓았었지. 그래서 그때 난 아주 앓았었지. 이미 젊은 나이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나는 말했다. 

이 대목만큼은 시사영어사판 혹은 영어판이 열린책들판보다 더 적합한 번역으로 보인다. 오래전 전혜린본에서 '뒤집어 엎어버렸다'고 옮긴 것과도 상응하고. 독어 원문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요는 '마음을 감동시키다'보다 더 강한 표현이어야 하고, 그 결과로 프레드가 한바탕 가슴앓이를 했다는 내용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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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권의 철학서를 관심도서로 올려놓는다. 둘다 일본인 저자의 책이라는 점이 공통적인데, 나카지마 요시미치의 <철학의 교과서>(지식의날개, 2014)와 와시다 키요카즈의 <듣기의 철학>(아카넷, 2014)가 그 두 권이다. 나카지마는 구면이고 와시다는 초면이다.

 

 

나카지마 요시미치의 책은 중복도서까지 포함하면 일곱 권이 번역됐고 <철학의 교과서>만 하더라도 <일하기 싫은 당신을 위한 책>(신원문화사, 2011)과 <인생 반 내려놓기>(21세기북스, 2013)에 이어지는 것이니까 출판계에서 선호하는 저자군에 속한다. '철학의 교과서'란 제목은 오히려 식상해서 눈에 띄는데, 저자의 말로는 "이 책은 철학에 '교과서' 따위가 있을 리 없다는 이야기를 풀어내어 이해시키려는 '철학의 교과서'"라고. 역설이지만 그래서 좀더 미덥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프롤로그를 보니 저자는 대부분의 '철학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내용으로 두 가지만 꼽는다. "하나는, 철학이란 순수한 의미로 볼 때 '학문'의 영역이 아니므로 그 책을 집필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세계관이나 현실적 감각이 녹아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세상에 넘쳐나는 철학 입문서들은 하나같이 철학을 너무도 무해하고 품행방정하며 훌륭한 것으로 과대 포장하고 있다는 점". 저자의 생각은 이렇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철학이란 약간을 병적이고, 흉포하고, 위험천만하며, 반사회적 성향이 강한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왜 죄악인가? 인류가 우주에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나는 결국 죽는다... 등등의 한탄과 독백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질적 물음에 고통받고 끌려다니며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힘겨워하던 사람이, 물귀신처럼 다른 사람을 그 개미지옥에 끌어들이려는 속셈으로 써내려간 이 책이야말로 진짜 철학의 '교과서'가 아닐까요?

그런 생각에 동감하는 독자라면 모처럼 친구 혹은 원군을 얻은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겠다.

 

 

 

<듣기의 철학>은 <철학의 교과서>에 비하면 조금더 '전문적'이란 인상을 준다. 전공이 논리학이라고 소개되지만 <얼굴의 현상학>, <현상학의 시선> 등의 저작을 갖고 있다는 와시다는 현상학 쪽의 전문가로 보인다. '듣기의 철학'이란 문제의식도 '현상학적'이고. 거기에 교육에 대한 관심도 얹어진다. 학생들에게 질문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는 것. 저자의 문제의식에 대한 소개는 이렇다.

저자는 ‘듣기’가 타자의 말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며, 동시에 말하는 이에게 자기이해의 장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 그 행위에서 어떤 힘을 느낀다고 덧붙인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가 ‘산파술’, 또는 ‘시중드는 사람’이라 불렀던 그 힘을 말이다. 저자는 ‘듣기’라는 행위가 가진 철학적 힘을 밝히고자 다양한 시도를 한다. 그리고 철학이 복원해야 할 것이 이렇게 귀를 여는 것이라 이야기한다. 고통받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위안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누군가’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의 시작과 끝을 다른 사람과 함께한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함께 있다는 사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듣기의 철학은 이것을 일깨우는 것이다. 말을 줄이고 겸허한 마음으로 타자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마음이다.

리쾨르 전문가이기도 한 현상학자 돈 아이디의 <소리의 현상학>(예전사, 2010)이 떠오르는데, 맥락은 좀 다르지만 듣기는 청각과 관련되는 만큼 연관성이 없지도 않겠다(아이디의 책은 <테크놀로지의 몸>(텍스트, 2013)도 소개돼 있다. 기술과 신체 등도 현상학 쪽 철학자들의 주요 관심사다). <소리의 현상학>은 벌써 절판됐군... 

 

14. 04. 20.

 

 

 

P.S. 철학분야의 책으로 지난달에 미처 언급하지 못한 관심도서는 로이 브랜드의 <지식애>(책읽은수요일, 2014)다. "소크라테스에서 데리다까지 허무와 냉소를 지식에 대한 사랑, 즉 지식애를 통해 극복해온 철학자 6인의 삶과 철학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담은 책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소크라테스의 변명>(<변론>)과 <향연>, 스피노자의 <윤리학>,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니체의 <도덕의 계보>, 푸코의 <성의 역사>, 그리고 데리다의 <나는 여기에 있다>까지가 저자가 다루는 텍스트들이다. 봄날의 철학적 산책에 가장 어울릴 만한 동반자.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의 추천사도 참고할 만하다.

격조 높은 책이다. 왜 모든 인간이 결핍을 느끼는지, 왜 지식에 대한 열정을 지녀야 하는지와 같은 오래된 철학적 질문을 우리들의 삶의 문제로 끌어들인다. 당신이 아직 철학을 사랑해본 적이 없다면, 아마도 이 책을 읽는 동안 철학과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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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중앙선데이에 실은 '로쟈의 문학을 낳은 문학'을 옮겨놓는다. 보르헤스의 단편 '페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를 조명하는 글이다. 당연히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없었다면 쓰이지 못했을 작품. 그렇지만 보르헤스는 또 보르헤스식의 기상천외한 단편을 썼다. 문학 독자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작품이지만, 생소한 독자들도 있을 듯하여 이 연재에서 다뤘다.

 

 

 

중앙선데이(14. 04. 20) 다시 쓰기는 베끼기인가 창조인가

 

보르헤스의 미학이 가장 압축적으로 제시된 작품은 『픽션들』에 수록된 단편소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1939)다. 『돈키호테』의 저자는 세르반테스 아니냐고? 물론이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또 다른 저자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가 우리에게 안내하는 이야기의 미궁은 어떤 것인가. ‘메나르의 진정한 친구들’의 일원임을 자임하는 소설의 화자는 메나르가 남긴 작품들의 목록을 정리하면서 유작들 가운데 특별히 『돈키호테』를 자세히 언급한다.

화자가 ‘우리 시대에서 가장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칭찬하고 있는 메나르의 『돈키호테』는 세르반테스가 쓴 『돈키호테』의 “1권 9장과 38장, 그리고 22장 일부”로 구성돼 있다. 세르반테스의 걸작에 대한 ‘다시 쓰기’를 시도한 것인가? 놀랍게도 메나르의 기획은 현대판 『돈키호테』를 쓰는 게 아니라(“그것은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돈키호테』자체를 쓰는 것이었다.

가령 『돈키호테』 9장에서 세르반테스는 “역사는 ‘진실’의 어머니이자 시간의 적이며, 행위들의 창고이자 과거의 증인이며, 현재에 대한 표본이자 조언자이고, 미래에 대한 상담자다”라고 썼다. 보르헤스의 화자에 따르면 이것은 17세기 작가가 쓴, 역사에 대한 단순한 수사적 찬양에 불과하다. 이것을 메나르는 “역사는 ‘진실’의 어머니이자 시간의 적이며, 행위들의 창고이자 과거의 증인이며, 현재에 대한 표본이자 조언자이고, 미래에 대한 상담자다”라고 다시 쓴다. 똑같은 거 아니냐고? 맞다, 똑같다. 그런데 다르다.

텍스트 차원에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메나르의 『돈키호테』 사이에는 아무 차이도 없지만, 그것을 쓰는 행위에서는 두 작품 간에 차이를 빚어낸다. 문체를 예로 들자면, 자기 시대의 스페인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했던 세르반테스와 달리 20세기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메나르에게 17세기 스페인어 문장은 고어체인 데다 다소 부자연스럽기까지 하다. 결과적으로 동일한 텍스트라 하더라도 그 텍스트를 읽는 지평이 달라짐에 따라 작품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메나르는 자신의 ‘자상한 선구자’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쓴 것은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세르반테스는 익숙한 언어와 타성적인 상상에 이끌려 약간 마구잡이로 그 불멸의 작품을 써 내려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메나르 자신은 이 우발적인 작품을 문자 그대로 다시 쓰는 ‘신비로운 의무’를 수행했다. 그렇게 새롭게 쓰인 『돈키호테』에 대해 ‘명민하지 못한’ 독자들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글자 그대로 옮겨졌다’라고 우길 테지만, 화자의 생각은 다르다. “피에르 메나르의 작품은 세르반테스의 작품보다 거의 무한할 정도로 풍요롭다. 그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더 ‘모호’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모호성은 풍요로움이다.”

 



이렇게 보르헤스는 피에르 메나르라는 가상의 인물을 『돈키호테』의 또 다른 저자로 창조해 낸다. 이것은 보르헤스의 창작 방법에 친숙한 독자라면 전형적인 ‘수작’임을 눈치챌 수 있다. 존재하지 않는 작가와 소설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논평하는 것이 보르헤스의 장기이니 말이다. “메나르는 (아마 자기도 모르게) 새로운 기법-계획적인 시대착오와 잘못된 원저자 설정-을 통해 꼼꼼하게 흔적을 남기는 기술인 독서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저자는 마치 신처럼 작품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간주돼 왔지만, 정작 작품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독서라면 저자는 한갓 기능으로 전락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구호는 그렇게 해서 탄생한다. 그리고 보르헤스는 그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그런데 ‘다시 쓰기’ 전략을 통해 저자와 텍스트의 관계를 유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세르반테스야말로 원조가 아닐까?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자신이 직접 지은 것이 아니라 아라비아의 역사학자 베닝헬리가 쓴 글을 각색한 작품이라고 했다. “이 텍스트의 진실성 여부에 대해 굳이 문제를 삼자면 아마도 작가가 아라비아 사람이라는 게 문제일 것이다. 아라비아인들은 천성적으로 거짓말을 잘하기 때문이다. (…) 이 이야기에서 유익한 것이 빠져 있다면 주제의 문제가 아니라 알량한 작자에 의해 기술된 탓이라고 생각한다.” 베닝헬리는 물론 세르반테스가 창조한 가공의 인물이다. 화자에 따르면 베닝헬리의 ‘원작’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아라비아어 원문을 스페인어로 옮긴 무명의 번역자도 중간에 끼게 되기에 이 작품의 ‘저자’는 여럿이 된다.

보르헤스는 비록 세르반테스처럼 방대한 분량의 장편소설을 쓸 생각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문학적 유희 정신을 충실히 계승한 상속자다. 그는 유명한 자전적 산문의 제목을 ‘보르헤스와 나’라고 붙였는데, 세르반테스 역시 ‘세르반테스와 나’라는 글을 남겼다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겠다. 세르반테스야말로 작가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그런 가면을 쓰고서 연기할 줄 아는 작가였기 때문이다.

 

14. 0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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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만 나오는 뉴스들을 듣다가 스트레스 지수만 높아졌다. 독서에 집중하기도 어려워서 책상 정리를 한바탕 하고 페이퍼를 적는다. '이주의 저자'를 고른다. 국외 저자로만 골랐는데, 에릭 오르세나를 제외하면 단골로 다루게 되는 저자들이다.

 

 

먼저 스티븐 제이 굴드. '자연학 에세이' 시리즈의 3권이 출간됐다.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현암사, 2014). "이 책에 실린 에세이들은 굴드의 끝없는 지식욕의 다채로움을 보여준다. 그는 홈그라운드인 과학과 과학사의 경계를 넘어 철학, 신학, 종교, 야구, 미술, 소설, 광고, 영화, 학생들의 은어, 심지어 자신의 병까지 온갖 이야깃거리를 동원해 지적 곡예를 벌인다. 그가 인용한 마크 트웨인의 “내 부고는 대단히 과장된 것이다”(689쪽)라는 농담처럼 굴드의 희대의 낙천적 지식은 독자에게 독서의 묘미와 기쁨을 전한다."

 

 

 

<여덟 마리 새끼 돼지>부터 <플라밍고의 미소>,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까지 꽤 보기 좋은 '컬렉션'이다. 몇 권 더 남은 굴드의 책이 마저 소개될지는 모르겠지만, 산뜻한 지적 포만감을 제공한다. 하던 대로 이번에도 원서를 주문해야겠다(한국어판의 표지가 더 낫군).  

 

 

 

그리고 두번째는 직함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헷갈리는 프랑스의 지성 에릭 오르세나. 소설과 논픽션을 오고 가는데, 이번에 나온 건 '인류가 만든 가장 위대한 발명품 종이의 탄생과 발전의 역사를 심도 있게 추적한 일생일대의 역작'으로 소개되는 <종이가 만든 길>(작은씨앗, 2014)이다. 소개는 이렇다.

 

에릭 오르세나의 종이 이야기. 종이를 맨 처음 발명한 '사람들'에서 시작해 오랜 세월 동안 중국대륙 안에 머물러 있던 종이가 어떻게 아랍을 거쳐 유럽대륙으로, 더 나아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갈 수 있었는지 이야기한다. 그리고 AD 8세기에 아랍에 전파된 종이가 대체 어떤 이유에서 그보다 무려 500여 년이나 뒤쳐진 AD 13세기나 되어서야 비로소 유럽에 전해지게 되었는지 그 놀랄 만한 정치적.사회적 배경과 맥락을 놓치지 않고 명확히 짚고 넘어간다. 그 밖에도 인간의 영원한 적인 박테리아를 제거할 수 있는 바이러스를 종이 속에 영원히 고정시키는 기술, 전자출판에 관한 고찰, 종이를 위한 위생이나 온도와 관련된 최신 기술과 같은 특별하고도 유용한 지식을 담아 전수한다. 또한 마르셀 프루스트와 루이 파스퇴르 등의 세계적인 문학가 및 과학자에게 생명과도 같은 존재였던 그들의 '원고'를 둘러싼 재미있는 이야기들, 괴도 루팡이나 셜록 홈스 시리즈보다 더 흥미진진하고 드라마틱한 프랑스 '위조지폐 제조왕' 보자르스키의 이야기도 들려준다.

책이 아닌 종이의 역사를 더듬어간다고 할까. <물의 미래>나 <코튼로드>와 같은 계열의 책으로 읽을 수 있겠다(<코튼로드>는 절판됐다).

 

 

 

말이 나온 김에 오르세나의 소설들에 대해서도. 책들을 모아두기만 하고 아직 펼쳐보진 못했는데, 재작년에 나온 <오래오래>(열린책들, 2012)를 비롯해서 <문법은 아름다운 노래>(미디어2.0, 2006), <두 해 여름>(열린책들, 2004) 등이 소개돼 있다. <두 해 여름>은 번역과 번역가에 관한 소설로도 흥미를 끄는데, "한 번역가가 외딴 섬에서 나보코프가 만년에 쓴 소설 <에이다 또는 아더 Ada or Ardor>를 번역하면서 겪는 소소한 사건들을 그린 이 책은 작가가 젊은 시절 체험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감정사회학자 에바 일루즈. 첫번째 책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이학사, 2014)에 연이어 최신간 <사랑은 왜 불안한가>(돌베개, 2014)도 번역돼 나왔다. '하드 코어 로맨스와 에로티시즘의 사회학'이 부제. 전작 "<사랑은 왜 아픈가>로 한 번쯤 사랑의 고통에 몸살을 앓아본 사람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은 저자는 이번에는 '사랑의 심리학'을 넘어서는 '사랑의 사회학' 연구를 이어나간다. 이번에 일루즈가 분석대상으로 삼은 분야는 ‘하드코어 로맨스’, 그중에서도 사도마조히즘이다." 

 

 

 

'하드코어 로맨스'라고 하면 뭔가 싶겠지만, 영국 등지에서 '주부를 위한 포르노'로 화제를 모았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시리즈를 가리킨다(박스세트로 전6권이군). 일루즈는 이렇게 말한다. "‘그레이 시리즈’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오늘날 남성과 여성의 성관계를 특징짓는 숱한 난제가 무엇인지 명확히 드러냈으며, 주인공들의 사도마조히즘적 관계가 이 난제의 상징적 해결책인 동시에 극복 방법이기도 하다는 점을 제시했다는 것이, 내가 펼치는 주장의 골자다. 그러나 다시금 좀 더 정확히 물어보자. 소설이 그 시대의 신경줄을 건드리려면 과연 어떤 요구조건을 채워줘야 할까?" 책에 대한 서동진 교수의 추천사가 명쾌하다.

에바 일루즈가 다시 돌아왔다. 감정사회학의 달인답게 그녀는 E. L. 제임스의 메가 베스트셀러이자 19금 사도마조히즘 로맨스인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솜씨 좋게 요리한다. 사도마조히즘적인 관계 그리고 진정한 사랑. 두 항은 절대 양립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자율성과 평등이라는 요구가 불러일으키는 현기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일루즈는 이 난관을 넘어설 해법으로 사도마조히즘적인 섹스가 자리잡는 과정을 추적한다. 후기 근대적인 세계에서의 사랑, 그것의 역설을 그녀보다 더 명쾌하게 풀이하는 이도 없을 것이다.

    

 

원서의 표지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점잖아 보이는데, 거울과 수갑이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시리즈의 독자나 감정사회학에 관심 있는 사회학도들은 필독해봐야겠다...

 

14. 0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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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출판문화진흥원에서 펴내는 월간 책&(426호)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로쟈의 주제별 도서 소개' 꼭지가 '인문학 서재'로 바뀌었고, 이달의 주제로는 '한국문화 바라보기'를 골랐다. 세 권의 관련서를 간단히 소개한다(덧붙이자면, 한국식 재난대응 문화를 다룬 책도 나옴직하다. 이렇게 주먹구구식인 것도 '문화'라면 말이다).

 

 

 

책&(14년 4월호) 한국인이 한국문화를 모른다?

 

한국인이 한국문화를 모른다? 물론 그렇게 등잔 밑이 어두운 이유는 여럿 있을 것이다. 친숙하기에 그냥 지나치거나 막연히 잘 안다고 생각하는 자신감이 주의를 소홀하게 만든다. 거기에다 습관적인 망각도 우리의 무지에 일조한다. <우리도 몰랐던 우리 문화>(인물과사상사, 2014)를 계기로 우리가 놓치거나 간과한 우리문화의 이모저모에 대해서 일러주는 몇 권의 책을 책장에서 빼내보았다. 


먼저, <우리도 몰랐던 우리 문화>는 ‘화장실의 역사’부터 ‘립스틱의 역사’까지 아홉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얼핏 사소해 보이는 주제들이지만 우리 근‧현대 문화사 속의 일상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 일례로 화장실을 보자. 전통적인 뒷간 혹은 변소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한 건 1920년대였다고 한다. 일제가 조선의 화장실을 개혁 대상으로 꼽았기 때문이다. 위생을 명목으로 재래식 화장실을 개량하고 요강을 폐지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단기간에 개량될 일은 아니었다.


해방 이후에도 서울역 공용변소의 분뇨와 악취 문제가 단골기사로 등장할 만큼 화장실 문제는 오랜 골칫거리였다. 그러다 1950년대 말 아파트가 등장하면서 화장실문화도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수세식 화장실이 등장하면서부터다. 하지만 수세식 화장실은 아직 일반 대중이 넘겨다보기 어려운 호사였고 공중화장실 문화는 여전히 낙후돼 있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1980년대에 ‘화장실 혁명’이 일어난다. 정부의 지원과 압력 하에 전국의 재래식 화장실이 수세식으로 개량된다. 불과 한 세대 전의 일인데, 한국의 도시화와 공업화 과정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진전이 도시 가정 내의 화장실 보급이라고 말해질 정도로 급속한 변화가 이 시기에 이루어진다.


‘한국 문화 교육 전문인’을 자처하는 정수현‧정경조의 <손맛으로 보는 한국인의 문화>(삼인, 2014)는 한국인의 의식주에 관련한 다양한 소재를 한국과 동서양 여러 나라의 문화와 비교하는 관점에서 기술한 책이다. “한국인의 생활상을 흥미롭게 전달해주는 이야기이자, 한국과 한국인이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유익한 길잡이가 되기를 바란다”고 적었는데, 특히 한국 식생활에 대한 비교서술은 이러한 길잡이로서 맞춤하다. 가령 ‘김치 vs. 샐러드’나 국 vs. 수프’ 같은 대비는 우리 식생활 문화의 특징을 단번에 압축한다.


가령 국물을 영어로는 주로 ‘수프(soup)’라고 옮기지만 우리가 아는 대로 국과 수프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음식이다. 국(혹은 탕)은 그 자체가 주 메뉴이지만 수프는 메인 요리가 나오기 전에 제공되는 부수적 음식이다. 조선시대 이후 문헌에 나오는 음식 종류에 구이류가 123가지인데 비해 국류는 204가지나 될 정도로 한국 음식엔 국이 많다. 왜 이렇게 국을 많이 먹을까.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주식인 밥이 빡빡하지 않게 잘 넘어가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고, 둘째는 가난한 하층민이 국으로 배를 채움으로써 적은 밥으로도 포만감을 얻기 위해서라는 것이며, 셋째는 온돌이 발달한 나라에서 온돌에서 남는 열을 이용하다 보니 국물 음식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국은 문화적으로 단순한 먹을거리 이상의 의미도 함축한다. 국은 밥, 반찬과 함께 먹는 음식이기에 ‘관계론적 음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반면에 식전 에피타이저와 메인 요리, 식후 디저트를 각각 따로 먹는 서양음식은 ‘개체론적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국물 음식의 특징은 혼자 먹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나눠먹는다는 데 있고, 이것은 집단의 동질성을 좀더 중요시하는 문화에 상응한다. 우리 식탁에서 국물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 많은 것을 의미하게 되는 이유다.


한국 근대 문학‧문화 연구자인 권창규의 <상품의 시대>(민음사, 2014)는 출세, 교양, 건강, 섹스, 애국 등 다섯 가지 키워드를 통해서 한국 소비사회의 기원을 들여다본 책이다. 처음으로 상품이 유입돼 소비문화가 형성되던 일제 식민지 시기를 그 기원으로 본다. 저자는 주로 신문이나 잡지 기사와 광고 전단지를 자료로 활용하면서 한국인이 소비자와 교양인으로 탄생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일례로, 처음 만난 이성 남녀가 서로의 취미를 물어보는 것도 한국식 문화라면 그 기원은 1920년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1920년대 중반부터야 취미나 취향이라는 말이 많이 쓰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스포츠는 ‘취미 위생’에 속했고, 영화나 연극에 대한 취미는 ‘연예 취미’로 불렸으며, 문학에 대한 관심은 ‘문예 취미’로 일컬어졌다.


문화인 혹은 교양인이란 ‘취미가 있는 사람’과 동의어였기에 취미에 대한 질문은 수준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다. “취미는 독서입니다”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그리고 교양 있는 가정이라면 음악 감상을 권유받았기에 1930년대에 보급된 유성기나 1960년대 초의 전축은 중산층 가정의 지표였다. 1930년대 한 일본축음기의 광고 문구에는 축음기가 ‘가정 단란’과 ‘웃음꽃이 핀 가정’을 선물한다고 했다. 상품은 바뀌고 문구는 조금 달라졌지만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소비문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만들어져왔다.

 

14. 0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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