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연말에 쿠스투리차의 영화 'Life is a miacle'(2004)를 빌미로 하여 "쿠스투리차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요?"란 제목의 모스크바 통신문을 쓴 적이 있다. 주된 내용이 '기적'에 대한 것이어서 다시 정리하는 김에 '기적에 대하여'란 제목을 붙이도록 한다(이 글은 기적에 대한 나의 수다이다).

“지금 나는 졸리지만 자지 않을 것이다. 나는 종이와 펜을 가지고 이야기를 쓸 것이다. 나는 내 안에서 어마어마한 힘을 느낀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어제 이미 다 생각해놓았다. 이것은 기적을 행하는 자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는 우리 시대에 살면서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기적을 행하는 자이며, 어떤 기적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를 아파트에서 쫓아낸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그 아파트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대신 아파트에서 고분고분 떠나 교외에 있는 헛간에서 지낸다. 그는 이 낡은 헛간을 아름다운 벽돌집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계속 헛간에서 살다가, 평생 동안 단 한번의 기적도 행하지 않은 채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이전에 한 차례 인용한 바 있지만, 하름스의 <노파>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앞에서 나는 ‘기적으로서의 삶(Life as a miracle)’과 ‘여행으로서의 삶(Life as a tour)’의 대립양상에 대해서 언급했는데(*단순하게 말하면, 여해에서 기적을 구하는 '여행으로서의 삶'은 '유사-기적으로서의 삶'이다), ‘기적을 행하는 자’에 관한 이야기에서 그는 (1)평생 동안 단 한번의 기적도 행하지 않았다. (2)평생 동안 단 한번의 여행도 행하지 않았다(“계속 헛간에 살다가”)는 걸로 특징지어진다. 이건 변증법적 지양의 길인가, 아니면 제3의 길인가? 이하의 내용은 이 한 대목에 대한 주석의 성격을 갖게 될 것인바, 겸사겸사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마지막에 가서는 다시 쿠스투리차의 영화 얘기로 되돌아올 것이다.

 

 

 



아마도 ‘기적을 행하는 자’의 라캉적 명칭은 ‘주인기표’가 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이며 나는 내가 말하는 바이다.” 여기서 기적이란 내가 나인 것이다. 왜냐하면, “상징적인 동일시와 상상적인 동일시의 불가능한 ‘원의 사각형’은 반드시 어떤 잔여물을 남”(<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216쪽)기기 때문이다. ‘원의 사각형’이란 말은 ‘square of the circle’의 번역인 듯한데, 사전에 다 나와 있는 바이지만, 그건 숙어적으로 (원을 네모지게 하는) ‘불가능한 일’을 가리킨다(우리말 ‘원의 사각형’이 그런 뜻을 갖고 있는가?). 때문에 “불가능한 원의 사각형”은 동어반복이며, “불가능한 일”로 충분하다. 다시 옮기면, “상징적인 동일시와 상상적인 (완벽한) 동일시는 불가능하며 그것은 반드시 어떤 잔여물을 남긴다.”

즉, 상징적/상상적 동일시는 불가능한 일이며 ‘미션 임파서블’이다. 그러니, ‘나(I)는 나(me)다’라는 상징적 동일시가 ‘기적’인 것은 당연하다. 특히나 나(me)가 ‘주인’ 혹은 ‘주인기표’일 경우에는 더더욱. 68혁명 이후의 현대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대학 담론’에서(그 담론 공식의 하단부에서) 드러나는 바는 (에릭 샌트너가 말하는바) ‘임명(investiture)의 위기’ 혹은 서임(敍任)/수임(受任)의 위기이다(지젝, <이라크>, 188-9쪽).

그러니까 (주인으로서의) 어떤 임무나 역할을 주려고 하지만, 아무도 안 받겠다며 거부하는 걸 말한다(예컨대, 아무도 반장 안 하겠다고, 아무도 대통령 안 하겠다고, 못 해먹겠다고 버티는 경우이다). 다시 말해서, “주체가 S(=주인기표)와 관계 맺는 것의 불가능성, 주체가 주인기표와 동일화하는 것의 불가능성 혹은 주체가 부과된 상징적 위임을 떠맡는 것의 불가능성”(<이라크>, 189쪽)을 가리킨다. 이 불가능성이 산출하는 것은 ‘상징적 동일성(=정체성)’의 상실이다. 즉, 상징적/사회적 정체성으로서의 ‘나(Me)’를 상상적 ‘나(i)’가 거부/회피함으로써 ‘나(i)≠나(Me)’가 되는 것이다(사회학자 미드의 ‘I-me’ 관계를 ‘i-Me’ 관계로 수정했다).

거꾸로, 기적이란 ‘내가 나인 것’이다. “아니, 이게 어떻게 나란 말인가?”란 부인으로부터 “나는 다름 아닌 나란 말이야!”란 수락에 이르는 여정(물론 이때의 ‘나는 나다’라는 건 동어반복이 아니다. 그것이 표시하는 건 역설적으로 동어반복의 불가능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은 ‘운명애’의 인간이다(비록 라캉은 니체를 참조하지 않지만). 그리고 이때의 운명은 (니체를 따를 때) 다리로서의 운명이고 몰락으로서의 운명이다. 너는 너의 운명(=몰락)을 사랑하는 자인가?

운명애로서의 ‘나=나’가 ‘기적’이라면, 그것에 대한 거부/회피로서의 ‘나≠나’가 흔히 가리키는 것은 투어이고 일탈/도착이다(흔히 ‘나’를 찾아간다는 명목의 이 행은 실상은 ‘나’로부터 미끄러지는 여행이다. 이런 여행담의 종결은 보통 집에 돌아와 보니까 거기에 ‘나’가 있더라는 식이니까). 그걸 좋은 쪽으로 말하면, 유목이고 탈주가 된다(무엇의 유목이고 탈주인가? 모든 경계를 넘나드는 블랙메일과 핫머니 아닌가? 정작 유목/탈주의 ‘모델’인 집시들은 탈주하고 있는가? 자신들이 탈주한다고 생각하는가? 무엇을 재배치하는가? 매번 재배치되는 건 전략 핵무기 아닌가? 사고/사유의 재배치는 뉴에이지즘과 과연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가? 생각을 바꾸면, 파트너를 재배치하고 체위를 바꾸면 새로운 세상이 되는가?).

하지만, ‘나=나’라는 상징적 동일시의 “상실의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은 갖가지 형태와 장치를 갖춘 향락으로 인해 온통 사방에서 시달리는 일이다…”(<이라크>, 189쪽) 번역문의 ‘향유’를 ‘향락’으로 고쳤다. ‘향유에 시달린다’는 건 우리말로 넌센스이다. 여기서 ‘갖가지 형태와 장치를 갖춘 향락’이란 지젝의 말은 비유적인 말이 아니며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한다.



러시아의 한 TV채널에서는 ‘플레이보이’사(社)에서 만드는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매일같이 보여주는데, 요즘은 주로 스트립쇼와 ‘섹스의 모든 것’이란 제하의 프로그램이 나온다(‘모든 것이 가능한 섹스’라고 해야 할 듯하다). 스트립쇼야 흔하게(?) 보는 거지만, ‘섹스의 모든 것’에 나오는 것들은 간혹 엽기적일 때가 있다.

성기 피어싱부터 각종의 도구와 장치들을 이용한 새도-마조히즘과 집단섹스에 이르기까지 르포식으로 보여주는데(<아이즈 와이드 샷>에서도 보여지는 집단섹스 등은 ‘판타지’가 아니다), 참가자들은 다들 희열에 차 있는 듯하지만(혹은 희열을 연기하는 듯하지만) “온통 사방에서 시달리는” 그들은 사실 너무 고생스러워 보인다(아무런 마취도 없이 성기를 피어싱한다고 생각해보라).

‘향락’이라는 이름의 바로 그러한 고생/고통이 우리가 ‘나=나’라는 기적을 포기하는 대가로 얻는 ‘보상’이다(웬만하면 기적을 택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나는 소위 ‘성 범죄자들’이 보내져야 할 곳은 감옥이 아니라 이러한 (어떠한 금지도 없는) ‘섹스 천국’이라고 생각한다(그들에게 원하는 것을 주라!).(‘섹스 천국’의 유일한 금지는 외부에서는 절대로 아는 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베르톨루치의 문제작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나=나’(라는 ‘파시즘’)에 대한 알레르기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안티-오이디푸스’적이다. 영화에서 말론 브란도와 마리아 슈라이버는 자신들의 이름을 지우며, 아파트라는 익명성의 공간에서 섹스만을 소통(불)가능성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들은, 특히 이해할 수 없는 아내의 자살 때문에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진 말론 브란도는 남편이라는 사회적 정체성으로부터, 자신의 수많은 (가짜)이름들로부터 필사적으로 벗어나고자(탈주하고자) 한다.

그에게서 ‘나=나’의 세계란 가식적인/의례적인 탱고의 세계에 다름 아니기에(그는 탱고경연장에서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까 보임으로써 그러한 세계를 욕보이고자 한다). 그러한 그가 도달하게 되는 마지막 지점은 물론 죽음이다(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지는 것이지만, 그에겐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죽음도 ‘껌’이었다). 그의 죽음을 순전히 부르주아 여성의 변덕/배신 탓으로 돌리는 것은 너무 소박한 견해일 것이다.

‘나=나’라는 테마를 사이에 두고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와 대척관계에 놓일 수 있는 것이 자크 도마엘의 <토토의 천국>이다(원제는 ‘영웅 토토’였던 듯하다). 신생아 병동에 난 화재소동 때문에 자신의 운명이 부잣집 아이의 운명과 뒤바뀌었다고 ‘믿는’ 토토는(자신의 연인도 빼앗긴다) 노인이 되어서 부도 위기에 몰린 이 재벌 친구(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한스’라고 해보자) 대신에 암살당하는 운명을 선택한다. 그는 그럼으로써 ‘나=한스’로 이행해가며, 자신의 ‘진정한 나(=한스)’로서 죽음을 맞는 ‘기적’을 연출한다. 그는 자기 운명의 주인공/영웅(Hero), 즉 주인-기표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 주인기표가 말 그대로 ‘죽음’을 의미하는 텅 빈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캐나다 감독 장 클로드 로종의 <레올로>에서 다루어지는 것도 같은 테마이다(나는 이 영화를 10년 전에 한 영화제에서 연거푸 보았다. 이 영화 또한 내게 ‘기적’을 보여주었다). 제대로 똥싸는 일에만 관심이 집중돼 있는, 몬트리올의 한 빈민가정에 태어난 소년 레오는 자신의 본래적 아버지는 시실리의 농부라고 ‘믿으며’ 그래서 자신의 이름도 이태리식으로 ‘레올로’라고 부른다.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와 무식한 아버지, 그리고 미친 누이들과 정신박약의 형 사이에서 삶을 버텨나가는 그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그리고 옆집 처녀 비앙카를 사랑한다. 그러다가 비앙카가 돈을 받고서 할아버지에게 매춘을 한다는 걸 알고서는 할아버지를 죽이려다 정신병원으로 가게 된다. 영화의 나레이터에게 남겨진 것은 레오, 아니 레올로가 남긴 기록들뿐이다. 그것은 레오가 레올로라는 상징적 위임을 떠맡고자 분투했던 날들의 기록들이기도 하다(하면, 기적들도 웬만하진 않다).

 

 

 



어쨌든 인상적인 것은 죽음/정신을 담보로 하더라도 끝까지 ‘나(me/Me)’라는 상상적/상징적 정체성에 도달하고자 하는, 혹은 그걸 유지하고자 하는 분투들이다 가령, 모파상의 단편 <쥘르 삼촌>은 여기서 좋은 분석거리가 된다. 거기서 문제되는 것은 한 가족의 상징적 정체성이다. 부자가 돼서 돌아올 걸로 이들 가족이 꿈꾸는 ‘쥘르 삼촌’이 아무리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허울은 필수적이다.

멕시코 감독 립스테인의 걸작 <짙은 선홍색>에서 자신의 ‘가발’에 악착같이 집착하는 대머리 이발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그 자신을 ‘가발을 쓴 나’하고만 동일시하고자 강박적으로 애쓴다. 가발을 안 쓰면 어떤가? 하지만, 그에게서 ‘가발을 안 쓴 나’는 곧 비존재(nothing)이다. 허리에 달랑 ‘새끼줄’ 하나만 두른 걸로 ‘의상’을 대신하는 한 원주민 부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어차피 새끼줄로 가려지는 부분도 없지만, 그들은 새끼줄을 안 찬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한다(새끼줄도 안 차고 어딜 돌아다닌단 말인가?).

여기서 ‘쥘르 삼촌’과 ‘가발’과 ‘새끼줄’은 모두 동일한 의미연관을 갖는다. 즉,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실제로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다) 나/우리의 상징적 정체성에 필수적인 보증물이며 버팀목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이데올로기 이전의 차원에 있는 향락의 무의미한 중핵”으로서의 그것들은 이데올로기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이데올로기의 최종적인 버팀목으로 기능한다. <이데올로기>에서 지젝은 욕망의 그래프를 해설하면서 잉여 향락의 차원을 끌어오는바,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호명’(알튀세르) 너머의 차원에 있는, 이데올로기의 최종적인 버팀목으로서의 이러한 잉여물을 고려하기 위해서이다. 이에 따라 이데올로기 비판은 두 가지 상보적인 절차로 구성된다(이하 <이데올로기>, 217-223쪽 참조).



-하나는 담화적인 차원으로서 이데올로기 텍스트의 ‘증상/징후를 읽는 독법’이다. 이는 의미의 즉각적인 경험을 해체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의 영역이 얼마나 서로간에 이질적인 ‘부유하는 기표들’의 조립을 통해, 다시 말해 어떤 ‘매듭’의 개입을 통한 전체화를 통해 가능하게 되었는지를 입증해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의미의 즉각적인 경험’이란 건, 텍스트의 의미에 대한 순진한 지각/수용을 뜻한다. 서로 이질적인 기표들이 어떤 ‘매듭’을 통해 얽어 매지고, 조립(=편집)됨으로써 산출되는 게 이데올로기적 텍스트인데(가령 신문의 지면을 보라), 그걸 자연스러운 것으로 지각/수용하는 데 이데올로기의 함정이 있다. 증상/징후 읽기는 그러한 자연스러움을 ‘해체’하는 것인바, 이러한 작업은 바르트의 신화 읽기와 유사하다.

-다른 하나는 향락의 중핵을 추출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가 (환상 속에 구축된 이데올로기 이전의) 향락을 함축하고 조작하고 산출하는 방식을 밝혀내는 것이다.

첫 번째의 ‘담화분석’을 두 번째의 ‘향락의 논리 분석’으로 보충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예증하기 위해서 지젝이 들고 잇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가장 순수한 육화’로서의 반유태주의이다. “담화분석의 수준에서 유태인의 형상 속에 투자된(=투여된) 상징적인 중층결정의 네트워크를 밝혀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첫째, 거기엔 전치의 과정이 있다. 반유태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계략(=속임수)은 사회적인 갈등(=적대)을 건전한 사회조직체와 그것을 부패시키는 힘으로서의 유태인 사이의 갈등(=적대)으로 전치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전치는 유태인과 돈 거래를 연관시킴으로써 가능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착취와 계급적인 적대의 근원은 노동계급과 지배계급의 기본 관계 속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인 조합이 계급투쟁을 대치하면서 ‘생산’력(노동자, 생산의 주최자…)과 ‘생산’계급들을 착취하는 상인들 사이에 위치하게 된다.”(218-9쪽)

마지막 문장은 오역인데, 러시아어본을 참조해서 다시 옮기면 이렇다: “그렇게 되면, 착취와 계급적 적대의 근원은 노동계급과 지배계급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생산계급(노동자+산업자본가)과 (생산계급을 착취하고 건강한 협력관계를 계급투쟁으로 변질시키는) 상인계급 사이의 관계가 된다.” 즉, 반유태주의는 ‘노동계급과 지배계급의 적대’를 ‘생산계급과 상인계급의 적대’로 전치시킨다. 이러한 전치를 보조하는 것이 응축(=압축)인데, “유태인의 형상엔 상하위계급들이 연상되는 특징들이, 상호 대립적인 특징들이 응축되어 있다. 유태인은 예를 들어 더러우면서도 지적이고, 음탕하면서도 (성적으로) 무기력하다 등등.”

담화분석에서는 이러한 유태인의 형상이 징후/증상이라는 걸 읽어낸다. 즉 그것이 코드화된 메시지이자 암호이고, 사회적 적대의 왜곡된 표상이라는 걸 읽어내는 것이다. 그러한 읽기가 바로 전치/응축작업의 ‘해체’이다. 하지만, 이러한 은유(=전치)-환유(=응축)의 논리 분석은 유태인의 형상이 얼마나 우리의 욕망을 사로잡고 있는지를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유태인이 환상의 틀 속에 들어와 우리의 향락을 구조화하는 방식”을 고려하는 것이다.

“사회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의 목적은 바로 진정으로 존재하는 사회에 대한 하나의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적대관계에 분할되지 않으며, 각 부분들 사이의 관계가 유기적이고 상보적인 사회에 대한 하나의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분명한 경우는 물론 사회를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체로서, 하나의 사회적 신체로서 보는 통합주의적인 관점이다… 우리는 물론 이러한 ‘하나로 통합된 신체로서의 사회’는 이데올로기의 근본적인 환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220쪽)

그렇다면, 이러한 통합주의적 비전과 적대적인 갈등에 의해 분열된 실제 사회간의 거리는 어떻게 설명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이 유태인이다. “유태인은 건전한 사회조직을 부패시키는 이질적인 신체, 외부적인 요소이다. 요컨대 ‘유태인’은 물신이다. ‘사회’의 구조적인 불가능성을 부인하는 동시에 구현하는 물신인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것은 사회적인 장 속에서 향락이 분출되는 지점을 표시한다. 따라서 사회적인 환상이란 개념은 적대라는 개념에 대한 필수적인 대응물이다. 환상은 정확히 적대적인 균열을 은폐하는 방식이다.”

요컨대,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의 기능은 (사회의 구조적인) 이러한 비일관성을, 다시 말해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에게 실패한 동일시를 보상해주는 것이다.” 예컨대, “파시즘에 있어 ‘유태인’은 파시즘 자체의 불가능성을 고려하고 표상하는 방편이다… 결국 ‘유태인’은 단지 어떤 근본적인 장벽에 대한 물신적인 구현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221-2쪽) 더불어 지적하자면, 스탈린 체제에 있어서 ‘인민의 적’들은 사회주의 자체의 불가능성을 고려하고 표상하는 방편이었다. 왜 우리가 완전한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도달하지 못하는가? 인민의 적들 때문이다! 왜 진정한 세계화가 실현되지 못하는가? 분파적 테러리스트들 때문이다! 등등.

“따라서 이데올로기 비판은 전체주의적인 응시에 의해 인식된 인과율의 연쇄를 전도시켜야 한다. ‘유태인’은 사회적 적대의 실제 원인이라기보다는 단지 사회가 하나의 완결되고 동질적인 전체로서 자신의 완전한 동일성은 획득하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장벽과 불가능성의 구현물일 뿐이다. 유태인은 사회적인 부정성의 실제 원인이라기보다 사회적인 부정성이 실제의 현존을 떠맡는 지점이다.”(222쪽)

마지막 문장을 다시 옮기면: “유태인은 사회적 부정성의 원인이 아니다. 유태인의 형상은 사회적 부정성 자체가 실정적인 것으로 전화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 비판은 어떤 주어진 이데올로기적인 구성물 속에서 그것 자체의 불가능성을 표상하는 요소를 탐사하는/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사회적인 환상의 횡단’은 이런 식으로 ‘증상과의 동일시’와 상관적인 게 된다.

지젝은 이데올로기를 일종의 사회적 환상으로 다루는데, 사회적 환상과 개인적 환상이라는 (불)가능한 구분을 도입하자면, ‘쥘르 삼촌’과 ‘가발’과 ‘새끼줄’은 가족적/개인적 환상이기도 하다. 보다 일상적인 용어로 말해서, ‘환상’을 우리의 (구조적인) 실패에 대한 ‘핑계’가 되어주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그것의 기본문형은 “그것만 없(었)다면(if not only)” 혹은 거꾸로 “그것만 있(었)다면(if only)”이다. 쥘르 삼촌만 있다면, 가발만 있다면, 새끼줄만 있다면, 상징적 동일시가 가능해지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될 거라는 기대/가정이 바로 환상의 중핵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상의 횡단이란 쥘르 삼촌과 가발과 새끼줄이 다만 허울이며 핑계라는 걸 인지/확인하는 것이다. 즉, 쥘르 삼촌과 가발과 새끼줄과 유태인은 모두 ‘환상’이며, 그 너머에 있는 건 ‘실재라는 사막’이고 ‘shit’이며, ‘개똥’이고 ‘nothing’이라는 걸. 거기에 있는 건 궁극적으로 죽음 충동뿐이라는 걸. ‘개똥-되기’에의 충동.

앞에서 나는 ‘나=나’로의 이행이 (불가능한) 기적이며, ‘나≠나’(투어적 존재론)가 그러한 기적에의 거부/회피라고 말했지만, 그때의 불가능한 기적은 불완전한 기적이기도 하다. 보다 온전한 기적의 내용은 ‘나=나’가 아닌 ‘나=0’라는 사실의 인지/확인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그걸 ‘기적의 횡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즉, 진정한 기적이란 “나는 나이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기적이다(“주여,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걸 순차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기적은 두 번 일어나며, 두 번 일어나야만 한다. “나는 나다”라는 기적,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기적.



다시 반복하자면, 하름스의 <노파>에서 ‘기적을 행하는 자’는 (1)평생 동안 단 한번의 기적도 행하지 않았다. 왜인가? 그는 기적을 행하는 자이지만, 동시에 그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기적을 행하는 자이며, 어떤 기적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 자신을 ‘기적을 행하는 자’와 동일시하기가 첫 번째 기적이라면, 그 ‘기적을 행하는 자’를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자’와 동일시하기가 두 번째 기적이다.

흔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적’이라고 일컬으며 축복하지만, 그건 기적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죽은 자가 부활하는 거야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일이지만, 그리스도는 신이며 최소한 신의 아들이 아닌가? 벼룩이 뜀뛰기를 잘 하는 게 기적이 아니듯이, ‘특별한 존재’가 기적(奇蹟)을 연출하는 것은 기적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기적은 다른 데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물리고 싶다고 했지만,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모든 걸 뒤바꿔놓을 수 있었을 테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진정한 기적은 바로 그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음’이다. 그걸 나는 ‘기적 없는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기적을 행하는 자’는 (2)평생 동안 단 한번의 여행도 행하지 않았다. 투어로서의 삶을 ‘나=나’로부터의 도피라고 했지만, 그러한 도피의 이면은 ‘나=0’과의 대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우리가 진정으로 주체가 되는 것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승인함으로써이다. ‘주체의 공백/궁핍(destitution of subject)’이란 말이 뜻하는바, 진정한 주체의 자리란 텅 빈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걸 무위(無爲)의 주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이 쉴 곳 없네”라고 한 가수는 노래했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은 한, 내가 ‘당신’을 영접하고 환대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이란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비라는 기적도 일어나지 않으며, 혁명의 시간도, 민주주의도 도래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로 사랑과 자비가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날 때, 혁명의 시간과 민주주의가 도래할 때,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우리는 결코 그것이 기적이라고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아무도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타르코프스키(1932-1986)의 마지막 영화 <희생>(1986)은 전적으로 ‘기적 없는 기적’에 바쳐진 영화이다. 자신의 아들 안드류샤에게 바친 이 영화의 이야기는 “은퇴한 노배우 알렉산더가 생일을 맞이하여 꾸는 세계 종말의 꿈과 그것을 막으려는 노력의 하루 낮 하루 밤”을 다루고 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에 따르면, ‘우리 세기(=지난 세기)의 마지막 우화’인 <희생>은 한마디로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에 관한 영화다. 그는 3차 대전(=세계의 종말)에 맞서서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지켜내고자 간절한 기도를 드리며 신에게 (종말 대신에) 오늘과 같은 하루가 내일 또 주어진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는 다음날, 어제와 같이 밝은 햇살의 아침을 맞이하게 되자 그는 신에게 감사하며 가족들 몰래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고는 결국 앰뷸런스에 실려간다.

사실 이 영화는 암투병중이었던 타르코프스키가 자신의 영화적 유언으로 만든 것이며, 자신의 아들과 인류의 다음 세대를 위해서 영화 속 알렉산더처럼 모든 걸 희생하겠다는 각오로 찍은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의 기적은 알렉산더의 간구대로 다음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다른 가족들에겐 일상적인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 것이었지만, 알렉산더는 그 하루에서 신의 은총과 기적을 본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한다(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자신의 ‘말씀’, 즉 로고스 또한 신에게 제물로 바친다). 만약에 당신이 이 ‘기적’ 같은 영화를 보면서 눈물 흘리지 않았다면(동시에 이 영화는 아주 코믹하다), 아직 당신의 삶은 기적이 아니라 투어에 가까운 것이리라.

바라건대, 당신 스스로가 ‘기적을 행하는 자’임을 믿을 것이며 세상은 너무도 많은 기적으로 충만해 있음을 믿을지어다. 아멘.

06. 05. 30.



P.S. 쿠스투리차의 <삶은 기적이다>에서는 시작 장면에서 “삶은 정말 기적이군!”이란 대사가 나온다. 우체부가 주인공 루카의 집 암탉이 닭장 둥지에 잔뜩 낳아놓은 달걀들을 보면서 감탄하며 내뱉는 대사이다. 전쟁과 난장 속에서도 (일상적) 삶이 끈질기게 이어지는 것, 그것이 쿠스투리차가 보는 기적이다.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버전으로 말하자면, (지진과 같은 재난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이 기적이다. 그렇듯, 기적은 활달하고 기적은 눈물나며, 기적은 충만하다. 눈물 흘리는 성상/성화나 불상/탱화를 찾아 다니는 이들만 모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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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여름에 한 카페에 올려놓았던 글을 다시 옮겨놓는다. 종교에 관한 토론/논쟁에 부득이하게 끼어들어 한 마디 거들었던 글인 듯하다. 다시 읽어보면서, 세월이 지남에 따라 무엇이 변하고 안 변하고 하는지를 알겠다.

저는 굳이 밝히자면, 무신론자이고, 범신론자입니다. 저에겐 무신론과 범신론의 차이가 잘 구별되지 않기에 그냥 막연하게 그렇게 분류하기로 하지요. 하긴 유신론이나 무신론이냐 하는 것이 대개는 기독교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한 판단 혹은 태도에 따른 것이어서, 그러한 사유 전통이나 범주의 바깥에서 바라볼 경우,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해야겠죠.

그리고 사실, 러시아의 무신론이란 것도 19세기에는 일종의 신앙이었기에, '무신론'에 말에 대한 '체감' 또한 저마다 다를 거라는 점도 인정해야겠구요. 하여간에 신의 존재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증명해 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자연적인 것도, 보편적인 것도 아니라는 전제 하에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길게 논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또 제가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유대교적 전통이나 부정신학에서의 신은 똑같은 기독교적 신이라 하더라도 양상이 좀 다르다는 건 말씀드리고 싶어요. 요는 우리가 신에 대해서 알 수 없다는 것. 왜냐면, 우리는 무능력하고 어리석으며 모자라니까. 조금 만용을 부려 신의 존재를 증명했다고 해서, 그 증명 때문에 신이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 만약에 '존재'한다면, 존재 '증명'이 안된다고 해서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겠죠.

요는 신의 존재 증명이니 하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를 빌리면) 기독교적 담론 체계(/전통) 내에서의 언어게임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믿는 자에게만 중요한. 믿지 않는 자에게는 바람에 흩날리는 비닐 봉다리만큼이나 사소한. 그러면서 때로 거룩한.

 

 

 

 

이러한 토론/논쟁에 제가 깊이 참여하지 않는 것은 오래 전부터 그러한 '게임'에 멀미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의 <대심문관>)이나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재미있게 읽었더랬습니다. 하지만, 관념이 주는 재미라는 건, 한 인류학자가 지적한 대로, 그저 '생각하기에 좋은 것(good to think)'이어서, 우리 삶을 가상으로만 지배할 따름입니다. 삶을 철학화하는 데 대해 반감을 가졌던 체홉의 경우를 떠올릴 수도 있겠네요.

이반 카라마조프가 가졌던 의문 중의 하나는 신의 존재라기 보다는 신의 의미입니다. 하여간에 이러저러한 신의 존재한다고 칩시다. 그리고 그러한 신(들)에 의해서 이 세계가 창조되었다고 칩시다.(그런 믿음은 가정이 아닐 경우, 대개는 용기의 결여에서 나오는 것인데- 즉 끝까지 가보지 않는 사유) 그렇다고 해서 무엇이 얼마만큼 달라지는지요. 순진한 어린아이들의 무고한 고통이 감면됩니까? 소위 세계 고가 탕감됩니까? 예수만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아침마다 전철역에서 설교하는 분도 있는데, 정말 그런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면, 제 생각에 그 믿음의 환희 때문에(혹은 두려움 때문에) 심장이 터져 죽든가 혼절하든가 해야하지 않을까 싶군요.

주인 의식을 가지고 사는 건 좋지만, 주인 의식이라는 게 자신이 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의식이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내가 사는 곳, 내가 속한 공동체, 내가 가진 믿음이 반드시 옳은 것이고 절대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믿음보다 태만하며 부정직한 믿음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그러한 믿음은 '인간적'이기조차 합니다. 무능력하고 이기적이며 모자란...

 

 

 

 

'하늘을 나는 새, 들의 백합'이란 성경 구절도 있지만("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자신의 존재를 그 새들과 백합과 차별화시키면서 잘난 체하기보다는 그 새들과 백합의 자유로움과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본받아 보려는 삶이 제겐 좋아보입니다. 저마다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말할 수 있고,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걸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타자로서의 자신뿐만 아니라(우리는 자신에게 낯설지 않던가요?) 다른 이, 다른 존재들의 언어에 귀기울이기 위한 것입니다. 일종의 말건넴이지요.

정말로 보기에 좋더라는 세상에 살고 싶은 건 모든 사람의(모든 사람은 아닐 겁니다) 꿈이고 열망일 겁니다. 하지만, 그런 세상을 손에 물 안 묻히고, 무슨 믿음 하나로 이루려고 하는 건 교만이겠지요. 믿거나 말거나 각자의 자리에서 세상의 조그만 정의들을 위해서 조금씩 노력해 가는 것, 가끔은 퇴보도 하고 방황도 하면서 하여간에 어딘가를 주시하며 가는 것, 그것이 저에겐 신의 존재 증명보다도 신의 의미보다는 중요해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무신론자이고, 굳이 말하자면 범신론자입니다. 당신들이 모두 신으로 보이니까...

 

 

 

 

(*)마지막 멘트는 그냥 유머이다. 그리고 그 유머의 다른 말이 '이데올로기'이다. 테리 이글턴에 따르면, 인간을 신이나 벌레로 간주하는 태도가 이데올로기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사이의 어중간한 무엇이다. 혹은 침팬지와 보노보 사이의 '제3의 침팬지'일 뿐이다...   

06. 0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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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문학기자(이면서 현재는 수석논설위원)인 박래부씨가 <작가의 방>이란 책을 최근에 냈다(서해문집, 2006). 지난주말에 북리뷰들을 읽다가 알게 된 것인데, 오늘자 한국일보(06. 05. 30)에 소개 기사가 실렸다. 기꺼이 옮겨오도록 한다. '남의 집' 혹은 '남의 서재' 구경에 특별히 취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 블로그 자체가 '나의 서재'인 만큼 작가들의 서재를 눈동냥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니까. 기사의 필자는 (동업자이면서 필히 후배일) 최윤필 기자이다.

한편, 박래부 기자는 직장 선배였던 김훈과 '문학기행'을 연재하기도 했었는데, 찾아보니 2004년에 세번째 판이 <제비는 푸른 하늘 다 구경하고>(따뜻한손)로 출간됐다. <화가 손상기 평전>(랜덤하우스중앙, 2000)도 그의 작품이다.

-‘작가의 방’…, 이라는 묘한 울림의 에스프리를 담은 책이 나왔다. 한국일보 수석논설위원인 문학기자 박래부씨가 우리 시대의 좋은 시인 소설가 6명- 이문열, 김영하, 강은교, 공지영, 김용택, 신경숙- 의 집을 찾아가, 집과 방과 책과 책상을, 거기에 녹아 든 햇살과 바람과 음악과 그림을, 또 그들의 시와 소설을 이야기한 책이다.

-그들의 빛나는 문학이 탄생한 공간과 거기에 투영된 작가 자신의 내면이 아스라한 거리를 두고 그들의 문학과 만나는 지점들. 필자는 그 지점의 표정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격조 있는 문체로 담아냈고, 출판저널 기자 박신우씨는 사진으로, 일러스트레이터 안희원씨는 맛깔스러운 그림으로 빈 곳을 채워주고 있다.

-처음 들른 ‘방’인, 소설가 이문열씨의 경기 이천 ‘부악문원’을 두고 그는 “그 자체가 평생 추구해온 탈이념적 복고주의적 이상과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혹은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디세이에 다름 아닐 것”이라고 썼다. 그 정신적 ‘오디세이’의 서재는, 성채를 방불케 하는 규모와 공간 벽면을 가득 채운 저서에도 불구하고, 자기 과시나 예술적 취향에는 거의 돈을 들이지 않았다. 철저히 ‘기능적’이다. “검소한, 또는 무미건조해 보이는 취향 고백을 듣지 않더라도, 그의 소설 역시 예술지향적이기보다 철학지향적이다. 그러나 이는 그가 문학에만 전력투구하는 유형의 작가라는 것, 목표와 주제에 치열하다는 것을 말해준다.”(29쪽)

-이렇듯 그가 안내하는 작가의 방은 그들의 내밀한 사생활을 들여다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10여년 전 ‘문학기행’시절의 행로에서 문학이 배태된 거시 공간을 살폈다면, 이번 책에서 그는 작가들의 미시공간, 그리고 내면의 공간을 살핀다.

-자유로운 인문주의자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젊은 소설가이자 교수인 김영하씨의 연구실, ‘꾸밈없는 착함이 거처’하는 강은교 시인의 소박하고도 정갈한 방, 작은 도서관쯤은 될 법한 장서를 갖추고 책이 자신의 오락이라고 말하는 소설가 공지영씨의 ‘방’.

-시골 청년을 시인으로, 지식인으로 성장시킨 ‘조강지처 같은 책’들을 둘 데 없어 학교와 고향집, 전주의 아파트에 나눠 쌓아두고 있는 김용택 시인의 ‘방’을 나서며 그는, “자연 전체를 하나의 큰 서재로 여기는 시인은 드물지만 행복하다”(231쪽)고 썼고, ‘집 전체가 정갈한 카페’를 연상케 하는 소설가 신경숙씨의 집필공간 옆 책장에서는 ‘문학전집’을 꺼내보기도 한다. 작가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큰오빠가 선물한, 소설 <외딴방>에 그 과정을 쓰기도 했던 그 오래된 책이다.

-필자는 작가들의 서재에서 귀하고 반가운 책이나 사상가를 만나면 못내 지나치지 못하고 자신의 단상을 적는다. <외딴방> 이야기 끝에 필자의 대학시절 야학교사 경험을 이야기하는 등 기억을 더듬기도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작가의 방과 그들의 문학 이야기일 뿐 아니라, 기사로 문학텍스트를 심심찮게 압도했던 문학기자(필자)의 삶과 문학에 대한 열애의 은근한 추억담 같기도 하다. 책에 실린 사진들은 30일부터 내달 6일까지 종로구 사간동 ‘유갤러리’에서 전시된다.

06. 05. 30.


 

 

 

P.S. 서재 훔쳐보기가 흥미로웠다면, 아예 돗자리 펴고 작가들의 사생활까지 염탐해볼 수도 있겠다. 김화영 교수의 <한국 문학의 사생활>(문학동네, 2005)이 요긴한 길잡이가 되어줄 듯하다. 시인들 얘기는 <시인박물관>(현암사, 2005)에서도 엿들을 수 있겠고. 끝으로 맘에 드는 서재 이미지를 하나 옮겨온다. 다소 호사스러워 보이긴 하지만,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는 게 염치 있어 보인다(물론 서가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야 하지만). 가끔은 내가 가족뿐만 아니라 책들도 혹사시키는 게 아닌가란 자책이 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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瑚璉 2006-05-30 11:13   좋아요 0 | URL
마지막 이미지는 안보이는데요?

로쟈 2006-05-30 11:17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아직은 보이는데... 가 아니군요. 다시 구해와야겠습니다.^^

3794 2006-05-31 19:34   좋아요 0 | URL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는 게 염치 있어 보인다'// '염치 있어보인다' 는게 무슨 뜻인가요?^^;;

로쟈 2006-05-31 19:51   좋아요 0 | URL
염치란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입니다. 고작 책들로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는 건 염치 없는 일인지라...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의 최후의 걸작은 알다시피 <카라마조프의 형제들>(1880)이다. '저자로부터'라고 돼 있는 머리말을 읽으면 단박에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작가가 구상했던 작품, 곧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알료샤)의 전기'를 구성하는 두 부분 중 첫번째 이야기에 불과하다.

"중요한 대목은 바로 두 번째 소설이며, 내 주인공의 행위는 이 시대, 즉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순간에 속해 있다. 첫 소설은 겨우 13년전에 일어난 일이며, 어쩌면 소설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으로서 나의 주인공의 어린시절의 한순간에 불과하다."(열린책들판, 22쪽)

도스토예프스키 창작의 정수이자 서구 소설사에 있어서도 기념비적인 위치에 놓여 있는 작품이 주인공의 어린시절 '한순간', 혹은 한 가지 '에피소드'를 다룬 "소설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이야기라는 것은 아이러니컬하다(도스토예프스키의 창작은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었을까?).  

 

 

 

 

러시아문학에 대한 강의를 맡아서 하다 보면, 부득불 이런 걸작들을 '상대'해야 하는 때가 닥친다. 스릴을 느끼게도 하지만 부담스럽기도 하다. 웬만한 연구서를 써도 다 카바가 안될 작품에 대해서 적당히 '아는 체'한다는 게 매번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도스토예프스키라는 '잔인한 천재'를 내려다보면서 강의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물론 면피용 강의안이야 어떻게든 마련하지만, 언제나 미진함을 느끼게 된다. 변죽만 건드릴 뿐 아직 '전면전'을 치르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렇다고, 매번 당하고 살 수만은 없는 노릇이고, 이번 여름에는 진지전을 위한 참호라도 몇 개쯤 파둘 생각이다.

여기서는 그러기 전에 먼저 작품 해제 두 편을 옮겨둔다. 하나는 '서울대 권장도서' 해제로 동아일보에 게재됐던 것인데, 필자는 김희숙 교수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래전에 다른 지면을 위해서 내가 쓴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과 사상을 집약하고 있는 그의 마지막 소설이자 19세기 러시아 장편소설의 위대한 시대를 장엄하게 끝맺는 걸작이다. 이 소설은 신에 의해 세상에 허용된 악에도 불구하고 신을 변호하고 창조의 목적론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구상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영원한 주제(믿음 자유 악 구원 인류의 운명에 관한 문제들)를 범죄소설의 틀을 빌려 탐구하며 그 속에서 친부 살해를 카라마조프 집안의 사건을 넘어선, 아버지―신의 살해라는 이념적 차원과 연관시킨다. 그는 각각 정념과 이성과 신앙을 대변하는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 형제의 삶과 의식을 좇아가면서, 무신론적 합리주의나 공리주의가 아닌 영혼의 자유와 진정한 인간애, 속죄, 수난, 부활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하는 신앙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이 신앙을 소설에서 실천하는 인물은 알료샤와 그의 영적 아버지인 조시마 장로다. 그러나 작가의 창작 계획상 미완으로 머문 이 소설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진리를 자신의 내면에 지닌 ‘신의 인간’ 알료샤가 아닌 ‘마돈나의 이상’을 동경하면서도 끊임없이 ‘소돔의 이상’에 이끌리며 자신의 고통을 통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죄’의 의식과 인간성의 부활로 나아가는 드미트리다.

-그 못지않게 흥미로운 인물은 합리주의자 니힐리스트를 자처하며 “이 세계의 입장권을 신에게 돌려주겠다”는 ‘반역자’ 이반이다. 그의 창조물인 대심문관에 따르면 내적 자유를 감당하기에 너무 약한 존재인 인간에게 자유는 곧 저주다. 그런즉 자유를 인간에게 부여했던 그리스도는 기적, 신비, 권위에 의거하여 자유 대신 빵과 지상낙원을 보장하는 공식적 기독교에 의해 수정되어야 한다.

-‘대심문관의 전설’은 로마가톨릭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비판으로서, 신적 원칙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에 대한 분석으로서 강력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스스로를 ‘불신과 회의의 자식’이라 불렀던 본래 성향과는 모순되게 작가가 자신에게 부과한 과도한 종교적 역할은 소설에 의도치 않은 파열을 가져온다. 과도하게 열렬한 믿음은 오히려 긍정을 부정과 동행케 한다.

-그는 반역자 이반과 대심문관의 반대편에서 영혼 불멸과 진정한 신앙을 열렬히 전도하지만, 이반의 말 속에는 그의 목소리가 함께 울린다. 대심문관에 대한 그리스도의 입맞춤 역시 인류에 대한 사랑에서 그들의 지상적 행복을 위해 자신의 영원한 행복을 희생하는 자에 대한 이해와 용서를 누설한다.

-이반도 파열을 보인다. 그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의심하며, 믿음을 갈구하나 오만함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한다. 작가에게 나타나는 파열, 타락의 심연과 천상의 심연을 마음속에 함께 지닌 인물들, 찬반 사이에서의 흔들림 때문에 이 작품은 변신론자 도스토예프스키의 실패한 명제소설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실패는 소설의 ‘예술적’ 성공을 의미한다. 미의 본성에 대해 드미트리가 한 말 ‘소돔의 이상과 마돈나의 이상을 동시에 찬미하고 추구하는 것’은 이 소설 전체에도 적용된다. 영혼의 불멸과 구원의 문제에 천착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는 소돔에서 마돈나에 이르는 모든 길에 뻗쳐 있는 이율배반으로 가득찬 삶, 살아 있는 삶에 바치는 송가다.

이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이미 제목에서 알 수 있는 대로 카라마조프 집안의 사람들이다. 아버지인 표도르와 그의 세 아들,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 그리고 사생아인 스메르자코프가 이 집안의 구성원들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다른 장편 소설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의 전체적인 이야기는 범죄소설적인 구성을 따르고 있다. 즉, 친부 살해라는 모티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탐욕스럽고 방탕한 노인 표도르와 큰아들 드미트리는 그루센카라는 여인을 두고 질투와 증오 속에서 서로 반목한다. 그러는 중에 표도르가 살해되자, 혐의는 당연히 드미트리에게 간다. 하지만 표도르를 살해한 사람은, 둘째 아들 이반의 정신적 사주를 받은 스메르자코프였다. 스메르자코프가 죽는 바람에 드미트리의 무죄 입증은 어려움에 처한다. 드미트리는 비록 직접 아버지를 살해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고 시베리아 유배길에 오른다. 이렇듯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 전개에 재미와 깊이를 부여해 주는 것은, 이 세 아들이 대표하는 인간형이다.

큰아들 드미트리는 무엇보다도 정념의 인간이고 미학적 인간이다. 그는 '마돈나의 이상'(성스러움)을 동경하면서도 끊임없이 '소돔의 이상'(추악함)에 이끌리는 양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면성이 가능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 너무나 넓기 때문이고, 또 이 양면성이 그가 보기에 미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미는 마돈나에만 깃들여 있는 것이 아니라, 소돔 속에도 깃들여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는 두려우면서도 신비스러운 것이라고 드미트리는 말한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그의 여러 모순적인 행동들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둘째인 이반은 이성적인 인간으로서, 작품 속에서 서구의 합리주의와 무신론의 입장을 대변한다. 그가 제시하는 무신론의 핵심은, 동생 알료샤에게 들려주는 '대심문관의 전설'에 집약되어 있다. 대심문관은, 무지한 인류를 영원히 사로잡을 수 있는 세 가지 힘, 즉 기적, 신비, 권위를 거부하고, 지상의 빵 대신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그들을 영원히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그리스도를 비난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에겐 선택의 자유, 양심의 자유만큼 짐스러운 것이 없다. 인간은 무력하기 때문에 자신을 이끌어 줄 강력한 힘과 물질적인 풍요를 갈망하게 되는데, 그리스도는 이러한 '인간적인'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심문관의 논리를 서구적 합리주의, 공리주의, 무신론, 사회주의, 그리고 모든 형태의 사이비 메시아주의의 논리이다.

이반이 이러한 논리의 인간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감성마저 배제된 인간인 것은 아니다. 사실, 그가 부정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신이 창조한 세상,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이다. 신이 만든 세상에서 고통받는 인류, 특히 고통받는 어린아이에 대한 연민과 사랑 때문에 천국 입장권을 반환하겠다는 그의 말에서 우리는 그가 가진 논리의 기원을 엿볼 수 있다.

막내인 알료샤는 종교적 인간이고 신앙의 인간이다. 광활한 러시아적 영토에 걸맞는 드미트리의 영혼이 러시아의 현재를 상징하고, 이반의 무신론이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당대의 여러 지식인들이 제시한 서구적 합리주의 정신을 상징한다면, 알료샤의 신앙은 작가가 제시하는 미래의 러시아를 상징한다.

작가는 인간 영혼의 자유와 사랑, 그리고 부활에 대한 희망을 토대로 하는 신앙만이 인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진정한 힘이라고 믿는다. 알료샤는 이러한 작가의 믿음을 소설 속에서 실천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사실, 알료샤의 성격과 이념적 입장은 이 작품에서 드미트리나 이반에 비해 완정하게 형상화되어 있지는 않다. 그것은 이 작품이 지닌 미완의 성격과 연관된다. 당초 작가는 알료샤를 주인공으로 이 작품을 구상했고, 이 작품은 알료샤의 어린 시절에 일어난 한 사건, 즉 아버지 살해 사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료샤가 대표하는 인간형에서 러시아의 미래에 대한 작가의 희망과 암시적 대안을 읽어내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자유와 양면적인 본성을 억압하는 대가로 경제적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당대의 어떠한 이념에도 반대했다. 그가 수용할 수 있었던 유일한 유토피아는, 불합리하고 변덕스러우며 때로는 한없이 무능력한 존재인 인간이 자유로운 선택과 고통, 그리고 수난을 거쳐서 도달하게 될 신의 왕국이었다. 이 신의 왕국은 "만인은 만인에게 죄인이다"라는 죄의 공동체 의식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한 죄의 속죄 과정에서 겪게 되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다름 아닌 인간성 부활의 희망이 된다.

이 작품에서 드미트리가 겪는 고통과 그의 영혼의 부활은 바로 이러한 도식 속에서 전개되며, 이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창작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와 연결된다. 그것은 바로 '수난을 통한 구원'이라는 주제이다.

 

06. 0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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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2006-05-30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제가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이고 늘 주변사람에게 권하곤 하는 책입니다, 혹시라도 안 읽은 사람이 있으면... 전 중 3 여름방학때 처음 접했었는데, 정말 충격이었죠.
도프토예프스키의 소설은 쉽게 손이 가지 않는 책입니다만(무게로나 양으로나 말이죠 ^^) 늘상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6-05-30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내 인생 최고의 책'으로 올려놓으셨군요.^^ 브루벨의 그림도 좋아하시는 걸 보면, '러시안 필' 하셔도 되겠습니다.^^

Bartleby 2006-06-10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아갑니다.^^
 

 

 

 

  

 

얼마전에 출간된 장 폴 브리겔리의 <불멸의 에로티스트, 사드>(해냄, 2006)는 사드의 독자라면 탐을 낼 만한 전기이다. 이미 모리스 르베의 전기가 <사랑, 자유 그리고 거짓말>(창, 2001)이란 제목으로 번역돼 있지만, 왠지 더 믿음이 가는 것은 브리겔리의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프랑스 혁명기 몰락귀족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은 데다 당대와 이후에 수많은 전기 작가들에 의해 왜곡된 사드의 일생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했"는데, "1부에서 사드의 일대기를, 2부에서는 사드가 영향을 미친 분야와 그 기록들을 담았다. 58컷의 도판과 함께 바타이유, 보들레르, 바르트 등의 사드 연구 저작들이 수록되었다."

스튜어트 후드의 <사드>(김영사, 2005)와 함께, 그리고 기네스 기비 감독의 영화 <사드>(1996)와 함께 마르키 드 사드 후작의 세계를 여행하기 위한 지도이자 매뉴얼로서 갖춰둘 만한 책이다. 아직 재정형편상 구해놓지 못했는데, 마침 오마이뉴스(06. 05. 26)에 자세한 서평이 게재되었기에 옮겨다놓고 '예고편'으로 읽어보도록 한다. 필자는 지용진 기자이며, 타이틀은 "탐미주의자? 자유주의자? '사드'를 다시 보자"이다.

-이탈리아 감독 빠졸리니(*파졸리니 혹은 파솔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일>은 불쾌할 정도로 적나라하다(*오래전에 영화 전공자로부터 빌려본 적이 있는데, 요즘은 영화를 구해보는 일이 어렵지 않을 듯하다). 영화는 거친 영상을 통해 사도마조히즘의 직접적인 재현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현실 자체를 무마시킬 정도로 뇌를 얼얼하게 만든다. 영화에 녹아있는 사디즘의 정의(定義)는 가학과 피학의 ‘관계의 권력’을 통해 규정되면서 복종의 미학을 정당화시킨다. 사도마조히즘은 그렇게 (어떤 의미에서는) 역겨운 대상으로만 기능하고, 그 의미는 제한된 영역에서만 발휘된다.

 

 

 

 


-우리가 소비하는 사디즘의 실체는 무엇일까?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채 비정상적인 행위에 의한 쾌락과 음탕함 그리고 강제적인 유린을 추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본질을 벗어난 그야말로 편의적인 접근이다. ‘쾌락과 불쾌’의 단순한 구도 안에 ‘사디즘’의 의미를 가둬두는 것은 그래서 옳지 못하다.

-<불멸의 에로티스트, 사드>(장 폴 브리겔리 지음 / 성귀수 옮김)는 그러한 박제된 통념을 거두기 위해 인간 사드(1740∼1814)의 인생을 장황하게 서술했다. 사드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부터 사랑통 정신병원에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의 시간을 객관적인 자료와 역사적 근거를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630페이지에 육박하는 이 긴 서적에서 느껴지는 방대함은 사드에 의한, 사드를 위한, 사드의 이야기로 촘촘히 매워져 스펙터클 함마저 감돈다. ‘집대성’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되는 이유다.

-크게 2개의 카테고리로 분류된 이 책은 제 1부에서는 그의 불꽃같은 인생을 다뤘고, 제 2부에서는 균형 있는 시각에 근거해 그를 에워싼 통설을 세세히 드러냈다.

-수많은 정부(情婦)를 둔 외교관 아버지와 폭군의 노리갯감이 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 아래서 사드는 아버지의 성적 괴벽이 적힌 일기를 보며 성장했다. 어린 시절 그의 의식을 점령한 성(性)은 그로테스하게 변질되면서 애초부터 정상적인 성적 의식을 형성할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아버지에 의한 강제 정략결혼으로 인해 사드는 ‘사랑’이란 감정을 싹 틔우기 전에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그 ‘사랑’의 본질을 오늘날 우리가 멋대로 해석하는 ‘사디즘’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사드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면 어린 시절은 ‘불행’으로 점철된 시기였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영역에 한해서만 유효하다. 그의 불행을 밖으로 끄집어내 재해석하고 의미를 갖다 붙이는 것은 결론을 미리 고정시켜 놓고 이유를 들이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실패한 사랑과 그에 이은 정략결혼. 사드는 점점 알 수 없는 혼란에 침잠하게 되면서 그 안에 잠재돼 있던 성욕과 변태성을 긍정하기 시작한다. 젊은 시절 광란한 방탕함과 예수상(像) 모독으로 감옥에 가게 된 사드는 아버지가 남긴 원고를 꼼꼼히 읽으며 자신만의 세상을 조금씩 갖춰가면서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분야에서 인용되는 인물로 거듭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아버지에 대한 사드의 기억이다. 그는 억압과 괴벽의 아버지를 분노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애정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신화화를 이룩해냈다. 반면, 그의 작품 속에 드러난 것처럼 어머니에 대한 평가는 관대하지 못하다. 이른바 전복(顚覆)된 오이디푸스를 반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다양한 저서를 활용해 이를 입증하면서 사드의 삶에 관해 철저히 객관적으로 접근한다. 이 책의 의도가 바로 객관성에 근거한 ‘사드읽기’라는 점을 헤아린다면 저자의 자료수집과 인용이 얼마나 절실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사드(Sade)’의 인생을 책 속에 옮겨와 그를 둘러싼 여러 가지 오해의 매듭을 하나씩 풀어가지만 의도를 강요하거나 인위적인 결론을 맺지 않는다. 다만 수백 년 간 누적된 거대한 담론을 제시하면서 천재로 살다간 한 인간의 파란만장했던 삶 자체에 무게를 둔다.

-인류의 역사에서 사드 만큼이나 포괄적으로 인용되는 인물도 드물다. 종교, 풍습, 철학, 예술 심지어 정치까지도 ‘사드’를 안으로 끌어들여 고정된 영역 안에서 재활용시키며 번식시켰다. 문제는 하나의 통일된 개념적 활용이 아니라 각각의 분야에서 차별적으로 해석됐다는 데 있다. 사드의 불행은 여기서 출발한다. 그를 경배의 대상으로 삼은 추종자들은 자신의 영역에 맞게 사드를 활용했다. 하나의 사드가 여러 의미로 분열돼 다양한 색깔을 지니게 된 것. 저자가 가장 무게를 두고 이야기하는 문제점이다. 사드는 악마적인 천재였다. 동시대에서는 미처 포용 할 수 없을 정도로 사악하게 비쳐졌지만 그가 후세에 끼친 정신적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자연의 정상상태로서의 사디즘은 ‘도착적인 자연주의’를 표방하지만 동시에 자연주의 문제 안에 머무름으로써 자연에 기댄다. 자연을 부정하면서 자연의 이름으로 사회의 인위성을 부정하는 이러한 모순구조는 ‘사드’라는 개념을 더 모호하게 만든다. 이렇듯‘사드’의 모호성은 그를 종교로 삼는 탕아들에게는 그 자체로 매혹적이었다. 이제는 하나의 개념이 돼버린 ‘사드’의 전설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프랑스 대혁명 동안, 무차별적인 살인과 폭동을 목격한 사드는 인간에 내재한 폭력성에 대해 고찰한다. 그는 인간에게는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폭력적 성향이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탐구하게 되고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정당화한다. 이후 나폴레옹 시절에는 반혁명분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남은 일생을 사랑통 정신병원에서 보내게 되면서 <쥘리에트> 등의 불후의 명저를 남긴다.

-사드를 거론하는 것은 음담패설에서는 유용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저자는 왜곡된 사디즘에 경도된 나머지 전체를 보지 않고 작위적인 해석을 강제로 주입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저자가 <사드>에 천착하는 목적은 ‘바로 알리기’다. 저자의 전방위적인 탐구는 사드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과 맞물리면서 진정성으로 독자들을 포섭한다. 다분히 다큐멘터리 적인 시각에서 그의 인생을 쫓으며 ‘사드’의 오용(誤用)을 걱정하는 저자의 노력이 눈부신 건 일차적으로는 방대한 분량에 있겠고, 그 다음으로는 진정성을 들 수 있다. 지면 곳곳에 묻어 있는 저자의 어법은 사드에 대한 몰이해의 실태를 지적하면서 동시에 안타까움이 스며있기 때문에 와 닿는다.



-사드의 실험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근원적인 자각이었다는 사실은 스스로 내린 정의에 의해 타당성을 인정받는다. “인간은 혼자이고, 악은 필연적으로 만연한다.”소름끼치도록 자기 희열에 충실했던 한 인간의 고뇌는 절대본능을 추구한 방탕한 탐미주의자인가? 욕망의 충족을 선도한 희대의 성적 자유자인가? 선택은 온전히 ‘사드’를 읽는 독자의 관점에서 갈린다.

06. 0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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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9 12: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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