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1821-1881)의 최후의 걸작은 알다시피 <카라마조프의 형제들>(1880)이다. '저자로부터'라고 돼 있는 머리말을 읽으면 단박에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작가가 구상했던 작품, 곧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알료샤)의 전기'를 구성하는 두 부분 중 첫번째 이야기에 불과하다.

"중요한 대목은 바로 두 번째 소설이며, 내 주인공의 행위는 이 시대, 즉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순간에 속해 있다. 첫 소설은 겨우 13년전에 일어난 일이며, 어쩌면 소설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으로서 나의 주인공의 어린시절의 한순간에 불과하다."(열린책들판, 22쪽)

도스토예프스키 창작의 정수이자 서구 소설사에 있어서도 기념비적인 위치에 놓여 있는 작품이 주인공의 어린시절 '한순간', 혹은 한 가지 '에피소드'를 다룬 "소설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이야기라는 것은 아이러니컬하다(도스토예프스키의 창작은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었을까?).  

 

 

 

 

러시아문학에 대한 강의를 맡아서 하다 보면, 부득불 이런 걸작들을 '상대'해야 하는 때가 닥친다. 스릴을 느끼게도 하지만 부담스럽기도 하다. 웬만한 연구서를 써도 다 카바가 안될 작품에 대해서 적당히 '아는 체'한다는 게 매번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도스토예프스키라는 '잔인한 천재'를 내려다보면서 강의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물론 면피용 강의안이야 어떻게든 마련하지만, 언제나 미진함을 느끼게 된다. 변죽만 건드릴 뿐 아직 '전면전'을 치르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렇다고, 매번 당하고 살 수만은 없는 노릇이고, 이번 여름에는 진지전을 위한 참호라도 몇 개쯤 파둘 생각이다.

여기서는 그러기 전에 먼저 작품 해제 두 편을 옮겨둔다. 하나는 '서울대 권장도서' 해제로 동아일보에 게재됐던 것인데, 필자는 김희숙 교수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래전에 다른 지면을 위해서 내가 쓴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과 사상을 집약하고 있는 그의 마지막 소설이자 19세기 러시아 장편소설의 위대한 시대를 장엄하게 끝맺는 걸작이다. 이 소설은 신에 의해 세상에 허용된 악에도 불구하고 신을 변호하고 창조의 목적론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구상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영원한 주제(믿음 자유 악 구원 인류의 운명에 관한 문제들)를 범죄소설의 틀을 빌려 탐구하며 그 속에서 친부 살해를 카라마조프 집안의 사건을 넘어선, 아버지―신의 살해라는 이념적 차원과 연관시킨다. 그는 각각 정념과 이성과 신앙을 대변하는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 형제의 삶과 의식을 좇아가면서, 무신론적 합리주의나 공리주의가 아닌 영혼의 자유와 진정한 인간애, 속죄, 수난, 부활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하는 신앙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이 신앙을 소설에서 실천하는 인물은 알료샤와 그의 영적 아버지인 조시마 장로다. 그러나 작가의 창작 계획상 미완으로 머문 이 소설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진리를 자신의 내면에 지닌 ‘신의 인간’ 알료샤가 아닌 ‘마돈나의 이상’을 동경하면서도 끊임없이 ‘소돔의 이상’에 이끌리며 자신의 고통을 통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죄’의 의식과 인간성의 부활로 나아가는 드미트리다.

-그 못지않게 흥미로운 인물은 합리주의자 니힐리스트를 자처하며 “이 세계의 입장권을 신에게 돌려주겠다”는 ‘반역자’ 이반이다. 그의 창조물인 대심문관에 따르면 내적 자유를 감당하기에 너무 약한 존재인 인간에게 자유는 곧 저주다. 그런즉 자유를 인간에게 부여했던 그리스도는 기적, 신비, 권위에 의거하여 자유 대신 빵과 지상낙원을 보장하는 공식적 기독교에 의해 수정되어야 한다.

-‘대심문관의 전설’은 로마가톨릭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비판으로서, 신적 원칙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에 대한 분석으로서 강력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스스로를 ‘불신과 회의의 자식’이라 불렀던 본래 성향과는 모순되게 작가가 자신에게 부과한 과도한 종교적 역할은 소설에 의도치 않은 파열을 가져온다. 과도하게 열렬한 믿음은 오히려 긍정을 부정과 동행케 한다.

-그는 반역자 이반과 대심문관의 반대편에서 영혼 불멸과 진정한 신앙을 열렬히 전도하지만, 이반의 말 속에는 그의 목소리가 함께 울린다. 대심문관에 대한 그리스도의 입맞춤 역시 인류에 대한 사랑에서 그들의 지상적 행복을 위해 자신의 영원한 행복을 희생하는 자에 대한 이해와 용서를 누설한다.

-이반도 파열을 보인다. 그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의심하며, 믿음을 갈구하나 오만함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한다. 작가에게 나타나는 파열, 타락의 심연과 천상의 심연을 마음속에 함께 지닌 인물들, 찬반 사이에서의 흔들림 때문에 이 작품은 변신론자 도스토예프스키의 실패한 명제소설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실패는 소설의 ‘예술적’ 성공을 의미한다. 미의 본성에 대해 드미트리가 한 말 ‘소돔의 이상과 마돈나의 이상을 동시에 찬미하고 추구하는 것’은 이 소설 전체에도 적용된다. 영혼의 불멸과 구원의 문제에 천착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는 소돔에서 마돈나에 이르는 모든 길에 뻗쳐 있는 이율배반으로 가득찬 삶, 살아 있는 삶에 바치는 송가다.

이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이미 제목에서 알 수 있는 대로 카라마조프 집안의 사람들이다. 아버지인 표도르와 그의 세 아들,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 그리고 사생아인 스메르자코프가 이 집안의 구성원들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다른 장편 소설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의 전체적인 이야기는 범죄소설적인 구성을 따르고 있다. 즉, 친부 살해라는 모티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탐욕스럽고 방탕한 노인 표도르와 큰아들 드미트리는 그루센카라는 여인을 두고 질투와 증오 속에서 서로 반목한다. 그러는 중에 표도르가 살해되자, 혐의는 당연히 드미트리에게 간다. 하지만 표도르를 살해한 사람은, 둘째 아들 이반의 정신적 사주를 받은 스메르자코프였다. 스메르자코프가 죽는 바람에 드미트리의 무죄 입증은 어려움에 처한다. 드미트리는 비록 직접 아버지를 살해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고 시베리아 유배길에 오른다. 이렇듯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 전개에 재미와 깊이를 부여해 주는 것은, 이 세 아들이 대표하는 인간형이다.

큰아들 드미트리는 무엇보다도 정념의 인간이고 미학적 인간이다. 그는 '마돈나의 이상'(성스러움)을 동경하면서도 끊임없이 '소돔의 이상'(추악함)에 이끌리는 양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면성이 가능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 너무나 넓기 때문이고, 또 이 양면성이 그가 보기에 미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미는 마돈나에만 깃들여 있는 것이 아니라, 소돔 속에도 깃들여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는 두려우면서도 신비스러운 것이라고 드미트리는 말한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그의 여러 모순적인 행동들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둘째인 이반은 이성적인 인간으로서, 작품 속에서 서구의 합리주의와 무신론의 입장을 대변한다. 그가 제시하는 무신론의 핵심은, 동생 알료샤에게 들려주는 '대심문관의 전설'에 집약되어 있다. 대심문관은, 무지한 인류를 영원히 사로잡을 수 있는 세 가지 힘, 즉 기적, 신비, 권위를 거부하고, 지상의 빵 대신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그들을 영원히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그리스도를 비난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에겐 선택의 자유, 양심의 자유만큼 짐스러운 것이 없다. 인간은 무력하기 때문에 자신을 이끌어 줄 강력한 힘과 물질적인 풍요를 갈망하게 되는데, 그리스도는 이러한 '인간적인'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심문관의 논리를 서구적 합리주의, 공리주의, 무신론, 사회주의, 그리고 모든 형태의 사이비 메시아주의의 논리이다.

이반이 이러한 논리의 인간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감성마저 배제된 인간인 것은 아니다. 사실, 그가 부정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신이 창조한 세상,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이다. 신이 만든 세상에서 고통받는 인류, 특히 고통받는 어린아이에 대한 연민과 사랑 때문에 천국 입장권을 반환하겠다는 그의 말에서 우리는 그가 가진 논리의 기원을 엿볼 수 있다.

막내인 알료샤는 종교적 인간이고 신앙의 인간이다. 광활한 러시아적 영토에 걸맞는 드미트리의 영혼이 러시아의 현재를 상징하고, 이반의 무신론이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당대의 여러 지식인들이 제시한 서구적 합리주의 정신을 상징한다면, 알료샤의 신앙은 작가가 제시하는 미래의 러시아를 상징한다.

작가는 인간 영혼의 자유와 사랑, 그리고 부활에 대한 희망을 토대로 하는 신앙만이 인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진정한 힘이라고 믿는다. 알료샤는 이러한 작가의 믿음을 소설 속에서 실천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사실, 알료샤의 성격과 이념적 입장은 이 작품에서 드미트리나 이반에 비해 완정하게 형상화되어 있지는 않다. 그것은 이 작품이 지닌 미완의 성격과 연관된다. 당초 작가는 알료샤를 주인공으로 이 작품을 구상했고, 이 작품은 알료샤의 어린 시절에 일어난 한 사건, 즉 아버지 살해 사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료샤가 대표하는 인간형에서 러시아의 미래에 대한 작가의 희망과 암시적 대안을 읽어내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자유와 양면적인 본성을 억압하는 대가로 경제적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당대의 어떠한 이념에도 반대했다. 그가 수용할 수 있었던 유일한 유토피아는, 불합리하고 변덕스러우며 때로는 한없이 무능력한 존재인 인간이 자유로운 선택과 고통, 그리고 수난을 거쳐서 도달하게 될 신의 왕국이었다. 이 신의 왕국은 "만인은 만인에게 죄인이다"라는 죄의 공동체 의식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한 죄의 속죄 과정에서 겪게 되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다름 아닌 인간성 부활의 희망이 된다.

이 작품에서 드미트리가 겪는 고통과 그의 영혼의 부활은 바로 이러한 도식 속에서 전개되며, 이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창작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와 연결된다. 그것은 바로 '수난을 통한 구원'이라는 주제이다.

 

06. 0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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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2006-05-30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제가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이고 늘 주변사람에게 권하곤 하는 책입니다, 혹시라도 안 읽은 사람이 있으면... 전 중 3 여름방학때 처음 접했었는데, 정말 충격이었죠.
도프토예프스키의 소설은 쉽게 손이 가지 않는 책입니다만(무게로나 양으로나 말이죠 ^^) 늘상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6-05-30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내 인생 최고의 책'으로 올려놓으셨군요.^^ 브루벨의 그림도 좋아하시는 걸 보면, '러시안 필' 하셔도 되겠습니다.^^

Bartleby 2006-06-10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