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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지바고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3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지음, 오재국 옮김 / 범우사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시인이자 작가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와 닥터 지바고의 삶은 분리되어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소설의 작가와 주인공의 관계라기 보다는 시인과 시적 화자(poetic hero)의 관계에 가깝다.

러시아 문학의 전통에서 보자면,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이 '시로 쓴 소설'이었다면, 그러한 전통을 마감하는 <닥터 지바고>는 '소설로 쓴 시'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는 바, 이 작품 속에서의 지나친 우연의 남발은 일종의 '고의적인' 시적 기법의 일종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하다.

노벨상 수상과 데이비드 린의 영화로 더 유명해진 이 소설은 덕분에 20세기의 걸작 몰록에도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만한 유명세도 치르는 듯하다. 덕분에 이 작품은 그동안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그리고 지나치게 '멜로 드라마적'으로 읽혀왔다.

'눈덮인 설원에서의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 이야기'쯤으로 요약되어 온 것이다. 물론 그런 면이 없진 않다. 하지만, 작가 자신, 혁명기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동시대인들에 대한 일종의 '빚갚음'으로 이 작품을 구상했다는 고백을 음미해 봄 직하다. 다른 무엇보다는 이 소설은 역사 속에 놓인 한 인간의 삶과 그 의미에 관한 것이다.

여주인공 라라를 놓고 삼각관계를 이루는 두 인물, 지바고와 파샤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혁명과 관계한다. 지바고는 방관자적 지식인의 비겁한 삶을 끝까지 유지하며, 반대로 파샤는 적극적인 행동가로서 혁명(역사)에 적극 개입하지만, 둘다 불운한 죽음을 맞는다. 파샤는 자살하고, 지바고는 자신의 유고 시들을 남긴 채 길거리에서 죽음을 맞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 죽음이 삶의 의미인 것일까?

작가는 이야기가 종결된 이후에 유리 지바고의 시들을 덧붙임으로써 그의 삶이 예술을 통해서 부활함을 암시한다. 한 인간의 삶은 타인들의 기억 속에서, 그리고 그가 남긴 예술적 창작 속에서 촛불처럼 '타오르는 것'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세계를 바꾸는 일을 한갓 하찮은 일로 치부했던 라라와 지바고의 세계관에 다 동의할 수는 없어도, '역사'라는 명분에 굴복(?)하기 보다는 사회와 역사 속에서 내적 망명자의 길을 택한 한 시인의 삶을 존중할 수는 있다.

<닥터 지바고>의 운명은 그러나 주인공의 지바고의 삶과는 대조된다. 이 작품이 1958년 노벨상 수상작으로 선정되면서 내적 망명의 삶에서 꺼내어져 스캔들에 휘말려 든 파스테르나크는 2년만인 1960년에 건강악화로 사망함으로써 '역사'의 비정함을 또 한번 입증하였다. 그리고 우리에겐 파스테르나크의 마지막 시로서 <닥터 지바고>가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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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30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캉과 정신분석 혁명
셰리 터클 지음 / 민음사 / 1995년 11월
평점 :
절판


국내에도 이미 프로이트 전집이 번역 출간되어 있고, 전문학회(라캉과 현대정신분석학회)도 구성되어 있는 만큼, 정신분석 '문화'를 위한 조건은 조금씩 갖춰져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직은 정신과(정신의학)나 정신분석에 대한 일반인들의 편견과 의혹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20세기 중반까지의 프랑스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고 하니 섣불리 판단할 일은 아닌 듯싶다.

<라캉과 정신분석 혁명>은 프랑스에서의 1968년 혁명을 기점으로 정신분석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태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통시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일종의 지성사적 '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프로이트 이후의 대표적인 정신분석학자이자 이론가인 자크 라캉이다.

난해하기로 이름난 사상가이자 '지적 사기' 한 우두머리로 지목되기도 하는 라캉은 정신분석학계에서는 이단자에 속한다. 저자인 셰리 터클은 파리정신분석학회에서 프랑스정신분석학회가 분리되어 나가고, 또 프랑스정신분석학회에서 라캉 일파가 떨어져 나가 프로이트 학교를 세우게 되는 과정, 거기에 이 프로이트 학교 내에서까지 내분이 생겨나는 과정을 많은 자료와 인터뷰들을 통해 재구성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이론뿐만 아니라 라캉이란 인물 자체의 모순이 이러한 분열과 분파에 한몫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정신분석이론을 시(적 수사학)이면서 동시에 과학으로 밀고 나가려는 기획에 어찌 모순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캉은 매력적인데, 이에 대한 저자의 해명에 공감이 간다. 터클은 이렇게 적고 있다.

'정신분석의 비전에서 가장 급진적인 것은 우리 내부의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며 라캉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과 자신 안에서 대면하도록 끊임없이 촉구한다고 많은 분석가들은 믿는다. 이것이 라캉 세미나의 위력이다.'(304쪽)

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차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중심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에 라캉의 안티-휴머니즘이 놓인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껄끄러운 진실이다. 따라서 정신분석의 수용은 동시에 그에 대한 저항을 함축한다. 프로이트도 지적한 바 있지만, 정신분석에 대한 저항 없는 수용이란 미심쩍은 것이다. 라캉에 대한 유혹은 분명 그에 대한 반감과 교차한다. 그의 이론에 대한 끌림은 그에 대한 거부감과 한몸이다. 인간의 자신에 대한 앎은 항상 이러한 모순 속에 놓인다고 라캉은 우리에게 가르치는 듯하다.

이미 여러 권의 라캉 입문서들이 나와 있지만, 그 이론의 테두리를 알지 못한다면, 이론의 '이해'라기보다는 '암기'에 그칠 확률이 높다. 그런 의미에서 라캉에 관심있는 독자들에게는 <라캉, 어느 지적 영웅의 죽음>과 더불어 추천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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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렌티우스 2006-12-09 14: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번역한 책을 읽을 만한 책으로 추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자로서 말씀 드리면 우리말 <라캉, 어느 지적 영웅의 죽음> 번역본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공들인 부분은 라캉류 영미 정신분석 문학비평의 한 흐름을 보여주는 책 자체의 옮김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더, 책 뒤에 부록으로 달린 프로이트/라캉의 관련 서지입니다...

지금은 격세지감을 느낄만치 달라졌지만 제가 책을 번역하던 90년대 중후반 당시에는 극소수의 전공자들을 제외하고는 라캉이란 이름 자체가 그저 생소하다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이 부분은 제가 선택하고 - 혹은 이런저런 인연, 추천으로 선택당하고(?) - 번역한 모든 책들에서 제가 의식적으로 공을 들이는 부분입니다...

문헌학 없는 학문이란, 없는 것, 혹은 그야말로 '모래 위에 쌓은 성'일테니까요...

그런 면에서 로쟈님 같은 서평 전문가 혹은 번역평(?) 전문가의 존재는 같이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몹시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학자로서의 긴장을 늦출 수 없도록 지탱시켜주는 몹시 소중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알라딘에서의 로쟈님의 노고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날카롭고도 따뜻한 로쟈님만의 '지적이고도 지젝적인 지적'(^^) 바라보겠습니다...

로쟈 2006-12-09 15: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허선생님이신가요?^^ 면식은 없지만 반갑습니다. <푸코>는 중복이어서 안 갖고 있는데, 구입해봐야겠습니다. 참고서지가 자세하게 붙어 있는 건 다 이유가 있었군요. 여하튼 귀국(?)하신 듯도 하니까 저도 많은 활약을 부탁드리겠습니다.^^

2006-12-09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테렌티우스 2006-12-09 2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엇 답글을 달아주셨군요 ...^^ 감사합니다. 저도 반갑습니다...

프로이트와 라캉의 서지는 '쟈크 라캉, 지적 영웅의 죽음'(인간 사랑)에, 라캉 연표는 라캉 이론의 신화와 진실(이 '비라캉적인' 제목 이거 제가 붙인 것 아닙니다...-_-, 민음사)에, 들뢰즈 서지는 '푸코'(동문선)에, 출간 당시까지의 사정을 정리해 두었고, 푸코 관련 부분은 귀국하는대로 제가 단행본으로 출간하려는 '푸코와 근대성'에 부록으로 달릴 것입니다. 푸코에 관심을 가진 88년 부터 정리한 것이니 상당한 분량이 될 것입니다...

문헌학과 관련한 제 입장은 한 사상가의 저작의 전모를 파악하기 이전에 섣불리 글을 쓰는 것은 한계가 너무도 명백하다... 이런 정도가 되겠습니다... 그 판정의 기준은 애매하지만 학자로서의, 아닌 한 교양인으로서의 평균적 양식을 갖춘 사람은 자기가 이런 글을 써도 되는지, 이런 책을 번역해도 되는지 스스로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댓글 주셔서 감사하고요, 앞으로도 자주 뵐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로쟈 2006-12-09 2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님/ 여유시간을 가지시는 거 보면 논문은 다 통과되신 모양이군요.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출간하실 책은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애쓴 글들도 있지만 그냥 책소개를 위해 만들어놓은 글들도 많은데 적당히/대충 추려서 읽어주시길.^^

테렌티우스님/ "문헌학과 관련한 제 입장은 한 사상가의 저작의 전모를 파악하기 이전에 섣불리 글을 쓰는 것은 한계가 너무도 명백하다"고 하신 건 존중할 만한 의견입니다(미네르바의 부엉이를 떠올리게도 하고). 다만, 저로선 그것이 학자나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나 '한 교양인'에게는 무리한 요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더구나 그가 생존 작가이거나 사상가라면 '전모'에 대한 기대는 어려운 게 아닐까요?). 그러한 읽기라면 사실 푸코 한 사람을 읽기에도 벅차며, 누구 말대로 <말과 사물>을 읽으려면 10년을 공부해야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기에는 책도 사상가도 너무 많지요. 제 입장은 병행하는 것입니다. 책읽기도 정독과 속독이 두루 필요하듯이 사상에 대한 이해도 학문적 탐구와 함께 교양적 이해 또한 병행될 수 있다고 보는 편입니다. 아무려나 상당한 무게의 책이 출간될 거 같다는 예감을 갖게 됩니다. 건강하시길...

테렌티우스 2006-12-10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적하신 비전문가의 문제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입니다. 저로서는 저와 크게 보아 같은 문제의식을 다른 측면에서 지적해 주신 것이라 생각되는데, 바로 그런 의미에서 전문가는 관심이 있고 열린 마음을 가진 일반 독자를 위한 적절한 가이드 라인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는 서지는 비단 전문가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비전공인들에게도 - 그 사상가를 읽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기존의 일정한 정보와 성과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고를 덜기 위하여 - 각각 사상가, 주제들에 대한 관련서, 논문 등에 대한 서지 정리와 함께 가능하다면 간략한 전문가로서의 소견을 밝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로쟈님이 알라딘에서 진행하시는 리스트나 페이퍼와 같은 방식도 하나의 좋은 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를 들면 <쟈크 라캉, 지적 영웅의 죽음>에 제가 부록으로 만들어 추가한 프로이트/라캉 서지도 바로 이런 원칙으로 작성되었고요...


사실 제가 푸코를 전공하지만 비단 언어만이 문제만이 아니라 푸코의 예를 들어 본다면 그의 <말과 사물> 같은 책은 프랑스 대학의 웬만한 영문학 교수라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지적 게임, 계약들로 이루어 있습니다(사실을 고백하건대 제가 이 책을 사실 대충이라도 '제대로' 이해하는데 정말 거짓말같이 위에서 말한 것처럼 10년 정도가 걸렸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논리적인 논박이 아니라, 순전히 주관적인 '너 나만큼 고생했어, 원전 다 읽었어, 세컨더리 다 읽었어!' 같은 식의 '윽박/협박'은 정중히 사양하고요).

사정이 이러하다면 한국 독자의 경우, 푸코 사상 전반에 대한 불어, 영어 - 가능하다면 독어, 일어까지 - 로 된 원전을 포함한 주요 2차 문헌들(우리말은 말할 것도 없고 이상의 언어로 된 저작, 논문들)에 대한 서지 및 가능하다면 간단한 작성자의 소견을 적은 소개, 정리의 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러한 부분은 그것이 자신의 전공인 이상, 스스로의 학문을 위한 탐구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선택되고, 정리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이에 대한 인식과 그 필요성에 공감하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하고 있는 서지 작업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고, 또 그런 의미에서 로쟈님이 지적해주신 위의 '지식의 민주화 과정'은 지식인, 전공인에게는 선택이 아니라, 하나의 의무로서 제시된다고 봅니다.

사실 이부분은 서구 지식인들의 비반성된 엘리트주의를 생각해 보건대, 역시 단절의 역사를 경험하지 않은 지배적 문화의 사상가들이 보이는 자의식, 쉽게 말해 아직 '계몽'이 덜 된 부분이라고 봅니다.

사실 사상가는 너무도 많고, 읽을 책 또한 너무도 많으며 - 그것이 바로 배우고 때로 익히는 기쁨이고요! ^^ - 더구나 생존 작가의 경우에는 소위 '전모'를 파악한다는 것이 비전공자는 물론, 전공자에게조차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

그렇지만 바로 그런 의미에서 위에서 지적된 지식의 민주화 작업, 병행 작업은 더욱 더 필요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런 부분에서 '병행'이라는 로쟈님의 방법론에 제가 적극적으로 동의하면서, 로쟈님이 알라딘에서 진행하시는 작업에 공감과 감사의 마음을 표하는 것입니다.

2006-12-10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2-10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테렌티우스님/ 제 서재에 원래 댓글이 뜸한 편인데, 모처럼 장문의 유익한 댓글을 달아주셔서 기쁨니다. 우리가 아직 '계몽'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데 합의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잘난 체하는 계몽이 아니라 나누는 계몽...

**님/ 우여곡절이 있으셨군요. 명장 밑에 약졸 없다고 했으니까 걸출한 논문일 거라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미리 감사드려야겠군요.^^
 

라캉의 용어 중 jouissance는 그간에 '향락' '희열' 등이 사용됐지만, 홍준기의주장 이후(<라캉의 재탄생>, 102-3쪽) '향유'를 선호하는 이들도 많아진 듯하다(jouissance는 바르트도 사용하는 용어인데, 라캉과 바르트 중 누구에게 우선권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연배로 봐선 바르트가 빌어온 거 같기도 하고. 영어로 라캉의 jouissnace는 보통 enjoyment로 번역하며, 바르트의 jouissance는 enjoyment도 쓰지만, 더 자주 눈에 띄는 건 bliss이다.)

 

 

 


물론 최근에는 상식적인 '쾌락'을 번역어로 사용하는 이들도 있지만(라캉에 대해서 좀 안다는 이들로부터 욕을 먹기 십상이다), 기본적으론 그것이 pleasure와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쾌락'이 pleasure의 번역어로서 거의 굳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지 jouissance의 번역어로 불가능한 건 아니다. 여기서 jouissance의 번역어가 갖춰야 할 최소조건을 추출할 수 있는바, 첫째는 pleasure(쾌락)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쾌락원칙을 넘어선 '과도한' 쾌락이란 의미를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홍준기가 정리한 바에 따르면, 주이상스의 번역어는 (1)고통 속의 쾌락 (2)죽음의 충동과 결합된 쾌락 (3)법적 개념인 용익권과의 연관성이 드러나야 한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그가 제안/고집하는 것이 '향유'이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데, 홍준기는 (3)번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정작 중요한 (1), (2)번은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말 '향유(享有)'는 '누려서 가짐'이란 뜻으로 원래 성적인 뉘앙스가 거의 없는 말이다. '자유와 풍요를 향유하다'라고 할 때처럼, 그것은 보통 어떤 긍정적인 가치를 풍족하게 소유하여 즐긴다란 의미를 갖는다. 즉, 거기에는 '고통'이나 '죽음'과의 의미론적 연관성이 희박하다. 만약에 그런 뉘앙스를 담고 있다면, '모든 국민이 자유와 풍요를 향유하는 사회'와 같은 '국가적' 캐치프레이즈는 넌센스가 될 것이다.

또 하나 '향유'란 말은 '소유'와의 연관성 때문에 계급적인 뉘앙스를 갖는 말이다. '향유'란 말에서 내가 떠올리는 이미지는 대리석 욕조에서 거품목욕하거나 명품쇼핑에 나선 여피족들인데, 거기에 어떤 '고통 속의 쾌락'이 있는 것인지(정말 비명을 지르며 목욕하고, 아주 괴로워하며 '이거 얼마나 하나?'라고 묻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법적인 뉘앙스를 살려서 우리가 '삶을 향유할 권리'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자기 삶을 망치고 패가망신할 권리'란 뜻으로 새기는 것인지?

원래 법학을 전공했던 홍준기로선 '법적 개념'과의 연관성 운운하며, '향유'를 제시할 때, '안다고 가정된 주체'로서 자신을 위치시키며 자신의 기득권을 얼마나 '향유'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향유에는 어떠한 '고통'도 부재하다는 점에서, 나는 '향유'라는 번역어가 내키지 않는다. 그리고 번역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부족한 건 법학이나 정신분석학 공부가 아니라 국어 공부이다.

주이상스의 번역어로 내가 선호하는 것은 '향락'인데, 물론 그것이 완벽한 번역어이기 때문은 아니다(거듭 말하지만, 번역의 조건은 번역의 불가능성이다). 하지만, 내가 앞에서 내세운 두 가지 최소조건을 향락은 충족시킨다. 즉 (소유를 연상시키는) 향유와는 달리, (쾌락과 운을 맞추는) 향락은 쾌락과 구별되는 짝개념으로서 유용하다(나는 사실 '희열'에도 반대하진 않는다. 다만, '향락'이 더 편리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향락'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고통 속의 쾌락' '죽음 충동과 결합된 쾌락'의 의미를 여러 후보들 가운데 가장 잘 전달한다는 것이다.'향락산업'이란 말에도 암시되어 있듯이('향유산업'이나 '희열산업'은 없지만), 그것은 어떤 지나친/과도한 쾌락 추구라는 '부정적' 뉘앙스를 담고 있다. 즉 쾌락원칙을 넘어서는 과도한 쾌락으로서의 향락을 추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 삶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나는 '향유'가 그런 뉘앙스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맥락에서, 오역을 향유하는 번역서 <향락의 전이>의 최대 기여는 '향락'이란 번역어를 보다 익숙하게 만든 거라고 나는 생각하며, 주이상스의 번역어로 '향락'을 지지한다. '향유'를 고집하는 이들이 어떤 반론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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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2-25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서평이나 글을 볼때마다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번역의 오류를 집어내는 데는 일가견이 있음! 로쟈님의 글이 출판사에 흘러들어가서 앞으로 나오는 책에 반영되지 않는 것은 너무나 아까운 일이다.
아니면 직접 번역계로 투신한다면, 로쟈님의 번역서는 다 사서 볼 용의가 있다.

로쟈 2004-02-25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른 번역서들을 내야겠네요^^ 사실 제가 오역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데 좀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건 분통이 터져서입니다. 보통 1-2만원 이상하는 고가의 인문 번역서들을 사서 읽는데, 전혀 이해할 수 없고, 게다가 그 원인이 엉터리 번역에 있다고 하면 정말 분통터질 일이지요(책은 환불도 안되고!). 우리식 출판관행이 단기간에 바뀔 리는 없겠지만, 하여간에 싸울 건 싸우고 얻을 건 얻어야겠습니다. 독자의 제몫찾기 차원에서!...
 

지난 12월초에 미국의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D. Rumsfeld)가 영국의 한 시민단체인 PEC(바른 영어쓰기 캠페인)로부터 ‘올해의 횡설수설상(Foot in Mouth)’을 받았다. 수상의 빌미가 되었던 2003년 3월의 한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There are known knowns. These are things we know that we know. We also know there are known unknowns. That is to say, there are things that we know that we don't know. But there are also unknown unknowns. There are things we don't know we don't know."



이 연설은 지난 10월에 방한했던 슬라보예 지젝의 한 강연문(<생물유전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에서도 인용된바 있는데, 지젝의 분석에 따를 때, 럼스펠드는 여기서 일종의 지식의 유형학을 제시하고 있다. 즉 그에 따르면, 우리에겐 (ⅰ) known knowns(이미 알고 있는 걸 아는 것) (ⅱ) known unknowns(아직 모르고 있는 걸 아는 것) (ⅲ) unknown unknowns(아직 모르고 있는 걸 모르는 것)이라는 3가지 종류의 지식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분류에서 논리적으로 가능하지만, 최강국의 국방장관이 (무)의식적으로 억압/배제하고 있는 마지막 한 종류의 앎이 있는바, 그것이 바로 (ⅳ) unknown knowns(이미 알고 있는 걸 모르는 것)이다. 지젝은 바로 그것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지식(knowledge which doesn't know itself)”으로서의 프로이트적인 무의식이라고 말한다. 즉, 그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부인된 믿음과 가정들이다.

 

2003년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라크전쟁’(이런 중립적 표현은 사실 부적절하다. ‘이라크공격’ 혹은 ‘이라크침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의 해로 기억될 것인바, 그 전쟁을 주도했던 부시행정부(와 미국인들)에 의해서 간과된 이 타자적 앎으로서의 ‘무의식’은 최강국의 이성, 혹은 초자아가 놓치고 있는 어떤 앎이자, 실재의 중핵이다. 9.11과 이후의 국제정세를 다룬 책들은 제법 나와 있지만, 이러한 중핵을 건드리고 있는 책이 지젝의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Verso, 2002)이다.  

그리고, 9.11 1주년을 맞이하여 그와 관련된 다섯 편의 에세이를 묶은 이 책의 국역본이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인간사랑)란 제목으로 지난 10월에 나온바 있다. 하지만, 이 우리말 번역본은 대개의 지젝 번역서들과 마찬가지로 무능하기 짝이 없는 책이어서, 유감스럽게도 지젝의 고뇌와 만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책읽기의 고난 속에서 허우적거리게만 할 뿐이다. 그러니, 아무리 원저가 좋은 책이라 한들 이 번역본을 추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내가 바라는 바는 제대로 된 번역본이 다시 나오는 것이다).

대신에 여기서는 이 책에서의 인상적인 주장 하나만을 뭉뚱그려서(약간은 번안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허위적인) 종언 이후의 ‘그저 그런 삶(mere life)’을 ‘진정한 삶(real life)’과 대비시킨다. ‘그저 그런 삶’은 자신의 삶에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는 삶이며, 자신의 기득권이 아무 탈 없이 그대로 (자자손손) 보존되기를 매주 기도하는 삶이다. 그것의 정치적 버전이 자유민주주의인바, 지젝이 보기에, 자유민주주의의 최대 관심사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곧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마하는 일이다(미국의 대통령은 한달씩 여름휴가를 떠난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는 무-사건의 당이다”(Liberal democracy is the party of non-Event).

그러한 ‘그저 그런 삶’의 경제적 버전은 ‘아무일 없는 삶’(흔히 ‘여유로운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열심히 일했다고 저 혼자 ‘떠나는 삶’이며, 무료한 삶을 명품 브랜드들로 치장하느라 등골이 빠지는 ‘럭셔리한 삶(luxurious life)’이다(이상은 지젝의 용어들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본질적으로 아무런 이벤트도 없는 삶을 끊임없이 이벤트화하고 스펙터클화하기 위해 난리법석을 떠는 것이 포스트모던한 후기 자본주의의 삶이다.

사실, 지난 한해 우리사회에서 유행어가 되었던 ‘10억’은 이 ‘럭셔리한 삶’에 진입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을 지시하는바, 어느 사이에 ‘진정한 삶’에 대한 기대나 열망 대신에 우리 삶의 풍경이 된 것은 여기저기서 억! 억! 하는 ‘10억의 삶’, ‘럭셔리한 삶’에 대한 집요한 탐욕이다(물론 여기서의 ‘10억의 삶’은 지극히 서민적인 레벨에서의 목표치이긴 하다). 하지만, 아무리 호사스럽다 하더라도 ‘럭셔리한 삶’의 본모습은 아무일 없는, 더불어 의미도 없는 ‘그저 그런 삶’일 뿐이며, 그것은 살아 있지만 이미 죽어 있는, 산송장(living dead)들의 적극적인 가장(假裝)이자 자기연출에 불과하다.

이러한 풍경을 두고, 지젝은 그가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말을 빌려서, 이렇게 묻고자 한다. “당신은 진정 살아있습니까?” “(유복한 나라의 국민들이여!) 9.11 이후에도 진정 당신들은 살아있습니까?” 그러한 물음이 전제하는 것은 ‘그저 그런 삶’과 ‘진정한 삶’의 존재론적 차이 혹은 거리이다. 단순히 ‘그저 있는 것들’(=얼빠진 것들) 혹은 ‘좀 있다고 하는 것들'(well-being족들)은 ‘정말로 있는 것’이 아니며, 멀쩡히 숨쉬고 두발로 걸어 다닌다고 해서 정말 살아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열린책들)의 러시아 작가 자먀찐의 표현을 빌면, 인간 중에는 ‘살아있고-죽어있는’ 인간과 ‘살아있고-살아있는’ 인간이 있다. 그는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고 기계처럼 행동하는 ‘살아있고-죽어있는’ 인간과 달리 실수와 탐구와 질문과 고통 속에서 존재하는 인간을 ‘살아있고-살아있는’ 인간이라고 분류한다. 이 차이에 대한 예민한 의식, 자신이 자리잡고 있는 곳에 안주하며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로 있어야 할 곳에 나는 있지 않구나라는 의식에서부터 ‘진정한 삶’으로의 이행을 위한 준비는 마련될 수 있다.

 

 ‘진정한 삶’이란 사건은 다른 것이 아니다. ‘살아있고-살아있는’ 인간들의 실수와 탐구와 질문과 고통을 대가로 얻어지는 사건이란 러시아말로 ‘싸브이찌에(sobytie)’, 곧 ‘함께-있음(being-together)’이란 뜻이다. 때문에 그것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력공격과 같은 유사-행위와는 가장 거리가 멀다. 진정한 행위(action)란 ‘그저 그런 삶’에서 ‘진정한 삶’으로 나아가는 결단을 담지하고 있는 행위이다.

그러한 이행의 길(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초자아의 길(the way of superego)과 행위의 길(the way of the act). 제국주의의 압제에 대항하기 위한 9.11의 테러리스트들의 행위나 <죄와 벌>에서 19세기 러시아의 전제주의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벌어진 라스콜리니코프의 노파 살해가 (부정적이면서도 불가피한) 초자아의 길을 보여준다면(‘살아있는 삶’(zhivaja zhizn')은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핵심적인 주제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진정한 행위의 길이며, 함께-있음의 윤리이다. 이것이 9.11의 교훈으로서 우리가 깊이 새겨두어야 할 ‘unknown knowns’이다.


하지만, 럼스펠드의 사례에서 보듯이, 이 ‘unknown knowns’가 국제사회에서 진지하게 공유될 가능성은 아직 희박해 보인다. 불운하고도 유감스럽게도, 9.11이라는 실재의 충격에 의해서 ‘진정한 삶’으로의 이행이 촉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저 그런 삶’에 대한 집착이 더 강화되고 미국의 패권주의만 더 심화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한 패권주의에 동참하기 위해서, 아니 그러한 패권주의에 한 대 얻어맞지 않기 위해서, 새봄엔 이라크에 한국군이 파병된다고 한다. 이건 좀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살아있지만-죽어지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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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발바닥 2004-10-20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오역에 관한 따끔한 질책들을 보다가 로쟈님의 서재를 즐겨찾게 되었습니다.
지젝이 제시했다는 '그저그런 삶'과 '진정한 삶'에 관한 부분이 제 온몸을 때리네요.
평소에 무언가 이게 아닌데..라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내가 '그저그런 삶'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지젝의 그 책을 읽고 싶은데 지금으로서는 원서를 읽을 수밖에 없는 것 같군요. 철학적 배경지식 없이 지젝의 원서 읽기가 가능할까요? (참, 이 글 퍼가도 될까요?)

로쟈 2004-10-20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적 배경지식 없이 지젝의 원서 읽기가 가능할까요?" Yes, if you read(struggle with) him, you can get 철학적 배경지식 from him. "참, 이 글 퍼가도 될까요?" Why not?
 

지젝의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인간사랑)를 읽고 있다. 이미 지젝의 책들은 오역으로 악명이 높은바, 이 책 또한 예외는 아니며, 차라리 나오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책이다. 그렇게도 재미있으며 도발적인 책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엉터리로 무책임하게 번역되는 것인지 의아스럽다. 역자는 이러한 사태를 초래한 몇몇 주요 인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나르시시즘이 엉터리 독해력과 결합해서 빚어내고 있는 이 '오역의 모험'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그걸 독자는 언제까지 견뎌내야 하는 것인지. 지겨운 지젝! 물론 지겨운 건 지젝이 아니라 그 불성실한 번역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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