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2004)에 대한 연속적인 브리핑이다. 가능하다면 이 글에서는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글 '모더니즘 회화'(<예술과 문화>)를 함께 정리하고 싶다. 그러니까 그린버그가 정의하는바, 미술에서의 '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까지 다루고 싶은데, 그린버그가 준거로 삼고 있는 것은 칸트 미학이다. 칸트와 그린버그에 대해서는 김광명 교수의 '칸트와 그린버그: 모던 미학에 대한 논의', <칸트와 현대 영미철학>(철학과현실사, 2001)을 참조할 수 있다. <예술과 문화>의 역자가 그린버그 전공자로서 박사학위논문 외에 여러 편의 학술논문을 발표하고 있으므로 이 문제에 대하여 보다 전문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참조해볼 수 있겠다.

 

 

 

 

단토의 문제의식을 보다 폭넓은 시야에서 보고자 한다면, 신시아 프리랜드의 <과연 그것이 미술일까?>(아트북스, 2002)가 도움이 될 듯하다. 단토의 추천사에 따르면, "신시아 프리랜드는 매우 명쾌한 책을 썼는데, 그의 명석한 철학적인 지성은 실제 예술작품에 의해 제기된 난해한 문제들을 매우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내고 있다." 책에는 단토의 '예술의 종말론'도 2장의 '브릴로 박스와 철학적인 미술' 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예술의 종말 이후>를 읽은 독자라면 저자의 정리는 별로 새로울 게 없는데, 다만 80쪽에 실린 "앤디 워홀의 쌓아올린 '브릴로 박스'들이 예술인지 아닌지 곰곰이 생각중인 철학자 아서 단토"란 설명이 붙은 사진만은 흥미롭다(사실 이 사진 한 장이 모든 걸 말해준다!). 이 자리에 따오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한편, 미술의 개념/정의 못지 않게, 혹은 그 개념/정의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미술사에 대한 감각인데, 미술의 종말이라는 게 과연 무엇의 종말인가를 알기 위해서도 미술사에 대한 배경지식은 필수적이다. <과연 그것이 미술사일까?>(아트북스, 2005)는 다양한 미술사의 가능성에 대해서 조감하게 해준다. 그리고 실제적인 서양미술사에 대한 리뷰는 <서양회화사: 조토에서 세잔까지>(시공사, 2000)의 도판들이 저렴하고 유용하다. <손에 잡히는 미술사조>(예경, 2005)는 저렴하지는 않은 책이지만, 미술사조의 '개념'을 잡는 데는 가장  간편하고 따라서 유용하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는 것.    

지난번에 이어서 <예술의 종말 이후>의 1장 45쪽 이후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한다. 여기서 단토가 이야기하는 것은 철학에서의 모더니즘(=근대철학)이 데카르트적 코기토, 즉 (세계가 아니라)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나'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미술에서의 모더니즘도 미술에 대한 '자의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 "미술상의 모더니즘은 하나의 지점을 표시하고 있는데, 이 지점 이전까지는 화가들이 인물과 풍경과 역사적 사건을 눈에 드러나는 그대로 그리고 세계를 나타나는 대로 재현하고자 했다. 모더니즘과 함께 재현의 조건들이 핵심적이게 되며,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미술이 미술 자체의 주제가 된다."(47쪽, 강조는 나의 것) 

칸트의 (모더니즘)철학에서 '인식'이 아닌 '인식의 조건'들이 문제되었듯이, 미술사의 모더니즘 또한 '재현'이 아닌 '재현의 조건'들을 문제삼으며, 이에 따라 미술 자체자 미술의 주제가 되었다. 마치 '사고하는 나'가 우리 생각의 주제가 되었던 것처럼. 그리고 모더니즘에 대한 이러한 규정은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선구적인 논문 '모더니스트 회화(Modernist Painting)'(1960)에 빚지고 있다(국역본의 번역은 '모더니즘 회화'이며, 이하에서는 '모더니즘 회화'라고 칭하겠다). 단토는 두어 쪽에 걸쳐서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회화론을 간추리고 그에 대해 논평한다(단토의 본격적인 '그린버그'론은 4장에서 다루어진다).

여기서는 이 요약을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회화'(<예술과 문화>, 344-353쪽)과 같이 읽도록 한다. 참고로, 국역본 논문은 <예술과 문화>의 원저에는 빠져 있는 것을 역자가 부록으로 보충한 것이다. 내가 참조한 원문은 4권짜리 그린버그 선집 중 제4권(1995)에 실린 것인데(85-93쪽), 저자가 몇 차례 수정한 논문이어서인지 국역본과는 약간 차이가 난다(역자는 1965년 수정본을 번역했다고 후기에서 밝혔다). 하지만 그다지 큰 차이는 아니다. 아래는 에드 해리스가 감독 겸 주연을 맡아 열연한 영화 <폴락>(2000)에서 그린버그 역을 맡았던 배우 제프리 탬버.

일단 진도를 빨리 빼도록 해야겠다. '칸트주의자'로 분류되는 그린버그는 모더니즘에 대한 정의에 있어서도 그가 '최초의 진정한 모더니스트'라고 부르는 칸트를 절대적으로 참조한다. 모더니즘이란 무엇보다도 '자깁;핀적 경향의 강화 내지 심화'라고 할 때 칸트의 비판철학이야말로 전범이 아닐 수 없겠다. 그린버그의 직접적인 언급과 단토의 인용을 보라.

"내가 보는 바로는 모더니즘의 본질은 어떤 분야 그 자체를 비판하기 위하여 그 분야의 특징적인 방법들을 사용한다는 데 있다. 이것은 그 분야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당 능력 범위 안에서 그 분야를 보다 공고하게 지키기 위해서이다."(<예술과 문화>, 344쪽)

"내가 보기에, 한 분야 자체를 비판하기 위해서 그 분야 특유의 방법들을 이용한다는 데 모더니즘의 본질이 있다. 이는 그 분야를 전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의 능력의 영역 속에다 더 확고하게 방호하기 위해서이다."(<예술의 종말 이후>, 47쪽)

이 대목은 <예술의 종말 이후>의 두번째 역자해설에서도 복창되고 있는데, 번역은 좀 다르다: "모더니즘의 본질은 훈련 자체를 비판하는 훈련 특유의 방법을 사용하는 데 있으며, 훈련을 타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훈련의 위상을 더욱 확고하게 확립하기 위해서이다." 대동소이하지만, 'discipline'을 '훈련'으로 옮긴 것은 어색하다. 아울러 두 번역자가 서로의 번역에 대해서는 스크린하지 않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요컨대, 모더니즘의 본질은 '자기비판'에 있다. 예술/미술의 경우, 예술/미술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 그것이 모더니즘이다. 그러한 물음을 버텨내면서 예술/미술의 부피는 좀 졸아들 테지만 더 단단해질 것이다. 마치 자코메티의 조각에서처럼 모더니즘 예술은 비본질적인 것은 다 깎아내버리는 절차를 도입한다. 그리하여 "예술이 제공하는 종류의 경험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며 다른 어떤 종류의 활동에서도 얻어질 수가 없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 그것이 예술의 과제, 또한 각각의 예술의 과제로 제기되는 것. "이렇게 하게 되면 각 예술들의 권한 영역이 축소될 것은 분명하지만, 그와 동시에 각 예술은 제 영역을 훨씬 더 확실하게 소유하게 될 것이다."(그린버그, 345쪽)

반복하자면, 예술에서 자기비판의 과제는 "각 예술의 효과들 가운데에서 다른 예술의 매체로부터 또는 다른 예술의 매체에 의해 빌어왔다고 여겨질 수 있을 모든 효과를 제거하는 것이 되었다. 그럼으로써 각각의 예술은 '순수'하게 되며, 그 '순수성'으로 각 예술의 독자성뿐만 아니라 그 질적 수준도 보장받게 될 것이다. '순수성'은 자기정의를 뜻했기에, 예술들의 자기비판이라는 과업은 철저한 자기정의의 과업이 되었다." 즉, 예술의 '자기비판'의 귀결점은 보다 엄밀한 수준에서의 '자기정의'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예술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진 것이고, 그 물음을 견뎌낸다면 새로운 정의가 도출될 테니까(물론 정황적으로, 그러한 물음은 '위기의식'의 산물이다. 그 물음은 기존의 자기정의로는 더이상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없게 될 때 터져나오는 것이니까).

'예술'이란 말을 쓰지만, 그린버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미술'이며 그 중에서 특별히 '회화'에 그는 초점을 맞춘다. 그렇다면, 회화에서의 자기비판은 어떻게 감행되는가? 회화의 매체를 구성하는 여러 한계들, 혹은 조건들 즉, 평평한 표면, 그림 바탕의 형태, 안료의 속성 가운데에서 오직 회화예술에만 배타적으로 고유한 것은 그린버그가 보기에 '평면성' 하나뿐이다(여기에서 그의 악명높은 '평면성 테제'가 주장된다). 그림의 닫힌 형태는 무대예술과 공유하는 조건/제한이고, 색채는 연극뿐 아니라 조각과도 공유하는 기준/방법이다. 하지만, "평면성, 즉 2차원성은 회화예술이 다른 어떤 예술과도 공유하지 않는 유일한 조건이었으므로, 모더니즘 회화는 다른 어떤 것에도 적응하지 않는 한편 평면성에 적응해갔다."(346쪽)

 

 

 

 

그리하여,  (3차원의 사실주의적 환영을 추구했던) 과거의 거장들에 의해 오직 암묵적으로나 간접적으로밖에는 인정될 수 없는 회화의 부정정적인 요소들이 모더니즘 회화에서는 긍정적인 요소들로 간주되게 되었고, 그린버그가 보기에 그 시작은 마네부터이다. "마네는 그림들은 최초의 모더니즘 회화가 되었는데, 이는 그림이 그 위에 그려지는 바탕의 평평한 표면을 마네의 그림들이 솔직하게 선언했기 때문이다." 최적의 사례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마네의 <올랭피아>를 이미지로 가져와 본다.

 

단토의 정리로 재정리하자면, "칸트는 철학을 우리의 지식(=인식)을 추가하는 것으로 본 게 아니라 어떻게 지식이 가능한가 하는 물음에 대답하는 것으로 보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칸트의 이러한 철학관에 상응하는 회화관은 사물의 외관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회화가 가능한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린버그가 보기에 마네야말로 모더니즘 회화의 칸트였다. '물감이 칠해진 편평한 표면들을 솔직하게 선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네의 그림들이 최초의 모더니즘 회화가 되었다."(단토, 48쪽)  

미술사의 상식에 기대에 이야기하자면, 회화에서의 모더니즘은 사진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도전에 직면하여 재현이란 기존의 특권적 규정이 아닌 새로운 규정에 따라 스스로를 재정의한 것이다. 오직 회화만이 할 수 있는 것, 혹은 오직 회화에서만 가능한 것. 그린버그는 그것을 회화의 화면공간, 즉 2차원적 평면에서 찾은 것이다. "그린버그의 논지를 따른다면, '모더니즘 이전의 미술'로부터 모더니즘 미술로의 이행은 회화의 모방적 특질로부터 비모방적 특질들로의 이행을 의미한다."(단토, 48쪽) 그 이행은 회화에서 문학적인 것뿐만 아니라 (이전에 회화가 전점으로 삼았던) 조각적인 것을 배제하려는 지속적인 시도로서 나타난다. 그러한 시도를 끝까지 밀고 나갔을 때 얻게 되는 것인 피에트 몬드리안이나 잭슨 폴록의 추상회화들일까?    

하지만, 그린버그 자신도 지적하고 있듯이 "모더니즘 회화가 지향하는 평면성은 결코 전적인 평면성일 수가 없다. 그림면에 대한 감수성이 고양됨으로써 조각적 환영이나 눈속임 회화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감수성도 시각적 환영은 허용하고 또 반드시 허용해야 하는 것이다.(...) 옛거장들은 관객이 그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의 환영을 창조했으나, 모더니스트가 창조한 환영은 관객이 바라볼 수만 있는, 즉 오직 눈으로만 여행할 수 있는 환영이다."(350쪽) 요컨대, 모더니즘 회화가 배제하고자 하는 것은 환영 일반이 아니라 '조각적 환영'(sculptural illusion) 등속이다. '시각적 환영'(optical illusion)'만은 모더니즘 회화에서도 보존되고, 또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모더니즘 회화'의 후반부에서 그린버그는 모더니즘이 과거와의 단절을 뜻하는 건 아니며 오히려 전통의 계속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초현실주의만큼은 그가 용서할 수 없었는데(해서 초현실주의는 그린버그 내러티브의 바깥, '역사의 경계 밖'에 놓여 있다), 이에 대한 단토의 설명은 이렇다: "칸트는 한때 자신의 시대인 계몽주의 시대를 인류가 성년에 도달한 시대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린버그도 미술을 이런 방식으로 생각했을지 모르는데, 그래서인지 그는 초현실주의에서 일종의 미적 퇴행을, 괴물들과 무시무시한 위협들로 가득찬 미술의 유아기에서 유래하는 가치들의 재확증을 보았다."(51쪽) 다시 말해서, 초현실주의는 '상상계'의 미술이며 이것은 자기비판이라는 성년의 과제로부터 도피이자 미적 퇴행이라고 그린버는 판단했을 법하다.

이에 대한 반론도 물론 미술 비평계에서는 제기되는바, 주로 할 포스터와 로잘린 크라우스를 주축으로 한 <옥토버>지의 비평가들이 대표적이다. 단토는 '그린버그 비판가'로 두 사람을 지목하고 있는데(50쪽), 크라우스의 <시각적 무의식>(MIT출판부, 1993)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만(불역본 엔솔로지인 <사진-인덱스-현대미술>(궁리, 2003)이 대신에 번역돼 있다), 포스터의 'Compulsive beauty'(MIT출판부, 1993)는 <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아트북스, 2005)으로 번역/소개돼 있다(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에 이어서 나는 이 책들을 읽을 계획이다).  

할 포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초현실주의를 위한 하나의 공간이 열렸다. 그것은 이를테면 옛 내러티브(즉 그린버그 내러티브) 내의 수리비용으로서, 현재 이 내러티브를 비판하기 위한 하나의 특권적인 지점이 되었다."(단토, 51쪽) 번역문에서 '수리비용'은 불어단어 'impencé'를 옮긴 것인데 'impencé'는 '수리비용'이란 뜻의 'impence'와는 다른 단어이므로 착오이다(마지막 e에 붙은 강세유무에 주의해야 한다). 'impencé'는 아직 불한사전에 등재돼 있지 않은 듯하지만, 현대철학에서는 자주 나오는 단어로 영어로는 'the unthought'로 옮긴다. 즉, '사유되지 않은 것' 정도의 뜻이다('비사유'라고 옮기는 경우도 있는데, '사유가 아닌 것'이란 뜻이므로 나로선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래 사진은 포스터가 자신의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작품. 

해서 다시 정리하면, "초현실주의를 위한 하나의 공간이 열렸다. 그것은 이를테면 옛 내러티브(즉 그린버그 내러티브) 내에서는 사유되지 않은 것으로서, 현재 이 내러티브를 비판하기 위한 하나의 특권적인 지점이 되었다." 즉, 초현실주의는 그린버그 내러티브에서 사유되지 않은 것, 억압된 것이다. 거기에 예술로서의 정당한 '공민권'을 부여하고자 하는 것인 포스터나 크라우스 등 '옥토버 그룹'의 작업이다. 이 또한 언제 들춰볼 것이냐 궁리해보는 것이니, 공부할 꺼리는 무궁이라 아니할 수 없다...

06. 02. 03 - 07.

P.S. 하지만, PC방 이용시간은 무궁이 아니어서 여기서 줄인다. <예술의 종말 이후>는 대체 언제 종말을 고하게 되는 건지 슬슬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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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8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2-08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네, 번역이 나쁜 편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철학적인 내용들이 들어가는지라 가독성은 떨어지네요. 원서와 같이 읽으시면 좀 수월해지실 겁니다. 이런 책들만 읽으며 세월을 보내는 것도 '올모스트 헤븐'일 거 같은데, 왜 다른 일들도 자꾸 발에 채이는지!..
 

최근에 나온 책들이 부쩍 많아진 건 아니고, 그냥 몇 권의 평전 류들이 눈에 띄어서 정리해둔다. 당장에 구입하거나 읽을 책들이 아니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운 탓에 몇 마디 '신소리'를 해두는 것이다. 여우처럼.  

첫번째 책은 '자유로운 여자, 삶과 전설'이란 부제를 가진 <루 살로메>(해냄, 2006)이다(가운데 표지는 작년 가을에 나온 러시아본). 저자는 잡지 <엘르>의 편집장과 프랑스의 문화부 장관 등을 역임한 걸출한 여성 언론인 프랑수아즈 지루(1916-2003)이다(지루의 책으론 <나는 행복하다> 등이 소개돼 있다). 원저가 2002년에 나온 것으로 돼 있으니까 그녀의 유작이지 않을까 싶은 책인데, 루(1861-1937)나 지루나 모두 당대를 풍미했던 여성의 대명사로서 손색이 없다. 저자가 '루 살로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는데, 230쪽 정도의 분량이니까 부담스러울 정도의 '시도'는 아니므로 단숨에 읽어볼 만하다.

책의 부록으로는 루가 자신의 '연인들'이었던 니체, 릴케, 프로이트와 교환한 편지들이 발췌돼 있는 듯한데, 이 또한 흥미로운 자료가 될 듯하다. '루 살로메'를 전설적인 여인으로 만들어준 이 세 남자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권의 책들이 나와 있다. 지루의 책이 좋은 반응을 얻어낸다면, 마저 소개될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절판된 걸로 나오지만, 비교적 최근에 나온 루의 책으론 <선택된 자들의 소망>(투영, 2000)을 기본도서로 들어야겠다. 소개를 옮겨보면, "'한 남자가 루와 정열적으로 교제할 수 있다면 9개월 후쯤 그 남자는 한 권의 책을 저술할 수 있다'는 말의 주인공인 루 살로메. 그러나 스스로 훌륭한 작가이자 정신상담가이기도 했던 그녀의 중편소설과 산문들을 모은 책으로 광범위하고 신선한 살로메의 지적세계를 알게 한다." '선택된 자들의 소망'은 그 중편소설의 제목이다. 책에는 루 자신이 고백하고 있는 '나와 니체', '나와 릴케', '나와 프로이트'가 실려 있으므로 유익한 참고자료도 겸한다. 릴케 사후에 그녀가 릴케에 관하여 쓴 책 <하얀 길 위의 릴케>(모티브, 2003)는 아직 구할 수 있는 책이다. 릴케의 <소유하지 않는 사랑>(고려대출판부, 2003)과 짝이 될 만한 책이므로 같이 읽으면 좋을 것이다. 루 살로메, 그리고 루와 릴케에 대한 짧은 설명은 '클라시커 50' 시리즈의 <여성>과 <커플>에서 읽어볼 수 있다.

두번째 책은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시드니 셀던(1917- )의 자서전 <또 다른 나>(북앳북스, 2006)이다. 그의 책들은 "180여개국에서 50여개 언어로 번역되어 2억 8천만부가 넘게 팔렸다"고 하니까 이 '대중문학의 거장'은 '직업작가'들의 우상이자 선망의 대상이 될 만하다.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그의 소설을 한권도 읽어본 적이 없지만, 그의 작품들이 워낙에 많이 드라마화, 영화화되었기에 '친숙한' 작가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게다가 인상도 좋지 않은가?). 아래 사진은 1999년에 나온 시드니 셀던 기념 우표(시트).

소개에 따르면, "시드니 셀던은 약국 배달부로 일하던 열일곱의 나이에 자살을 결심하고, 이를 만류하던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생애에서 가장 지독하고 처절했던 바로 그 순간의 회고에서부터 시작되는 <또 다른 나>는, 그 누구보다 진취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았던 시드니 셀던의 인생 역정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취향이 다소 '고약한' 나는 그의 소설들보다 이런 자서전에 더 끌린다.

 

 

 

 

내게 이름이 친숙한 셀던의 책들은 <천사의 분노>, <악마의 유혹> 등인데, 요즘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책은 <텔미 유어 드림>(북앳북스, 2000)인 모양이다. 이번에 알게 된 것이지만, 셀던의 책들은 자서전을 낸 '북앳북스'와 '문학수첩리틀북스'(셀던의 독자층이 주로 청소년인 모양)에서 거의 전담하고 있는 듯하다. 전담하는 만큼 고른 수준을 갖춘 양질의 번역서들이 계속 나올 것으로 기대해본다(청소년 권장 도서인지는 의문이지만).

 

 

 

 

세번째 책은 미국의 철학자이자 초인격심리학자 켄 윌버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기>(한언출판사, 2006). 지난 주 언론의 북리뷰란을 보고 알게 된 책인데, 켄 윌버와 그의 아내 트레야의 사랑과 아내의 (5년 동안의) 유방암 투병기, 그리고 죽음에 대한 생각 등이 담겨 있는 책이다. 드라마틱한 '러브스토리'로도 읽히지만(줄거리만으로도 딱 '우리 드라마'이다) 실화이며, 영성(靈性)학자 켄 윌버 입문서로도 적합해 보인다. 아래는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

책에서 두 사람은 "특유의 방대한 지식과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질병에 대한 일반적 접근과 뉴에이지적인 접근 모두에 의문을 던지며 철학, 심리학, 종교적 해석을 더하고 있다"고. 개인적으론 윌버를 '뉴에이지 사상가' 정도로 분류하고 있었는데, 혹 편협한 선입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기억이 맞다면, '켄 윌버'란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김상일 교수의 책에서였다(김교수는 켈 윌버를 최고의 현역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았다). <수운과 화이트헤드>(지식산업사, 2001)나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풀어본 원효의 판비량론>(지식산업사, 2003), <한의학과 러셀역설 해의>(지식산업사, 2005) 등은 내가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이지만, <러셀 역설과 과학 혁명 구조>(솔출판사, 1997)는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카오스와 문명>(동아출판사, 1994)은 좀 '허한' 책이었고.

 

 

 

 

네번째 책은 '영성'과는 다소 무관한 철학자 네그리의 대담집 <귀환>(이학사, 2006)이다. 지난 2001년에 출간된 <제국>으로 전세계 사상가에 한 차례 태풍을 몰고 왔던 이 이탈리아의 골수 좌파 철학자의 책들은 꾸준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마니아'들을 거느리고 있다. <혁명의 시간>, <혁명의 만회>, <전복적 스피노자> 등의 제목들만으로도 그의 철학적 주제가 자나깨나 '혁명'에 놓여 있다는 걸 알 수 있는바, 이 '혁명'은 맑스주의의 캐치프레이즈이면서 (이론으로서의 혁명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트렌드이기도 하다. 이번에 나온 대담 형식의 자서전에서 "네그리는 자신의 삶과 사상을 요약하는 핵심어들을 A부터 Z까지 알파벳순으로 따라가며 자신의 가족사와 성장 배경에 대해, 그에게 지적으로나 인간적으로 큰 영향을 준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그의 사상과 실천의 자양분이 되었던 정치 격변기의 수많은 에피소드들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네그리 입문서로 적합해 보인다.

국내 필자들의 네그리 입문서로는 조정환의 <아우또노미아>(갈무리, 2003)와 윤수종의 <안토니오 네그리>(살림, 2005)가 있다. 전자는 무겁고, 후자는 가볍다(책의 무게가). 편한 쪽으로 구해잡으면 되겠다. 국외서로는 보론(Atilio A. Boron)의 <제국과 제국주의>(Zed Books Ltd, 2005) 정도가 신간이다. 160쪽 분량인데, 국내에 네그리주의자들이 많은(?) 만큼 벌써 번역중인 책인지도 모르겠다. 네그리/하트의 <제국>에 대한 비판적인 리뷰를 포함하고 있는 지젝의 책도 조만간 출간될 것으로 보인다. 올해 '네그리의 시간'을 따로 내보려 한다면 참고하시길.

 

 

 

 

끝으로 따로 소개가 필요없는 책이지만, 대표적인 인권변호사이자 <전태일 평전>의 저자 조영래(1947-1990) 변호사의 일생을 다룬 안경환 교수의 <조영래 평전>(강, 2006). "조영래 변호사의 대학 1년 후배인 서울법대 안정환 교수가 5년여의 준비 끝에 펴낸 이 책은 고인의 사후에 나온 최초의 평전이다."(청소년을 위한 현대인물사 시리즈의 <조영래>가 있긴 했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의 특징은 "첫째, 조영래를 통해 격동기 한국 현대사를 재구성하고 있"고, "둘째, 조영래의 삶에서 서울대 법대가 차지하는 자리에 특별한 관심과 무게를 두고 있"으며, "셋째, '인권변호사, '공익변호사'로서 조영래의 활동을 가장 높게 평가"하고 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 '망원동 수재 사건', '여성 조기 정년제 사건' 등을 변론하는 과정에서 조영래가 보여준 열정과 치밀함을 감동적인 필치로 옮기고 있다"니까 우리가 살아온 '현대사'의 증언자료로서도 의미가 있겠다. 

한편, 그가 쓴 <전태일 평전>(돌베개, 1983/2001)은 전태일의 누이 전순옥 박사에 의해 영역되기도 했다. 'A Single Spark'(돌베개, 2003)가 그것인데,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을 바로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다(영화의 영어제목이기도 하고). 그 영화에 나오는 교내 시위 장면 촬영 현장을 바로 옆에서 보던 기억이 새롭다. 박광수 감독의 이 영화에서 아마도 가장 공을 들였을 법한 장면은 60-70년대 청계천 평화시장의 노동현장이다. "전태일은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비인간적 노동환경에서 쓰러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노동운동에 눈떠간다. 노동법에는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되어 있으나 법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 앞에 분신자살로 경종을 울린다. 1970년의 일이다."



엊그제 잠시 읽은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2>에서 저자는 전태일의 분신과 3년전 자살한 한 대학강사의 죽음을 비교하면서(그는 내 친구였다) '지식산업 사회'의 역군이라는 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이 30여년전 '시다'들의 열악한 삶과 그다지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다. 굳이 그렇게 일러주지 않아도 다 아는 바이거늘, 꼭 그런 식으로 대놓고 얘기할 건 뭐란 말인가? 박노자는 한국인으로서의 '교양'이 아직 좀 부족하다. '너도 시다지?'라고 몰상식하게 묻는 건 예의가 아니다. 오늘도 헐값의 '박음질'을 해놓고 보니까 괜히 부아가 나는군(이렇게 투덜거리면 그 친구도 웃어주곤 했는데).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06. 02.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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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02-02 10:55   좋아요 0 | URL
지루&레비의 <남자와 여자>라는 대담집을 읽은 적이 있어요. 지루의 '살로메'는 아주 재미있겠어요.

로쟈 2006-02-02 11:20   좋아요 0 | URL
예, 저도 오래전에 읽어본 적이 있는 책인데, 알라딘에서는 검색이 안되네요...

비로그인 2006-02-02 13:12   좋아요 0 | URL

춫현하고 퍼갑니당^^


로쟈 2006-02-02 18:08   좋아요 0 | URL
**님/ 평소대로입니다.^^

호랑녀 2006-02-03 09:42   좋아요 0 | URL
평소 목록보다 이번 건 더 땡기네요 ^^
일단 땡스투입니다.

돈케빈 2009-10-18 05:10   좋아요 0 | URL
켄 윌버의 주저들을 읽어보았습니다. 중심 내용?은 <로쟈의 인문학 서재>의 '기적이란 무엇인가'와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로쟈님 책을 더 좋게 읽었지요.
켄 윌버는 화이트헤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하고 책에서도 자주 인용합니다.
윤리적인 주장에서도 화이트헤드, 바이첵커 등과 비슷한 인상을 받습니다.
49년생으로 슬라보예 지젝과 동갑인 점도 흥미롭네요.
 

저녁에 아주 오랜만에 동창회 모임이 있어서 곧 나가야 하는데, 30분 정도 남은 자투리 시간에 잠시 작년 이맘때 생각이 났다.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써내려가던 모스크바통신. 그건 이렇게 시작했었다:

"예정대로 마지막 통신문을 쓰기로 한다. 지난주에 결혼이야기호모 레겐스(Homo Legens), 책을 읽는 인간이란 제목의 통신문을 더 쓸 수도 있었지만, 나는 말년 휴가를 보내는 기분으로 그냥 쉬었다. 물론 지난 수요일에 모스크바에서 사들인 책들을 서울로 배송하는 중대사(重大事)를 치르긴 했다(상당한 비용이 들었다). 그러니 나름대로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젬피라의 노래 다스비다냐(러시아어의 작별인사)를 듣던 2주 전부터 마음은 이미 모스크바를 떠나가고 있었다(안녕, 내가 사랑하는 도시여…”). 예정대로라면, 나는 모스크바에서 10개월 10일째를 맞는 날 한국행 아에로플로트(러시아항공사)에 몸을 싣게 될 것이다." 오늘 밤에는 그 젬피라의 라이브나 감상해야겠다(여러분도 한번 들어보시길 http://www.youtube.com/watch?v=vOTA1r9oUTM).

그리고, 모스크바. "며칠 전부터 모스크바의 기온도 제법 떨어졌다. 낮기온이 영하 15도 안팎이고 밤에는 18-20도 정도까지도 떨어지는 듯하다.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눈보라까지 치는 바람에 체감기온은 더 떨어졌었고. 모스크바의 겨울에 다소간 실망(?)하고 있던 차에 이번 추위는 모처럼 겨울의 맛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하지만, 간혹 한국에서 맛보던 살을 에는 듯한 추위는 아니다. 수북하게 쌓인 눈들과 함께 찾아오는 추위라서 눈보라만 없다면 오히려 포근한 느낌마저 전해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너무 오랜 시간을 밖에서 보내는 건 곤란하지만." 물론 올해라면 사정이 달랐을 것이다. 영하 40도까지도 내려갔었으니!

사진은 내가 기숙하던 모스크바대학 본관 건물의 초저녁 야경이다. 오랜만에 대하는 '친숙함'이군! 아래는 정문쪽에서 바라본 모습. 스탈린 양식의 이 건물은 1949-1953년에 지어진 것이며 독일군 포로들이 대거 공사에 동원되었다고. 

그리고 크레믈린의 야경. 모스크바에서 '열린음악회'가 개최되던 날 본 모습과 가장 유사하다.

자주 밤하늘을 수놓던 불꽃놀이들...

이젠 기억 속으로...

동창들을 만나러 가야겠다. 또다른 기억 속으로...

06. 02. 01.   

P.S. "어디라고? 강남역 8번 출구? 알았어. 그래 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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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에 관한 페이퍼를 두 편 쓰는 것이 오늘의 일정 중 하나이다. 그게 단지 '하나'일 뿐이니 다른 일정들을 어찌 소화해야 할는지 의문이지만, 하여간에 할일은 많고 갈길은 멀다(곧 도서관에도 다녀와야 하고). 데리다의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2004)에 수록된 두번째 텍스트 '벤야민의 이름'을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다. 첫번째 텍스트는 재작년에 읽고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글로 정리한 바 있다. 데리다의 벤야민 읽기에 대한 정리는 차후로 넘겼었는데, 대충 그 '차후'의 시간이 된 것. '법과 폭력'을 키워드로 한 논문을 준비하면서 계획했던 책들을 더는 미룰 수도 없고 해서 읽어나가고자 한다.

'폭력'에 관한 책들은 세상의 폭력만큼이나 많이 나와 있지만,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와 함께 내가 일차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책들은 아렌트의 <폭력의 세기>나 메를로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 등이다. 만약에 더 여유가 생긴다면,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이나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폭력의 고고학> 같은 인류학 책들로 눈길을 돌릴 수도 있겠다(진중권의 <폭력과 상스러움>은 예전에 읽었다). 그리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조르지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나 <예외 상태> 같은 책들이 필독 목록이다.  

국역본 <법의 힘>을 읽으면서 내가 참조한 책은 불어본과 영역본이다. 영역은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Deconstruction and the Possibility of Justice)>(Routledge, 1992)에 실린 것인데, 이 텍스트는 영어판 데리다 선집인 'Acts of Religion'(Routledge, 2001)에도 재수록돼 있다. 사정이 허락한다면, 데리다의 텍스트를 끝까지 읽고 정리하겠지만, '현지 사정'이 또한 그렇지가 않아서 일단은 텍스트의 문턱까지만 정리해두도록 한다('읽기 위하여'란 제목은 그래서 붙여졌다).

영역본의 경우 국역본 72쪽의 "만약 내가 여러분의 인내심을 바닥내지 않았다면"으로 시작되는 문단부터가 본문이고, 이 강의의 '서언'에 해당하는 부분(63-72쪽)은 미주로 돌려져 있다. 그걸 읽겠다는 얘기이다. 이 '서언'에서 데리다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나치즘과 궁극적 해결책'이란 제목의 컨퍼런스에서 자신이 왜 벤야민의 텍스트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대한 독해를 시도하는가에 대한 해명이다. 그 해명을 그는 몇 가지로 나누어 제시한다. 

(1)먼저, "나는 의도적으로 이 텍스트가 말살적 폭력이라는 주제에 (신)들려 있다고 말"한다. 즉, 그것은 '유령의 논리'에 들려 있고,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니며, 죽은 것 이상이고 살아있는 것 이상"인 이 유령의 논리 혹은 법칙은 (나치의 유태인 '청소'라는) '궁극적 해결책'에 대응하는 논리로서 적합하다. 게다가 벤야민 자신이 '유대인'이며, 그의 텍스트는 '유대적 관점' 속에 기입되어 있다.

(2)그리고 또 관심사가 되는 것은 벤야민의 특유의 언어관이다. 벤야민은 표상(=재현)으로서의 언어를 명명(=이름부름)으로서의 언어와 대립시키는데, 전자가 기술적, 효용적, 기호론적, 정보적인 차원에서 언어를 사고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명명과 호명, 이름 속에서 현전의 선사 내지는 호출"을 언어의 소명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이름에 대한 사상이 신들림 및 유령의 논리와 접합되는지 묻게 된다."(65쪽)

  

(3)벤야민의 폭력비판론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1921)는 한편으로 형식적인 의회/대의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이며 때문에 1920년대초의 반의회주의적, 반계몽주의적 흐름과 맞닿아 있다. <독재론>의 저자 칼 슈미트가 벤야민의 논문을 칭찬한 것은 우연이 아닌 셈이다(칼 슈미트에 관한 문장은 영역본에 빠져 있다).   

(4)벤야민의 이 기묘한 논문에서 대의(=표상)이라는 다면적/다의적인 문제는 그가 제시하는 정초적/보존적 폭력의 문제와도 결부된다. "소위 정초적 폭력은 때로는 보존적 폭력에 의해 '표상/대리'되고 필연적으로 반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확장하여 데리다는 "'궁극적 해결책'이라는 주제에 대해 벤야민이라면 무엇을 생각했을까?"를 질문한다. "벤야민이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데리다가 제시하는 잠정적인 의견에 따르면, "여러 징표들로 미루어볼 때, 벤야민은 '궁극적 해결책'이었던 게 될 이 표상불가능한 것 이후에는 담론 및 문학, 시가 불가능하지 않게 될 것으로" 본다. 오히려 "표상의 언어에 대립하는 이름들의 언어 및 명명의 언어나 시학의 복귀, (...) 그것들의 도래를 말하게 될 것"으로 본다.  

정리하면, 데리다는 1942년의 '궁극적 해결책'이라는 역사적 지평에서 벤야민의 1921년 텍스트를 읽고자 하는 것이다. '오래된 미래'의 텍스트로 읽겠다는 것. 그게 그의 취지이다. 그리고 이 취지가 놓여 있는 두 가지 맥락.  

(1)먼저, 데리다 자신이 '철학적 민족성 및 민족주의'라는 3년짜리 세미나를 기획하면서 '칸트, 유대인, 독일'이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이미 1년간 진행했다는 것. 칸트에게서 '독일적인 것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을 던지면서 자연스레 유대계 독일 사상가/작가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얘기이다. 그러면서 데리다가 주목하게 된 것은 몇몇 유대인 독일 사상가와 비유대인 독일 사상가들 사이의 유사점들(analogies)이다. "독일 식의 어떤 애국주의(대개는 민족주의이지만, 때로는 1차 세계대전 기간과 그 이후의 군국주의이기도 하다)"(굵은 글씨는 국역본에 누락된 부분)가 코헨이나 로렌츠바이크, 그리고 부분적으로 후설 등에 나타난다는 게 결코 전부가 아니다(아마도 이 점에 대해서는 지적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보다 주목되어야 하는 것은 벤야민과 칼 슈미트, 그리고 심지어는 하이데거의 텍스트들 간에 보이는 어떤 '친화성'이다. "이는 단지 의회 민주주의나 심지어 민주주의 일반에 대한 적개심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계몽주의에 대한, 폴레모스와 전쟁, 폭력 및 언어의 특정한 해석에 대한 적개심이라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당시에 널리 확산되어 있던 '해체'라는 주제 때문이기도 하다."(70쪽) 이 대목은 약간의 교정이 필요해 보이는데(굵은 글씨 '적개심'이 빠져야 한다), 영역본을 인용하면 이렇다:

"Not only because of the hostility to parliamentary democracy, even to democracy as such, or to the Aufklarung, not only because of a certain interpretation of the polemos, of war, violence and language, but also becasue of a thematic of 'destruction' that was very widespread at the time."(66쪽)

구문상으로는 'Not only A, not only B, but also C' 형태이며, 'A나 B뿐만 아니라 C도'란 뜻이겠다. 여기서 '적개심(hostility)'은 A에 나열된 항들에만 걸리며 '해석에 대한 적개심'으로 확장되지 않는다(내가 본 불어본의 문장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벤야민, 슈미트, 하이데거가 공유하는 것은 (1)의회 민주주의, 심지어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적개심과 (2) 투쟁(polemos)과 전쟁, 폭력, 그리고 언어에 대한 특정한 해석 (3)해체/파괴라는 주제, 세 가지인 것. 물론 하이데거식의 '해체/파괴(Destruktion)'와 벤야민의 '해체/파괴(destruction)'론은 구별되어야 하지만, 양차 대전 사이에 '해체/파괴'라는 주제가 거의 강박적인 수준이었다는 데 데리다는 주목한다.

(2)또 다른 맥락은 뉴욕 예시바 대학의 카르도조 법학대학원에서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주제로 개최된 콜로키움(사진은 이 콜로키움에서 강연하는 데리다의 모습). (서문에서 밝혀진 바이지만) 여기서 데리다는 '법의 힘: 권위의 신비한 토대'(<법의 힘>의 제1부)라는 강연문을 읽어나갔으며, '벤야민의 이름'은 비록 낭독되지 않았지만 참석자들에게 배포되었다. 데리다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그리고 궁극적으론 '벤야민의 이름'이란 데리다 텍스트의 제목을 낳은 것은 벤야민 텍스트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 텍스트의 마지막 단어들, 마지막 구절은 한밤중의, 또는 우리가 더 이상 또는 아직 알아듣지 못하는 기도의 밤의 쇼퍼(=나팔)처럼 울려퍼진다." 나중에 다시 반복되겠지만, 벤야민의 그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Die gottliche Gewalt, welche Insignium und Siegel, Niemals Mittel heiliger Vollstreckung ist, mag die waltende heissen. Walter Benjamin.(징표이고 봉인이지만 결코 신의 집행 수단은 아닌 신성한 폭력은 아마도 주권적인 것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발터 벤야민)"(125쪽, 서명은 내가 집어넣은 것이다) 

이 대목에 대한 데리다의 설명을 따라가면, "텍스트의 마지막에서 마지막 문장, 종말론적인 마지막 문장은 서명과 봉인을 명명하고, 이름(Walter)과 '주권적인 것(die waltende)'이라 불리는 것을 명명한다. 발텐발터 사이의 이러한 '유희'는 어떠한 논증도, 어떠한 확실성도 산출할 수 없다. 더욱이 그것의 '논증적' 힘의 역설은 이 힘이 인지적인 것과 수행적인 것의 분리에서 생겨난다는 데 있다."(71쪽)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고틀리히 게발트(신의 폭력)... 발텐데(주권)... 발터(벤야민)'라고 하여, 시적인 음성논리에 따르자면 '신의 폭력=주권=벤야민'이라는 유사 계열체가 형성된다. 이러한 '유희'는 합리적/논리적인 근거를 갖는 것이 아니기에 "어떠한 논증도, 어떠한 확실성도 산출할 수 없다." 한데, 역설적으로 '논증적(demonstrative)' 힘을 갖는다(이것은 '논증 아닌 논증'이기에 '역설적'이다) . 이때 '논증적'이라는 것은 '말이 되게 하는 힘', 곧 (신비한) '설득력'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리고 '인지적인 것'과 '수행적인 것'이 분리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기의 논리와 기표 논리의 분리이다. 가령 아래서 (A)의 번역문은 기의의 논리를 따른 것이고, (B)를 음역해서 읽을 경우 기표의 논리를 따른 것이 된다(그러니까 '벤야민의 이름'이 갖는 효과는 낭독할 경우에만 발휘될 수 있다).  

(A) 징표이고 봉인이지만 결코 신의 집행 수단은 아닌 신성한 폭력은 아마도 주권적인 것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발터 벤야민.

(B) Die gottliche Gewalt, welche Insignium und Siegel, Niemals Mittel heiliger Vollstreckung ist, mag die waltende heissen. Walter Benjamin.

벤야민 텍스트에서 이 두 논리는 서로 따로 논다. 그래서 유희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희'는 전혀 유희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벤야민이 특히 '괴테의 <친화력>'이라는 논문에서 우연하지만 의미심장한 일치들(고유명사들이야말로 이것들의 고유한 장소이다)에 대해 아주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유희는 한편으로 의도된 것이면서 신비주의의 아우라를 거느리고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데리다의 본격적인 독해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에는 벤야민 텍스트의 이러한 면모가 포함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마침내 도착한 곳은 데리다 텍스트의 입구이자 문턱이다(그리고 이 글의 출구이다).

"만약 내가 여러분의 인내심을 바닥내지 않았다면, 이제 다른 스타일로, 다른 리듬에 따라 벤야민의 짧지만 당혹스러운 한 텍스트에 대해 약속했던 독해를 시작해보자."(72쪽)   

06. 01. 31.

P.S. 데리다에 대한 또 다른 페이퍼는 시간관계상 다음으로 미룬다. <목소리와 현상> 번역본에 대한, 역자의 취향에 대한 낭패감과 유감을 담은 글이 될 텐데, 몇 마디 앞당겨 쓴 글은 조금 전에 날아가버렸다. 때로 신의 은총과 폭력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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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1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TheSe 2009-02-21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퍼갑니다. http://cafe.naver.com/hanthese/38
 

  

 

 

 

지난주에 교보에 들렀다가 미술사 책 한 권과 함께 구한 책이 알폰소 링기스의 <낯선 육체>(새움, 2006)이다. 얼마전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언급한 책인데, 책에 대한 흥미와 일말의 책임감에 이끌려 책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 '육체'와 관련한 독서계획을 급조했는데(급조한 제목은 '낯선 육체를 찾아서'), 피터 브룩스의 <육체와 예술>(문학과지성사, 2000), 쥬디스 버틀러의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인간사랑, 2003)이 가장 먼저 꼽은 책들이다. 계획대로 진행되는 일이 어디 있으랴 싶지만, 하여간에 이 책들을 읽게 될 것이다(<낯선 육체>는 원서를 구하고 있고, 나머지 책들은 번역본이 나오기 전에 이미 원서를 갖고 있던 책들이다). 버틀러는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에도 분량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에 지젝의 재비판을 더불어 읽어볼 수도 있겠다. 다른 책들은 고려중이다.    

 

 

 

 

한데, 조금 유감스러운 것은 '육체'보다도 먼저 일부 눈에 띄는 오역들. 대개 책을 구하게 되면, 서문과 목차, 그리고 색인 등을 들춰보는데, <낯선 육체>의 색인에는 '유어세너, 마거리트'라는 이름이 올라와 있다. '낯선' 이름이지만 소리나는 대로 적어보면 'Marguerite Yourcenar', 즉 프랑스의 저명한 여성작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1903-1987)'이다. 국내에서는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세계사, 1995)으로 일부 '마니아'들을 거느리고 있는 명망 높은 작가이고 이미 여러 권의 소설들이 번역돼 있는데, '유어세너'라는 건 좀 무례한 호명이다. 전문 번역가들이 우리말다운 문장들을 만들어내는 데는 '전문가들'보다 나은 편이지만, 이런 대목에서는 종종 실수를 드러낸다. 본문에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낯선 육체>의 원서를 구할 때까지(이번주 안으로 구해질 것이다) 먼저 <육체와 예술>을 읽어보기로 했는데, 뜻밖에도 좀 실망스럽다. 저자인 'Peter Brooks'를 '피터 부룩스'라고 옮긴 것부터가 의아한 대목인데(이게 얼마나 갈망질팡이냐면, 겉표지/속표지에는 '룩스'이고 본문과 서지정보란에는 '룩스'이다.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었다는 얘기이다. 하기야 발음상으로야 대수롭지 않은 차이이지만), 이런 경우 검색에서는 서로 '다른 사람'이 돼버리는 수도 있다. 물론, 나의 오랜 '경험'에 근거하여 말하자면, 이런 무신경이 오직 저자명의 표기에만 국한될 리는 만무하다.  

<육체와 예술>의 원제는 'Body Work'이고, 부제는 '근대 서사에서의 욕망의 대상들'이다. 국역본 뒷표지의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문학과 미술 작품에서 육체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으며, 왜 육체를 다루고 있는가에 주안점을 두고 육체와 의미, 육체의(에 의한) 글쓰기를 탐구하고 있다." 저자인 브룩스는 예일대학의 불문과 교수로서 <플롯을 위한 독서(Reading for the Plot)>이란 대표적인 저작을 갖고 있다(이 책에 대해서는 권택영 교수의 <소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동서문학사, 1991; 문예출판사, 1995)를 참조할 수 있다. '육체'와 관련한 주제로는 권택영, <몸과 미학>(경희대출판부, 2004)도 출간돼 있다).

그런데, 국역본의 표지에는 유감스럽게도(?) 원서 표지에 실린 앙리 제르벡스(Henri Gervex)의 그림 <롤라(Rolla)>(위의 그림)의 상당 1/5 정도만이 사용되고 있다. 나는 첫눈에 번역 또한 그렇게 '에누리'한 수준은 아닐까 우려하는 마음을 가졌는데, 첫페이지의 번역은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켜주지 못했다. 첫 페이지라는 건 1장 '서사물과 육체'가 시작되는 21쪽을 말하는데, 가령 이런 대목을 읽어보자.

"상상적 문학에 있어 육체는 항상 매혹의 대상이 되어왔다. 육체는 인간의 정신력과 의지력을 세상에 행상하는 중간과정이며, 물질성을 넘어서는 의미의 생성 작업에 있어 타자로서 작용한다.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의미 생성의 매개가 되고 하며(예를 들어, 글을 쓰는 손 같은 경우), 심지어는 작업의 장소로도 사용된다."

이 대목의 원문: "In imaginative literature the body has always been a object of fascination, at once the distinct other of the signifying project - which, as an exercise of mind and will on the world, takes a stand outside materiality - and in some sense its vehicle(this living hand that writes), perhaps even its place of inscription."(1쪽)  

처음 몇 페이지를 읽어본 인상으로 판단하건대, 국역본은 대개 '의역'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두번째 문장에서 'as an exercise of mind and will on the world'을 '인간의 정신력과 의지력을 세상에 행사하는 중간과정'이라고 옮기는 것도 그런 사례인데, '중간과정'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임의적'인 첨가어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관계사 'which'의 선행사는 'body'가 아니라 'signifying project'이다. 문장의 요체만 간추리자면, "[T]he body has always been a object of fascination, at once the distinct other of the signifying project and in some sense its vehicle..." 정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육체'는 '의미화 작업'과의 관계에 의해서 정의되고 있다. 즉, 육체는 의미화작업과는 무관한 타자이면서(의미화작업은 주로 '대뇌'에서 담당한다) 한편으론 그 수단이라는 것.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손(this living hand that writes)'이 바로 그 '수단'이다. 그리고 때로 육체는 심지어 '그 기입의 장소(its place of inscription)'가 되기도 한다. 육체에 뭔가를 쓰거나 새겨넣는 경우도 있으니까. 가령,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화 <필로우북>(1995)이 좋은 예가 되겠다.

한국영화로는 정진우 감독의 <자녀목>(1984)에서도 '육체에 씌어지는 글자들' 장면을 볼 수 있다. 주연을 맡았던 원미경은 80년대 초중반 여러 사극영화들에서 연기력 좋은 '육체파' 배우로 각광받았었다(<변강쇠>, <사노>, <물레야, 물레야> 등이 그녀의 주연작들이다). 이야기가 언제 또 '육체파'로 새버렸나? 

어쨌든 나의 요점은 <육체와 예술>의 번역이 '예술'의 수준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임의적인 의역/오역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주의해 읽어야 한다는 것.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을 포함하고 있는 책에 '역자 후기'가 빠져 있는 것도 상당히 드문 일인데, 번역의 자초지종에 대해서 알길이 없기에 유감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애로사항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육체와 예술>에 대한 읽기는 한동안 더 진행될 것이며 독후감은 나중에 따로 올리기로 한다.

06. 01. 31.

P.S. <의미를 체현하고 있는 육체>도 읽을 만한 번역이지만, 아쉬운 대목들이 눈에 띈다(라캉의 '실재(계)'를 '실제계'라고 옮긴 것 등의 대표적이다). 서문에서 일인칭 주어 '나'를 '본인'이라고 옮기는 경우는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데, 그렇다고 이걸 오역이라 할 수는 없겠다. 다만 '공통감각'의 부재를 탓할 밖에. 이 책에 대해서도 브리핑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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