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2004)에 대한 연속적인 브리핑이다. 가능하다면 이 글에서는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글 '모더니즘 회화'(<예술과 문화>)를 함께 정리하고 싶다. 그러니까 그린버그가 정의하는바, 미술에서의 '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까지 다루고 싶은데, 그린버그가 준거로 삼고 있는 것은 칸트 미학이다. 칸트와 그린버그에 대해서는 김광명 교수의 '칸트와 그린버그: 모던 미학에 대한 논의', <칸트와 현대 영미철학>(철학과현실사, 2001)을 참조할 수 있다. <예술과 문화>의 역자가 그린버그 전공자로서 박사학위논문 외에 여러 편의 학술논문을 발표하고 있으므로 이 문제에 대하여 보다 전문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참조해볼 수 있겠다.

 

 

 

 

단토의 문제의식을 보다 폭넓은 시야에서 보고자 한다면, 신시아 프리랜드의 <과연 그것이 미술일까?>(아트북스, 2002)가 도움이 될 듯하다. 단토의 추천사에 따르면, "신시아 프리랜드는 매우 명쾌한 책을 썼는데, 그의 명석한 철학적인 지성은 실제 예술작품에 의해 제기된 난해한 문제들을 매우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내고 있다." 책에는 단토의 '예술의 종말론'도 2장의 '브릴로 박스와 철학적인 미술' 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예술의 종말 이후>를 읽은 독자라면 저자의 정리는 별로 새로울 게 없는데, 다만 80쪽에 실린 "앤디 워홀의 쌓아올린 '브릴로 박스'들이 예술인지 아닌지 곰곰이 생각중인 철학자 아서 단토"란 설명이 붙은 사진만은 흥미롭다(사실 이 사진 한 장이 모든 걸 말해준다!). 이 자리에 따오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한편, 미술의 개념/정의 못지 않게, 혹은 그 개념/정의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미술사에 대한 감각인데, 미술의 종말이라는 게 과연 무엇의 종말인가를 알기 위해서도 미술사에 대한 배경지식은 필수적이다. <과연 그것이 미술사일까?>(아트북스, 2005)는 다양한 미술사의 가능성에 대해서 조감하게 해준다. 그리고 실제적인 서양미술사에 대한 리뷰는 <서양회화사: 조토에서 세잔까지>(시공사, 2000)의 도판들이 저렴하고 유용하다. <손에 잡히는 미술사조>(예경, 2005)는 저렴하지는 않은 책이지만, 미술사조의 '개념'을 잡는 데는 가장  간편하고 따라서 유용하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는 것.    

지난번에 이어서 <예술의 종말 이후>의 1장 45쪽 이후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한다. 여기서 단토가 이야기하는 것은 철학에서의 모더니즘(=근대철학)이 데카르트적 코기토, 즉 (세계가 아니라)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나'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미술에서의 모더니즘도 미술에 대한 '자의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 "미술상의 모더니즘은 하나의 지점을 표시하고 있는데, 이 지점 이전까지는 화가들이 인물과 풍경과 역사적 사건을 눈에 드러나는 그대로 그리고 세계를 나타나는 대로 재현하고자 했다. 모더니즘과 함께 재현의 조건들이 핵심적이게 되며,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미술이 미술 자체의 주제가 된다."(47쪽, 강조는 나의 것) 

칸트의 (모더니즘)철학에서 '인식'이 아닌 '인식의 조건'들이 문제되었듯이, 미술사의 모더니즘 또한 '재현'이 아닌 '재현의 조건'들을 문제삼으며, 이에 따라 미술 자체자 미술의 주제가 되었다. 마치 '사고하는 나'가 우리 생각의 주제가 되었던 것처럼. 그리고 모더니즘에 대한 이러한 규정은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선구적인 논문 '모더니스트 회화(Modernist Painting)'(1960)에 빚지고 있다(국역본의 번역은 '모더니즘 회화'이며, 이하에서는 '모더니즘 회화'라고 칭하겠다). 단토는 두어 쪽에 걸쳐서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회화론을 간추리고 그에 대해 논평한다(단토의 본격적인 '그린버그'론은 4장에서 다루어진다).

여기서는 이 요약을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회화'(<예술과 문화>, 344-353쪽)과 같이 읽도록 한다. 참고로, 국역본 논문은 <예술과 문화>의 원저에는 빠져 있는 것을 역자가 부록으로 보충한 것이다. 내가 참조한 원문은 4권짜리 그린버그 선집 중 제4권(1995)에 실린 것인데(85-93쪽), 저자가 몇 차례 수정한 논문이어서인지 국역본과는 약간 차이가 난다(역자는 1965년 수정본을 번역했다고 후기에서 밝혔다). 하지만 그다지 큰 차이는 아니다. 아래는 에드 해리스가 감독 겸 주연을 맡아 열연한 영화 <폴락>(2000)에서 그린버그 역을 맡았던 배우 제프리 탬버.

일단 진도를 빨리 빼도록 해야겠다. '칸트주의자'로 분류되는 그린버그는 모더니즘에 대한 정의에 있어서도 그가 '최초의 진정한 모더니스트'라고 부르는 칸트를 절대적으로 참조한다. 모더니즘이란 무엇보다도 '자깁;핀적 경향의 강화 내지 심화'라고 할 때 칸트의 비판철학이야말로 전범이 아닐 수 없겠다. 그린버그의 직접적인 언급과 단토의 인용을 보라.

"내가 보는 바로는 모더니즘의 본질은 어떤 분야 그 자체를 비판하기 위하여 그 분야의 특징적인 방법들을 사용한다는 데 있다. 이것은 그 분야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당 능력 범위 안에서 그 분야를 보다 공고하게 지키기 위해서이다."(<예술과 문화>, 344쪽)

"내가 보기에, 한 분야 자체를 비판하기 위해서 그 분야 특유의 방법들을 이용한다는 데 모더니즘의 본질이 있다. 이는 그 분야를 전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의 능력의 영역 속에다 더 확고하게 방호하기 위해서이다."(<예술의 종말 이후>, 47쪽)

이 대목은 <예술의 종말 이후>의 두번째 역자해설에서도 복창되고 있는데, 번역은 좀 다르다: "모더니즘의 본질은 훈련 자체를 비판하는 훈련 특유의 방법을 사용하는 데 있으며, 훈련을 타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훈련의 위상을 더욱 확고하게 확립하기 위해서이다." 대동소이하지만, 'discipline'을 '훈련'으로 옮긴 것은 어색하다. 아울러 두 번역자가 서로의 번역에 대해서는 스크린하지 않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요컨대, 모더니즘의 본질은 '자기비판'에 있다. 예술/미술의 경우, 예술/미술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 그것이 모더니즘이다. 그러한 물음을 버텨내면서 예술/미술의 부피는 좀 졸아들 테지만 더 단단해질 것이다. 마치 자코메티의 조각에서처럼 모더니즘 예술은 비본질적인 것은 다 깎아내버리는 절차를 도입한다. 그리하여 "예술이 제공하는 종류의 경험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며 다른 어떤 종류의 활동에서도 얻어질 수가 없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 그것이 예술의 과제, 또한 각각의 예술의 과제로 제기되는 것. "이렇게 하게 되면 각 예술들의 권한 영역이 축소될 것은 분명하지만, 그와 동시에 각 예술은 제 영역을 훨씬 더 확실하게 소유하게 될 것이다."(그린버그, 345쪽)

반복하자면, 예술에서 자기비판의 과제는 "각 예술의 효과들 가운데에서 다른 예술의 매체로부터 또는 다른 예술의 매체에 의해 빌어왔다고 여겨질 수 있을 모든 효과를 제거하는 것이 되었다. 그럼으로써 각각의 예술은 '순수'하게 되며, 그 '순수성'으로 각 예술의 독자성뿐만 아니라 그 질적 수준도 보장받게 될 것이다. '순수성'은 자기정의를 뜻했기에, 예술들의 자기비판이라는 과업은 철저한 자기정의의 과업이 되었다." 즉, 예술의 '자기비판'의 귀결점은 보다 엄밀한 수준에서의 '자기정의'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예술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진 것이고, 그 물음을 견뎌낸다면 새로운 정의가 도출될 테니까(물론 정황적으로, 그러한 물음은 '위기의식'의 산물이다. 그 물음은 기존의 자기정의로는 더이상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없게 될 때 터져나오는 것이니까).

'예술'이란 말을 쓰지만, 그린버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미술'이며 그 중에서 특별히 '회화'에 그는 초점을 맞춘다. 그렇다면, 회화에서의 자기비판은 어떻게 감행되는가? 회화의 매체를 구성하는 여러 한계들, 혹은 조건들 즉, 평평한 표면, 그림 바탕의 형태, 안료의 속성 가운데에서 오직 회화예술에만 배타적으로 고유한 것은 그린버그가 보기에 '평면성' 하나뿐이다(여기에서 그의 악명높은 '평면성 테제'가 주장된다). 그림의 닫힌 형태는 무대예술과 공유하는 조건/제한이고, 색채는 연극뿐 아니라 조각과도 공유하는 기준/방법이다. 하지만, "평면성, 즉 2차원성은 회화예술이 다른 어떤 예술과도 공유하지 않는 유일한 조건이었으므로, 모더니즘 회화는 다른 어떤 것에도 적응하지 않는 한편 평면성에 적응해갔다."(346쪽)

 

 

 

 

그리하여,  (3차원의 사실주의적 환영을 추구했던) 과거의 거장들에 의해 오직 암묵적으로나 간접적으로밖에는 인정될 수 없는 회화의 부정정적인 요소들이 모더니즘 회화에서는 긍정적인 요소들로 간주되게 되었고, 그린버그가 보기에 그 시작은 마네부터이다. "마네는 그림들은 최초의 모더니즘 회화가 되었는데, 이는 그림이 그 위에 그려지는 바탕의 평평한 표면을 마네의 그림들이 솔직하게 선언했기 때문이다." 최적의 사례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마네의 <올랭피아>를 이미지로 가져와 본다.

 

단토의 정리로 재정리하자면, "칸트는 철학을 우리의 지식(=인식)을 추가하는 것으로 본 게 아니라 어떻게 지식이 가능한가 하는 물음에 대답하는 것으로 보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칸트의 이러한 철학관에 상응하는 회화관은 사물의 외관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회화가 가능한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린버그가 보기에 마네야말로 모더니즘 회화의 칸트였다. '물감이 칠해진 편평한 표면들을 솔직하게 선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네의 그림들이 최초의 모더니즘 회화가 되었다."(단토, 48쪽)  

미술사의 상식에 기대에 이야기하자면, 회화에서의 모더니즘은 사진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도전에 직면하여 재현이란 기존의 특권적 규정이 아닌 새로운 규정에 따라 스스로를 재정의한 것이다. 오직 회화만이 할 수 있는 것, 혹은 오직 회화에서만 가능한 것. 그린버그는 그것을 회화의 화면공간, 즉 2차원적 평면에서 찾은 것이다. "그린버그의 논지를 따른다면, '모더니즘 이전의 미술'로부터 모더니즘 미술로의 이행은 회화의 모방적 특질로부터 비모방적 특질들로의 이행을 의미한다."(단토, 48쪽) 그 이행은 회화에서 문학적인 것뿐만 아니라 (이전에 회화가 전점으로 삼았던) 조각적인 것을 배제하려는 지속적인 시도로서 나타난다. 그러한 시도를 끝까지 밀고 나갔을 때 얻게 되는 것인 피에트 몬드리안이나 잭슨 폴록의 추상회화들일까?    

하지만, 그린버그 자신도 지적하고 있듯이 "모더니즘 회화가 지향하는 평면성은 결코 전적인 평면성일 수가 없다. 그림면에 대한 감수성이 고양됨으로써 조각적 환영이나 눈속임 회화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감수성도 시각적 환영은 허용하고 또 반드시 허용해야 하는 것이다.(...) 옛거장들은 관객이 그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의 환영을 창조했으나, 모더니스트가 창조한 환영은 관객이 바라볼 수만 있는, 즉 오직 눈으로만 여행할 수 있는 환영이다."(350쪽) 요컨대, 모더니즘 회화가 배제하고자 하는 것은 환영 일반이 아니라 '조각적 환영'(sculptural illusion) 등속이다. '시각적 환영'(optical illusion)'만은 모더니즘 회화에서도 보존되고, 또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모더니즘 회화'의 후반부에서 그린버그는 모더니즘이 과거와의 단절을 뜻하는 건 아니며 오히려 전통의 계속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초현실주의만큼은 그가 용서할 수 없었는데(해서 초현실주의는 그린버그 내러티브의 바깥, '역사의 경계 밖'에 놓여 있다), 이에 대한 단토의 설명은 이렇다: "칸트는 한때 자신의 시대인 계몽주의 시대를 인류가 성년에 도달한 시대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린버그도 미술을 이런 방식으로 생각했을지 모르는데, 그래서인지 그는 초현실주의에서 일종의 미적 퇴행을, 괴물들과 무시무시한 위협들로 가득찬 미술의 유아기에서 유래하는 가치들의 재확증을 보았다."(51쪽) 다시 말해서, 초현실주의는 '상상계'의 미술이며 이것은 자기비판이라는 성년의 과제로부터 도피이자 미적 퇴행이라고 그린버는 판단했을 법하다.

이에 대한 반론도 물론 미술 비평계에서는 제기되는바, 주로 할 포스터와 로잘린 크라우스를 주축으로 한 <옥토버>지의 비평가들이 대표적이다. 단토는 '그린버그 비판가'로 두 사람을 지목하고 있는데(50쪽), 크라우스의 <시각적 무의식>(MIT출판부, 1993)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만(불역본 엔솔로지인 <사진-인덱스-현대미술>(궁리, 2003)이 대신에 번역돼 있다), 포스터의 'Compulsive beauty'(MIT출판부, 1993)는 <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아트북스, 2005)으로 번역/소개돼 있다(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에 이어서 나는 이 책들을 읽을 계획이다).  

할 포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초현실주의를 위한 하나의 공간이 열렸다. 그것은 이를테면 옛 내러티브(즉 그린버그 내러티브) 내의 수리비용으로서, 현재 이 내러티브를 비판하기 위한 하나의 특권적인 지점이 되었다."(단토, 51쪽) 번역문에서 '수리비용'은 불어단어 'impencé'를 옮긴 것인데 'impencé'는 '수리비용'이란 뜻의 'impence'와는 다른 단어이므로 착오이다(마지막 e에 붙은 강세유무에 주의해야 한다). 'impencé'는 아직 불한사전에 등재돼 있지 않은 듯하지만, 현대철학에서는 자주 나오는 단어로 영어로는 'the unthought'로 옮긴다. 즉, '사유되지 않은 것' 정도의 뜻이다('비사유'라고 옮기는 경우도 있는데, '사유가 아닌 것'이란 뜻이므로 나로선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래 사진은 포스터가 자신의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작품. 

해서 다시 정리하면, "초현실주의를 위한 하나의 공간이 열렸다. 그것은 이를테면 옛 내러티브(즉 그린버그 내러티브) 내에서는 사유되지 않은 것으로서, 현재 이 내러티브를 비판하기 위한 하나의 특권적인 지점이 되었다." 즉, 초현실주의는 그린버그 내러티브에서 사유되지 않은 것, 억압된 것이다. 거기에 예술로서의 정당한 '공민권'을 부여하고자 하는 것인 포스터나 크라우스 등 '옥토버 그룹'의 작업이다. 이 또한 언제 들춰볼 것이냐 궁리해보는 것이니, 공부할 꺼리는 무궁이라 아니할 수 없다...

06. 02. 03 - 07.

P.S. 하지만, PC방 이용시간은 무궁이 아니어서 여기서 줄인다. <예술의 종말 이후>는 대체 언제 종말을 고하게 되는 건지 슬슬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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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8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2-08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네, 번역이 나쁜 편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철학적인 내용들이 들어가는지라 가독성은 떨어지네요. 원서와 같이 읽으시면 좀 수월해지실 겁니다. 이런 책들만 읽으며 세월을 보내는 것도 '올모스트 헤븐'일 거 같은데, 왜 다른 일들도 자꾸 발에 채이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