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작가 황혜선의 전시회가 포스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기간은 2006. 5. 11 - 6. 1). 전시회 도록 서문으로 씌어진 글을 여기에 옮겨놓는다. 제목은 '황혜선의 정원 이야기: '고요한 삶'과 '최대한의 삶''이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양식과 어법으로 독특한 예술세계를 구축해온 작가 황혜선의 이번 전시회는 한 ‘젊은 예술가’의 집요한 관심과 주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물론 그 관심과 주제는 여느 예술작품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날로그적인) 조형적 오브제들로 구현돼 있기에 (디지털적인) 논리적 언어로 쉽게 포획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작가에게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관심과 주제는 그 일련의 예술작품들을 들여다보고 말을 건넬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준다. 작가의 작업은 매번 “황혜선의 최근작은 다소 의외였다”라는 평가를 얻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의외성’은 반복됨으로써 그 자체의 문법을 구축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즉, 작가는 매번 새로운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지만 어떤 반복의 흔적들을 남기며, 관객은 거기서 고유한 언어(랑그)를 포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 언어는 어떤 메시지를 품고 있는 언어인가?


먼저, 이번에 전시되는 10점의 작품들은 전시회-텍스트, 혹은 집약된 황혜선-텍스트를 구성하는 통사적 기본단위이다. 즉, 매 작품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어휘이고 문장이면서 스스로 말을 건네는 하위텍스트들이다. 전시회-텍스트는 공간적 동시성을 바탕으로 하지만 관객의 동선에 따라 의미론적으로 (재)구성되는 시간적 서술성을 갖기도 한다. 작품의 배치/배열 자체가 작가의 섬세한 고려를 수반하는 것일 때, 이러한 서술성은 특히 주목을 요한다.  

그렇다면, 이 전시회의 하위텍스트들이 제일 먼저 건네는 메시지(발화)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텍스트-세계가 ‘끝없이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이라는 것이다. 지난 2005년에 처음 발표된 이 작품에서 ‘끝없이 갈라지는 길들’은 지시적으로는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20장의 대형 유리‘벽면’을 가리킨다(이 작품은 ‘입체적인 벽화’의 컨셉을 갖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그려져 있는 것은 작가의 소소한 일상과 사적 공간의 기억들이다.


내용과 형식의 이분법을 고집하자면,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것은 ‘사소한’ 내용과 (입체 벽화라는) ‘거창한’ 형식 사이의 미묘한 충돌이다. 이 충돌의 언어적 상관물은 아마도 작가의 2000년 작품 제목이기도 한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기대한다”일 것이다. 아무것도 믿지 않지만, 모든 것을 기대한다? 그렇다, 어쩌면 그러한 언어적 진술 속에 황혜선-텍스트의 비밀이 슬쩍 암시되어 있는 건 아닐까?


작가가 창작활동의 초기부터 집요하게 관심을 가져온 주제가 ‘소통’의 문제였다는 걸 상기해본다면(귀/귀마개가 작가의 첫 주제였다),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 그 불신의 대상은 일상에서의 소통가능성 자체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관객과의 소통가능성에 대한 불신까지도 포함하는 것이겠다. 그 소통가능성에 대한 불신은 으레 소통가능성에 대한 기대/요구와 그 경험적 좌절을 전제로 한다(소통에 대한 작가의 불신이 경험 이전의 선험적인 불신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작가는 무엇을 기대하고 요구하였던 것일까? 바로 소소한 일상들과 일상의 정물들에 대한 관심이다.


작가 황혜선의 ‘정물(Still Life)’ 연작은 그런 의미에서 창작에서의 한 분기점이라 할 만하다. 흰색 캔버스천을 이용해서 만든 흰색-받침대 위의 (다소 찌그러진) 흰색-정물들이 보여주었던 것도 받침대 위에 놓인 조각 작품이라는 ‘고상한 형식’과 찌그러진 일상적 정물이라는 ‘소소한 내용’ 간의 불일치, 혹은 미묘한 의미론적 충돌이었다.


그러한 의미론적 충돌에 작가 황혜선다운 반복이 놓여 있다. 이것을 다소 현학적으로 정리해보자면, 작가 황혜선이 즐겨 다루는 오브제들은 존재론적 지위에 있어서 사소한 ‘최소존재론적 대상들’이고, 반면에 그것들이 자리하는 공간/형식은 관례상 고상한 의미가 기대되는 ‘최대의미론적 틀’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물론 현대미술에서 이러한 충돌/파격의 원조라면 마르셀 뒤샹을 꼽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뒤샹의 작품에는 황혜선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사소한 개인성’에서 ‘개인성’이 빠져 있었다).      


최소존재론과 최대의미론의 대비와 충돌, 어쩌면 그것이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기대한다”라는 작가의 언명에 상응하는 황혜선 고유의 미학적 양식이 아닐까? 일상의 사소한 세목들과 자잘한 이야기들에 주목하게 될 때, 세상이라는 정원은 ‘큰 이야기들’ 몇 개로 가름될 수 없는, ‘끝없이 갈라지는 길들’의 무한-정원이다. 그러한 세계상을 가지고 작가는 우리의 일상적 세목의 크기를 벽화적 크기로까지 확대/격상시킴으로써, 소통가능성에 대한 회의와 불신을 뛰어넘는 ‘크나큰 관심’을 관객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작가는 모든 것을 기대한다!). ‘나’의 속삭임과 사소한 이야기에 좀더 귀기울여달라고.


작품 ‘흘리지 못한 눈물’ 또한 그런 맥락하에 놓인다. 눈물이라는 것 자체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함축하고 있지만,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므로 이 눈물은 눈물로서의 존재성도 갖지 않는, 최소존재론적 눈물이다. 그 눈물이 드러나지 않도록 다독였던 것은 크리스탈에 아주 미세하게 씌어 있는 ‘그래’ ‘괜찮아’ 같은 자기위안적 문구들일 것이다(작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 문구들을 관객들이 주목할 수 있도록 배려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믿지/기대하지 않기에?!).


그런데, 이 작품에서 특이한 것은 ‘흘리지 못한 눈물’의 존재론적 위상에 걸맞지 않는 ‘대형’ 크리스탈들이다. 이 크리스탈들이 ‘흘리지 못한 눈물’의 최대의미론적 상관물인바, 이제는 ‘흘린 눈물들’보다도 훨씬 큰 크기와 광채를 갖고서 자신에 대한 관심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고요한 삶’(still life)이 오히려 ‘최대한의 삶’(maximum life)을 위한 방책인 것처럼.

 

따라서 황혜선의 작품세계에서 작고 사소한 것에 대한 작가적 관심을 액면 그대로만 이해하는 것은 불충분해 보인다. 거기에는 작가의 작지 않은, 사소하지 않은 기대와 열망이 내기로 걸려 있기 때문이다. ‘상처’와 ‘Scars’ 같은 작품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상처’에서 작가는 강화유리판에 아주 작은 흠에 다이아몬드를 붙여놓았다. 흔히 ‘영원한 가치’를 상징하는 다이아몬드가 이 작품에서 갖는 지시적 의미는 아주 작고 사소한 ‘상처’이다. 하지만, 그 상처는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보석의 질감을 획득하면서 지워지지 않을, 영원한 상처가 된다. 만약에 그것이 ‘영원한 상처’라면, 그 상처는 결코 사소한 상처라고 말할 수 없다.

 

‘흉터들의 책’이라고도 부름직한 ‘Scar’ 역시 유사한 의미적 연관성을 보여준다. 작가는 지인들의 신체에 난 사소한 흉터들을 사진에 담아놓음으로써 그것들의 일상적인 존재론적 지위에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의학용 자료집에서가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사진은 대상의 ‘아름다운’ 면을 찍어서 보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이 사진이란 형식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를 낳는다.


하지만, 작가가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것은 그러한 기대를 배반한다. 적어도 타인들에게는 가리고 싶거나 숨기고 싶어 하는 흉터 사진들을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흉터들은 모두에게 보여지는 ‘아름다움’은 결코 갖지 못하는 지극한 ‘개인성’을 함축한다. 그것은 최소한으로 존재하도록 요구받지만, 한 인간의 삶에 대해서 최대한의 것을 말해줄 수도 있다(마치 고흐의 ‘낡은 구두’처럼). 작가 황혜선이 지속적으로 포착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다. 왜? 그녀는 모든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아마도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 가운데 가장 의외라 할 만한 것은 ‘약속’이란 제목이 붙은 스테인레스 작품일 텐데, 표제와 모양에 비추어 결혼반지 등에 해당하는 ‘내용’과 그 중요성을 전달하는 크기라는 ‘형식’이 일치하고 있는 드문 경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이며 어떤 징후일까? 보다 친절하게 작품의 의미를 전달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너무나 믿기 때문에 채울 수도 덜어낼 수도 없는’(양동이)을 참조함으로써 답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가 일부러 고른 양동이 형상은 예술성과는 거리가 먼 허름한 양동이의 그것이다. 우리는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기대한다”라는 작가의 언명을 실마리로 삼아 이 전시회-텍스트를 읽고자 했지만, 이 스테인레스 양동이 오브제가 보여주는 것은 그러한 (최수주의적) 불신과 (최대주의적) 기대 사이의 균형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채울 수도 덜어낼 수도 없는’, 즉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균형점. 어쩌면 작가 황혜선이 약속하는바, 혹은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그것이 아닐까?     

 

그러한 모순적 형용에 의해서 지시되는 균형점은 ‘우연히 일어나지만 미리 정해져 있는’에서도 반복된다.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건 ‘속치마’이다. 오브제로서의 ‘속치마’는 정신분석학적 독해를 자극하는데, 가장 단순하게 말해서 그것은 ‘숨겨진 욕망’의 상관물 아닌가? ‘겉치마’라는 일상적인 외피에 가려진, 그러다가 우연히 자신을 드러내곤 하는 ‘속치마’에 대해서, 작가는 ‘우연히 일어나지만 미리 정해져 있는’이란 제목을 붙인다. 거기서 만나는 것은 ‘속치마’의 드러남이란 사건의 우연성과 필연성이다. 우연과 필연이라는 모순적인 양태가 조우하는 ‘채울 수도 덜어낼 수도 없는’ 지점이 작가 황혜선의 영점이 아닐까?(마치 고흐의 반쯤 풀려 있고 반쯤 조여 있는 ‘낡은 구두’의 끈 같은.)

 

중요한 것은 그러한 만남의 지점, 균형점에 대한 믿음/기대가 ‘너무나’에 의해서 수식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믿음/기대의 과잉이며, 이 과잉이야말로 작가의 작업을 이끌고 가는 동력이다. ‘발이 닿지 않는’과 ‘두려운 낯설음’이라는 작가 자신의 프로필적 자아상이 암시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그것이다. ‘발이 닿지 않는’에서 작가-형상은 지상으로부터 (정서적으로) 10cm 가량 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초월이되, 최소초월이고 최소주의적 초월이다(때문에 낯익은 것이면서 낯선, ‘두려운 낯설음’을 낳는다).

 

이 초월을 낳는 간극이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와 “그러나 모든 것을 기대한다” 사이의 단락적 거리이며 ‘인간 황혜선’과 ‘작가 황혜선’ 사이의 거리이다(우리는 때로 스스로에게 ‘두려운 낯설음’의 존재이다. 하물며, 작가들임에랴!). 그리고 이 거리를 낳는 것이 “너무나 믿기 때문에”이다. 작가는 너무나 믿기 때문에, 삶이라는 양동이의 물이 균형점에서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다 찼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채울 수도 덜어낼 수도 없는”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이름 붙인다. 그리고 거기에서 삶에 대한 감정과 예술창작의 자기운동은 시작된다.


이 전시회에서 의미론적으로는 가장 마지막에 놓이는 작품이 물잔에 출렁이는 물을 보여주는 영상물 ‘바람과 같은 무게’인 것은 그런 맥락에서 필연적이다. 얼핏 이 작품에서도 보여지는 것은 삶 혹은 감정의 은유로서 제시된 물잔 속의 ‘폭풍’이다. 그것은 출렁이다가 잠잠해지고 잠잠해지다가 다시 출렁이는 연속적인 과정으로 구성돼 있다. 그러한 출렁임의 운동을 낳은 것은 제목에 따르면 ‘바람과 같은 무게’이다. 물론 이때의 바람은 사소한 공기의 운동을 지칭한다. 하지만, 물잔 속의 물은 그 미세한 공기의 결을 따라 심하게 출렁이고 다시 잠잠해진다.


물잔 속에서 (넘치지 않게) 요동하는 물은 그것이 아무리 격렬하고 히스테리컬한 것이라 하더라도 지극히 고요하면서 사소한 율동체이다. 극히 최소한으로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 투명한 물은 작가 황혜선의 최소주의적 오브제의 계보를 잇고 있다. 주목할 것은, 이 최소주의적 율동이 그것 나름으로는 정지된 균형점 상태와 구별된다는 점이다. “채워낼 수도 덜어낼 수도 없는”이라는 정념의 운동처럼.


작가 황혜선의 세계는 정지된(Still) 세계이지만 동시에 삶(Life)의 세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그 세계는 엔트로피의 세계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에너지가 계속 유입되는 反엔트로피(=네겐트로피)의 세계이다. 이 ‘외부’의 물질적 표상은 ‘바람과 같은 무게’이지만, 그 심리적 근원은 “너무나 믿기 때문에”이다.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도 지극한 의미를 갖는 ‘최대한의 삶’에 대한 갈망이다.


작가 황혜선이 지난 10년간 정물적인 오브제들의 ‘바람과 같은 무게’로써 (물론 특별히 배려하는 건 아니지만) 관객들에게 시사해온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읽힌다. 여기서 뒤늦게 드는 생각은, 어쩌면 ‘고요한 삶’(최소존재론)이라는 것 자체가 ‘최대한의 삶’(최대의미론)의 알리바이가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황혜선의 예술세계, 혹은 그녀의 정원에서는 일상적인 사물들과 사소한 기억들마저도 벽화적인 크기의 의미를 부여받고 있지 않은가? 혹은 스노볼처럼 영원한 의미공간에 보존되고 있지 않은가? 흘리지 않은 눈물조차도 대형 크리스탈로 표상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녀의 ‘끝없이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우리의 범상한 정원들보다 도대체 얼마나 더 큰 것인지!     

 

06. 0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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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6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 2004년 11월말에 올린 모스크바 통신문은 "책은 무조건 즐겁게 읽어라"란 제목을 달고 있는데, 그 후반부는 올해초에 '공부냐 학습이냐'란 페이퍼로 따로 정리해놓은 바 있다. 그 전반부를 이미지 버전으로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둔다. 제목은 페나크의 소설에서 인용한 '즐거운 도망, 즐거운 저항'으로 바꿔달고. 다시 읽어보니 '나의 독서론'도 겸하고 있다. 

낮에 (점심이 아니라) 아침을 먹고서 수업에 들어가기 위해 나서는 참에 문 우편함에 인쇄 우편물이 들어 있는 걸 발견했다. 북매거진 <텍스트>(23호)였다. 지난 22호부터 20일 간행 체제로 바뀌고서 두번째로 나온 것인데(22호에 나는 ‘체홉론’을 기고한바 있다), 표지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실용적’이었지만, ‘책과 시대’란 가볍지 않은 주제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었다. 제목의 인용구는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처럼>(문학과지성사)에 대한 서평의 제목이기도 한데, <텍스트>의 표지에는 그의 글이 조금 더 인용돼 있다.



 

 

  

“지금까지 우리의 인격을 형성해온 책읽기란 대개는 순응하고 따르는 책읽기라기보다는, 무언가에 반하고 맞서는 책읽기였다. 즉 이제껏 우리가 책을 읽어온 것은, 마치 세상과 등지듯 현실을 거부하고 현실과 대립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때론 우리가 현실 도피자처럼 여겨지고 현실마저 우리가 탐닉하는 독서의 매력에 가려져 아득해질지언정, 어디까지나 우리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도망자,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탈주자인 것이다. 모든 독서는 저마다 무언가에 대한 저항 행위이다.”(<소설처럼>, 103-4쪽)

두 개의 인용구를 종합하면, 책읽기는 ‘즐거운 도망’이고, ‘즐거운 저항’이다. 도망치면서 저항하는 것인지, 저항하면서 도망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한없이 도망치고 한없이 저항한다. 아니, 도망치기 위해서, 저항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 건지도 모르겠다. (페나크에 따르면) 그것이 책읽기의 의의이다. 중요한 것은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는 것. 만약에 당신이 책을 읽으면서 즐겁지 않(았)다면, 당신은 제대로 도망가지도, 저항하지도 못한 것이 된다(그건 당신이 변변찮다는 얘기이다). 그러니, 책은 무조건, 절대적으로, 악착같이 즐겁게 읽을 필요가 있다(물론 애초에 그럴 만한 책을 고르는 안목이 중요하다).  


 

 

 

 

‘즐거운 책읽기’와 관련하여 나에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책이 두 권 있다. 그건 김현의 평론집 <책읽기의 괴로움>(민음사)과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동문선)이다. 기억에 <책읽기의 괴로움>은 최인훈의 <회색인>에 대한 평문의 제목을 표제로 한 책이었다. 나는 김현 전집으로 다른 책과 묶여서 나온 <책읽기의 괴로움>도 갖고 있지만, 내가 더 아끼는 건 민음사판의 초판본이다. <분석과 해석> 이전에 나온 것이니까 아마도 80년대 초반에 나왔을 법한데, 내가 중학교 때부터 문학평론집을 읽은 건 아니므로 내가 이 책을 구한 건 당연히 훨씬 나중이다(물론 책은 이미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다 읽은 뒤이다).  

절판됐던 그 책을 구한 건 아마도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90년대 초반에 새로 개장한 영풍문고에서였다. 아마 재고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던 책이 나온 듯한데, 나는 한 권 남아 있던 이 책을 집어들고서 쾌재를 부른 적이 있다(요컨대, 이런 게 ‘책 구하기의 즐거움’이다). 그게, 마지막 한 권이었는지는 어떻게 아느냐고? 그걸 확인해보려고, 책을 사고 며칠 안 돼서 서점에 또 가봤기 때문이다(더는 진열돼 있지 않았다). 해서, 한동안 내가 가장 즐겨 들르던 서점이 영풍문고였고, 영풍문고는 내게 <책읽기의 괴로움>으로 각인돼 있다. 

사실, (내 기억에) 김현이 말한 ‘책읽기의 괴로움’은 책을 통해서 읽을 수밖에 없는 ‘세상 읽기의 괴로움’을 뜻한다. 그러니까 그 자체로는 ‘즐거운 책읽기’를 괴롭게 만드는 건 세상인 셈. 하지만, 책읽기의 즐거움은 그런 괴로움을 기꺼이 감수하도록 하는 즐거움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쾌락원칙을 넘어선다. 즉, 책읽기의 즐거움은 쾌락이 아니라 향락이다.

 

  

 

 

 

바르트의 책 <텍스트의 즐거움>은 우리말로 두 종의 번역서가 나와 있는데(나에겐 이 두 번역본과 영역본이 있다), 읽은 만한 건 김희영 교수가 옮긴 동문선본이다(연대출판부본은 ‘책읽기의 괴로움’을 강요하는 번역이다). 바르트의 책들은 우리말 전집이 기획/출간되고 있을 정도이니까 우리에게 친숙한 편이지만, 아쉽게도 그의 유미적인/유희적인 문체 때문에 쉽게 읽히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사랑의 단상>이나 <카메라 루시다> 정도가 예외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 우리말로 번역된 바르트의 책들은 대부분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카메라 루시다>, 즉 <밝은 방>만 아직 보지 못했다). 더 번역된 건 두툼한 선집 외에 정도. 그 중에서 내가 산 건 아직까지는 <기호의 제국> 한 권뿐인데, 그건 내가 영역본을 따로 갖고 있지 않아서이다.

<텍스트의 즐거움>을 읽기 위해서 먼저 읽어야 하는 것은 '저자의 죽음'과 '작품에서 텍스트로(From Work to Text)'라는 바르트의 두 짧은 평문이다(동문선본에 같이 번역돼 있을 듯하다). 어떤 책을 ‘작품(Work)’으로 간주하는 건 간단히 말해서, 그걸 산출한 ‘주인’ 혹은 ‘아버지’로서의 저자를 상정하고, 그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을 작품 읽기의 목적으로 삼는 태도이다(따라서 신학적이며 형이상학적인 태도이다). 반면에 어떤 책을 ‘텍스트(Text)’로 간주하는 건(‘교재’란 의미의 ‘텍스트’가 아니다), 더 이상 그런 의미작용의 중심으로서의 저자를 고려하지 않는 태도이다. 그래서, ‘저자의 죽음’이다(이건 반형이상학적이며 탕아적인 태도이다).

바르트는 ‘작품’의 은유로 ‘유기체’를 드는 반면에 ‘텍스트’의 은유로는 ‘덫’을 든다. 하나는 채워져 있고, 다른 하나는 비어 있다. 그래서, 작품은 독자가 ‘읽어내는’ 것이지만, 텍스트는 독자가 ‘채워넣는’ 것이 된다. 해서, (바르트의 다른 용어로 표현하자면) ‘작품’이 독자가 읽어내는 텍스트(readerly text)에 대응한다면, ‘텍스트’는 독자가 써나가는 텍스트(writerly text)에 대응한다.


나는 러시아 문학 이전에 ‘문학’이 전공이다 보니까 문학이론/비평 또한 관심에서 제쳐놓을 수가 없(었)는데(해서 문학이론서들을 지겨울 정도로 많이 읽었다. 그런데, 이 ‘이론’이라는 게 말 그대로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요구한다. ‘공부’하기엔 좋은 동네인 셈), 이른바 ‘이론’은 20세기 후반 인문학의 주도적인 담론이었다. 그 기폭제가 (프랑스) 구조주의였다면(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구조주의는 ‘현실’을 ‘구조’로 대체/환원했다) 문학비평에서 ‘구조주의 혁명’을 주도했던 바르트의 위치는 간과될 수 없다(물론 그는 <텍스트의 즐거움>(1973)을 경계로 포스트 구조주의로 넘어간다). 

 

특이한 건 그가 주로 아카데미즘의 바깥에서 활동했다는 것.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기호체계의 사상을 가르치는 교수로 취임하는 것이 1977년이니까 1953년 <글쓰기의 영도>(이 또한 우리말 번역이 있는데, ‘번역의 0도’쯤으로 불릴 만하다)로 ‘데뷔’한 지 22년이 지나서야 그는 ‘변변한’ 직업을 갖게 된다(이전에 그가 몸담았던 연구소 등에서의 지위나 보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그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는 것은 불과 몇 년 후이다(내 기억에는 1980년이고 그의 유작이 <밝은 방>, 곧 <카메라 루시다>이다).


아마도 그런 전기적 이력이 보다 ‘본격적인’ 구조주의 비평가라는 제라르 주네트보다 바르트에게 더 친밀감을 갖게 하는 듯하다(나는 두툼한 영어판 바르트 전기도 갖고 있으며, 1/3쯤 읽었더랬다). 그건 ‘불문학자’ 김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프랑스비평사: 현대편>(문학과지성사)에서 주네트 대신에 바르트에게 한 장을 할애한다(곽광수 교수 같은 이는 바르트를 딜레탕트 비평가, 좀 ‘재치 있는’ 비평가 정도로 평가절하한다).

 

 

 

 

 

 

 

 

 

 

참고로, 김현이 재구성한 프랑스 현대비평은 '사르트르-바슐라르-바르트-블랑쇼'의 4각형으로 이루어지는바, 이들의 키워드를 차례대로 나열하면 '참여-상상력-언어-죽음'이다(나는 문학을 구성하는 네 원소가 ‘사랑과 가난과 죽음과 언어’라고 생각하는바, 사랑과 상상력, 가난과 참여를 등가화시키면, 두 사각형은 동일한 매트릭스의 변주가 된다).

 

주인/아버지로서의 ‘저자의 죽음’을 선언한 바르트였지만, 사실 그에겐 아버지가 없었다(일찍 여읜 걸로 기억된다). 그래서 그에겐 내내 어머니밖에 없었으며(<밝은 방>은 그 어머니의 죽음에 바쳐진 책이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교통사고이긴 했지만) 그는 얼마 더 살지 못했다(참고로 그는 동성애자였다). ‘유복자’ 혹은 ‘아비 없는 자식’이란 점에서 바르트는 한 세대 선배인 사르트르를 따르고 있다(프랑스의 20세기 지성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이들은 사르트르-바르트-데리다이다. 데리다의 죽음으로 이들은 모두 고인이 됐다. 1980년부터 2004년까지이다).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린시절 나에게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79년 박정희의 죽음이 아니라 80년 사르트르의 죽음이었다(*나는 '사르트르의 죽음과 철학'이란 글을 쓴 바 있다). 나는 신문지상에 보도된 그의 죽음에 매료됐고, (‘정치가’가 아닌) ‘작가’의 길을 선망하게 된다(그 길이 이 길이었다니!).

 

 

고등학교 때부터 사르트르의 소설들을 읽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책들을 모두 읽은 건 아니다(나는 <존재와 무>도 아직 읽지 않았다). 하지만, 국내에서 나온 사르트르에 대한 책들은 거의 다 읽었다. 얼마 전에는 헌책방에서 러시아어로 된 사르트르 연구서를 샀는데(333쪽이고 1,600원) 레오니드 안드레예프란 저자의 이름은 낯설지만, 1994년에 나온 이 책이 러시아에서 나온 ‘최초의 사르트르 연구서’란 점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레이몽 아롱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좌파였던 사르트르 세대의 프랑스 지식인들이 과거 소련체제, 그리고 소련의 작가들과 가졌던 ‘친분’을 고려하면(이들의 서신교환도 두툼한 책 한 권 분량이다), 90년대에 들어서야 그의 연구서가 나왔다는 점은 다소 의외이다(소련에서는 ‘부르주아 철학’도 열심히 연구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책읽기의 괴로움>과 <텍스트의 즐거움>, 두 권의 책이 생각난다는 얘기이다. 물론 ‘텍스트’가 그러하듯이 모든 ‘생각’에는 꼬리가 있다(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김현의 유작은 사후에 출간된 일기 <행복한 책읽기>인데, (내 기억에) 생전에 제목을 정해두었다는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책읽기의 괴로움>이었을 것이다(돌이켜 보건대, 그의 죽음은 90년대 한국문학의 최대 손실이다. 비평가와 불문학자로서 그의 ‘열정’과 ‘업적’을 넘어설 만한 이는 아직 없으며, 앞으로도 당분간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건 한편으로 고인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그 ‘행복한 책읽기’가 10년 정도만 더 연장됐어도, 우리는 (그는 4년에 한번 꼴로 책을 냈으므로) 최소한 두 권의 문학비평집과 (그가 <프랑스비평사>에서 포부를 밝힌바) 리쾨르와 데리다 등의 연구서를 더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다.

 

 

아마도 1994년에 책이 나온 건 1964년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거부 3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도 갖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올해는 그의 노벨상 수상/거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어제 날짜 <니자비씨마야>의 ‘엑스 리브리스’의 표제기사가 그걸 상기시켜주었는데, 러시아(소련)에 사르트르가 제일 처음 소개된 것이 바로 그 해 1964년이고, <노브이 미르>란 잡지(1962년에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발표됐던 잡지)에 <말>이 번역/소개됐다(그의 ‘자서전’ <말>은 ‘읽기’와 ‘쓰기’ 두 대목으로 구성돼 있다. *새로운 우리말 번역본이 출간되지 않는 것은 유감스럽다).

 

계기는 물론 그가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 스웨덴 한림원의 선정에 대해서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상은 거부한다. 하지만, 돈은 받겠다.”(이를 인용한 러시아 필자는 이것이 ‘진정한 철학적 행위’라고 평한다. 그는 사르트르를 무척 좋아한다고 하니까, 반어적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는(나부터도) 흔히 “나는 노벨상을 거부한다”란 그의 선언을 사르트르 철학(=자유의 철학)의 상징적인 제스처로 이해해왔는데, 알고 보면 그건 절반의 이해였던 셈이다.

 

거기에 덧붙여져야 할 것은 “하지만, 돈은 받겠다!”이다. 그럴 때에라야,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같은 구호가 아주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는가?(즉, 실존주의는 마음이 약하고, 돈에 약하다!) 그리고, 그럴 때에라야 실존주의가 왜 프롤레타리아 철학이 아니라 부르주아 철학인가가 명료해지지 않는가? 더불어, 우리는 사르트르를 더 좋아하게 되지 않는가?..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 사르트르는 <말>과 <구토> 등이 포함된 작품집과 <보들레르>, <상상적인 것>(그의 초기 상상력 연구서) 등이다(<존재와 무>는 너무 고가여서 사지 못하더라도 ‘전쟁일기’인 <이상한 전쟁의 기록>이나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은 형편을 봐서 구할 생각이다. 어린시절 ‘영웅’에 대한 예의로서). <상상적인 것>은 그가 후설의 영향하에 쓴 것으로 흔히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 연구와 비교된다(김현의 연구가 있다). 더불어, 얇은 분량의 <보들레르>는 그의 ‘실존적 정신분석’이란 방법론이 구체적으로 적용된 사례이다.

 

<상상적인 것>은 우리말 번역이 없지만, <보들레르>(문학과지성사)는 오래 전에 번역/출간돼 있다(아마 절판됐을 것이다). 나는 지난 달에 2권짜리 보들레르 선집도 구했기 때문에(1권은 시집이고, 2권은 산문집이다) 이젠 좀 읽어보는 일만이 남았다(보들레르를 읽는 건 나의 오랜 숙제 중의 하나이다. 그가 현대시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한국어와 영어와 러시아어로(들뢰즈가 인용한 프루스트의 말을 빌면, “훌륭한 작품은 모두 외국어로 씌어져 있다”니까 읽는 것도 ‘외국어’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한국어 사르트르는 제법 풍족한 편이다. 작품도 <자유의 길>을 포함해 대부분 번역돼 있고(그의 일기와 플로베르론인 <집안의 백치>, 철학서인 <변증법적 이성비판> 정도를 제외하면) 정명환, 박이문, 박정자 선생들의 소개도 충실하고 수준도 높다. 사실 다른 작가/철학자들의 경우도 이런 정도의 소개 수준만 되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이에 견줄 만한 작가는 김화영 교수의 카뮈 정도이다). 사르트르의 전기로는 코헨-솔랄의 3권짜리 전기 <사르트르>가 우리말로 번역돼 있는바, 규모에 맞게 충실하면서도 재미있다.


실존주의 세대(4-50년대)와 구조주의 세대(60년대)를 대표하는 사르트르와 바르트는 각각 ‘타동사’와 ‘자동사’로서의 문학을 주창한 걸로 흔히 비교되는데(하지만 사르트르 자신도 시는 ‘앙가주망(=참여)’에서 제외시켰다), 폴 존슨이 쓴 <지식인들>을 보면, 딱히 그렇게 대조적인 것만도 아니다(지식인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는 그의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브레히트 비판이다). 그는 사르트르를 ‘모피를 뒤집어쓴 잉크’라고 불르는데, 하여간에 이 ‘인간’은 평생 끊임없이 뭔가를 써댄 것이었다(그렇게 써대고 노벨문학상까지 받았으니 할말은 없지만).


즉, 그에게서 글쓰기의 발화주체는 타동사적 주체였지만(사르트르의 글쓰기 주어로서의 ‘나’), 발화행위주체인 사르트르 자신은 자동사적 주체였던 것이다(쉽게 얘기하면, 앙가주망(=타동사)을 주창하는 글들을 그는 자동사적으로 썼다). 그러니, 사르트르의 ‘참여’란 것은 좀 의심스러운 것일까? 거꾸로인 것 같다. 그는 모든 지식인의 참여가 갖는 자동사적 성격(‘자위행위적’ 성격)을 상기시켜주는바, 그런 의미에서 그의 앙가주망은 ‘진짜’ 앙가주망이다(오히려 우리가 의심해 보아야 하는 것은 그런 자위행위적 성격을 부인/배제하는 앙가주망이 아닐까?).


미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비평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그의 박사학위논문은 사르트르인바(‘문체의 기원’이란 제목인가로 책이 나와 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형식>(<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로 번역됨)에서도 (여느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달리) 사르트르를 중요하게 다룬다. 하지만, 제임슨을 필두로 한 미국의 강단 좌파들의 ‘정치적 행위’는 (사르트르와 비교해 보더라도) 대학 등의 지식인 사회에만 한정된 것이다. 즉, 그들의 참여는 의미론적으론 타동사이지만, 화용론적으론 자동사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물며 대부분의 미국 학문은 기능주의적이지 않은가? (직접적인 경험담은 아니지만) 철학이 그렇고, 심리학이 그렇다. 분업화된 분석철학은 철학의 자기소외를 자기존립의 당위적인 조건으로 수용한다는 점에서 자폐적이며, 자아(에고) 심리학은 사회에 대한 (병리적) 개인의 ‘적응’을 중심적인 과제로 설정함으로써 정작 사회의 병리성 자체는 사고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직면한다. 가령, 소비자심리학이나 유권자심리학이 자본주의나 민주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까? 가령, 분석철학이나 자아심리학은 파농의 탈식민주의를 문제로서 사유할 수 있는가?(최근 파농의 <대지의 저주 받은 사람들>(그린비)이 번역돼 나온 걸로 돼 있다. 기억에, 재번역이다.)


이런 생각은 얼마전 미 대선 결과에 대한 김우창 교수의 시론(時論)을 읽고서 든 것인데, 정작 9.11 테러사건이 발생한 맨하탄 지역에서 부시의 지지율이 20% 미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케리가 패배한 것은 도시 지역의 진보적 지식인/중산층들과 그와는 전혀 다른 사고와 가치관을 가진 전통적/보수적 ‘시골’ 사람들이 서로 유리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건 마치 제정 러시아시절, 인텔리겐치아와 민중 간의 유리를 상기시킨다).

 

아무리 대학은 좌파 혹은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어도 그 영향력은 대학가 주변에 한정돼 있는 것(한국이라고 사정이 다른 건 아니다. 80년대 대학가와 지방 소도시의 ‘공기’는 너무도 달랐다). 그러니까 미국사회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네트워킹이 부족한 고립사회이다(아메리카는 ‘섬’들로 이루어진 대륙이다). 개방된 고립사회(서로 문은 열어두고 있지만, 아무도 왕래하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리 (좌파)이론이 ‘첨단’을 가고, 좌파 지식인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하더라도 그 사회의 보수성은 쉽게 개선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경우를 타산지석으로 삼는다면, 우리가 좀더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은 사회적 의사소통의 네트워킹을 강화하는 것이다(데리다의 ‘새로운 계몽주의’는 이런 의미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건 흔한 말로 시민의식의 강화이면서 시민교양의 확충이며, 그로써 지식인과 대중간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다(지식인이 대중화되고, 대중이 지식인화되어야 한다. 마치 모든 노동자가 예술가이어야 한다는 사회주의의 구호처럼, 모든 노동자는 ‘지식인’이 될 필요가 있다. 의사나 교수보다 응급차 운전기사가 더 많은 월급을 받았던 과거 소련에서처럼).

 

 

 

 

 

 

 

 

 

 

그리고 거기에 기본이 되는 것은 기본적인 책들을 읽(히)는 것이고(가령, 시카고시에서 <앵무새 죽이기>를 단체로 읽듯이), 서로 대화/토론하는 것이다(학교에서 왜 ‘말하기’를 교육하지 않는가?).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것이 생활의 ‘기본’이 될 경우에(학교에서 왜 ‘글쓰기’를 교육하지 않는가?), 민주주의(=존재적 차원)는 (지젝이 지적하는바) 포퓰리즘(=존재론적 차원)으로 추락하지 않게 될 것이다(이런 경우엔 하이데거가 아니라 레비나스를 따라서, '존재에서 존재자로'라고 말해야 할 듯하다). 이 정도도 너무 거창한 것인가?

 

06. 0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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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의 <형제 자매들> 공연을 앞두고 러시아 연출가 레프 도진이 내한했다. 관련 인터뷰 기사들이 몇 군데 게재됐는데,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여기서는 한국일보(06. 05. 18)와 함께 원작자인 아브라모프의 이미지들을 몇 개 옮겨온다.

-“아마 관료들이 게을러 그 책을 읽지 않았겠죠.” 체제에 대한 비판의 칼날이 도처에서 번득이는 <형제 자매들>이 1985년 러시아에서 초연될 수 있었던 것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며 러시아 연출가 레프 도진(62)의 반농담에 회견장의 분위기가 한결 밝아졌다. 그는 “뭣보다 표도르 아브라모프의 비판적 소설이 어떻게 검열을 통과했는지 지금도 모를 일”이라고 말했다.

(*)사실 표도르 아브라모프(1920-1983)란 이름이 내게는 생소하다. 이번 공연이 아니었다면 찾아볼 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원작 <형제자매들>은 1958년에 발표된 소설이다(그의 3부작중 첫번째 작품). 그것이 1985년에 연극으로 초연되었다는 것. 아래가 원작소설 표지이다.  



-17일 오후 3시 서울 코리아나 호텔에서 열린 기자 회견에서 극단 말리극장의 대표 도진은 자신이 이끄는 연극 집단은 강력한 예술적ㆍ인간적 결속력으로 묶여 있음을 강조했다. “배우들이 거의 내 제자이니, 20년 넘게 한 몸처럼 자라 온 연극 집단은 세계적으로 드물죠.” 배우 41명을 포함, 이번에 함께 온 70명의 단원 대부분은 실제 한 식구나 다름 없다. 그러나 연극이란 관객들에 의해 꾸준히 새로워지는 만큼, 2001년 첫 만남을 가진 열정적 한국 관객들로부터 새로움을 기대한다는 바람을 말했다.

-“연극이란 익숙한 것들을 밀쳐내고, 낯선 것들을 깊이 들여다보는 거죠. TV나 컴퓨터 때문에 우리 삶의 템포는 너무 발라졌어요. 우리는 그렇게 자동 기계가 돼 가고 있습니다.” 그의 7시간반의 연극은 그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 10년에 걸쳐 숙성돼 온 대하 서사시 같은 이번 무대에 한국 관객들은 ‘공감’해 주길 바란다는 말. “인간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공감의 능력이니까요.” 그는 “우리 연극을 통해 하는 정신적 모험은 멍청한 블록버스터보다는 훨씬 의미 있다”고 말했다.



-노대가의 말은 21세기, 세계 곳곳에서 분투하는 연극인들에게 격려의 전언이었다. 그는 “이 시대, 연극은 더 느리게, 더 심각하게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했다. “사랑, 죽음, 기아, 희망, 절망이 뭔지 보고 듣게 해 줘야 합니다. 20년 동안 해 오면서 이 작품은 더 드라마틱해졌고, 더 비극적으로 발전했죠.”이번 공연은 20~21일 LG 아트센터에서 7시간 30분 동안 자막과 함께 상연된다.

06. 05. 18.

P.S. 어젯밤에 EBS에서 시사다큐멘터리 '자본주의 러시아의 그늘' 편을 봤다. BBC에서 제작한 것이었는데(최근 이야기였지만 제작년도는 정확히 모르겠다), 우리의 형편과는 다르게 러시아에서 현재 문제되고 있는 것은 '천민 자본주의'가 아니라 '날강도 자본주의'였다. 권력을 등에 업고 서류 위조 등의 수법으로 달려드는 작전세력들에게 사유재산을 어이없게 강탈당하고 있는 러시아인들의 현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 희생자의 물망에는 모스크바의 에르미타주극장을 운영하고 있는 저명한 현역 연출가도 포함돼 있었다(그에겐 현실보다 더한 부조리극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아래는 TV토론 프로그램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억울한 처지를 호소하던 연출가 미하일 레비틴(레비찐).

러시아에 희망이 있는가? 그 희망은 '익숙한 절망'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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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05-18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극이란 익숙한 것들을 밀쳐내고, 낯선 것들을 깊이 들여다보는 거죠. 이 말에 공감합니다. 로쟈님은 이 연극 보시나요?
날강도 자본주의는 러시아만 있는 것 같진 않네요. 그죠?

로쟈 2006-05-18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저는 토요일에 봅니다. 그리고 '날강도'는 물론 러시아에만 있지 않지만, 러시아는 좀 셉니다. 그리고 '비유'가 아니구요...

stella.K 2006-05-18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저는 그 나라를 모르니...
토요일 날 많이 기대되시겠어요. 즐거운 시간 되세요. 기왕이면 로쟈님의 리뷰를 보면 좋겠군요.^^

로쟈 2006-05-18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연에 대한 간단한 리뷰 정도는 올릴 수 있을 겁니다.^^
 

사담 후세인이 체포되었다는 것이 어제오늘의 톱뉴스이다(*이 글은 2003년 12월 중순에 씌어졌다). 부시가 재선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어제 문득 들었지만(*예감은 언제나 실현된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체포되는니(우리의 KAL기 사건처럼 타이밍을 맞춰서), 미리 체포되는 게 낫다는 생각도 해본다. 어차피 곧 연말이니까 두주쯤 지나면 잊혀질 것이다. 아니다! 그에 대한 재판이 남아있다!...

 

 

 



연말연시는 비교적 좋은 책들이 나오는 계절이다. 주머니가 좀 넉넉해지는 시기인 만큼 (실제적인 통계는 갖고 있지 않지만) 책에 대한 소비도 다소 헤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눈길이 가는 책들이 많이 나왔고, 책 소개의 주기도 빨라졌다.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건(가장 먼저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케밀 파야의 <성의 페르소나>(예경)이다. 지난주 한겨레 서평에서 가장 크게 다루어진 책이다.

원제는 'Sexual Personae'(1990)이고, 번역서의 분량이 916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이다(원서도 718쪽에 이른다). 지난주 구내서점에 포장된 채로 들어왔길래 무슨 책인가 궁금했었는데, 알고 보니 학교 도서관에서 자주 보던, 다소 싸구려틱한(!) 표지의 책이었다. 인터넷교보에 자세히 소개가 되어 있고, 몇 군데에서 신간리뷰로 다루기도 했으니까 찾아보시면 될 듯하다.

한겨레 고명섭 기자에 의하면 "서구 문화의 역사를 바로 이 3중의 이분법으로, 다시 말해 디오니소스=자연=여성 대 아폴론=문명=남성의 대립으로 이해함으로써 논란을 불러일으킨 책이다." 논란만 불러일으켰다면, 그저 호사가적 관심거리만 될 터이지만, 내가 제임슨의 신간과 함께 이 책을 주문한 것은(내일쯤 책을 받아봐야 내용을 알 수 있을 거 같다), 해롤드 블룸의 추천사 때문이다. 그는 이 책이 말의 좋은 의미에서 '센세이션Sensation'이며, 이에 비견할 만한 책이 없다는 호평을 하고 있다. 나는 거물들의 그런 말에 잘 넘어간다.

 

 

 



두번째 책은 민음사에서 나오는 '일본의 현대지성' 시리즈의 7번째 책인 나카무라 유지로의 <공통감각론>이다(*<문화의 두 얼굴>, <근대초극론> 등도 이 시리즈의 책들이다). 어제 영풍문고에 들렀을 때에도 실물은 보지 못했지만, 이 시리즈의 책은 모두 읽을 만하다는 경험적 판단에 근거하여 추천할 수 있다. 알라딘의 소개글에 의하면, "이 책은 커먼 센스 commom senses, 상식, 공통감각의 문제에서 시작하여, 네덜란드의 화가 에스헤르, 초현실주의자 마그리리트 등의 회화론, 지각 심리학의 역전 시야에 대한 지각 문제, 그리고 데카르트파 언어학과 촘스키의 생성문법의 이론까지, 심지어 베르그송의 기억의 문제까지 논의를 확대시키고 있다." 저자는 바슐라르, 푸코 등을 일어로 번역한 바 있는 일본의 중진학자이고, 역자는 마루야마 게이자부로의 <존재와 언어>(민음사)를 번역했던 고동호 교수이다.

 

 

 

 

세번째 책은 박홍규 교수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우물이있는집)이다. 이쯤되면 박교수의 놀랄 만한 생산력에 경탄을 금할 수 없는데, <오리엔탈리즘>의 역자이기도 한 그가 올 한해 (번역서를 제외하고) 낸 책들은 내가 기억하는 것으로 모두 7권이다. 이전에도 그런 얘기를 한 듯하지만, 이에 견줄 만한 글쓰기의 생산성이라면, 강준만 정도를 꼽을 수 있을 뿐이다. 사실, 두 사람의 글은 스피디하게 읽힌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어쨌든 지난번에 타계한 에드워드 사이드를 추모하는 저작 한권 정도는 서가에 꽂아둘 만하다(*다른 입문서로는 2005년에 나온 <다시 에드워드 사이드를 위하여>가 있다). 굳이, 박교수의 흠을 덧붙여 지적하자면, 교정이 섬세하지 않다는 것. 하긴 우리 출판계에서 교정이 잘 돼 있는 책을 손에 꼽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네번째 책은 남미문학의 거장인 페루 작가 바르가스 요사(Llosa)의 <세상종말전쟁>(새물결)이다. 나는 그의 책 가운데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문학동네, 초역판은 다른 제목이었다)를 부분적으로 읽고, '대단한 구라'라는 생각을 한 바 있는데, 이번에 나온 신간은 그의 최고작이라고 한다. 당연히 한번쯤 읽어봄 직하지 않은가. 아마도 올해 번역돼 나온 남미문학 작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이지 않나 싶다. 우리에게 알려진 작가들 가운데는 가브리엘 마르케스나 카를로스 푸엔테스 정도가 그와 견줄만한 생존작가들이다.

 

 

 


다섯번째 책은 프란스 드 왈의 <보노보>(새물결)이다. 보노보에 대한 화보들이 실려 있는(그래서 책값이 256쪽에 35,000원이다) 이 생태 연구서는 제인 구달의 말을 빌면 "이 4번째 거대 유인원의 진가를 세상에 알려줄 책"이다. 4대 유인원이란,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그리고 덩치가 작아서 '피그미침팬지'라고도 불리는 이 보노보를 말한다.

내가 보노보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건, 인류학자 리처드 랭햄(하버드대 교수)과 과학저술가 데일 피터슨의 <악마 같은 남성>(사이언스북스, 1998)에서였다. 거기서 야만적인 폭력성을 드러내는 다른 가부장적 영장류들과 달리 보노보는 온화한 가모장적 사회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소개되었다. 요컨대, 우리의 '오래된 미래'가 거기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 보노보에 대한 드문 연구소개서인 만큼 관심을 둘 만하다.

참고로, 보노보는 동성애도 즐기는 프리섹스주의자들이라고. 저자인 영장류 학자 드 왈은 <정치하는 원숭이: 침팬지의 정치와 성>(동풍, 1995)의 저자이기도 하다(*이 책은 <침팬지 폴리틱스>로 다시 나왔다. 드 왈(드 발)의 최신간은 작년 12월에 나온 <내 안의 유인원>이다).

이 책들을 언제 다 읽을 것인가?!...

2003.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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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눈에 띄는 책들은 대개 일간지 북리뷰란에서 다루어졌기 때문에, 굳이 군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어 보인다(*이 글은 2003년 12얼 초순에 씌어졌다). 지난 두 주간에 나온 책들 중에서 과학분야에서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까치)나 평전분야에서 <안데르센 자서전>(Human & Books) 등은 누가 보더라도 손꼽을 만한 책이고, 당연히 1면에서 다루어졌다.

 

 

 



오늘 배달된 빌 브라이슨의 책은 이미 영미권에서 장기간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만큼(교양과학서쪽에선 보통 베스트셀러가 믿을 만하다) 신뢰할 만한 책으로 보인다. 양성자와 담백질과 쿼크의 역사를 말하지만, 저자가 비교적 과학의 문외한이라는 점도 독자의 부담을 덜어주는 책이다(색인 포함 558쪽). 이 분야에서 경쟁했던 책은 ‘창조론을 과학을 어떻게 이용하는가?’란 부제를 단 <과학적 사기>(이제이북스)인데, 문제는 정작 읽어야 할 창조론 과학의 신봉자들이 이런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 <왜 하필이면 그리스에서 과학이 탄생했을까>(몸과마음)도 눈길을 끈다.

 

 

 

 

안데르센의 자서전(896쪽)과 경합을 벌인 책은 모처럼 나온 파크 호건의 <셰익스피어 평전>(북폴리오, 644쪽)이다. 원저는 1998년에 옥스포드대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신간인 만큼 내용이 풍성할 거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책이고, 또 사실이 그래 보인다. 역자는 시인 김정환. 어디선가, 이참에 셰익스피어 전집에 도전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는데, 한번 기대해 봄직하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초의 과학자>(사이언스북스, 470쪽)도 흥미로워보이는 평전이다. 헤르만 헤세의 세번째 부인의 니논 헤세의 편지모음 <헤세, 내 영혼의 작은 새>(웅진닷컴, 752쪽)도 헤세의 독자들이 반길 만한 책이다. 그러나 역시 1순위는 안데르센의 자서전(원제는 ‘내 인생의 동화’)이다(뒷표지에 특이하게도 황동규 시인의 추천사가 실려 있는데, 알고보니 이 신생출판사의 발행인이 문학평론가 하응백씨이다. 그럴 만한 관계이다!)

 

 

 


인문서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보이는 것의 날인(Signatures of the Visible)>(한나래)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제임슨의 대중문화론, 더 구체적으론 영화론이다. 난해하기로 악명높은 그의 책으론 아도르노 연구서인 <후기 마르크스주의>(한길사, 2000) 이후 3년만에 소개되는 책인데, 주저인 <정치적 무의식>은 왜 아직 안나오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새삼 불러일으킨다(*이젠 궁금한 걸 넘어서 무슨 '음모'와 관련된 게 아닐까란 생각마저 갖게 한다). 신간의 복사본을 내가 갖고 있는지 어쩐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이 참에 찾아서 읽어볼까 한다. 원서는 그다지 두꺼워 보이지 않았는데, 우리말 역서는 485쪽에 25,000원. 이젠 웬만한 역서들이 원서보다 비싼 시대가 돼 버렸다(번역만 괜찮다면야 나무랄 건 없지만).

이론서로서 같이 언급되어야 할 책들은 기호학 삼총사이다. 즉 얼마전 출간된 박상진의 <에코 기호학 비판>(열린책들)에 이어서 신항식의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문학과경계사), 박인철의 <파리학파의 기호학>(민음사) 등이 같이 나왔다. 그것도 모두 국내 연구자들의 저작이다. 반갑고 대견한 마음이 드는데, 가장 주목할 만한 건, 그레마스가 이끄는 파리학파 연구서이다. 분량도 516쪽으로 묵직하다. 이 분야에선 작년에 나온 김성도의 <구조에서 감성으로>(고려대출판부) 이후에 주목할 만한 저작이다(김성도 교수의 책은 이미 지적한 바 있지만, 부분적으로 표절이다).



그래서, 에코와 바르트, 그레마스까지 구색이 맞춰졌는데, 아쉬운 점이 있다면, 러시아 문화기호학의 태두 유리 로트만에 관한 연구서가 아직 부재한 것이다. 이 분야에도 국내에 유능한 연구자들이 있기 때문에 곧 만족스런 성과물이 나올 걸로 믿는다. 영어권 저작으론 최근에 E. Andrews가 쓴 'Conversations with Lotman'(University of Toronto Press)이 출간됐다. 200쪽쯤 되는 콤팩트한 책이다.

 

 

 



번역도 시원찮은 영화이론서들보다는 추천할 만한 책이 <2002 한국시나리오선집>(커뮤니케이션북스)이다. 재생지 800쪽이 넘는 두께에 작년에 개봉된 영화 81편중에서 시나리오 10편이 추려져 실렸다(*이 선집은 해마다 나오고 있다). 경쟁률이 8대 1쯤 되는 셈이다. 개인적으론 <복수는 나의 것>, <질투는 나의 힘>, <오아시스>, <로드무비> 등의 시나리오가 눈에 띄는데, <가문의 영광>이나 <광복절 특사> 같은 영화의 시나리오도 읽어볼 수 있다. 어느 정도 대중성과 작품성을 함께 고려한 선집이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한국영화에 대한 애정이 좀 있다면, 이런 책도 사서 꽂아두기를 바란다.

 

 

 



고전분야에서는 드니 디드로의 주요 저작 중의 하나인 <부갱빌 여행기 보유>(숲)을 손꼽을 수 있다. 당대의 낙원으로 상상되던 타히티에 관한 부갱빌의 여행기 부록이란 형식을 통해서, 계몽사상가 디드로가 자신의 유토피아관을 펼쳐보이고 있는 책이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가 민음사에서 출간됐고(*2004년엔 천병희 선생의 정역본이 한길사에서 출간됐다), 역시 민음사에서 미셀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양의 끝>도 세계문학전집으로 다시 나왔다.

 

 

 

 

투르니에의 책은 잘 알다시피 <로빈슨 크루소> 다시 쓰기이고, 그런 점에서 쿳시의 되받아쓰기로서의 <포>와 비교할 만하다.

그리고, 지젝의 책들. 물론 번역이 아니라 원서들이다. 이미 예고되던 <신체 없는 기관(Organs without Bodies)>(Routledge)이 출간됐다. 270쪽 정도로 예고돼 있었는데, 알고 보니까 200쪽 조금 넘는 분량으로 생각보다 얇다. 지젝이 라캉주의자뿐만이 아니라 헤겔주의자로서 반(反)헤겔주의자인 자신의 ‘적’ 들뢰즈와 대결하고 있는 책이다. 이건 아마도 판권을 갖고 있는 도서출판b에서 내년쯤에 선보이지 않을까 기대한다(*책은 근간 예정이다).

그리고 지젝 입문서로서 딱 좋은 <지젝과의 대화(Conversations with Zizek)>(Polity)가 출간됐다. 지젝과 Glyn Daly와의 대화로만 구성돼 있는데(댈리는 곧 지젝 연구서를 출간할 예정이다), 170쪽이 안되는 분량으로 콤팩트하다. <향락의 전이>에 실린 지젝의 자가-이너뷰와 함께 지젝에 입문하는 데 아주 요긴할 듯해 보이는 책이다(*'지젝 붐'에도 불구하고 지젝 입문서로 '딱'인 이 책이 아직 소개되지 않는 것도 기이한 일이다). 지젝의 신간 두 권은 모두 발행년도가 2004년으로 돼 있는 미래의 책들이다. 벌써/어느새 2004년의 책들이 오고 있다!(*이 영탄은 지금 시점에서는 코믹한 것이 돼 버렸지만, 해가 바뀔 때마다 내게 감동적인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더도 덜도 아니고 그냥 새해의 책이 나온다는 것!)

2003.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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