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눈에 띄는 책들은 대개 일간지 북리뷰란에서 다루어졌기 때문에, 굳이 군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어 보인다(*이 글은 2003년 12얼 초순에 씌어졌다). 지난 두 주간에 나온 책들 중에서 과학분야에서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까치)나 평전분야에서 <안데르센 자서전>(Human & Books) 등은 누가 보더라도 손꼽을 만한 책이고, 당연히 1면에서 다루어졌다.




오늘 배달된 빌 브라이슨의 책은 이미 영미권에서 장기간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만큼(교양과학서쪽에선 보통 베스트셀러가 믿을 만하다) 신뢰할 만한 책으로 보인다. 양성자와 담백질과 쿼크의 역사를 말하지만, 저자가 비교적 과학의 문외한이라는 점도 독자의 부담을 덜어주는 책이다(색인 포함 558쪽). 이 분야에서 경쟁했던 책은 ‘창조론을 과학을 어떻게 이용하는가?’란 부제를 단 <과학적 사기>(이제이북스)인데, 문제는 정작 읽어야 할 창조론 과학의 신봉자들이 이런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 <왜 하필이면 그리스에서 과학이 탄생했을까>(몸과마음)도 눈길을 끈다.




안데르센의 자서전(896쪽)과 경합을 벌인 책은 모처럼 나온 파크 호건의 <셰익스피어 평전>(북폴리오, 644쪽)이다. 원저는 1998년에 옥스포드대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신간인 만큼 내용이 풍성할 거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책이고, 또 사실이 그래 보인다. 역자는 시인 김정환. 어디선가, 이참에 셰익스피어 전집에 도전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는데, 한번 기대해 봄직하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초의 과학자>(사이언스북스, 470쪽)도 흥미로워보이는 평전이다. 헤르만 헤세의 세번째 부인의 니논 헤세의 편지모음 <헤세, 내 영혼의 작은 새>(웅진닷컴, 752쪽)도 헤세의 독자들이 반길 만한 책이다. 그러나 역시 1순위는 안데르센의 자서전(원제는 ‘내 인생의 동화’)이다(뒷표지에 특이하게도 황동규 시인의 추천사가 실려 있는데, 알고보니 이 신생출판사의 발행인이 문학평론가 하응백씨이다. 그럴 만한 관계이다!)





인문서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보이는 것의 날인(Signatures of the Visible)>(한나래)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제임슨의 대중문화론, 더 구체적으론 영화론이다. 난해하기로 악명높은 그의 책으론 아도르노 연구서인 <후기 마르크스주의>(한길사, 2000) 이후 3년만에 소개되는 책인데, 주저인 <정치적 무의식>은 왜 아직 안나오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새삼 불러일으킨다(*이젠 궁금한 걸 넘어서 무슨 '음모'와 관련된 게 아닐까란 생각마저 갖게 한다). 신간의 복사본을 내가 갖고 있는지 어쩐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이 참에 찾아서 읽어볼까 한다. 원서는 그다지 두꺼워 보이지 않았는데, 우리말 역서는 485쪽에 25,000원. 이젠 웬만한 역서들이 원서보다 비싼 시대가 돼 버렸다(번역만 괜찮다면야 나무랄 건 없지만).
이론서로서 같이 언급되어야 할 책들은 기호학 삼총사이다. 즉 얼마전 출간된 박상진의 <에코 기호학 비판>(열린책들)에 이어서 신항식의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문학과경계사), 박인철의 <파리학파의 기호학>(민음사) 등이 같이 나왔다. 그것도 모두 국내 연구자들의 저작이다. 반갑고 대견한 마음이 드는데, 가장 주목할 만한 건, 그레마스가 이끄는 파리학파 연구서이다. 분량도 516쪽으로 묵직하다. 이 분야에선 작년에 나온 김성도의 <구조에서 감성으로>(고려대출판부) 이후에 주목할 만한 저작이다(김성도 교수의 책은 이미 지적한 바 있지만, 부분적으로 표절이다).

그래서, 에코와 바르트, 그레마스까지 구색이 맞춰졌는데, 아쉬운 점이 있다면, 러시아 문화기호학의 태두 유리 로트만에 관한 연구서가 아직 부재한 것이다. 이 분야에도 국내에 유능한 연구자들이 있기 때문에 곧 만족스런 성과물이 나올 걸로 믿는다. 영어권 저작으론 최근에 E. Andrews가 쓴 'Conversations with Lotman'(University of Toronto Press)이 출간됐다. 200쪽쯤 되는 콤팩트한 책이다.




번역도 시원찮은 영화이론서들보다는 추천할 만한 책이 <2002 한국시나리오선집>(커뮤니케이션북스)이다. 재생지 800쪽이 넘는 두께에 작년에 개봉된 영화 81편중에서 시나리오 10편이 추려져 실렸다(*이 선집은 해마다 나오고 있다). 경쟁률이 8대 1쯤 되는 셈이다. 개인적으론 <복수는 나의 것>, <질투는 나의 힘>, <오아시스>, <로드무비> 등의 시나리오가 눈에 띄는데, <가문의 영광>이나 <광복절 특사> 같은 영화의 시나리오도 읽어볼 수 있다. 어느 정도 대중성과 작품성을 함께 고려한 선집이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한국영화에 대한 애정이 좀 있다면, 이런 책도 사서 꽂아두기를 바란다.





고전분야에서는 드니 디드로의 주요 저작 중의 하나인 <부갱빌 여행기 보유>(숲)을 손꼽을 수 있다. 당대의 낙원으로 상상되던 타히티에 관한 부갱빌의 여행기 부록이란 형식을 통해서, 계몽사상가 디드로가 자신의 유토피아관을 펼쳐보이고 있는 책이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가 민음사에서 출간됐고(*2004년엔 천병희 선생의 정역본이 한길사에서 출간됐다), 역시 민음사에서 미셀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양의 끝>도 세계문학전집으로 다시 나왔다.





투르니에의 책은 잘 알다시피 <로빈슨 크루소> 다시 쓰기이고, 그런 점에서 쿳시의 되받아쓰기로서의 <포>와 비교할 만하다.


그리고, 지젝의 책들. 물론 번역이 아니라 원서들이다. 이미 예고되던 <신체 없는 기관(Organs without Bodies)>(Routledge)이 출간됐다. 270쪽 정도로 예고돼 있었는데, 알고 보니까 200쪽 조금 넘는 분량으로 생각보다 얇다. 지젝이 라캉주의자뿐만이 아니라 헤겔주의자로서 반(反)헤겔주의자인 자신의 ‘적’ 들뢰즈와 대결하고 있는 책이다. 이건 아마도 판권을 갖고 있는 도서출판b에서 내년쯤에 선보이지 않을까 기대한다(*책은 근간 예정이다).
그리고 지젝 입문서로서 딱 좋은 <지젝과의 대화(Conversations with Zizek)>(Polity)가 출간됐다. 지젝과 Glyn Daly와의 대화로만 구성돼 있는데(댈리는 곧 지젝 연구서를 출간할 예정이다), 170쪽이 안되는 분량으로 콤팩트하다. <향락의 전이>에 실린 지젝의 자가-이너뷰와 함께 지젝에 입문하는 데 아주 요긴할 듯해 보이는 책이다(*'지젝 붐'에도 불구하고 지젝 입문서로 '딱'인 이 책이 아직 소개되지 않는 것도 기이한 일이다). 지젝의 신간 두 권은 모두 발행년도가 2004년으로 돼 있는 미래의 책들이다. 벌써/어느새 2004년의 책들이 오고 있다!(*이 영탄은 지금 시점에서는 코믹한 것이 돼 버렸지만, 해가 바뀔 때마다 내게 감동적인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더도 덜도 아니고 그냥 새해의 책이 나온다는 것!)
2003. 1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