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은 강의 공지다. 봄학기 정기강좌로는 마지막 공지가 아닐까 싶다. 매주 수요일 오전(10시 40분-12시 40분)'책사랑'이라는 고전강좌를 10년째 진행해오고 있는데(<아주 사적인 독서>가 그 결과물이었다), 이번 봄학기(16주) 커리는 스탕달에서 프루스트까지의 프랑스문학이다(지난 학기 커리가 제인 오스틴에서 토머스 하디까지의 영문학이었다). 장소는 푸른역사아카데미(http://cafe.daum.net/purunacademy/)이며 강의 문의는 010-7131-2156(오유금)으로 하시면 된다. 구체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

 

1강 3월 02일_ 스탕달, <적과 흑>(1)

 

 

2강 3월 09일_ 스탕달, <적과 흑>(2)

 

 

3강 3월 16일_ 발자크, <고리오 영감>(1)

4강 3월 23일_ 발자크, <고리오 영감>(2)

 

 

5강 3월 30일_ 보들레르, <악의 꽃>(1)

6강 4월 06일_ 보들레르, <악의 꽃>(2)

 

 

7강 4월 20일_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8강 4월 27일_ 플로베르, <감정교육>(1)

 

 

9강 5월 04일_ 플로베르, <감정교육>(2)

 

 

10강 5월 11일_ 졸라, <목로주점>(1)

 

 

11강 5월 18일_ 졸라 <목로주점>(2)

 

 

12강 5월 25일_ 모파상, <벨아미>

 

 

13강 6월 01일_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

 

 

14강 6월 08일_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2)

 

 

15강 6월 15일_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3)

 

 

16강 6월 22일_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4)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전7권(아직 완간되지 않았다) 가운데 이번 봄학기에는 1권(스완네 집 쪽으로)과 2권(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까지만 읽는다.

 

16. 0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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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공지다. 목요일 오전(10시-12시)에는 한우리독서토론논술 광명지부에서 강의를 진행해오고 있는데, 이번 3-4월 커리는 '한국문학'으로 정했다. 장기적으로는 현대문학까지 다룰 예정이지만 이번 봄에는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에서 이인직, 이광수, 김동인, 염상섭 같은 근대 작가들까지 다루려고 한다. 중고교 교육과정에서 배우는 필독 작품이라는 것도 고려했다. 구체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강의 문의는 02-897-1235/010-8926-5607).

 

1강 3월 10일_ <홍길동전>

 

 

2강 3월 17일_ <춘향전>

 

 

3강 3월 24일_ 이인직, <혈의 누>

 

 

4강 3월 31일_ 이광수, <소년의 비애>

 

 

5강 4월 07일_ 이광수, <무정>

 

 

6강 4월 14일_ 김동인, <감자>

 

 

7강 4월 21일_ 염상섭, <만세전>

 

 

8강 4월 28일_ 염상섭, <삼대>

 

 

16. 0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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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린 코리건의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책세상, 2016)는 피츠제럴드와 <위대한 개츠비>의 독자라면 필독할 만한 책이다. 단순히 전공자가 쓴 책이라기보다는 <위대한 개츠비>를 '가장 위대한 미국소설'이라고 생각하는 열독자가 쓴 찬가다. 저자가 영문학자에 문학비평가이기도 해서 이 찬가가 작품분석과 해석의 모양새를 띠고 있다는 게 여느 찬가와 다를 따름이다.

 

 

오랜만에 나도 문학 열강을 듣는 기분으로 책을 읽으며 저자에게 감염이 되었는지 피츠제럴드에 관한 책을 여러 권 구입했고, 심지어 이미 두어 권 갖고 있는 영어판 <위대한 개츠비>도 또 구입했다. 한데 좀 낭패다 싶은 대목과 만났다. 소설의 결말에 대한 해석 부분이다. 저자는 "이 소설이 물과 익사의 심상에 매달린다는 점"을 여러 근거를 통해 설득력 있게 주장하면서 그 피날레로 마지막 단락을 예로 든다.  

"개츠비는 녹색의 불빛을 믿었다. 해가 갈수록 우리 앞에서 멀어지는, 절정의 순간과 같은 미래를 믿었던 것이다. 그때는 그것이 우리한테서 달아났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 내일은 우리가 더 빨리 달리고, 더 길게 팔을 뻗으면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맑은 아침에---"(64쪽)

정확하게는 소설의 끝에서 두번째 단락이다(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우리는 계속 나아간다, 흐름을 거스르는 보트들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리면서도."인데, 피츠제럴드의 묘비에 새겨진 문장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눈에 띄는 것은, 눈에 띄어야 하는 것은 마지막의 긴 줄표이다. "어떤 평론가들은 마지막 문장의 불필요하게 긴 줄표에 충격을 받았다."고 할 정도다(인용문에서는 짧은 줄 세개를 붙여 놓았지만 하나로 이어진 것으로 봐달라). 이에 대해서 "몇몇 평론가는 이 터무니없이 긴 줄표가 개츠비가 소유한 선착장 끄트머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다고 주장했다."

 

 

<위대한 개츠비>의 독자라면, 그리고 영화 <위대한 개츠비>를 눈썰미 있게 본 관객이라면 기억하듯이, 1장 끝 무렵에 개츠비가 해협 너머의 데이지의 저택 선착장(녹색의 불빛)을 향해 팔을 뻗던 장소가 바로 개츠비의 선착장이다. 모린 코리건도 이러한 해석에 가세한다. 익사하지 않기 위해 계속 헤엄을 친다는 것은 비단 이 작품에서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읽을 수 있는 피츠제럴드 자신의 인생관이었다. 물론 그러다 언젠가는 기운이 빠질 것이고, 그러다 보면 '그날'이 올 것이다. "개츠비가 수영장에서 죽은 바로 그날처럼 우리가 선착장에 끄트머리에 도달하고 떨어져 물에 빠져 죽는 그날이." 

"이런 독법에 따른다면, <개츠비>의 마지막 부분에 피츠제럴드가 선착장만큼이나 긴 줄표를 심어둔 것은 어쩌면 미국 문학사상 최초의 그래픽노블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64-65쪽)

 

전문가들의 과잉해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문제는 우리로선 그렇게 과잉해석할 여지도 없다는 점. 왜냐하면 이 긴 줄표가 번역본들에서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전수조사는 하지 못하고 책장에 있는 <개츠비>들을 눈에 띄는 대로 확인해본 결과 대부분 긴 줄표를 평범한 말줄임표로 대체하고 있었다(문학동네판만은 못 찾아서 바로 확인하지 못했다). 이 '선착장'이 사라진 것이다!

 

 

심지어 내가 갖고 있는 몇 권의 영문판에서도 긴 줄표 대신에 짧은 줄표가 쓰이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맑은 아침에---"가 "그러다 보면 어느 맑은 아침에-"로 바뀐 것. 애초에 그렇게 된 판본을 우리말로 옮겼으니 한국어판 역자나 편집자에게 책임을 묻기도 어렵다. 순전히 이 긴 줄표를 확인하기 위해서 다른 영어판을 구해야 할까 잠시 생각해봤지만(이건 줄표 하나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선착장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막상 긴 줄표로 되어 있는지 여부를 알지 못한 채 책을 주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내가 염두에 둔 건 스크리브너판이다. 애초에 <위대한 개츠비>를 펴낸 출판사).   

 

여하튼 내가 비평을 가리켜서 '다시 읽게끔 하는 것'이라고 할 때 뜻한 바는 바로 이런 사태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 읽고 또 읽는다...

 

16. 02. 10.

 

 

P.S. 지나는 김에 번역서에서 누락된 곳 하나. "위대한 미국 소설의 지원자들을 한번 모아보자. <모비딕> <보이지 않는 인간>, <주홍글씨>, <허클베리 핀>, <앵무새 죽이기>."(21쪽) 무엇이 빠졌나?(말이 나온 김에 지적하자면, '지원자들'은 '후보자들'로, <주홍글씨>는 <주홍글자>로 옮기는 게 낫겠다.) 물론 이 목록만 가지고는 알 수 없지만, 같은 목록이 한번 더 나오므로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계급을 다룬 미국의 소설 중 가장 위대한 작품이다. 사실, 그 분야 고전들(<모비딕><허클베리 핀>, <앵무새 죽이기>, <보이지 않는 사람>, <빌러비드>) 가운데 인종 대신 계급을 중시한 작품으로는 유일하다."(26쪽) 

여기서도 '그 분야 고전들'은 '미국문학의 정전들'로 옮기고, <보이지 않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인간>으로 통일시켜주는 게 낫겠다. 그렇다, 빠진 작품은 <빌러비드>다. 21쪽에서 <빌러비드>가 누락되었다. <보이지 않는 인간>이나 <빌러비드>나 모두 인종 문제를 다룬 대표적 작품이다. 반면 <개츠비>는 계급 문제를 다룬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는 게 저자의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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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에 읽은 책 중 하나는 <한나 아렌트의 말>(마음산책, 2016)이다. 번스타인의 <악의 남용>(울력, 2016), 모린 코리건의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책세상, 2016) 등과 같이 읽기 시작했으나 아무래도 분량상 가장 먼저 완독했다. 읽기 전에는 가장 좋은 아렌트 입문서일지도 모르겠다고 적었으나, 일단 그런 입문서로는 적합하지 않은 듯하다는 게 독후감이다. 아렌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예비 지식을 가진 독자에게 더 유익할 듯하기에. 가령 작년에 나온 소개서 가운데 나카마사 마사키의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갈라파고스, 2015)나 권정우, 하승우의 <아렌트의 정치>(한티재, 2015) 등을 예비적으로 읽어두는 게 좋겠다. 전체적인 조감도를 갖고서 인터뷰를 읽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다.  

 

 

생각해보니 아렌트의 인터뷰는 처음 읽은 게 되는데, 글보다는 역시 수월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명료하게 이해되는 것도 아니었다. 말은 말대로의 모호함을 갖고 있는데다가 아렌트의 어법은 다소 독특해서다(좀 익숙해지면 나아질지도). 그래서 생각만큼 편안한 독서는 아니었는데, 그래도 소득이 없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세계' 개념에 대해서, 그리고 평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생각을 알 수 있었던 게 가장 큰 성과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열네 살에 칸트를 읽었다는 애기, 자신은 자유주의자가 아니라는 토로 등이 그에 대한 이해를 더 보강해주었다.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읽으면서 손이 근질거렸던 책은 엘리자베스 영-브륄의 방대한 평전 <한나 아렌트 전기>(인간사랑, 2007)인데, 이 책의 부제가 바로 '세계 사랑을 위하여'다. 그리고 국내 연구자들의 논문집도 <한나 아렌트와 세계사랑>(인간사랑, 2009)이란 제목으로 나와 있기도 하다. 영-브륄의 책은 원서와 번역본을 모두 갖고 있지만 아마도 서고에 있는 모양으로 책장에서 찾을 수 없었다. '도음이 안돼!'라고 투덜거리는 걸로 마음을 가라앉히는 수밖에. 그런데 아렌트에게서 '세계 사랑'이란 어떤 의미인가? 인터뷰의 한 대목.

가우스: 당신은 '세계'라는 단어를 정치를 위한 공간이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아렌트: 맞아요. 세계는 정치를 위한 공간이에요.(59쪽)

군말이 필요없는 대목이다. 아렌트 철학, 아니 아렌트 정치사상의 핵심은 바로 '정치를 위한 공간'으로서 세계를 예찬하고 회복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좀 유감스러운 것은 옮긴이의 말이었다.

정치는 혐오스럽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정치는 쉴 새 없이 곰팡이가 슬고 먼지가 쌓이는, 불결하고 악취 나는 안방과 비슷하다. 안방이 그렇다는 이유로 넓은 안방을 버려두고 비좁은 골방에 웅크린 채 구시렁거리며 사는 건 바보 같은 일이다. 상황이 그렇다면 먼지와 때를 묻힐 각오를 하고는 두 팔 걷고 안방에 들어가 곰팡이와 먼지를 제거해서 사람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 옳은 일 아니겠는가. 아렌트가 강조한 정치적 사유와 행위는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198쪽)

그런 취지에서 옮긴이 말의 제목도 '정치는 안방의 먼지를 털어내는 일'이라고 붙여졌는데, 나로선 이런 '정치관'이 아렌트에 대한 오해로 여겨진다. 아렌트에게 혐오스러운 건 정치의 실종, 내지는 유사 정치이지 결코 정치 자체가 아니다. 

 

아무려나 그런 생각으로 아렌트의 말을 옮겼다고 하니까 좀 찜찜한 기분이 되는데, 결국 몇몇 대목에서는 불만도 갖게 되었다. 아렌트의 공적 행복(public happiness)을 원어까지 병기하면서 '대중의 행복'(114쪽)이라고 옮긴 것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렵다. "대중의 행복이란, 사람은 공적인 생활(public life)에 참여했을 때, 그러지 않았다면 그에게 닫힌 채로 남았을 인간적 체험의 차원을 혼자 힘으로 열어젖힌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여러 면에서 완전한 '행복'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것을 뜻해요."(114쪽)라는 대목이다. 다른 모든 곳에서 'public'는 '공적' 혹은 '공공'이라고 옮겨놓고 이 대목에서만 '대중'이라고 옮긴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더구나 '공적 행복'이란 말은 학계에서도 통용되고 있음에도 말이다.  

 

 

해제를 쓴 아렌트 전공자 김선욱 교수도 "가끔씩 대담의 생생함에 초점을 맞추려다 보니 일부 문장의 번역이 치밀하지 못한 부분들이 보이긴 하지만"(14쪽)이라고 지적하지만, '공적'을 '대중의'로 옮긴 건 '대담의 생생함'과도 무관해 보인다. 덧붙여, 내가 오역이라고 생각하는 몇 대목을 적어둔다.

"그런데 내가 20대였을 때 그 질문은 어머니가 20대였을 때보다 당연히 훨씬 더 중요했어요."(35쪽)

원문은 "But the question was naturally much more important in the twenties, when I was young, than it was for my mother."(13쪽)이다. 여기서 '20대'로 옮긴 'in the twenties'는 '20년대에는'이다. 아렌트는 1906년생이므로 1920년에 열네 살이었고, 1926년에야 스무 살이 된다. 어렸을 때라는 건 20년대 초반을 뜻하는 것. "(그리고) 내가 철이 들었을 때"라는 말이 이어지는데, 그와 견주더라도 언급되는 시점은 20대 때가 아니라, 10대 때여야 한다.  

 

'정치와 혁명에 관한 사유'를 주제로 한 세번째 인터뷰에서 한 대목.

"오늘날 주요하게 대비되는 나라들은 사회주의국가 대 자본주의국가가 아니라, 이런 권리를 보호하는 나라들, 예컨대 스웨덴 대 미국이거나, 그렇지 않은 나라들, 예컨대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 대 소련이죠."(131쪽)

이 부분도 부정확하게 옮겨졌는데, 번역문만 보면 '스웨덴 대 미국'과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 대 소련'이 대립구도를 형성하는 것처럼 읽힌다. 핵심은 '이런 권리를 보호하는 나라 대 그렇지 않은 나라'의 대비다. 그리고 '이런 권리를 보호하는 나라'에 스웨덴과 미국이 속하고, 그렇지 않은 나라에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과 소련이 속한다. 다만 스웨덴과 미국은 '이런 권리를 보호하는 나라'의 스펙트럼에서 두 축을 구성하고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과 소련이 '그렇지 않은 나라들'의 두 축이다. 원문은 "The chief distinction today is not between socialist and capitalist countries but between countries that respect these rights, as, for instance, Sweden on one side, the United States on the other, and those that do not, as, for instance, Franco's Spain on one side, Soviet Russia on the other."(84쪽)

 

이런 대목에서도 아렌트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을 결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아렌트는 이렇게 말한다.

"본질적으로 사회주의는 그냥 계속 지속돼왔고, 극단적인 곳까지 치달아 자본주의가 시작된 지점에 도달했어요. 그렇다면 어째서 그 체제가 자본주의의 해결책이어야 하나요?"(131쪽)

원문은 "In essence, socialism has simply continued, and driven to its extreme, what capitalism began. Why should it be the remedy?"(84쪽) 역자는 이 문장을 연속적으로 해석했는데, 내가 보기에 'what capitalism began'은 has continued와 (has) driven이란 두 동사의 (공통) 목적절이다. 다시 옮기면 "본질적으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시작한 것을 그냥 지속해서 그 극단으로까지 몰고 갔다." 곧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극단화된 형태일 뿐이므로 결코 대안적 사회체제가 아니라는 얘기다(자본주의가 시작된 지점에 사회주의가 도달하다니?).

 

번역은 불가불 오역을 수반할 수밖에 없지만 평이한 문장에서까지 엉뚱한 실수가 나오는 것은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하기 어렵다. 옥에 티라고 하면 할 수 없지만, '대중의 행복'이란 말이 납득하기 어려워서 독후감에다 번역에 대한 불평도 같이 적었다...

 

16. 0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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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번스타인의 <악의 남용>(울력, 2016)을 읽다가 존 듀이의 '창조적 민주주의'란 연설문을 알게 되었다. 그가 80세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행한 연설로 전체 제목은 '창조적 민주주의 - 우리 앞에 놓인 과제'(1939)다. 국내에 번역본이 있는지 찾아봤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다만 서용선의 <혁신교육 존 듀이에게 묻다>(살림터, 2012)에 이 연설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악의 남용>에서 인용된 부분은 연설의 말미다.

 

"민주주의는, 다른 삶의 방식과 비교해볼 때, 경험의 과정을 목적인 동시에 수단으로서 성심성의껏 믿는(...) 그리고 사람의 감정, 욕구, 소망을 해방시켜서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존재하게 하는 유일한 삶의 방식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에 이르지 못하는 모든 삶의 방식은, 경험들이 확장되고 풍부해지면서 계속 안정을 이루게 하는, 접촉, 교환, 의사소통, 상호작용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이 해방과 풍요로움의 과제는 매일매일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경험이란 것은 그 자체로 종말에 이를 때까지는 끝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과제는 모두가 공유하고 모두가 이바지하는 보다 자유롭고 보다 인간적인 경험을 창조하는 영원한 과제이다."(45-46쪽)

요컨대 '매일매일의 경험으로서의 민주주의''영원한 과제로서의 민주주의'가 듀이가 생각한 민주주의의 최종적인 모습이다. 물론 우리가 갖고 있는 제도로서의 민주주의와는 좀 다른 의미의 민주주의다. 번스타인의 해설은 이렇다.

"듀이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단지 제도나 공식적인 투표 절차 또는 권리에 대한 법률적 보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들에 생명과 의미를 불어넣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민주주의적 협동이 실천되는 문화가 요구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제도와 절차는 실속 없고 무의미해질 위험에 놓이게 된다. 민주주의는 '삶의 방식'이자, 적극적이고 부단한 관심을 요구하는 윤리적 이상이다. 만일 우리가 민주주의를 창조하고 재창조하는 일을 해내지 못한다면, 민주주의가 계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다."(45쪽)

<악의 남용>이 듀이의 민주주의론을 핵심으로 다룬 책은 아니다. '9/11 이후의 정치와 종교의 부패'란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9/11과 그 이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가 저자의 관심사다. 이 문제를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멘탈리티의 충돌'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 주장이다. 그 멘탈리티의 한쪽에는 '절대적인 것에 대한 열망'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실용주의적 가류주의'(pragmatic fallibilism)가 있다. 실용주의적 가류주의란 대략 미국의 실용주의(프래그머티즘)와 일치하는 철학이자 태도이며, 이를 설명하면서 다른 실용주의 사상가들과 함께 듀이도 검토하고 있다.  

 

 

미국의 대표 철학자 듀이는 국내에서 주로 교육철학자로서 참조되고 있는데, 그런 면에서는 <민주주의와 교육>이 핵심 저작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널리 읽히는 성싶지 않다. 그런데 듀이는 교육철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공공철학자로서 주목받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마이클 샌델이 보여주듯이 공공철학이야말로 미국철학다운 특징이며 강점이다. 찾아보면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책세상, 2011), <공공성과 그 문제들>(한국문화사, 2014), <현대 민주주의와 정치 주체 문제>(CIR, 2010) 등 읽을 거리가 없지 않다.

 

듀이의 민주주의론이 여전히 우리에게도 유효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그가 진작에 '기업 멘탈리티'를 민주주의 가장 큰 적으로 지목한 때문이다. "그는 미국 민주주의에의 최대 위협은 내부적인 것, 즉 공중들이 강력한 특정 이익 단체의 조종을 받게 되는 경우라고 느꼈다. 그는 '공중의 소멸', 즉 공개적인 의사소통과 토론 및 심의 하에서 정보를 숙지한 공중의 소멸을 염려하였다. 듀이는 우리 시대에 전 세계적 차원에서 채택된 멘탈리티인 '기업 멘탈리티'의 성장과 전파로 인해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44쪽)

 

 

이후 듀이의 경고는 현실이 되었다. 그 여정은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마이클 샌델의 <민주주의의 불만>으로의 여정이다(<민주주의의 불만>은 공공철학자 샌델의 가장 중요한 저작이다). 샌델은 20세 후반 미국사를 '절차적 공화정'(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절치적 민주주의' 내지 '형식적 민주주의')에 의해 미국 민주주의가 점차 거세되어온 과정으로 묘사한다. 그 결과 얻게 된 것은 '형식상의 민주정+내용상 과두정'이다. 이건 미국만의 현실이 아니다. 서민 표몰이를 한 뒤에 부자 감세를 하는 게 한국 민주주의의 현단계니까. 그 결과가 미국 중산층의 붕괴이고 유사 이래 가장 크게 벌어진 게 빈부 격차다. 물론 '헬조선'을 만들어낸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현실이 바뀔 수 있을까.

 

 

듀이식 대안을 다시 적자면 관건은 '창조적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제껏 없었다면 만들어내는 것이다. 미국 대선후보 예비선거가 진행되면서 그 과정과 결과가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민주당 후부로 버니 샌더스와 힐러리 클린턴의 승부가 주목거리인데, 듀이가 옹호한 미국 민주주의가 아직 살아있는지 가늠해보는 중요한 지표가 될 듯싶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올봄의 총선과 2017년 대선은 한국 민주주의의 맨얼굴을 확인하게 해줄 중요한 일정이다. 그것이 당장의 변화를 가져올 수는 없다. 하지만 변화를 위한 첫걸음은 내딛게 해줄 것이다. '매일매일의 경험'과 '영원한 과제'를 향한 첫걸음... 

 

16. 02. 09.

 

 

P.S. 실용주의적 가류주의를 설명하면서 저자 리처드 번스타인이 가장 많이 참고하고 있는 책은 루이스 메넌드의 <메타피지컬 클럽>(민음사, 2006)이다. "미국 실용주의의 역사를 탐구하고 미국 역사의 맥락 안에서 이 운동의 위상을 조망"한 책. 메넌드가 가장 중요하게 다룬 네 명의 실용주의 사상가는 윌리엄 제임스와 찰스 퍼스, 존 듀이 외 연방 대법관을 지닌 올리버 웬델 홈즈 2세다. 프래그머티즘의 3인방으로 널리 알려진 세 명의 철학자와 같이 놓인 홈즈만이 생소한데, 국내엔 <보통법>(알토란, 2012)이 번역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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