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문학 강의에서 투르게네프의 작품으론 보통 <아버지와 아들>을 강의한다. 1회 강의일 경우에 대표작을 다룰 수밖에 없어서인데, 두번째 선택은 대개 <첫사랑>. 이 두 작품에 관해서라며 아마도 수십 차례 강의한 듯싶다.

하지만 투르게네프를 좀더 깊이 다루려면 다른 작품들에도 관심을 가져볼 만한데 단편집 <사냥꾼의 수기>를 제외하면 <첫사랑>을 포함한 몇편의 중편과 <루진>에서 <처녀지>에 이르는 여섯 편의 장편을 꼽을 수 있다. 순서대로 하면 <루진>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귀족의 둥지>와 <전날밤>(<전야>)가 있고 <아버지와 아들> 이후에 <연기>와 <처녀지>가 있다.

오늘도 <아버지와 아들>을 강의하고(사실은 강의하기 전에) 든 생각은 세계문학전집판으로 작품이 더 나오면 좋겠다는 것. 현재로선 <루진>(열린책들)과 <첫사랑>(민음사)에 같이 들어 있는 <귀족의 보금자리> 정도다(범우사판을 제외하면).

<전날밤>과 <귀족의 보금자리>도 강의에서 다룬 적이 있지만 드물고 오래 전이다. 강의에서 종종 언급하지만 나도 오랜만에 다시 읽고 싶어졌다. 번역본이 새로 나온다면 <전야>와 <귀족의 둥지>라는 제목이면 좋겠다. ‘보금자리‘와 달리 ‘둥지‘는 사람에게 잘 쓰지않는데 작품에서 ‘둥지‘란 말은 좀 비꼬는 듯한 뉘앙스로 쓰이기 때문이다(보금자리파와 둥지파가 있다면 나는 둥지파에 속한다).

언젠가 투르게네프의 장편을 강의에서 모두 읽는 날이 올 것인가? 러시아문학 강사의 개인적인 호기심이다(아래는 영어판 <귀족의 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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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플 친구가 많다 보니 때로는 의외의 책에도 눈길을 주게 된다. 아킬 모저의 <당신에게는 사막이 필요하다>(더숲)도 그런 책이다. 연휴에 하지 못한 일들에 마음이 무거워져서 반성문이라도 쓸 태세였는데, 책제목이 마치 그에 대한 ‘처방‘으로 읽혔다. 실제로 저자가 전세계 사막 25곳을 홀로 횡단하며 겪은 일과 갖게 된 생각을 담은 여행서라고.

사막 한 곳만 지나가보아도 책 한 권은 나올 법한데(죽을 고비도 한번쯤은 넘길 테니) 25개의 사막은 좀 심했다 싶다(징벌이거나 중독 아닐까?). 저자가 겪은 일인데 나까지도 벌을 받은(혹은 버림 받은) 느낌이다. 사막의 연상 효과 때문일 터이다. 사막은 이미지상으로 우리에게 삶의 공간이 아니라 시험과 시련의 공간이니까. 아무튼 그래서 이 책은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근신‘의 효과가 있겠다 싶다. 얼차려 여행 같은 것.

문학기행에 대한 궁리를 하면서 연휴에 여행 팟캐스트를 듣다가 관심을 갖게 된 곳은 지중해다. 구체적으로는 그리스와 스페인. 그밖에 지중해를 끼고 있는 나라는 많으니 얼마든지 추가할 수 있겠다. 당장 카잔차키스의 <지중해기행>(열린책들)도 진지한 자세로 읽어보고 클라우스 헬트의 <지중해 철학기행>(효형출판)도 마저 읽어보면 좋겠다(어디에 둔 건지?).

그런 생각을 하니 무거웠던 마음이 좀 풀리는 듯싶다. 소화제를 먹고 막힌 속이 뚫리는 것처럼. 사막은 이런 처방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가슴 답답한 분들께 사막을 권한다. 사진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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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노벨경제학상은 미국 시카고 대학의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세일러 교수에게 돌아갔다. 들어본 이름이다 싶어서 찾으니 그간에 ‘리처드 탈러‘라는 저자명으로 소개되었다. 바로 베스트셀러 <넛지>의 공저자다.

기사들에서도 두 가지 이름이 병용되고 있는데 어느 쪽으로든 정리가 되었으면 한다. 국내 소개된 책은 지난해에 나온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리더스북)을 비롯해 캐스 선스타인과의 공저 <넛지>(리더스북)와 <승자의 저주>(이음)까지 세 권이다. <승자의 저주>는 2007년에 나왔으나 큰 반응을 얻지 못했다. 반면 2009년 출간된 <넛지>는 ‘올해의 책‘에도 선정된 베스트셀러. 그러고는 좀 간격을 두고 출간된 게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인데, 이제 보니 나도 놓친 책이다.

허술함을 만회하고자 주문을 넣는다. 그런데 제목은 뭔가 찔리는 데가 있군. 하지만 순전히 번역본 제목상으로만 그렇다. 저자가 창시자로 꼽히는 행동경제학의 탄생과정과 배경을 소개하는 책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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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대로 진행된다면 내년 1월 마지막주에는 일본문학기행을 떠난다. 일정을 검토중인데, 아무래도 겨울인 점을 고려하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관련 기행이 큰 비중을 갖게 될 듯하다. 사실 <설국> 이외의 작품은 강의에서 다루지 않아서 깊이 읽어볼 기회가 없었는데 문학기행 준비과정에서 챙겨보려고 한다.

가와바타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은 연구가 되어 있는 편이고 연구서도 여럿 나와있다(연휴에 추가로 두어 권 주문했다). 어림에는 나쓰메 소세키와 함께 가장 많이 연구된 작가가 아닌가 싶다. 그렇더라도 일반 독자가 연구서까지 읽을 건 아니고 전체적으로 참고할 만한 소개서나 평전이 더 요긴한데 막상 그런 종류의 책은 별로 없다. 번역된 작품만 읽고 또 읽는 수밖에.

다작의 작가로 알려져 있고 적잖은 작품이 번역되기도 했지만 절판된 작품이 많다. 남은 작품들 가운데서 대표작을 고를 수밖에 없는데, 순서대로 하면 <이즈의 무희><설국><천마리 학><산소리><호수> 등이다. 이 가운데 <이즈의 무희>와 <천마리 학><호수>. 세편은 한권으로 묶여 나왔기에 간편하다. <산소리 >(웅진지식하우스)는 절판돼 아쉬운데 <잠자는 미녀>(마르케스에게 영향을 준 작품이다)와 함께 재출간 되면 좋겠다(나는 두권 모두 갖고 있지만). 거기에 추가한다면 ‘무용소설‘의 결정판이라는 <무희>(문학과지성사) 정도까지.

돌이켜보니 <이즈의 무희>와 <설국> 등은 고등학생 때 처음 읽었다. 그때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충분히 그럴 만했다. 일본의 게이샤문화가 낯설기도 했고), 다시 생각해보면 가와바타도 청춘의 작가라기보다는 중년의 작가, 중년을 위한 작가다(러시아 작가로는 안톤 체호프가 그렇듯이). ‘하고 싶은 일‘보다 ‘하지 못한 일‘을 세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는 나이가 중년이다.

연휴를 거의 다 흘러보내고 나니 얼핏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시간‘을 보낸 것 같기도 하다. <설국>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을창고에 화재가 나 사람들이 정신이 없는 경황에도 은하수의 아름다운 별빛에 빠져드는 사내처럼 말이다.

직업이 무용평론가도 아니면서 괜스레 남의 처지를 넘겨다보았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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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준비차 블라지미르 오도예프스키의 <러시아의 밤>(을유문화사)를 읽다가 ‘크리스토포로 콜롬보‘란 표기가 나와서 잠시 검색을 해보았다. 우리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고 부르는 15세기 탐험가의 이탈리아어 이름이 ‘크리스토포로 콜롬보‘다. 아직 뉴스기사나 인터넷 사전에서 콜럼버스가 콜롬보로 대체되지는 않았다. 너무 친숙해진 이름이어서 변경에 대한 거리낌도 있을 것이다.

잠시 생각한 것은 고유명사의 번역 문제인데 예전에 ‘어륀지‘(오렌지) 파문이 한차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듯싶다. 의견 차이가 커서 정리될 수 없는 문제일 수도 있겠고. 오렌지는 고유명사가 아니니까 사정이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공통적인 것은 우리말 표기에서 원음주의(원음 충실주의)를 어느 수준까지 적용할 것이냐의 문제다. 원칙적으로는 원음주의가 절대적으로 옳은/우선적인 기준이냐라는 문제도 걸려 있다.

생각나는 사례가 도시명의 표기인데 작고한 안동림 선생은 ‘시카고‘란 도시이름은 반드시 ‘쉬카고‘라고 표기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게 원음에 가깝다는 이유에서다. 출판사 창비는 자체적인 외국어 표기법을 갖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일본 수도 ‘도쿄‘는 ‘토오꾜오‘라고 적어야 한다(창비 출간서에서는 그렇게 표기한다). 그것도 원음이 그에 가깝다는 게 이유다. 하지만 이 두 표기는 아직 우리사회의 통용 표기는 아니다. 원음(현지음)도 고려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가장우선적인 고려사항은 아니기에 그렇다.

가령 <러시아의 밤>의 저자 ‘블라지미르 오도예프스키‘를 현행 외국어표기법에 맞게 고치면 ‘블라디미르 오도옙스키‘가 된다. ‘블리디미르‘와 ‘블라지미르‘의 차이는 구개음화된 ‘di‘의 음가를 어떻게 읽어줄 것이냐의 차이다. 구개음화를 반영하면 ‘지‘에 가깝고 철자만 그대로 옮기면 ‘디‘가 된다. 그런데 ‘오도예프스키‘와 ‘오도옙스키‘의 차이는 정반대다. ‘오도옙스키‘에서 ‘옙‘이 실발음의 근사치를 표기하기 위한 조처라면 ‘오도예프스키‘의 ‘예프‘는 철자를 분리시켜서 표기했던 예전 표기법의 관행을 따른 것이다(‘도스토옙스키‘와 ‘도스토예프스키‘도 마찬가지다). 두가지 조합 모두 어떤 일관된 원칙이 적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블라지미르 오도옙스키‘와 ‘블라디미르 오도예프스키‘로 표기한다면 나름 일관적일 테지만).

외국어 표기에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관행과 합의다. 관행을 존중하되 타당한 근거(원음주의는 그 근거 가운데 하나다)에 따라 합의로 변경가능하다는 것. 남아공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현재는 남아공을 떠났지만) 존 맥스웰 쿳시(Coetzee)가 처음 소개되었을 때 ‘코에체‘라고 표기됐었고, 지금도 일부 백과사전에서는 ‘쿠체‘라고 읽는다. 대체 철자만 갖고는 어떻게 읽어야 할지 알기 어렵다(철자중심주의의 한계다). 당사자가 자신의 이름을 ‘쿳시‘라고 부른다고 하여 이후에는 ‘쿳시‘로 통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관행으로 굳어지기 전에 표기가 바뀐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코에체‘로 굳어졌더라도 나는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그건 우리(한국어사용자)끼리의 합의의 문제라서다.

각 언어는 발음과 표기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정확하게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일을 억지로 맞추려고 할 때 어륀지 사태 같은 해프닝이 벌어진다. ‘헤겔‘ 같은 독일철학자를 프랑스에서는 ‘에글‘이라고 읽고 러시아에서는 ‘게겔‘로 읽는다. 그런 경우 ‘에글‘과 ‘게겔‘은 이미 프랑스어와 러시아어에 체계에 들어가 있기에 맞다, 틀리다의 문제를 넘어선다. 러시아에 있을 때 서점에 가서 ‘조지 오웰‘의 책을 찾다가 낭패를 겪은 일이 있는데 오웰은 러시아어로는 ‘오루엘‘이라고 읽는다. 곧 영어(오웰)와 러시아어(오루엘)의 차이를 알지 못해서 빚어졌던 해프닝.

공연히 긴 얘기가 되어 버렸는데, 다시 콜럼버스 문제로 돌아오면 문제는 이것이 한국어인가 아닌가, 곧 외래어가 된 고유명사인가 여전히 외국어인가, 이다. 한국어 체계라는 문턱을 넘어온 것인가 아니면 아직 그 바깥에 있는 것인가. 한국어 체계 안에 들어와 있다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이탈리아 사람 ‘크리스토포로 콜롬보‘를 이르는 한국어다. 이 경우 ‘콜롬보‘는 음역이지 번역이 아니다. ‘쉬카고‘나 ‘토오꾜오‘나 ‘어륀지‘가 번역이 아니라 음역에 불과한 것과 마찬가지다.

번역은 한 자연어를 다른 자연어로, 우리의 경우엔 외국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문제는 더 복잡할 테지만 외국어 고유명사 표기에 대한 나의 견해는 대략 이러하다. ‘콜롬보의 달걀‘은 한국어가 아니라는 얘기를 길게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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