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지방강의와 주말의 특강까지 남아있지만 목요일 저녁이면 한주간의 강의 일정이 일단락됐다는 느낌을 갖는다. 한편에는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감이, 다른 한편으론 기력이 다했다는 탈진감이 그 느낌과 같이 한다. 잠시 팟캐스트 뉴스를 들으며 망중한의 시간을 갖다가 다시금 읽을 책들을 가늠해보는데, 일단 내일 지방으로 내려가는 기차에서 읽을 책은 게르하르트 노이만의 <실패한 시작과 열린 결말: 프란츠 카프카의 시적 인류학>(에디투스)이다.

카프카문학기행을 소개하는 강의를 하러 가는지라 관련도서에 들어간다. 저자는 독일대학에서 독문학 교수로 오래 봉직했고 카프카 비평판에도 공동편자로 관여했다. 대표적인 카프카 전문가의 한 명인 것. 제목도 끌리지만 독일의 전문가가 카프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도 궁금하다.

개인적으로는 카프카의 주요작들에 대해 여러 차례 강의했고 내년에도 올해 완간된 카프카 전집을 바탕으로 주요작 강의를 한 차례 진행할까 계획중인데, 주요한 연구성과들을 이 참에 두루 읽고 나의 관점과 비교해보고픈 욕심도 갖는다. 카프가 전문가들뿐 아니라 벤야민과 들뢰즈, 블랑쇼와 아감벤 등의 카프카론도 검토대상이다. 그렇게 두루 살펴보고 나대로의 카프카론을 내년중에 출간하는 것도 목표 가운데 하나다. 많은 날들이 남은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 바짝 분투해야겠다. 망중한이라고 해놓고 이렇게 적으니 뭔가 멋쩍긴 하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의준비 중에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시집 ‘서핑‘을 하다가 읽은 건 이희중의 ‘짜증론‘이다. <나는 나를 간질일 수 없다>(문학동네)에 수록된 시. 전문이 책소개에 실린 것으로 보아 시집의 간판시 가운데 하나다. 제목이 흥미로워서라도 읽어볼 만하다.

모름지기 짜증은 아무한테나 내는 것이 아니다 짜증은 아주 만만한 사람한테나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짜증을 받아줄 마지막 사람은 제 엄마다 엄마들은 보통 자식의 마음과 제 마음속을 분간 못하는 불구, 자식들은 엄마에게 어떤 원죄가 있다고 믿는다 어떤 빚이 있음을 본능으로 안다 짜증이 심한 사람은 엄마만 아니라 다른 식구들한테도 짜증을 낸다 필시 이 사람은 제 식구를 아주 만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달리 보면 식구를 예사롭지 않게 믿고 사랑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더 심한 사람은 남한테도 짜증을 낸다 이 사람은 아주 힘있는 놈 아니면 망나니임에 틀림없다 짜증낼 사람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저 자신한테 짜증을 부린다 이 사람은 저 자신을 만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니면 저 말고는 아무도 안 믿거나 못 믿는 사람이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이 사람은 필시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

글쎄 어디서 감탄을 해야 할지, 아니면 짜증을 내야 할지 헷갈리는 시다. 정말 놀라운 건 놀라게 하는 대목이 한 군데도 없다는 점이다. ˝모름지기 짜증은 아무한테나 내는 것이 아니다 짜증은 아주 만만한 사람한테나 내는 것이다˝ 같은 예사로운 서두가 돌이켜보면 결코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독자를 결코 놀라게 하지 않겠다는 단단한 결심이 아니고서야 이런 시를 쓰기 어렵다. 짜증이 뭔지 제대로 아는 시인이라고 할 수밖에. 짜증은 아무한테나 내는 게 아니라고 하므로, 게다가 안면도 없는 시인이 내게 만만할 수도 없으므로 나는 그냥 입이 다물어지 않는다고만 적는다. 세상에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녁은 하루의 끝이 아니다‘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민음사)에 실린 작품해설의 제목이다. 이시구로의 작품을 다수 번역한 김남주 번역가의 해설인데, 작품을 강의한 뒤의 소감으로는 동의하기 어렵다. 역자는 달링턴 홀의 집사로 평생 충직하게 일해온 스티븐스가 마지막에 도달하는 깨달음을 특이하게 과대평가한다.

˝이제 스티븐스는 느리지만 꾸준하게 상호소통의 길로 나아갈 것이라고 독자는 믿고 싶다. 그것은 성공 가능성이 낮은 길이지만, 그 힘든 발걸음을 스티븐스의 장기인 긍지와 성실이 도와줄 것이다. 그런 그에게서 독자는 희망을 본다. 남아있는 시간은 많지 않지만 저녁은 아직 끝이 아니다.˝

역자 개인의 믿음과 희망을 독자 일반의 믿음과 희망으로 지레 넘겨짚는 일에 공감하기 어렵다. 작품에서 결국 문제가 된 것은, 곧 스티븐스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든 것은 ˝장기인 긍지와 성실˝이었다. 사고와 판단을 동반하지 않은 긍지와 성실이 결국 어떻게 삶을 마모시키고 불행하게 만드는가를 보여주는 게 이 소설 아닌가.

작품의 결말에서도 미국인 주인의 농담 취향에 맞추기 위해 농담의 기술 연마에 더 애쓰겠다고 다짐하는 스티븐스의 모습은 작가의 짓궂은 아이러니의 절정으로 읽힐 뿐이다. 번역본의 뒤표지에까지도 ˝젊은 날의 사랑은 지나갔지만 남아있는 날들에도 희망은 있다˝는 문구를 박아넣은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다. 작품을 오도하고 있기 때문인데, 최대한 양보하더라도 작품에 대한 별로 공감하기 어려운 견해를 마치 핵심인 양 제시하고 있는 게 된다.

이런 해설이 유감인 것은 자칫 청소년 독자처럼 미숙한 독자에게 일종의 가이드라인이 되기 때문이다. 전혀 다르게 읽힐 수 있는 작품의 해석을 한정하면서 섣부른 견해를 표준적인 해석처럼 제시하는 것은 월권이다. 차라리 여백으로 비워놓는 것만 못하다.

아주 잘 쓰인 문제적인 소설이면서 대단히 ‘정치적인‘ 소설을 ‘저녁은 하루의 끝이 아니다‘ 정도의 메시지를 전하는 소설로 ‘격하‘하는 해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견과 유감을 적는다. 이시구로는 그보다 훨씬 심오한 소설을 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연 공지다. 연세대학교 미래사회통합연구센터에서는 12월 4일(월) 오후 3시-5시에 러사아혁며 100주년 기념 초청강연으로 ‘예술로 표현된 러시아혁명‘을 개최한다. 문학과 영화 두 분야에 대한 강연이 진행되는데 ‘러시아혁명과 문학‘ 강연은 내가 맡았다. 러시아혁명과 영화는 한국외대 이지연 교수가 강연을 진행한다. 자세한 건 아래 포스터를 참고하시길. 대학연구소 행사이지만 일반인도 참석하실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주의 발견‘으로 지바 마사야의 <너무 움직이지 마라>(바다출판사)를 고른다. 생소한 저자이고 제목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 ‘질 들뢰즈와 생성변화의 철학‘이 부제. 이 역시 일본산 프랑스 철학 해설서. 다만 여느 해설서와 다르게 저자 자신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이 책 <너무 움직이지 마라> 일본어판에는 1980년대 일본 사상계를 주름 잡은 아사다 아키라의 추천사가 실려 있다. 그는 추천사에서 “들뢰즈 철학의 올바른 해설? 그런 것은 따분한 우등생들한테나 맡겨라. 들뢰즈 철학을 변주하고, 스스로도 그것을 따라 변신하는 이 책은 멋지고도 거친 안내서다”라고 하였다. 

기존의 들뢰즈 해석을 거부하고, 흄과 베르그송을 끌어와 자기만의 방식으로 들뢰즈를 해석하는 지바 마사야의 철학에 일본의 몇몇 철학자들은 거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일본의 소설가이자 문화비평가인 아즈마 히로키는 이 책에 대해 “초월론적이지도 경험적이지도 않고, 아버지도 아니고 어머니도 없는 ‘어중간한’ 철학”이라고 평했다.˝

요컨대 일본 비평계에서 화제가 된 책으로 호오가 갈린다고 보면 되겠다. 아시다 아키라는 <구조와 힘>(번역본 제목으론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이란 출세작으로 ‘제2의 가라티니 고진‘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너무 오래 전 일이다. 그래도 이런 자리에서 한 마디 거드니까 책이 궁금해진다. 비록 아즈마 히로키가 ˝어중간한 철학˝이라고 초를 치더라도.

들뢰즈의 책들에 대한 강의도 가늠이 되는 대로 진행해보고 싶은데(지젝과 아감벤 강의의 연장선에서) 지바 마사야도 참고해볼 참이다. 언제나 그렇듯 읽을 책들은 광속으로 우리를 앞질러 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