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엘리엇의 ‘황무지‘(1922)를 아주 오랜만에 강의에서 읽게 책을 다시 주문했다. 현재 번역본으로는 민음사판과 이담북스판이 있는데, 확인해보니 이담북스판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은 절판된 상태다.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는 것. 오히려 연구서들이 절판되지 않고 남아있다. 이 역시도 수요가 없어서인 듯 보이지만.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로 봄비를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주었다.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Winter kept us warm, covering
Earth in forgetful snow, feeding
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

엘리엇 자신은 개인적인 경험을 리듬에 실어서 노래했다지만 ‘황무지‘는 불모의 20세기를 상징적으로 다룬 대표작으로 읽혀 왔다. 무엇이 세계문학인가란 물음에 답하는 사례가 된 셈. 마치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 그러한 상징성을 갖게 된 것과 견줄 만하다.

‘황무지‘의 원서로는 펭귄판을 주문했다. 온라인에 원문이 다 떠 있지만 종이책이 휴대와 독서에 더 간편해서다(펭귄판은 가벼운 종이를 쓴다). 강의를 핑계로 그동안 나왔던 연구서와 연구논문도 훑어볼 참이다. 언제 또 읽어보겠느냐는 생각으로. 목련과 벚꽃이 한창인 이 봄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곁에 있을 때만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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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공지다. 마포중앙도서관에서 이달 19일(목) 저녁 7시에 ‘로쟈의 러시아문학 쉽게 읽기‘ 강의를 진행한다. 주제와 제목은 도서관에서 정했는데, 그간에 ‘다시 읽기‘나 ‘깊이 읽기‘ 강의는 자주 진행해보았지만 ‘쉽게 읽기‘는 처음이다. 어떻게 해야 ‘쉽게 읽기‘가 될는지는 고민해봐야겠다. 참고할 만한 책은 물론 <로쟈의 러시아문학 강의>(현암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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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귀가하여 내일 강의할 책을 찾느라 30분 넘게 시간을 허비했다(결국 찾기는 했다). 매일 강의한 작품에 대해서 한마디씩 적어놓으려고 한 것도 날짜를 넘기게 되었다. 엊저녁에는 일본 다이쇼기의 대표 작가로 ‘소설의 신‘으로도 불리는 시가 나오야(1883-1971)의 대표작 <암야행로>(1937)를 읽었다.

작가의 유일 장편으로 1937년에 완결되었다고는 하나 완성까지 25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집필과정과 성립사가 복잡한 작품이다. 초고는 191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작가의 나이로는 29세 때부터 54세까지다. 필생의 작품인 것. 게다가 발표본과는 현저하게 다른 초고가 있어서 작품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참고자료만 보고 판단하건대, 초고의 과격한 사상이 발표본에서 상당 부분 거세되고 순치된 게 아닌가 한다. 결과적으로는 남은 건 쇼와기의 얌전한 교양소설이다.

1883년생 작가로 시가의 생년은 카프카와 같다. 부유한 부르주아 집안 출생인데 17살에 기독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고 1901년에 구리광산의 환경오염 문제를 두고 아버지와 의견 충돌을 빚는다. 부자간의 격렬한 대립은 1917년에 가서야 화해로 막을 내린다. 대략 16년간의 대립이었는데 이 대립이 시가 나오야 인생의 결정적 사건이고 그의 문학에서도 핵심 주제가 된다(1917년작 ‘화해‘가 번역되지 않아 아쉽다).

하지만 <암야행로>에서 부자갈등은 핵심에서 조금 비껴나 있다. 갈등뿐 아니라 화해가 이미 주제로 넘어와 있어서다. 이 화해가 문제적인 것은 집안에 대한 비판은 물론 초고에 나타나 있는 국가권력 비판이란 주제도 집어삼키기 때문. 카프카 문학에 견주자면 시가 나오야는 부자간의 갈등을 일반화하여 법(정)과의 대결로 형상화한 <소송>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다. 그 점이 일본 국민문학의 대표작일지언정 세계문학에는 미달하게끔 한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일본문학 내부에서 비교대상을 찾자면 <암야행로>는 나쓰메 소세키의 <그후>(1909)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후>에서 부자갈등은 화해가 아닌 파국으로 치닫기 때문인데, 교양소설에서의 화해는 정치적으로 보수적인(불순한?) 함의를 갖는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시가 나오야가 다 책임질 일은 아니지만 일본근대문학은 군국주의의 광기와 폭주를 제어하는 데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암야행로> 초고의 반국가주의 사상이 구두선에 그치고 만 점이 한번 더 유감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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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시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20년만에, 길게는 30년에 읽는 시인들이 있다. 청마 유치환도 그러한데(미당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로 묶이지만 나는 미당과 청마가 정확히 대별되는 두 진로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다시 읽어보려고 하니 허다한 시집이 절판되고 몇 종 눈에 띄지 않는다. 시집으로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시인생각)와 서간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중앙출판공사)를 아쉬운 대로 주문했다. 제목은 물론 청마의 애송시 ‘행복‘에서 따온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 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

설령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시 전체가 편지이고 또 편지가 시가 된 경우다. 궁금한 건 마지막 행이 왜 시집과 서간집 제목에서 다르게 표기되었을까, 라는 점. ‘사랑하였으므로‘와 ‘사랑했으므로‘. 어느 한쪽이 오기이거나 아니면 실제로 시와 편지에서 다르게 표기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시에서는 모든 기표가 의미화되는 사정을 고려하면 7음절의 ‘사랑하였으므로‘는 6음절의 ‘사랑했으므로‘보다 더 오랜 사랑을 표현한다. 뒤따르는 6음절의 ‘행복하였네라‘와 연결해본다면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는 방점이 ‘사랑‘에 찍히고,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에서는 ‘행복‘에 찍힌다. 예민하게 구별하자면 둘은 다른 사랑이고 행복이다. 혼동해서는 곤란한. 주문한 서간집이 도착하는 대로 제일 먼저 확인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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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왕가위>(씨네21북스)이고 부제가 ‘영화에 매혹되는 순간‘이다. 왕가위 영화의 팬이라면 ‘왕가위 영화에 매혹되는 순간‘을 곧바로 떠올릴 만하다. 그가 돌아왔다, 영화가 아닌 책으로!

˝8,90년대 홍콩 영화 뉴웨이브를 이끌었으며 특유의 영상 미학과 독창적인 영화 세계를 구축해온 살아 있는 거장 왕가위의 인터뷰집이다. 왕가위가 영화평론가 존 파워스와 자신의 영화와 인생에 대해 나눈 깊이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18년 데뷔 30주년을 맞은 왕가위의 필모그라피 전체를 세세하게 다루는 이 책은 각 영화의 탄생 배경과 제작 코멘터리, 미공개 스틸 컷을 대거 수록한 ‘왕가위 종합 안내서’이기도 하다.˝

책은 생각보다 크고 비싸고 고급지다. 열혈관객, 혹은 열혈독자들을 위한 책. 그에 대한 남다른 기억을 갖고 있는 영화팬들을 위한 책이고 나도 거기에 속한다. <아비정전>을 처음 비디오로 본 순간, 친구와 극장에서 <중경삼림>을 보고 마주보며 웃음짓던 순간, <동사서독>을 같은 날 두 군데 극장에서 연이어 본 순간, 모스크바에서 ‘봉까르바이 회고전‘과 만나던 순간, 왕가위는 최고의 감독이었다. 그게 20년 전이고 30년 전이었구나.

그 시간들과 다시 마주한다니, 잃어버린 시간들과 다시 만나는 느낌이다. 타르코프스키의 말대로 영화는 ‘봉인된 시간‘이다. 어떤 영화들 속에 시간은 그대로 보존된다. 그 시간들이 우리 곁에 남는다. 그렇게 왕가위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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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22-04-02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왕가위는 딱 화양연화까지만 인정!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