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1308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리처드 번스타인의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한길사)를 읽고 적었다. 아렌트 입문서가 여럿 나와 있는데, 각각의 특장이 있으므로 비교해서 읽어도 좋겠다. 그러고 보니 올해의 마지막 리뷰다...


 














주간경향(18. 12. 31) 아돌프 아이히만은 악의 화신이었나


20세기의 주요 정치사상가로서 한나 아렌트의 책은 대부분 소개되었고 안내서 또한 적지 않다. 그럼에도 리처드 번스타인의 책이 갖는 의의를 찾자면 저자가 아렌트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찾을 수 있다. 아렌트 사상의 주요 개념들 가운데 그는 특히 ‘난민’과 ‘악의 평범성’, 그리고 ‘혁명정신’에 주목한다. 다른 저자라면 ‘정치’나 ‘인간의 조건’ 등을 내세울 수도 있었다. 주제를 한정하는 건 아니지만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을 바꿈으로써 저자는 아렌트를 이해하는 새로운 경로를 제시한다. 

아렌트의 생애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에 뒤이어 특별히 강조되는 것은 난민으로서의 경험이다. 나치 하의 독일에서 탈출하여 프랑스로 망명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갈 때까지 아렌트는 독일계 유대인 난민이었다. 미국에 이주해서도 정식으로 시민이 되기까지 그녀는 18년간 무국적자였다. 본래 난민은 어떤 행위나 정치적 견해 때문에 피난처로 내몰린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20세기의 역사는 그 의미를 변화시켰다. 아렌트도 그런 경우이지만 나치는 유대인 전체를 난민으로 만들었다. 아렌트는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해 무국적 난민의 양산 과정을 성찰한다. 그리고 이 성찰은 전체주의 체제의 탄생과 그 유산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아렌트의 주저는 <전체주의의 기원>과 <인간의 조건>이지만 그녀를 유명인사로 만든 건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취재기였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악의 화신이 아니라 평범한 인물로 묘사한다. 소위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로 아렌트가 지적한 것은 순전한 무사유와 상상력의 결여였다. 아이히만은 유대인들을 강제수용소와 죽음으로 내모는 데 아주 능숙했지만 희생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상상력을 결여하고 있었고 ‘확장된 심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후에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연기에 속았다는 비판도 제기되었지만 악의 평범성 개념은 여전히 중요하다. 핵심은 악을 신화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는 사유를 봉쇄한다. 거꾸로 사유를 중단하는 순간 우리를 아주 쉽게 악으로 인도될 수 있다는 것을 아렌트는 경고한다. 

아렌트에게 인간은 무엇보다 정치적 동물이다. 인간 존재의 복수성, 즉 우리가 여럿이 함께 살아간다는 조건이 정치적 행위의 바탕이다. 행위로서의 정치란 복수성이라는 조건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공적 공간을 보존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복수성을 제거하고 획일화하려는 전체주의는 정치가 아니라 반정치의 산물이다. 우리는 각자의 차별화된 관점을 갖고서 펑등하게 공적 공간에서 함께 행위한다. 그런 기회와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 다름 아닌 혁명이다.

아렌트는 1871년의 파리코뮌과 1917년 러시아의 소비에트, 그리고 독일 스파르타당의 봉기와 1956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봉기 때의 평의회를 혁명정신의 사례로 지목한다. 저자는 거기에 덧붙여 1980년대 동유럽과 중부유럽에서 확산된 정치운동을 아렌트가 목도했다면 혁명정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추가적인 사례로 인용했으리라고 추정한다. 그리고 2016∼2017년 한국의 촛불시위도 마찬가지로 혁명정신의 발현이라는 사실을 적시한다. “시민이 함께하고 공동으로 행위하며, 공적 자유를 실천하고 역사의 경로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깊은 확신”이 바로 아렌트의 유산이며 우리 시대에 갖는 적실성이다.


18.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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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7 2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8 0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늘상 그렇듯이 책을 찾다가 예기치않은 책을 손에 든다. 만나려는 사람 대신에 길에서 마주친 엉뚱한 사람과 말문을 튼다고 할까. 모이라 데이비가 엮은 <분노와 애정>(시대의창)이 그렇게 마주친 책이다. ‘여성작가 16인의 엄마됨에 관한 이야기‘가 부제. 원저는 ‘마더 리더‘인데, 전체의 절반 가량만 옮긴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는 내년에 따로 책이 나온다고.

‘엄마됨‘이라고 옮긴 단어는 ‘motherhood‘다. 예전에 ‘모성‘이라고 주로 옮겨온 단어다. ‘모성‘에서 ‘엄마됨‘으로의 이행이 모성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반영한다. ‘자연스런 모성‘에서 ‘만들어진 모성‘으로의 변화다. 책은 도리스 레싱의 자서전 발췌로 시작하는데 눈길이 머문 건 미국의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의 글이다. ‘Of Woman Born‘에서 발췌한 것인데 제목이 <더이상 어머니는 없다>라고 옮겨져 있길래 확인해보니 올해 재판본이 나왔다.

편자는 리치의 글 전체를 반복해서 읽으면서 엄마됨의 과정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리치는 자녀에게 느낀 감정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쓰라린 분노와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 더없는 행복에 대한 감사와 애정 사이를 죽을 듯이 오간다.˝ 같은 기획의 한국판도 충분히 나옴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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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12-25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치의 저말은 소름돋을 정도로 공감되네요.
저기에 하나 더 얹자면
‘저 둘사이를 죽을듯이 오가는것‘에
죄책감도 느꼈다는것.
나는 좋은 엄마가 아닌가~

로쟈 2018-12-25 23:47   좋아요 0 | URL
네 더이상 자연스럽게 되지는 않는 듯.
 

오후에 오랜만에 동네서점에 들렀다가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민음사) 개정판을 손에 들었다. 판권면을 보니 1판이 나온 게 1999년이고, 올 9월에 2판이 나왔다. 하지만 옮긴이 서문을 보건대 초판이 나온 건 1992년이므로(당시 <포스트모던적 조건>이라는 제목으로 서광사판도 같이 나왔다) 무려 26년만에 개역판이 나왔다. 리오타르의 불어판 원저는 1979년에 나왔기에 거의 40년 전 책이다. 개역판은 초역의 오역과 오류들을 바로 잡았다고 하므로 사실 이제 읽는다고 해서 늦은 건 아니다. 게다가 포스트모던의 여러 쟁점들은 여전히 진행형이기도 하고.

아마도 90년대 중반 대학원 시절에 두 종의 번역본을 영역본을 참고해가며 읽었던 듯싶다.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의 대유행기에 가장 많은 참고의 대상이 되었던 책이 바로 <포스트모던의 조건>이었기 때문이다(미스터리한 일 가운데 하나는 프레더릭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가 그때는 물론 지금까지도 번역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많이 이야기된 저작이면서도 말이다). 사실 책의 핵심은 서론에 곧바로 나온다.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을 ˝거대서사에 대한 회의˝로 곧장 정의하고 있어서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상세한 해명이 <포스트모던의 조건>이기도 하다.

책을 다시금 손에 든 건, 근대문학과 근대성에 대한 강의를 수년간 해오면서 갖게 된 생각들을 포스트모더니즘론에 대입해보면 어떨까 싶어서다. 말하자면 생각의 키가 얼마나 자랐는지 대보려는 것이다. 성장기 아이들만 그런 체크가 필요한 건 아니다. 삶이 끊임없는 배움의 과정이라면 지식과 생각의 성장은 각자의 도덕적 의무다. 20년이 지나고 30년이 흘러도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이해에 아무런 진전이 없다면 꽤나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생각으로 야심한 시각에 이구아수 커피를 마시며 책장을 넘긴다. 아직은 책을 읽을 수 있는 시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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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맘 2018-12-25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식과 성장은 각자의 도덕적의무다!

로쟈 2018-12-25 23:46   좋아요 0 | URL
밥값은 해야 하니까요.~

Comandante 2019-12-22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 현대사상‘을 읽다 ‘포스트모던의 조건‘을 언급하는 구절이 있어 냉큼 보관함에 담았는데,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에 대한 정의와 평가가 궁금해집니다. 읽어야 안다고 생각이라도 할 수 있겠죠..
 

<피네간의 경야>에 대해 험담하는 동안 비로소 아침에 주문한 책이 배송되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기분을 내는 데 전혀 도움이 안될 만한 책, <서사론의 새로운 연구방향>(한국문화사)이다. 제목에서부터 독자들을 발길로 걷어차는 책이다. 아마도 소수의 문학전공자들에게나 어필할 법한데, 나 같은 독자가 그에 해당한다. 서사이론 내지 서사학이 좋아하는 분야는 아니지만 뭔가 새로운 게 나왔다고 하면 관심까지 접어두지는 못한다.

원저는 독일에서 2002년에 나온 책이다. 공역자들이 10여년에 걸쳐 함께 강독한 듯한데 ‘새로운 연구방향‘이라고 하기엔 좀 미심쩍다. 벌써 16년이 지났는데 그 사이에 변화나 진전이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에 견주면 몇년 전에 나온 <서술이론1,2>(소명출판)이 더 나중에 나온 책이다. 영어 원저가 2005년에 나왔기에(분량이 방대해서 번역본은 두 권으로 분권돼 나왔다). 그 역시 13년 전이고 보면 오십보백보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검색해보니 내년에도 옥스포드에서 <내러톨로지>란 제목의 책이 나온다. 입문서로 보이는데, 그래도 서사학 분야의 발전사를 정리해놓지 않을까 싶다. <서사론의 새로운 연구방향>이나 <서술이론>이 갖는 새로움은 그런 책을 참조해봐야 식별할 수 있겠다. 그와는 별도로 ‘페미니즘 내러톨로지‘ 같은 장은 눈길이 가는 장이다. 이 주제의 서사학 책들이 몇 권 있었는데 새삼 아직 번역되지 않은 것인지 궁금하다. 페미니즘의 물결이 페미니즘 서사학 쪽으로도 흘러 넘쳤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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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1916) 강의가 있었다. 올해도 여러 차례 강의한 작품이다(<로쟈와 함께 읽는 문학 속의 철학>에 포함돼 있다). <더블린 사람들>(1914)의 몇몇 단편을 제외하면 조이스의 작품들 가운데 유일한 강의 레퍼토리에 해당한다. 내년에 <율리시스>에 도전할 계획이어서 미리 관련한 책들을 준비하며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데, 강의중에도 곧잘 언급하는 것이지만 나는 조이스가 <율리시스>(1922) 정도에서 멈추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걸작이라고 부른 ‘괴물‘ <피네간의 경야>(1939)는 우주의 언어로 쓰였다는 말 그대로 인간의 언어로는 이해하거나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도단‘의 여실한 사례가 아닐까.

조이스 전문가로서 김종건 교수가 학자로서의 일생을 바쳐서 이 작품을 번역하고 주석을 붙였지만 결과를 놓고 보건대 안타까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번역의 불가능성 내지 무의미성을 보여주는 게 <피네간의 경야> 번역이기 때문이다. 조이스의 숱한 신조어를 옮기기 위해 역자는 생경한 한자어를 무수히 동원하는데 그로 인해 이 작품은 한글 번역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국한문혼용체 소설이 되어버리고 만다. 한자 병기를 생략하고 초반부를 읽어보자.

˝사랑의 재사, 트리스트람경, 단해 너머로부터, 그의 반도의 고전을 재차 휘두르기 위하여 소유럽의 험준한 수곡 차안의 북아모리카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니 오코노의 흐르는 샛강에 의한 톱소야의 암전이 항시 자신들의 감주수를 계속 배가하는 동안, 조지아주 로렌스군의 능보까지 아직 지나치게 쌓지 않았으니 뿐만 아니라 원화로부터 혼일성이 ‘나 여기 나 여기‘ 하고, 풀무하며 다변강풍으로 패트릭을 토탄세례하지 않았으니 또한 아직도, 비록 나중의 사슴고기이긴 하나, 아직도 피의 요술사 파넬이 얼빠진 늙은 아이작을 축출하지 않았으니, 비록 바네사 사랑의 유희에 있어서 모두 공평하였으나, 이들 쌍둥이 에스터 자매가 둘 혹은 하나의 나단조와 함께 과격하게 격노하지 않았나니, 아빠의 맥아주 한 홉마저도 젬 또는 셴으로 하여금 호등으로 발효하게 하지 않았나니, 그리하여 눈썹 무지개의 붉은 동쪽 끝이 바다 위에 반지마냥 보였을지라.˝(<복원된 피네간의 경야>,3쪽)

<피네간의 경야>는 원어민들도 ‘읽을 수 없는 책‘으로 치부하며 독자보다 박사학위자가 더 많다고 일컬어지는 작품이다. 첫 페이지에 나오는 한 문장을 예시했지만 우리말(?) 번역으로도 당연히 읽을 수 없는 작품이다. 심오해서가 아니다. 그냥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박상륭의 <칠조어론>이 이에 견줄 만한 사례라고 할까). 원문으로야 소수의 독자가 심오한 무엇을 찾아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투의 문장을 600쪽 넘게 읽고, 거기에 딸린 12000개가 넘는 주석을 읽어야 한다는 건 고문에 가깝다(책값은 48000원이다).

<피네간의 경야>가 심오한 걸작이라는 데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설사 그렇다 한들 우리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작품이다. 내가 찾을 수 있는 의미는 조이스가 문학의 막다른 길, 문학의 벼랑을 보여주었다는 것. 덕분에 많은 작가와 독자들이 그 벼랑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물론 그럼에도 남들은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굳이 그 벼랑길로 가보려는 독자도 있으리라. 나는 이쯤에서 그들을 배웅하고자 한다. 내가 동행할 수 있는 조이스는 <율리시스>까지만이다. 그 정도만으로도 조이스의 다이달루스적 기예는 충분히 훌륭했다. 추락의 기예까지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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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2-24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피네간의 경야를 살까 주저하다가 단념했습니다.
잘했다고 하기엔 상황이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