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보부아르의 명성을 잇는 여성 철학자는 줄리아 크리스테바이지만 국내 독자들에게 크리스테바의 인지도는 높지 않다. 대신 미국의 여성 지성으로 수전 손택과 (최근 몇년간) 리베카 솔닛이 그 계보를 잇지 않나 싶다. 손택과 솔닛의 책도 최근에 연이어 나왔다. 
















먼저, 독일 비평가 다니엘 슈라이버의 평전 <수전 손택>(글항아리)이 나왔다. 자전적인 글로는 앞서 '일기와 노트' 두 권이 나왔는데, 평전을 보태서 읽으면 좋겠다. 
















내년 봄학기에 미국 여성작가들을 읽을 예정인데, 생각해보니 손택을 빠뜨렸다. 소설가로서도 욕심을 냈던 손택은 <인 아메리카>로 2000년에 전미도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물론 그래도 손택은 비평가로서 더 기억할 만한 업적을 남기긴 했지만. 

















리베캇 솔닛의 책도 이번 가을에 <마음의 발걸음>(반비)과 <그림자의 강>(창비)이 나란히 나왔다. 솔닛의 책은 반비와 창비, 두 출판사에서 경쟁적으로 출간하고 있어서 앞으로도 몇 권 나오지 않을까 싶다(예상으로는 그녀의 모든 책이 번역될 듯싶다).






























솔닛의 책은 대부분 갖고 있지만, 독서는 부진한 편이다. 소설들이었다면 진작 강의에서 다루었을 텐데, 에세이에 속한 책들이다 보니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그래도 조만간 저지선을 마련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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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 시몬 드 보부아르의 <모든 인간은 죽는다>를 강의하면서 '보부아르 읽기'의 견적서를 내봤다. 사실 <제2의 성>은 번역돼 있지만 주요 소설들은 절판된 상태라 보부아르 강의는 계획하기 어려웠는데, 몇달 전에 새로 나온 <레망다랭>(현암사) 때문에 그래도 견적이라도 내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단 보부아르의 책들을 소설과 비소설로 나눈다면, 소설은 다시 <레망다랭>까지와 이후의 자서전(대략 5-6편을 이 범주에 넣는다)으로 나눌 수 있다. 첫 장편 <초대받은 여자>부터 <레망다랭>까지의 목록은 이렇다. 


<초대받은 여자>(1943)

<타인의 피>(1945)

<모든 인간은 죽는다>(1946)

<레망다랭>(1954)


유감스러운 건 이 가운데 <초대받은 여자>가 절판된 상태라는 것(이번에 중고로 다시 구입했다). 중요도로 치자면 공쿠르상 수상작인 <레망다랭>만큼 중요한 작품이 <초대받은 여자>이고, <타인의 피>는 보부아르 윤리학의 연장선상에서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죽음의 문제를 다룬 형이상학 소설로 사르트르의 희곡들과 같이 읽을 수 있는 작품. 여하튼 절판된 소설들이 다시 나와야 보부아르 문학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독서와 평가가 가능해진다. 
















이어서 자서전으로 넘어가면 1958년 50세에 출간한 <처녀시절>(<정숙한 처녀의 회상>)부터 만년의 사르트르에 대한 회고 <작별의 예식>까지다. 미번역 작품명은 <처녀시절/여자 한창때>의 연보를 따른다. 


<처녀시절>(1958)

<여자 한창때>(1960)

<사물의 힘>(1963)

<결국>(1972)


<아주 편안한 죽음>(1964)

<작별의 예식>(1981)


이 가운데, <쳐녀시절>과 <여자 한창때>(다른 제목으로는 <계약결혼>으로 번역됨), 그리고 <조용한 죽음>과 <작별의 예식>이 번역돼 있다. <작별의 예식>은 절판된 상태. 이 경우에도 <사물의 힘>과 <결국>이 마저 번역되면 좋겠다(그렇게 완간된다면 영국 작가 도리스 레싱의 자전소설들과 견줄 만하다. 레싱의 소설로는 <마사 퀘스트>가 포함된 '폭력의 아이들' 5부작과 <금색 공책>을 자전소설로 꼽을 수 있다. 더불어 레싱은 두 권의 자서전도 남겼다).

















이상 10권에 비하면 <위기의 여자>나 <모스크바에서의 오해>는 자투리 정도에 해당한다(그럼에도 마땅한 번역본이 없어서 <위기의 여자>를 강의에서 읽으려 했다). <타인의 피>도 번역본은 있지만 너무 낡은 상태라 세계문학전집판의 새 번역이 나오길 기대한다. 
















이제 덧붙이자면 에세이들이 있다. 초기의 중요한 두 에세이가 국내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제목으로 번역돼 유감이다(<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는 번역 상태도 안 좋다). 


<퓌루스와 시네아스>(1944) *<모든 사람은 혼자다>

<애매성의 윤리학>(1947)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

<노년>(1972)

















기타로는 미국 여행기와 미국 작가 넬슨 알그렌에게 보낸 연애편지가 있다. 현재는 절판된 상태인데, 이번에 마음먹고 모두 중고로 구입했다. 다시 나올 가능성이 적어 보여서. 


이제 <제2의 성>과 보부아르에 관한 2차문헌이 남는데(보부아르의 저작은 사르트르의 철학서들과 어떤 관련성을 갖는지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가령 <존재와 무><변증법적 이성비판>과 <제2의 성>은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건 다른 기회에 다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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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청년 전태일의 50주기다.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도 50주년 기념판으로 다시 나왔기에 아침에 주문했었다(곧 배송될 예정). 관련서도 몇 권 같이 나왔다. 교통방송에서는 특집다큐도 만방송했기에 오전에 유튜브로 시청할 수 있었다. 


  














눈에 띄는 또다른 책은 <전태일 실록1,2>(동연)인데, 두 권 합계 1200쪽이 넘는다. 저자가 37년간 300인에 달하는 관련 인물들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모았고 이소선 여사의 증언도 더했다고 한다. 
















아무려나 50주기를 맞아 전태일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한번쯤 되새겨보면 좋겠다. 나로선 한국현대문학 강의를 하면서 한국현대사에 관해 계속 곱씹어보게 된다(내달에는 황석영 소설들에 대해 강의할 예정이다). 1960년의 출발점이 4.19였다면, 1970년대의 출발점에는 전태일의 분신이 놓여 있다. 
















한국 자본주의 역사에 관한 책도 다시 검색해보니 이병천 교수의 책이 신간으로 나왔다. <한국 자본주의 만들기>(해냄). 앞서 낸 <한국 자본주의 모델>의 속편이거나 개정판인 듯싶다. 


 



 











당연하게도, 자본주의 관련서도 계속 나오고 있는데, 타이틀만 봐서는 흥미로운 책들이다(이 주제의 책들을 훑어볼 시간이 없다). 그 가운데서는 오늘 발견한 저자는 피터 플레밍.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죽음>에 이어서 최근에 <슈거대디 자본주의>가 번역됐다. '친밀한 착취가 만들어낸 고립된 노동의 디스토피아'가 부제. 


"후기 자본주의의 추악한 이면과 착취당할 대로 착취당하다 죽음에 이르는 노동자들의 처참한 현실을 분석하는 데 오랫동안 천착해온 런던 대학의 피터 플레밍 교수는 현재의 자본주의를 “슈거 대디 자본주의”라 이름 붙였다. 규제와 감시 체계의 테두리 바깥, 기술 진보와 금전 거래의 접점에서 ‘자유로운 개인주의’라는 당의정을 다시 꺼내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 책은 경제적 이성을 공공재로서 다시 획득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끝으로, 오늘날의 전태일이 있다면 플랫폼 노동자가 아닐까 싶은데, 노동분야의 관련서로 다수의 책이 나오고 있다. <플랫폼 자본주의>부터 <공유경제는 공유하지 않는다>까지. 전태일 50주기를 맞아 챙겨놓는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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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가 공동편집자로 참여한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전3권)가 완간되었다. 1권이 2018년에 나왔으니까 만 2년만이다(번역에는 물론 그 이상의 시간이 소요됐을 듯싶다). 앞서 1,2권이 나왔을 때는 아직 완간이 안 됐으니까, 란 핑계를 댔었는데, 이제는 옴짝달싹 못하고 이 세 권의 두께와 마주하게 되었다. 
















제목에서 '경이로운'은 물론 '철학의 역사'를 수식하지만, 책의 존재 자체도 경이롭다. 이 정도 분량의 철학사가 1인 번역으로 무탈하게 완간되었다는 사실이 경탄스럽고, 두께와 함께 그 이상으로 묵직한 책값이 또한 탄복할 만하다(권단 8만원). 든든한 철학사 내지 철학사전을 장서용으로 마련했다고 하면 되겠다(독서용이라고 하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번에 나온 3권(현대철학)은 '독일 관념주의'를 첫 장으로 하여 '20세기의 철학과 과학'을 마지막 장으로 마무리된다. 다루는 범위가 넓어서 좁은 의미의 철학사라기보다는 넓은 의미의 현대 인문학사로도 읽힌다(대략 역사학만 제외된 듯싶다).



포괄적인 철학사다 보니까 방대한 분량임에도 실제 주제별 기술은 압축적이다. 헤겔에 대해 10여 쪽이 할애되는 식이다. 그렇지만 '문학과 소설 속의 부르주아 서사시'나 (실존주의 장에서) '도스토옙스키와 철학' 같은 주제가 다루어지고 있는 점은 이 시리즈의 매력이다. 짐작에 이탈리아 철학 내지 인문학 수준의 척도가 되는 시리즈이지 않을까 싶다(문득 이탈리아 문학기행 때 들렀던 밀라노의 서점이 떠오르는군).   


아무려나 세 권을 서가에 잘 모아두어야겠다. 몇 개 장은 바로 읽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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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명 2020-11-17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이정우 선생님의 세계철학사는 어떤가요? 완결은 아직 안됐지만

로쟈 2020-11-17 12:59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완결 기다리는중. 3권이 사실 어려운 부분이죠..
 

이번주 한겨레의 '언어의 경계에서' 꼭지를 옮겨놓는다. 지난달 미국문학 강의에서 다시 읽은 케이트 쇼팽의 <각성>에 대해서 적었다. 분량상 에드나의 선택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한겨레(20. 11. 13) 자식보다, 내 목숨보다 중요한 것


생전에는 홀대받다가 사후에야 문학사에서 복권되고 정전 작가로 재평가되는 사례가 종종 있다. 미국 문학에서라면 단연 허먼 멜빌을 첫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데, 여성작가로는 ‘페미니즘 소설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케이트 쇼팽도 여기 해당한다. 1850년생으로 19세기 후반을 살았던 쇼팽은 두 권의 단편집과 두 편의 장편소설을 남겼고, 이 가운데 두번째 장편이자 대표작 <각성>(1899)이 오늘날 그에 대한 재평가를 떠받치고 있다. 발표 당시에는 여주인공의 성적 욕망과 일탈을 다루었다는 이유로(미국판 ‘마담 보바리’로도 불렸다) 거센 비난을 받고 절판되었던 작품이다.


여성문학이란 무엇인가. 흔히 창작자가 여성인 경우를 가리키지만, 더 중요하게는 여성 문제를 다룬 작품을 뜻한다. 여성 문제란 가부장적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와 상태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불거진다. 아버지와 남편으로 대표되는 남성에 대한 예속상태에서 어떻게 동등한 주체로 나아갈 수 있는가, 여성의 고유한 자아와 정체성을 어떻게 새로 정립할 수 있는가 등이 수반되는 과제다. 그런 관점에서 주인공 노라의 각성과 가출을 다룬 입센의 <인형의 집>(1879)도 여성문학에 부합한다. 그리고 여성의 각성 내지는 각성된 여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각성>은 <인형의 집>의 연장 선상에 놓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각성>의 주인공 에드나 퐁텔리에는 28살로 미국 뉴올리언스의 상류층 주부다. 남편은 중년의 사업가이고 둘 사이에는 네 살, 다섯 살의 두 아들이 있다. 에드나는 여름휴가차 머문 휴양지에서 로베르라는 청년과 만나 새로운 감정에 눈뜬다. 바로 그즈음에 에드나는 아이들에게 무관심하다는 남편의 타박을 듣고 전에 없던 눈물을 흘린다. 결혼생활에서 남편의 타박은 흔한 일이었고, 비록 잔소리를 늘어놓긴 하지만 남편은 친절하고 헌신적인 편으로 주변에서는 ‘최고의 남편’으로 치켜세워지는 남자였다. 그럼에도 에드나는 이례적인 압박감과 함께 고통까지 느낀다. 이는 자신의 위치, 그리고 주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이라고 설명된다.


에드나의 각성은 자연스레 주부 역할에 대한 거부로 이어져 남편 퐁텔리에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각성>에는 에드나와는 다른 유형의 여성도 등장한다. 휴양지에서 친구가 된 아델 라티뇰인데, 라티뇰 부인은 2년 간격으로 세 자녀를 둔 상태에서 넷째를 가지려 한다. 그녀는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행복을 느끼고 아내와 어머니 역할에 충실한 여성이다. 당시에 쓰던 표현에 따르면 아델은 ‘모성애가 넘치는 여성’(마더-우먼)이었고, 반면에 에드나는 그렇지 않은 여성이었다. 에드나는 두 아들을 사랑했지만 때로는 그들의 존재를 까맣게 잊기도 했다. 에드나는 아델에게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지만 자기 자신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녀에게서 ‘나 자신’은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었다.


에드나에게 ‘나 자신’은 결혼생활에서 찾아질 수 없었다. ‘아내’와 ‘어머니’는 그녀의 ‘나 자신’이 아니었다. 가까이에 있는 라티뇰 부부가 가장 이상적인 부부상을 보여주었지만 에드나는 그들 부부의 삶을 끔찍하게 여겼고 아델에게는 연민을 느꼈다. 비록 로베르에게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로베르는 ‘당신을 떠납니다,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쪽지를 남기고 에드나를 떠난다. 설사 에드나와 로베르가 결합한다 하더라도 또 다른 결혼생활은 에드나가 꿈꾸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에드나가 바다를 향해 계속 헤엄쳐나가는 장면이 <각성>의 마지막 장면이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잠시 떠올리지만, 에드나는 자신이 그들의 소유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수영을 할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에드나는 어린 시절 푸른 초원을 걷는 기분을 느낀다. 그녀에겐 그 자유가 목숨보다 더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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