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의 '언어의 경계에서' 꼭지를 옮겨놓는다. 지난달 미국문학 강의에서 다시 읽은 케이트 쇼팽의 <각성>에 대해서 적었다. 분량상 에드나의 선택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한겨레(20. 11. 13) 자식보다, 내 목숨보다 중요한 것


생전에는 홀대받다가 사후에야 문학사에서 복권되고 정전 작가로 재평가되는 사례가 종종 있다. 미국 문학에서라면 단연 허먼 멜빌을 첫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데, 여성작가로는 ‘페미니즘 소설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케이트 쇼팽도 여기 해당한다. 1850년생으로 19세기 후반을 살았던 쇼팽은 두 권의 단편집과 두 편의 장편소설을 남겼고, 이 가운데 두번째 장편이자 대표작 <각성>(1899)이 오늘날 그에 대한 재평가를 떠받치고 있다. 발표 당시에는 여주인공의 성적 욕망과 일탈을 다루었다는 이유로(미국판 ‘마담 보바리’로도 불렸다) 거센 비난을 받고 절판되었던 작품이다.


여성문학이란 무엇인가. 흔히 창작자가 여성인 경우를 가리키지만, 더 중요하게는 여성 문제를 다룬 작품을 뜻한다. 여성 문제란 가부장적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와 상태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불거진다. 아버지와 남편으로 대표되는 남성에 대한 예속상태에서 어떻게 동등한 주체로 나아갈 수 있는가, 여성의 고유한 자아와 정체성을 어떻게 새로 정립할 수 있는가 등이 수반되는 과제다. 그런 관점에서 주인공 노라의 각성과 가출을 다룬 입센의 <인형의 집>(1879)도 여성문학에 부합한다. 그리고 여성의 각성 내지는 각성된 여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각성>은 <인형의 집>의 연장 선상에 놓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각성>의 주인공 에드나 퐁텔리에는 28살로 미국 뉴올리언스의 상류층 주부다. 남편은 중년의 사업가이고 둘 사이에는 네 살, 다섯 살의 두 아들이 있다. 에드나는 여름휴가차 머문 휴양지에서 로베르라는 청년과 만나 새로운 감정에 눈뜬다. 바로 그즈음에 에드나는 아이들에게 무관심하다는 남편의 타박을 듣고 전에 없던 눈물을 흘린다. 결혼생활에서 남편의 타박은 흔한 일이었고, 비록 잔소리를 늘어놓긴 하지만 남편은 친절하고 헌신적인 편으로 주변에서는 ‘최고의 남편’으로 치켜세워지는 남자였다. 그럼에도 에드나는 이례적인 압박감과 함께 고통까지 느낀다. 이는 자신의 위치, 그리고 주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이라고 설명된다.


에드나의 각성은 자연스레 주부 역할에 대한 거부로 이어져 남편 퐁텔리에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각성>에는 에드나와는 다른 유형의 여성도 등장한다. 휴양지에서 친구가 된 아델 라티뇰인데, 라티뇰 부인은 2년 간격으로 세 자녀를 둔 상태에서 넷째를 가지려 한다. 그녀는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행복을 느끼고 아내와 어머니 역할에 충실한 여성이다. 당시에 쓰던 표현에 따르면 아델은 ‘모성애가 넘치는 여성’(마더-우먼)이었고, 반면에 에드나는 그렇지 않은 여성이었다. 에드나는 두 아들을 사랑했지만 때로는 그들의 존재를 까맣게 잊기도 했다. 에드나는 아델에게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지만 자기 자신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녀에게서 ‘나 자신’은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었다.


에드나에게 ‘나 자신’은 결혼생활에서 찾아질 수 없었다. ‘아내’와 ‘어머니’는 그녀의 ‘나 자신’이 아니었다. 가까이에 있는 라티뇰 부부가 가장 이상적인 부부상을 보여주었지만 에드나는 그들 부부의 삶을 끔찍하게 여겼고 아델에게는 연민을 느꼈다. 비록 로베르에게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로베르는 ‘당신을 떠납니다,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쪽지를 남기고 에드나를 떠난다. 설사 에드나와 로베르가 결합한다 하더라도 또 다른 결혼생활은 에드나가 꿈꾸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에드나가 바다를 향해 계속 헤엄쳐나가는 장면이 <각성>의 마지막 장면이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잠시 떠올리지만, 에드나는 자신이 그들의 소유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수영을 할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에드나는 어린 시절 푸른 초원을 걷는 기분을 느낀다. 그녀에겐 그 자유가 목숨보다 더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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