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KTX 민영화를 추진한다는 기사(하단 참조)를 읽고 떠올린 책은 폴 버카일의 <정부를 팝니다>(시대의창, 2011)이다. 지난달에 구입해놓고는 잊고 있었는데, 다시금 책상맡에 갖다놓아야겠다. 이명박 정부는 국민에게 정말 많은 책을 읽게 한다...

 

 

아시아투데이(11. 11. 15) “무책임한 정부는 모든 것을 민영화한다”

 

미국과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수도, 전기, 철도 등 공공시설의 민영화에 이어 국방, 교도소, 치안 등 그야말로 정부 고유의 기능까지 민간 기업에 넘겨지고 있다. 정부가 서비스하는 영역을 민간에 넘기는 것, 민영화란 정부가 전체 시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주권을 일부 시민(이윤을 추구하는 민간 기업)에게 넘기는 것이다.


<정부를 팝니다>(폴버카일 지음·김영배 옮김·시대의창)의 원제는 '주권 아웃소싱(Outsourcing Soverignty)'으로 미국의 공법학자인 저자가 정부 기능의 민영화를 냉철하게 파헤친 책이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유행한 지난 30여년 동안 미국과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국가의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하는 조치들이 단행됐다. 미국 레이건 행정부에서 불거진 이란-콘트라 사건, 민간인 전쟁용병 블랙워터, 유럽의 공항안보 민영화 등 미국 안팎의 다양한 민영화 사례를 제시한다.

 

 

한 예로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국이 이라크에 최고 행정관으로 파견한 폴 브레머를 호위한 것은 미국군대가 아니라 ‘블랙워터’라는 회사였다. 이 회사는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남동부를 강타했을 때 뉴올리언스의 치안을 담당하기도 했다.

저자는 “정부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을 민간에 넘겨줬을 때 이들은 정부를 위해 무엇을 하는가. 정부는 주권을 아웃소싱할 권한이 있느냐”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는 “민영화는 주권을 ‘아웃소싱’하는 것이다. 민영화의 실체는 헌법과 시민주권을 시장에 넘기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저자는 "효율성이라는 가치보다 헌법과 시민 주권의 가치가 더 우위에 있다"고 강조하면서도 “기본 관점이 반(反)민영화는 아니다”라고 전제했다. 그러면서 “아웃소싱을 결함투성이 방안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이를 공법의 체계 내에서만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 경계를 정확히 설정할 때 비로소 민주주의 체제가 올바로 작동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홍규 영남대 교수는 추천사에서 “이 책은 이미 정부 민영화가 시작되고 있는 위험한 우리 현실에 경종을 울리고 이를 막는 방벽 구축의 지혜를 주고 있다”고 밝혔다.(주진기자)

 

11. 12. 27.

 

P.S. 관련기사를 자료로 스크랩해놓는다.  

 

노컷뉴스(11. 12. 26) "KTX 민영화"…정부, 또 대기업 퍼주기 

 

4대강 사업과 인천공항 민영화에 이어 정부가 이번에는 철도 부분에서 '알짜'로 통하는 KTX 민영화를 강하게 밀어부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26일 복수의 정치권 인사에 따르면 국토해양부는 27일 이명박 대통령에게 'KTX 경쟁체제 도입'을 골자로 업무보고를 할 예정이다.

정부는 사실상 국가 독점체제인 철도 운영에서 경쟁체제를 도입할 경우 경영효율화, 서비스 향상, 안전 강화 등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이유로 일부 노선의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다. 주무부처인 국토해양부는 우선 오는 2015년 수도권 고속철도(수서~평택)가 개통되면 수서발(發) 경부, 호남선 400km를 민간사업자에 맡길 예정이다. 이를 위해 내년 상반기 중에 사업자를 선정하고 2015년부터 시행에 들어간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KTX가 민영화할 경우 철도 운영의 다원화로 인한 안전 시스템의 인터페이스 붕괴, 공유노선에 대한 소통 및 조정의 난항, 선로나 열차고장 등 비상 상황 시 대응의 어려움 등 철도 안전이 위협 받을 것이라고 지적이 나오고 있다. 민주통합당 김진애 의원과 통합진보당 강기갑 의원은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민간자본의 수익성 추구 경영으로 철도의 기반인 차량 및 시설유지보수를 소홀히 함으로써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며 "이는 영국 등 철도선진국의 민영화 이후 사고발생, 요금인상 등의 경험과 재공공화 추진으로 이미 확인된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경영효율화라는 명목 하에 구조조정이 이뤄진 이후 KTX와 관련해 크고 작은 사고가 잇따라 발생했다. 또 일부 민간에서 운영하는 고속도로 요금이 일반 고속도로보다 훨씬 높게 책정된 사례가 민영 KTX에서도 그대로 재현될 가능성이 크다는 걱정도 많다. 국토부도 철도 민영화로 요금이 내려갈 것이라고는 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국토부 고위 관계자는 “외국에서도 대부분 철도를 경쟁체제로 운영하고 있으며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고 있지 않다”며 “그렇다고 요금이 내려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철도부분에서 KTX는 영업이익률이 30%에 달해 적지 않은 대기업들이 탐을 내고 있지만 민영화 이후 수익성 추구에 매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 의원은 "임기가 1년도 안 남은 상황에서 민간 대기업에 새로운 돈벌이의 장을 만들어 주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라며 "우리는 국민의 세금과 호주머니를 털어 민간대기업의 배만 불리는 특혜"라고 지적했다. 특히 국토부가 이런 정책 수립과정에서 임명된 지 10개월 밖에 안 된 철도정책관에 대해 인사를 내면서 구설수에 휘말리기도 했다. 지난 20일 인사에서 A정책관이 새로 전보됐고 기존에 철도정책을 총괄했던 B 전 정책관은 대기 중이다. 당시 인사에서는 A 정책관 외에 과장급 1명이 전보됐을 뿐이었다. 민영화를 강하게 밀어붙이기 위해 B 전 정책관을 앉혔다는 얘기가 도는 것이 이 때문이다. 이에 대해 국토부측은 "최 전 정책관은 내년에 인사낼 때 한꺼번에 내려고 해서 대기 근무 중"이라며 "KTX민영화와는 무관하다"고 말했다.(정영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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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 2011)을 내고 대학내일과 인터뷰를 가진 적이 있다. 그 기사가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2011)로 시작해서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자음과모음, 2011)로 마무리지었기에 나름으로는 2011년 결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대학내일(589호) 로쟈를 거쳐 지젝을 지나 실재의 사막으로

 

인문학자 이현우  혹은  로쟈

구 동독 시절 농담 하나. 동독의 한 노동자가 시베리아에 일자리를 얻었다. 생활환경이 좋다고 홍보하는데 당연히 미심쩍다. 노동자가 친구와 약속하길 “(모든 우편물이 검열될 테니까)우리 암호를 정하자. 내가 쓴 편지가 파란 잉크로 쓰여 있으면 그 내용은 진실이고, 빨간 잉크로 쓰여 있으면 거짓이야.” 친구는 한 달 후 파란 잉크로 쓰인 편지를 받는다. 편지엔 모든 게 훌륭하다고 적혀 있다. 음식은 풍부하고, 아파트는 넓고, 영화관에선 서구권 영화를 마음껏 틀어주고. 그런데 친구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문장, “딱 하나 빨간 잉크만은 구할 수가 없더라고.”


월 스트리트 점령 시위 현장에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인간 확성기’를 이용해 미국인들에게 이 우화를 전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유 민주주의 시스템’에 과연 자유와 민주가 있는지 생각해보라고. 동물과 섹스할 자유마저 있지만, 부자들의 세금 10% 높일 자유는 없는 곳, 생명연장기술이 찬란하게 발전 중이지만, 가난한 사람은 병원조차 갈 수 없는 곳. 지배 권력의 프레임 탓에 자유롭지 못함을 자각조차 못 하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우리 생각의 한계를 꼬집는 지젝은 현대판 소크라테스다.


이번 인터뷰는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으로 유명한 인문학자 이현우 교수와 슬라보예 지젝에 대해 나눈 내용이다. 이 교수는 최근 책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을 출간했다. 지젝의 저서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를 풀어 전달하는 내용이다. 이 교수는 사람들이 지젝을 읽고 지적으로 무장하길 바랬다.(이정섭기자) 

 

 

9 .11은 미국의 과잉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에 자주 들어왔던 사람이라면 슬라보예 지젝에 대한 관심을 익히 알 테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도 있으니 왜 지젝을 이야기하는지 다시 한 번 설명해달라.
금융위기 이후 현실 세계를 이해하는 데, 그리고 다음 올 세계를 이해하는 데 참고할 부분이 많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지젝은 가장 좌측에 있는 사람이다. 깃발만 거기에 들고 있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논리와 설득력이 있다. 1대 99의 사회에서 99%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말하는 자본주의의 실재에 대해 필독할 필요가 있다. 그냥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가 기득권을 위해 만들어 놓은 사고의 프레임 자체를 신랄하게 드러낸다. 그동안 많은 사람이 자기 분수에 맞지 않게 1%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따라왔다. 속고 이용당해 온 사람들이 지젝을 통해 자신을 지적으로 무장했으면 좋겠다.  

 

책 서문에 ‘지젝거리다’ 할 정도로 자주 거론되는 철학자라고 소개했는데, 견문이 짧아서인지 나는 그렇게 많이 들어본 것 같진 않다.
식자층, 특히 문화비평, 영화비평 쪽에서 정말 자주 거론되는 철학자인데, 그 밖과는 좀 갭이 있다.  책도 그렇게 많이 팔리는 편이 아니다. 이름이 자주 거론되니까 기자들도 책이 꽤 읽히는 것으로 착각하더라. 시장성은 적지만 네임 밸류가 있으니까 출판사에서 책을 내는데 그만큼 읽히진 않는 게 현실이다.

 


보통 9. 11사태를 문명 간 충돌의 시각으로 보는 게 일반적인데, 지젝은 9. 11사태 미국의 과잉이라고 해석한다.
문명의 충돌로 프레임을 짜는 것 자체가 미국식 시각이다. 자기들 주류적인 세계관을 주입하고 싶어서 만들어내는 것이고, 여기서 문제는 이 체제에서 고통 받는 제3세계 사람들마저 그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점이다. 미국이 만들어낸 이슬람의 이미지, 폭력적이고 우리와는 뭔가 다른 이슬람의 이미지를 걷어내야 한다. 우리가 보는 현상 너머의 사막과 같은 실재를 보고 경험할 필요가 있다. 영화 ‘매트릭스’로 치면 빨간 약을 먹고 실재 세상을 보는 것처럼.

 

미국의 과잉이란 표현이 어렵다. 설명해달라.
경제학의 경기론을 보면 호황과 불황 곡선이 있잖은가. 미국의 과잉이란 말도 그것과 같다. 미국의 힘이 모자랄 때도 있고 과하게 넘칠 때도 있다. 미소 냉전 시절 미국은 이슬람원리주의를 지원해 소련과 맞섰다. (영화 ‘람보 3’를 보면 람보가 이슬람 무장 세력과 함께 소련군을 공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게 성장한 이슬람원리주의 단체들이 미국의 중동 정책과 부딪치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슬람원리주의는 타자적인 게 아니다. 미국 바깥에 있던 게 아니라 미국 패권을 위한 수단이 과잉이 돼서 돌아온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외부에서 온 문제냐, 미국 자체의 과잉이냐에 따라 해결 방향이 상당히 달라진다. 외부, 즉 이슬람 문명에서 온 문제라면 오히려 쉽다. 이슬람원리주의자만 모두 없애면 문제가 사라진다. 근데 과연 그럴 것이냐. 그럴 것 같지 않다. 한때 파시즘이 그렇고, 공산주의가 그랬듯, ‘진짜 이번 적만 없애면 끝이다’ 싶지만 어느 순간 또 다른 적이 나타나 있을 것이다. 책에서 또 하나 재밌는 건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로 미화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미화하는 것 역시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다. 동양적인 것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든 경멸의 대상으로 삼든 그 기저는 같다. 보편성의 논리로 보지 않는 것. 상대를 우리랑 다른 존재, 우리랑 소통되지 않는 존재로 보는 것이 문제다.

 

 

상상조차 못하는 부자유
월 스트리트 점령 시위 도중 지젝이 중국 이야기를 했다. 중국이 대안적인 세상을 그리는 영화, 소설 등이 금지됐다는 이야기를 꺼내며 미국은 상상할 능력마저 잃어버렸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적절하게 표현할 수단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막연히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현실’에서는 자유로운 것 같지만 ‘실재’적으론 자유롭지 못한 것.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언어를 찾아야 한다. ‘매트릭스’에서 그렇듯 안락하게 몽상의 세계에서 살 수도 있지만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선 우선 속고 있다는 의식이 필요하다. 익숙한 사고에서의 탈주가 있어야 한다.

 

지젝이 건네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평소 듣지 못한 내용이고, 낯선 생각의 단초가 된다. 예를 들어 중국 올림픽 때 매스게임 보면서 뭔가 전체주의적 느낌을 받았는데, 책에서 지젝은 매스게임을 그렇게 보는 고정관념 자체가 잘못돼 있다고 지적했다.
흔히 매스게임을 원조 파시즘으로 해석하는데, 그것과는 또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집단 퍼포먼스는 본래 노동자 운동의 한 요소다, 그것을 파시즘이 갖다 쓴 것이다. 공산주의 매스게임을 보며 파시즘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건 지배 시스템이 의도적으로 바꿔놓은 순서로 인식하는 것이지.
 
비폭력 시위가 옳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지젝은 ‘카페인 없는 커피’ 같은 것이라며 비판한다.
운동에 폭력을 쓰느냐 마느냐는 따로 매뉴얼이 있는 게 아니다. 현실 상황은 반복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상황에 최선의 길을 찾아가야 한다. ‘무조건 비폭력이 옳다’ ‘폭력은 항상 정당하다’ 그런 건 없다. 정세를 판단해 가장 강력한 수단을 택해야 한다. 간디의 인도 해방 때는 비폭력이 강력했고, 레닌의 러시아 혁명 땐 폭력이 강력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일반론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레닌을 반복하라
공산주의(코뮈니즘)이란 말 자체도 요즘엔 지식인들이 웬만하면 피하려는 단어다. 지젝처럼 자신을 공산주의라고 내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현실 공산주의 국가들의 역사를 생각하면 특히 그렇다. 공산주의라는 단어와 함께 거대한 수용소, 강제적인 의식화, 활력 없는 사회 같은 장면이 떠오른다. 
그것은 우리나라 교육체제의 승리고. 프로파간다의 승리다. 지젝은 레닌을 반복하라고 이야기한다. 보통 현실은 어떤 선택지를 강요한다. 예를 들어 취업해서 잘 먹고살든가, 취업하지 않고 굶든가. 레닌은 현실이 강요하는 선택지를 포기하고 행동을 통해 불가능을 돌파했다. 여기서 레닌을 반복하라는 건 레닌이 했던 것을 똑같이 하라는 것이 아니다. 레닌이 시도했지만 실패한 자리가 있다. 전체 인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의 문턱. 실패하되 더 낫게 실패하라. 한 번 실패했기 때문에 역사의 폐기장에 던지지 말고 그 원래 자리로 가서 다시 한 번 시도하라. 전철이 있으니 다른 방법으로 다시 시도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또 실패할 수도 있고.

 

지젝은 현재의 의회 민주주의는 반대한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말이 대의제이지 별로 대의가 되지 않지 않는가. 가진 사람 의견만 대의하니까. 지금 보면 거의 과두제화돼 있지 않은가. 해결책을 고민하는 한쪽은 최장집 교수처럼 기존 대의제 시스템은 유지하되 어떻게 대표성을 강화할 것인지를 이야기하고, 다른 한쪽은 이 제도 자체가 한계가 있으니 바꾸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정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까?
흔히 누군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면 그 대안이 뭐냐며 자본주의를 대체할 그만한 사이즈의 뭔가를 가져오라고 이야기하는데, 지젝은 지금이 파국적 마지막 상황이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그런 것을 절박하게 발명해야 될 시기라고 이야기하는 거다. 여러 방식이 가능하지만 미리 예단할 수 없다. 나꼼수의 돌풍을 보라. 지난해까지만 해도 아무도 알 수가 없던 일이다. 변화된 정황, 매체의 변화, 사회적 분위기가 결합해 나온 게 나꼼수다. 미리 계획을 다 짜놓고 하는 게 아니라 적절한 타이밍에 개입해서야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지젝이 제안한 건 소비에트식 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의 방식이다. 직접민주주의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인구수가 너무 많아서 안 된다고 반대하는데 그렇게 불가능하지도 않다. 기술적으로 그런 게 가능해진 시대이지 않은가.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통해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자기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 있다. 가능한 방법을 이용해 우리가 원하는 민주주의의 최대치를 찾아가는 것, 길을 찾아가는 게 오늘날 필요한 일이다. 무언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이는 게 있다면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부자 세금도 마찬가지. 10%? 30%? 그중 어떤 것도 정해져 있는 거 아니다. 모두 사람이 만든 규칙이다. 원래 있던 규칙을 자연법칙처럼 인식하는 것. 현 상태를 ‘자연화’하려는 게 보수다.

 

 

곁다리의 가치
지젝의 나머지 내용에 대해선 독자의 독서를 위해 남겨두고 인문학 자체에 대해 묻겠다. 한동안 유용성이 없다고 취급받던 인문학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인문학 서적 중엔 알랭 드 보통의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처럼 인문학을 통해 개인을 치유하려는 책도 많이 나와 있다. 그런데 당신은 한 방송에서 인문학은 희망이나 행복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인문학자마다 관점의 차이는 있다. 나는 인문학이 공동체의 삶에 대해 고민하는 거라면 그런 면에선 희망을 품기 조금 어렵다고 생각한다. 개인이라면 직장을 갖고 수입을 늘려가면서 행복할 수도 있겠지만, 전체의 행복에 대해 고민해보면 쉽게 희망을 말하긴 어렵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한 이야기다.

 

행복이란 값어치가 없는 말이라고도 했다.
행복이란 게 상당히 오용되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 행위의 목적으로 행복을 이야기할 때는 그 행복은 에우다이노미아(eudaimonia)다. 지속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우리가 쓰는 행복(happiness)하고는 다르다. 복권 당첨, 승진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남과 비교했을 때 차별적인 행복이다. 전쟁에 나갔는데 옆에 있는 병사가 화살에 맞는 게 행복이란 말이다. 자신은 안 맞았으니 속으로 기쁜 거야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그게 대놓고 만세 부를 일은 아니지 않은가. 가령 몇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취업을 하면 행복해하는데, 99명이 1명을 위해 들러리 서는 시스템을 문제라고 생각지 못하는 건 불행한 일이다.

 

 

당신은 자신을 전체주의자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지젝이 전체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적 편견을 없애기 위해 쓴 책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도 번역돼 나와 있는데. 나는 나 자신을 지식 전체주의자, 혹은 공유주의자라고 소개한다. 지식의 많고 적음이 어떤 차등적 대우의 근거가 되는 것에 반대한다. 블로그 활동도 그런 것의 일환이다. 영어로 된 콘텐츠는 인터넷상에 이미 상당히 많다. 대학마다 공개강의도 영상으로 올라와 있고. 무료로 접할 수 있는 지식 정보가 굉장히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전보다 훨씬 똑똑해질 수도 있다. 나는 그게 중요한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많이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격차가 큰 사회보다 중간이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다.

 

마지막 질문이다. 스스로 곁다리 인문학자라고 하는데 이유는 뭔가?
내가 곁다리 인문학자라고도 쓰는 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 곁에 두는(beside)의 뜻이 있다. 인문학에 발을 담그고 있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대항하다(against)의 의미다. 어깃장을 놓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는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서구 중심이다. 한 일본 학자가 말했듯 서구인이 하면 ‘인문학’, 제3세계인이 하면 ‘인류학’인 꼴이다. 서구의 시각으로 돼 있기에 제3세계의 본 생각이 반영되긴 쉽지 않다. 그리고 인문학엔 보수주의도 있다. 소위 교양주의라고 불리는 ‘나는 이만큼 알고 있는데 쟤는 잘 모르지. 그러니 내가 우월해’식의 사고다. 그래서 나는 인문학에 beside와 against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고 본다. 인문학에 대해 끊임없이 경계하고 감시하고 교정해가면서 동시에 인문학의 가능성을 확장시켜 나가는 것. 이용가치를 선용하는 게 나의 역할이다.

 

언젠가 당신이 인문학을 등쳐 먹고 인문학이 또 당신을 등쳐먹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웃음)내가 인문학 때문에 세월을 보냈으니 제 인생을 등쳐 먹은 게 맞지. 곁다리란 말엔 사실 친근감을 느낀다. 한 문학평론가가 머리말이라든가 책 표지에 있는 글 같은 걸 뭉뚱그려 곁다리 텍스트라고 한 적이 있다. 메인이 아닌 그런 텍스트에도 나름의 역할이 있다. 나 역시 메인 텍스트를 이용해 곁다리 텍스트를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도 제 몫이 있다고 본다. 지금 세상은 연구를 열심히 해서 좋은 인문서가 나와도 그 텍스트가 전파가 안 된다. 사회적 유용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소통을 위해서는 다리 역할이 필요한데 내 책도 그런 역할이다. 지젝하고 독자하고 사이에 거리감이 있으니 좀 좁히고 싶다. 가령 징검다리로 개천을 건너는데 돌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가운데 하나를 놓고 싶은 거고. 그래도 넘기 힘들면 하나 더 놓고. 그런 작업이 필요한 것 아닐까. 독자가 성장해서 컴퍼스가 길어지면 중간 돌 필요 없이 그냥 건너가면 되고.


지금 이 인터뷰도 지젝과 로쟈에 가까워지는 돌이 됐으면 좋겠다.

 

11.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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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아침에 읽은 칼럼을 옮겨놓는다. 한겨레 '고전 오디세이'가 어제는 '기독교 성인 열전'을 다루었다. 물론 오늘이 성탄절이란 걸 염두에 둔 글로 '예수를 둘러싼 서사'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엿보게 한다.

 

 

한겨레(11. 12. 24) 예수 둘러싼 거대한 서사, 부처설화까지 빌려 짜깁기

 

도마(Thomas)는 예수가 다시 살아났음을 믿을 수가 없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온몸이 축 늘어진 채 죽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한 그를 보았다고 했지만, 그 무슨 헛구역질 같은 괴담이란 말인가. 도마는 직접 봐야 믿겠다고 했다. 아, 그래? 예수는 그에게 나타났다.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하여 믿지 않는 자 되지 말고, 믿는 자 되어라.” 도마는 대답했다. “나의 주, 나의 신이시여!”(<요한복음>) 그 후 도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정경(正經)으로 공인된 성서 안에선 그의 행적을 찾을 수가 없다.

성서는 담지 않은 도마의 인도행
반면 3세기께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마행전>에는 도마가 인도로 갔다고 한다. 목수였던 도마는 인도에 가서 군다포로스 왕의 궁전을 짓는 일을 맡았는데,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건축비용을 모두 다 썼다. 왕이 궁전을 다 지었느냐고 묻자, 도마는 대답했다. ‘다 지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볼 수 없습니다. 이 땅의 삶을 떠난 후에만 볼 수 있습니다. 저는 폐하의 궁전을 하늘나라에 지었으니까요.’(이 문서는 정경에 포함되지 못했다. 도마가 예수의 쌍둥이 형제라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한편 1945년에 발견된 ‘나그함마디 문서’에는 <도마복음>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 책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은 사뭇 다르다. 인간 세계를 초월해 존재하는 신에 대한 믿음보다는 인간 안에 빛으로 깃든 신에 대한 깨달음을 강조한다. 그 깨달음만이 옛사람에서 벗어나 새사람으로 거듭나 죽음을 이겨내고 영원한 삶으로 가는 길이라는 메시지다. 왠지 반야(般若)를 통한 참나 찾기, 성불(成佛)과 해탈의 메시지와 엇비슷하다. 그래서일까? 이 책도 역시 정경 속에 포함되지 못한 채 잊혀 있었다.

11세기의 기독교 성인열전 <바를람과 요아사프>도 도마가 인도로 갔다고 한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을 땅끝까지 전하기 위해 인도를 택했다. 인도에 도착한 도마는 각종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의 풍속을 척결하고 인도를 기독교 복음의 땅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아베나르 왕은 기독교를 탄압하고 우상숭배의 종교 전통을 다시 세웠다. 아베나르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의 이름이 바로 요아사프다. 아베나르는 왕자가 기독교에 물들까봐 왕궁 안에만 머물게 하고 부족함 없이 살도록 했다. 하지만 요아사프 왕자는 풍요로움 속에서도 영혼의 허기를 느꼈다. 그는 자신을 가두고 있는 담장 너머가 궁금했다. 그런 왕자에게 아버지는 말했다. “아들아, 나는 네가 마음에 역겨움을 일으키며 기쁨을 가로막는 그 어떤 것도 보지 않기를 원한다. 난 언제나 네가 안락하고 기뻐하며 살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한단다.” 왕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아바마마, 이곳에서는 제가 기쁘게 살 수 없습니다. 짓눌려 살아가는 제겐 먹을 것과 마실 것도 쓰디씁니다. 성문 밖에 있는 것들이 보고 싶습니다. 제가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면, 바깥으로 나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왕은 안타까웠지만 왕자의 외유를 허락했다. 마침내 요아사프는 성문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다. 마치 인도의 왕자 고타마 싯다르타처럼.

성문을 나선 첫날, 요아사프는 팔다리가 잘린 나병환자와 장님을 보았다. 예쁘고 잘생긴 사람만 보고 자란 왕자의 눈에 일그러진 그들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수행원은 말했다. “저것은 인간이 겪어야만 하는 고통입니다. 몸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이 망가지고 몹쓸 액이 고이면 저런 고통을 겪게 되지요.” 며칠 후 그는 다시 성문을 나섰고, 남루한 노인이 비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수행원은 말했다. “이 사람은 아주 오랜 시간을 살아낸 사람입니다. 그의 사지에서 힘이 조금씩 빠져나가기에 비참한 고통에 이른 것입니다.” 왕자는 물었다. “그러면 그의 끝은 무엇인가?” 수행원은 다시 대답했다. “죽음입니다. 팔십에서 백세가 되면 사람들은 저런 노령에 이르게 되며, 이어 죽게 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죽음이란 사람들이 타고난 자연스러운 본성이며 피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순간 죽음은 사람들을 찾아옵니다. 그 누구도 그 매정한 방문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태어나 자라다가 이내 병들고 늙어 마침내 죽어야만 하는 것. 낙엽처럼 하릴없이 흩날리는 존재. 요아사프 왕자는 지금껏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삶의 진실에 홀연히 마주섰다. “나도 언젠가는 죽음이 휘어잡겠지? 내가 죽으면 산산이 흩어져 더 이상 이 땅에 있지 않겠지? 아니라면 또 다른 삶과 또 다른 세계가 있는가?” 요아사프 왕자는 구원을 향한 깊고 독한 허기를 느꼈다. 마치 샤카 족의 왕자로 태어나 곱게 자라다가 사문유관(四門遊觀), 즉 네 개의 성문 바깥으로 나가 생로병사라는 인생의 참모습을 보았던 고타마 싯다르타처럼. 미칠 것만 같은 구원의 갈증을 풀기 위해 출가하여 마침내 성자(muni), 즉 깨닫는 자 붓다(Buddha)가 된 샤카무니처럼. 이제 인도의 왕자 요아사프도 종교적이고 실존적인 결단의 순간에 마주섰다. 그러나 그는 집을 나가는 대신, 집으로 찾아온 기독교 수도사 바를람을 만났다. 그에게서 기독교의 가르침을 듣고 뜨거워진 요아사프는 왕자의 지위와 황제의 논리를 버리고 바깥으로 나가 구도자로서 나머지 삶을 살았다. 이렇게 인도의 ‘부처설화’는 기독교적인 교리를 입고 기독교 성인열전 <바를람과 요아사프>로 거듭났다. 인도에서 서쪽으로 간 부처가 기독교의 성인 요아사프가 된 것이다. 이름만 봐도 그 흔적이 보인다. 산스크리트어인 붓다(Buddha)는 다른 말로 보디삿뜨바(Bodhisattva, 보살)인데, 이것이 그리스어에 와서 요아사프로 바뀐 것이다.

한편 이 성인열전의 27장에 삽입된 기독교 변증론은 문헌학적으로 흥미롭다. 그것은 애초 서기 2세기께에 아테네에서 활동하던 아리스티데스의 글이었다. 스토아 철학자였던 그는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다가 결국 기독교철학자가 되었다. 그는 로마 황제가 기독교를 탄압하자 그 앞에 섰다. “고명하시며 관대하신 카이사르 티투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황제 폐하께 아테네의 철학자 마르키아누스 아리스티데스가 올립니다. 우리는 복음의 거룩한 기록에서 신의 아들이 현존하심과 그 영광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의 아들은 성령 안에서 하늘로부터 순결한 처녀를 통해 인간의 씨앗으로 더럽혀짐 없이 육체를 취하여 이 땅의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는 기독교가 유일한 진리임을 변론하고 그리스, 로마, 이집트 등 두루 퍼져 있는 온갖 다신론적인 신화가 잡스런 거짓말이라고 외쳤다. 최초의 ‘기독교 변론’으로 평가되는 이 글이 부처설화를 기독교 성인열전으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짜깁기처럼 끼어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어디 이것뿐이랴? 역사상 수많은 이야기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만들어졌고 전해지며 확대 재생산된다, 끊임없이.

도마복음, 해탈과 유사한 메시지
지금 여기 아기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온 세계가 들떠 있다. 오늘 밤, 그 절정에 이를 것이다. 왜 사람들은 예수의 탄생에 열광할까? 예수의 탄생이란 예수를 둘러싼 거대한 서사의 탄생이다. 엄청난 영향력으로 역사에 깊은 주름을 만들어 온 서사의 출발이다. 어떤 이는 이 서사를 진실로 받아들여 진지하게 살며 삶의 의미를 찾는다. 어떤 이는 친구나 연인, 가족과 즐거운 하루를 보내기 위한 이벤트 아이템으로 활용한다. 어떤 이는 이 서사를 설파하며 막대한 돈과 권력을 쥐고 대중을 교란하며, 어떤 이는 자신의 추악한 삶을 덮는 포장지로 삼아 두르고, 서사 바깥의 사람들을 악마로 정죄하며 잔혹하게 죽이는 섬뜩한 칼로 부린다. 예수를 둘러싼 거대한 서사의 탄생이 ‘서사적 존재’(homo narrans)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를 묻지 않고는 이 밤이 지나가지 않을 것만 같다.(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11. 12. 25.

 

 

P.S. 불교와 기독교의 가교로서 <도마복음>에 대해서는 오강남 교수의 <종교, 심층을 보다>(현암사, 2011), <또 다른 예수>(예담, 2009)를 참고할 수 있다. 라즈니쉬의 강의록과 김용옥의 한글역주본도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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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필요에서 인류학 관련서들을 읽고 있는데, 가령 크리스마스 이브에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을 읽는다고 하면 그리 머쓱한 일은 아닐 것이다. '기획 아이템'이라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테니까. 하지만 푸코의 <안전, 영토, 인구>(난장, 2011) 같으면 어떨까. 강의와 원고에 치여 지내느라 진득하게 붙들지 못하고 해를 넘기게 된 책인데, 장정일의 서평을 읽으며 한번 더 눈길을 주어본다. 김정일 사망으로 어수선한 남북관계를 고려하면(그는 죽어서도 이명박 정부의 수호천사 노릇을 하는군), 다시금 '규율권력'과 '통치성'에 대한 푸코의 사유에 차분히 귀를 열어도 좋겠다(이건 강의록이니까). 물론 바쁘신 분들은 아래 서평만 일독하셔도 된다... 

 

 

 

시사IN(11.12. 24) 당신은 왜 새벽 횡단보도 앞에 정차하나?

 

1970년에 발표된 강용준의 중편소설 <광인일기>의 말미에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도덕 사디즘의 창시자’로 소개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어를 배운 작가는 광복 뒤에도 일본 서적을 입수해서 읽었고, 그런 경로를 통해 푸코를 실시간으로 접했던 것 같다. 재미있는 점은 작가가 푸코의 기본 개념 가운데 하나인 ‘규율 권력’을 ‘도덕 사디즘’으로 번안한 것이다. 저 용어가 일본을 경유한 것인지 아니면 작가 자신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푸코의 규율 권력은 ‘일망감시(판옵티콘)’ 체계와 짝을 지워 설명하면 한결 이해하기 쉽다. 일망감시 체계란 감시자(간수)가 피감시자(죄수)의 밖에 있는 게 아니라 피감시자의 내부에 장착되어 있는 형국을 일컫는다. 위·간·허파처럼 감시자가 피감시자의 내부에 들어와 있는 상태란 예컨대, 자동차 운전자가 아무도 없는 새벽에 정차 신호를 받고 횡단보도 앞에 차를 멈추고 서 있는 일과 같다. 교통질서라는 명분의 도덕 확립을 통해 이와 같은 일망감시 체계가 완성되고 나면 권력은, 경찰의 수와 CCTV 설치비를 줄일 수 있게 된다. 물론 일망감시 효과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각자의 내부에 감시자를 모신 우리는, 권력이 다루기 좋은 균질한 시민이 된다.

 

강제나 무력이 아니라 피통치자들이 자발적으로 행하는 규율을 통치의 주요 수단으로 삼은 근대적 권력의 특징에, 푸코는 규율 권력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와 같은 규율 권력을 통해, 아무도 보지 않는 횡단보도 앞에 정차하고 있는 운전자들은 모범 시민으로 훈육된다. 하지만 그처럼 규범을 잘 체화한 시민들이, 푸코를 읽은 바 있는 한 눈썰미 있는 소설가의 눈에는, 갈 데 없는 도덕 사디즘의 희생자로 보였던 것이다.


상명하달되는 통치를 거부

우리나라에 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때는, 문학평론과 문화 이론에 수시로 인용되던 1990년대부터다. 그는 당시의 포스트모더니즘 열풍과 연계되면서, 대표적인 해체주의 철학자가 되었다. 그리스의 수덕주의(修德主義)에서 현대의 최종 해결책을 찾은 그를 해체주의자나 포스트모더니스트로 간주하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가 사용한 방법론이 중심·위계·기원을 의심하고 전복하는 두 사조와 흡사했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그가 애용한 ‘계보학적 방법론’이 그랬다. 그의 계보학은 권력과 한 몸인 지식 권력이 옹호하는 기원과 단일성(전체성·통일성)에 저항하면서, 지식 권력이 배제하거나 무시했던 주변 현상에 주목한다. 학술원에 의해 부적격 처리된 ‘뒷담화’를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온 계보학은 신성한 기원과 역사의 단일성에 균열을 냈다.

 

 

계보학의 위력은 푸코가 차례대로 행했던 광기·정신병원·감옥·성·비정상인에 대한 일련의 연구들로 입증됐다. 푸코는 기존 인문학이나 역사가 다루지 않았던 위와 같은 연구를 통해, 권력이란 왕과 같은 개인 인격체나 그가 불시에 행사할 수 있는 비축된 폭력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이성(정상인)과 광기(비정상인)를 구획하기도 하고 생산하기도 하는 미시적이고 편재적인 지식 효과라는 것을 밝혔다. 지식을 권력의 합목적성에 딸린 시녀로 보는 이런 생각은 지식을 신의 선물이자 인간의 위대성으로 여겨온 서구 지성사의 면면한 흐름에서는 굉장히 이질적이며, 서양의 근세를 만든 계몽주의 역사관(앎을 통해, 무지로부터 깨어남!)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런 이유에서 <데리다와 푸코,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인간사랑 펴냄, 1991년)을 쓴 마단 사럽은 푸코의 계보학을 일종의 역사 투쟁이고 지식 비판이라고 평한다.

 

어렵고 낯선 온갖 사상과 철학은 매스컴과 시간이 흐물흐물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한번 녹기 시작한 것은 어느덧 사라지기 마련이다. 규율 권력·일망감시·계보학 같은 도발적인 용어를 일반 상식으로 헌납한 푸코는(수능시험에도 나온다!), 한동안 ‘노틀’ 취급을 받았다. 그러던 그가 대처리즘(Thatcherism)의 나라에서 쏘아올린 신호탄에 따라 ‘푸코 르네상스’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가 귀환한 배경은 이렇다. 첫째, 1984년에 푸코가 죽기 전에 했던 몇 년간의 강의록이 2003년이 되어서야 프랑스에서 출간되기 시작했다. 둘째, 푸코가 말년에 제시한 ‘통치성’이라는 개념이 1990대 초반부터 퍼지기 시작한 신자유주의를 해명하는 데 요긴했다.

 

왕의 귀환에 결정적 구실을 한 책이 바로, 이만큼 장황했던 서두를 필요로 했던 <안전, 영토, 인구>이다. 이 책의 모태가 된 것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한 강의이다. 푸코는 대학에 미리 제출한 강의 제목을 ‘안전, 영토, 인구’로 했으나, 넷째 주 강의에서는 이 제목보다 “제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고, 실제로 지금 하고 싶은 것은 ‘통치성’의 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다”라고 초점을 명료히 했다. 역사 이성 밖에서 늘 기존 역사 이성과 대결했던 푸코는 이 책에서도, 권력 담지자로서의 국가나 국가 권력에 의해 상명하달되는 통치를 거부한다.


‘죽이기’ 대신 ‘죽게 내버려두기’

우리나라 사전에서 ‘통치’는 힘을 가진 사람이 지역이나 주민을 다스리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우리는 18세기에 발견된 통치성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때, 푸코가 가리키는 그것은 정치경제학과 경제적 자유주의를 동시에 뜻한다. 이전의 권력이 ‘죽게 하거나(적극적), 살게 내버려두는 것(방임)’이었다면 18세기에 생겨난 새로운 권력은, ‘살게 하고(적극적), 죽게 내버려두는 것(방임)’이다. 18세기 이전의 권력과 새로운 권력은 전자의 권력이 칼에서 나오고, 후자의 통치성이 경제에서 나오는 만큼 큰 차이가 있다.

 

2005년, 고 노무현 대통령은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라고 말했지만, 이미 18세기부터 도시들은 시장을 위해 권력의 상징인 성벽을 허물었다. 푸코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이미 18세기부터 시작되고 있었고, 오늘날 세계인이 목숨을 거는 ‘자기계발의 주체’도 그때부터 생겨났다. 이 책에서 푸코는 아무리 지우려 해도 주권자의 힘을 가정할 수밖에 없다면서, 자신이 개념화했던 일망감시 이론을 비판한다. 거기에 반해 통치성 개념에는 정치적 힘을 지닌 여하한 주권자도 없다고 정의된다. 만약 당신이 한 새벽에 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면, 그것은 고작 금지(일망감시)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보다 더 잘살기 위해서다. 일망감시는 한층 보강된 형국으로 통치성 속에 봉합됐다.(장정일_소설가)

 

11.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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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주 전 의원에 대한 대법원 유죄판결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기고를 옮겨놓는다. 박경신 교수의 시론이다.

 

 

한겨레(11. 12. 24) 정봉주 유죄판결은 법적 착시현상

 

국가가 모든 걸 통제하고 개입할 필요는 없다. 상대성이론은 국가 개입 없이 발견되었고 아이폰은 국가 지원 없이 잘 만들어졌다. 사법부가 모든 말의 진위 여부를 결정할 필요도 없다. 안기부 엑스(X)파일 검사가 실제로 떡값을 받았는지, <조선일보> 사장이 장자연의 성상납을 받았는지,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감염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지 등등 어떤 명제들은 과학적으로, 현실적으로 확인이 불가능하다. 아마도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명제인 ‘신은 존재하는가?’도 그 진위가 결정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수천년을 잘 살아왔다.

국가가 국민이 한 말이 허위라고 해서 잡아 가두거나 국가가 독점하는 기타 강제력을 행사하려면 우선 그 말이 허위임이 입증되어야 한다. 이번 정봉주 전 의원의 유죄 판결은 이 당연한 원리를 송두리째 무시한 판결이다. ‘비비케이(BBK)가 이명박 소유가 아니다’라는 입증이 없는 상황에서 정봉주 의원에게 ‘네 말이 진실이라고 입증하지 못했으니 유죄’라고 하는 판결은 전세계적으로,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판결이다.

대륙법과 영미법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에서도 진실인지 입증하지 못한 명제의 책임을 그 말을 한 사람에게 지우는 나라는 없다. 그런 논리라면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야훼의 존재를 입증하지 못한 죄로 모두 감옥에 가야 할 것이다.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입을 다물라’는 것인데 이런 규범 아래서 문명이 어떻게 발전하고 사상이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안기부 엑스파일 사건에서는 다행히도 우리 대법원이 정확하게 말했다. “안강민·홍석현·이학수가 법정에 출두해서 ‘우린 떡값을 주지도 받지도 않았다’고 증언이라도 하지 않는 한 이를 입증하지 못한 책임을 노회찬에게 지울 수 없다”고. 이 대법원 판결의 원리를 완전히 뒤집은 이번 판결은 우리나라 사법부의 수준이 얼마나 저열한지,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깊게 우리 속살을 도려내야 하는지 보여준 판결이다.

이상훈 대법관은 ‘비비케이가 이명박 소유이다’라는 명제가 허위인지를 판시하지 않고 정봉주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틀림없이 죄목은 ‘허위사실 공표’인데 허위인지를 판시하기 전에 정봉주에게 자신이 한 말의 근거가 없다고 유죄를 때렸다. 이렇게 하게 된 이유는 착시현상 때문이다. 형법 307조 1항이 진실인 경우에도 명예훼손의 성립을 인정하기 때문에, 진실이든 허위이든 어차피 유죄이니 기소 죄목에서는 ‘허위’가 위법성 요건임에도 불구하고 진위를 판정하기도 전에 말한 사람이 얼마나 근거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따진다. 피고인이 한 말의 진위를 밝힐 생각은 안 하고 ‘피고인 너 그런 말 할 자격 있느냐’를 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권력비리는 캘 수가 없다. 권력비리는 침묵과 어둠의 장막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이들은 이런 장막을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장막을 뚫고 간신히 올라오는 단서들은 당연히 ‘충분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단서들을 제시할 수조차 없다면 비리의 고발은 불가능하다.

장자연이 남긴 유언장과도 같은 문서, 안기부가 본의 아니게 남긴 엑스파일, 외국 과학자들과 언론이 광우병에 대해서 한 말, 누리꾼들이 황우석의 테라토마 사진을 보고 제기한 의혹들이 바로 그러한 단서들인데, 이 단서들을 국민들에게 공개하고 국민들의 의견을 묻는다고 해서 감옥에 가야 한다면 누가 비리 고발을 하겠는가. 정봉주도 비비케이의 소유주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이 침묵의 장막으로 차단된 상황에서 어렵게 어렵게 얻어낸 단서들을 국민들과 공유한 것뿐이다.

지금 할 일은 두 가지이다. 첫째, 전세계에서 유례가 없이 진실임에도 명예훼손 책임을 지우는 형법 307조 1항을 꼭 폐지해야 한다. 물론 이번 유죄 조항은 선거법 조항이지만, 명예훼손 논리를 대입하였음이 분명하다. 둘째, 사법개혁이다. 법관소환제도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법관이든 검사든 국민의 위임 범위 안에서 활동한다는 명제를 확실히 상기시켜줘야 한다. 국민은 누구에게도 국민의 말이 진실임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국민을 처벌할 권한을 준 적이 없다.(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1.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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