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 필요에서 인류학 관련서들을 읽고 있는데, 가령 크리스마스 이브에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을 읽는다고 하면 그리 머쓱한 일은 아닐 것이다. '기획 아이템'이라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테니까. 하지만 푸코의 <안전, 영토, 인구>(난장, 2011) 같으면 어떨까. 강의와 원고에 치여 지내느라 진득하게 붙들지 못하고 해를 넘기게 된 책인데, 장정일의 서평을 읽으며 한번 더 눈길을 주어본다. 김정일 사망으로 어수선한 남북관계를 고려하면(그는 죽어서도 이명박 정부의 수호천사 노릇을 하는군), 다시금 '규율권력'과 '통치성'에 대한 푸코의 사유에 차분히 귀를 열어도 좋겠다(이건 강의록이니까). 물론 바쁘신 분들은 아래 서평만 일독하셔도 된다... 

 

 

 

시사IN(11.12. 24) 당신은 왜 새벽 횡단보도 앞에 정차하나?

 

1970년에 발표된 강용준의 중편소설 <광인일기>의 말미에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도덕 사디즘의 창시자’로 소개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어를 배운 작가는 광복 뒤에도 일본 서적을 입수해서 읽었고, 그런 경로를 통해 푸코를 실시간으로 접했던 것 같다. 재미있는 점은 작가가 푸코의 기본 개념 가운데 하나인 ‘규율 권력’을 ‘도덕 사디즘’으로 번안한 것이다. 저 용어가 일본을 경유한 것인지 아니면 작가 자신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푸코의 규율 권력은 ‘일망감시(판옵티콘)’ 체계와 짝을 지워 설명하면 한결 이해하기 쉽다. 일망감시 체계란 감시자(간수)가 피감시자(죄수)의 밖에 있는 게 아니라 피감시자의 내부에 장착되어 있는 형국을 일컫는다. 위·간·허파처럼 감시자가 피감시자의 내부에 들어와 있는 상태란 예컨대, 자동차 운전자가 아무도 없는 새벽에 정차 신호를 받고 횡단보도 앞에 차를 멈추고 서 있는 일과 같다. 교통질서라는 명분의 도덕 확립을 통해 이와 같은 일망감시 체계가 완성되고 나면 권력은, 경찰의 수와 CCTV 설치비를 줄일 수 있게 된다. 물론 일망감시 효과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각자의 내부에 감시자를 모신 우리는, 권력이 다루기 좋은 균질한 시민이 된다.

 

강제나 무력이 아니라 피통치자들이 자발적으로 행하는 규율을 통치의 주요 수단으로 삼은 근대적 권력의 특징에, 푸코는 규율 권력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와 같은 규율 권력을 통해, 아무도 보지 않는 횡단보도 앞에 정차하고 있는 운전자들은 모범 시민으로 훈육된다. 하지만 그처럼 규범을 잘 체화한 시민들이, 푸코를 읽은 바 있는 한 눈썰미 있는 소설가의 눈에는, 갈 데 없는 도덕 사디즘의 희생자로 보였던 것이다.


상명하달되는 통치를 거부

우리나라에 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때는, 문학평론과 문화 이론에 수시로 인용되던 1990년대부터다. 그는 당시의 포스트모더니즘 열풍과 연계되면서, 대표적인 해체주의 철학자가 되었다. 그리스의 수덕주의(修德主義)에서 현대의 최종 해결책을 찾은 그를 해체주의자나 포스트모더니스트로 간주하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가 사용한 방법론이 중심·위계·기원을 의심하고 전복하는 두 사조와 흡사했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그가 애용한 ‘계보학적 방법론’이 그랬다. 그의 계보학은 권력과 한 몸인 지식 권력이 옹호하는 기원과 단일성(전체성·통일성)에 저항하면서, 지식 권력이 배제하거나 무시했던 주변 현상에 주목한다. 학술원에 의해 부적격 처리된 ‘뒷담화’를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온 계보학은 신성한 기원과 역사의 단일성에 균열을 냈다.

 

 

계보학의 위력은 푸코가 차례대로 행했던 광기·정신병원·감옥·성·비정상인에 대한 일련의 연구들로 입증됐다. 푸코는 기존 인문학이나 역사가 다루지 않았던 위와 같은 연구를 통해, 권력이란 왕과 같은 개인 인격체나 그가 불시에 행사할 수 있는 비축된 폭력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이성(정상인)과 광기(비정상인)를 구획하기도 하고 생산하기도 하는 미시적이고 편재적인 지식 효과라는 것을 밝혔다. 지식을 권력의 합목적성에 딸린 시녀로 보는 이런 생각은 지식을 신의 선물이자 인간의 위대성으로 여겨온 서구 지성사의 면면한 흐름에서는 굉장히 이질적이며, 서양의 근세를 만든 계몽주의 역사관(앎을 통해, 무지로부터 깨어남!)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런 이유에서 <데리다와 푸코,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인간사랑 펴냄, 1991년)을 쓴 마단 사럽은 푸코의 계보학을 일종의 역사 투쟁이고 지식 비판이라고 평한다.

 

어렵고 낯선 온갖 사상과 철학은 매스컴과 시간이 흐물흐물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한번 녹기 시작한 것은 어느덧 사라지기 마련이다. 규율 권력·일망감시·계보학 같은 도발적인 용어를 일반 상식으로 헌납한 푸코는(수능시험에도 나온다!), 한동안 ‘노틀’ 취급을 받았다. 그러던 그가 대처리즘(Thatcherism)의 나라에서 쏘아올린 신호탄에 따라 ‘푸코 르네상스’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가 귀환한 배경은 이렇다. 첫째, 1984년에 푸코가 죽기 전에 했던 몇 년간의 강의록이 2003년이 되어서야 프랑스에서 출간되기 시작했다. 둘째, 푸코가 말년에 제시한 ‘통치성’이라는 개념이 1990대 초반부터 퍼지기 시작한 신자유주의를 해명하는 데 요긴했다.

 

왕의 귀환에 결정적 구실을 한 책이 바로, 이만큼 장황했던 서두를 필요로 했던 <안전, 영토, 인구>이다. 이 책의 모태가 된 것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한 강의이다. 푸코는 대학에 미리 제출한 강의 제목을 ‘안전, 영토, 인구’로 했으나, 넷째 주 강의에서는 이 제목보다 “제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고, 실제로 지금 하고 싶은 것은 ‘통치성’의 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다”라고 초점을 명료히 했다. 역사 이성 밖에서 늘 기존 역사 이성과 대결했던 푸코는 이 책에서도, 권력 담지자로서의 국가나 국가 권력에 의해 상명하달되는 통치를 거부한다.


‘죽이기’ 대신 ‘죽게 내버려두기’

우리나라 사전에서 ‘통치’는 힘을 가진 사람이 지역이나 주민을 다스리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우리는 18세기에 발견된 통치성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때, 푸코가 가리키는 그것은 정치경제학과 경제적 자유주의를 동시에 뜻한다. 이전의 권력이 ‘죽게 하거나(적극적), 살게 내버려두는 것(방임)’이었다면 18세기에 생겨난 새로운 권력은, ‘살게 하고(적극적), 죽게 내버려두는 것(방임)’이다. 18세기 이전의 권력과 새로운 권력은 전자의 권력이 칼에서 나오고, 후자의 통치성이 경제에서 나오는 만큼 큰 차이가 있다.

 

2005년, 고 노무현 대통령은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라고 말했지만, 이미 18세기부터 도시들은 시장을 위해 권력의 상징인 성벽을 허물었다. 푸코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이미 18세기부터 시작되고 있었고, 오늘날 세계인이 목숨을 거는 ‘자기계발의 주체’도 그때부터 생겨났다. 이 책에서 푸코는 아무리 지우려 해도 주권자의 힘을 가정할 수밖에 없다면서, 자신이 개념화했던 일망감시 이론을 비판한다. 거기에 반해 통치성 개념에는 정치적 힘을 지닌 여하한 주권자도 없다고 정의된다. 만약 당신이 한 새벽에 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면, 그것은 고작 금지(일망감시)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보다 더 잘살기 위해서다. 일망감시는 한층 보강된 형국으로 통치성 속에 봉합됐다.(장정일_소설가)

 

11.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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