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5주기를 앞두고 관련서들이 출간되고 있다(딱 한달 남겨놓고 있다). <그가 그립다>(생각의길, 2014)와 <기록>(책담, 2014) 등이 거기에 속한다. 넓게 보면 최근에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전 청와대 연설비서관 강원국의 <대통령의 글쓰기>(메디치미디어, 2014)도 관련서로 분류할 수 있겠다. 지난해에 나온 책 두 권과 같이 묶어서 리스트로 만들어놓는다.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그가 그립다- 스물두 가지 빛깔로 그려낸 희망의 미학
유시민.조국.신경림 외 지음 / 생각의길 / 2014년 5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14년 04월 23일에 저장

기록- 윤태영 비서관이 전하는 노무현 대통령 이야기
윤태영 지음, 노무현재단 기획 / 책담 / 2014년 4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14년 04월 23일에 저장

대통령의 글쓰기
강원국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2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2014년 04월 23일에 저장
구판절판
바람이 불면 당신인 줄 알겠습니다
이동형 지음 / 왕의서재 / 2013년 5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2014년 04월 23일에 저장
절판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요즘 우리의 상황과도 너무나 잘 맞아떨어지는 제목의 책을 '이주의 발견'으로 고른다. 마이클 페럴먼(페렐먼)의 <무엇이 우리를 무능하게 만드는가>(어바웃어북, 2014). 같은 저자의 책으로 <기업권력의 시대>(난장이, 2009)가 나온 바 있는데, 앞으로 두번째 책이 소개된 저자까지는 '이주의 발견' 대상으로 삼는다. 부제는 '일할 권리를 빼앗는 보이지 않는 수갑, 어떻게 풀 것인가?' 어떤 책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경제적 무능함’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가? 어느 날 갑자기 고용주가 어떤 이유를 들어 당신을 해고했다면 그것은 오롯이 당신 자신의 무능함 탓이라고 자본주의식 언어는 일갈한다. 경쟁이 난무하는 정글사회에서 먹잇감으로 전락한 책임을 그 무엇에도 전가시킬 수 없다는 게 자본주의식 질서이다.

 

 

여기 이 냉정한 언어와 부조리한 질서에 맞서 평생을 외롭게 싸워온 노학자가 있다. 노학자는 ‘노동자의 삶’에 초점을 맞춰 자본주의의 모순을 끄집어냄으로써, 끊임없이 이어지는 실업과 가난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이 자신의 무능함 때문이라는 노동자들의 자책과 세상의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저자는 캘리포니아주립대(치코) 경제학과 교수로 주로 '먼슬리 리뷰' 같은 진보저널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이와 짝이 될 만한 책으로 <무엇이 정부를 무능하게 만드는가>도 나옴직하다.

 

 

'기업권력의 시대'라고 하니까 신간 가운데 데이비드 코튼의 <경제가 성장하면 우리는 정말로 행복할까>(사이, 2014)도 눈길을 끈다. 원제는 <기업이 세계를 지배할 때>(세종서적, 1997)이고 그런 제목으로 책이 나온 적이 있는데(절판됐다), 이번에 나온 건 2판의 번역이고 출판사와 역자도 바뀌었다. 부제는 '나와 당신은 과연 성장의 과실을 공정하게 분배받고 있는가'.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이자 세계적인 성장 관리 전문가 데이비트 C. 코튼 박사의 저서. 저자는 탄탄한 이론과 현장에서 겪은 풍부한 경험과 직접 눈으로 목격한 수많은 사례를 바탕으로, 경제 성장 논리가 숨기고 있는 왜곡된 진실과 환상, 그리고 그 부작용에 대해 신랄하게 파헤쳤다. 이 책은 '경제 성장론자'들이 내세우는 기존의 이론을 뒤집는 책으로, 경제가 성장하면 자동으로 빈곤이 종식되고, 복지가 향상되고, 모두가 잘살게 될 거라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전 세계가 '경제 성장률'에 집착하게 된 그 시작이 된 사건과,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경제 성장률 측정 방식에 대한 오류, 무조건적인 경제 성장 추구가 야기하는 사회적, 경제적 재앙 등을 전 세계 수많은 나라들의 사례와 데이터를 동원해 증명하고 있다.

'성장 신화'를 깨뜨리거나 '성장 중독'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이다. 한데, 만성 질환에도 효과가 있으려는지...

 

14. 04. 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주 한겨레에 실린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독일 작가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열린책들, 2011)를 읽고 적었다. 전혜린의 유고 에세이집 제목으로도 유명한 작품이지만 현재는 번역본이 한 종밖에 나와 있지 않다. 영어본도 절판된 상황이어서 구해본 건 시사영어사에서 나온 대역본인데, 발췌본이다. 열린책들판 번역에 아쉬운 대목이 있어서 전혜린 번역의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백만사, 1980)도 도서관에서 빌려 참고했다. 전혜린본은 동민문화사(1967)판이 최초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14. 04. 21) 폐허 속 희망을 본 하인리히 뵐
 
전후 독일문학의 양심으로도 불린 하인리히 뵐의 초기 대표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53)를 읽었다. 어떤 독자에게는 전혜린의 유고 에세이집 제목으로도 친숙할지 모르겠다. 전혜린은 뵐의 작품을 유고 번역으로 남겨놓았기에 인연이 없지 않다. 법과대학에 재학중이던 전혜린이 ‘새로운 땅’ 독일로 유학을 떠난 해가 1955년이었다. 한국전쟁의 상흔을 뒤로하고 떠난 독일에서 전후문학의 기수가 쓴 ‘폐허문학’과 조우한 것이라고 할까. 
 
1952년이 시간적 배경이지만 2차 대전 패전국의 상처는 다 아물지 않았고 주인공 프레드와 캐테 보그너 부부의 삶은 여전히 고달프다. 무엇보다도 가난이 일상을 짓누르며 이웃의 편견이 고통을 배가시킨다. 가톨릭교회의 유력한 신자이자 주택위원회 회장이기도 한 집주인 프랑케 부인이 프레드가 술주정뱅이이고 캐테가 성당의 단체 행사에 적극 참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부부의 주택 신청을 거부하는 바람에 사정은 더 나빠졌다. 
 
프레드는 성당의 전화교환수로 일하지만 박봉이어서 부업으로 과외까지 병행한다. 그는 폭력을 본능적으로 혐오하지만 다섯 식구가 단칸방에 살면서 마음이 여유를 잃다 보니 사소한 일로 아이들에게 손찌검까지 한다. 그는 더 참지 못하고 두 달째 가족과 떨어져 지낸다. 아이들과 남은 캐테의 일상은 더러움과의 투쟁으로 채워진다. 장롱을 조금만 움직여도 회칠한 벽에서는 석회 덩어리가 우수수 떨어지기에 하루에도 몇 번씩 걸레질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구역질나는 현실 속에서 ‘신’이라는 단어만이 자신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여기는 캐테야말로 진정한 신자다. 캐테는 프랑케 부인과 같은 사람들이 ‘하느님 장사’를 하는 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부부라고는 하지만 한 집에 살지 않으므로 프레드와 캐테는 가끔씩 바깥에서 만나 밤을 보낸다. 값싼 호텔에라도 하룻밤 묵으려면 프레드는 여기저기 돈을 빌리러 다녀야 하는 형편이다. 이들에게 희망이 있을까. 오랜만에 만난 주말에 아내는 헤어지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말을 꺼낸다. 가난은 그렇게 부부의 사랑까지 파괴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작가 뵐은 냉정한 현실을 과장 없이 묘사하면서도 동시에 회복의 길도 제시한다. 
 
상이군인인 아버지, 바보 동생과 같이 살아가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이웃에게 친절을 베푸는 간이식당의 소녀에게서 프레드가 감동을 받았다고 하자 캐테는 자신도 그런 감동을 준 적이 있는지 묻는다. “그런 적은 없지만 내 마음을 돌린 적은 있어. 내가 아주 심하게 아플 때였지.”(열린책들) 오래전 전혜린의 번역본에서는 “당신은 내 심장을 건드리질 않고 뒤집어엎어 버렸어. 나는 그때 아주 병이 나 있었어, 그 때문에.”라고 옮긴 대목이다.
 
프레드의 나이가 썩 젊지 않았던 때였음에도 캐테는 프레드의 마음을 뒤집어엎은 전력이 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결혼한 것이기도 하다. 그때의 감정을 상기하면서 가난에 무뎌진 프레드의 열정은 다시 회복된다. 이튿날 길거리에서 어떤 여자의 모습을 보고 심장이 멎는 듯한 감동과 흥분을 느끼며 뒤쫓아 가는 게 그 증거다. 한데 놀랍게도 그 여자는 아내 캐테였다. “15년간 결혼생활을 해온 내 아내는 여전히 내게 낯선 동시에 또 무척 낯익게 생각되었다.” 이 소설이 프레드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아주 당연해 보인다. 뵐이 암울한 폐허 속에서 발견한 은총인지도 모른다. 
 
14. 04. 20.
 
P.S. 인용한 대목에 대해 좀더 자세히 적으면 보그너 부부의 대화장면을 열린책들판은 이렇게 옮겼다. 

"나도 당신 마음을 감동시킨 적이 있나요?"
"그런 적은 없지만 내 마음을 돌린 적은 있어. 내가 아주 심하게 아플 때였지. 그리 젊지 않을 때였고." 나는 말했다.(191쪽)

시사영어사에서 나온 대역판은 이렇게 옮긴 대목이다. 

"Did I also touch your heart?"
"You didn't touch my heart, you turned it upside down. It made me quite ill at the time. I wasn't young any more," I said.
"나도 당신을 감동시켰어요?"
"당신은 날 감동시킨 게 아니라 내 가슴을 발칵 뒤집어 놓았었지. 그래서 그때 난 아주 앓았었지. 이미 젊은 나이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나는 말했다. 

이 대목만큼은 시사영어사판 혹은 영어판이 열린책들판보다 더 적합한 번역으로 보인다. 오래전 전혜린본에서 '뒤집어 엎어버렸다'고 옮긴 것과도 상응하고. 독어 원문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요는 '마음을 감동시키다'보다 더 강한 표현이어야 하고, 그 결과로 프레드가 한바탕 가슴앓이를 했다는 내용이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 권의 철학서를 관심도서로 올려놓는다. 둘다 일본인 저자의 책이라는 점이 공통적인데, 나카지마 요시미치의 <철학의 교과서>(지식의날개, 2014)와 와시다 키요카즈의 <듣기의 철학>(아카넷, 2014)가 그 두 권이다. 나카지마는 구면이고 와시다는 초면이다.

 

 

나카지마 요시미치의 책은 중복도서까지 포함하면 일곱 권이 번역됐고 <철학의 교과서>만 하더라도 <일하기 싫은 당신을 위한 책>(신원문화사, 2011)과 <인생 반 내려놓기>(21세기북스, 2013)에 이어지는 것이니까 출판계에서 선호하는 저자군에 속한다. '철학의 교과서'란 제목은 오히려 식상해서 눈에 띄는데, 저자의 말로는 "이 책은 철학에 '교과서' 따위가 있을 리 없다는 이야기를 풀어내어 이해시키려는 '철학의 교과서'"라고. 역설이지만 그래서 좀더 미덥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프롤로그를 보니 저자는 대부분의 '철학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내용으로 두 가지만 꼽는다. "하나는, 철학이란 순수한 의미로 볼 때 '학문'의 영역이 아니므로 그 책을 집필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세계관이나 현실적 감각이 녹아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세상에 넘쳐나는 철학 입문서들은 하나같이 철학을 너무도 무해하고 품행방정하며 훌륭한 것으로 과대 포장하고 있다는 점". 저자의 생각은 이렇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철학이란 약간을 병적이고, 흉포하고, 위험천만하며, 반사회적 성향이 강한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왜 죄악인가? 인류가 우주에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나는 결국 죽는다... 등등의 한탄과 독백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질적 물음에 고통받고 끌려다니며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힘겨워하던 사람이, 물귀신처럼 다른 사람을 그 개미지옥에 끌어들이려는 속셈으로 써내려간 이 책이야말로 진짜 철학의 '교과서'가 아닐까요?

그런 생각에 동감하는 독자라면 모처럼 친구 혹은 원군을 얻은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겠다.

 

 

 

<듣기의 철학>은 <철학의 교과서>에 비하면 조금더 '전문적'이란 인상을 준다. 전공이 논리학이라고 소개되지만 <얼굴의 현상학>, <현상학의 시선> 등의 저작을 갖고 있다는 와시다는 현상학 쪽의 전문가로 보인다. '듣기의 철학'이란 문제의식도 '현상학적'이고. 거기에 교육에 대한 관심도 얹어진다. 학생들에게 질문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는 것. 저자의 문제의식에 대한 소개는 이렇다.

저자는 ‘듣기’가 타자의 말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며, 동시에 말하는 이에게 자기이해의 장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 그 행위에서 어떤 힘을 느낀다고 덧붙인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가 ‘산파술’, 또는 ‘시중드는 사람’이라 불렀던 그 힘을 말이다. 저자는 ‘듣기’라는 행위가 가진 철학적 힘을 밝히고자 다양한 시도를 한다. 그리고 철학이 복원해야 할 것이 이렇게 귀를 여는 것이라 이야기한다. 고통받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위안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누군가’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의 시작과 끝을 다른 사람과 함께한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함께 있다는 사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듣기의 철학은 이것을 일깨우는 것이다. 말을 줄이고 겸허한 마음으로 타자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마음이다.

리쾨르 전문가이기도 한 현상학자 돈 아이디의 <소리의 현상학>(예전사, 2010)이 떠오르는데, 맥락은 좀 다르지만 듣기는 청각과 관련되는 만큼 연관성이 없지도 않겠다(아이디의 책은 <테크놀로지의 몸>(텍스트, 2013)도 소개돼 있다. 기술과 신체 등도 현상학 쪽 철학자들의 주요 관심사다). <소리의 현상학>은 벌써 절판됐군... 

 

14. 04. 20.

 

 

 

P.S. 철학분야의 책으로 지난달에 미처 언급하지 못한 관심도서는 로이 브랜드의 <지식애>(책읽은수요일, 2014)다. "소크라테스에서 데리다까지 허무와 냉소를 지식에 대한 사랑, 즉 지식애를 통해 극복해온 철학자 6인의 삶과 철학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담은 책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소크라테스의 변명>(<변론>)과 <향연>, 스피노자의 <윤리학>,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니체의 <도덕의 계보>, 푸코의 <성의 역사>, 그리고 데리다의 <나는 여기에 있다>까지가 저자가 다루는 텍스트들이다. 봄날의 철학적 산책에 가장 어울릴 만한 동반자.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의 추천사도 참고할 만하다.

격조 높은 책이다. 왜 모든 인간이 결핍을 느끼는지, 왜 지식에 대한 열정을 지녀야 하는지와 같은 오래된 철학적 질문을 우리들의 삶의 문제로 끌어들인다. 당신이 아직 철학을 사랑해본 적이 없다면, 아마도 이 책을 읽는 동안 철학과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주 중앙선데이에 실은 '로쟈의 문학을 낳은 문학'을 옮겨놓는다. 보르헤스의 단편 '페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를 조명하는 글이다. 당연히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없었다면 쓰이지 못했을 작품. 그렇지만 보르헤스는 또 보르헤스식의 기상천외한 단편을 썼다. 문학 독자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작품이지만, 생소한 독자들도 있을 듯하여 이 연재에서 다뤘다.

 

 

 

중앙선데이(14. 04. 20) 다시 쓰기는 베끼기인가 창조인가

 

보르헤스의 미학이 가장 압축적으로 제시된 작품은 『픽션들』에 수록된 단편소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1939)다. 『돈키호테』의 저자는 세르반테스 아니냐고? 물론이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또 다른 저자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가 우리에게 안내하는 이야기의 미궁은 어떤 것인가. ‘메나르의 진정한 친구들’의 일원임을 자임하는 소설의 화자는 메나르가 남긴 작품들의 목록을 정리하면서 유작들 가운데 특별히 『돈키호테』를 자세히 언급한다.

화자가 ‘우리 시대에서 가장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칭찬하고 있는 메나르의 『돈키호테』는 세르반테스가 쓴 『돈키호테』의 “1권 9장과 38장, 그리고 22장 일부”로 구성돼 있다. 세르반테스의 걸작에 대한 ‘다시 쓰기’를 시도한 것인가? 놀랍게도 메나르의 기획은 현대판 『돈키호테』를 쓰는 게 아니라(“그것은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돈키호테』자체를 쓰는 것이었다.

가령 『돈키호테』 9장에서 세르반테스는 “역사는 ‘진실’의 어머니이자 시간의 적이며, 행위들의 창고이자 과거의 증인이며, 현재에 대한 표본이자 조언자이고, 미래에 대한 상담자다”라고 썼다. 보르헤스의 화자에 따르면 이것은 17세기 작가가 쓴, 역사에 대한 단순한 수사적 찬양에 불과하다. 이것을 메나르는 “역사는 ‘진실’의 어머니이자 시간의 적이며, 행위들의 창고이자 과거의 증인이며, 현재에 대한 표본이자 조언자이고, 미래에 대한 상담자다”라고 다시 쓴다. 똑같은 거 아니냐고? 맞다, 똑같다. 그런데 다르다.

텍스트 차원에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메나르의 『돈키호테』 사이에는 아무 차이도 없지만, 그것을 쓰는 행위에서는 두 작품 간에 차이를 빚어낸다. 문체를 예로 들자면, 자기 시대의 스페인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했던 세르반테스와 달리 20세기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메나르에게 17세기 스페인어 문장은 고어체인 데다 다소 부자연스럽기까지 하다. 결과적으로 동일한 텍스트라 하더라도 그 텍스트를 읽는 지평이 달라짐에 따라 작품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메나르는 자신의 ‘자상한 선구자’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쓴 것은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세르반테스는 익숙한 언어와 타성적인 상상에 이끌려 약간 마구잡이로 그 불멸의 작품을 써 내려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메나르 자신은 이 우발적인 작품을 문자 그대로 다시 쓰는 ‘신비로운 의무’를 수행했다. 그렇게 새롭게 쓰인 『돈키호테』에 대해 ‘명민하지 못한’ 독자들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글자 그대로 옮겨졌다’라고 우길 테지만, 화자의 생각은 다르다. “피에르 메나르의 작품은 세르반테스의 작품보다 거의 무한할 정도로 풍요롭다. 그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더 ‘모호’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모호성은 풍요로움이다.”

 



이렇게 보르헤스는 피에르 메나르라는 가상의 인물을 『돈키호테』의 또 다른 저자로 창조해 낸다. 이것은 보르헤스의 창작 방법에 친숙한 독자라면 전형적인 ‘수작’임을 눈치챌 수 있다. 존재하지 않는 작가와 소설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논평하는 것이 보르헤스의 장기이니 말이다. “메나르는 (아마 자기도 모르게) 새로운 기법-계획적인 시대착오와 잘못된 원저자 설정-을 통해 꼼꼼하게 흔적을 남기는 기술인 독서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저자는 마치 신처럼 작품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간주돼 왔지만, 정작 작품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독서라면 저자는 한갓 기능으로 전락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구호는 그렇게 해서 탄생한다. 그리고 보르헤스는 그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그런데 ‘다시 쓰기’ 전략을 통해 저자와 텍스트의 관계를 유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세르반테스야말로 원조가 아닐까?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자신이 직접 지은 것이 아니라 아라비아의 역사학자 베닝헬리가 쓴 글을 각색한 작품이라고 했다. “이 텍스트의 진실성 여부에 대해 굳이 문제를 삼자면 아마도 작가가 아라비아 사람이라는 게 문제일 것이다. 아라비아인들은 천성적으로 거짓말을 잘하기 때문이다. (…) 이 이야기에서 유익한 것이 빠져 있다면 주제의 문제가 아니라 알량한 작자에 의해 기술된 탓이라고 생각한다.” 베닝헬리는 물론 세르반테스가 창조한 가공의 인물이다. 화자에 따르면 베닝헬리의 ‘원작’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아라비아어 원문을 스페인어로 옮긴 무명의 번역자도 중간에 끼게 되기에 이 작품의 ‘저자’는 여럿이 된다.

보르헤스는 비록 세르반테스처럼 방대한 분량의 장편소설을 쓸 생각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문학적 유희 정신을 충실히 계승한 상속자다. 그는 유명한 자전적 산문의 제목을 ‘보르헤스와 나’라고 붙였는데, 세르반테스 역시 ‘세르반테스와 나’라는 글을 남겼다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겠다. 세르반테스야말로 작가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그런 가면을 쓰고서 연기할 줄 아는 작가였기 때문이다.

 

14. 04. 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