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에 교수신문 지면에서 벌어진 촘스키 논쟁을 옮겨놓는다. 소쉬르 전공자인 김성도 교수의 촘스키 비판에 대해서 촘스키 전공자인 장영준 교수가 반박하면서 논쟁이 오고갔다. 개인적으론 논쟁의 내용보다는 스타일에 관심이 있어서 읽어보게 된 글들이다. 자료 삼아 모아놓는다.   

교수신문(06. 06. 05) 학문비평 : 촘스키 혁명의 진정성을 묻는다

언어학 및 인지 과학 분야에서 촘스키 혁명의 실체에 대한 비판의 매스를 가하는 작업은 아직도 시기상조인 것으로 보인다. 촘스키라는 지성의 아우라가 여전히 심오하고 그가 쌓아올린 상징권력의 보루가 요새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언어 이론을 한 때의 유행이나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치부하는 사람들은 촘스키의 언어학 혁명이란 것이 도대체 존재한 적이 있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72년 ‘촘스키 혁명’을 외쳤던 언어철학자 존 썰(J. Searl)은 2002년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서평 논문에서 촘스키 혁명의 애초의 목적은 변질되고 포기되었다는 점에서 실패한 혁명이라는 진단을 내린바 있다.

지난 30여년 동안 지식 사회학자(Murray), 언어학사가(Koerner), 과학 철학자(Itkonen), 언어 철학자(Katz), 이론 언어학자(Botha) 등 촘스키 언어학 혁명의 역사적, 인식론적 토대에 대한 다양한 시각의 비판적 연구가 전개되었으나, 문제는 정작 이같은 비판에 귀를 기울이고 생산적 대화를 촉진시켜야 할 촘스키와 그의 추종자들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였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지식 사회학의 관점에서 촘스키 패러다임의 성공 요인은 그의 언어학 이론의 내재적 설명력과 과학적 우월성에 기인하기보다는 당시 언어학의 급속한 제도적 팽창, 재정지원, 생성 언어학 학술지의 창간 및 편집권 독점 등 외적 요인도 큰 몫을 차지하였음을 실증적으로 밝혀내었고, 과학 철학의 시각에서는 촘스키가 주장한 언어학의 자연과학적 경험성이 근거가 없다는 점을 꾸준히 제기해왔다.



촘스키 언어학은 ‘셀프 프로모션 마케팅’ 결과?
촘스키는 생성문법이라는 새로운 언어학 패러다임을 제시하면서 인지과학의 혁명을 주도한 장본인이자, 맹렬한 정치 평론가와 사회운동가로서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닌다(그는 마침내 내년도에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내년이면 '작년'이었는데, 한국 방문이 무산된 모양이다). 하지만 촘스키에 대한 이같은 중간적 평가를 기축으로 그의 언어학에서의 업적에 대해서 국한시켜보더라도, 지극히 폄훼적인 입장에서 가장 예찬적인 담론에 이르기까지 촘스키 언어 사상의 평가는 다양한 평가의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비교적 객관적 자료에 기초하여 서술하고 있는 최근의 부정적 평가에 따르면, 언어학 분야에서의 촘스키의 업적은 희소하고 위대한 창조적 정신의 업적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상아탑의 ‘해킹’의 생산물로 치부된다. 즉, 그가 누리는 과도한 평판과 명성은 인간의 이해에 대한 의미심장한 공헌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약간의 셀프 프로모션 마케팅과 기존의 언어 이론에 대한 비방의 남용,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의 학문적 발견물의 침소봉대 또는 날조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라는 독설이 가해진다.

실제로 그가 현대 언어학의 판도를 변화시키면서 촘스키의 혁명이라는 공표가 발설된 지 올해로 정확히 반세기가 흘렀는데, 이 기간 동안 다른 학문 분야에서는 엄청난 진보가 이루어졌다. 과학의 발전으로 우주 탐사를, 컴퓨터의 발명을 통한 정보 혁명을 경험하였다. 흔히, 열성 촘스키주의자들이 비교 대상으로 삼는 아인슈타인은 실제로 그의 물리학 이론을 통해서 수많은 물리적 현상을 설명할 수 있었으며, 실생활의 변화를 초래했다.

반면, 촘스키 언어학에서 성취된 결과물은 그에 비하면 너무나 하찮은 것일 뿐만 아니라, 과학사의 의미에서 진정한 독창적 패러다임이라고 보기도 힘들다는 것이 부정적 평가의 시각이다. 하지만 보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의 이론적 정당성과 과학적 타당성이 입증되기도 전에, 그는 절대 다수의 언어학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론적 토대에 기초하여 생성 언어학이라는 동일한 연구 프로그램을 수행하도록 직간접적으로 자극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지식 사회학적 관점에서 지난 50년 동안 단일 인물이 한 학문 분야의 지적 생산 방식을 독점한 것을 현대 언어학의 큰 손실로 보기도 한다. 실제로 ‘Beyond Chomsky’라는 웹 사이트에서 이런 글을 읽을 수 있다. “우리가 오늘날 언어의 본질과 기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직면한 주요 장벽은 촘스키 패러다임의 지나친 형식주의적, 반경험적, 반역사적 영향이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촘스키 이론의 진화는 정확히 10년을 주기로 새로운 이론들이 창발되는 행태를 보여주었다. 10년마다 종합된 새로운 연구 프로그램을 발표하고 거의 종교적 신앙을 연상시킬 정도의 맹목성에 기대어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와 추진력으로 세계 언어학계에 자신의 이론을 유포 확산시켜왔다. 하지만 이 과정은 거의 예외 없이 극도의 복잡화와 추상화를 보여주고, 이어서 모순이 동반되고, 작은 과학적 ‘아노말리’와 파란들을 일으키면서 다시 해명에 나서고 침체기로 접어드는 패턴을 반복하였다.

특히, 언어를 포함하는 인간의 행동 양식과 정신 활동의 모든 양상들에 대해서 그가 시종일관 적용하는 생물학적 결정주의는 언어와 관련된 일체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차원들을 주변화하거나 아예 소거한다는 점에서 언어학을 포함하는 인문과학에 부적절한 토대이다. 인간 언어가 내재적, 심리적 차원과 더불어 외재적이며 문화적 양상들을 엄연히 갖고 있다는 보편적 사실과 어긋나서, 촘스키 전통의 현대 언어학은 주로 내재적 차원(I-language)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생물학적 언어학의 시각에 따르면, 생성 문법은 ‘언어 기관’의 추상적 기술로서 간주되고, 인간 정신과 두뇌는 일정 수준에서 동일할 수밖에 없으며, 이 같은 이유에서 촘스키와 그의 추종자들의 공식에서는 정신/두뇌와 같은 표기법이 사용된다.

“생물학적 결정론을 향해 돌진”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는 특정 문법 현상의 보편성을 찾아내어, 인간의 두뇌가 특정한 문법적 구조를 선호한다는 증거로 삼는다. 그것이 바로 그의 유명한 가설, 보편 문법은 생득적이라는 것과 인간들은 문법에 대해서 생물학적으로 ‘하드와이어’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언어 능력의 생물학적 토대를 대중들에게 유포시킨 사람은 그의 추종자이며 베스트셀러 심리학자인 핑커이다(주저 ‘언어 본능’에서 보편 언어의 생물학적 토대를 강조하기 위해서 워프와 사피어의 언어 상대성 가설을 무력화시키는 논증 과정을 살펴보면서, 진정 이들 언어학자들의 문화 수준과 지적 양심에 강한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생물언어학적 시각에서 궁극적으로 I-언어의 연구는, 최소한 원칙적으로 자연과학과 더불어 통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자연주의적 환원주의는 물리적 현실에 대한 이론들과, 우리의 정신적 능력들에 대한 이론들을 통일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물리과학과 인지과학의 완전한 통일은 여전히 금시초문이며 언어와 인지에 대한 일방적 자연주의는 도그마적 일원주의의 형식이며 증명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입장일 뿐이다. 그래서 과학 철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촘스키 언어학이 물리학과 생물학과 같은 진짜 과학이었다면 과학적 성과의 미비로 이미 수 십 년 전에 재정적 지원을 상실하였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미 실패한 이론, 대중에게 팔아먹어
중반기까지 촘스키 언어 이론의 추종자였던 레빈과 포스탈은 2004년 발표한 ‘타락한 언어학’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의 글에서 촘스키의 부풀려진 기대와 희망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그들에 따르면 촘스키의 업적 위에 쌓아올려진 저속한 찬양은 빈번하게 그의 초기 활동에서 이루어진 주장과 약속에 대한 비언어학자들의 무비판적 수용에 의해서 추동된 것이라는 것이다. 촘스키의 대부분의 주장들은 그릇되거나,  과학적 검증이 될 수 없거나, 아니면 그의 기대와 약속들은 전혀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 불과하다고 몰아붙였다. 이들 언어학자들이 제시하는 구체적인 예들과 에피소드들을 명시할 수 없지만, 학문적 진리 탐구 규준에 대한 무시, 자기 선전, 비판자들에 대한 무지막지한 언어 남용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촘스키의 비양심적 속임수 가운데서 최악의 것은 이미 실패한 이론을 마치 천재적인 발견인 것처럼 판별 능력이 없는 비언어학 청중들에게 열심히 팔아 넘겼다는 것이다. 또한 최근의 촘스키 계열의 언어학은 물리학의 용어를 빌려와 동사와 형용사의 행동 양식을 설명하기 위한 시도 속에서, ‘가벼운’, ‘무거운’ 문장 또는 ‘약한’, ‘강한’ 유인력 따위의 술어들을 사용하여 언어학의 과학성을 과시하려 한다. 이같은 제스처는 촘스키가 노출하는 또 다른 위선이다.

결국 필자가 이 짧은 글을 통해서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물음이다. 학문적으로 윤리적으로 결정적 문제점을 노출한 이력의 소유자이면서도 너무나 과도한 지적 영향력을 행사해 온 인물에 대해서 그에 상응하는 정당한 비판을 회피해왔다는 점에서 이제 한국 학계에서도 맹목적 찬양이 아닌 균형 잡힌 평가를 준비할 계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촘스키 혁명이라는 신화가 기정사실로 고착화되기 전에 말이다.(김성도 고려대교수)

교수신문(06. 07. 02) "촘스키의 보편문법, 생물학적 증거 있다”

촘스키 혁명에 대한 김성도 교수의 비판(교수신문 제401호)에 대해 장영준 중앙대 교수가 반론을 제기했다. 김성도 교수는 촘스키 언어학이 과학사의 차원에서 독창적 패러다임이 아닌데다가, 촘스키의 생물학적 결정주의는 일체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차원들을 주변화하거나 소거해 인문과학에 부적절한 토대이고, 자연주의적 환원주의는 도그마적 일원주의의 형식이며 증명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입장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이러한 주장과 함께 촘스키에 대한 맹목적 찬양에서 벗어나 균형잡힌 평가를 제안하고 있다. 이에 장영준 중앙대 교수의 글과 그에 대한 김성도 교수의 답변을 함께 싣는다.(편집자주)

어떤 강연회에서 촘스키는 자신을 “생존하는 가장 중요한 지식인”이라고 소개하는 사회자의 말에 대해 매스미디어를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촘스키는 자신에 대해 이러한 평가를 내린 뉴욕타임즈가 바로 같은 글에서 “그가 근거 없는 주장들을 일삼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어떤 부분을 인용하는가에 따라 한 인간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타당성 있는 지적으로 성찰 계기돼
촘스키 혁명의 진정성을 묻는 김성도 교수의 글은 타당한 측면이 있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성찰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참으로 반가운 글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글을 대하면서 떠오르는 첫 생각은 모든 언론의 본질적 위험에 대한 촘스키의 지적이 역시 일리있다는 것이다. 제목으로 뽑은 “침소봉대와 날조”, “비언어학자의 무비판적 수용”만 보면, 촘스키는 “학문적으로, 윤리적으로 결정적 문제점을 노출한 이력의 소유자”임이 틀림없다. 짧은 글이기 때문에 그러한 판단의 근거들을 김 교수가 낱낱이, 충분히 밝힐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날조”가 있었다면 이미 윤리적 차원을 떠나 실정법적 문제까지 초래되었을 것임은 명백하다. 매우 격렬한 단어들이 ‘남용’되었다는 소회와 더불어, 김 교수의 비판이 떠올리는 몇 가지 문제들을 생각해보자.

첫째, 촘스키 언어학은 ‘셀프 프로모션 마케팅’의 결과인가. 김 교수는 촘스키 패러다임의 성공 요인이 “그의 언어학 이론의 내재적 설명력과 과학적 우월성에 기인하기보다는 당시 언어학의 급속한 제도적 팽창, 재정지원, 생성 언어학 학술지의 창간 및 편집권 독점 등 외적 요인도 큰 몫을 차지”하였다는 평가를 인용한다. 촘스키 언어학의 전 세계적 파급과 영향력을 외적 요인의 결과로 보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이론의 우월성과 생명력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의 언어학이 전 세계적으로 팽창하고, 재정지원을 받고, 학술지들이 대거 창간될 수 있었겠는가. 김 교수는 또 “언어학 분야에서의 촘스키의 업적은 희소하고 위대한 창조적 정신의 업적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상아탑의 ‘해킹’의 생산물로 … (중략) … 기존의 언어 이론에 대한 비방의 남용,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의 학문적 발견물의 침소봉대 또는 날조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라는 독설을 인용한다.

이것은 한 마디로 독설이자 한 자연인에 대한 ‘독살’이다. 이러한 독설은 전적으로 촘스키 언어학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판관의 실수로 보여진다. 잘 알려졌다시피, 촘스키는 기존의 언어이론 자체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그런 점에서는 그는 매우 독선적이고 오만하다). 때문에 기존의 언어이론에 대한 ‘비방의 남용’이란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연구가 데카르트, 훔볼트, 예스페르센, 전통문법 등의 연구성과들에 그 모태를 두고 젖줄을 대고 있음을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현대 언어학의 판도를 바꾼 지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그는 수많은 당대의 반대자들로부터 제기되는 비판을 수용하면서 이론을 보강해왔다. 비판자들과 생산적 대화를 게을리 했다는 김 교수의 말은 일면 수긍할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사실이 아니다.

둘째, 김 교수는 촘스키 언어학이 꽃피어온 지난 반세기 동안 다른 학문 분야에서는 엄청난 진보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가령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물리학 이론을 통해서 수많은 물리적 현상을 설명했을 뿐 아니라 실생활의 변화를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맞는 말이다. 실용인문학을 추구하는 김 교수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평가에 동의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실생활의 변화’를 초래하는 학문이 훌륭한 학문이라는 의미는 물론 아닐 것이다. 언어학과 같은 연성과학(soft science)과 물리학 등의 경성과학(hard science)의 유용성을 비교하는 것은 아무래도 촘스키 언어학 자체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사하로프의 물리학 이론이 수소폭탄으로 이어지며 엄청난 실생활의 변화를 초래했을 때 우리가 그를 훌륭한 학자로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셋째, 촘스키 언어학의 이론 내적인 문제에 대한 김 교수의 지적을 보자. 그는 촘스키의 이론이 “거의 예외 없이 극도의 복잡화와 추상화를 보여주고, 이어서 모순이 동반되고, 작은 과학적 ‘아노말리’와 파란들을 일으키면서 다시 해명에 나서고 침체기로 접어드는 패턴을 반복하였다”고 말한다. 역시 맞는 말이다. 그러나 복잡화와 추상화가 이론의 약점인가? 옳은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옳은 것은 옳은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물리법칙들은 그쪽 분야 사람들에게 너무나 명료하고 간단할지 모르지만 범인들에게는 너무나 복잡하고 추상적일 것이다. 문제는 촘스키의 이론이 옳은 것인가 아닌가에 있지 복잡하냐, 추상적이냐에 있지 않다. 이 점은 김 교수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복잡화와 추상화가 이론의 약점인가?
넷째, 김 교수는 촘스키 언어학이 시종일관 생물학적 결정주의에 빠져 “언어와 관련된 일체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차원들을 주변화하거나 아예 소거한다”고 지적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 뿐 아니라 촘스키 자신도 동의하는 것이다. 이에 관해 촘스키는 언어를 내재언어와 외재언어로 구분하여, 자신의 연구가 내재언어를 대상으로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리하여 촘스키에게 있어서 내재언어의 연구는 한 개인에 국한되는 ‘언어기관’의 연구이고 정신/두뇌의 연구이다. 언어학이 인지과학이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언어자료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전통적, 고전적 의미에서의 언어학자들로 하여금 생성문법이 더 이상 언어학이기를 포기했다고 비판하게 만드는 지점도 바로 여기이다. 언어학이 생물학으로 환원 내지 포섭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코퍼스 언어학이 주목을 끌게 된 것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도 보인다.

다섯째, 김 교수는 촘스키 언어학이 “생물학적 결정론을 향해 돌진”했다고 지적한다. 같은 맥락에서 생물언어학(bio-linguistics)이란 용어가 회자된 지도 꽤 오래 되었다. 보편문법은 생득적이라는 주장, 인간의 문법은 생물학적으로 ‘하드와이어’되어 있다는 주장은 촘스키 언어학의 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주장의 검증을 위해 많은 심리학자, 생물학자, 언어습득학자들이 노력을 기울여온 결과, 일부는 근거를 얻은 것으로 보이고 일부는 실패한 가설로 폐기되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촘스키의 언어학은 기존의 어떠한 이론보다도 강력한 학문적 역동성(dynamism)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각론에 대한 정밀한 검증 필요
마지막으로 촘스키가 “이미 실패한 이론을 대중에게 팔아먹었다”는 김 교수의 비판을 살펴보자. 서두에 언급된 존 썰(Searle)의 비판을 촘스키 혹은 그의 ‘추종자’들이 개의치 않는, 혹은 무시하는 듯한, 이유는 자명하다. 도대체 촘스키의 어떤 이론이 실패했다는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 교수에 의하면 포스탈(Postal)은 2004년 발표한 ‘타락한 언어학’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의 글에서 촘스키의 부풀려진 기대와 희망을 맹렬하게 비판했다고 하지만, 막상 그는 여전히 생성문법의 틀 안에서 논문들을 발표하고 있다(포스탈은 1995년 이후의 촘스키 이론 모델에 대해 반대한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모르긴 몰라도 결국 그 분야의 전문가들일 것이다. 물론 전문가만이 어떤 사안에 대해 비판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김 교수가 언급한 인접 학문의 교수들이 과연 촘스키 언어학의 핵심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김 교수가 우려하고 있듯이 “비언어학자들의 무비판적 수용”이 문제의 핵심이라면 그것은 분명 반성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전 세계의 수많은 언어학자들이 “그릇되거나,  과학적 검증이 될 수 없거나” 한 촘스키의 기대와 약속들에 현혹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촘스키 자신의 말대로 그는 과학자들을 훈련시키거나 기대해왔지 추종자(followers)를 양육한 것은 아니다.

촘스키의 업적에 대한 저속한 찬양은 금물이다. 그러나 그의 이론에 대한 각론적이고 정밀한 검증이 없이 총체적으로 진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특히 “실패한 이론을 천재적 발견인 것처럼 비언어학 청중들에게 팔아넘겼다”는 공격은 얼마나 비과학적인가. 이러한 공격은 촘스키뿐만 아니라, 그가 제시한 언어학의 진정성을 지금까지 점검, 보완, 반박해온 전 세계 수많은 언어학자들을 싸잡아서 비언어학자로 몰아붙이는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총론적 비판이나 단죄에 앞서 각론적인 점검이 수행되어야 한다.

필자는 촘스키가 “학문적, 윤리적으로 결정적 문제점을 노출한 이력의 소유자”란 평가에 결코 동의할 수 없지만, 전대미문의 어마어마한 지적 영향력을 행사해 온 한 인물에 대해서 이제 “맹목적 찬양이 아닌 균형 잡힌 평가”를 해야 한다는 김 교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좀 더 구체적인 논쟁이 양산되기를 기대한다.(장영준 중앙대 교수)

교수신문(06. 07. 02) “구체적 증거 보여달라” … 비판적 언어학 수용사 필요

장영준 교수의 반론을 읽고 난 후 필자의 비평이 최소한 절반은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 교수는 필자가 제기한 촘스키 언어 사상의 균형 잡힌 평가의 필요성을 수긍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평소 존경하던 국내 촘스키 언어학 이론의 권위자 가운데 한 분인 장 교수가 자신이 수십년 동안 꾸준하게 연구해온 이론적 패러다임의 창시자에 대한 다소 자극적인 수사와 가파른 언어에  대해서 비교적 차분하게 반박 논리를 전개해준 것에 대해서 감사한다.

하지만 그 짧은 글을 통해서 필자가 궁긍적으로 던진 물음의 본질은 거의 전혀 감지되지 못했고, 대부분의 문제 제기는 필자가 사용한 표현들에 함몰되어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실상, 장 교수가 강조 표시를 하면서 심기가 불편함을 드러낸  자극적 독설들은 필자의 것이 아닌, 反촘스키 진영에서 피력된 표현들이다. 더구나 이같이 거친 표현들을 사용한 학자들은 촘스키 언어학을 수십년 동안 추종하고 전파했던 그의 직계 제자들이었다.

“비판의 본질 접수되지 않아 아쉽다”
필자는 다만, 지금까지 예찬 일변도나 백과사전식 상투어들을 지양하고, 기존의 찬동 일변도의 태도에 경종을 울리고 보다 균형 잡힌 시각의 필요성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논증 전략의 차원에서 그같은 반대 주장을 先텍스트로서 사용했을 뿐이다. 촘스키가 어떤 절대적 신화가 아닌 이상, 그가 지난 50년 동안 받아온 온갖 찬양과 흠모의 수사에 못지않게, 그의 학문적 성취의 진정성과 의미에 대한 비판적 태도와 논의는 원칙적으로 장려되어야 할 것이다. 

독자들의 따분함을 피하기 위해서 필자는 장 교수가 반론으로 제시한 사항들에 대해서 조목조목 역반박을 가하는 수순을 밟는 대신 장 교수가 제기한 내용을 재해석하고 이어서 이 짧은 지면에서 필자가 제기하려 했던 본질적 문제를 다시 환기시킬 생각이다.

먼저 장 교수는 물론, 독자들에게 분명히 할 것이 있다. 장 교수의 비평을 보면, 필자가 反촘스키 진영에 서서 그의 지적 성취의 모든 것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려는 것처럼 비춰질 소지가 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필자가 처음 언어학을 접한 80년대 초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도 촘스키는 필자를 포함한 모든 언어학자들에게 넘어야 할 높은 산이요, ‘문제’ 그 자체이다. 아울러 그가 20세기의 인지과학 혁명을 촉발시킨 사유의 원천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정한다. 기실, 그가 제기한 세 가지 언어학의 과제, 언어의 기원, 언어 능력, 그리고 언어의 사용은 언어 연구의 본령이요, 정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현대 언어학의 창립자이자 문화과학의 패러다임을 창발시킨 소쉬르가 제시했던 언어학의 3대 과제인 언어의 관찰과 기술, 일반 법칙 추론, 언어학 자체의 한계 설정 및 본질 규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또 다른 시각에서 이들 세 가지 과제들은 섣부른 보편주의에 빠지지 않고 현상의 기술과 설명, 보편과 특수의 미묘한 변증법을 예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촘스키 연구 프로그램에서는 찾을 수 없는 또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세 번째, 과제는 바로 언어학 이론 자체의 인식론적 토대에 대한 철학적 메타적 성찰과 자기 반성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필자가 시도한 언어학 이론의 비평 작업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지면 관계상 장 교수가 제기하는 문제를 모두 답할 수 없어 몇 가지 문제만을 재론한다.  첫째, 장 교수는 필자가 제기한 촘스키 언어학 이론의 성공 요인으로 제시한 제도적 사회적 요인들을 지적한 것에 대해서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이것은 과학 지식의 성공 요인이 이론 내재적 내용과 제도적 여건들 사이의 상호 종속적 관계에 있다는 지식 사회학의 매우 기본적인 상식을 무시한 데에서 기인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근대 언어학의 제도화 과정을 지식사회학 관점에서 고증한 암스테르담스카(Amsterdamska)의 노작을 참조하기 바란다). 예컨대, 촘스키가 MIT에서 언어학과를 창립하고 초기에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받은 것은 촘스키 이론 그 자체의 과학적 탁월성 때문만이 아니라, 2차 대전 이후, 정보 처리의 중요성을 간파한 미국방성이 자연언어의 자동 번역이라는 국가적 사업에 대대적인 투자를 했기 때문이었다.

미 국방성에서 연구비 받은 촘스키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의 본산지로 그렇게 맹렬하게 비난했던 미국방성으로부터 그 자신은 물론 생성 언어학 연구의 상당수가 재정 지원을 받으면서 성장했다는 아이러니이다. 심지어 최근의 한 인터뷰에서 촘스키는 교수 초기 시절 보수의 절반 가량을 국방성으로부터 받았으며, 실제로 군사적 연구와 거리가 먼 언어학의 성격을 변질시켜 가면서까지 연구비를 수주하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였음을 스스로 발설한 바 있다.

둘째, 장 교수는 필자가 인용한 ‘인접학문의 교수들’이 촘스키 언어학에 대해서 정통하지 못했다는 혐의를 두면서 그 비판의 적효성을 단숨에 무력화시킨다. 이것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이들 언어학사가, 과학철학자, 전문 언어학자, 언어철학자들이 촘스키 비판의 자격이 없다면, 누가 촘스키의 비판자 역할을 맡을 수 있단 말인가. (이들 가운데서는 초기 변형 문법의 창시부터 70년대 초까지 촘스키의 가장 가까운 동반자였던 카츠 교수도 있다) 촘스키 저작은 크게 전문적인 언어학(technical linguistics) 이론서와 언어 이론의 철학적 토대를 다루는 철학적 언어학(philosophical linguistics)으로 크게 양분된다.

그런데 문제는 촘스키 계열의 언어학자들 가운데 이 양자에 대해서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면서 연구하는 학자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촘스키 생성 언어학의 핵심 학자들 가운데 그 누구도 촘스키 언어 이론의 인식론적 구조와 정당성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을 제시하는 학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저 모국어 화자의 직관에 의존하여 생성 문법 이론을 데이터에 적용하고 그것의 적합성을 따져 묻는 작업만이 중시된 것이다.

끝으로, 촘스키 언어학의 생물학주의에 대해서 한 마디. 지난 30년 동안 촘스키는 시종일관 인간 정신의 외부에 있는 언어 개념의 혼란성을 이유로, 언어 연구는 언어 지식을 구성하는 정신적 구성체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리고 인간 언어는 궁극적으로 생물학적 대상이며 자연 과학의 방법을 사용하면서 분석되어야 한다는 당위적 필요성만을 반복해왔다. 이제, 이같은 촘스키 언어학의 생물학적 토대에 대해서 순수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보편 문법 과학성을 입증할 수 있는 생물학적 증거가 현재 얼마나 확보되었으며, 아울러 인간의 언어 구사 능력을 설명할 수 있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장 교수를 비롯한 생성언어학자들이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가.

필자가 제기하려 했던 문제는 무엇보다 지난 50년 동안 세계의 언어학계를 평정하고 그 지적 헤게모니를 휘둘러 온 촘스키의 언어 사상에 대한 총체적 비판의 시점에 임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문제의식은, 하나의 특정 언어학 이론이 과도한 독점적 주류를 형성하여 다른 언어학 이론들을 소외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점에서 학문의 다양성 정신을 훼손시키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언어학 자체의 건강한 지식 생태계를 교란시켰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자연과학적 방법을 실제로 사용하느냐가 중요
그리고 이 문제는 다시 세 개의 하위 주제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그의 이론의 과학성과 진정성의 문제이며, 또 하나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대로, 과연 그가 행동 하는 양심의 선구자인지, 그리고 그가 자신의 언어학 이론을 구축하면서 타자의 비판에 대해 얼마나 성실하고 진지하게 소통했는지 점검하면서, 그의 학문적 윤리성을 따져 보자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지난 40년 동안 촘스키 가라사대 식의 맹목적 수용과 추종을 당연시한 한국의 언어학자들(여기에는 애석하게도 일군의 국어학자들 역시 포함된다)에게 그의 언어 모델의 획일적 적용을 통해 과연 한국어의 본질과 구조가 얼마나 해명되었는지 점검해, 비판적 서구 언어학 수용사를 진작시키려는 암묵적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같은 문제의식을 장 교수가 동감하고 그 취지에 찬동한다면, 필자의 글과 장 교수의 반론에서 제기될 수 있는 사소한 오해나 곡해는 부차적인 문제이다.(김성도 고려대 교수)

08. 02. 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경향신문에서 오랜만에 김우창 교수의 칼럼을 옮겨온다. 그간에 몇 번 '계몽적인' 내용의 칼럼을 옮겨오려고 했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무산된 적이 있는데(때론 바빠서, 때론 굳이 퍼오나 싶어서) 이번엔 대입제도와 관련된 내용이기도 하기에 수고를 무릅쓴다. 마침 해마다 1학기엔 1학년 전공과목을 강의하고 있는데 '자기가 선택하는 삶', 혹은 '자기가 선택하는 공부'에 대한 생각을 한번쯤 가다듬어볼 필요도 있다 싶다. 새삼스럽진 않을지라도 말이다. 거기에 '저녁이군'에 대한 단상은 음미해둘 만하다. 

경향신문(08. 02. 14) 자기가 선택하는 삶

오스트리아의 시인 후고 폰 호프만슈탈의 시 ‘외면적 삶의 노래’는 큰 주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면서 인생에 대하여 심금에 닿을 만한 관찰을 담고 있다. 사람의 삶에는 방황과 고독과 고통 또 기쁨과 열매가 있으나, 결국은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이런 저런 많은 것을 보아서 의미가 있나?” 하는 물음들이 일게 된다. 그런 가운데에도 그것을 보상해줄 수 있는 것은, 작은 대로 깊은 느낌의 어떤 순간이다. 무슨 소용인가 하지만. “그래도 ‘저녁이군’ 하고 말하는 사람은 많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호프만슈탈은 이렇게 말한다. “이 하나의 말-깊은 뜻과 눈물이 흐르는 이 하나의 말”로부터 “마치 벌집 구멍으로부터 진한 꿀 흘러 내리듯” 감미로움이 흐를 수 있다.

저녁은 해의 밝음이 가고 밤의 어둠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명암의 교체만으로도 저녁은 특별한 감흥을 준다. 또 이 감흥에는 더욱 지적인 인식이 스며 있다. 저녁 시간은 하루의 끝이다. 그것에 주의하는 것은 하루를 되돌아보고 그것을 하나로 포착하는 것이다. 저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감흥과 깨달음을 언어로 표현하는 행위이다. 외면화된 삶에서 귀중한 것은 이와 같이 작은 내면성의 깨달음을 분명히하는 것이다.



외적인 순응만 강요된 사회
‘외면적 삶의 노래’는 노년의 지혜를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호프만슈탈이 이 시를 쓴 것은 스무 살이 갓 넘었을 때였다. 이 시를 썼을 때, 그는 빈의 심미주의적 시풍의 영향 하에 있었다. 감흥의 중요성을 말한 것은 이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마음 깊이에서 분명하게 느껴지는 삶을 살겠다는 그의 젊은 시절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법학 공부를 하던 호프만슈탈은 이 시를 쓸 무렵 문학과 철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렇기는 하나 이 시에서의 내면성의 강조는 그럴싸하게 들리다가도, 시인의 젊은 나이를 생각하면, 그것이 현실 삶의 도피일 수 있다는 의심을 갖게 한다. 내면이 없는 외면이 맹목인 것은 틀림이 없지만, 외면이 없는 내면도 공허한 일이다. 그러나 세상은 외면적 삶에 중요성을 두는 경향이 있는 만큼 내면을 강조하는 것은 균형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내면의 동의 없이 사는 삶은 결국 나의 삶이 아니라 남의 삶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적인 삶은 스스로가 의미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삶을 바깥세상에서 살고 또 가능하다면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삶이다. 개인의 삶의 문제를 떠나서, 외면적 순응만을 요구하고 내면적 의미의 추구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도 창조성의 근거를 잃고 무엇보다도 안정의 바탕을 마련하지 못한다. 그러나 안과 밖이 맞아 들어가는 삶이 쉽게 가능한 것이 아님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젊은 시절은 자신이 수긍할 수 있는 의미를 실현해줄 삶을 추구하다가도 대개는 사회의 요구에 타협하면서 안착점을 찾게 되는 것이 보통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젊은 시절이 없는 사회가 우리 사회가 아닌가 한다. 교육제도 그리고 대학 입시제도의 혼란도-사실 또 많은 사회 문제도--깊은 근본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외면화된 우리의 삶의 방식에 연유하는 것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이번 달로 오랫동안 계속되던 대학 선발 절차가 마감된다. 말할 것도 없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간 사람도 있고, 입학은 되었지만 원하지 않는 대학에 입학이 된 사람도 있고, 전적으로 새로 입시 준비를 해야 할 사람도 있다. 원하는 대로 된 사람에게는 축하의 말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위로의 말을 주어야 마땅하겠지만, 입시제도의 난관을 겪는 모든 젊은이들은 위로를 받아야 한다고 할 수도 있다.

우리 사회 제도에서, 대학에 지원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일류대학에 들어가기를 희망한다.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데에는 수문장이 있다. 들어가기 위해서는 수문장이 내놓는 물음과 지원자의 답이 맞아들어 가야 한다. “열려라, 참깨!”라는 암호를 발견하는 데에 학생들은 수없는 시간을 보낸다. 그것은 원서를 내기 전의 1년 또는 2~3년일 수도 있고, 요즘 추세로 보면 유치원을 들어갈 무렵부터 수문장이 내어놓을 법한 암호들을 익히는 데에 긴긴 세월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일류대학에 들어가려는 것은 얼른 생각하기에는 일류의 교육을 받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일류대학의 교육이 참으로 이류와 다른가? 교육의 내용의 높고 낮음은 교수와 교육 프로그램과 교육시설에 달린 것일 터인데, 참으로 이러한 항목들에서 일류와 이류의 차이가 그렇게 큰 것인가? 일류, 이류, 삼류 하는 말들이 시사하는 차이가 크다고 상정하더라도, 대학 지망생이나 그 부모가 이러한 것들을 고려하고 난 결과 일류대학을 선택하는 것일까? 대학을 가까이 돌아본 사람이면, 차별화해서 이야기되는 대학들에서 받는 교육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몸 담고 있는 대학의 일류, 이류에 따라서 학문이나 사회봉사 활동에서 교수들의 수준이 반드시 크게 차이가 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차이가 난다고 하여도 학부 학생들의 수용 능력을 생각할 때, 그것이 크게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는 시설이나 교육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중요한 문제는 대학의 선택이 참으로 나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대학을 선택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나는 대학에 의하여 선택되는 것이다. 전공이나 학과의 선택에서도 그러하다. 내가 어떤 학문을 공부하고 싶은가는 중요치 않다. 어느 단과대학, 어느 학과가 나를 받아주고, 나중에 어느 이름 난 직장에서 나를 받아주겠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학·직장서 선택 당하는 현실
내가 원하는 공부가 어떤 것인가, 내가 살고자 하는 인생이 어떤 것인가를 아는 일이 쉽지 않다. 바른 판단의 한 요소는, 지혜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에 못지 않게, 무엇을 의미 있는 것으로서 절실하게 느끼는가-이에 관련하여 마음 속에 들려오는 부름을 아는 일이다. 심증이 생길 때까지는 방황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는 일을 시험하고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게 하는 방황을 허용할 여유가 없다.

우리는 인생에서 값진 것은 모두 밖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한다. 물건을 고름에는, 무엇이 내 마음에 드느냐보다는 무엇이 명품이냐가 중요하다. 아파트를 구하는 데에도 기준은 편의나 보금자리로서의 느낌보다 부동산 시장의 전망이다. 삶의 의미는 사회적 지위의 명품 가치에 의하여 정해진다. 물론 외면적 사회에서, 이름은 실질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름은 허영심을 만족시켜준다. 그것은 취직이나 존경이나 사회적 지위와 교환할 수 있는 고가의 어음이다. 그러나 실질과 허상이 교차되는 명품의 세계에서 잃어버리는 것은 나의 인생이다. 나는 참으로 내가 원하는 공부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다. 아마 더 중요한 것은 삶의 작은 순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일 것이다. 오늘날 하루가 끝난 다음, “저녁이군”하고 저녁의 감흥에 주의할 수 있는 사람은 실로 극히 희귀한,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08. 02. 13.

P.S. '저녁이군'이란 말에서 아마도 가장 흔하게 떠올릴 수 있는 그림은 밀레의 <만종>일 것이다. 하루의 고단한 수고를 마무리짓는 '의식'을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농부 부부의 모습에서 읽게 되는 그림이다. 생각해보니 저녁노을을 음미해본 때가 언제였던가 싶다. 운동장에서 뛰어놀다가 저녁상을 차려놓았다고 부르시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부랴부랴 동생들과 뛰어가며 바라보던 노을이면 어느새 30년 전이다!   

 

혹은 (내가 좋아하는) 물기 머금은 저녁.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진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이 있어서 옮겨놓는다. 내일은 '퇴근시간이군'이란 말 대신에 '저녁이군'이라고 중얼거려봐야겠다. 속으로라도...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08-02-13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13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14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14 11:54   좋아요 0 | URL
저는 진로 문제에 대해선 특별하게 고민해본 적은 없구요, 학부 4학년때 잠시 책이 읽히지 않아서 불안했던 적은 있습니다.^^; 관심사와 여러 주변 여견을 잘 고려하시길 바랍니다. 더불어, 공부도 때가 있다곤 하지만 요즘은 '평생공부' 시대이니까 공부와 취업을 양립불가능한 것으로만 보지는 마시길...
 

김윤식 교수의 허다한 책들 가운데 전기 비평 범주에 속하는 책들과 몇몇 신간의 목록을 만들어둔다...


9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이광수와 그의 시대 1
김윤식 지음 / 솔출판사 / 1999년 4월
30,000원 → 27,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500원(5% 적립)
2008년 02월 13일에 저장
품절
이광수와 그의 시대 2
김윤식 지음 / 솔출판사 / 1999년 4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2008년 02월 13일에 저장
절판
김동인 연구- 개정증보판
김윤식 지음 / 민음사 / 2000년 4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2008년 02월 13일에 저장
품절
염상섭 연구
김윤식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99년 1월
25,000원 → 25,000원(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2008년 02월 13일에 저장
절판


9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람혼 2008-02-13 19:21   좋아요 0 | URL
그 '허다한' 책들 중에서 제게도 대략 40~50권 있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8-02-13 22:31   좋아요 0 | URL
저도 얼추 40권 안팎일 거 같습니다. 많은 책이 절판되거나 품절된 게 아쉽네요...
 

연휴 직전에 발견하고 보관함에 넣어둔 책의 하나는 김윤식 교수 <백철 연구>(소명출판, 2008)이다. 출간일은 1월 중순으로 돼 있지만 아마도 지난주에 출고된 책인 듯싶다. 비평가 평전으로 김교수의 <임화 연구>(문학사상사, 1989)를 오래전에 읽은 적이 있는데 그 후속 타자가 '백철'이라는 건 약간 의외이다. 하지만 책소개와 관련기사를 읽어 보면 그럴 만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한없이 지루한 글쓰기, 참을 수 없이 조급한 글쓰기'란 부제에서도 암시되듯이 저자의 화두는 문학이나 비평 이전에 '글쓰기', 보다 구체적으론 '자동사적 글쓰기'로 모아지고 있는 듯해서이다(이와 관련해서는 고종석의 기사 '나는 '쓰다'의 주어다'(http://blog.aladin.co.kr/mramor/896390)를 참조). 최재봉기자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8. 02 13) "백철 연구는 백철론 아니라 김윤식론”

흔히들 말하길 ‘백철처럼 글 많이 쓴 사람 없고, 백철처럼 알맹이 없는 글 쓴 사람도 드물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막상 백철이란 인물을 파고들어가 보니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알겠습디다. 지금 한국에서 문학평론 하는 사람들, 그리고 대학에서 문학 가르치는 사람들 치고 백철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백철은 그 누구보다 민첩한 평론가였고, 무엇보다 국어학과 고전문학으로 양분되었던 대학 국문학과에 현대문학을 처음으로 도입해 오늘의 삼분할 편제를 만든 장본인입니다.”

국문학자 겸 평론가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가 선배 국문학자이자 평론가인 백철(1908~1985)의 생애와 업적을 천착한 전기 비평서 <백철 연구>(소명출판)를 내놓았다. 고은 시인과 더불어 문단의 양대 다작가로 꼽히는 김 교수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제까지 쓴 책이 120권은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로 탄생 100년을 맞은 백철은 <문학개론>(1947)과 <신문학사조사>(1948~9)를 쓴 문학 이론가이자 문학사가이며 열정적으로 당대의 작품을 읽고 평을 쓴 현장비평가였다. 도쿄 유학 시절에는 나프(일본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가담해 활동했으나 식민통치 말기에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학예부장과 베이징 특파원을 지냈다. 해방 후에는 동국대 국문학과 교수 및 중앙대 문과대학장으로서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미국발 신비평(뉴크리티시즘)의 한국 소개에 앞장섰다. 그처럼 다양한 활동의 바탕에는 고향인 평북 신의주에서부터 집안의 종교였던 천도교라는 중심이 확고히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 김 교수의 분석이다.

얼핏 갈팡질팡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는 백철의 행보에 김 교수는 ‘웰컴주의’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새로운 사상이 들어오면 대번에 ‘웰컴!’ 하고 외치며 물불 가리지 않고 수용하여 흥분하다가도 또 다른 사조가 들어오면 전의 것을 헌신짝모양 던져버리고 다시 ‘웰컴!’을 외치기”(546쪽)라는 뜻이다. “이 ‘웰컴주의’에 민감한 비평가로 백철 오른편에 설 자는 일찍이 없었다.”(546쪽) 그러나 그게 또 어찌 백철만의 문제이랴. “근대를 문제 삼는 한, 그 누구도 많건 적건 이 웰컴주의에서 자유롭기 어렵다.”(547쪽)

선배 비평가 백철에 관한 이런 양가적 평가에서는 근대문학 연구자로서 김 교수의 어쩔 수 없는 자의식이 만져진다. 사실 700쪽에 가까운 두툼한 책 <백철 연구>를 읽다 보면 수시로 연구 대상인 백철의 모습에 연구의 주체인 김 교수의 모습이 포개지곤 한다. “이 책은 사실 백철론이 아니라 김윤식론이다. <백철 연구>를 완성하는 데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데에는 그런 까닭도 작용했다”고 11일 오후에 만난 김 교수는 말했다. 책에는 일제 말기 백철의 활동 무대였던 베이징의 북경반점 앞에서 포즈를 취한 김 교수 자신의 사진도 들어 있다.

<백철 연구>의 부제는 ‘한없이 지루한 글쓰기, 참을 수 없이 조급한 글쓰기’로 되어 있다. 전자가 문학사가로서의 저술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현장비평가로서 쓴 글들을 이르는 말이다. 이 두 가지 글쓰기에서 지은이 김윤식 교수 역시 백철에 못지않았다. 작고한 김현과 함께 쓴 <한국문학사>와 카프 연구서인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 그리고 <임화 연구> <이광수와 그의 시대> <염상섭 연구>와 같은 숱한 작가론저들은 김 교수의 돌올한 업적을 이룬다. 그와 동시에 벌써 수십 년째 계속해 오고 있는 소설 월평 역시 그만의 독보적인 영역으로 꼽힌다. “그만큼 소설을 매달 열심히 읽은 자도 없으며 이를 괴발이든 개발이든 월평으로 써낸 비평가도 백철을 빼면 신문학 생긴 이래 아무도 없었다”(669쪽)고 김 교수가 쓸 때 그것은 백철의 이름을 빌린 김 교수의 자기 평가라 할 법하다.

국문학자와 비평가가 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을 했을 것 같냐는 질문에 김 교수는 그저 머리를 저었다. 다른 길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만 “대학 시절에 쓴 소설 습작 원고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말로 창작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내비쳤다.(최재봉 문학전문기자)

08. 02. 13.

P.S. 개인적으로 상당수의 책을 읽었거 갖고 있다곤 하지만 120여권에 이르는 목록에 비하면 중과부적이다. 그래도 <이광수와 그의 시대>로부터 시작된 작가나 비평가 평전들을 대개 따라 읽었는데 유일하게 <염상섭 연구>만은 그러하질 못했다. 다행히 아직 절판되지 않았으니 문제는 970쪽이 넘는 이 두꺼운 책을 꽂아놓을 '공간'이다. 이번에 검색해보니 백철의 경우에도 <신문학사조사>(신구문화사, 1999)와 <문학개론>(신구문화사, 1982)이 아직 절판되지 않았다. 이 또한 의외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람혼 2008-02-13 19:26   좋아요 0 | URL
백철에 대한 김윤식 선생의 한 권의 책은, 그간 백철에 대한 선생의 언급들을 떠올려볼 때, 한 번은 나와야 하는 책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김윤식 선생의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은 로쟈님이 말씀하신 저 '자동사적' 성격과 모종의 '고아 의식'ㅡ어쩌면 조금 더 정확하게는(?) '사생아적 의식'ㅡ사이의 어떤 결합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오고 있습니다.

로쟈 2008-02-13 22:31   좋아요 0 | URL
제가 강의시간에 들었던 멘트는 '백철처럼 글 많이 쓴 사람 없고, 백철처럼 알맹이 없는 글 쓴 사람도 드물다'란 것이어서요.^^;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아직 20대였던 시절에 쓴 글을 옮겨놓는다. 대학원 강의의 기말 페이퍼로 쓴 것인데 무더운 장마철에 학교 연구소에서 1박 2일 동안 썼던 기억이 떠오른다(날밤을 샌 건 아니고 커다란 강의용 책상 위에 드러누워 눈은 붙였었다). <어느 망명작가의 참인생>(청하, 1988)이라고 국내에는 소개된 나보코프의 첫 영어소설 <세바스챤 나잇의 참인생>에 대한 '읽기'인데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그냥 내키는 대로 써나간 글이어서 자랑할 만한 구석은 별로 없지만 내겐 기억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글이고 나보코프에 관해 쓴 가장 긴 글이기도 하기에 보존해놓는다(각주는 본문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나보코프의 영어본 일부 표지들은 본문과 무관하게 집어넣었다).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약간의 흥미는 가질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라면 굳이 애써서 읽어볼 필요는 없겠다. '망명작가' 나보코프에 관한 개인적인 흥미를 적어놓은 것이니까...

OPENING

0.1. “반어적인 과학ironic science은 우리를 어디로도 데려가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최소한,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무언가 우리에게 할일을 줄 수는 있다. 영원히.” 존 호건, <과학의 종말>(까치, 1997), 222쪽.

아침에 이런 걸 읽다가, 나는 반어적 과학으로서의 문학비평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이번엔 거꾸로 말이다. 즉 문학비평은 최소한,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무언가 우리에게 할일을 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를 어디로도 데려가주지 않는다. 정말 그런 듯싶으니 이를 어찌할까. 할일은 주어지지만, 정작 거기에 상스sens, 즉 의미와 방향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런 것이 일종의 일시적인 무기력증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우리가 처한 사태의 본질이라면 정말 어찌할까. 나는 또다시 아주 친숙한 근심에 발목이 잡힌다. 장마철이어서일까?

0.2. 나보코프에 대한 기억이 이젠 희미해지질 즈음에, 이런 자리에 불려나와서 몇 마디 해야 하는 것은 일종의 고역이다. 네댓장쯤 쓰다가 다시 고치고 지우고 짜깁기하면서 나는 벌써 진을 다 빼버렸다. 사실 그럴 만한 여유도 재간도 없는 처지에, 남들이 뜯어먹지 않는 부분을 골라서 뜯어먹으려니 이 고생이지 싶다. 하지만 뒤져보면, 이미 먹을 만한 부분은 다 거덜나 있다.(이 글에서 몇 마디 주석을 달려고 하는 The Real Life Sebastian Knight이 대충 어떻게 뜯어먹혔는가에 대해서는 Vladimir Navokov (New York & London: Garland Publishing, Inc., 1995), p. 634 참조.) 그러니 정성이 갸륵하지 않고서야 새로운 것이 얻어질 리 만무하다. 대략 입막음의 글이라도 작성하고자 일을 벌이긴 했지만, 이미 예전의 정(신)력은 아닌 모양이어서, 나는 지레 지치고 지레 나앉는다. 이래서야 어디 밥은커녕 죽 구경이라도 하겠는가? 참으로 걱정은 걱정이다.

0.3. 어제 나는 무얼 했던가? 아니 지난주에 난 무얼 했던가? 막바지까지 <어느 망명작가의 참인생 The Real life of Sebastian Knight>(이하 <참인생>, 텍스트로 사용한 것은 V. Nabokov, The Real Life of Sebastian Knight (Penguin Books, 1995); <어느 망명작가의 참인생>, 권택영 옮김(청하, 1988)이다. 본문에서는 국역/영어의 쪽수만 표기하며, 국역의 경우 일부 수정해서 인용한다.)을 읽었다. 그리고 이제와서, 또다시 마감에 닥쳐 이렇게 몇 자 적어내려 가고 있는 것이다. 계획은 이랬다. 나보코프의 초기 러시아 소설과의 연관성 속에서 <참인생>을 읽어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제서야 나는 이 작품을 손에 들었고, 불과 몇 분 전에야 손에서 놓았다. 그리고 그새 다시 손에 들지 않았다. 한번 읽은 것이다. 소설에 관한 나보코프의 지론은 읽고 또 읽으라는 것이다. 한 대담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소설은 읽고 또 읽는 거지요. 아니면 읽고 읽고 또 읽든가요. You can only re-read a novel. Or re-re-read a novel.”(Charles Nicol, "The Mirrors of Sebastian Knight," L. S. Dembo (Ed.), Nabokov: The man and his work (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67), p. 85에서 재인용.)

뭔가 적어가며 읽긴 했지만, 한번 읽고 모든 걸 손아귀에 다 틀어쥘 수는 없는 법이다. 하물며 무슨 연관성이랴? 해서 계획은 남아나지 않았다. 그저 나는 <참인생>을 비교적 자세히 읽음으로써 나보코프의 입이나 일단 틀어막아보기로 했다(그리고 비로소 읽기 시작해야지!). 바로 옆에선 푸줏간 주인 같은 나보코프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나의 이런 꼴을 쳐다보고 있지만, 별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는 것이지. 자신의 체험에 충실할 밖에. 이런, 벌써 몇 시간이 지나갔다. 또 어느새 자정을 넘긴 것이고. 하여간에 나는 나보코프에 대해 쓴다. 쓰기 시작한다. 일단은 이 “무의미의 부메랑boomerangs of nonsense”(218/149)을 던져보는 것이다... Hello, Mr. Nabokov!.. 어쿠!



SCENE 1

1.1 <참인생>(1938)은 마지막 러시아어 장편인 <재능Gift>(1936)에 바로 이어진 소설로서 일단 나보코프의 작가적 경력에서 경계에 자리한다. 이 경계를 지나면서 그는 러시아어 작가에서 영어 작가로 변신한다. 나보코프에 관한 가장 방대한 두 권짜리 전기는 각각 ‘러시아인 시절’과 ‘미국인 시절’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Brian Boyd, Vladimir Nabokov: The Russian Years (London, Chatto & Windus, 1990), Vladimir Nabokov: The American Years (London, Chatto & Windus, 1992).)



아무리 재능있는 작가라지만 이 과정에서 자신의 작가적 장래에 대해 염려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서 <참인생>은 나보코프의 약한 고리이다.(Field 같은 이는 <참인생>을 가장 허술한weakest 작품으로 평하기도 한다. Vladimir Navokov (New York & London: Garland Publishing, Inc., 1995), p. 634.)

이 시기에 나보코프는 점차 암울해지던 유럽을 떠나 영국이나 미국으로의 이주를 계획한다. 즉 영어-사용권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한다. (John Lanchester, "Afterword," The Real Life of Sebastian Knight, p. 178.) 이러한 정황에서 볼 때, 이 제2의 데뷔작은 자못 비장한 의의를 가진다. 한 직업작가의 밥숟가락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염려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지.

1.2. 모두 2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참인생>의 1장에서 화자인 ‘나’(브이V)가 존경해 마지 않는 노장 비평가 사우스 케징턴South Kesington이 세바스챤 나잇Sebastian Knight의 때이른 죽음을 접하면서, “가엾은 나잇! 그는 두 시대를 살았지, 먼저는 엉터리 영어로 글을 쓰는 멍청한 작가로, 나중엔 멍청한 영어로 글을 쓰는 엉터리 작가로 말이야. Poor Knight! he really had two periods, the first - a dull man writing broken English, the second - a broken man writing dull English.”(12/6)라고 말하는 부분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이 ‘고약한 농담nasty dig’의 대상에 나보코프라고 걸려들지 말라는 법은 없다(더구나 자신이 놀던 물이 아닌 데야!) 이것이 그 염려의 내용이 될 수는 없을까. 과거에 그는 똑똑한 러시아어 작가였지만, 이제는 한낱 엉터리, 멍청이 ‘영어’ 작가로 전락할 수도 있는 것. 그럼 어떡해야 하나? 가장 자신 있는 걸로,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걸로 밀고나가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건 우리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인 바, 나보코프의 지능이 우리보다 못할 리가 없다. 때문에 그가 이전에 쓴 러시아어 소설들에서 주제와 구성뿐만 아니라 많은 모티브를 <참인생>에 빌려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참고로, J. W. Connolly는 Nabokov's Early Fic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pp. 220-222에서 <참인생>에 나타난 <재능>의 그림자를 몇 가지 지적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나’와 ‘세바스찬’의 관계(<참인생>)가 ‘나’와 ‘표도르’의 관계(<재능>)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 이것을 그는 에셔M. C. Escher의 그림 <드로잉 핸즈Drawing Hands>(서로가 서로를 그리고 있는 두 손)의 이미지로 이해한다. 이때 작가 나보코프는 이 두 손을 그리고 있는 제 3의 손이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심적인 것은 작가-화자(‘나’)와 인물-작가(세바스챤)의 관계 속에서 정체성의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다. 사실 <참인생>은 바로 이 ‘나’(브이)와 세바스챤의 정체성, 그들의 관계에 대한 수수께끼/퍼즐 풀기에 다름아니다.

1.3. 허구적 인물과 작가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러시아어 소설에서 나보코프의 작가-예술가로서의 자기탐구와 자기확인에의 요구가 빚어낸 것이다. <재능>은 이러한 탐구의 정점으로서, 이 작품은 주인공 표도르가 결국 나보코프와 같은 작가적 반열에 이르게 되는 여정을 형상화함으로써 그것을 일단락짓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전기적 이력을 놓고볼 때, 우리는 이 <참인생>에서 나보코프가 무엇을 기대하고 요구할지에 대해 미리 짐작할 수 있는 바, 그것은 영어 작가로서 러시아어 작가 못지 않은 장래성(재능)의 확인/확보 문제이다(따라서 이것은 <재능>의 반복이자 번안이다). <참인생>의 ‘진짜’ 주인공은 포르 레크노이로 분한 나보코프란 주장도 있다.(“Nabokov's novel has one "real" character, Nabokov himself, who poses as Paul Rechnoy.", Charles Nicol, op. cit., p. 91.)

이 작품에서의 화자-작가인 ‘나’는 나보코프의 그러한 기대의 대리인이다. 이 작품이 ‘나’가 이복형인 세바스챤의 전기를 완성하는 여정의 형식이면서, 동시에 세반스챤을 닮아가는, 세바스챤이 되어가는 여정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나보코프답지 않은 염려와 나보코프다운 기대 속에 <참인생>은 놓여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나보코프의 생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것이다.



SCENE 2

2.1. “1938년 프랑스 파리의 어느 단칸방 아파트. 당시 가난한 러시아의 망명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문제의 소설 한편을 탈고한다. 1940년 미국 이주 후 영어로 출간되어 “찬란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호평과 함께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책이 아니냐”는 혹평을 받은 이 소설은, 우리들의 책읽기 방식에 중대한 도전을 던진다.” 여기까지는 국역본의 광고인데, 문제는 우리들의 책읽기 방식이 아니라 바로 나보코프 자신일 테다(그래서 보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우스꽝스러울” 수 있겠지).

2.2. 세바스챤 나잇(1899-1936)이라는 러시아 태생 영국작가가 5권의 소설을 남기고 36세의 나이로 죽는다(한편으론 이 6이란 숫자는 브이를 상징하는, 대변하는 숫자인데, 이것은 뒤에서 자세하게 밝혀질 것이다). 아래 이복동생인 나, 브이는 이복형의 출판매니저였던 굿맨Goodman의 전기 <세바스챤 나잇의 비극 The Tragedy of Sebastian Knight>이 결함 투성이임을 발견하고 세바스챤의 새로운 전기를 쓰고자 유품들을 뒤적거리고 생전에 세바스챤과 가까웠던 인물들을 찾아가 얘기를 들으며 자료수집에 전력을 기울인다. 그렇지만 결국 대단한 무얼 얻지는 못하고 그런 과정을 그럭저럭 기술하여 우리 앞에 내놓은 것이 <참인생>이다. 여기서 일차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세바스챤 나잇과 작가 나보코프 사이의 많은 유사점이다.(John Lanchester, op. cit., p. 177-8.)

1899년은 나보코프가 태어난 해이고 1936년은 <재능>을 쓰고 러시아어로는 절필한 해이다. 그러니까 러시아어 작가로서는 생명이 끊어진 해이다. 이런 사정을 고려해본다면, 세바스챤 나잇을 나보코프의 러시아어-작가적 분신으로 보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세바스챤은 영어로 창작을 했으니까 정작 나보코프와는 차이가 난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차이는 그저 일종의 은폐전략에 불과할 테다. 그것도 보일 거 다 보이는 은폐전략 말이다.

2.3.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이 해결되지 않고 독자는 저자와의 게임에서 승부를 기대할 수 없다"(권택영, "쓰면서 지워가는 소설", <어느 망명작가의 참인생> 역자 해설, 255쪽.)는 이 소설의 맨 마지막 문장의 내용은 우리의 기대를 전혀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세바스챤이다, 아니 세바스챤이 나다, 아니 아마도 우리 둘 다 우리 둘이 다 모르는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 I am Sebastianm or Sebastian is I, or perhaps we both are someone whom neither of us knows.”(251/173)

이 문장에서 ‘나’(브이)는 나보코프의 영어-작가적 분신이다. ‘나’ 브이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지만, 이때의 V는 Vladimir Nabokov가 아닐까. 그는 나보코프의 일부이기 때문에 풀네임은 갖지 않는다. 한편, 세바스챤이 브이에게 보낸 편지에 Sevastian이라고 서명돼 있는 것은 이 둘의 분신성을 보강해준다. 러시아어 철자 ‘B’가 지닌 이중성(‘B’이면서 ‘V’)이라는 글자퍼즐을 나보코프는 인물퍼즐과 겹치게 만들고 있는 것.

그리고 이들이 둘 다 모르는 어떤 사람은 바로 나보코프인 것이지. 이 두 분신은 모두 전체-나보코프Total-Nabokov의 일부이며 장기말/기사knight이다. 이 점에서 굿맨이 세바스챤을 “그는 완벽한 포우저였다. [H]e was the perfect ‘poser’.”(141/97)고 본 것은 조금 다른 문맥에서이긴 하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다. 브이와 세바스챤, 두 인물-작가는 모두 나보코프 자신이자 그의 가면이며 포우저이다. 그리고 사실 이 정도만이 내가 나름대로 읽은 <참인생>의 내용이다. 즉 나보코프의 작가적 경력 속에서 <참인생>이 차지하는 의의와 성격을 브이와 세바스챤의 관계가 그대로 반영하고, 반복하고 있다는 것.



2.4. 이런 맥락에서 브이가 성 다미에르St Damier 병원에서 얻은 깨달음 이해할 수 있을까. 먼저 옮겨본다. 그것은 이렇다. 나보코프 자신은 <참인생>을 탐탁찮게 생각한 모양이지만, 이런 대목 같은 부분은 단순한 재능 이상의 통찰을 보여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종의 영혼의 메타모포시스metamorphosis라고나 할까.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향수>에서 도미니크가 어린 아들의 뒤를 좇으며 걸음을 맞추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얼 더 해줄 수 있을까? 우리는 서로에게 얼마나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영혼이란 오직 존재의 방식에 불과한 것으로 영원불변의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만일 당신이 영혼의 맥박을 발견하여 따라간다면 어떤 영혼도 당신의 것이 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어떤 선택된 영혼, 어떤 수의 영혼들 속에서 그들 모두가 서로 바뀔 수 있다는 부담을 의식하지 않은 채, 의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충만한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세바스챤 나잇이다.

[T]hat the soul is but a manner of being - not a constant state - that any soul may be yours, if you find and follow its undulation. The hereafter may be the full ability of consciously living in any chosen soul, in any number of souls, all of them unconscious of their interchangeable burden. Thus - I am Sebastian Knight. (250/172)

브이와 세바스챤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보자면, 여기서의 ‘영혼’은 ‘언어’란 뜻으로 번역해서 이해해도 무방할 듯하다.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영혼)이란 바로 언어가 아니겠는가. 그럴 경우, 브이의 깨달음은 언어(영혼)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즉 그것이 교체가능interchangeable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언어(영혼)의 맥박과 리듬을 잘 찾아내고 따라가는 것이다. 이 소설은 견습작가인 브이가 세바스챤의 행적과 작품세계를 더듬어가면서 이 이복형의 맥박(리듬)을 배워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 소설의 끄트머리에 와서 브이(=영어 작가로서의 나보코프)가 마침내 자신의 반쪽half-brother인 세바스챤(=러시아어 작가로서의 나보코프)을 따라잡은 것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제 대신하게 된 것이다.(그의 브이는 승리의 브이이다).

2.5. 이러한 결말의 의미는 작품의 초반부(4장)에서 브이가 세바스챤에 대해서 갖고 있는 정서적 동질감과 이질감을 대비시켜보면 더욱 확연해진다.

언젠가 나는 두 형제가 테니스 챔피언으로서 경기를 벌이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두 사람이 치는 힘은 완전히 달랐다. 그러나 경기장을 휩쓰는 행동의 리듬은 정확히 같았다. 만일 그 두 개의 리듬을 그릴 수만 있다면 똑같은 그림이 나타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바스챤과 나도 역시 공통된 리듬을 가졌으리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렇다고 나와 세바스챤이 마음의 풍요와 재능의 일면이라도 공유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의 글쓰는 방식을 나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다.(...) 그 재능의 높이에 다다를 수는 없지만 나를 도와줄 어떤 심리적 유사점들을 나도 갖고 있다는 것에 자신을 얻은 것이다.

Once I happened to see two brothers, tennis champions, matched against one another; their strokes were totally different, and one of the two was far, far better than the other; but the general rhythm of their motions as they swept all over the court was exactly the same, so that had it been possible to draft systems two identical designs would have appeared. I daresay Sebastian and I also had some kind of common rhythm. (...) This is not meant to imply that I shared with him any riches of the mind, any facets of talent.(...) I cannot even copy his manner{...] I feel that inspite of the toe of his talent being beyond my reach certain psychological affinities which will help me out. (43-45/28-30)

브이와 세바스챤의 관계는 이 인용에서 테니스를 치는 형제의 관계를 닮았다. 즉 두 작가는 힘과 기량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동작의 리듬에 있어서는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장에 세바스챤을 따라갈 수는 없지만, 브이에겐 세바스챤을 따라갈 만한 바탕(=심리적 유사성)은 마련되어 있는 것이고, 그런 바탕이 결국에 가서는 “나(브이)=세바스챤”이라는 당당한 고백을 가능하게 한다.

전기를 쓰기 위해 세바스챤의 아파트에서 유품을 뒤적이다가 브이가 발견한 러시아어 문구 “언제나 찾아야 할 당신의 방식 [T]hy manner always to find...”(48/32)을 마침내 그는 찾아낸 것인데, 그것이 바로 세바스챤의 맥박이고 리듬이며 “특이한 글쓰기 방식queer way”(50/33)이다. 브이는 작가로서 세바스챤의 뒤를 이을 준비가 다 된 것이다. 이것이 이 소설의 결말이 뜻하는 바이다.

SCENE 3

3.1. 다시 인용하겠다. 나름대로 좋아하는 대목이어서 조금 더 거창한 해석을 덧붙여보기 위해서이다.

영혼이란 오직 존재의 방식에 불과한 것으로 영원불변의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만일 당신이 영혼의 맥박을 발견하여 따라간다면 어떤 영혼도 당신의 것이 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어떤 선택된 영혼, 어떤 수의 영혼들 속에서 그들 모두가 서로 바뀔 수 있다는 부담을 의식하지 않은 채, 의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충만한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세바스챤 나잇이다.

여기서 ‘맥박’은 한 영혼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생의 리듬이다. 이 리듬의 공유를 통해서 영혼은 서로 교환(교체)되고 합일된다. 이것을 통해 브이(그리고 나보코프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주적인 차원에서의 동시화cosmic synchronization라는 형이상학이다. 이때의 동시화는 곧 시간적인 동시성의 구현인데, 이에 의해서 개체적, 개별적 존재가 지닌 시간의 단속성(=불연속성)과 유한성은 극복될 수 있다. 즉 우리의 영혼은 불멸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나보코프가 시간을 믿지 않는다고 한 것 은 이런 맥락에서 음미해볼 수 있다.( V. Nabokov, Speak, Memory (London, Weidenfeld & Nicolson, 1967), p. 139.)



3.2. 20세기 전반기 서구 형이상학의 주조음은 시간에 대한 것이다(대표적인 철학자로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를 들 수 있다). 즉 시간은 이 시기의 주된 관심거리이면서 이런저런 입장들을 찍어내는 거푸집이다. 이 시기에 시간이 문제된 것은, 비로소 그것이 과거-현재-미래라는 일직선적인 공간화로부터 이탈하여 제값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보이지 않는 시간, 순수한 지속으로서의 시간은 이때부터 서구 형이상학이란 유구한 깡통에 흠집을 내고 그것을 찌그러뜨리기 시작한다. 이때의 형이상학이란 바로 기하학적 사유(=공간에 대한 사유)로 특징지어지는 것인바, 개념화되지 않는 어떤 것, 그러니까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것으로서의 시간 앞에서 제대로 기운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은 형이상학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며, 시간이 낳는 불안은 실존적인 차원의 것이면서 동시에 인식론적인 것이다. 이러한 도전과 불안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가?

3.3. 저마다의 생애가 시간-내-세계에서 그것을 초월하기 위한 필사적인(더러는 게으른) 도주라고 한다면, 전기bio-graphy는 바로 그 도주의 궤적이다. 전기는 한 인간의 손에 잡히지 않는 생애를 이야기(=형태)의 장속으로 끌여들여 가시화함으로써 시간에 저항한다. 이것이 한가지 대처방법이다. 그리고 신화가 있다. 이때의 신화는 저마다의 생애를 ‘동일한 것의 영원한 되돌아옴’의 자리에 갖다 놓음으로써 그것의 고유성과 유한성을 희석시킨다. 신화는 비유컨대, 모든 이의 생애를 닳고 닳은 동전의 그것으로 바꿔놓는 것이다. 이것이 또다른 대처방법이다. 그리고 나보코프가 제안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우리들 모두의 시간(=리듬)을 동일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인이 만인의 영혼이 되고, 마스크가 되는 것, 바로 이것이 나보코프가 말하는 동시화synchronization의 세계이다.

이 동시성의 세계에서 “오직 단 하나의 참 숫자는 하나이고 나머지는 그저 반복일 뿐이다. The only real number is one, the rest are mere repetition.”(<잃어버린 재산Lost Property>)(127/89) 즉, 저마다의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죽음이 있는 것이며, 이 전체로서의 하나는 시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기에 결코 시간-내-존재로서의 유한성에 구속받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나보코프의 게임으로서의 소설은 형이상학으로 승격된다.



3.4. 세바스챤의 네번째 소설 제목인 ‘잃어버린 재산’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패러디한 것인바, 여기서 ‘재산property(=고유성)’이란 말과 ‘시간’의 대응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비록 명시적인 형태로는 아닐지라도, 이미 나보코프는 하이데거-데리다가 지적하게 될 인간의 종언, 인간의 고유성의 종언을 미리 앞당겨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바로 데리다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부분을 말이다.

인간의 종언은[시작과 끝]은 존재의 사유와 그 언어 안에 처음부터 언제나 지시되고 등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시는 텔로스와 죽음과 유희 안에서 ‘끝’의 이중적 의미를 변주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유희를 읽어갈 때, 다음과 같은 연관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즉 인간의 끝[완성]은 존재의 사유이며, 인간은 존재 사유의 끝[목적]이며, 인간의 끝[정점]은 존재 사유의 끝[정점]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언제나 그 자신의 고유한 끝[목적]이며, 다시 말해서 그 자신의 고유성의 끝[목적]이다. 존재는 처음부터 언제나 그 자신의 고유한 끝[목적]이며, 다시 말해서 그 자신의 고유성의 끝[목적]이다. (김상환, <해체론 시대의 철학> (문학과지성사, 1996), 340쪽.)



"In the thinking and the language of Being, the end of man has been prescribed since always, and this prescription has never done anything but modulate the equivocality of the end, in the play of telos and death. In the reading of this play, one may take the following sequence in all its senses: the end of man is the thinking of Being, man is the end of the thinking of Being, the end of man is the end of thinking of Being. Man, since always is his proper end, that is, the end of his proper. Being , since always, is its proper end, that is, the end of its proper." (J. Derrida, "The Ends of Man," Margins of philosophy, Trans. by Alan Bass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p. 134.)

인간의 고유성에 대해서 사유한다는 것은 곧 그 고유성의 끝(한계와 목적)에 대해 사유한다는 것이다. 나보코프의 메타모포시스적인 세계는 바로 그러한 사유의 한 끝을 보여준다. 타인의 영혼과 같은 리듬 속에 공속됨으로써 “나는 세바스챤이다, 아니 세바스챤이 나다.”라는 비분리성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은 한 개인이 지닌 고유성의 종언이면서, 정점이며 또한 완성이 아닐까. <참인생>은 이러한 물음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도덕적이며, 그러한 형이상학적 물음이 다차원적인 게임의 형태로 발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유희적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나보코프의 고유성이며, 그 고유성의 끝이다.



3.5. 인간의 종언을 말하면서 세바스챤의 죽음을 빼놓을 수는 없다. 세바스챤의 일생에서 마지막해인 1936년으로 접어들면서 브이는 이 죽음의 연도와 사람 사이의 “신비한 유사점occult resemblance”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이 유사점에 의해 암시되는 것은 그 죽음의 필연성이고, 비고유성이다. 이 부분이다.

세바스챤 나잇 d. 1936... 이 연도는 나에게 잔물결이 이는 연못 속에 그 이름을 비추어 본 것같이 보인다. 마지막 세 숫자의 곡선은 물결 모양 같은 윤곽이 웬일인지 세바스챤의 개성을 상기시켜준다.(...) 만일 내가 여기저기에서 적어도 그가 생각하는 것의 그림자조차 파악하지 못했거나, 이따금씩 무의식적인 뇌의 작용이 은밀한 미로에서 올바른 방향을 잡도록 나를 이끌지 않았다면, 내 책은 서툰 실패작에 불과하다.

Sebastian Knight d. 1936... This date to me seems the reflection of that name in a pool of rippling water. There is something about the curves of the last three numerals that recalls the sinuous outlines of Sebastian personality.(...) If here and there I have not captured at least the shadow of his thought, or if now and then unconscious cerebration has led me to take the right turn in his private labyrinth, then my book is a clumsy failure. (224-5/154)

여기서 브이는 자신과 세바스챤의 관계가 운명적인 분신double이면서 동형isotopie이며 거울 관계에 놓여 있다는 걸 무의식적이지만 알게 된다. 1936년에서 936은 잔물결(3)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본 형상이다(9↔6). 여기서 9가 세바스챤이라면 6은 브이이다. 머릿 숫자 1은 이들이 한몸임을 말해준다. 세바스챤은 자신의 운명의 소용돌이를 안고 이제 서서히 종국을 향하고 있고, 브이는 바야흐로 작가로서 입문하고 있다. 이렇듯 서로 하강하고 상승하는 운명을 9와 6은 도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참인생>의 시작인 1장에서 언급되는 한 러시아 여인은 “올가 올레고브나 오를로바Olga Olegovna Orlova라는 달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여인의 일기에서 브이는 세바스챤이 태어난 1899년 12월 31일의 날씨 기록을 본다. 여기서 이 “달갈 같은 이름”은 세바스챤의 태생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는 O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6년 후에 브이 또한 같은 집에서 태어난다. 여기서 세바스챤과 브이를 나타내는 숫자인 9과 6은 O에 운동성(꼬리)이 부여된 형태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숫자 상징은 20장에서 세바스챤이(나중에 Kegan이란 다른 환자임이 밝혀지지만)이 입원해 있는 병실은 36호라는 데에도 이어진다. 936에서 9(=세바스챤)가 떨어져나간 것이니 세바스챤이 이 병실에 입원해 있을 리 없다. 그는 이미 죽은 것이다. 세바스챤 나잇Knight은 나잇night(=어둠) 속으로 이미 사라져버린 것이다. 브이는 성 다미에를 병원을 찾아가 세바스챤을 찾으며 이렇게 말한다. 'I have come,' I said, 'to see Monsieur Sebastian Knight, K, n, i, g, h, t. Knight. Night.'(168) 이렇듯 나잇의 이름은 몇 차례에 걸쳐 낱낱으로 분해되고 결국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12장에서 로이 카스웰Roy Carswell(이것 또한 루이스 캐롤의 아나그램이다) 속의 초상화가 보여주는 세바스챤, 즉 연못 속의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있는 모습(144/99)을 이제 브이 또한 반복하고 있는 것인데, 사실 <참인생>의 이야기 전체가 바로 이 연못 속의 자신 들여다보기인 것이다. 브이는 세바스챤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욕실로 가서 거울looking- glass 앞에 몇 분 동안 서 있는다.”(234/160)

3.6. 브이가 세바스챤의 아파트를 찾아갈 갔을 때 발견한 이상한 문구 또한 이러한 거울보기의 연장선상에서, 그리고 시간의 동시화synchronization라는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

그는 깊게깊게 잠드는 자였기에 로저 로저슨, 늙은 로저슨은 늙은 로저스가 산 것을 샀다. 깊게 잠드는 자가 되는 게 그토록 두려운 늙은 로저스는 내일을 놓치는 게 그토록 두려웠다. 그는 깊이 잠드는 자였다... 그는 숙명적으로 내일의 사건의 영광, 이미 훈련의 영광을 놓치는 것을 두려워하였기에 그가 하는 것은 사고 그날 저녁을 사기 위하여 집으로 옮겨 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가 아니고 여덟 개의 각기 다른 크기와 강도로 똑딱거리며 9, 8, 11시를 지나치는 자명종 시계는 그는 시계를 침실에 놓았고 그 모습은 마치 9개의 알람시계가 9마리의 고양이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As he a heavy A Heavy sleeper, Roger Rogerson, old Rogerson bought old Rogers bought, so afraid Being a heavy sleeper, old Rogers so afraid of missing tomorrows. He was a heavy sleeper. He was mortally afraid of missing tomorrow's event glory early train glory so what he did was to buy and bring home in a to buy that evening and bring home not one but eight alarm clocks of different sizes and vigour of ticking nine eight eleven alarm clocks of different sizes ticking which alarm clocks nine alarm clocks as a cat has nine which he placed which made his bedroom look rather like a (50/33)

무슨 말인지 잘 알아먹기 힘들지만(번역도 부분적으로 맞는 것 같지 않다), 여기서도 로저스Rogers와 로저슨Rogerson은 트윈twin이며 분신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내일의 어떤 사건(영광)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서로 크기도 다르고 똑딱소리도 다른 8개의 알람시계를 사서 9시, 8시, 11시 등에 맞춰놓는다. “깊은 잠”이란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면, 이 말장난word-play이 배면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 죽음 극복에의 욕망이다. 이 욕망이 세바스챤에게서 자신의 창작으로 나타났다면, 동생 브이에게는 형의 삶을 전기의 형식으로 다시 복원하려는 의지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들은 로저스Rogers와 그를 따르는 로저슨Rogerson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방법이다. 8개(9개?)의 알람시계를 동원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이미 앞에서 얘기한 동시화의 세계가 아닐까.

SCENE 4

4.1. 나보코프의 이전의 러시아어 작품들이 그렇듯이 <참인생> 또한 게임적인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이미 세바스챤 나잇Sebastian Knight의 기사Knight와 그의 애인인 클레어 비숍Clare Bishop의 주교Bishop가 이미 장기의 말이름이다. 그리고 세바스챤이 죽은 장소인 성 다미에르St Damier에서 다미에르Damier는 불어로 장기판을 뜻한다. 이렇듯 게임소설novel as a game적인 성격과 자기 정체성의 탐구novel as a quest for identity의 병치라는 나보코프 특유의 전략은 어떤 효과를 유발하는가? 이 문제를 세바스챤이 쓴 소설들과 그에 대한 브이의 읽기를 따라가면서 생각해보기로 한다.

4.2. 세바스챤이 제일 처음 쓴 소설은 <무지개빛 단면The Prismatic Bezel>(1924)이다. 여기서 ‘무지개빛’이라는 건 프리즘을 통해서 투과된 빛의 분광을 뜻한다. 우리 눈에 그저 단순하게 한 가지로 보이는 빛이 실제로는 여러 가지 빛의 종합이라는 걸 프리즘은 보여주는 것인데, 이 프리즘이 바로 세바스챤에게서(그리고 나보코프에게서) 바로 소설이란 허구적 세계가 아닐까. 이 <무지개빛 단면>은 일종의 탐정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10장). 열두명의 사람들이 한 하숙집에 묵고 있는데, 아베슨G. Abeson이란 미술판매상이 자신의 방에서 살해된 채로 발견된고, 런던에서 탐정이 어렵사리 도착해 수사를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투숙객들이 다양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지는데, 이때 시체가 사라져버린다. 그러면서 이곳을 어슬렁거리던 행인인 늙은 노즈박Nosebag이 자신의 가발과 거은 안경을 벗어던지면서 자신이 아베슨임을 드러낸다. 여기서 노즈박Nosebag은 아베슨G. Abeson의 아나그램이다.

이렇듯 철자변환의 게임을 존재의 동일성 문제, 정체성의 문제와 관련짓는 세바스챤의 방식은 바로 나보코프의 그것이면서 이 <참인생>의 그것이기도 하다. 브이와 세바스챤 또한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아나그램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세바스챤의 이러한 방식을 브이는 ‘문학적 구성의 방법methods of literary composition’(114/79)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허구적 작품이 구성되는 원리인바, 그것을 브이(그리고 세바스챤)는 아나그램(=구성․편집의 문제)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세바스챤의 이러한 인식과 방법은 그의 마지막 소설인 <의심스러운 아스포델The Doubtful Asphodel>에도 이어지는 바, 거기서 그는 기법의 완벽함을 과시한다. 브이의 주석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부분들이 아니고, 그것들의 조합이다. It is not the parts that matter, it is their combination.”(216/148)

4.3. 두번째 소설인 <성공Success>에서 다루어지는 ‘인간 운명의 방법methods of human fate'은 이와 관련하여 작가의 문제를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소설 속에 나오는 윌리엄과 마술사의 대화를 보라.

“제가 토기 한 마리 사 드릴까요?” 윌리엄이 말한다. “필요하면 내가 하나를 만들지.” 마술사는 ‘필요한’이란 말이 무슨 끝없이 긴 리본이라도 되듯이 길게 빼면 대답한다. “괴상한 직업이예요, 소매치기가 미치죠, 주문만 외면 되니가요. 거지의 모자 속에 든 동전과 당신의 마술모자에 든 오믈렛, 말도 안되지만 같거든요.” 윌리엄이 말한다.

"May I buy you a rabbit?" asked William. "I'll hire one when necessary," the conjuror replied drawing out the "necessary" as if it were an endless ribbon. "A ridiculous profession," said William, "a pickpokek gone mad, a matter of patter. The pennies in a beggar's cap and the omelette in your top hat. Absurdly the same." (120/83)

마술모자 속의 오믈렛과 거지의 모자 속에 든 동전을 “말도 안되지만” 같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작가-마술사의 허구적 세계가 아닌가.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운명을 다루는 방법이다. “필요하다면” 한 인간의 운명을 만들어낼 수 있고, 또 조종할 수 있는 세계, 허구적 세계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무지개빛 단면>에서 피력된 구성방법과 더불어 <참인생>이 어떻게 읽혀야 하는가에 대한 안내 지침의 역할을 한다.



4.4. 세번째 소설인 <우스운 산The Funny Mountain>(1932)은 세 개의 단편 모음집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다른 방법으로 세 명의 불쌍한 여행자를 도와주는 실러Mr Siller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실러가 문제되는 것은 세바스챤의 마지막 여인을 찾아가는 브이의 여정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인물인 실버만Silverman이 이 실러를 빼닮았다는 데 있다. 즉 실버만은 허구적 인물인 실버의 현실적 구현체이다. 거꾸로 말하면, 실버만은 브이의 허구적 성격을 드러내주는 인물이다.(최유미, <The Real Life of Sebastian Knight 연구>(서울대 석사논문, 1992), 36-38쪽.)

“가장 정직한 중개인을 조심하라. 당신이 들은 것은 정말이지 세번 굴절된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Beware of the most honest broker. Remember that what you are told is threefold.”(66/44)는 브이의 내면의 메아리는 이제 그 자신의 실재성에 대한 의혹으로까지 확산된다(사실 <참인생>의 가장 믿음직한 브로커 행세를 하는 인물이 바로 화자-작가인 브이가 아닌가). 그러한 의혹은 사실 브이 자신에게서 먼저 터져나오고 있기도 하다. 바로 이어지는 대목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가 세바스챤 나잇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가? 내 양심 속에서 같은 음성이 반복된다. 정말이지 누구인가? Who is speaking of Sebastian Knight? repeats that voice in my conscience. Who indeed?” 만약에 <참인생>이 세바스챤의 여섯번째 소설이라면, 6이란 숫자와 브이와의 연관성은 앞에서 여러 번 지적한 바 있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론 결국 허구적 주인공인 브이가 작가 세바스챤의 삶에 대해 궁리하고 탐색하고 있는 형국이 된다. 이런 식의 읽기 또한 ‘가능한’ 읽기이다.



4.5. 사실 다른 나보코프의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참인생>에서도 어떤 고유한 유일한 읽기란 가능하지 않다. 그런 읽기를 통해 굿맨이 세바스찬 나잇의 문학세계를 규정지으면서, ‘불쌍한 나잇poor Knight’이 “소위 우리시대의 산물이며 희생자product and victim of what he calls ‘our time’”(77/52)라는 걸 보여주려한 것이 한낱, 브이에 의하면, “굿맨의 소극The Farce of Mr Goodman”이 되고 마는 것은 그런 유일한 읽기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심한 손가락innocent blind fingers”(98/67)으로 작품(열쇠)를 만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결국 브이가 실재적인 인물이든, 허구적인 인물이든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데, 다만 그의 존재가 그렇듯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것만을 유의하면 되겠다.

여기서 제3의 중재적인 해석도 생각해볼 수 있는데, 그것은 나보코프가 두 세계, 혹은 더 나아가 다(多)세계 모델을 세계관으로 견지하고 있었다는 관점이다. 그 관점에 의하면, 거울 안의 세계와 거울 바깥의 세계는 동일한 지위의 현실성을 갖는다. 이미 앞에서 6과 9의 숫자를 통해 브이와 세바스챤이 거울상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걸 지적한 바 있는데, 세바스챤의 시점에서 볼 때, 브이는 자신의 허구적인 거울상에 불과하고, 또 브이의 시점에서 볼 때, 세바스챤은 이미 죽은 인물로서 자신의 전기를 통해 재생되어야 하는 인물이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시점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비해 우월한 현실성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는 점이다. 이런 식의 두 세계 모델은 시간의 힘을 상대화시킨다는 강점을 가진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 세바스챤의 마지막 소설인 <의심스러운 에스포텔>에서 다루어지는 주제이기도 하다.

4.6. 세바스챤의 네번째 소설 <잃어버린 재산>은 브이에 의하면, 문학적인 발견의 여정에 있어서 일종의 정지halt이며 요약summing up이다. 이 소설의 한 장은 비행기 추락사고를 다루고 있는데, 떨어진 항공우편물 가방에 남아있는 편지들을 브이는 다시 소개하고 있다. 이들 중 연애편지는 당시 클레어 비숍과의 멀어져가는 관계에 대한 세바스챤의 안타까움이 직접 토로되고 있는 것으로도 읽히는데, 사랑에 대해 언급되고 있는 부분은 재미있으면서도 우리가 앞에서 지적했던 동시화의 문제와 연관해서 중요한 시사를 제공해준다.

사람은 천명의 친구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하렘은 이 문제와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나는 체조가 아니라 댄스에 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또는 사백 명의 부인들을 모두 다 사랑한 어느 거대한 터키인의 사랑을, 내가 당신을 사랑한 것처럼 상상해볼 수 있나요? 왜냐하면 만일 내가 <둘>이라고 말하면 나는 세기 시작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끝이 없지요. 오직 단 하나의 참 숫자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 그리고 사랑이란 이 단수 개념을 설명하는 최고의 대표자입니다.

One may have a thousand friends, but only one love-mate. Harems have nothing to do with this matter: I am speaking of dance, not gymnastics. Or can one imagin a tremendous Turk loving every one of his four hundred wives as I love you? For if I say "two" I have started to count and there is no end to it. There is only one real number: One. And love, apprently, is the best exponent of this singularity. (137/94)

여기서의 하나, 즉 단수성singularity은 앞에서 언급한 단수화synchronization과 유사한 의미연관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두 개인 것, 혹은 복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하나One라는 것은 정념론적 원리이면서 인식론적 원리이다. 아니 원리라기 보다는 차라리 가능조건이다(적어도 체조가 아니라 댄스가 문제되는 것이라면).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나보코프 소설에서의 여러 인물들은 작가 자신의 분신들이며, 또 이 분신들은 전체-나보코프Total Nabokov로 수렴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일(一)과 다(多)의 수렴, 발산운동이 그의 소설을 직조하는 원리가 되는 것이라. 한편으론 이 일과 다, 부분과 전체는 마치 프랙탈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부분은 전체를 고스란히 자기 안에 내포해 가지고 있다. 부분과 전체를 서로 닮은 꼴인 것이다. 브이가 세바스챤을 닮고, 세바스챤이 작가 나보코프를 닮는 과정은 이러한 일/다의 운동, 프랙탈 운동 과정에 다름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도 나보코프의 창조원리가 아닐까 싶다.



SCENE 5

5.1. 일/다의 수렴 발산 운동 대신에 왔다리 갔다리 식으로 이야기가 여기까지 뻗어나오게 되었다. 비는 여전히 줄기차게 내리는구만. 세바스챤의 마지막 소설로 넘어가기 전에, 그의 마지막 여인(마지막 사랑?)이었던 니나(=르세프)에게 브이가 정작 묻고 싶었던 질문을 하지 못하고 넘어간 이유를 잠시 음미해본다.

물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런 종류의 여인들에게 책이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을, 자기 자신의 삶이 백 권의 소설이 주는 스릴보다 더 야단스러울 텐데 만일 그녀가 만 하루 동안 도서관에 갇혀서 보내라는 선고를 받는다면 아마 점심 때쯤 죽은 시체로 발견되리라.

What was the asking! Books mean nothing to a woman of her kind; her own life seems to her to contain the thrills of hundred novels. Had she been condemned to spend a whole day shuy up in a liberary, she would have been found dead about noon.(213-4/146)

그런 니나가 세바스챤의 마지막 사랑이었을까? 사랑이었다니! 어쨌든 지금이라고 사정이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무수한 니나들이여! 가련한 얼간이들이여! 돼먹잖은 천사들이여!



5.2. 세바스챤의 마지막 소설 <의심스러운 아스포델>은 죽어가는 한 남자의 얘기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가 곧 책이다. 다른 건 그저 본문main subject에 딸린 주석commentary에 불과하다. 죽음에 대한 생각들과 상념들의 조합이 이 소설의 기법이면서 장기이다. 그는 마침내 삶과 죽음에 관한 온갖 질문의 대답인 ‘절대적인 해결’을 발견하는 데 이른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보아온 야생의 시골도, 자연스런 현상의 우연한 종합도 아니고 이런 산과 숲, 들과 강을 한 문장으로 집약시킬 수 있는 책 속의 지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여행자와 같은 것이었다.

[I]t was like a treaveller realizing that the wild country he surveys is not an accidential assembly of natural phenomena, but the page in a book where these mountains and forests, and fields, and rivers are disposed in such a way as to form a coherent sentence. (219/150)

이 깨달음은 단순하면서 아름답다. 그걸 감상할 수 있는 여유가 우리에게 있는가? 이어지는 문장은 <의심스러운 아스포델> 전체에서, 그리고 이 <참인생>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적인 문장이다.

이제 수수께끼는 풀렸다. ‘그리고 모든 것의 의미가 그들의 형태를 통해서 빛나면 최상으로 중요한 것같이 보였던 여러 생각들과 사건들은 사소한 것조차 되지 못한다. 이제 아무것도 사소한 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한때는 중요성을 부정하기도 했던 다른 생각들과 사건들과 같은 크기로 축소된다.’ 그렇게 하여 과학, 예술, 혹은 종교와 같은 우리 뇌의 빛나는 업적들은 분류의 친근한 계보로부터 떨어져나오고 합세한 손들은 서로 혼합되어 즐겁게 하나가 된다. 버찌의 씨와 어느 낡은 벤치, 그 페인트칠한 나무토막 위에 놓여 있던 그것의 조그만 그림자, 혹은 찢어진 조그만 종이조각, 혹은 수천 수백만의 사소한 것에서 떨어져 나온 어떤 다른 사소한 것은 신기한 크기로 자란다. 다시 조형되고 재조립되어 둘 다 숨쉬듯 자연스럽게 세상은 영혼에 그 의미를 제공한다.

Now the puzzle was solved. ‘And as the meaning of all things shone through their shapes, many ideas and events, which had seemed of the utmost import!ance dwindled not to insignificance, for nothing could be import!ant now, but to the same size which other ideas and events, once denied any import!ance, now attained.’ Thus, such shining giants of our brain as science, art or religion fell out of the familiar scheme of their classification, and joining hands, were mixed and joyfully levelled. Thus, a cherry stone and its tiny shadow which lay on the painted wood of a tired bench, or a bit of torn paper, or any other such trifle out of millions and millions of trifles grew to a wonderful size. Remodelled and re-combined, the world yield its sense to the soul as naturally as both breathed.(219-20/150)

다소 길지만, 내용은 대단히 의미깊다. <참인생>과 같은 “뇌의 빛나는 업적”을 스스로 무화시키면서, 재조형되는 세계, 그래서 새롭게 의미가 생성되는 사소한 세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사실, 브이가 세바스챤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떤가. 또 세바스챤이 “상대방에게는 법칙들을 알려주지도 않고 계속 자기가 고안해낸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222)으면 또 어떤가. 문제는 우리의 고유성 너머에 자연스레 숨쉬면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는 또다른 세계이다. <참인생>에 지시되어 있지만, <참인생> 저편에 있는 어떤 세계, 책장 너머의 세계, 그리고 이 “뇌의 빛나는 업적들”이 이루어놓은 자질구레한 제도들과 그 틈바구니 너머의 세계, 아니 이런 언어 저편의 세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숨은 가벼워지는 것을.

브이는 <의심스러운 아스포델>을 세바스챤의 모든 책 가운데 가장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그 책 자체로서 그걸 좋아한다고. 그 책의 전모를 다 읽은 것은 아니니까 나로선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위의 대목 같은 부분은 그냥 그 자체로 좋아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제대로 왔든 거꾸로 왔든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면 이제 사다리는 버려도 좋다.



ENDING

E.1. 나는 무얼 얘기했는가? 예전만큼의 정(신)력이 안된다는 걸 자백했는가? 이 피로 속에서(엄살이다). 어쨌거나 나보코프에 대해 몇 마디 할 얘기가 있었고, 그걸 <참인생>을 빌미로 삼아 하고자 했지만, 구성상의 문제로 말미암아 제대로 다 털어놓은 것 같지는 않다. 굿맨과 브이의 전기를 비교하는 것, 세바스챤의 여자 관계를 추적하는 것 따위가 얼른 생각에 여기에 담겨지지 않은 부분들이다. 사소한 걸로 내버려두면 되는 것인지?... 이젠 다 잊어버리기로 한다.

E.2. 그렇다고 전혀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다. 1장에서 “살갗을 따스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눈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펼쳐진 구름 한점 없는 하늘이 안겨주는 완벽한 사치. [T]he pure luxury of a cloudless sky designed not to warm the flesh, but solely to please the eye.”(10/5)라는 대목은 이 소설의 초점이 처음에는 시선(게임)의 측면에 있었음을 미리 말해준다. 그렇지만 이후의 전개과정에서 이 유희적 측면은 형이상학, 도덕적 측면에 너무 많은 걸 양보했고, 결국은 끝에 와서 죽음에 대한 성찰에까지 이르러버렸다. 이건 혹 작가 자신도 예기치 못한, 통제하지 못한 부분은 아니었을까(나는 “버찌 씨와 낡은 벤치”를 염두에 두고 있다).

Владимир Набоков Соглядатай

나보코프 자신이 이 작품을 불완전하다고 본 것은 바로 그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추측을 나는 내 식으로 해본다. 육체(살갗)/시선(눈)의 대립구도가 막판까지 유지되지 않은 것이다. 나보코프에게서 ‘눈(시선)’은 한 인간의 분신으로서 기능할 만큼 중심적이다(그의 <스파이Eye> 같은 작품). 즉 고골의 ‘코’를 대신하는 것이 바로 나보코프의 ‘눈’이다. 또 그의 여러 작품들에서 시선(시각)은 주인공-인물에 대한 작가-화자의 지배-권력 자체이다. 작가는 시선의 지배권자이기에. 이런 걸 좀더 잘 말할 수 있는 날이 조만간 오길 바란다. 그리고 지금은 무엇보다도, 살갗을 따스하게 해주는 햇빛이 좀 있었으면! 오갈데 없는 비만 줄기차게 내리고 있다...

08. 02. 12.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08-02-13 0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13 08:57   좋아요 0 | URL
반성만은 저도 게으르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2008-02-13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13 09:26   좋아요 0 | URL
네,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원서를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 거구요, 저는 보통 번역본을 읽다가 좀 불분명하다거나 중요한 대목이다 싶은 곳은 대조해서 봅니다. 장편소설의 경우도 마찬가지구요. 특별한 노하우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