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차하면 강의차 시외버스를 탈 뻔했지만 다행히 일정이 사라져 적어도 몸은 분주하지 않은 '세계 책의 날' 아침이다. 서재 일도 여느 주말처럼 밀려 있지만, '책의 날, 10개의 질문'에 답하는 것도 오늘의 의례인 듯싶어서 간단히 답변을 적는다. 엊그제 세상을 떠난 프린스의 'When Doves Cry'(1984)를 들으며(30년여 전에 듣던 노래지만, '퍼플레인'과 함께 여전히 그의 대표곡이로군).
날 계속 서있게 내버려 둘거니 (How can you just leave me standing)
혼자라는 건 너무 매정해 (Alone in the world that’s so cold)
우리는 왜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는 걸까? (Why do we scream at each other)
그 소리는 마치 (This is what it sounds like)
비둘기들이 우는 소리처럼 들려 (when doves cry)
Q1. 언제, 어디서 책 읽는 걸 좋아하십니까?
언제, 어디서건, 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지 않을 때를 제외하곤. 아니 읽을 수 없을 때를 제외하곤. 주로 카페에서, 버스에서, 기차에서. 그리고 집에서는 서재와 식탁에서. 때와 장소를 특별히 가려본 기억은 없는데, 책을 좋아한다면 때와 장소는 부차적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아, 종종 걸어다니면서도 읽습니다...
Q2. 독서 습관이 궁금합니다. 종이책을 읽으시나요? 전자책을 읽으시나요? 읽으면서 메모를 하거나 책을 접거나 하시나요?
모니터로 파일류를 읽을 때를 제외하곤 종이책입니다(종이책 포에버!). 읽으면서 메모를 하지는 않지만 형광펜으로 줄은 긋습니다. 강의를 하거나 원고를 쓸 때 필요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최적화한 방식입니다. 두 가지 브랜드의 연두색 형광펜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문구점에 들를 때마다 통으로 구입해둡니다(가장 저렴한 브랜드인데 모든 문구점에 비치돼 있지는 않아서요. 주로 녹색이 많은데, 제가 쓰는 건 연두색입니다). 그리고, 네, 책을 접습니다. 그래야 강의할 때나 서평을 쓸 때 인용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한 권을 읽거나 강의하게 되면, 그 흔적이 남습니다. 나중에 기억을 상기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Q3. 지금 침대 머리 맡에는 어떤 책이 놓여 있나요?
지금 침대 맡에는 책이 한권도 없습니다. 아예 없는 건 아니고 좀 널브러져 있는 걸 지난주에 치웠기 때문에. 침대에서 책을 읽는 일은 드물기 때문에(더는 일을 하거나 책을 읽을 수 없을 때 침대로 갑니다) 불편한 건 없어요. 그냥 아무 책이나 빼들고 자기 전에 10-20분 읽는 경우는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그렇게 읽은 책은 염상섭의 소설들입니다. 강의를 하고 있어서.
Q4. 개인 서재의 책들은 어떤 방식으로 배열해두시나요? 모든 책을 다 갖고 계시는 편인가요, 간소하게 줄이려고 애쓰는 편인가요?
'어떤 방식으로' 배열해두고 싶지만, 현실은 무작위에 가깝습니다. 90퍼센트의 책이 무작위로 꽂혀 있고, 그걸 재배열하기보다는 눈에 익혀서 적응하려고 합니다. 필요할 때 찾긴 찾아야 하니까. 책을 구입하는 대로 다 갖고 있느냐는 질문 같은데, 몇 차례 갖다 판 적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소장하고 있습니다. 다만, 공간 문제로 여러 곳에 분산돼 있어서 실제적으로는 '다 갖고 있다'는 게 무의미할 때가 많습니다. 또 사거나 대출해야 하는 경우가 자주 있어서요. 책의 관리는 5000권 이하에서 가능한 것 같습니다. 1만권 이상 넘어가면 통제가 어려운 듯. 지금은 2만권도 넘어간 상태이고(정확히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제 서재는 공화국이 아니라 무정부에 가깝습니다.
Q5.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책은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은 왜 하시나요? 그게 궁금하신가요? 저는 한번도 그런 게 궁금해본 적이 없는데. '네 어린시절을 말해주면 지금의 너에 대해 알려주겠다'는 식의 프로이트주의자가 아니라면 이런 질문은 '인생의 책'을 묻는 질문만큼 식상합니다. 참신한 질문을 궁리해보세요. 어릴 때도 책을 좋아했지만 '가장 좋아했던 책' 같은 건 없습니다(다른 책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저는 편애하지 않는 편입니다.
Q6. 당신 책장에 있는 책들 가운데 우리가 보면 놀랄 만한 책은 무엇일까요?
저도 놀라는 책이 가끔 있습니다. 그래도 기준이 다를 테니까 '당신들'이 보고 놀랄 책을 고르라면, (이건 안 갖고 있을 만한 책을 대보라는 거지요?) 내심 무리해서 구입했던 3권짜리 케임브리지대출판부판 <D. H. 로렌스 평전>이 있습니다. 각 시기별로 세 명의 저자가 쓴 건데, 분량만 2500쪽이 넘습니다. 로렌스의 전기를 몇 종 더 갖고 있는데, 사실 이 압도적인 분량에 혹해서 구입한 책이긴 합니다.
제 '로렌스 컬렉션'의 일부입니다. 제가 로렌스보다 좋아하는 작가는 많습니다. 러시아 작가들은 두말할 것도 없고. 당연히 이 이상의 컬렉션을 갖고 있습니다.
Q7. 고인이 되거나 살아 있는 작가들 중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면 누구를 만나고 싶습니까? 만나면 무엇을 알고 싶습니까?
만날 수 있다 하더라도 대화가 가능할지 의문이긴 한데, 당장은 프란츠 카프카와 만나서 그의 작품에 대한 제 해석을 들려주고 그의 생각을 듣고 싶네요. 카프카에 대한 책을 쓰고 있기도 해서. 근년에 나온 라이너 슈타흐의 결정판 평전에 대해서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의 생애와 작품이 이렇게 집요할 정도의 관심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구요(유고를 불태워달라는 유언을 배신한 절친 막스 브로트를 한번 더 흘겨볼까?).
Q8. 늘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읽지 못한 책이 있습니까?
박경리의 <토지>입니다. 결정본이라는 마로니에북스판이 전20권인데(인물사전까지 포함하면 21권) 이게 2012년에 나왔으니까 많이 늦은 건 아닙니다. 그 이전 판본으로 읽은 독자도 물론 있겠지만요. 어지간하면 대출하지 않고 구입해서 읽기 때문에, 이런 규모의 대하소설은 전셋집에 살면서 구입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구입과 독서가 가능해진 건 2년도 되지 않고 몇달 전에야 제1부를 구입해서 읽고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읽을 수 있는 여건이 아니기 때문에 맛보기로 좀 읽었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역시나 강의도 하고 싶습니다. 러시아나 유럽의 대하소설과 비교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Q9. 최근에 끝내지 못하고 내려놓은 책이 있다면요?
이건 부지기수입니다. 일주일에도 수십 권의 책을 '면접'하기 때문에. 그래서 '끝내지 못한 책'이라면 다 읽을 만한 시간적 여유가 있음에도 내려놓은 책을 지목해야 할 거 같은데, 그 정도로 형편없는 책이라면 아예 손에 들지도 않았을 테니, 이 또한 답하기 어렵네요. 그리고 원론적으로 책을 '끝내다''끝내지 못하다'가 무슨 의미인지 묻는다면, 사정은 더 꼬이겠습니다. 아, 프로이트의 <끝낼 수 있는 분석과 끝낼 수 없는 분석>(도서출판b, 2004)도 끝내지 못한 책이었네요. 어디에 있는지...
Q10. 무인도에 세 권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시겠습니까?
드디어 끝나는 질문인가요?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식상한 질문이긴 한데, 짐짓 진지하게 답하자면 두꺼워서 오래 읽을 수 있는 책이어야 하겠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권수 초과인가요?). 슬라보예 지젝의 <레스 댄 낫씽>도 유력하구요(번역본이 두 권이어서 문제라면 영어본을 들고 가야겠구요). <로빈슨 크루소>도 한권 들고가는 건 무인도에 대한 에티켓이라고 생각합니다...
16. 0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