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젤의 아침이 밝았다. 구름이 많이 낀 날씨이지만 어제 튠에서 일찍 환해졌는데 간밤에 서머타임이 해제되었기 때문이다. 상당수 유럽국가에서 3월하순부터 10월하순까지 1시간 당기는 서머타임제를 실시한다. 어제는(지난밤은) 그게 해제되는 날이었는데(마지막주 일요일새벽 3시가 2시로 돌려짐으로써 1시간이 늘어난다) 덕분에 같은 시각에 일어난다면 한시간 더 잔 게 된다. 덕분에 피로가 좀더 풀린 느낌.

라인강변의 바젤은 스위스에서 취리히와 제네바 다음으로 큰 도시다(로잔과 베른이 그 뒤를 잇는다). 바젤을 찾는 목적은 다양하겠으나 이번 문학기행에서는 바젤미술관에서 홀바인의 그림(무덤속의 그리스도)을 보는 게 핵심 미션이다. 1867년 8월, 도스토옙스키가 유럽여행중에 처음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은 그림으로 그의 소설 <백치>(1869)에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소설 <백치>와 홀바인의 그림에 대해서는 어제 인터라켄에서 바젤로 이동하는 중에 강의했다(문학기행에서 나의 담당인 문학강의는 주로 이동중에 진행된다. 거기에 짧은 현장강의가 더해진다).

바젤미술관에 가기 전에 우리는 바젤대학을 지나갈 예정인데 15세기(1460)에 건립된 스위스 최고(最古) 대학이다. 바젤을 대표하는 학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1860)의 저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이고(헤세의 <유리알 유희>(1943)에 나오는 야코부스 신부의 모델이다), 니체가 소장 문헌학 교수로 재직한 대학으로 알려져 있다(니체와 바젤의 인연은 끝이 좋지 았았지만. 니체는 <유리알 유희>에서 요제프 크네히트의 친구 테굴라리우스로 등장한다). 바젤대학이 내게 의미를 갖는다면 그 두 사람 때문이다.

바젤미술관을 둘러보고 점심을 먹고나서는 곧 취리히로 향하게 된다. 스위스를 한바퀴 돌아서 처음 출발지로 가는 셈. 스위스문학기행의도 어느덧 막바지 일정으로 접어드는 중이다...

(사진은 숙소에서 보이는 창밖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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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지붕
융프라우의 자부심은
지붕의 자부심
지붕이란 무엇인가
가을 산빛을 산아래 두고서
혼자 눈 맞은 융프라우요흐
눈보라에 펄럭이는 스위스 깃발을
두손으로 끌어안고
융프라우 정상에 오른 듯
기분을 낸다
세상의 국적은 모두 달라도
융프라우의 국적은 스위스
우리는 모두 스위스인이 되는 것
스위스의 지붕 아래 하나가 되는 것
융프라우의 호된 눈보라를 맞으며
비로소 알았네
우리의 이중국적
스위스성이란 무엇인가
몰래 학습하지
인터라켄으로
다시 내려와 궁리하지
인터라켄의 낙엽을 밟으며
융프라우의 기억을 떠올리지
세계의 지붕이란 무엇인가
전쟁 없는 세상을 꿈꾸지
영세 중립국
스위스 국적을 갖게 된 날
스위스의 깃발은
백십자의 깃발이라네
눈덮인 융프라우에서
펄럭이던 깃발
세계시민의 정신은
이중국적의 정신인 걸
나는 알았네
그래서 쓴다네
바젤로 떠나기 전에
이 시를 쓴다네
인터라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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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프라우로 가는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대기중이다. 케이블 터미널은 대표 관광지답게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단체관광객은 모두 중국인들(루가노부터는 숙소마다 중국인 관광객들을 볼 수 있었다).
(...)

융프라우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하산중이다. 몇분이 고산병 증세로 어려움을 겪었지만(대략 10퍼센트) 예상보다는 무난하게 일정을 소화했다. 시옹성을 찾는 관광객이 많다고 하지만 실감으론 융프라우가 스위스 관광의 시그니처이고 이름값만큼 관광객으로 붐볐다. 스위스 국기가 꽂혀있는 융프라우요흐 산마루에는 한겨울처럼 눈보라가 휘몰아쳐서 잠시 놀랐는데 곧 ‘겨울‘을 만끽하며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스위스의 랜드마크에서 인증샷까지 찍었으니 이제 할일을 다한 것 같다.

스위스문학기행의 6일차는 융프라우 등정이 핵심이다(융프라우 데이). 올라온 것과는 반대순서로 하산하여 인터라켄에 이르면, 이어서 바젤로 이동하고 자유시간을 갖게 된다. 문학기행의 마지막 일정은 바젤과 취리히의 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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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저의 도시는 따로 없겠지
발저는 산책가였으니
파리의 산책가 보들레르를 뺨칠
아니 따귀를 후려칠
산책가였으니
발저는 생의 마지막날까지
산책에 나섰던 거지
눈이 내리는 성탄절 아침에도
발저는 눈길을 꾹꾹 밟으며
걸음을 옮기는 일을
마치 성탄의식처럼
행했던 거지
눈덮인 산언덕에 이르러
마지막 열두 걸음을 옮기고
발저는 이제
생에서 손을 놓았지
지상에 남겨둔 두 켤레 같은
마지막 두 걸음 더
그러고는 누웠네
다 이룬 것처럼 누웠네
대자로 누웠네
그 바람에 모자가 날려
발저의 영혼길을 안내했다네
하늘에는 발저의 자리가 있을까
분명 정신요양원은 없을 테지
그래도 필시
발저는 산책을 멈출 수 없을 거야
경력 단절은 없을 거야
산책길 대화도 이어지겠지
연필로 쓴 작은 글씨도
다시 이어졌으면
그게 발저니까
로베르트 발저
눈길에 꾹꾹 새겨진
이름 로베르트
발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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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베른은 인구 14만의 도시(스위스에서 다섯번째라 한다). 도시의 아름다운 전경은 베른을 빠져나오는 언덕길에 오르고서 볼 수 있었다. 어제의 핵심일정이었던 로베르트 발저센터 방문을 마친 뒤에. 느긋하게 몽트뢰를 떠나 버스로 베른에 도착한 것은 12시가 되기 전이었다. 치즈퐁듀를 에피타이저로 한 점심을 마치고 짧게 구시가를 둘러본 뒤(아인슈타인하우스가 있었다. 내부로는 들어가지 않았는데 1903년-05년에 아인슈타인 가족이 살았다는 집이다) 예정시간에 맞추어 역시 구시가에 있는 발저센터를 찾았다.

발저센터는 건물 2층에 위치한 곳으로 연구소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발저의 사진들이 벽에 걸려있고 관련 유품들도 진열장에 전시돼 있었지만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발저의 책과 연구서, 번역서 때문에 ‘연구센터‘라고 해도 어울렸다. 회의나 세미나, 개인 연구자의 방문 등은 있었겠지만 단체관광객의 방문은 처음 받는 눈치였다. 우리는 담당자로부터 발저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를 듣고 질의응답시간을 가졌다. 발저를 전공한 담당자는 한국어 번역본들을 미리 테이블에 준비해놓고 있을 정도로 손님맞이에 진심이었다.

센터의 한쪽방 벽은 발저가 생을 마친 헤리자우 요양원 근방을 파노라마 사진으로 보여주었고 후견인 카를 젤리히의 책을 근거(<발저와의 산책>)로 만들어진 모형 지형도도 전시돼 있었다. 아직 한국어판은 나오지 않은 책인데(평전을 포함해 긴급하게 번역돼야 하는 책들이 있다), 가장 최근에 나왔다는 일어판이 눈길을 끌었다.

질의응답까지 1시간 반쯤 시간을 보내고 일행은 센터에서 판매하는 책들과 굿즈들을 구입했다. 내용만 보면 문학기행이라기보다는 학술기행 일정이었다. 발저센터 방문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랐다. 50분쯤 떨어진 튠시에서 일박하기 위해서였다. 이름이 생소한 튠은 인구 4만3천의 도시로 성(튠성)과 호수(튠호수)가 유명하다(중세에는요새도시였다고). 튠호수의 물이 아레강으로 흐르고 유람선도 운항한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본 튠호의 야경이 아름다웠다. 내일(그러니까 오늘) 날이 밝으면, 날이 밝기 전에 우리는 인터라켄으로 향하게 된다. 융프라우 등정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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