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의 윈도우가 업데이트되는 동안 황동규 시인의 <연옥의 봄>(문학과지성사)을 읽는다. 제목과 다르게 작년 늦가을(11월말)에 나온 시집이다(혹은 연옥에서는 11월이 봄인지도). 의당 갖고 있는 줄 알았는데 구매내역에 없어서 어제 뒤늦게 주문했던 시집.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간판 시인이기도 한 그의 시집은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부터 모두 갖고 있는 듯싶다. 대학 첫학기에 ‘대학영어‘를 황동규 교수에게 들은 인연 때문에 내가 기억하는 시인은 주로 30년 전 언저리의 모습이다. 어느새 시인도 팔순이고 시집의 다수 시편이 ‘마지막 날‘의 상상과 ‘별사‘로 읽힌다(마지막 시집이 아니길 희망한다). 시집의 문을 여는 ‘그믐밤‘도 그렇다.

여행 도중 받은 아끼던 제자의 부음,
벌써 가는 나인가 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별이나 보자꾸나, 민박집 나와 언덕을 오를 때
휴대폰 전짓불이 나갔다.

냄새로 달맞이꽃 무리를 거쳐
반딧불이만 몇 날아다니는 관목 덤불을 지났다.

빛이 다가오는가 했더니 물소리였다.
불빛 낮춘 조그만 방같이 환(幻)한 여울을 건넜다.
기다렸다는 듯 하늘에서 별이 하나 떨어졌다.

걸음 멈추고 아는 별들이 제대로 있나
잊혀진 별자리까지 찾아보았다.
더 내려오는 별은 없었다.
땅으로 숨을 돌리자 풀벌레 하나가
마음 쏟아질까 가늘게 울고 있었다.

시만 보더라도 누가 썼는지 알 수 있는 시다. 그만큼 황동규 풍이 완연하다(하기야 대다수 그의 시가 그러하다). 일단 그는 가면을 쓰지 않는다. 시적 페르소나가 따로 없어서 시에서 ‘나‘는 시인 자신이다. 이른바 맨얼굴의 시인이고 따라서 연기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솔직하고 정직하다. 그럼에도 시가 되는 것은 소위 ‘시적 긴장‘을 만들어내는 그의 언어 구사력과 발견술 덕분이다. 시인은 항상 발견하고 감탄하고 마음 환해진다. 그 환해진 마음을 적는 것이 또한 그의 시다.

이 시에서 시인은 여행길에 제자의 부음을 듣고서 별을 보러 언덕에 오른다. 관목덤불을 지나고 여울을 건너 어렵사리 언덕에 올라 별이 하나 떨어지는 것을 본다. 별이 지면 사람도 진다는 오랜 믿음! 그렇게 별과 인간의 운명이 상응하기에 마지막 연에서 별들의 안부를 유심히 관찰한다.

걸음 멈추고 아는 별들이 제대로 있나
잊혀진 별자리까지 찾아보았다.
더 내려오는 별은 없었다.
땅으로 숨을 돌리자 풀벌레 하나가
마음 쏟아질까 가늘게 울고 있었다.

˝더 내려오는 별˝이 없자 그나마 안도하며 언덕을 내려온다. 그러자 제자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비로소 절감한다. 그 대목을 시인은 ˝풀벌레 하나가 마음 쏟아질까 가늘게 울고 있었다˝고 표현했다. ˝나는 숨죽여 흐느꼈다˝ 정도를 대신하는 시구인데, 이런 대체에 의해 시적 긴장이 만들어진다. 시는 다르게 말하는 방법이기에. 그리고 이런 게 황동규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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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표적 한국학자(연구분야는 동아시아 국제관계까지 포함하지만)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현실문화)이 번역돼 나왔다. 대표작 <한국전쟁의 기원>의 업데이트 요약판이라 생각하고 원서가 나왔을 때 구입한 기억이 있다(이사한 이후로는 책의 행방을 알 수 없다). 더불어 책이 바로 번역되지 않아서 의아해 한 기억도(책은 2010년에 나왔다). 물론 제목에서 ‘기원‘이 빠진 만큼 한국전쟁을 훨씬 폭넓게 고찰한다.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한국전쟁과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꿨던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학 석좌교수가 총정리한 한국전쟁의 모든 것. 새로운 사료를 반영하고 아주 쉬운 필치로 써내려 간 역작이다.

저자는 한국전쟁의 발단과 전개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저항세력‘과 ‘부역세력‘ 사이에서 벌어졌던 대립,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의해 추진된 일본과 남한에서의 조치, 북한과 중국.러시아 사이의 관계 등 다양한 요소들의 영향을 되돌아보며, 이후 분단이라는 형태로 고착된 대결이 어떻게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지 폭넓게 살펴본다.˝

 말이 나온 김에 적자면 <한국전쟁의 기원>은 1980년대에 1권만 나왔다가 현재는 절판된 상태다. 2권까지 번역되지 않은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패러다임을 바꿨다고 하는 저작이 전문연구자들에게만 읽힌다는 건 유감스럽다. 이번에 나온 <한국전쟁>이 그나마 독자의 범위를 넓혀줄 것으로 기대돼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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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도 일을 한 셈이니 여느 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게 좋겠다고 침대에 누워서도(사실은 업드려서도) 아직은 말똥말똥한 상태라 책을 뒤적인다. 내주 강의와 관련된 책도 있고 무관한 책도 있다. 장석주의 <은유의 힘>(다산책방)은 무관한 책인데 손 가까이에 있다는 이유로 펼쳤다. ‘시에 관한 책‘도 시집처럼 아무 곳이나 펼쳐서 읽다가 덮으면 되는 이점이 있다. 그렇게 펼친 곳에 전문 인용된 시가 류경무의 ‘팬지‘다.

비를 기다리며 팬지를 심었지 흙의 자물쇠를 따고
나는 팬지를 거기로 돌려보내지

팬지는 위로만 꽃, 아래는 흙의 몸뚱이를 가졌지
나는 꽃을 움켜쥐고 아래를 쓰다듬었지

나를 만진 건 당신이 처음이야

옛날이었지 말미잘처럼 붙어살던 때
거긴 아주 물컹한 곳이었고
토악질하듯 갑자기 쏟아져나왔던 순간과

처음의 빛으로 구워지기 시작했던,
빛의 날들을 우리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
팬지도 지금 그럴까

나는 수많은 팬지를 실어나르지
팬지는 색색의 여린 잎을 벌려 다른 나라의 말로 조잘거리고
나는 그 나라의 말로 대답해주네

팬지를 심으며 나도 팬지라는 이름을 다시 얻고 싶었지
참 좋은 어딘가로 팬지와 함께 땅에 붙어서 가고 싶었지

팬지는 자꾸 줄어들고 있었네
하나둘 팔랑거리며 팬지는 내 손을 떠나갔네

이 시가 <은유의 힘>에서 인용된 것은 ‘팬지‘가 무엇인가를, 누군가를 대신하는 은유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적 화자의 연인이었겠다. 다시 보면 시에서 팬지는 팬지로서도 등장하고 은유로서도 나온다. 대략 앞의 두 연과 뒤의 세 연의 팬지는 팬지꽃이고 그 사이 세 연의 팬지는 옛날 연인의 은유로서의 팬지다. ˝나를 만진 건 당신이 처음이야˝(3연)란 고백을 매개로 두 팬지는 연결된다.

장석주 시인의 해설. ˝몸뚱이, 쓰다듬다, 붙어살다, 벌리다 같은 어휘들은 팬지가 성애적 경험의 대상이라는 암시를 강하게 풍긴다. 한 대상과의 애착과 분리의 경험을 진술하는 이 시가 낭만적 사랑에 대한 기억을 환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낭만적 사랑‘이라고 특정할 필요와 근거는 모르겠지만 동의할 수 있는 해석이다. 팬지를 심으며 시적 화자가 떠올린 팬지와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4-5연이 그 사랑에 대한 진술인데, 좀 특이하게 묘사된다.

옛날이었지 말미잘처럼 붙어살던 때
거긴 아주 물컹한 곳이었고
토악질하듯 갑자기 쏟아져나왔던 순간과

처음의 빛으로 구워지기 시작했던,
빛의 날들을 우리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
팬지도 지금 그럴까

시제상으론 옛날이고, 구문상으로 ˝갑자기 쏟아져나왔던 순간˝과 ˝빛의 날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줄거리다. 그런데 기억의 주체는 왜 ‘우리‘일까? 이어서 ˝팬지도 지금 그럴까˝라고 궁금해 하는 걸 보면 ‘우리‘에는 팬지가 포함되지 않는다. ˝나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 팬지도 지금 그럴까˝라고 해야 의미상 자연스럽다. ‘우리‘라고 한 건 미스터리(복잡하게 읽으면 팬지는 ‘우리‘의 안에도 있고 바깥에도 있다). ˝말미잘처럼 붙어살던 때˝도 팬지의 생활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또 의문을 갖게 하는 대목.

팬지를 심으며 나도 팬지라는 이름을 다시 얻고 싶었지

시에서 팬지는 사랑의 대상이었는데 팬지라는 이름을 다시 얻고 싶었다는 진술에 따르자면 바로 ‘내‘가 팬지였다! 그렇다면 사랑의 주체와 대상, 나와 당신이 모두 팬지라는 것인가? 팬지에 대한 흥미로운 연상을 이끌어내는 시이지만 논리적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들을 포함하고 있다.

다양한 색감이 팬지의 특징이자 매력일 텐데, ˝팬지는 색색의 여린 잎을 벌려 다른 나라의 말로 조잘거리고/ 나는 그 나라의 말로 대답해주네˝라는 시구는 그 점을 잘 포착하고 있다. 분석적으로 읽으면 처음에 주목하지 않은 부분들에도 주목하게 된다(그렇지만 이 시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처음 세 연이다). 찾아보니 팬지의 꽃말은 ‘사색‘(나를 생각해주세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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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날씨구나 싶은 날에 외출했다 돌아오니 아랫목을 찾는 기분으로 침대로 직행하게 된다. 읽을 책 몇권을 침대맡에 두고 펼쳐보는데 천양희 시인의 <새벽에 생각하다>(문학과지성사)도 그중 하나다. 올봄에 나온 시집이지만 나는 뒤늦게 어제서야 주문하고 받았다.

이 시인의 시를 읽은 게 대체 언젯적인가 생각해보는데 20년은 훌쩍 넘기지 않을까 싶다. 42년생이니 시인의 나이도 70대 중반이다(그보다 고령인 현역 여성시인이 또 있는지?). 아하, ‘일흔 살의 인터뷰‘라는 시도 있다!

몇편의 시를 앞뒤로 읽다가 마음에 드는 시와 만났다. ‘구별되지 않는 일들‘이 제목인데, 검색해보니 발표시에는 ‘쓴맛‘이란 제목이었다.

쑥부쟁이와 구절초와 벌개미취가 잘 구별되지 않고
나팔꽃과 메꽃이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은사시나무와 자작나무가 잘 구별되지 않고
미모사와 신경초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안개와 는개가 잘 구별되지 않고
이슬비와 가랑비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왜가리와 두루미가 잘 구별되지 않고
개와 늑대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적당히 사는 것과 대충 사는 것이 잘 구별되지 않고
잡념 없는 사람과 잡음 없는 사람이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평생을 바라본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왜 그럴까
구별없는 하늘에 물었습니다
구별되지 않는 것은 쓴맛의 깊이를 모른다는 것이지

빗방울 하나가 내 이마에
대답처럼 떨어졌습니다

따로 해독이나 해석이 필요하지 않은 시다. 잘 구별되지 않는 것들을 나열하고 있지만 시는 명징하고 빗방울 하나처럼 분명하다. 더불어 그 빗방울은 독자의 이마에도 떨어진다. 나이에서 오는 지혜이지만 또 이런 시들을 쓸 때 시인의 나이는 흔히 하는 말로 숫자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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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오후에 무라카미 하루키 강의차 도심에 나왔다가 저녁까지 먹고 귀가하는 참이다. 오늘 주로 다룬 <기사단장 죽이기>(문학동네) 외에 일본인 평론가와 저널리스트가 합작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오후>(국일미디어)를 가방에 넣어왔는데 귀갓길에서야 펼쳤다.(그러고는 눈을 붙였다.)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부터 <여자 없는 남자들>까지 대상으로 다루고 있는 책인데 최근작인 <기사단장 죽이기>에 대한 내용은 빠져 있다(그럼에도 내년초에 진행할 하루키 강의를 준비하는데 유익한 참고자료로 삼을 수 있겠다). 두 저자가 대담 형식으로 특히 자세히 다루고 있는 건 <1Q84>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이다. 그 이후에 나온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서는 ‘드라이브 마이 카‘와 ‘예스터데이‘가 대담에서 언급된다. 주로 후기작에 방점이 놓인 셈.

<다자키 쓰쿠루>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을 소개하면서 공저자의 한 명은 이렇게 말한다. ˝오랜 기간 무라카미 씨 작품을 읽어온 사람은 ‘오랜만에 힘이 났습니다‘라고 하고, 그다지 많이 읽지 않았던 나람이라도 ‘재미있어서 끝까지 다 읽었습니다‘라며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더군요.˝

이런 반응은 <기사단장 죽이기>에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까 싶다. 거기에 보태자면, ˝재미는 있지만 재탕이 심한데요.˝ 실제로 하루키 소설을 얼마간 읽어온 독자라면 곳곳에서 기시감을 갖게 된다. 결과적으로 처음 읽어도 오래 전에 읽었다가 다시 읽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나 같은 독자에게 <기사단장 죽이기>의 최대 유익은 각권에 붙은 부제, 곧 ‘현현하는 이데아‘와 ‘전이하는 메타포‘에 있다. 작품에서 인물로 등장하는 ‘이데아‘와 ‘메타포‘, 두 개념을 하루키 문학의 분석도구로 쓸 수 있겠다 싶어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소설은 하루키 소설의 종합판이자 자가분석서로 읽을 수 있다. 이전작들에서 이데아와 메타포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꽤 효과적이 작품분석이 될 터이다(이런 일은 대학원생들에게 과제로 내줌직하다).

나머지 자세한 분석은 나중에 진행할 강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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