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인디고에서의 행사를 마치고 귀경중이다. 이제 대전을 지나니 자정을 훌쩍 넘겨서 귀가할 것이다. KTX 죄석에 비치된 매거진에서 ‘동유럽 예술기차 여행‘ 기사를 읽다가(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체코 3개국 여행기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기차로 2시간 30분 거리에 있다는 도시 그문덴에서 눈길이 멈추었다. 트라운제 호수를 품은 도시인데(브람스가 사랑한 도시란다), 호수 위 작은 섬에 지어진 성이 오르트성이다. 풍광이 인상적이어서 사진들을 찾아보고 몇장 올린다. 가볼 날이 있을까 싶지만, 인생 모르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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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문학을 강의하면서는 프랑스문학과 러시아문학의 ‘평행이론‘을 소개하곤 하는데(가령 발자크와 푸슈킨은 똑같이 1799년생이고, 플로베르와 도스토예프스키도 1821년생으로 생년이 같다), 미국문학과 러시아문학 사이에도 평행이론이 성립한다. 근거 가운데 하나가 러시아 농노제 폐지(1861)와 미국의 노예해방(1865)이다.

문학사에서 각각 농노제 폐지와 노예해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작품으로 꼽히는 게 투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수기>(1852)와 스토 여사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1852)이다. 이번 주에 <사냥꾼의 수기>에 대한 강의를 상당히 오랜만에 하게 되었고 내년 봄에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도 강의에서 처음 다룰 예정이다(물론 누구의 주문도 아니고 내가 일정을 그렇게 잡았다). 단편집과 장편소설이란 차이점이 있지만 문학의 사회적, 정치적 역할이란 면에서 많이 비교되는 작품들이기도 하다(강의에서도 그렇게 비교해볼 참이다).

아쉬운 것은 <사냥꾼의 수기> 번역본이 현재 한 종밖에 없다는 점. 25편을 모두 수록하고 있는 번역본은 동서문화사판이 유일하다. 얼마 전에 투르게네프의 장편들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아쉬움을 표했지만 사정은 단편에서도 마찬가지다. 투르게네프의 단편들은 미국의 저명한 비평가 해럴드 블룸도 엄지손가락을 치켜들 정도로 수일하다. 복수의 번역본을 음미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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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루스 2023-04-21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문당 출판사에 투르게네프 단편집 김학수 선생님 역으로 나온 거 있습니다!
 

세계문학에 대한 강의로 세계일주를 하는 게 지난 10여 년간 내가 해온 일인데, 어느새 두 바퀴째 도는 상황이 되었다(안 가본 대륙도 있긴 하지만). 이번 학기 러시아문학 강의에 이어서 겨울부터는 미국문학 강의를 진행할 예정. 미국에는 가본 적이 없지만(트럼프 재임중에는 더더욱 없을 것 같다), 미국문학은 재방문이다.

강의에서 주로 다루는 미국문학은 19세기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인데 작가로는 워싱턴 어빙부터 존 스타인벡까지다. 19세기와 20세기 경계에 위치한 작가가 남성작가로는 헨리 제임스, 여성작가론 이디스 워튼이다. 워튼은 그간에 한번도 다룬 적이 없었다(헨리 제임스의 경우에도 <나사의 회전>만 읽었더랬다). 이번 가을에 <순수의 시대>를 일부러 일정에 포함시켰고 겨울에는 <이선 프롬>까지 읽어볼 예정.

독서도 일종의 ‘방문‘이라 사전에 일정을 잡고 여러 가지 준비도 해야 한다. 한 작가의 (작품)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기에 마치 여행을 준비하듯 (책)짐도 싸고 미지의 세계에 대해 기대도 품다 보면 설레임마저 느끼게 된다. 이번 방문지는 1870년대 뉴욕의 상류사회다.

1921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순수의 시대>(1920)는 워튼 여사가 58세 발표한 작품으로 후기작에 해당한다. 순서대로 하면 <기쁨의 집>(<환락의 집>)(1905), <이선 프롬>(1911), <그 지방의 관습>(1913) 등이 그보다 앞서 발표된 작품들. 한권만 고른다면 대표작으로 <순수의 시대>를 꼽을 수밖에 없고 번역본도 가장 많이 나와 있다.

<순수의 시대>를 읽으며 책의 부피감을 느끼다 보니 이제 이디스 워튼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인가란 생각에 감회마저 생긴다. 완독한 이후에는 워튼 여사와의 면담도 진행할 예정이다. 가상의 대화이지만 벌써 기대가 된다. 한 사람과 만나는 것은 하나의 세계 전체와 만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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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듬의 시집을 몇권 갖고 있지만 특별히 떠오르는 시가 없으므로 내게 각별한 시인은 아니다. 다만 열렬 지지자들을 거느린 시인이라는 것 정도가 내가 가진 정보. 그럼에도 <표류하는 흑발>(민음사)이라는 시집 제목이 ‘김이듬스럽다‘고 느꼈다. 그로테스크한 은유가 지배하는 세계?

서문을 대신한 시인의 말은 한 줄이다. ˝바람이 불었고 나는 움직였다˝. 역시나 뭔가를 말하면서 동시에 숨기는 게, 직접 말하기보다 돌려서 말하고 비유적으로 말하고 비틀어서 말하는 게 김이듬의 전략이고 스타일로 보인다. 거꾸로 그의 시를 읽는 건 그가 숨기려고 하거나 돌려 말하고 있는 어떤 진실과 대면하는 것일까?

갈피를 잡히지 않기 위해서 표류하는 말들 위로 떠다니다가 종점처럼 도착하게 되는 곳이 시집의 마지막 시 ‘노량진‘이다. 앞선 시집들에 실린 시 제목들을 다 살펴본 건 아니지만 이런 구체적인 지명은 김이듬 시에서 이례적이지 않을까 싶다(아, 시집에는 ‘연희동‘도 있긴 하다). ‘노량진‘은 마지막 시이면서 이 시집의 고정점(누빔점/정박점)이라 부르고 싶다. 나대로 시집에서 한편만 고른다면 ‘노량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시집 전체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도 ‘노량진‘의 한 연이다.

가끔 하늘을 보지만 하늘은 나를 보지 않는다
모양은 달라졌으나 구름에는 언제나 죽은 이들과 함께 흐르려는 취지가 있다

이 대목은 ˝시체 몇 구가 하늘에 떠 있다˝는 첫 연과 호응한다. 구름을 시체에 비유하고 있는데 그렇게 시체들이 떠 있는 하늘 아래서 살아가는 일이 아름답게 그려질 리 만무하다. 시는 노량진 학원가에서 만난 두 사람의 대화 장면을 배경으로 깔고 있는데(이 정도로 선명하게 제시되는 것도 김이듬 시에서는 이례적일 거라고 짐작한다), 아마 시에서 ‘나‘와 ‘너‘는 가족 관계로 추정된다.

너는 내게 화난 사람처럼 보인다고 하고
진짜야
화나지 않았다고 나는 대답한다
너는 쓰러질 것 같아 보이는데 움츠리며 괜찮다고 한다

오답 노트를 잃어버렸어

‘오답노트‘를 잃어버렸다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상황은 아주 구체적이다. ‘너‘는 노량진 학원가의 재수생이고 ‘나‘는 염려차 혹은 위문차 찾아온 가족이다. 이어지는 연에서의 진술을 참고하면 ‘‘너‘는 나이가 스물넷이나 되었지만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이라는 다짐으로 입시에 도전하려 한다. ‘나‘는 그런 ‘너‘가 안쓰러우면서도 화가 치민다.

우리의 빰엔 골목길 벽보 뗀 자리처럼 진득한 자국이 있다
이 얼굴이 굳어 인상이 되고 개성이 된다고 해도
나는 이것을 팔아 피와 고기를 만들었다

인상적인 비유인데 아무튼 ‘얼굴‘ 팔아가며 어렵사리 생계를 꾸렸고 가족을 부양했다. 그 다음 연에서 ˝가끔 하늘을 보지만 하늘은 나를 보지 않는다˝는 건, 하늘이 외면한다는 뜻이니 사는 것 같지 않게 살고 있다는 뜻이겠다.

네 방의 불이 꺼지기를 기다리면서
반지하에서 자라나는 기대와 좌절의 밀도를 나는 모른다
동정하지 않는다
어깨에 손을 얹는 일 없다
너는 잘 수 없어도 나는 돌아가 잠들 것이다

정황을 추정해보면 ‘너‘는 사수 혹은 오수생으로 반지하 자취방에서 밤늦도록 몸을 상해 가며 입시공부에 매달려 있고 ‘나‘는 그런 ‘너‘가 안쓰럽고 착잡하다. 이제 마지막 연이다.

외따로 떨어지는 사람을 안도하여
나는 답을 못 썼다
그것이 정련 과정인 줄 알고 나아갔으나
마모 한계선을 넘은 바퀴는 방향을 잃는다
지난 생이 내 마지막 실감이었다는 걸 나만 모르는 것 같다

답을 못 썼다는 건, 문자 메시지 같은 것에 답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읽힌다. ‘나‘는 상황에 대해서 자못 비관적인데 ‘나‘의 인내는 임계치에 도달해 있다. ˝지난 생˝이 ˝마지막 실감˝이었다는 얘기는 ‘이번 생‘의 절망감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읽힌다.

시집의 마지막 시이기에 상징성을 갖고 있으면서 내막을 좀 드러낸 시라 시상의 추이를 따라왔는데 나로선 늦깎이 재수생 가족이 노량진에서 고생하고 있는 상황이 ˝시체 몇 구가 하늘에 떠 있다˝는 인식과 과연 알맞게 조응하고 있느냐는 의심이 든다. 많이 봐주어도 과장법 아닌가(김이듬 시는 과장법의 시인가?).

˝가끔 하늘을 보지만 하늘은 나를 보지 않는다˝고 진술할 만한 내역을 시인은 충분히 보여준 것인가? 그것이 누적된 것이라면 모를까 ‘노량진‘에서는 찾기 어럽다. ‘노량진‘이 이 시집에서 가장 읽을 만하다고(납득할 만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전적으로 공감하지는 못하는 이유다. 표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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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시에 대한 강의도 간간이 하고는 했지만 하한선은 기형도였다. 기형도 이후, 혹은 2000년대 이후 시인들에 대해서는 그 전 세대 시인들만큼 관심을 갖지 않았고 그래서 덜 읽었다. 어느샌가 생소한 시인들이 늘었고 읽지 않은 시집도 차츰 쌓였는데, 어쩌다 넘겨본 시집들에 동의할 수 있는, 공감할 수 있는 시를 발견하는 일도 드물어서 나로선 더 데면데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소설을 중심으로 한국현대문학 강의도 본격적으로 진행하게 되면서 현대시에 대한 강의도 다시 기획하게 되었다. 아마도 내년에는 일정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일정을 염두에 두면서 최근에 나온 시집들도 챙겨보고 있다. 이번주에 훑어본 건 이병률의 <바다는 잘 있습니다>(문학과지성사)와 김이듬의 <표류하는 흑발>(민음사)이다.

여유가 있다면 두 시집에 대해서 내가 지지하는것과 지지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자세히 말해볼 테지만, 그건 나중의 일로 미루고 요지만을 적는다. 내가 지지하고 공감하는 시를 더 자주 만나기 위한 계산속으로.

내가 지지하지 않는 건 안이한 포즈의 시, 근거없이 난해한 시, 가짜 감정으로 허세 부리는 시들이다. 그렇게만 적으니 누구라도 그렇지 않겠느냐 하겠다. 부분만 떼어서 읽는 게 허용된다면, <바다는 잘 있습니다>에서 집히는 대로 적는다.

만나도 모르는 사람들
몰라도 만나는 사람들 (‘사람의 재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버릴 수 없습니다 (‘청춘의 기습‘)

멍이 드는 관계가 있습니다
멍이 나가는 관계가 있습니다 (‘호수‘)

등등. 내게는 심오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구절들이다. 그와 비교한다면 내가 보기에 시집에서 가장 뛰어난 성취는 ‘내가 쓴 것‘ 같은 시다.

눈을 뜨고 잠을 잘 수는 없어
창문을 열어 두고 잠을 잤더니
어느새 나무 이파리 한 장이 들어와 내 옆에서 잠을 잔다

그날 아침
카페에 앉아 내가 쓴 시들을 펴놓고 보다가
잠시 밖엘 나갔다 왔는데
닫지 않은 문 사이로 바람이 몹시 들이쳤나 보다

들어와서 내가 본 풍경은
카페에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람에 흩어진 종이들을 주워
내 테이블 위에다 한 장 두 장 올려다 놓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우리들은 금세 붉어지는 눈을
그것도 두 개나 가지고 있다니
그럼에도 볼 수 없는 것들도 있다니

사실은 내가 쓰려고 쓰는 것이 시이기보다는
쓸 수 없어서 시일 때가 있다 (‘내가 쓴 것‘)

전문을 다 옮긴 건 완벽해서다. 다른 게 찬란한 게 아니라 이런 시들이 찬란하다. 한데 역설적인 건, 이 시가 묘사하는 풍경이다. 시인의 시보다 더 시답고 찬란한 건 시를 둘러싼 풍경, 구체적으론 바람에 날린 종이들을 카페 사람들이 주워서 테이블에 올려놓는 장면이다. 그걸 보고서 눈시울이 붉어진 시인 자신의 모습이다.

‘내가 쓴 것‘에서 힌트를 얻자면 <바다는 잘 있습니다>에는 ˝쓰려고 쓰는 것˝과 ˝쓸 수 없는 것˝이 섞여 있다. 이병률은 시를 쓰려고 할 때가 아니라 시를 쓸 수 없을 때 시인이 된다. 시인으로 포즈를 잡을 때가 아니라 스스로 벌레 같다고 느낄 때 시인이 된다(‘비를 피하려고‘). 곧 시의 포즈를 취할 때 그의 시는 시답잖고 시의 바깥에 있을 때 그의 시는 오히려 빛난다.

독자로서 나의 계산속은 ‘내가 쓴 것‘ 같은 시를 더 읽고 싶다는 것. 그런데 그건 시인에게만 부탁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한 편의 시가 되기 위해서는 한 잎의 이파리부터 생각 없는 바람과 카페에 모인 사람들까지 다 동원되어야 하겠기에.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시를 ‘마음속 혼잣말‘에 비유했는데 영문을 모르고 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시는 그 혼자만 쓴 게 아니어서 비로소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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