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김규항-고종석의 문체에 대한 생각'이란 제목으로 재작년 6월 모스크바통신에 올렸던 글을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둔다. 고종석에 대한 부분만 따로 떼내어 보강하려다가 '자료' 차원에서 글 전체를 다시 옮겨놓기로 한 것이고, 대신에 이미지들을 보강해 넣기로 한다. 문학비평가 롤랑 바르트가 정의한 바대로 문체가 '양파' 껍질 같은 것이라면, 내가 여기서 다루려고 하는 것은 김훈, 김규항, 고종석이라는 세 종류의 양파가 되겠다.  

문체에 대한 나의 몇 가지 생각을 적고자 한다. 먼저, 자신만의 독특한 ‘얼굴’ 혹은 ‘손가락’을 가진 작가로 제일 먼저 손꼽을 수 있는 사람이 김훈이다. 그는 소설가이기 전에 에세이스트였고, 에세이스트이기 전에 언론사 기자였다. 그는 자신의 직업과 표정을 그렇게 변화시켜가고 있지만, 나에게 소설가로서의 김훈은 좀 낯설다. 문학판의 각광에도 불구하고(그는 두번째 장편으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고, 첫번째 단편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런 건 그들만의 ‘비즈니스’이다. 작품이 있으니까 상을 주는 게 아니라, 상이 있으니까 작품을 찾는 것이 문학/출판계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소설가의 손가락’이 아니라 ‘에세이스트의 손가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주제를 모른다거나 어리석은 것은 결코 아니다. 에세이로서는 ‘밥벌이’를 할 수 없는 나라가 한국이며, 그는 ‘밥벌이’의 신성함을 누구보다도 ‘지겹도록’ 맹신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현재 오랜 기자생활을 그만 둔 그에게 소설쓰기는 그의 밥벌이, 즉 그의 비즈니스이다. 도둑질을 하거나 사기를 치는 게 아닌 이상 남의 밥벌이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은 좀 우스운 일이다. 그건 각자의 문제이다. 그래서 예컨대, 화장실 청소원에게 혹 “그것도 밥벌이냐?”고 묻는 것은 우스운 일을 넘어서 아주 무례한 일이다. 세상의 밥벌이에는 귀천(貴賤)이 없으므로.

 

 

 

 

나는 김훈의 에세이들을 ‘숭배’하지만(나는 그것들이 국어교과서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소설들은 아직 한편도 읽지 않았다. 그의 에세이들은 출간되자 마자 사들였지만(어떤 건 몇 권씩),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칼의 노래>, <현의 노래> 세 장편 소설에 대해서는 무심하게 대했다. <빗살무늬>는 품절된 이후에야 사려고 돌아다녔는데, 결국 내가 샀는지 못 샀는지도 기억나지 않으며, <칼의 노래>는 대폭 할인할 때에야 ‘싼 맛’에 샀고, <현의 노래>는 사두지 못한 채 모스크바에 왔다. 그러니 내가 그의 소설들에 대해서 말할 ‘지분’은 별로 없는 셈이다.

대신에 나는 북매거진 <텍스트>(2004년 4월호)에서 <현의 노래>에 대한 두 편의 서평을 읽었고, 이 소설에 대한 그림을 대충 그려볼 수 있었는데, 그건 읽지 않은 상태에서 그린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이하의 인용은 모두 두 서평으로부터의 재인용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는 그를 잘 안다고도 말할 수 있다(하긴, 소설을 제외한 그의 글과 인터뷰 대부분을 찾아 읽었으니까). 단적으로 말해서, ‘장편소설’이라고 표지에 박혀 있더라도, 그런 걸 세 권이나 냈더라도 그는 아직 단 한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다. 그가 쓴 건 에세이스트의 손가락이 쓴 역사 ‘에세이’이고, 혹은 그에 대한 ‘판타지’이거나 ‘모노드라마’들이다. 그건 박상륭의 ‘잡설’들이 ‘소설’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어떻게 해도 감추어지지 않는, 그의 ‘문체’ 때문이다. 흔히 ‘아름답다’ 혹은 ‘현란하다’고 일컬어지는 것 말이다. 요컨대, 그의 문체는 소설이란 장르, 품위 없고 잡스러운 장르가 요구하는 바 일상적 디테일, 저자거리의 언어를 담기에는 너무 고상하며 품위가 넘쳐난다. 그래서 어색하다. 마치 장미희가 떡장사를 연기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가 아무리 “소설이요!”라고 외쳐도 내겐 “똑 사세요!”로 들린다.

<텍스트>의 두 서평은 ‘모노톤의 복화술’(김용필)과 ‘문체의 아름다움이 놓친 몇 가지’(조은영)란 제목으로 돼 있는데, 서평자들이 지적하는 바나 내가 지금 얘기하는 거나 같은 얘기이다. 그의 소설은 ‘모노드라마’이며, 문체의 아름다움 때문에 소설을 ‘망쳤다’는 얘기니까. 조은영 기자의 서평은 “그렇다면, 김훈의 진정한 3인칭 소설, 최초의 3인칭 소설은 아직 씌어지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라는 조심스러운 진단으로 마무리되고 있는데, 나는 그것이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물론 신중함은 기자로서의 조건이다). 그는 3인칭 소설은커녕, 소설 자체를 쓴 일이 없고, 앞으로도 별로 쓸 일이 없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예컨대, 김훈은 한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한다: “악기를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그 구멍과 줄과 떨림판과 건반 어디에도 소리의 흔적은 없다. 악기는 소리의 집이지만, 소리는 그 집에서 살지 않는다. 소리는 어디에 있느냐. 소리는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에서 죽느냐. 나는 소리의 거처를 알지 못하지만, 소리는 악기와 그 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의 몸 사이에서 아날로그 방식으로 태어나고 죽는다.”(<밥벌이의 지겨움>, 19쪽) 이런 건, 그의 에세이들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사유이고, 문장이지만, 소설로는 옮겨질 수 없는 문장이다(뿐만 아니라 번역되기도 곤란한 문장들이다. 박상륭의 잡설들이 번역 불가능한 것처럼, 김훈의 에세이들도 번역 불가능하다).

그것이 <현의 노래>에서 “소리는 몸속에 있지 않다. 그러나 몸이 아니면 소리를 빌려올 수가 없다. 잠시 빌려오는 것이다. 빌려서 쓰고 곧 돌려주는 것이다. 소리를 곧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 자리는 적막이다. 그 짧은 동안만 흔들리고 구르고 굽이치는 것이다. 소리를 거스를 수 없다.”라는 우륵의 말로 가장(假裝)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게 김훈의 목소리임을 이미 알고 있다. 요컨대, 그의 소설의 언어는 에세이의 언어를 “잠시 빌려오는 것이며, 빌려서 쓰고 곧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그 에세이의 자리는 그가 <풍경과 상처>나 <자전거여행>에서 적었듯이 물론 ‘적막’이다(이 적막으로는 밥벌이가 되지 않는다!). 나는 그가 “짧은 동안만 흔들리고 구르고 굽이치다가”(빨리 한몫잡고서!) 곧 제자리, 에세이스트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에세이를 거스를 수는 없다.” 그 정신, 그 문체, 그 손가락, 그 적막을!



김훈의 보수주의를 이문열의 보수주의와 비교하는 시각도 있는데(하긴 쿤데라와 이문열도 양립 가능하다고 동렬에 놓는 시각에서라면야), ‘보수주의’에 대한 얘기를 잠시 미뤄두고, 일단 ‘소설가’ 김훈과 이문열을 비교하는 것 자체는 흥미롭다. 일단 둘 다 ‘소설가’가 아니라는 점, 즉 ‘소설가’를 연기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김훈은 이제 막 소설로 밥벌이하고 있으며, 이문열은 소설로 밥벌이를 할 만큼 하자 딴짓을 하고 있다(사실, 한때 소설가이긴 했지만, 요즘도 소설가 이문열 운운하는 것은 좀 우습다. 그의 대표작은 <삼국지>이며, 이번에도 동아일보에 <초한지>인가를 연재하는 듯하던데, 그걸로 미루어도 짐작할 수 있는 바이지만 그의 본업은 ‘고전 번역가’이다). 근래엔 둘 다 내가 아직 읽지 않은 소설들만 썼다는 것도 공통적이고, 그 소설들이 ‘에세이 정신’으로 충만해 있다는 점도 공통적이다(가령, 이문열의 <선택> 이후의 ‘소설들’). 차이라면, 문체에 있어서, 품위에 있어서, 그리고 언변에 있어서 김훈이 한 수 위라는 것 정도(그런 이문열도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다!).

그리고, 보수주의. 요즘 좀 특이한 한국사회의 풍경은 자칭 보수주의자들, 즉 ‘자각적인’ 보수주의자들이 (특히 젊은 세대에서) 늘어나고 있는 것과 동시에 한편에서는 ‘B급 좌파’들이 ‘보수주의자’란 딱지를 마치 이전에 ‘보수꾼’들이 ‘빨갱이’(혹은 ‘사회주의자’)란 딱지를 적대자들에게 갖다 붙이듯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술어논리에 의하면, ‘B급좌파’나 ‘보수꾼’이나 똑같게 된다). 그런 식으로 보수주의나 진보주의(혹은 사회주의)의 외연이 넓어지는 것은 ‘언어의 경제’상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보수주의’나 ‘진보주의’란 말의 의미가 불분명해지는 탓에 앞에다 수식어를 더 붙여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노무현 정부는 한쪽에서 보기엔 좌파 사회주의 정부이고, 다른 쪽에서 보기엔 우파 보수주의 정부이다. 그런 ‘딱지’들이 가리키는 바는 대개 “당신은 우리편이 아니다!” 내지는 “우리는 당신이 싫다!”는 정서적 상관물이자 자기정체성의 확인이지 지시적 연관성을 갖는 논리가 아니다.

김훈과 이문열의 보수주의란 말도 마찬가지이다. 그건 대국적 견지에서의 ‘통찰’이긴 하지만, 섬세하지는 않다. 김훈은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허무주의자이기 때문이다(이문열도 허무주의자인가?). “아마도 소리와 병장기는 같은 것인 모양이구나”(<현의 노래>)라는 통찰, 즉 악기와 무기는 등가이며, 펜과 칼은 같은 것이라는 그의 주장 혹은 자기암시는 대립물의 통일이라는 변증법적 논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그게 그거라는 허무주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허무주의야 말로 모든 것을 ‘풍경’의 자리에 갖다 놓는 그의 에세이스트 정신에 부합한다. 풍경의 자리에 놓일 때, 봄 여름 가을 겨울, 자연의 사계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충만하며 허무하고 부질없다. 역사 또한 그는 그 ‘풍경’의 자리에다 놓고 묘사할 따름이다.

<현의 노래>의 한 장면에서 김훈이 “이 질퍽거리는 구멍은 대체 무엇인가? 이 빨아당기는 속살이 어째서 왕의 무덤 속에 들어가 쇠와 함께 썩어야 하는가. 야로는 식은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하였다.”(117-8쪽)라고 묘사할 때, ‘야로’는 김훈 자신이며, “이 질퍽거리는 구멍”이야말로 그의 ‘허무주의’의 근거이고, 그의 표현을 빌자면, 풍경의 ‘적막’이다. 그는 언제나 그 풍경 앞에서, 허무 앞에서, 적막 앞에서 기진맥진하였고, 그러면서 마치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이 험난한 사투 끝에 돛새치의 뼈다귀만을 건져 올리듯이 자신의 문체를 길어냈다. 언제나 칼로 깎은 연필을 손가락에 쥐고 원고지에 쿡쿡 눌러써가면서 말이다(왜 칼과 펜이 등가가 아니겠는가!). 때문에, 그의 ‘기진맥진’에, 그의 ‘문체’에 나는 언제나 경의를 표한다.

반복하자면, 내가 보기에 김훈에게서 더 핵심적인 건 그의 보수주의가 아니라 허무주의이다. 그가 ‘보수주의자’라면, 그에겐 ‘보수’나 ‘진보’가 무의미하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가 가부장(家父長)적인 사고의 틀을 고수한다는 의미에서일 뿐이다(언젠가 이 때문에 ‘김훈 파동’이 한번 있었다). 그는 무어라고 말하는가?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 언어를 다루는 일의 힘겨움을 생각한다면 등에서 식은땀이 날 지경이다.” 이 고백에 그의 진실이, 핵심이 담겨 있다.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가 뜻하는 바는 말의 허무주의, 의미의 허무주의이다. 그래서 그에겐 그러한 의미(=기의)보다 말의 뼈(=기표), 말의 잔해, 말의 화석이 더 중요하다. 그가 일상적 시간(=밥벌이의 시간)이 아닌, 역사적 시간, 더 나아가 지질학적 시간에 언제나 매혹되며 거기에 붙들려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예컨대, <현의 노래>의 구상 또한 국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우륵의 가야금에서 얻어졌다고 하지 않는가? 그 천년의 ‘적막’이 곧 그의 ‘질퍽거리는 구멍’이다.



작가는 ‘천년의 적막’을 탐사하고 있지만, 사실 그의 문체를 낳은 허무주의는 좀더 실제적인 기원을 갖고 있다.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고백한바 있지만, 그는 5공 때 한 일간지의 젊은 기자로서 군사정권에 대한 ‘용비어천가’에 앞장섰던 경력이 있다. 그가 신념(=이즘)을 갖고 그 일에 나섰던 거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것이 ‘신념’이 아니라 ‘처세’였더라도 마찬가지이다(그랬더라면 이후에 다른 ‘기자들’처럼 금배지라도 달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를 그 일에 내몬 것은 ‘신념’도 ‘처세’도 아닌 ‘체념적 자학’이고 ‘허무’였다. 당당하게, 폼나게 사표를 던질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의 논리는 좀 다르다. 그 대신 다른 누군가가 결국 그 일을 해야 했을 거라는 것. 즉, 한 사람이 폼나는 대가로 또 다른 누군가가 오물을 뒤집어써야 하는 것이다. 그럴 거라면, 자신이 하겠다는 것이 그의 논리이다.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라는 건 그러한 ‘자발적 부역’에 대한 변명의 논리이다. 그의 ‘부역’은 오직 그가 문장에서 ‘의미’를 버릴 때에만 가능했다. 그것이 그의 의미론적 허무주의의 기원이다.



 

 

 

한편으로, 대장부의 길과 가장(家長)의 길은 좀 다른 길이다. ‘질퍽거리는 구멍’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달리 식구(食口)들의 ‘입구멍’이다. 한 가장이 해야 할 최소한이란 그 구멍을 채워 넣을 밥벌이를 하는 것이다. 유구한 일이지만, 대장부의 ‘명분’은 우리를 한번도 밥 먹여주지 않았다(밥 먹여주기는커녕 죽이지만 않아도 다행이겠다. 오, 계백이여!) 후배 박래부 기자와 한국일보에 연재되었던 <문학기행>이 책으로 묶여 나왔을 때, 김훈이 썼던 서문에는 그의 가족사 한 자락이 들어있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그의 아버지는 아주 엄하고 혹독한 분이었는데, 자주 ‘세상을 저버린 자’처럼 세상에 대한 분노와 허무를 무지막지한 술로 달랬다. 그리고 그런 날 새벽이면, 소년 김훈은 해장국 심부름을 가야 했다고. 어느 추운 겨울날 새벽에도 그는 해장국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그만 뚝배기를 바지와 길바닥에 다 엎지르고 말았다. 새벽녘 길바닥에서 그는 목놓아 엉엉 울면서 절대로 아버지와 같은 삶은 살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아버지와 같지 않은 삶? 그건 대장부의 삶이 아니라 충실한 가장의 삶이다.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라는 것은 대장부의 논리가 아닌 바로 가장의 논리이며(대장부는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지만, 가장은 한 입으로 두 말 해야 할 때가 있다), 가장으로서의 김훈이 발명해낼 수밖에 없었던, 발명해내지 않으면 안되었던 논리이다(자신의 아들에게 주는 편지에서 그가 가장 강조하는 바도 ‘자기 밥벌이’라는 건 그런 의미에서 지극히 당연하다. 그 ‘밥벌이’에 그의 오욕과 영광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허무주의는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장(家長)의 허무주의’이다. 그 허무주의는 결코 겉멋이나 잘난 체가 아니며, 젊은 치기나 늙은 달관도 아니었다. 그것은 기자 김훈이 밥벌이를 하기 위한, ‘유능한’ 가장이 되기 위한 허무주의였다. 어찌 그의 허무주의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지금도 나는 6하원칙의 신성함을 믿는다. 다만 6하의 가치와 존엄을 인정하되, 6하로서 충족될 수 없는 진실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뿐이다.”라고 그는 또 말한다. 복습하자면, 그가 말하는 ‘6하원칙’이란 ‘밥’과 동의어이다. 기자 김훈은 어떤 원칙의 신성함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밥의 숭고함과 밥벌이의 신성함을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기자의 밥벌이란 ‘6하원칙’에 맞게 기사를 쓰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또한 ‘6하원칙’이라거나 ‘밥벌이’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건 앎일 수도 있고, 직관일 수도 있고, 양심일 수도 있다. 그것은, 정신분석학의 개념을 가져오자면, ‘죽음 충동’이라 지목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 죽음충동은 삶 혹은 생존에의 의지를 ‘전부가 아닌(not-All)’ 것으로 잠식하며, 거기에서 기자 김훈이 아닌 에세이스트 김훈이 태어난다.

 

 

 

 

가장은 자기 식구들의 밥벌이를 하는 것으로 충분히 존엄하지만, 한편으로 세상은 그가 다 먹여 살릴 수 없는 ‘구멍들’ 천지이다. 그 구멍들 앞에서, 어느 봄날 전군가도(全群街道)에 무지막지하게 흩날리는 ‘사쿠라’ 꽃잎들 앞에서, 그는 할딱이며 기진맥진이고 속수무책이다. ‘6하’로 기술될 수 있는 세상의 진실들은 몇십 년 기자생활의 ‘짬밥’으로 어떻게든 카바한다지만, 그걸로 충족되지 않는, 그걸 넘어서는 진실들은 다 어찌한단 말인가? 에세이스트 김훈은 그 ‘충족될 수 없는 진실’들을 (‘가부장적’ 책임의식을 가지고!) 기록하고자 분투하지만, 그의 자백대로 언제나 ‘백전백패’이다. 그의 문체는 그 싸움에서 얻어진 전과이되, 패장(敗將)의 그것이어서 아름답지만 속절없다. 아마도 김훈 자신이 그걸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에세이스트 김훈의 허무주의는 기자 김훈의 그것과 같이 ‘가장의 허무주의’이되, 이 대책 없는, ‘무능한’ 가장의 허무주의이다. 어찌 그 허무주의가 안쓰럽지 않겠는가? 하여 그 ‘허무주의들’에 비하면, 보수주의란 딱지는 사소하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사르트르에 의하면, 현실과 지시적 연관을 갖는, 그러니까 현실을 ‘앙가제’하고, 현실에 ‘앙가제’하는 문학은, 곧 소설은 ‘어떻게’가 아닌 ‘무엇을’에 복무해야 한다(그는 총구를 제대로 겨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무엇을’을 달리 ‘의미’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순수한 음악의 상태, 무의미의 상태를 지향하는 시와는 달리, 산문(=소설)은 무엇보다는 ‘의미’해야 하며, 의미-지향적이어야 한다(그것이 시와 산문의 차이이다). 비록 그 의미가 단선적이거나 독백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카뮈와의 논쟁에서 사르트르-장송이 지적했던 바는 카뮈의 아름다운 문체가 ‘앙가주망’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달’이 아니라 ‘손가락’만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훈의 소설에도 똑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그의 아름다운 문체, 그리고 그걸 뒷받침하는 허무주의적 세계관(“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은 소설에 적합하지 않다. 소설가의 문체는 적당히 아름다워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적당히 지저분해야 한다. 그것이 ‘산문적 일상’을 묘사/기술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즉 소설가가 자신의 얼굴, 필체, 문체를 갖는 건 바람직하며, 동시에 좋은 소설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긴 하지만, ‘너무 아름다운 문체’이어서는 안된다(<내겐 너무 예쁜 당신>이란 프랑스 영화의 문제의식이기도 한데, ‘너무 아름다운 여자’는 ‘아내’로서 적합하지 않다. 결혼생활은 ‘산문적’이기 때문이다).



<현의 노래>의 서평이 들어 있는 <텍스트>(4월호)에는 ‘여성’을 주제로 한 서평들도 여러 편 모아져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한국어로 ‘아름다운 페미니스트’란 부제를 달고 나온 <글로리아 스타이넘>이다. 플레이보이의 바니걸로 위장취업할 정도로 미모가 뛰어난, 미국의 이 대표적인 ‘스타’ 페미니스트 운동가의 평전인데, 스타이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녀의 ‘너무 아름다운 외모’는 페미니즘에 혼란과 지장을 초래한다. “곧 그녀는 페미니스트이기에는 너무 예쁜 여성인 것이다.” 그래서 튄다. 다르게 말하면, 그녀는 ‘문체적/문채적’이다. 가령, 그녀의 50세 생일파티 풍경. “보스턴의 부동산 부호가 파티준비를 돕겠다고 나섰고, 파티 장소는 월도프 아스토리아호텔 그랜드볼륨이었다. 베트 미들러의 축하공연이 있었으며 스타이넘의 어린 시절과 젊었을 적 사진이 실린 생일 책이 전시되었다. 언론 또한 이 파티를 크게 다루었다. 스타이넘은 일에서나 개인적으로나 인생의 정점에 서 있었다.”

페미니스트의 삶이 불행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성공적인’ 페미니스트란 건 뭔가 어색하다. 결국 페미니즘은 그녀의 미모와 상승작용하며 스타이넘이란 한 여성에게 ‘성공한 삶’을 가져다 준 것이지만, 그것이 전체 페미니즘, 혹은 억압받는 여성 전체의 삶과는 과연 얼마만큼의 관계가 있을까? 그녀를 비판하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주장대로, 차라리 스타이넘이란 ‘스타’ 없는 페미니즘이 더 낫지 않았을까?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못생겨야 할 필요는 없지만, 적당히 못생길 필요는 있다(그래야 얼굴을 보는 게 아니라, 주장을 듣는다). 즉 적당히 예뻐야 한다. 그건 다른 모든 ‘산문적’ (정치적)운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시적인’ 외모는 ‘산문적’ 일상에 적합하지 않다.


 

 

 

이건 너무 ‘마초적인’ 생각인가? 가부장적인 김훈은 ‘마초적’이란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그 자신은 거기에 굳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념적으로 그와는 좀 거리가 먼 ‘B급 좌파’ 김규항조차도 똑같이 ‘마초적’이란 비판을 받곤 한다는 점이다(술어논리에 따르면, ‘보수주의자’ 김훈과 ‘진보주의자’ 김규항은 똑같다). 그건 그가 성모순보다 계급모순이 우선한다고 생각하는 데서, 그리고 그런 생각을 공개적으로, 공격적으로 드러낸 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사실 나로선 그의 비판자들보다는 그의 의견에 공감하는 바가 더 많다. ‘중산층 페미니즘’, 즉 “계급과 사회구조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 페미니즘은 ‘허드렛일을 대신해줄 누군가(다른 여성, 빈민, 식민지인)’를 착취하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벨 훅스, <행복한 페미니즘>)는 의견에 동의하기 때문이다(<텍스트>의 서평에서 인용).

그런 의미에서 이 페미니즘은 민주주의와 똑같은 딜레마를 갖고 있다. 민주주의 또한 허드렛일을 대신해줄 누군가를 착취하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민주주의의 기원으로서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바탕은 노예제였다). 미국, 프랑스, 영국 등 대부분의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경영국가, 제국주의 국가였던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라크 침공을 거론하면서 이런 것이 미국의 민주주의냐고 비판하는 것은 따라서 예리하지 못하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반민주주의적, 제국주의적 행태이기 때문이다.

다른 데서 착취해야지만, 자국의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한국의 민주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국내적 ‘평등’은 국외적 ‘차별’에 의해서 지탱된다). 민주주의가 고상하고 고급스런 제도라는 건 그런 뜻에서이다(어느 정도의 경제적 바탕, 가령 1인당 국민소득 1만불 이상이라든가 하는 토대가 마련돼야지만, 민주주의란 제도는 작동한다). 이러한 사정은 ‘고상한’ 페미니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고상한 것들이란 원래 그 모양이다). 나는 다른 민주주의, 다른 페미니즘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며, 자신할 수 없다.


 

 

 

내가 김규항을 처음 알게 된 건, 그러니까 그의 글을 처음 읽게 된 건 <씨네21>의 ‘유토피아/디스토피아’ 지면을 통해서였다. 공동으로 연재하던 몇 사람의 필자들 가운데에서 유독 그가 눈에 띄었는데(그는 아마도 ‘유토피아/디스토피아’ 지면이 낳은 최고의 ‘스타’일 것이다), 그건 그가 자신의 ‘문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의 이름이 공개되지 않더라도 그의 문장들은 ‘김규항’을 입증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비유컨대, 김훈의 문체가 아름답고 유장한 ‘패장(敗將)의 문체’라면, 김규항의 문체는 ‘자객의 문체’이다. 백전백패를 ‘자랑하는’ ‘패장의 문체’와는 달리, ‘자객의 문체’는 ‘무엇을’에 ‘어떻게’가 복무하는 문체이다. 마치 자토이치의 검술처럼, 그는 짧게 끊어서 군더더기 없이 급소들만을 공격한다. 그래서,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때에라도 그의 문장(=수사학)에는 매료되었다. 이후에 내가 가급적이면 그가 쓴 모든 글을 챙겨 읽고자 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최근에 인터넷에서 그가 쓴 글을 읽고 다소 실망했다. 유시민에게 보수주의자란 딱지를 붙이는 글이었는데, 내용에 실망한 게 아니라(“나는 유시민을 보수주의자로 본다”는 데 어쩔 것인가?), 문체가 예전의 문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했다. 온라인 글쓰기의 특수성을 고려한다고 해도(설마 그런 류의 글들이 공식적으로 출판되는 걸까?) 그의 글은 더 이상 김규항의 ‘얼굴’도 ‘필체’도 보여주지 못했다. 덕분에, 나는 ‘손가락’ 대신에 글의 ‘내용’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보게 되었다.

김규항의 문체를 ‘자객의 문체’라고 했는데, 그의 칼끝이 유독 예리하게 겨냥하는 것은 우파(=보수주의자)가 아니라 자신이 유사-좌파(=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그것이 좌파 전체의 ‘이익’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유시민을 전여옥과 ‘똑같은 놈’이라고 배제함으로써, 좌파는, 혹은 민노당은 어떤 이익을 챙기는지) 모르겠지만, 유사-좌파들을 걸러내는 일을 이 ‘B급 좌파’는 자신의 소명으로 간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하지만, 단순하게 말해서, 민노당을 지지하지 않은 90% 국민들, 혹은 요즘 지지율이 좀 올라갔다고 하니까 한 70%의 ‘불순한’ 국민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들을 어떻게 걸러내고 순화/훈육/계몽해야 하나?). 그것은 한국의 논객 중 가장 ‘좌파적’이라 할 만한 자신의 입지/주장을 ‘B급’이라고 공언하는 그의 ‘결벽’에 이미 새겨져 있기도 하다. 그는 자신을 좌파의 ‘최소한’이라고 간주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기준에 미달한다면, 모두 ‘보수주의자’란 딱지를 뒤집어써 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준에 따를 때, 제도권 좌파, 즉 개량주의적 ‘의회주의 좌파’는 진정한 좌파인가? 동급의 의원으로서 한나라당 의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의정을 논할 민노당 의원들은 과연 좌파다운 좌파인가? 대학에 몸담고 있는 제도권 좌파, 자칭 ‘좌파’ 교수들은 과연 진짜 좌파이며 진보주의들인가? 일부일처제를 고수하면서 ‘아빠’로서 자녀들의 교육을 책임지는 일(“너희는 이렇게 바르게 살아라!”)은 진정 얼마나 좌파적인가? 혹은 한국의 자본주의라는 ‘식인체제’ 하에서 구차하게 계속 살아가는 일은 과연 얼마나 좌파적인가? 등등.

‘자객식’으로 말하자면, 사실 “살겠다고 버둥거리는 놈들”은 전부 보수주의자이고, “죽지 못해 안달인 놈들”이 진보주의자이다. 유기체의 생존은 ‘항상성(호메오스타시스)’이라는 걸 조건으로 한다. 항상성이란 건 ‘기브 앤 테이크’, 즉 주고받는 타협을 통해서 유지된다. 단칼에 자결하지 않고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는 일은 언제나 그러한 ‘타협’을 전제로 한다. 그것이 인간조건이다. 그럴 경우, 급진적인 진보주의 혹은 절대적 진보주의(‘숭고한 A급 좌파’란 게 있다면)란 그러한 타협과 인간조건으로부터의 ‘단절’을 뜻한다. 즉, 결코 타협하지 않으며, 죽음을 무릅쓸지언정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것(지젝 같은 좌파가 ‘죽음충동’에 그토록 매혹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당연하다. 그에게 유일한 ‘행위(act)’는 상징적 ‘자살’이다). 지젝과 네그리 같은 좌파들은 모두 기계-인간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는바, 그것은 현재의 인간조건이 극복되어야지만 진정한 ‘진보’가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김규항도 그러한지?).



 

 

 

사실, 새로운 사회를 위한 ‘새로운 인간’이란 테마는 러시아문학에서는 이미 고전적인 테마이다.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1863)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가 정면충돌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문제를 둘러싸고서이다. 1917년 혁명 이후에 역사는 한동안 체르니세프스키의 편이었다. 사회주의 인간형, 혹은 공산주의 인간형이 인민들에게 요구되었고(그러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벌레’로 낙인찍혔다), 인간개조론이 제기되었다. 요컨대, 일차적 본성이든(공병호가 얘기하는), 이차적 본성이든(아도르노가 얘기하는), 현재의 ‘이기적인’ 인간본성을 가지고는 사회주의 유토피아(=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공산주의는 ‘인간들’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천사들’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에서 왜 누구는 대학교수를 하고, 누구는 탄광노동자를 해야 하는가? 그걸 누가 결정하는가? 제비뽑기로 결정하는가? 혹은 로테이션을 하는가? 그런 질문들을 허용해서는 사실상 사회주의 건설이 불가능하다. 모든 것은 자발적인 ‘의무감’에 따라 마치 ‘기계’처럼 처리되는 수밖에 없다. 즉 인간-기계, 기계-인간들을 만들어내는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좌파적 휴머니즘’이란 말은 ‘듣기 좋은 소리’이거나 넌센스라고 생각한다(그런 얘기를 들먹이는 좌파를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C급이다). 휴머니즘을 가지고는 ‘좌파’를 할 수도 없고, ‘좋은 세상’을 만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진보가 변화/변혁에 대한 요구를 의미할 때 가장 먼저 변화/변혁되어야 할 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며, 인간조건 자체이다(기계-인간이 되기 전이라도 최소한 ‘강철 인간’은 돼줘야 한다. ‘스탈린’이란 이름에 새겨진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인간복제라거나 유전자 조작을 가장 앞장서서 환영해야 할 사람들은 라엘리안들이 아니라 좌파들이다. 그리고, 인간본성 운운하며, 인간복제에 반대하는 하버마스 같은 철학자야말로 유사-좌파, 즉 보수주의자이다. 진정한 좌파가 되기 위해선, 모성을 버리고, 부성도 버리고, 인간성 자체를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유토피아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리라(모스크바-유토피아의 ‘새로운 러시아인’들처럼). 좌파, 혹은 ‘에덴의 기계들’에게 입력된, 프로그래밍된 행복!

말이 좀 길어졌다. 요점은 보수주의자니, 진보주의자니 하는 딱지 붙이기가 얼마만큼의 준거성, 혹은 의미연관성을 갖는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급진적 환경주의자들에 따르면, 환경문제의 해결은 이 지구의 암종인 인간이란 종이 완전히 사라질 때에야 가능하다. 거기에 무슨 타협의 여지가 있는 게 아니다. 그러한 관점에 서면, 좌파니 우파니 하는 구분은 사소하다. 좌파 박테리아와 우파 박테리아가 아웅다웅하고 있는 것이기에. 빨간색이건 파란색이건 박테리아는 박테리아일 뿐이다. 거꾸로 그런 게 아니라면, ‘작은 차이’를 중요하게 간주해야 한다. 좋은 사회, 혹은 유토피아를 만들고자 하는 강박관념이나 순수에의 결벽에 들려 있지 않다면 말이다.

김훈과 이문열은 다르며, 유시민과 전여옥도 다르다. 그리고 전두환과 김대중이 다르며, 노무현과 이회창도 다르다. 그리고 부시와 케리도 다르다. 그들은 아주 조금 다를 뿐이지만, 그 다름을 인정하는 게 내 상식이고 정치적 감각(이기 이전에 일상적 감각)이다. 나는 우리사회가 ‘더 좋은 사회’가 될 거라고 믿지 않지만 적어도 ‘덜 나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덜 나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러한 상식과 감각이 필요하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덜 나쁜 사회’의 의의를 가르쳐준 이는 기자(요즘은 편집위원이던가?)이자 에세이스트이며 소설가인 고종석이다(자칭 ‘자유주의자’인 그가 복거일의 제자를 자처하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 또한 ‘문체’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 문체는 화려하지도 간결하지도 않으며 그저 담백하다. 그리고 상식적이다. 그는 허무주의자(혹은 보수주의자)도 아니고, B급 좌파도 아니다. 그는 개인주의자이고, 자유주의자이다. 이념의 스펙트럼 속에 굳이 자신을 분류해 넣어야 한다면, 나는 그와 같은 칸에 분류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즉 나의 정치적 입장은 그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그것은 내가 그만큼 그에게서 감화를 받은 바가 많은 탓일 것이다(그에 따를 때, 외모에 의한 서열화는 지성에 의한 서열화보다 더 나쁘거나 억지스럽지 않다. 이것도 마초적인가?).

김훈, 김규항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는 고종석의 (모든 글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글들을 읽었고, 읽고자 했다. 전라도 사람으로서의 ‘서얼의식’은 갖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특별한 트라우마나 결벽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 그의 사유는 논리적이지만, 모나지 않고 둥글다. 따라서, 그런 그의 문체가 소설이란 장르와 잘 어울리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김훈이 소설을 못 쓰고, 김규항이 소설을 안 쓰는 데 반해서, 고종석은 소설을 잘 쓴다(이 세 ‘글쟁이’를 내 식대로 분류하자면, 김훈은 ‘예술가’이고, 자칭 ‘출판인’이어서 ‘출판운동’을 하는 김규항은 ‘운동가’이며, 고종석은 ‘지식인’이다). 더불어, 그에게선 기자와 에세이스트와 소설가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아름답지도 날카롭지도 않지만 담담하면서 유려한 그의 문체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체는 그렇게 그 사람이 된다…

06. 03. 19 -20.

P.S. 언젠가 김규항의 홈피에 들렀다가 인상깊게 읽은 것이 그의 '문장론'이다. 작년 8월에 씌어진 것인데, 이상하게도 9월에 나온 그의 책 <나는 왜 불온한가>(돌베개, 2005)에는 실려 있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의 '문체'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필히 읽어볼 필요가 있는 글이다. (저작권이 문제되지 않는다면) 여기에 옮겨놓는다(부분 발췌하고자 했으나 저자의 뜻이 훼손될 우려도 없지 않아 그냥 그대로 옮겨놓는다). 여기서도 군말과 강조는 나의 것이다.

-이따금 “문장론이 뭐냐”는 식의 질문을 받는다. 그런데 나는 글을 쓰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내가 글 쓰는 사람이라는 현실에 익숙하지(하고 싶지) 않아서 늘 대답을 흐리곤 한다. 사실 나는 어떤 문장론을 갖고 글을 쓰진 않는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즉 내가 단어와 단어를 꿰고 이어 붙여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유는 단지 세상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다. 나는 글의 소재를 얻기 위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세상을 들여다보기 위해 글을 쓴다. 어쨌거나, 문장론이 있든 없든, 내가 초고를 써놓고 퇴고를 거듭하는 걸 보면 나에게도 문장에 대한 어떤 태도는 있는 것 같다. 아마도 그건 두 가지일 것이다. 간결함과 리듬.(*그러니까 그에게 글, 혹은 문장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소통을 위한 수단이다.)

-내가 쓰는 글의 8.5할쯤에 해당하는, 공을 들여 쓰는 글은 초고를 쓰면 적어도 서너 번 이상은 퇴고를 한다. 군더더기라 느껴지는 건 망설임 없이 없애거나 좀 더 간결한 표현으로 바꾼다. 나는 중언부언 하는 것만 군더더기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쓸데없이 화려한 표현도 군더더기라 생각한다. 그리고 부러 반복 효과를 내려는 게 아니라면 같은 글에선 같은 단어를 쓰지 않는다. 10매 이하 칼럼에선 반드시, 30매가 넘어가는 긴 글에선 되도록 그렇게 한다. 동시에 리듬을 만들어간다. 거창하게 말해서 운율을 맞추는 건데, 눈으로 소리 내어 읽으면서 리듬감이 흐트러지거나 호흡이 끊기는 부분은 글자 수를 고치거나 단어를 바꾼다.(*'간결함'이 그가 첫손에 꼽는 글의 요건이다. 앞에서 나는 그의 '자객의 문체'가 '자토이치의 검법'을 연상시킨다고 적었다.)  

-간결함과 리듬이 덜 다듬어진 글을 내놓는 것처럼 불편한 일은 없다. 어쩌다, 내 글의 1.5할쯤에 해당하는 글에서, 이런저런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도리 없이 그러곤 하는데 그런 글들은 그저 실용적인 이유를 위해 일회용으로 존재한 것일 뿐, 내가 썼지만 더 이상 내 글은 아니라 여긴다. 간결함과 리듬 말고 또 하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쉽게 쓰는 것이다. 나는 왜 거의 모든 글쟁이들이 글은 쉬우면 쉬울수록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배운 사람들이나 알아먹는 어려운 말을 이유 없이 쓰지 않는 건 물론이려니와 되도록 한자말을 줄이려고 애쓴다.(*하지만, 모두가 간결하고 쉽게 쓴다면 '간결함'과 '쉬움'이라는 미덕 자체가 증발해 버릴 것이다.)

-그러나 간결함, 리듬, 그리고 쉬움 같은 문장에 대한 내 모든 태도들은 오로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한다. 나는 이오덕 선생이 말씀한 ‘삶을 가꾸는 글쓰기’를 믿는다. 모름지기 글은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글을 씀으로서 내 일상의 에피소드들은 비로소 내 생각으로 정리되며 그렇게 정리된 생각들은 다시 내 일상의 에피소드에 전적으로 반영된다. 내 삶과 내 글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순환한다. 내 삶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나라는 인간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내 글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문장에 대한 내 태도는 삶에 대한 내 태도와 같다.

앞에서, 김규항은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즉 내가 단어와 단어를 꿰고 이어 붙여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유는 단지 세상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다"라고 적었지만, 이 마지막 문단에 의거할 때 그건 그의 문장론으로서 불충분하며 부정확하다. "문장에 대한 내 태도는 삶에 대한 내 태도와 같다"고 할 때 '문장'은 '삶'과 등가화되고 있으며, 그럴 때 '문장'은 단지 수단에만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그의 삶이다. 그러니, "문체는 곧 사람이다"(뷔퐁)라는 고전적인 명제에 기대지 않더라도 나는 그가 '문체주의자'라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그 또한 'B급 좌파'이면서 동시에 '양파'인 것이다.

덧붙여 지적하자면, '양파'는 롤랑 바르트의 그것처럼 그저 텅빈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러시아 정교회 사원 지붕들에서 보듯이 신성함에의 의지와 염원을 담고 있다. 내가 문체주의자들을 존중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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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3-19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많은 부분에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자객식’으로 말하자면, 사실 “살겠다고 버둥거리는 놈들”은
전부 보수주의자이고, “죽지 못해 안달인 놈들”이 진보주의자이다.

아주 흥미롭습니다.^^

blowup 2006-03-19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 한번쯤은 이 세 사람을 묶어서 글을 쓰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로쟈 님이 하셨네요. 저는 소설가 고종석에게서는 허무주의자의 숨결을 느끼곤 합니다. 그의 문체가 담백하다고 하셔서 사실 놀랐습니다. 의미의 뭉개짐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가, 가르고 고르고 조합하고 만들어내는 단어들에서 저는 현란함을 느끼거든요. 그 어지럼증을 즐기는 거지만. 글 퍼갈게요.

twoshot 2006-03-19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에 대한 혐오가 그득했는데 로쟈님의 글을 읽고 조금 누그러 졌습니다. 보수주의자도 좋고 허무주의자도 좋은데 그것이 넘치는 자기연민처럼 보일때는(그러니까 '용비어천가'를 부르던 시절에 대해 말할때) 참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고종석의 경우 인물과 사상에 쓴 복거일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에 대한 신랄한 비평에서 보듯 더이상 제자로 남고 싶는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

krinein 2006-03-20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행중'이라면 아직 완성된 글이 아닌 건가요? 괜찮으시다면 글을 퍼가겠습니다.

로쟈 2006-03-20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아직 진행중이고 가급적이면 완성되 후에 퍼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페일레스 2006-03-20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로드무비님과 나무님 말씀에 공감하며... 제가 왜 김훈(의 글)에 그리 끌렸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yoonta 2006-03-21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는 로쟈님 페이퍼중에서도 발군인듯..^^
다만 좌파이기 위해서는 기계-인간이 되어야한다라는 부분은 좀 논란이 될만한 야이긴데..A급좌파이기 위해서 인간개조의 이론을 가져야만 하는지 아닌지 불분명한 상태에서 좌파이기 위해서는 "기계-인간은 아니더라도 강철인간은 되어줘야 한다"라는 말은 현실에 타협하면서 (생계형) B급좌파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기자신을 변명하려는 것은 아닐까요?

로쟈 2006-03-21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계를 돌보지 않고 썼던 것인데, 많이들 읽어주시는군요.^^ '기계-인간' 문제는 나중에라도 자세히 얘기할 기회가 있겠죠. 그리고, '생계형 B급 좌파'라고 보신 건 yoonta님 나름의 분류이시겠으나 저와는 다소 무관합니다('우파가 아니면 좌파다'란 잣대를 적용하지 않는 한). 본문에 적었다시피, 저는 김훈과 김규항과 고종석을 모두 지지하니까요(정치적 포지션상 가장 가까운 '자유주의자' 고종석은 '좌파'가 아닙니다). 단, 그들의 문체를. 굳이 분류하자면, '문체파' 혹은 '문장파' 그도 아니면 '양파'로 해주십시오...

로드무비 2006-03-21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퍼갑니다.^^

이리스 2006-03-21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파! ㅎㅎㅎ
저도 이글 퍼갑니다.. ^^;;

이잘코군 2006-03-21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로쟈님의 내공은 깊이를 모르겠군요. 퍼갈게요. ^^ 꾹.

urblue 2006-03-21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

Koni 2006-03-21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 양파 중에 고종석 양파에 가장 관심이 있어서 열심히 읽었는데, 고종석 부분이 너무 짧아요.ㅠ_ㅠ

로쟈 2006-03-21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냐오님/ 그게 원래는 김훈에 대한 걸 쓰다가 두 사람 얘기로 확장돼서 그렇습니다. 한데, 세 '양파' 중 가장 덜 튀는(공감하는 바가 가장 많기도 하고) 고종석에 대해서는 그만큼 할 얘기가 없기도 합니다. 저로선 그의 칼럼들을 열심히 읽는 것으로 당분간은 만족할 거 같습니다...

닉네임을뭐라하지 2006-03-28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보고 퍼갑니다-

wnsgml 2007-12-01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게 읽게 되었네요 글 조금 가져갑니다 ㅡ

turk182s 2008-01-09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로쟈님 늦게읽었네요..아마도 로쟈님한테 알라딘에서 상줘야해요,,님덕분에 구입한 책이 저도몇권인지..이런게 플라톤의 극장의우상 이라고하나? 암튼 직장이 이런거하고 전혀 먼분야인지라 ,,그냥 이렇게 도움받으며 사네요,, 인문학을 공부하는게 겨우 지적만족을 향유하는거라면 저도 결국 상류층적 상징자본을 쫓는 것일테고..요즘은 그냥 어떻게 생각과 실천이 결합해야하나 라는 20대 초반때의 원론적 고민이 뼈저리게 생각이 듭니다. 귀족적인냄새가 조금나지만 그래도 노조쪽에 참가해야하나라는 생각,시골에 내려가 풍류나 읅으며 살겠다는생각등등.. 이러다 생각정리되면 뭐가나오겠죠,근데로쟈님은 서울쪽에 계신지.나중에기회되면 술이라도 한잔 ㅎㅎ 글퍼갑니다.

외계인교신장치 2008-03-01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의 미학적 행보의 끝에 위치한 관념이 무엇인지 잘 보고 갑니다 가지런하고 반듯하게 잘 골라 분류하셨네요 서재가 참 풍부하고 아름다와 좋습니다
 

점심 먹고 산책 삼아 몇 권의 책을 소개한다. 봄비가 살짝 내렸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볕이 좋다(당연한 말이지만, '봄날'이다). 어제 한국일보에 실렸던 고종석의 칼럼 '봄날의 만보(漫步)'는 오늘 날씨에 더 어울렸음 직하다. 그 칼럼의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삶의 큰 부분은 싸움이다. 사람이라는 종(種)이 출현한 뒤 줄곧 그랬겠지만, 인간의 가장 내밀한 부분까지 거리낌없이 상품화하고 있는 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리 악착같이 싸우는 것도 따지고 보면 결국 쉬기 위해서다. 깊숙한 수준에서, 그것은 뜻밖에도 초월의 소망과 잇닿아 있다. 둘레 세계와 거리를 두고 혼자 느릿느릿 걸을 때 우리는 문득 제 주인이 되어 초월의 문턱에 설 수 있다. 우리는 제 주인으로 태어났지만, 일상 속에서 대체로 제 주인이 되지 못한다. 홀로 느릿느릿 걷는 것은 잠시라도 제 주인이 되는 길이다. 지금이 바로 이런 성찰적 걷기의 적기다. 조금 있으면 선거와 축구의 미친 바람이 휘몰아칠 테니."

 

 

 

 

'둘레 세계'란 표현을 굵을 글씨로 강조한 것은 나의 견문으로는 '최초의' 조어가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어제 인터넷 검색을 잠시 해보았는데, 같은 표현을 찾지 못했다). 보통은 '주변'이나 '주변 세계'란 말로 대신할 대목에서 고종석은 '둘레 세계'라고 적었고, 이 새로운 조어 때문에 나는 반나절이 즐거웠다. 요즘 흔히 쓰는 '배둘레' '허리둘레' 할 때의 '둘레'가 '둘레 세계'로 스카웃된 것은 마치 WBC에서 한국야구팀이 미국과 일본팀은 연파한 것과 같은 (대견한) 쾌감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고종석의 영어이야기> 같은 책도 간혹 내지만 고종석의 (한)국어 사랑은 각별한데, 지난주부터 연재를 시작한 '말들의 풍경'(그의 자백대로 작고한 평론가 김현 선생의 제명을 훔쳐온 것이다)에 내가 기대를 거는 건 그런 이유에서이다(그의 가지런한 한국어는 요즘의 어지간한 비평가들도 주지 못하는 '읽는 재미'를 내게 준다).  

여하튼 점심을 먹었으면 '봄날의 만보'라도 다녀올 일이거만, 나는 고작 이런 페이퍼나 쓰다가 잠시 도서관에 다녀오는 걸로 오늘의 산책을 마감했다. 그러면서 떠올린 것은 '산책'열이라고 하면 세계 정상을 자부하는 나라 러시아이다. 모스크바의 산책로들이 기억에 새로웠는데, 이미지는 요즘 분위기에 맞게 모스크바대학의 야구장을 띄워놓는다(이미지 버점 참조). 러시아 야구수준이라는 건 별 게 없지만 대학간 친선경기가 이 경기장에서 열리며(나는 구경가보지 못했지만) 내가 있던 본관 기숙사에는 한동안 와세다 대학의 야구 선수 한 명이 초청을 받아 기숙한 적이 있었다. 이런 날에는 저런 경기장에서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뛰어보는 것도 부듯하겠다.  

 

 

 

 

최근에 나온 책으로 그런 부듯함을 안겨주는 건 최선 교수의 번역으로 나온 대역본 <예브게니 오네긴>(서울대출판부, 2006)이다. 이미 지난 99년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두 종의 번역서가 출간된 적이 있는데(물론 그밖에도 국역본이 두엇 더 된다) 이번에 나온 대역본의 특징은 러시아어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한 페이지당 한 연씩 할당해서 배치하고 있다는 점. 그러니 이미 러시아어본, 영어본 등을 포함해서 여러 종의 번역본을 갖고 있는 처지이지만 '애서가'의 구미를 당기는 책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대역본으로는 서정시편들을 담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민음사) 이후에 처음이 아닌가 싶다(역자의 또다른 푸슈킨 번역으로는 <보리스 고두노프>와 <벨킨 이야기/스페이드 여왕>이 있다). 아래는 푸슈킨의 친필 원고.

특히나 역자는 '오네긴 연(스탄자)'라고도 불리는 고유한 형식과 리듬감을 우리말로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애를 쓴지라 이런 봄날에 산보하면서, 혹은 벤치에 앉아서 읽기에 더욱 좋겠다(밤에는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곡들과 함께). 한번쯤 러시아 문학의 '대명사' 푸슈킨의 세계에 한번쯤 빠져보시길. 혹은 각별한 애정이 담긴 손으로 받아보시길. "반은 우습고, 반은 슬프고, 소박하고 서민적이고 또 고답적인 각양각색의 장을 모은 이 작품을. 내 즐거움과 불면과 날개 돋친 영감의 결실, 설익은 시절과 시들어버린 시절의 열매, 이성의 냉철한 관찰과 심장의 슬픈 기억으로 내키는 대로 엮은 결과물을."   

러시아문학 전공자로서 덧붙이자면, <예브게니 오네긴>의 주석으로는 역자가 참조하고 있는 유리 로트만의 주석과 작가 나보코프의 번역/주석이 가장 유명하다. 나보코프의 주석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으며 나도 재작년에 구했던 책이다(저렴하기에). 아무려나 전공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사랑받는 '고전'이었으면 싶다.

한가지 더. 이번에 나온 번역본에서는 '타치야나'나 '따찌야나'로 표기되었던 여주인공이 '타티아나'로 표기됏다. 구개음화를 표기에 반영하지 않은 것인데(읽을 때는 '타치야나'로 읽어야겠다), 다소 독특한 선택이다. 그리고, 작품의 대단원에서 '끝'에 해당하는 러시아어 '까녜츠(конец)'가 '까녜치(конеч)'로 잘못 표기됐다. 오타일 텐데, 한편으로는 이 작품에 대한 읽기와 번역이 결코 종결될 수 없는 것임을 고지하는 듯도 하다.

푸슈킨 자신이 이렇게 적어놓고 있지 않은가? "삶의 소설을 끝까지 읽지 않고 내가 내 오네긴과 그런 것처럼 갑자기 소설과 작별할 수 있는 사람은 축복 받은 자이다."

 

 

 

 

두번째 책은 앙그레 라콕과 폴 리쾨르의 공저 <성서의 새로운 이해>(살림, 2006)이다(이 책은 이미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돼 있다). 살림출판사에서 나오는 '우리시대 신학총서'의 10번째 책으로 나온 것인데, 원저는 'Thinking Biblically'(1998)이고 역자 김창주 교수는 시카고 신학대학의 교수인 라콕의 제자이다. 같은 출판사에서 작년 연말에 나온 폴 존슨의 기독교사 <2천년 동안의 정신>과 같이 읽어보면 기독교에 대한 이해와 '영성 함양'에 도움이 되겠다.

두 공저자는 책의 부제 '주석학과 해석학의 대화'에서 각각 성서 '주석학'과 '해석학'을 떠맡고 있는데, 작년에 타계한 프랑스 철학자 리쾨르에 대해서는 따로 소개가 필요하지 않을 테고, 라콕 교수도 저명한 성서학자로서 시카고 신학교에 재직하면서 멀치아 엘리아데, 리쾨르 등과 깊은 교분을 나눈 것으로 돼 있다.

지난 연초에 '시편'을 좀 읽으면서 관련 주석들을 찾아읽은 적이 있는데, 비록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종교(성) 혹은 '종교적 인간'에 대한 나의 관심은 뿌리가 깊은 편이다. 거기에 레비나스나 데리다의 종교론에 자극을 받아서(거기에 지젝의 '유물론적 신학'까지 보태진다) 성서와 그 관련서들을 조금씩 읽고 있다(데리다식의 성서 읽기로는 'Derrida's Bible'(2004) 같은 논문집이 나와 있고 데리다와 종교라는 테마에 대해서는 Yvonne Sherwood의 'Derrida and Religion'(2004)가 가장 포괄적이다. 데리다와의 인터뷰도 포함돼 있다). '주석학과 해석학의 대화' 방식으로 성서를 읽는 것은 그 읽기에 요긴한 지침이 되어줄 듯하다.  

 

 

 

 

세번째 책은 아돌프 로스의 <장식과 범죄>(소오건축, 2006). 모처럼 건축(비평)가의 책을 꼽게 됐는데, <아르누보>(예경, 2005)에 잠깐 소개돼 있다는 저자 아돌프 로스(1870-1933)는 "현재의 체코 브르노에서 태어나 빈에서 활동한 오스트리아 건축가이자 비평가"로서 "<장식과 범죄(1908)>를 비롯한 많은 사회, 문화비평들로 빈 아르누보(제체시온)에 반기를 들고 현대의 정신이 나아갈 바를 제시했다"고 한다.  

사실 로스의 책은 오늘 한겨레의 북리뷰를 읽다가 '발견'한 것이다. '장식'과 '범죄'라는 제목부터가 눈에 띄는데, 한마디로 "장신은 죄악이다"라는 게 그의 세계관이라고 한다. 리뷰에 따르면, "그는 건축의 진정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건축은 건물의 실제 목적과 부합해야 한다는 것, 재료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시대가 보유한 진보적 기술로 지을 것을 주문했다."(그에 따르면 대중의 수준이 낮을수록 장식을 원하며 장식만 강조하는 것은 범죄와 문신의 관계와 같다고.)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그는 츠빙거 궁전 같은 건축 대신에 당연히 심플하고 실용적인 건축을 지향했겠다. 그가 디자인한 아파트라고 한다(아파트 값도 좀 저렴해지지 않을까?). 한데, 국내의 아파트들은 다 그런 '심플한' 아파트들 아닌가?(오히려 로스의 아파트가 장식적으로 보일 정도로!)

과거 유럽의 궁전들 같은 '장식적인' 건축들을 주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지라(서울이 세기말의 비엔나도 아니고) 아돌프 로스의 '세계관'은 감동적이면서도 멋쩍다. 우리 현실에 대입하자면, "실내장식(인테리어)은 죄악이다"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랬다면 세간이 별로 없는 나로선 더욱 감격했을 것이다.

 

 

 

 

네번째 책은 브루스 모런의 <지식의 증류>(지호, 2006)이다. 부제는 '연금술, 화학, 그리고 과학혁명'이며 오랜만에 나온 '연금술' 책. '오랜만'이라고 한 건 내가 갖고 있는 앨리슨 쿠더트의 <연금술 이야기>(민음사, 1995)를 염두에 두어서이다. 물론 그간에 관련서들이 없지 않았다(코엘료의 <연금술사> 탓인가?). 이번의 책은 과학사가인 저자가 과학혁명의 장애물로 간주되어온 연금술의 복권을 시도하고 있는 책. 저자에 따르면, 16-17세기에 연금술이야말로 과학혁명의 원동력이었다는 것.

소개에 의하면, "지은이는 연금술사들의 발견이 비록 부정확한 오류 투성이지만 정밀하고 장시간에 걸친 관찰과 실험을 통해 과학적 연구의 토대를 세웠다고 말한다. 이와 함께 현대 의학과 화학, 인체에 대한 이해 등에 끼친 영향을 상세히 묘사한다. 연금술사들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 아이작 뉴턴 등의 저작을 분석하면서 당대 많은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연금술을 과학적 학문으로 여기는 시각을 보여준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최적의 입문서라고 하니까 믿어봄 직하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역시나 산책할 때 들고나가기 좋은 책(다소 두꺼운가?), <한시의 세계>(문학동네, 2006)이다. "한시 감상의 기초 개념과 한시의 양식을 체계적으로 소개한 입문서. <김시습 평전>, <한시기행>의 고려대 심경호 교수가, 2001년부터 2년간 월간 「현대시」에 연재했던 원고를 다듬고 여기에 새로운 내용을 보충하여" 펴낸 책으로 "한시 구성의 기본 원리에서부터 한시 미학의 핵심적인 개념들, 한시에서 즐겨 다루는 소재, 한시 창작의 방법론 등을 200편이 넘는 다채로운 한시와 더불어 설명했다. 당시와 송시뿐 아니라 뛰어난 한국 한시까지 골고루 소개해 '한시의 세계' 전체를 균형 있게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해서 읽어보면 된다.

그간에 한시 입문서의 최강자는 정민 교수의 <한시미학산책>(솔출판사, 2006)과 어린이용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보림, 2003)였다. 이에 심경호 교수의 <한시의 세계>가 도전장을 내민 형국이다. 그 귀추가 주목된다. 여기서 맛보기 한 수와 그 해설을 잠시 감상해본다.

春宵一刻値千金 봄날 밤은 한 시각이 곧 천금
花有淸香月有陰 꽃은 맑은 향기 품고 달빛은 어스름하다.
歌管樓臺聲細細 누대에선 노래와 피리 소리 가늘게 들려오고
楸韆院落夜沈沈 그네만 남은 정원에 밤은 점점 깊어간다.

"술자리가 벌어졌던 누대에도 밤이 깊자 노랫소리와 피리 소리가 희미하다. 그래도 불빛이 여전히 휘황한 누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시인은 정원에 홀로 서 있다. 낮에는 여인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깔깔대는 웃음을 흘리며 그네를 뛰던 정원이다. 밤이 깊도록 시인은 홀로 깨어 서성인다. 독성(獨醒), 이것이 한시의 영원한 주제이다. 세상 물결에 휩쓸려 잠길락 뜰락 하면서 흘러가면 그만인 인생을, 시인은 그렇게 살아가지 못한다. 이 절망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한시에는 그 긴장이 있다."(강조는 나의 것) 조오타!

거기에 호응하여 김수영의 시 '봄밤' 한 수.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이 봄밤이다. 그런 밤들이 지나가고 있다...

06. 0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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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6-03-20 01:28   좋아요 0 | URL
16, 17세기의 연금술이나 헤르메티즘이 과학혁명의 원동력이었다는 분석은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과학의 탄생>라는 책에서도 나오는 내용이죠. 그밖에도 다빈치코드의 히트이후 관련서들이 나오면서 같이 나온 <성혈과 성배>.<다빈치코드의 비밀> <다빈치코드와 숨겨진 역사>등과 같은 책도 기본적으로 연금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책이라고 볼수있습니다. 최근들어서 로버트 보일이나 아이작 뉴튼등과 같은 당대의 대과학자들이 연금술이나 시온수도회등과 같은 조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들이 많이 밝혀지고 있다고 하는군요.

로쟈 2006-03-20 12:35   좋아요 0 | URL
뉴튼이 밤에는 딴짓을 했다는 건 비교적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다만 과학사가들이 정면으로 '인정'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 거 같습니다. <다빈치 코드>는 제가 아직 읽지 않아서.^^ 나중에 정리를 한번 해주시면 좋겠네요...

yoonta 2006-03-20 15:00   좋아요 0 | URL
다빈치코드는 안읽으셔도 되고요..^^ 대신 <성혈과 성배>..그리고 <다빈치코드와 숨겨진 역사>(원제는 Templar revelation...-_-)를 보시는게 좋습니다.

서구에서 과학의 발전은 원래 연금술사들이나 오컬티스트들에 의해서 이루어져왔죠...르네쌍스의 핵심적 인물들의 대부분도 연금술사들이고요. 다만 데카르트이후에 과학이 정신과 물체의 이원론에 기반한 근대적 방식으로 재정의 되면서 연금술적 지식들이 가진 통합적이고 일원론적 접근법이 폐기된 것이죠. 사실 그 이전까지는 지식과 과학이라는 말과 연금술, 헤르메티시즘등은 같은 것을 지칭하는 말이었다고 하더군요.
 

점심 먹고 산책 삼아 몇 권의 책을 소개한다. 봄비가 살짝 내렸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볕이 좋다(당연한 말이지만, '봄날'이다). 어제 한국일보에 실렸던 고종석의 칼럼 '봄날의 만보(漫步)'는 오늘 날씨에 더 어울렸음 직하다. 그 칼럼의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삶의 큰 부분은 싸움이다. 사람이라는 종(種)이 출현한 뒤 줄곧 그랬겠지만, 인간의 가장 내밀한 부분까지 거리낌없이 상품화하고 있는 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리 악착같이 싸우는 것도 따지고 보면 결국 쉬기 위해서다. 깊숙한 수준에서, 그것은 뜻밖에도 초월의 소망과 잇닿아 있다. 둘레 세계와 거리를 두고 혼자 느릿느릿 걸을 때 우리는 문득 제 주인이 되어 초월의 문턱에 설 수 있다. 우리는 제 주인으로 태어났지만, 일상 속에서 대체로 제 주인이 되지 못한다. 홀로 느릿느릿 걷는 것은 잠시라도 제 주인이 되는 길이다. 지금이 바로 이런 성찰적 걷기의 적기다. 조금 있으면 선거와 축구의 미친 바람이 휘몰아칠 테니."

 

 

 

 

'둘레 세계'란 표현을 굵을 글씨로 강조한 것은 나의 견문으로는 '최초의' 조어가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어제 인터넷 검색을 잠시 해보았는데, 같은 표현을 찾지 못했다). 보통은 '주변'이나 '주변 세계'란 말로 대신할 대목에서 고종석은 '둘레 세계'라고 적었고, 이 새로운 조어 때문에 나는 반나절이 즐거웠다. 요즘 흔히 쓰는 '배둘레' '허리둘레' 할 때의 '둘레'가 '둘레 세계'로 스카웃된 것은 마치 WBC에서 한국야구팀이 미국과 일본팀은 연파한 것과 같은 (대견한) 쾌감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고종석의 영어이야기> 같은 책도 간혹 내지만 고종석의 (한)국어 사랑은 각별한데, 지난주부터 연재를 시작한 '말들의 풍경'(그의 자백대로 작고한 평론가 김현 선생의 제명을 훔쳐온 것이다)에 내가 기대를 거는 건 그런 이유에서이다(그의 가지런한 한국어는 요즘의 어지간한 비평가들도 주지 못하는 '읽는 재미'를 내게 준다).  

여하튼 점심을 먹었으면 '봄날의 만보'라도 다녀올 일이거만, 나는 고작 이런 페이퍼나 쓰다가 잠시 도서관에 다녀오는 걸로 오늘의 산책을 마감했다. 그러면서 떠올린 것은 '산책'열이라고 하면 세계 정상을 자부하는 나라 러시아이다. 모스크바의 산책로들이 기억에 새로웠는데, 이미지는 요즘 분위기에 맞게 모스크바대학의 야구장을 띄워놓는다. 러시아 야구수준이라는 건 별 게 없지만 대학간 친선경기가 이 경기장에서 열리며(나는 구경가보지 못했지만) 내가 있던 본관 기숙사에는 한동안 와세다 대학의 야구 선수 한 명이 초청을 받아 기숙한 적이 있었다. 이런 날에는 저런 경기장에서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뛰어보는 것도 부듯하겠다.  

 

 

 

 

최근에 나온 책으로 그런 부듯함을 안겨주는 건 최선 교수의 번역으로 나온 대역본 <예브게니 오네긴>(서울대출판부, 2006)이다. 이미 지난 99년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두 종의 번역서가 출간된 적이 있는데(물론 그밖에도 국역본이 두엇 더 된다) 이번에 나온 대역본의 특징은 러시아어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한 페이지당 한 연씩 할당해서 배치하고 있다는 점. 그러니 이미 러시아어본, 영어본 등을 포함해서 여러 종의 번역본을 갖고 있는 처지이지만 '애서가'의 구미를 당기는 책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대역본으로는 서정시편들을 담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민음사) 이후에 처음이 아닌가 싶다(역자의 또다른 푸슈킨 번역으로는 <보리스 고두노프>와 <벨킨 이야기/스페이드 여왕>이 있다). 아래는 푸슈킨의 친필 원고.

특히나 역자는 '오네긴 연(스탄자)'라고도 불리는 고유한 형식과 리듬감을 우리말로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애를 쓴지라 이런 봄날에 산보하면서, 혹은 벤치에 앉아서 읽기에 더욱 좋겠다(밤에는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곡들과 함께). 한번쯤 러시아 문학의 '대명사' 푸슈킨의 세계에 한번쯤 빠져보시길. 혹은 각별한 애정이 담긴 손으로 받아보시길. "반은 우습고, 반은 슬프고, 소박하고 서민적이고 또 고답적인 각양각색의 장을 모은 이 작품을. 내 즐거움과 불면과 날개 돋친 영감의 결실, 설익은 시절과 시들어버린 시절의 열매, 이성의 냉철한 관찰과 심장의 슬픈 기억으로 내키는 대로 엮은 결과물을."   

러시아문학 전공자로서 덧붙이자면, <예브게니 오네긴>의 주석으로는 역자가 참조하고 있는 유리 로트만의 주석과 작가 나보코프의 번역/주석이 가장 유명하다. 나보코프의 주석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으며 나도 재작년에 구했던 책이다(저렴하기에). 아무려나 전공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사랑받는 '고전'이었으면 싶다.

  

한가지 더. 이번에 나온 번역본에서는 '타치야나'나 '따찌야나'로 표기되었던 여주인공이 '타티아나'로 표기됏다. 구개음화를 표기에 반영하지 않은 것인데(읽을 때는 '타치야나'로 읽어야겠다), 다소 독특한 선택이다. 그리고, 작품의 대단원에서 '끝'에 해당하는 러시아어 '까녜츠(конец)'가 '까녜치(конеч)'로 잘못 표기됐다. 오타일 텐데, 한편으로는 이 작품에 대한 읽기와 번역이 결코 종결될 수 없는 것임을 고지하는 듯도 하다.

푸슈킨 자신이 이렇게 적어놓고 있지 않은가? "삶의 소설을 끝까지 읽지 않고 내가 내 오네긴과 그런 것처럼 갑자기 소설과 작별할 수 있는 사람은 축복 받은 자이다."

 

 

 

 

두번째 책은 앙그레 라콕과 폴 리쾨르의 공저 <성서의 새로운 이해>(살림, 2006)이다(이 책은 이미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돼 있다). 살림출판사에서 나오는 '우리시대 신학총서'의 10번째 책으로 나온 것인데, 원저는 'Thinking Biblically'(1998)이고 역자 김창주 교수는 시카고 신학대학의 교수인 라콕의 제자이다. 같은 출판사에서 작년 연말에 나온 폴 존슨의 기독교사 <2천년 동안의 정신>과 같이 읽어보면 기독교에 대한 이해와 '영성 함양'에 도움이 되겠다.

두 공저자는 책의 부제 '주석학과 해석학의 대화'에서 각각 성서 '주석학'과 '해석학'을 떠맡고 있는데, 작년에 타계한 프랑스 철학자 리쾨르에 대해서는 따로 소개가 필요하지 않을 테고, 라콕 교수도 저명한 성서학자로서 시카고 신학교에 재직하면서 멀치아 엘리아데, 리쾨르 등과 깊은 교분을 나눈 것으로 돼 있다.

지난 연초에 '시편'을 좀 읽으면서 관련 주석들을 찾아읽은 적이 있는데, 비록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종교(성) 혹은 '종교적 인간'에 대한 나의 관심은 뿌리가 깊은 편이다. 거기에 레비나스나 데리다의 종교론에 자극을 받아서(거기에 지젝의 '유물론적 신학'까지 보태진다) 성서와 그 관련서들을 조금씩 읽고 있다(데리다식의 성서 읽기로는 'Derrida's Bible'(2004) 같은 논문집이 나와 있고 데리다와 종교라는 테마에 대해서는 Yvonne Sherwood의 'Derrida and Religion'(2004)가 가장 포괄적이다. 데리다와의 인터뷰도 포함돼 있다). '주석학과 해석학의 대화' 방식으로 성서를 읽는 것은 그 읽기에 요긴한 지침이 되어줄 듯하다.  

 

 

 

 

세번째 책은 아돌프 로스의 <장식과 범죄>(소오건축, 2006). 모처럼 건축(비평)가의 책을 꼽게 됐는데, <아르누보>(예경, 2005)에 잠깐 소개돼 있다는 저자 아돌프 로스(1870-1933)는 "현재의 체코 브르노에서 태어나 빈에서 활동한 오스트리아 건축가이자 비평가"로서 "<장식과 범죄(1908)>를 비롯한 많은 사회, 문화비평들로 빈 아르누보(제체시온)에 반기를 들고 현대의 정신이 나아갈 바를 제시했다"고 한다.  

사실 로스의 책은 오늘 한겨레의 북리뷰를 읽다가 '발견'한 것이다. '장식'과 '범죄'라는 제목부터가 눈에 띄는데, 한마디로 "장신은 죄악이다"라는 게 그의 세계관이라고 한다. 리뷰에 따르면, "그는 건축의 진정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건축은 건물의 실제 목적과 부합해야 한다는 것, 재료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시대가 보유한 진보적 기술로 지을 것을 주문했다."(그에 따르면 대중의 수준이 낮을수록 장식을 원하며 장식만 강조하는 것은 범죄와 문신의 관계와 같다고.)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그는 위의 츠빙거 궁전 같은 건축 대신에 당연히 아래와 같은 심플하고 실용적인 건축을 지향했겠다. 그가 디자인한 아파트라고 한다(아파트 값도 좀 저렴해지지 않을까?).

한데, 국내의 아파트들은 다 그런 '심플한' 아파트들 아닌가?(오히려 로스의 아파트가 장식적으로 보일 정도로!)

 

과거 유럽의 궁전들 같은 '장식적인' 건축들을 주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지라(서울이 세기말의 비엔나도 아니고) 아돌프 로스의 '세계관'은 감동적이면서도 멋쩍다. 우리 현실에 대입하자면, "실내장식(인테리어)은 죄악이다"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랬다면 세간이 별로 없는 나로선 더욱 감격했을 것이다.

 

 

 

 

네번째 책은 브루스 모런의 <지식의 증류>(지호, 2006)이다. 부제는 '연금술, 화학, 그리고 과학혁명'이며 오랜만에 나온 '연금술' 책. '오랜만'이라고 한 건 내가 갖고 있는 앨리슨 쿠더트의 <연금술 이야기>(민음사, 1995)를 염두에 두어서이다. 물론 그간에 관련서들이 없지 않았다(코엘료의 <연금술사> 탓인가?). 이번의 책은 과학사가인 저자가 과학혁명의 장애물로 간주되어온 연금술의 복권을 시도하고 있는 책. 저자에 따르면, 16-17세기에 연금술이야말로 과학혁명의 원동력이었다는 것.

소개에 의하면, "지은이는 연금술사들의 발견이 비록 부정확한 오류 투성이지만 정밀하고 장시간에 걸친 관찰과 실험을 통해 과학적 연구의 토대를 세웠다고 말한다. 이와 함께 현대 의학과 화학, 인체에 대한 이해 등에 끼친 영향을 상세히 묘사한다. 연금술사들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 아이작 뉴턴 등의 저작을 분석하면서 당대 많은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연금술을 과학적 학문으로 여기는 시각을 보여준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최적의 입문서라고 하니까 믿어봄 직하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역시나 산책할 때 들고나가기 좋은 책(다소 두꺼운가?), <한시의 세계>(문학동네, 2006)이다. "한시 감상의 기초 개념과 한시의 양식을 체계적으로 소개한 입문서. <김시습 평전>, <한시기행>의 고려대 심경호 교수가, 2001년부터 2년간 월간 「현대시」에 연재했던 원고를 다듬고 여기에 새로운 내용을 보충하여" 펴낸 책으로 "한시 구성의 기본 원리에서부터 한시 미학의 핵심적인 개념들, 한시에서 즐겨 다루는 소재, 한시 창작의 방법론 등을 200편이 넘는 다채로운 한시와 더불어 설명했다. 당시와 송시뿐 아니라 뛰어난 한국 한시까지 골고루 소개해 '한시의 세계' 전체를 균형 있게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해서 읽어보면 된다.

그간에 한시 입문서의 최강자는 정민 교수의 <한시미학산책>(솔출판사, 2006)과 어린이용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보림, 2003)였다. 이에 심경호 교수의 <한시의 세계>가 도전장을 내민 형국이다. 그 귀추가 주목된다. 여기서 맛보기 한 수와 그 해설을 잠시 감상해본다.

春宵一刻値千金 봄날 밤은 한 시각이 곧 천금
花有淸香月有陰 꽃은 맑은 향기 품고 달빛은 어스름하다.
歌管樓臺聲細細 누대에선 노래와 피리 소리 가늘게 들려오고
楸韆院落夜沈沈 그네만 남은 정원에 밤은 점점 깊어간다.

"술자리가 벌어졌던 누대에도 밤이 깊자 노랫소리와 피리 소리가 희미하다. 그래도 불빛이 여전히 휘황한 누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시인은 정원에 홀로 서 있다. 낮에는 여인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깔깔대는 웃음을 흘리며 그네를 뛰던 정원이다. 밤이 깊도록 시인은 홀로 깨어 서성인다. 독성(獨醒), 이것이 한시의 영원한 주제이다. 세상 물결에 휩쓸려 잠길락 뜰락 하면서 흘러가면 그만인 인생을, 시인은 그렇게 살아가지 못한다. 이 절망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한시에는 그 긴장이 있다."(강조는 나의 것) 조오타!~

거기에 호응하여 김수영의 시 '봄밤' 한 수.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이 봄밤이다. 그런 밤들이 지나가고 있다...

06. 0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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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하 2006-03-17 13:16   좋아요 0 | URL
아아....^^; 그렇군요
 

 

 

 

  

 

최근에 출간된 알베르트 망구엘의 <독서일기> 때문에 생각된 글이 있다. 재작년 봄에 모스크바통신에 번역해서 올렸던 것인데, 애서가에 관한 움베르토 에코의 기명 칼럼. 이탈리아 잡지 <레스프레소(L’Espresso)>지에 실렸던 것이 당시 러시아 신문 <리테라투르나야 가제타>(우리말로는 ‘문학신문’이고 매주 수요일 발행)에 번역/소개되었었다. 그걸 중역한 것. 

에코의 <레스프레소> 칼럼들은 <미네르바 성냥갑>(열린책들, 2004)이란 제목으로 두 권 분량이 국내에 번역된 바 있다. ㅡ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나 <작은 일기> 등도 역시 이런 류의 칼럼들을 모은 것이다. '애서가'에 관한 그의 칼럼도 언젠가 이탈리아어에서 직역될 듯하지만, 여기서는 중역된 것을 창고정리 차원에서 옮겨놓는다. 이미지들을 좀 집어넣어서.  

  

최근에 나는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두 차례 ‘책 수집’이란 테마를 다룰 기회가 있었고, 두 번 다 청중 가운데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었다. ‘책 수집에의 열정’을 애서가 자신들에게 말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보편적인 ‘읽기에의 애호’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르네상스 시기 회화나 중국의 도자기를 수집하는 사람의 집이 갔다고 해보자. 물론 당신은 그 아름다움에 매료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당신에게 다 바랜 17세기의 소책자를 보여주면서 그 주인이 손가락으로 따라가며 읽었을 거라고 단정지을 때, 따분한 손님은 대개 헤어질 시간만을 겨우겨우 기다릴 것이다.


 

 

  

 

책 수집 – 이것은 책에 대한 사랑이지만, 그 책의 내용에 대한 사랑까지 늘 뜻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당신이 어떤 주제에 대해서 알고 싶을 경우에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 애서가라면 그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더라도 책을 갖고 싶어하며, 더 나아가 가급적이면 초판본을 구하고자 할 것이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어떤 애서가들은(나는 찬성을 하지는 않지만 이해는 한다) 손에 넣은 책을 심지어 열어보기조차 하지 않는다. 책을 망칠까봐서. 그들에게서 희귀본의 책장을 여는(열기 위해 자르는) 것은 시계 수집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시계 뒤쪽을 열어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애서가는 단테의 <신곡>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곡>의 특정한 판본이나 특정한 책자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가 마음에 들어하는 것은 책을 만져보고, 책의 페이지들을 쓰다듬어보며, 책의 장정을 손에 들고 다니는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마치 자신을 매혹시키는 어떤 대상처럼 책과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책은 그에게 자신의 내력과 삶에 대해서, 자신을 소지했던 많은 사람들의 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때로는, 엄지 손가락 자국, 난외의 메모들, 밑줄들, 속표지의 자필서명들, 심지어 책벌레의 흔적들 등등이 이런 이야기들을 해준다. 하지만, 더욱 황홀한 일은 500년 전에 발간된 책이 당신의 손이 새 책처럼 깨끗한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살짝 갈라지는 소리를 낼 때이다.

 

 



 

 

하지만, 50년이 안된 책이라 하더라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 나에겐 50년대 초에 발간된 E. 질송의 <중세철학>이 있는데, 이 책은 내가 학위논문을 방어할 때부터 지금까지 내 곁을 지켜오고 있다. 그 당시에는 종이의 질이 열악해서 지금은 종이가 다 부서져 심지어 책장을 넘기기도 힘들다. 만약에 이 책이 공부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서만 쓰였다면, 나는 저렴한 가격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새 판본을 찾아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밑줄과 여러 잉크로 씌어진 메모들이 있는 바로 이 낡은 책이며, 세월과 무관하게 이 책을 읽을 때마다 내가 성장해 가던 시절뿐만 아니라 최근의 기억들까지도 상기하게 된다.

나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하여 젊은이들에게 이야기했다. 왜냐하면 보통 ‘책 수집에의 열정’은 돈 많은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수억 리라씩 하는 희귀본들도 있다(몇 년 전에 <신곡>의 초판본이 15억 리라에 경매에 나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책에 대한 사랑은 고서(古書)들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며, 거기엔 현대시의 초판본 같이 단순히 좀 오래된 책에 대한 사랑도 포함된다. 예컨대, <살라나>출판사에서 나온 <아동문학전집>을 구하는 애호가들도 있다.



3년 전에 나는 한 헌책방에서 지오반니 파피니(1881-1956)의 <곡>, 제본됐지만 진본 종이 표지를 가진 초판본(*무슨 말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2만 리라에 구입했다. 하지만, 캄파노(?)의 <오르페우스의 노래> 초판본은 10년 전에 우연히 (경매)목록에 들어 있는 걸 보고 천 3백만(리라)에 구한 것이다(물론, 이 가련한 사람이 이런 책을 뜯어볼 기회를 가진 것은 다해봐야 몇 권에 불과했다). 하지만, 20세기 책들에 대한 훌륭한 수집(컬렉션)도, 피자가게에서 저녁을 먹는 걸 제외하고 이따금 모든 걸 희생하면서라면, 가능하다.

헌책방을 순례하면서 나의 학생 하나는 특이하게도 다양한 시대의 여행 안내책자를 수집했다. 처음엔 그런 발상이 나에겐 좀 별스러운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퇴색한 사진들로 채워진 이 책자들에 기초하여 이 학생은 나중에 아주 훌륭한 졸업논문을 썼는데, 그 논문에서 그는 여러 도시들에 대한 시각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추적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별로 가진 거 없는 젊은이들도 ‘포르타 포르테제’나 ‘상트 암브로지오’ 시장에서 뜻하지 않게 16세기나 17세기 책들과 맞닥뜨릴 수 있다. 이 책들이 지금은 좋은 운동화 한 켤레 값 정도이고, 진품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시대를 증언해 줄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책 수집은 우표 수집과 아주 유사하다. 물론, 진짜 수집가들에게는 언제나 엄청난 고가의 어떤 것이 있다. 하지만, 내가 회상하는 건, 아직 어린 꼬마였을 때 신문판매점에서에서 10장 혹은 20장으로 포장된 우표를 사서는 그날 저녁을 내내 이 다채로운 색깔의 직사각형(=우표)에서 본 마다가스카르나 피지 군도를 상상하면서 보내던 때이다. 이런 우표들은 물론 결코 드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런 것들에 대한 향수(노스텔지어)를 경험한다.

06. 0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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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99 2006-03-15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제본됐지만 진본 종이 표지를 가진 초판본(*무슨 말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다)"은 초판본인데 (표지도 초판본의 표지를 그대로 사용해서) 제본만 새로한 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언뜻 생각이 떠올라 주제 넘게 끄적여 봅니다.

로쟈 2006-03-15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국내에도 그렇게 만드는 책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대략 그런 식이지 않을까라고 짐작만 하고 있습니다...

south99 2006-03-15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끔 그런 식으로 제본합니다. 아끼는 책이 너덜거리면 다시 해체해서 제본합니다. 페이퍼백의 경우 2-3천원이면 되더라구요. 항상 로쟈님의 서재를 흥미롭게 드나들고 있습니다. 인사 겸 해서 다시 끄적입니다.

로드무비 2006-03-15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흥미롭습니다. 퍼갈게요.^^

twoshot 2006-03-15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수집이 우표수집과 유사하다는 말씀에 슬쩍 찡한 느낌이 오네요. 제가 가지고 있는 박정희우표, 최규하우표, 전두환우표가 밉지만은 않은 것이...

로쟈 2006-03-21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귀님/ 정확하게 짚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페이퍼는 그래도 읽어주시는군요.^^
 

작년에 내한한 바 있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에 관한 몇 가지 자료들을 인용-정리하고자 한다. 나의 관심은 조금더 문학적인 차원에서 러시아 민족주의 혹은, '러시아에서의 네이션과 소설(Nation and Narration)의 문제'란 테마에 놓여 있지만, 사전정지작업의 일환으로 앤더슨의 민족주의 비판적 문제제기에 관한 국내외의 논란(민족주의 vs 탈민족주의)도 얼마간 정리해보고자 하는 것. 물론 그걸 일거에 정리할 만한 역량을 나는 갖고 있지 않으며 대신에 몇 가지 자료를 인용-정리해놓는다.

그러고 몇 시간... 집앞에 있는 PC방을 놔두고 볼일 때문에 나왔다가 5분쯤 거리에 있는 PC방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예상대로 초딩들이 진치고 있는지라 공기가 훨씬 낫다(집앞 PC방은 한 시간만 죽치고 있어도 옷에 담배 냄새가 밴다). 집에 인터넷을 깔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백수파보다는 초딩파에 붙어지내야겠다. 흡연/끽연 문제에 있어서 나는 백수들보다는 초딩들과 더 강한 연대의식, 공동체의식을 느낀다... 

 

 

 

 

갑작스레 베네딕트 앤더슨 얘기를 꺼내게 된 건(물론 작년봄 그가 강연차 내한했을 때도 몇 마디 거들려다가 그만두긴 했었다) 어젯밤에 문득 호미 바바가 편집한 'Nation and Narration'(Routledge, 1990)을 꺼내들고 서문을 읽게 되었기 때문이다(러시아 국민문학 발생의 문제에 관한 생각을 좀 진전시켜보자는 속내에서. 러시아에서도 이 주제와 관련한 책들을 한두 권 구해왔었다), 그런데 거기 제일 처음 인용되는 문장이 바로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가 아닌가. 다행히 박스에 들어가 있지 않은 국역본을 바로 서가에서 꺼내들었다. 몇 년전에 개정판 원서(1991; 초판은 1983)를 구하려다가 못 구한 적이 있는데(대출중이었던가) 이 참에 구해서 읽어보기로 마음먹고(사실 앤더슨의 기본 아이디어 자체는 이미 제목 자체에 기입돼 있기도 하지만, 여러 소개/해설들을 통해 잘 알려진 것이기도 하다).

 

 

 

 

책을 열자마자 '감사의 말씀'에 나오는 첫문장. "독자들도 알아보겠지만, 민족주의에 대한 나의 사고는 에릭 아우얼바흐, 발터 벤야민 그리고 빅터 터너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5쪽) 그러니까 <상상의 공동체>를 읽기 전에 예비적으로 좀 읽어줘야 하는 책이 아우얼바하(아우얼바흐;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 벤야민의 <일루미네이션>(<조명>), 터너의 <제의에서 연극으로>(현대미학사, 1996) 등인 것. 전공상으론 가장 가까운(아마도 개인적인 면식도 있을 듯한데) 문화인류학자 터너의 책으로 앤더슨이 참조하고 있는 책은 'Dramas, fields, and metaphors : symbolic action in human society'(Cornell University Press, 1974)이지만, <제의에서 연극으로>에서도 그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간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번째 문장. "이 책을 준비하면서 나의 형인 페리 앤더슨과 안토니 바네트, 스티븐 헤더의 논평과 조언으로부터 크게 도움을 받았다." '뉴레프트지' 편집장으로도 유명한 맑스주의 이론가 페리 앤더슨은 사실 베네딕트 앤더슨보다 일찍 국내에 소개되었고 훨씬 잘 알려져 있다. 한데, 페리는 베네덱트의 형이 아니라 동생이다(베네딕트가 36년생이고, 페리는 38년생이다). 물론 영어 단어 brother는 형/동생을 가리지 않지만, 이 경우에 '나의 형'이라고 옮긴 것은 오역이다. 아주 사소하지만(앤더슨 집안 문제이니까), 번역본에 대한 신뢰에 약간 금이 간다(이런 건 그냥 사실 확인만 해보면 되는 것인데). 본문에서 이 금이 더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밖에(한데, 그런 사소한 오역은 12쪽에서도 나온다. 홉스봄의 책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가 <1788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로 잘못 옮겨졌다. *확인해보니까 원서 자체의 오타이다). 아래 사진은 앤더슨가의 형 베네딕트와 동생 페리. 

 

형 베네딕트가 훨씬 나이들어 보이는 것은 사진 자체가 비교적 최근의 것이기 때문이다. 작년 봄 방한시에 찍은 것이니까. 그때의 인터뷰 기사 두 건을 옮겨온다. 동아일보와 한겨레의 것이다. 내가 더 집어넣은 이미지들도 있다.  

동아일보(05. 04. 26) “20세기 민족주의는 19세기 민족주의와 큰 차이가 없었지만, 21세기 민족주의는 기존의 민족주의와 전혀 다른 ‘돌연변이 민족주의(mutant nationalism)’가 될 것입니다.” 민족주의가 근대의 문화적 산물이라는 학설을 체계화한 베네딕트 앤더슨(69) 미국 코넬대 명예교수가 한국을 처음 찾았다. 그가 1984년 발표한 ‘상상의 공동체: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는 에릭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과 함께 민족 또는 민족주의가 근대에 정치적 목적에 따라 재구성됐음을 정교하게 이론화한 저서로 꼽힌다.  

-앤더슨 교수는 한국동남아연구소와 서강대 동아연구소의 공동 초청으로 24일 방한해 26일 서강대 김대건관에서 ‘동남아의 부르주아 과두제’를 주제로 특별강연한 뒤 출국했다. 25일 저녁 그를 만나 최근 동북아에서 거세게 일고 있는 민족주의의 파고(波高)와 관련해 앞으로 민족주의의 전개방향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민족주의는 21세기에도 번성할 겁니다. 민족주의는 이제 우리 몸을 보호해주는 피부 같은 존재가 됐어요.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공동체를 유지해주니까요. 문제는 국내외 갈등상황만 발생하면 이 피부가 벌겋고 크게 부풀어 오른다는 데 있습니다.”  

-동북아에서는 민족주의의 파고가 높게 일고 있는 반면 유럽연합(EU)에서는 민족주의를 넘어선 통합의 움직임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독일출신의 라칭거 추기경이 (베네딕토 16세)교황이 됐을 때 영국신문에서는 ‘나칭거’(나치+라칭거의 합성어)라는 제목을 뽑을 정도로 민족주의는 모든 나라에 뿌리 깊게 잠복해 있습니다. 지금 민족주의적 성향이 가장 두드러진 나라가 바로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란 점도 이를 증명해요. 동북아의 민족주의 강화현상에도 자본주의화를 택함으로써 혁명의 정통성을 상실한 중국 정부의 국내 정치적 불안감이 깔려있습니다.”  

-중국에서 태어나 베트남 유모에게서 자라고 아일랜드 국적으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앤더슨 교수는 19세기와 20세기에 민족주의가 정복과 팽창의 형태로 나타났다면, 21세기 민족주의는 오히려 분열과 해체, 응축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민족국가의 확립이 국경선의 성역화로 나타나면서 1960, 70년대 이후 영토를 넓힌 민족국가는 없지만 구소련이나 유고연방처럼 오히려 영토가 나눠지는 경우는 늘고 있어요. 중국 인도와 같은 다민족국가도 이런 움직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겁니다.”

-그는 지구화의 흐름 속에 본토가 아니라 해외에 거주하는 민족구성원들에 의해 민족주의가 근본주의화하는 문제도 지적했다.

“아일랜드 본토에서는 아일랜드의 세계적 축제인 ‘성 패트릭 데이’에 동성애자들의 참가를 진작에 허용했지만 미국 뉴욕과 필라델피아의 아일랜드 인들은 전통에 어긋난다며 절대 허용하지 않습니다. 중국의 대만 공격을 가장 거세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중국 본토인이 아니라 미국의 화교들입니다. 힌두교 근본주의 본부가 있는 곳은 인도가 아니라 영국 런던이죠.”

-앤더슨 교수는 이러한 ‘원거리 민족주의’에는 과거에 대한 자부심과 집착이 숨겨져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민족주의와의 행복한 동거를 위해서는 미래지향적 시각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한겨레(05. 04. 27) “동남아시아에서 90년대 사회 개혁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지만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동남아 사회의 중산층을 이루는 화인들이 개혁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 민족주의 연구의 권위자 베네딕트 앤더슨(69) 미국 코넬대 정치학과 명예교수는 26일 오후 서강대에서 한국동남아연구소와 서강대 동아연구소 주최로 열린 ‘동남아의 부르주아 과두제’ 강연에서 ‘도발적’인 문제제기로 말문을 열었다.

-앤더슨 교수는 70년대까지 군부나 우파의 독재정권이 집권해 온 동남아 나라들이 80년대 이후 민주화와 개혁을 추진했지만, 중산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화인(거주국의 국적을 취득한 화교)들이 공적인 문제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개혁이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민주화나 개혁이 성공하려면 고등교육을 받고 경제력이 중산층이 나서야 하는데, 동남아 화인들은 경제적 성공에만 치중할 뿐 정치나 공적 영역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에서 주로 농사를 짓던 화인들은 자연재해나 아편전쟁 등의 정치적 변화를 계기로 동남아 각 지역에 정착했으나, 현지 문화에 동화하지 못해 현지의 사회·정치적 문제가 ‘내 일’로 다가오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칸 영화제에서 <열대병>(2004년)으로 심사위원상을 받은 타이 영화감독 아피차퐁 위라세타쿤이 정작 타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도 이와 연관시켜 설명했다. 타이의 민족주의적 문화나 정신을 표현한 작품에 화인들이 동질감을 느끼지 못해 투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동남아 화인들이 각 나라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예컨대 인도네시아 화인 인구는 3.5%에 불과하지만 전체 상장기업 시가총액의 73%에 이르는 지분을 갖고 있다. 말레이시아나 타이, 필리핀 등에서도 소수의 화인들이 전체 민간 자본의 50% 이상을 갖고 있다.

-화인들에게 부가 집중되면서 집권세력과 화인들의 관계는 자연스레 상호보완적으로 발전해 갔다. 화인들은 세금으로 집권층의 재정을 채워줬고, 집권층은 이들의 경제활동을 보장해 줬다. 화인들의 유교적 가부장 문화와 동남아 나라들의 압제적 권력구조가 비슷한 것도 이들이 정치 개혁에 나서지 않는 한 이유라고 앤더슨은 덧붙였다.

-앤더슨 교수는 대표적 저서 <상상의 공동체: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1983년)에서 민족의 개념을 ‘본래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공동체’라고 규정해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리고 최근에 동아일보 게재됐던 신용하 교수의 탈민족주의론 비판. 신교수는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의 권위자이며, (당연하지만) 대표적인 민족주의 옹호론자이다. 그의 기본입장은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와  '민족해방적 민족주의'를 구별하고 이 둘을 동일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그러니까 일제의 침략적 민족주의와 한국의 저항적 민족주의는 같지 않다는 것). 따라서 섣부른 민족주의 비판은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내다버리는 격이라는 게 신교수의 비판이다.    

동아일보(06. 03. 04) 민족은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배우고 믿어 왔듯 우리의 존재를 규정하는 근원이자 완성일까. 민족주의의 권력 지향성과 배타성 등 부정적 측면을 지적하며 탈(脫)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움직임이 최근 몇 년 사이에 국내 학계에서 확산돼 왔다. 탈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은 상상에 의한 허구라고 주장한다. 반면 민족은 허구가 아닌 실재하는 공동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에 따라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를 둘러싼 학계의 논쟁이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신용하(愼鏞廈) 한양대 석좌교수가 갈수록 활발해지고 있는 국내 학계의 탈민족주의 움직임에 대해 포문을 열고 나섰다. 일제하 독립운동사를 주로 연구해 온 신 교수는 한국사회학회 학회지 최근호에 실린 논문 ‘민족의 사회학적 설명과 상상의 공동체론 비판’에서 탈민족주의 이론의 고전으로 꼽히는 베네딕트 앤더슨 미국 코넬대 명예교수의 대표 저서 ‘상상의 공동체: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1984년)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신 교수가 최근 왕성하게 영역을 넓혀 가고 있는 국내 탈민족주의 진영의 학자들을 직접 거명하진 않았지만 이들을 겨냥한 것은 분명하다. 신 교수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내 논문을 계기로 탈민족주의 진영의 학자들과 일대 논쟁을 벌이고 싶다”고 밝혔다. 앤더슨 교수는 <상상의 공동체>에서 ‘민족’이란 개념이 유럽의 식민지였던 아메리카 대륙에서 백인 이주민의 후손(크리올료)들이 유럽 본토인과 다른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면서 발명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 후 민족 개념이 유럽과 제3세계로 퍼져 나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신 교수는 민족은 공동의 언어·혈연·문화공동체라는 객관적 요소에 민족의식이라는 주관적 요소가 더해져 공고해진 실체라고 반박했다. 객관적 요소들로만 형성된 민족을 ‘즉자(卽自)적 민족’이라고 한다면 주관적 요소인 민족의식이 더해진 민족을 ‘대자(對自)적 민족’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것. 그런데 ‘상상의 공동체론’은 주관적 요소인 민족의식에만 주목한 나머지 ‘즉자적 민족’을 부인하고 있다는 게 신 교수의 지적이다. 신 교수는 “앤더슨 교수가 ‘상상’이란 표현을 통해 민족을 허위의식, 허구,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몰고 갔다”며 “‘상상의 공동체론’을 약소민족의 해방 투쟁에 적용하면 실재하지도 않은 ‘상상물’을 해방시키기 위해 투쟁한 우스꽝스러운 것이 된다”고 지적했다.  

-신 교수는 이어 “‘상상의 공동체론’은 오늘날 제3세계의 민족해방, 민족통일, 민족국가 건설과 발전을 비판하고 부정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이론적 도구를 제공할 수 있으나 사실에서 이론을 정립하는 경험적 사회과학으로서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맹비판했다. 신 교수는 민족을 ‘에스닉 그룹(ethnic group)’의 일환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비판했다. 에스닉 그룹은 다민족국가인 미국에 적용될 수 있는 ‘문화와 관습의 하위공동체’로서, 민족 형성 이후에 다른 지역에 이민한 탓에 민족의 특성이 많이 해체 소멸돼 가는 정태적 공동체라는 것. 반면 민족은 한 사회의 다수집단의 언어·지역·혈연·문화의 공동체로서 형성돼 발전되어 가는 동태적 문화공동체라는 게 신 교수의 설명이다.  

-신 교수는 민족주의를 크게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와 ‘민족 해방적 민족주의’로 구별해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국주의적 민족주의는 과거 서구 제국과 일본처럼 다른 약소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빼앗고 억압하는 민족주의이고, 민족 해방적 민족주의는 피압박 민족들이 제국주의의 침략에 저항해 민족의 자유와 해방,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민족주의를 말한다. 그는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논리를 그대로 적용해 민족 해방적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사회과학 방법론의 기초인 유형화를 소홀히 한 잘못된 비판”이라고 주장했다.  

-신 교수는 “제국주의 침략 아래 신음하는 자기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행동이 민족주의 문필가들의 선동에 속아 존재하지도 않는 ‘상상물’에 생명을 바친 어리석은 행동이란 말인가”라고 반문하며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가 아니라 ‘실재(實在)의 공동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하는 기자의 보충기사로 탈민족주의론자들의 견해를 정리하고 있다.  

■ 脫민족주의자 주장은 한국의 민족주의는 일제강점기의 가혹한 시련을 견뎌내며 광복과 건국, 근대화와 통일이라는 거대담론을 이끌어 온 견인차였다. 최근에는 세계화의 거센 물결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으로서 민족주의를 외치는 현상이 강화되면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더욱 번성하고 있다. 탈민족주의자들은 이러한 민족주의를 “현대의 신화”라고 지적하며 성역화된 민족주의의 이면에 감춰진 권력지향성, 배타성, 집단성, 가부장성 등을 폭로한다.

 

 

 

 

국내의 탈민족주의 담론을 주도하는 학자로는 임지현(林志弦·역사학) 한양대 교수가 첫손에 꼽힌다. 임 교수는 1999년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라는 도발적 저서를 통해 이념으로 기능해 온 민족주의를 정면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식민시대 민족이 국가의 공백을 채워 주는 절대적 신화였다면 광복 이후에는 남북 양쪽에서 모두 권력 유지를 위한 대중 동원 수단으로 쓰였다고 주장하며 민족주의와의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영훈(李榮薰·경제사) 서울대 교수도 탈민족주의를 주장하는 대표적 학자다. 이 교수는 ‘민족’이라는 말이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서 수입된 것이고 백두산을 ‘민족의 영산’으로 신격화한 것도 근대의 산물일 뿐이라며 ‘민족주의는 반(反)지성적 신화’라고 맹공을 퍼붓는다.  

박지향(朴枝香·서양사) 서울대 교수도 빼놓을 수 없는 논자. 탈민족 담론의 고전으로 꼽히는 영국의 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을 번역한 박 교수는 민족주의를 절대적 가치로 내면화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라고 비판한다.  

철학가 탁석산(卓石山) 씨도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라는 저서에서 한국에서 ‘민족’은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처럼 국가 건설이 불가능했던 시기 국가의 대체물로 만들어진 상상의 공동체였던 만큼 국가 수립 이후에는 ‘시민’으로 대체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진은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의 시위 모습이다. 끝으로 마지막 자료는 교수신문에 기고된 김봉률 교수의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비판"(05. 12. 21). 강조는 나의 것이다.

-이안 와트가 18세기 중엽에 '소설의 발생'을 강조하는 것은 18세기 중엽에 소설이 발생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1958년에 <소설의 발생>(열린책들, 1988)이 출간될 때 소설 발생이 제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차 대전 후 미국은 영국을 능가하는 자본주의 진영의 종주국으로 짧은 역사와 전통의 부재라는 특유의 미국적 콤플렉스를 해소하고자 했는데 소설과 관련해서 이루어지는 장르정치학 역시 그 작업의 일환이다. 더 나아가 콤플렉스 해소에 멈추지 않고 근대 민족주의가 미국에서 기원했다는 주장과 함께 소설 역시 미국에서 발생했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근대성의 기원을 전유하려는 전도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과정이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와 낸시 암스트롱과 레오나드 텐넨하우스의 <상상의 청교도>(The Imaginary Puritan)에서의 민족주의와 소설의 미국적 전유에서 잘 나타난다.

-근대 영국 자본주의에서 소설이 발생했다는 와트의 명제가 일단 미국에서 제도화되면 두 가지 현상이 생긴다. 첫째는 소설 기원의 문제가 일반 소설의 기원인가 아닌가에 대한 의문과 서구 근대 소설의 기원이 과연 근대 영국에서 일어났는가 아닌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는 은폐, 배제되고 당연히 소설은 근대 영국에서 발생한 것으로 전제된다. 둘째는 영국과 미국의 관계가 전도된다. 영국에서 기원이 되는 소설이 리얼리즘이고 미국에서 기원이 되는 소설이 로망스라는 전도된 관계는 언제든지 영국 기원설을 미국이 전유하게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암스트롱과 텐넨하우스가 1992년 '상상의 청교도'에서 주장한 ‘소설의 미국 기원설’은 미국적 예외주의를 논리로 내세운다. 소설의 근대영국 기원설이 유럽문학의 전통에서 하나의 예외라는 영국적 예외주의에서 출발했다면 미국적 예외주의 역시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문제의식은 “영국문화가 식민지적 환경 속에서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준 반면 식민지의 글쓰기가 대서양을 가로질러 영국으로 되흘러 갔을 때 일어났던 것을 탐색해보려고 하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들이 보기에 “소설은 무엇보다 최초로 유럽적 장르가 아니고 오히려 식민지 경험을 동시에 기록하고 기록했던 장르”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식민지에서 영어(English) 정체성의 새로운 토대를 창조했던 인쇄문화라는 것이다.

-미국 내에서도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런 주장이 있기 위해서 그 전사로서 있어야 되는 것이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이다. 앤더슨이 강조하는 것은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라는 것보다 미국이 근대 민족주의가 최초로 기원한 나라라는 것이다. 그는 개정증보판 서문에서 자신의 이러한 주장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주목받지 못한 것에 분개하면서 “현 세계의 모든 중요한 것은 유럽에서 기원하였다는 기만에 익숙한 유럽 학자들에” 반기를 들고 “민족주의가 신세계에서 발원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나의 원래 계획의 일부였다”(13-4)고 주장한다. 이처럼, 아메리카 대륙, 특히 미합중국에서 발원한 민족주의가 유럽으로 건너가 언어 민족주의를 유발시켰다는 것은 소설이 미합중국에서 발생해서, 기원의 소설로 주장되는 영국의 <파멜라>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과 같은 논리구조를 이루고 있다.

-앤더슨의 쇼비니즘은 근대 서구소설의 기원과 관련해서 중요한 언문일치와 민족의 문제에 관한 고찰에서 잘 드러난다. 앤더슨에 의하면, 16세기에 서구사회에서 이윤을 위한 지방어 서적의 대량 출판은 다양한 방언들을 소수의 표준어로 활자화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그 결과 동일한 지방 활자어 서적을 읽는 독자들은 다른 지방 활자어를 읽는 사람들과 구별되는 유대를 상상하고 의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언문일치가 종교개혁, 자본주의, 절대주의 시대의 지방행정어 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하더라도 수많은 방언들이 난립해 있었고 이를 차츰 해소하여 민족의 경계를 정할 정도의 독점적 언어의 지위를 차지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활자어로 보고 있다. 이 활자어들은 신문과 소설을 통해 나타난다. 그는 “사회적 유기체가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을 통해 달력의 시간에 맞추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를 따라 앞으로(혹은 뒤로) 꾸준히 움직이는 견실한 공동체로 민족을 생각하는 것과 정확히 비유가 된다”고 하면서 민족의 기원과 소설의 기원을 동일시하고 있다. 앤더슨의 인쇄에 대한 강조는 민족과 소설을 함께 묶어 상상의 실재로 만드는데 있다.

-그런데 그에게 상상의 공동체는 민족만이 아니다. 중세 제국도 종교적 “상상의 공동체”이고 세계사적 조건에서 자본가도 “본질적으로 상상의 기반 위에서 결속력을 성취한 최초의 계급”이다. 자본가 계급을 결속시키는 것 역시 앤더슨에게는 활자어로 소설과 신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논리대로라면 근대적인 것 뿐 아니라 모든 것이 상상의 산물이 된다. 그런데 그가 상상의 공동체로서 민족을 형성하는데 활자어로 된 소설과 신문의 역할을 중점적으로 놓은 것은 일종의 문화적 기술주의이다. 문화의 물질성을 밝힌다는 것이 문화가 물질성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전도된 분석방법을 쓰고 있다.

-앤더슨에 따르면, 초기 서적시장은 라틴어를 아는 소수 엘리트를 겨냥하였으나 인쇄술이 발달하여 16세기 초에 이미 ‘기계제 재생산’의 시대에 들어서서 인쇄자본가들은 대량출판에 눈을 돌렸다. 이미 16세기에 인쇄가 상상의 공동체를 매개할 수 있는 수준에 와 있는데 왜 하필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인쇄만이 최초로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케 하여 민족됨(nationness)을 먼저 자각하게 했을까? 앤더슨은 인쇄된 자국어물들은 단지 “절대주의 전제정”을 중앙화의 도구로 제공했을 뿐이고 어떤 “원형적 민족적 충동”도 없었으며 “백성들에게 언어를 체계적으로 부과한다는 생각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절대주의 체제에 대한 필자와의 인식의 차이를 드러내지만, 무엇보다도 민족됨이 공화국의 문제임을 주장하기 위한 예비과정이다.

-그는 언어와 종교의 공통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전쟁을 했던 크리올과 본토인의 차별의 문제로 전환한다. 앤더슨은 근대 민족국가의 구체적 형성이 결코 특정 활자어가 결정적으로 도래한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의식적으로 스스로를 민족이나 공화국이라 정의한 1776년에서 1838년 사이에” 나타난 새로운 정치실체인 미국에서 최초의 민족됨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민족됨”의 주장은 민족과 국가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닌 nation을 혼용하여 반증 회피의 수단으로 삼는다. 사실상 이들이 자각한 것은 민족됨이 아니라 국가의 형성 필요성이었으며, 또한 북미 독립운동을 한 13개 식민주의의 많은 지도자들은 노예를 소유한 부자 농업가들로 사실상 인디언이나 흑인 노예 그리고 프랑스나 스페인계의 일반인들과는 다른, 거의 봉건시대 영주들과 비슷한 지위를 지닌 자들로 근대적 민족의 범주와는 다르다.

-그는 인도를 동인도회사령으로 삼은 것을 예로 들면서 17세기 이후의 해외영토 정복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는 민족주의 이전 시대의 것”으로 정리한다. 그런데 해외 식민지 정복은 선박의 건조나 군대, 엄청난 경비 등으로 인해 국가적 지원체계가 꾸려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고 따라서 절대주의 체제나 그 이후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민족주의의 시원을 식민지 본국으로부터 차별을 당하는 크리올의 반항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또한 그것을 모방하여 유럽이 민족주의체제로 나아갔다는 전제 아래 입헌군주제나 절대주의 체제에서의 민족국가의 문제를 배제하였다.

-암스트롱과 텐넨하우스가 제기하는 문제는 '파멜라' 이전에 글쓰기 능력만을 지닌 평범한 여성의 육체를 중요시하는 소설들이 영국 내에서 없다고 할 때 이런 󰡔파멜라󰡕의 전통은 어디서 왔는가하는 것이다. 그들은 귀족에 대한 담론과 보통 사람에 대한 담론이 소설에서 분기하는 지점은 영국적 미국인인 메리 롤란드슨(Mary Rowlandson)이 쓴 <되찾은 포로>(The Redeemed Captive)(영국판 1682)에 있다고 보고 영국 산문의 원천이 되는 것은 17세기 말과 18세기 동안 북 아메리카 식민지들에서 씌어진 포로 서사라고 한다. 이들에 따르면, 17세기 인디언 포로서사에서 장르가 증식되고 분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롤란드슨은 납치된 몸으로 신세계에서 영국을 대표한다. 그는 인디언 즉 비영국적 문화 가운데서 문자해독의 힘을 보여준 영국여성으로서 영국적 미국의 경험이 되는 원천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영국적인 것을 생각해야 되기 때문에 이들 포로서사가 독자들에게 영국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바꾸길 요구하는 데 그것은 문자해독능력 곧 영어를 읽고 쓰는 능력의 문제이다. 특히 프랑스 혁명기 동안 프랑스 인들은 영국인 등장인물에 위협이 되었지만 후기의 포로서사에서 영국인 개인을 유럽 태생의 남녀와 구별해주는 것은 영어에 대한 문자해독능력이었다. 이렇게 해서 “영어”는 영국적인 것의 핵심이 되고 식민지에서 근대 국가의 탄생 문제와 결합한다.

-식민지 모국인 영국에서 독립할 때 민족의 문제에서는 언어를 배제했지만 독립한 이후 민족의 문제에서는 영어 활자어가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했다는 앤더슨과, 인쇄된 영어로 씌어진 포로서사가 최초의 소설이라는 암스트롱과 텐넨하우스는 소설과 신문을 통해 인쇄된 영어를 내세움으로써 유럽대륙과 아시아를 배제하고 급기야 영국을 배제하고 자신들이 민족주의와 소설의 기원을 전유하는 장르정치학의 놀라운 귀결을 보여준다.

김봉률 교수의 글은 '쇼비니스트' 앤더슨에 대한 흥미로운 비판을 담고 있는데, 이에 대한 판단은 <상상의 공동체>을 읽어본 후에 내리도록 하겠다(원서를 오늘 입수했다). 한데, '민족'이 비록 '상상의 공동체'라 하더라도 실감나는 공동체인 것만은 분명하다...

06. 3. 15 - 16.

P.S. 베네딕트 앤더슨 이전에 민족주의 연구에 있어서 최고 권위자는 한스 콘(1891-1971)이었다. 국내에는 그의 <민족주의>(삼성문화재단, 1974), <민족주의시대>(박영사, 1975), <근대 러시아, 그 갈등의 역사>(심설당, 1981), <19세기 유럽 민족주의>(탐구당, 1990) 등의 번역/소개돼 있고, 내가 학부시절에 읽은 것도 그런책들이었다. 앤더슨이 내세우는 것은  이러한 민족주의 연구 접근법에 있어서 자신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평가는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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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잘코군 2006-03-15 11:02   좋아요 0 | URL
아 이거 제가 관심있게 보는 주제입니다. 요번에 <상상의 공동체> 구입했는데.

로쟈 2006-03-15 11:04   좋아요 0 | URL
예, 저도 필요 때문에 관련서들을 읽고 있습니다(읽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비로그인 2006-03-15 12:11   좋아요 0 | URL
저두 민족주의에 지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계속 자료가 올라오면 좋겠네요.

기인 2006-03-16 17:41   좋아요 0 | URL
항상 로쟈 선생님 글 잘 보고 있습니다. 신용하 선생님의 비판도 잘 보았습니다. 그런데 앤더슨이 말하는 '상상'이라는 개념이 애매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신용하 선생님도 '객관적 요소'와 '주관적 요소'를 드셨지만, 혈연, 문화, 언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애매하다고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디까지는 '다른' 혈연, 문화, 언어로 볼 것이냐는 것이 '민족' 혹은 '국민국가'로 정해지는 면도 분명 존재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ㅎㅎ 읽기만 하다가 주절주절 써 봅니다.
로쟈 선생님 글들 공부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로쟈 2006-03-16 18:42   좋아요 0 | URL
'로쟈 선생님'이라고 하시니까 멋쩍네요. 그냥 '로쟈님'으로 해주십시오(저에게 수업료 내시는 것도 아니니까^^). 제가 알기에 '상상된 공동체'라고 할 때, 앤더슨이 염두에 두는 것은 (신문과 함께) 근대소설입니다(이에 대한 자료들을 그는 자세히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소설(허구)들에 의해서 매개된 민족의식이나 공동체의식을 '객관적'인 것으로 봐야할지, '주관적'인 것으로 봐야할지는 저도 읽어보면서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요 며칠은 '야구공동체'라고 해야겠네요). 그리고, 말씀대로 '혈연, 문화, 언어' 모두 모호한 기준들이죠. 그것들이 우리를 '확실한' 민족-공동체로 만들어준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