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판 경향신문에서 옮겨온 연재이다. 문광훈 교수의 '천천히 사유하기'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인데, 문학/예술의 종언론이 횡행하는 시대에 아직도 문학/예술에 뭔가를 기대한다면 그건 '세계시민적 공동체'(혹은 '세계공화국')에 대한 기여 지분과 관련해서가 아닐까 싶다. 너무 점잖은 글이긴 하나 카스파 프리드리히의 그림도 구경할 겸 스크랩해놓는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얼음바다’(1823년경)는 얼음덩이 아래 가라앉은 배의 잔해를 보여준다. 칼날처럼 치솟은 얼음조각이 보여주듯, 인간의 노력은 자연의 위력 앞에 쉽게 좌초되고 만다. 그러나 가없는 수평선은 지금의 좌절이 한 때의 일일수도 있음을, 그리하여 더 나은 세계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국가적 단위 속에서 이 국가를 넘어 서로 교류하는 이상적 상태-세계시민적 공동체는 이 ‘더 나은 세계’의 한 예가 될지도 모른다.

경향신문(07. 06. 30) [천천히 사유하기]예술과 세계시민적 공동체

거창한 제목은 날 불편하게 한다. 그래서 망설이게 된다. 그러나 길을 가면서도 때로는 주위를 살펴야 하듯, 한 주제도 그 맥락을 고려할 때 온전해진다. 이 지면을 통해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다루건 그 밑에는 늘 심미적 경험의 가능성이 자리했지만, 예술의 좌표를 제대로 짚으려면 그 환경-내외적 현실조건을 살펴야 한다.

2007년 6월의 한국은 몹시 불안정해 보인다. 흔히 말하듯 그것은 지난 40여년에 걸친 압축성장의 결과겠지만, 그래서 그동안 억눌려온 많은 것들이 하나씩 곪아터져 나오는 까닭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더 길게 보면 우리 사회가 정상화되어 가는 징표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단계에서 간과되거나 희생되는 면을 어떻게 최소화하느냐일 것이다. 그러나 당장 치러야 할 소모와 낭비는 너무 커 보인다. 여전히 불안정한 부동산 가격이나 대선을 앞둔 정파들의 이전투구, 아이들의 지옥같은 학교생활, 가계부채의 증가는 그 몇가지 예일 뿐. 사람들의 눈빛은 우리가 전투하듯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고, 그 어깨는 누군가가 만든 대열 속에 이 다음의 전선으로 끌려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런 불안정은 나라 밖에도 있다.

전쟁과 테러, 미국의 일방주의, 국제기관의 무능, 불공정한 노동조건, 종교분쟁과 문화갈등, 그리고 환경오염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당면 문제는 어느 것 하나 간단치 않아 보인다. 다국적 자본은 후진국의 값싼 노동력으로 이윤을 늘리지만, 일하는 사람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정당한 몫을 나눠갖지 못한다. 이 불안은 물가상승과 구조조정으로 더 가중되고 있다. 모두가 불안하다면 중간층이라도 튼튼해야 하는데, 이들 역시 허약하다. 이런 상태에서 많은 잠재된 문제는 ‘불균등하게 작용할’ 공산이 크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U. Beck)은 새로운 유토피아-신자유적이거나 복고적이지 않은 ‘세계시민적인 좌파’가 필요하다고 최근에 말했다. 그에 의하면, 이전에는 권력의 획득이 유토피아의 포기로써 가능했다면, 이젠 유토피아의 포기란 곧 권력포기가 된다. 따라서 이 이상을 실행할 새로운 사회민주주의적 시대가 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독일 사민당 당수의 ‘사회적 세계화’를 언급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느 한편의 과제일 수는 없다. 그것이 진보정당이나 시민단체에서 더 본격적으로 논의되겠지만, 보수당이나 일반대중에게도 열려 있다면 더 나을 것이다.

물론 이런 개방성조차 변질될 수 있다. ‘구조조정’이나 ‘노동유연화’에서 드러나듯, 오늘날의 많은 언어는 원래의 함의를 잃어버렸다. 구조조정이란 이름 아래 이 땅의 비정규직은 노동인구의 절반을 넘어섰고, 힘겹게 쟁취한 노동권은 ‘개혁’의 기치 아래 다시 박탈되고 있다. ‘유연화’가 노동권과 인권을 얼마나 경색시키는 것인지 우리는 잘 안다. 위험사회적 조건은, 벡이 지적하듯 오늘날엔 국내외를 막론하고 더욱 철저히 실현되고 있다. 많은 사상적 종교적 문화적 가치들은, 정부의 것이건 민간단체나 세계기관의 것이건 설득력을 상실하고 있다. 편재화된 ‘정당성 결손(Legitimationsdefizit)’이라고나 할까.

어떻게 시작하여야 하는가? 예술의 방법은 무엇일까? 시를 읽고 그림을 보며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무엇보다 ‘느낀다’. 이전에는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 글로 쓰여 있음을 확인하게 되고, 지금껏 눈여겨보지 못한 것이 화면 위에 그려져 있음을 보게 되고, 무덤덤했던 가슴이 어떤 선율로 울렁댐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듯 어떤 건축물에서는 사람 사는 공간이 이렇게 구획되고 구성될 수도 있음을 새삼 겪는다. 예술은 그 나름으로 심정을 어루만지며 감각에 호소한다. 그것은 정서적 인습을 뒤흔들어 세계를 더 본래의 모습으로 느끼게 한다. 이런 감각적 진동은 사고의 변화로 이어진다. 심미적 경험은 삶의 넓이와 깊이를 다시 느끼게 한다.



예술경험에서 중심은 주체-자아-개인이고, 이 개인의 변화 가능성이다. 그것은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조용하고 미묘한 움직임이다. 예술에는 자연의 원형상(Urbild)-본래적 형식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형식은 지금의 많은 것이 화석으로 남을 거라고 말한다. 반대로 버림받는 어떤 것은 언젠가 존중될 것임을 알려준다. 생성의 맥락을 잇는 가운데 그것은 이미 비판적 이미지를 담는다. 예술과 만나면서 자아는 “섬세하게 조율된 영혼”(쉴러)으로 주형될 계기를 얻는 것이다. 이 계기는 외부로부터 부과되는 것도 아니고, 강제로 해야 될 것도 아니다. 그것은 ‘내가 느끼는 한’ 하는, 느끼지 않으면 안 해도 되는 무엇이다. 심미적 각성은 철저히 개인의 의사에 맡겨진다. 이 점에서 도덕이나 윤리 또는 법률의 구속과는 다르다. 예술에서 나는 나 밖에 선다.

예나 지금이나 물질적 토대는 더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지식과 정보가 그렇듯이, 증가된 재화가 조화된 세계를 보장하지는 못할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시대에서도 왜곡과 폭력은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현실에의 항소가 멈출 수는 없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감각의 신선함이고, 이 신선함으로 유지되는 깨어있는 의식이다. 예술은 바로 이 신선함을 불러일으킨다. 예술에는 상투성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기 때문이다. 상투성이 타성의 반복이라면 예술은 타성의 경계를 넘어 경험의 배후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나 다시 물러나자. 예술의 새로움도 오늘날에는 대개 오염되어 있다. 시장과 자본의 개입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과 다르게 느낀다면 우리의 자유는 좀더 넓어지고, 새로 생각하는 만큼 더 깊어질 수도 있다. 이 에너지로 우리는 생활세계 안에서 조금 다르게-편견을 줄이고 거짓을 삼가며 서로를 더 배려할 수 있게 될까? 미시적 실천 속에서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예술은 자유와 자율, 그리고 관용을 연습하게 한다. 생기를 잃지 않은 영혼만이 부당함에도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 나와 세계 사이에 조율된 심성이 있다면, 예술을 통한 이 길은 이렇듯 에둘러 있다.(문광훈|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독문학)

07.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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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자적하게 '파도타기와 공잡기'란 페이퍼를 쓰고 있다가 문득 오늘이 마감인 보고서 파일을 저장해오지 않은 걸 알게 됐다. 부랴부랴 학교에 나올 수밖에(이런 게 '파도타기'다!). 오는 길에 경향신문에서 '작가와 문학사이' 마지막회를 읽었다. 덩달아 6개월 또한 이 연재를 '문학의 뒷계단'에 옮겨놓았으니 나로서도 감회가 없지 않다. 안면이 없지 않은 두 문학평론가의 얼굴을 지면에서 보니 반갑기도 하고, 매주 하던 일 한 가지가 줄어서 기쁘기도 하다. 기꺼이 마저 옮겨놓도록 한다.  

심진경(왼쪽)·신형철씨가 신세대 문학에 대해 대담하고 있다. 80년대, 90년대 학번인 두 사람은 작가적 자의식, 젊은 독자들의 수용태도 등에 대해 일부 이견을 보였으나 계몽과 교양의 손을 떠난 문학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경향신문(07. 06. 30) [작가와 문학 사이]시리즈 결산… 새로운 한국문학을 논하다

지난 1월6일부터 매주 연재됐던 ‘작가와 문학 사이’가 막을 내린다. 김연수부터 한유주까지 13명의 소설가, 문태준부터 김경주까지 10명의 시인을 다룬 이 시리즈는 현재 우리 문학계의 주역으로 떠오른 1970년대 생 이후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심층 조명해 호평을 받았다. 필자로 참여한 문학평론가 심진경씨(소설)와 신형철씨(시)의 대담을 통해 새로운 한국문학을 진단했다.

▲ 수록작가

시인: 문태준 황병승 진은영 김선우 강정 손택수 김민정 이장욱 이병률 김경주
소설가: 김연수 박민규 강영숙 윤성희 김중혁 이기호 천운영 정이현 편혜영 박형서 김애란 백가흠 한유주

# 자신만의 방언같은 소문자 문학

신형철:전통적인 스타일의 시인과 새롭고 전위적인 시인을 교대로 다뤘다. 이장욱 황병승 김민정 김경주 등 젊은 시인들의 특징은 서정시라고 하는 것에 대한 자의식이다. 시적인 것이라는 큰 범주가 있다면 서정적인 것은 하위 범주이면서 가장 유력한 범주다. 그러나 그것 사이에는 틈이 있다. 90년대에 워낙 서정시가 주류였기 때문에 2000년대 시인들은 대개 그에 대한 반작용을 보인다. 문태준이나 손택수 같은 시인도 서정시를 쓰지만 서정적인 것의 상투성, 그 메커니즘의 위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한다.

심진경:김연수와 한유주는 10살 차이가 나고 문학의 색깔도 많이 다르다. 그러나 이들을 아우르는 특징이라면 문학은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방언 같은 문학, 소문자 문학, 개별 문학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김연수는 역사를 다루지만 그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질문을 던지고 끊임없이 회의한다. 이기호도 기존 소설 관습을 뒤집고 비트는 시도를 한다. 박민규나 편혜영을 보면 기존의 인간이란 종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새로운 인종의 출현을 기대한다. 개별 지도를 만들어가는 영세업자들이 오늘의 작가다.

# 포스트모더니즘의 육화(肉化)

신형철:2000년대 문학의 변화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육화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90년대 초반의 전위적 시는 대중문화를 끌어들이건, 패러디를 하건 정치적·계몽적 요소가 있고 문학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보수적인 사람들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계몽적 자의식이 없다. 시에 대해 숭고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시인이 드물고 여러 예술 장르의 하나로 받아들인다. 90년대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머리로 받아들인 근대적 인간들의 시대였다면 지금 작가들에게는 포스트모던 문화가 그대로 들어와 있다. 장르 문학과 본격 문학의 경계 흐리기, 무국적, 젠더적 혼란, 인류와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기 등이 자연스럽다.

심진경:김중혁의 작가의 말(펭귄뉴스)을 보면 자기는 무수한 사람과 사물이 혼합된 레고블록이며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한 조각의 레고블록이 되고 싶다고 한다. 이런 식의 자기 이미지가 이전과 달라진 점이다. 작가가 이 정도는 알고 이 정도 음악은 듣고 이 정도 예술 영화는 봐야 한다는 자기검열, 교양인의 상은 사라졌다. 무작위로 보고 듣고 경험하면서 만들어지는 존재이다. 90년대 백민석이 비트음악과 록음악을 말할 때에는 고급문학과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의 표지로 소비했으나 지금의 박민규는 저항하기 위해 끌어온다든가 하는 자의식이 없다. 자기가 즐기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농민이 농업사회의 주체이고 노동자가 산업사회의 주체라면 후기 산업사회의 주체는 기계다. 자기를 단일한 주체로 호명하는 게 아니라 수많은 아바타로 분열, 해체시키고 다시 합칠 수 있는 기계로 보는 상상력이 자연스러워졌다.

# 교양속물 vs 자기전시

신형철:소설은 이래야 한다, 시는 저래야 한다는 숭고한 이미지에서 벗어난 문학은 쓰는 사람으로 하여금 훨씬 스타일에 대한 압박을 덜 느끼고 자유롭게 한다. 수용자 층의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워서 젊은 세대의 독자는 말 많은 젊은 시인들을 편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의 작품이 이질적이라는 건 윗세대의 담론 아닐까.

심진경:황병승의 시와 한유주의 소설은 책의 형태가 아니라 인터넷을 떠돌고 각자의 블로그에 퍼가는 형태로 소비된다. 대신 이 세대는 칙릿이나 일본소설을 산다. 자신을 현학적으로 포장하고 과시하기 위해 문학을 소비하는 경우가 많다. 대중적인 시, 연애시가 아니라 황병승의 시를 알고 있다는 식의 자기자랑, 내지는 개성의 표현방식으로 사용된다.

신형철:소비하는 방식이 바뀐 건 맞는데 외적인 방식이 바뀌었을지언정 자기세대의 문학을 통해 자기를 발견하고 수용한다는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황병승의 시를 읽는다면 단순히 좋아하기 때문이지, 이전 세대처럼 이만큼은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그러는 건 아니다.

심진경:이들은 물론 황석영 책 정도는 읽어줘야 한국 현실을 안다는 이전의 교양 속물들과는 다르다. 그러나 나름의 리스트가 있는데 이는 자기 전시적인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필독서 목록이 버지니아 울프에서 폴 오스터로 바뀌었으며 고급음악에 대한 느낌도 바흐나 모차르트에서 ‘라디오헤드’의 록음악으로 변했다. 개별적인 문화소비로 보이지만 그들만의 장(場)이 있다는 뜻이다.

# 후광 사라진 시대의 작가의식

신형철:문학적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작가 역시 그 위계질서의 위를 차지하려는 입신양명적인 욕망을 버렸다. 문학이 다른 예술 장르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거나 소설가가 기타리스트 나부랭이와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시대가 더 이상 아니다. 이기호가 말한대로 소설가는 소설을 써서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이다. 작가의 후광이 사라졌기 때문에 ‘너는 구두를 닦냐, 나는 소설을 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나 역시 옛날처럼 비평가가 권위있는 이름의 시대라면 말 못했을 것 같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 비평가라고 말한다.

심진경:이전 선배들이 보여주는 리더의식, 작가가 보통 사람과 다른 지성인이라는 생각은 없다. 그러나 지금의 문학적 환경이 예전보다 비천해지면서 일종의 자기보호 본능이 작동한다고 본다. 예컨대 윤성희나 김애란이 비천한 삶을 그리는 것, 김중혁이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박민규가 전직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하는 것 등에는 소설가라는 이름에 따른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보이는 제스처가 있지 않을까.

신형철:그런 자의식이 너무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라고 생각한다.

심진경:김중혁의 말처럼 누군가의 레고블록이라도 되고 싶다면 그게 작가적 자의식일 것이다. 그런 자의식 없이는 문학이 성립하지 않는다. 단 80년대에 비대해진 문학의 권력화, 제도화와 상관없는 게 오늘의 작가들이라면 오히려 60~70년대와 맥이 닿을 것이다.

# 신세대 문학, 예술 아니면 유령

신형철:근대문학이 했던 역할이나 위상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시인, 소설가들이 거꾸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 문학은 점점 주변화, 소수화, 취미화의 길을 갈 것이다. 이 현상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이야기하면 너무 갑갑하다. 오히려 너무 많은 걸 해야 했기에 왜곡되고 비대해졌던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문학만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자의식이 치열해졌으면 좋겠다. 그런 면에서 소설은 아직 모르겠다는 느낌이 많고 시에 대해 호의적이다. 지금 독자에게는 한국문학에 대한 막연한 선입견이 있다. 90년대 시와 소설이 남긴 부정적 효과 중 하나인데 서정시 일변도나 여성문학의 영향으로 인한 내면과 성찰의 이미지다. 특이한 시와 소설이 동시대 독자들에게 재미있네, 다르네, 우리 이야기를 하네, 그런 느낌을 준다면 함께 갈 수 있지 않을까. 기성 독자와 평론가들이 선입견을 자꾸 고착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심진경:문학의 전문화, 세분화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면 일반인들이 더 접근하기 어려운 클래식, 하이모더니즘이 될 것이다. 전문적인 독해능력, 지루함과 낯섦을 견딜 수 있는 고급 취향의 영역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처럼 현실이 있고 문학이 그걸 재현한다는 사고 대신,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사라짐으로써 현실에 대한 사유가 훨씬 탄력적으로 변한 건 신세대 문학의 장점이다. 단 상상할 수 없었던 여러가지를 미디어를 통해 경험하면서 모방의 모방이 거듭되고 사유없는 사유, 경험없는 경험이 떠다니는 것을 경계한다면. 자칫 유령이 될 수도 있다.

# 다루지 못한 작가들

신형철:시인 김행숙을 언급하고 싶다. 서정적인 것에 대한 자의식, 긴장이란 면에서 2000년대 시인의 등장 이전에 독보적인 자기 목소리를 냈고 직관이 아니라 프로그램으로 쓰는 시인이다. 소설가 전성태는 타자를 재현할 수 있는가라는 논란의 중심에 선 작가다. 빠트려서 죄송하다는 멘트가 들어가야 할 듯하다.

심진경:동의한다. 김숨도 다뤘으면 좋았을 것이다. 장편 ‘백치들’, 단편집 ‘침대’를 냈는데 같은 이야기를 아주 낯설게 하는 장점을 갖고 있다. 중동에서 일하다 돌아온 아버지를 방 안에 모래바람을 몰고 온 백치로 묘사한다든지, 현실적 이야기를 믿을 수 없게 한다. 권여선은 나이로 보면 젊은 작가가 아니지만 굉장히 특이한 인간형을 제시한다. 홍상수(영화감독)식의 자기비하가 우월감의 다른 표현이라면 권여선은 자기우월감 없이 바닥으로 추락시키는 자의식을 보여준다. 매우 공감가는 캐릭터이다.(진행·정리|한윤정기자)

07. 06. 30.

P.S. 두 평론가의 '일부 이견'에 대해서는 노랗게 색칠해놓았다. 8년 정도의 연배/세대 차이가 이견을 낳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소설(심진경)과 시(신형철)라는 장르적 관심(이해관계)의 차이가 작용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나는 두 장르가 공동운명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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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장마철이지만 서재의 스크린을 여름 휴가 모드로 미리 바꾸고(휴가를 갈 일이 없을 듯해서 기분만 내본다) 서핑하는 사진도 갖다 붙여놓는다. 보기에 제법 시원하군... 

6월 한달을 거의 파도타기로 보낸 듯하다. 서핑 수준의 그런 폼나는 파도타기가 아니라 바닥에 발들 딛고 있다가 파도가 밀려오면 살짝 발을 떼어 균형을 잡는 '파도타기' 말이다. 재미를 제외한다면 그런 파도타기의 목적은 순전히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자리를 보전하는 것이다(소위 물먹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해수욕장에 나가 그런 파도타기를 해본 건 10년도 더 전의 일 같지만 여하튼 그 '실감'을 오랜만에 느끼던 와중에 한달이 훌쩍 다 지나가고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밀린 잠을 보충하고 일어나니 밀린 책들이 수십 권이다. 이런 경우에 순서를 따지는 건 무의미해서 하버마스의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을 몇 페이지 읽다가 벨르이의 소설 <페테르부르크>를 몇 페이지 들춰보고(읽어야 하는 러시아어본이 얼른 눈에 띄지 않는다) 다시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문학동네, 2000)에도 손길이 갔다. 아직 국역본이 완간되지 않은 '이 빠진' 번역서와 함께 영역본을 빼놓고(내겐 러시아어본도 있다) 새롭게 시작하는 뜻으로 오늘은 서론을 읽어두기로 했다. 예전에 얼마간 읽었지만 따로 정리는 해두지 않았다는 게 이유이다(그땐 구 영역본을 참조했는데, 지난 2004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파도타기 말고 진짜 공부를 위한 자세도 가다듬을 겸. 

  

책에서 먼저 읽게 되는 건 가다머가 제사로 쓴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의 시구이다. 제목이 따로 붙어 있지 않은 한 후기시의 전반부라는데, 우리말 번역은 이렇다.

그대가 스스로 던진 공을 받아 잡는 동안은
모든 것이 그대의 솜씨요, 그대 노력의 대가이지만;
영원한 공연자(共演者)가 그대에게
그대의 중심으로 정확하고 민활한 스윙 동작으로
신이 만든 거대한 다리의
저 곡선들 중의 한 곡선을 따라 던진 공을
그대가 불시에 잡게 되는 경우
그때 공을 잡을 수 있음은 그대가 아닌
세상의 능력이라오.

영역본과 러시아어본에는 이 시에 대한 해설이 따로 붙어 있지 않지만 국역본에는 간략한 해제가 달려 있다. 그에 따르면 이 시는 "만년의 스위스 시절에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돌보아준 나니 분덜리-폴카르트 부인에게 헌정된 시이며, 전집 제2권에 실려 있다." 이어지는 해설. 

"'중심'이란 말이 이 시의 요체이다. '중심'은 개인적인 중심과 영원성 혹은 신의 '중심'으로 구별되고 있다. 여기서 '중심'은 공간적인 중심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힘으로서 타자로부터 다가오는 중심을 말한다. '영원한 공연자'가 '그대의 중심'을 향해 공을 던질 때, 다시 말해 우리가 협소한 중심에서 벗어나 일반적인 중심을 상대할 때, 비로소 '공을 잡을 수 있음'은 그대만의 것이 아닌 '세상의 능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다머는 이 시에서 공을 잡는 행위를 해석 행위로 풀이하고 있는 듯하다."

중심의 형이상학이 이 시의 요체인가는 좀더 생각해볼 문제이지만 눈대중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은 이 시에서 두 가지 공잡기가 대비되고 있다는 것. 그 하나는 자기 스스로가 던진 공을 받는 것이다. 즉 자가-포구(self-catching)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그러니까 부메랑처럼 자기가 던지고 자기가 받는 것인데, 그건 (당연한 말이지만) 순전히 "그대의 솜씨요, 그대 노력의 대가"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자가-포구는 혼자서 하는 파도타기에 가깝겠다.

다른 하나는 좀 다른 종류의 공잡기이다. 그건 공을 던진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영원한 공연자'이기 때문이다. 영역본에서는 '영원한 공연자'를 'eternal partner'라고 옮겼다(러시아어본에서는 이를 여성명사로 받았다). '영원한 파트너'라고 해도 무방할 텐데, 문제는 이 공연자/파트너가 '그대의 중심'을 향하여 정확하고 민활한 스윙 동작으로 던진 공, 큰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공을 받는/잡는 것이다. 그럴 경우 "why catching then becomes a power -/ not yours, a world's." 즉, 그때 공을 잡는 것은 그대의 능력이 아니라 바로 세상의 능력이라는 것. 왜 아니겠는가? 

"가다머는 이 시에서 공을 잡는 행위를 해석 행위로 풀이하고 있는 듯하다"라고 해설에도 적혀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 '해석행위' 혹은 그것을 중심적으로 다루는 해석학이란 게 텍스트의 이해와 해석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는 점. 가다머가 서론에서 주장하고 있다시피 "텍스트의 이해와 해석은 학문의 관심사일 뿐만 아니라, 명백히 인간의 세계 경험 전체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 경우 '인간의 세계 경험 전체'는 '공잡기'의 문제로 집약될 수 있다. 내가 써놓은 걸 읽는 게 아니라 누군가(혹은 영원한 파트너가!) 써놓은 걸 읽고 이해하는 일이 곧 우리 '세계 경험'의 요체라고 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와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하고 구성하고 축적하는 행위로서의 공부는 공을 제대로 잘 잡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다. 제대로 된 프로텍터와 미트도 준비해서 다양한 투구폼과 구속과 구질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영원한 파트너께서 던지는 공은 사인도 없이 날아올 때가 많기에 밥 먹으면서도 잠을 자면서도 미트를 벗어서는 안될 터이다...  

서문을 읽겠다고 해놓고 잠시 딴전을 피웠다. 다시 가다머의 묵직한 공을 받기 위해 책상머리로 가야겠다(그는 영원의 나라에서도 현란하게 공을 뿌려대는군!). 이건 혼자서 파도타는 것과는, 자리만 보전하는 것과는 양상이 좀 다르다. 이 여름에도 중무장을 하고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건 내가 공을 잡게 되더라도 그건 세상의 능력 덕분이고, 밥상을 차려준 사람들의 노고 덕분이라는 것. 결코 내가 잘나서가 아니다(그런 생각을 하는 놈들은 공부가 부족한 것인바 곧장 'X카바'로 들어가야 한다). 이크, 공이 벌써 날아오고 있다!..

07.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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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아니면 사기꾼'이란 평을 듣는 덴마크의 문제적 영화감독 라스 폰 트리에 특별전이 열린다고 한다. 말은 '특별전'이지만 고작 세 편의 영화를 상영한다고 하니 괜히 나까지 머쓱하긴 하다. 더구나 신작 <오 마이 보스>를 제외하면 이미 DVD 타이틀로까지 다 나와 있는 영화들이어서 '발견'의 새로움을 기대하기도 어려울 듯싶고. 개인적으론 그의 영화 <브레이킹 더 웨이브>를 인상적으로 본 기억이 있지만 이후에 나온 영화들을 다 챙겨보진 못했다(<킹덤>이나 <어둠 속의 댄서>, <도그빌> 모두 부분적으로만 보았다). 이번에 나온 신작 <오 마이 보스>는 예기치 않게도 코미디라고 하니까 그 중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도 싶다.

Антон Долин. Ларс фон Триер. Контрольные работы. Анализ, интервью. Ларс фон Триер. Догвилль. Сценарий

개인적인 기억을 하나 더 보태자면, (모스크바 통신에도 적은 바 있지만) 나는 러시아에서 라스 폰 트리에가 갖는 거장으로서의 위상에 좀 놀란 적이 있다(몇 년전 상황이긴 하나, 라스 폰 트리에, 왕가위, 기타노 다케시, 김기덕이 러시아에서 꼽은 '우리시대의 거장'들이었다). 그걸 웅변해주었던 건 지난 2004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키노텍스트'란 영화총서의 첫 권이 라스 폰 트리에에게 바쳐졌다는 점. 작품론과 함께 감독과의 인터뷰, 그리고 <도그빌>의 시나리오 등으로 구성된 책이었다(망설이다가 구입을 미루었던가?). 우리의 '키노텍스트'들도 보다 폼나게 나옴직하지 않을까?.. 

모아놓은 기사들은 <오 마이 보스>에 대한 리뷰와 라스 폰 트리에 특별전에 대한 소개이다.

경향신문(07. 06. 29) [영화 가로지르기]‘오 마이 보스’

‘오 마이 보스’(감독 라스 폰 트리에)는 가짜 사장으로 부임한 무명배우의 이야기다. 회사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해고를 책임지고 추진할 악역이 필요했던 진짜 사장은 가짜 사장으로 하여금 그 일을 맡도록 한다.

‘오 마이 보스’에는 라스 폰 트리에의 고유한 인장이 찍혀 있다. 도그마 영화에 대한 감독의 신념이 대사에까지 등장하고, 형식미에 있어서도 관객과의 심리적 거리를 확보하는 개성적 편집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영화에 자신의 모습까지 드러내는 감독은 점프 컷(두 장면 사이를 부자연스럽게 단절시키는 편집기법)을 이용하여 관객의 정서적 이입을 적절히 견제한다. 편집의 위력을 생생한 형태로 보여주는 점프 컷에는 영화라는 매체의 독자적 정체성이 간직되어 있다.



‘오 마이 보스’는 전문성의 신화를 재치있게 조롱한다. 첨단 IT기업의 경영자로 행세하는 무명배우 크리스토퍼의 모습은 허상에 의해 미화된 기업가들을 상징한다. 그래서 ‘오 마이 보스’는 단순한 가짜사장 소동이 아니라 능력에 비해 명성과 위신이 턱없이 부풀려져 있는 기업가 모두에 대한 풍자로까지 읽힌다. 가짜 사장을 둘러싼 소동에는 지위와 능력의 상관관계에 대한 근본적 회의가 내장되어 있다. 영화는 능력이나 전문성에 대한 일반적 믿음이 일종의 신화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크리스토퍼(젠스 알비누스)는 전통적 의미의 능력 때문에 고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 라운(피터 갠츨러)의 평판관리 혹은 이미지메이킹을 위해 고용되지 않는가.

한편 ‘오 마이 보스’의 직원들은 자본의 모든 대리인들에게 본능적으로 공손하다. 그들은 회사의 냉혹한 조직문화에 거부감을 보이면서도, 실제 소유주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정체불명의 ‘사장님의 사장님’까지 등장하지만, 직원들은 그 익명의 권위마저도 충실히 추종한다. 자본가에게 부여된 지엄한 권위 앞에서, 그들은 권위의 허상을 직시하려는 일체의 노력을 포기한 채 권위가 수반하는 화려한 후광에 현혹되고 만다. 그들이 사장의 비정한 행태에 대해 묵인하거나 회피하지 않았다면 사장의 정체가 그렇게 오랫동안 은폐될 수 있었을까. 감독은 자신의 앞날을 자본가에게 위탁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일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반응을 놓치지 않는다.

'오 마이 보스’의 대사처럼, 배우에게 관객은 법이고 무대는 법정이다. 그러나 배우가 단지 현실로부터 격리되어 무대에 유폐된 존재라면, 그가 과연 관객을 감동시킬 수 있을까. 관객과의 소통이 운명인 배우가 밀폐된 자의식의 세계에 갇힌 은둔자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창하는 예술지상주의는 자칫 예술가의 나르시시즘에 불과할 수 있다. 크리스토퍼가 자신의 역할모델로 숭배하는 ‘감비니’는 실존 배우가 아니라 라스 폰 트리에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트럭의 이름이다. 가상의 인물 감비니를 원용하여 자신만의 연기론을 변호하는 크리스토퍼는, 현실에서 유리된 채 예술지상주의의 포로가 되어버린 예술가들을 상징한다.

배우의 진정한 임무란 과연 무엇일까. 가짜 사장 크리스토퍼는 자신의 배역과 대사에만 관심이 있다. 그가 직원을 해고하는 악역을 맡지 않으려는 것도 배우로서의 자존심 때문이지 해고의 부당성에 대한 확고한 자각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그는 직원들의 해고를 초래할 매각계약서에 마침내 서명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크리스토퍼는 자신이 숭배하는 배우 감비니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충동적으로 계약서에 서명한다. 해고된 직원들의 운명에는 아랑곳없이 자신만의 예술에 몰두하는 크리스토퍼의 마지막 모습은, 자폐적 순수예술이 결국 자본가와 권력자들의 이익에 복무할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준다.

볼테르는 진실보다 평화가 더 소중하다고 충고한다. 반면 셰익스피어는 연극의 목적은 자연을 거울에 고스란히 비추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어쩌면 예술가의 숙명은 평화로운 거짓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롭지 않은 진실을 증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 마이 보스’에는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서글픈 자화상이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권위에 맹종하는 직원들, 가공된 이미지로 자신을 체계적으로 미화하는 자본가, 그리고 자신만의 관념적 예술세계로 도피한 예술가까지. 사람을 진실의 거울에 비추는 것이 예술이라면, 자본주의 사회의 부속품이 되어 버린 우리들의 초상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의 몫일 것이다. 그것을 거부하고 ‘순수예술가’라는 호사스러운 칭호만을 탐한다면, 결국 크리스토퍼처럼 힘 있는 자들의 충직한 공모자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다.(황승현 영화평론가)

경향신문(07. 06. 28) 하이퍼텍 나다 ‘라스 폰 트리에 특별전’

대학로 하이퍼텍나다 극장에서 ‘도그만 선언’으로 유명한 덴마크의 거장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특별전이 28일부터 7월 4일까지열린다. 6월14일 개봉한 그의 최신작 ‘오! 마이 보스!’의 개봉을 기념해 열리는 이번 상영이벤트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독창적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번 특별전은 첫 장편 데뷔작으로 비쥬얼리스트로서의 그의 감성과 단 한번의 NG 없이 2주 동안 모든 촬영을 마무리 지으며 연출력을 선보인 장편 데뷔작 ‘범죄의 요소’(1984) 가 눈에 띈다. 또 2000년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으로 여주인공 비요크에게 칸느영화제 여우주연상까지 선사했던 2000년작 ‘어둠 속의 댄서’(2000)와 1995년 ‘도그마 선언' 이후 다시 장르영화로 돌아와 관객과의 직접적이고 친밀한 소통을 위해 만든 코미디 영화 ‘오! 마이 보스!’(2006)까지 총 3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상영작 소개-

<범죄의 요소>(1984)

은퇴해 카이로에서 생활하고 있던 피셔 형사는 경찰학교의 스승이었던 오스본과 동기 크레이머의 요청으로 유럽으로 돌아온다. 피셔가 13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것은 3년 전에 종결된 것으로 알았던 연쇄살인사건이 재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범죄의 요소'라는 책을 쓰기도 한 오스본은 복권을 파는 아가씨들만을 골라 토막살인을 저지르는 일명 복권 살인사건의 수사를 포기한 채 현실 감각을 잃은 듯이 행동하기 시작하고, 범인이라고 생각했던 인물 해리 그레이는 차 사고로 죽음을 맞게 되는데...



<어둠 속의 댄서>(2000)
공장에서 일하는 셀마는 시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자신을 닮아 역시 눈이 멀어가는 아들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체코에서 이민 온 그녀는 아들이 13살이 되기 전 눈을 고쳐주겠다는 소망 하나로 밤낮을 가리지 않으며 고된 노동에 몸을 맡긴다. 그녀의 유일한 삶의 기쁨은 뮤지컬 배우를 꿈꾸며 춤과 노래의 상상 속에 빠지는 것. 이 행복한 상상은 늘 고통스런 현실로부터 셀마를 지켜주는 버팀목이 된다. 그러나 평온하던 그녀의 일상은 사치스런 아내 때문에 힘겨워하는 집주인인 경찰관 빌과 가까워지면서 예상치 못한 비극을 맞이한다.



<오! 마이 보스!>(2006)

지난 10년간 직원들과 동고동락하며 자신이 회사의 보스라는 정체를 숨기고 평직원처럼 지낸 라운! 회사를 매각하기로 결정을 했지만 동료들을 생각하면 미안해진다. 그래서 그는 엉터리 배우를 섭외해 회사 매각을 위한 가짜 보스를 만들어낸다. 보스를 직접 만난 적이 없는 10년 근속의 직원들은 그가 진짜 보스인줄로만 안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이 보스, 직원들의 눈엔 무언가 수상해 임무를 다그치는 라운과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직원들, 이 사이에서 어설픈 가짜 보스는 과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07. 06. 29.

P.S. 영어권에서도 지난 2005년에 라스 폰 트리에 인터뷰집이 출간됐다(그보다 먼저 2003년에도 비슷한 포맷의 인터뷰집이 출간된 바 있다). 영화학도들에겐 필독서가 됨 직하지만 번역된다면 일반독자들에게도 흥미로운 읽을 거리가 되지 않을까? 가장 최근에 나온 책으론 잭 스티븐슨의 연구서 <라스 폰 트리에>(2005)도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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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제3회 맑스 코뮤날레가 개최된다(아마도 자료집이 곧 출간될 듯하다). 초청된 학자들 중에는 국제헤겔연맹 의장 안드레아스 아른트 교수도 들어 있다. 그 정도면 거물급 인사가 아닌가 싶은데 한겨레에 인터뷰 기사가 실렸길래 옮겨놓는다. 헤겔에 대한 나의 관심은 거의 전적으로 지젝이 부추긴 것이기에 '로쟈의 지젝'으로 분류해놓고.

한겨레(07. 06. 28) “최근 영국·미국서 변증법 관심 되살아나”

28일 서강대 다산관에서 열리는 3회 맑스 코뮤날레에 발표자로 초청된 안드레아스 아른트(58·오른쪽 사진) 독일 베를린자유대 철학부 교수는 헤겔 변증법의 대가로 손꼽힌다. 1992년 이래, 전 세계 진보적인 헤겔(왼쪽 사진) 연구자 500여명이 참여한 국제헤겔연맹 의장을 맡아 왔다. 이 단체는 중도보수 성향의 국제헤겔회의와 함께, 세계 양대 헤겔학회로 꼽힌다. 그는 현실 개념을 파악하는 새로운 형태의 도구로서 헤겔 변증법의 의미를 재정립한 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저서 <칼 마르크스:그의 이론의 전체연관에 대한 연구>와 <변증법과 반성:이성개념의 재구성을 위한 연구>는 헤겔 변증법 철학과 변증법 일반에 대한 고전적 연구서로 평가받고 있다.

26일 고려대에서 만난 아른트 교수는 ‘복합적 구조들의 역사적 발전’을 기술하는 도구로서 헤겔 변증법을 적극 옹호했다. 그는 또 “‘노동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유시간과 관계하는 법을 잊어버렸다”면서 “자유시간을 쓸 수 있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경수 한신대 학술원 연구교수가 인터뷰를 도왔다.


-헤겔 철학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헤겔 이론은 근대의 지반에서 나왔다. 근대를 역사적으로 반성한 것이다. 헤겔 철학의 새로움은 구조에 대한 기술 뿐 아니라 역사적 과정을 항상 같이 사유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새로움은 인권을 새롭게 조명한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추상적 자유가 아니라 사회 정치적 제도를 통해 확보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자유는 빈말이 아니라 구조 즉 시스템으로서 확보해야 한다고 봤다. 헤겔 변증법은 ‘복합적 구조들의 역사적 발전’을 기술하는 데 그 어떤 방법론보다 탁월한 도구이다. 변증법을 통해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고 올바르게 보고 기술할 수 있다.

 

-동일성에 대해 차이의 우위를 강조하는 들뢰즈 등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은 헤겔 변증법을 싫어한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나?

=들뢰즈는 근대적(모던)이란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모던은 계속 발전되어 나가고 또 항상 현재화되는 개념이다. 현재 흐름 속에서의 발전의 개념인데,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은 모던을 ‘발전이 종결된 하나의 단위’로 오해하고 있다. 변증법은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이 말하는) ‘차이’를 하나의 연관 속에서 고찰하고 총체성 안에서 고찰한다. 이를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은 간과하고 있다. ‘동일성’에 대해 추상적으로 사고하며 ‘차이’와 대립시키고 있다.

-1990년 이후 한국에서는 데리다, 푸코, 들뢰즈 등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과, 이들과 철학적 영향을 주고 받은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 네그리 등을 대안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이론을 어떻게 보나?

=네그리는 대중의 자발성 이론에 기초해 있다. 하지만 대중 조직화 등 실천 환경에 대한 분석은 충분하지 않다. 세계화의 대안 이론이 될 수 없다. 대중에게 이미 자발성이 있고 제국이 있으며 항상 대항하는 힘이 있다는 생각은 철학적으로 나이브(순진)하다.

-논문 ‘시간의 경제’에서 ‘자유시간’을 누릴 줄 아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어떤 의미인가?

=사회적으로 노동 시간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는 경제에 중요하다. 유한한 존재가 어떻게 행복한 삶을 가질 것인지, 우리가 가진 시간을 자율적으로 규정하고 구성해나가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노동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자유시간과 관계하는 법을 잊어 버렸다. ‘노동형식’이 자유시간 안에 침투해 들어왔다. 자유시간 조차도 노동이나 업적을 위해 쓰이는 휴식이 되었다. 또 여가나 소비 산업을 위해 휘둘리고 있다. 자유시간을 쓸 수 있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좋으면서 행복한 삶이 뭔지 근본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생의 다른 대안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거기서 출발해 정치적 대안을 찾아야 한다. 출발점은 노동시간의 단축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끊임없이 허구적 욕구를 재생산해 낸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사용가치’에 근거한 요구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다시 한번 미래 생을 꿈꾸고 사회적으로 배워야 하고 정치적 대안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신자유주의와 정보혁명 시대에 유의미한 변혁적 도구는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국가가 자본주의를 규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본론>의 ‘1일 노동시간’장을 보면, 마르크스는 국가가 잔혹한 아동 노동에 대해 일정한 제한을 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단계에서 국가가 자본주의 잔혹성을 누그러뜨리는 기능도 한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국제적 비판적 운동도 중요하다. 고삐풀린 신자유주의 움직임을 제어해줄 수 있다. 유럽연합 등 모든 기관을 이런 식의 비판 운동에 활용할 필요가 있다. 유럽의 경우 노조간 연대 조직이 유럽노동헌장을 제정하려고 한다. 이런 움직임은 유럽의 최소 노동조건을 만드는 운동의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계급지배 철폐만을 외칠 게 아니라 구체적인 경제적 대안을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상품 생산과 분배, 소비를 어떻게 규정하고 계획적 생산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제시해야 한다.

-독일 등의 마르크스주의 연구 동향은?

=최근 미국과 영국에서 변증법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미국에서 마르크스 변증법 이해를 다루는 문헌들이 많이 나오고 있으며 토론도 활발하다. 이런 미국 쪽 움직임이 오히려 유럽 쪽에 영향을 주고 있다. 내가 맡은 대학 강좌를 보면, 최근 몇해 마르크스 철학이나 정치경제학 과목 수강 학생들이 점점 늘고 있다. 1989년 현실 사회주의 붕괴는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는 더 이상 정치적 의심을 받지 않으면서 위축되지 않고 마르크스 사상을 있는 그대로 과학적으로 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도그마(독단)에 빠질 가능성을 줄이는 긍정적 계기가 됐다.(글 강성만 기자)

07. 06. 28.

P.S. 갑작스런 '헤겔 붐'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주목할 만한 책들이 나오고 있다. 비토리오 회슬레 교수의 주저 <헤겔의 체계>(한길사, 2007)가 번역돼 나오기 시작했고, 헤겔 원저로는 오랜만에 <인륜성의 체계>(울력, 2007)가 우리말 번역본을 얻었다. 그리고 나종석 교수의 <차이와 연대>(길, 2007) 또한 최근에 나온 묵직한 연구서이다. '헤겔의 현재성' 정도는 허언이 아닌 듯싶다...

07. 0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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