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장마철이지만 서재의 스크린을 여름 휴가 모드로 미리 바꾸고(휴가를 갈 일이 없을 듯해서 기분만 내본다) 서핑하는 사진도 갖다 붙여놓는다. 보기에 제법 시원하군... 

6월 한달을 거의 파도타기로 보낸 듯하다. 서핑 수준의 그런 폼나는 파도타기가 아니라 바닥에 발들 딛고 있다가 파도가 밀려오면 살짝 발을 떼어 균형을 잡는 '파도타기' 말이다. 재미를 제외한다면 그런 파도타기의 목적은 순전히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자리를 보전하는 것이다(소위 물먹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해수욕장에 나가 그런 파도타기를 해본 건 10년도 더 전의 일 같지만 여하튼 그 '실감'을 오랜만에 느끼던 와중에 한달이 훌쩍 다 지나가고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밀린 잠을 보충하고 일어나니 밀린 책들이 수십 권이다. 이런 경우에 순서를 따지는 건 무의미해서 하버마스의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을 몇 페이지 읽다가 벨르이의 소설 <페테르부르크>를 몇 페이지 들춰보고(읽어야 하는 러시아어본이 얼른 눈에 띄지 않는다) 다시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문학동네, 2000)에도 손길이 갔다. 아직 국역본이 완간되지 않은 '이 빠진' 번역서와 함께 영역본을 빼놓고(내겐 러시아어본도 있다) 새롭게 시작하는 뜻으로 오늘은 서론을 읽어두기로 했다. 예전에 얼마간 읽었지만 따로 정리는 해두지 않았다는 게 이유이다(그땐 구 영역본을 참조했는데, 지난 2004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파도타기 말고 진짜 공부를 위한 자세도 가다듬을 겸. 

  

책에서 먼저 읽게 되는 건 가다머가 제사로 쓴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의 시구이다. 제목이 따로 붙어 있지 않은 한 후기시의 전반부라는데, 우리말 번역은 이렇다.

그대가 스스로 던진 공을 받아 잡는 동안은
모든 것이 그대의 솜씨요, 그대 노력의 대가이지만;
영원한 공연자(共演者)가 그대에게
그대의 중심으로 정확하고 민활한 스윙 동작으로
신이 만든 거대한 다리의
저 곡선들 중의 한 곡선을 따라 던진 공을
그대가 불시에 잡게 되는 경우
그때 공을 잡을 수 있음은 그대가 아닌
세상의 능력이라오.

영역본과 러시아어본에는 이 시에 대한 해설이 따로 붙어 있지 않지만 국역본에는 간략한 해제가 달려 있다. 그에 따르면 이 시는 "만년의 스위스 시절에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돌보아준 나니 분덜리-폴카르트 부인에게 헌정된 시이며, 전집 제2권에 실려 있다." 이어지는 해설. 

"'중심'이란 말이 이 시의 요체이다. '중심'은 개인적인 중심과 영원성 혹은 신의 '중심'으로 구별되고 있다. 여기서 '중심'은 공간적인 중심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힘으로서 타자로부터 다가오는 중심을 말한다. '영원한 공연자'가 '그대의 중심'을 향해 공을 던질 때, 다시 말해 우리가 협소한 중심에서 벗어나 일반적인 중심을 상대할 때, 비로소 '공을 잡을 수 있음'은 그대만의 것이 아닌 '세상의 능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다머는 이 시에서 공을 잡는 행위를 해석 행위로 풀이하고 있는 듯하다."

중심의 형이상학이 이 시의 요체인가는 좀더 생각해볼 문제이지만 눈대중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은 이 시에서 두 가지 공잡기가 대비되고 있다는 것. 그 하나는 자기 스스로가 던진 공을 받는 것이다. 즉 자가-포구(self-catching)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그러니까 부메랑처럼 자기가 던지고 자기가 받는 것인데, 그건 (당연한 말이지만) 순전히 "그대의 솜씨요, 그대 노력의 대가"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자가-포구는 혼자서 하는 파도타기에 가깝겠다.

다른 하나는 좀 다른 종류의 공잡기이다. 그건 공을 던진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영원한 공연자'이기 때문이다. 영역본에서는 '영원한 공연자'를 'eternal partner'라고 옮겼다(러시아어본에서는 이를 여성명사로 받았다). '영원한 파트너'라고 해도 무방할 텐데, 문제는 이 공연자/파트너가 '그대의 중심'을 향하여 정확하고 민활한 스윙 동작으로 던진 공, 큰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공을 받는/잡는 것이다. 그럴 경우 "why catching then becomes a power -/ not yours, a world's." 즉, 그때 공을 잡는 것은 그대의 능력이 아니라 바로 세상의 능력이라는 것. 왜 아니겠는가? 

"가다머는 이 시에서 공을 잡는 행위를 해석 행위로 풀이하고 있는 듯하다"라고 해설에도 적혀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 '해석행위' 혹은 그것을 중심적으로 다루는 해석학이란 게 텍스트의 이해와 해석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는 점. 가다머가 서론에서 주장하고 있다시피 "텍스트의 이해와 해석은 학문의 관심사일 뿐만 아니라, 명백히 인간의 세계 경험 전체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 경우 '인간의 세계 경험 전체'는 '공잡기'의 문제로 집약될 수 있다. 내가 써놓은 걸 읽는 게 아니라 누군가(혹은 영원한 파트너가!) 써놓은 걸 읽고 이해하는 일이 곧 우리 '세계 경험'의 요체라고 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와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하고 구성하고 축적하는 행위로서의 공부는 공을 제대로 잘 잡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다. 제대로 된 프로텍터와 미트도 준비해서 다양한 투구폼과 구속과 구질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영원한 파트너께서 던지는 공은 사인도 없이 날아올 때가 많기에 밥 먹으면서도 잠을 자면서도 미트를 벗어서는 안될 터이다...  

서문을 읽겠다고 해놓고 잠시 딴전을 피웠다. 다시 가다머의 묵직한 공을 받기 위해 책상머리로 가야겠다(그는 영원의 나라에서도 현란하게 공을 뿌려대는군!). 이건 혼자서 파도타는 것과는, 자리만 보전하는 것과는 양상이 좀 다르다. 이 여름에도 중무장을 하고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건 내가 공을 잡게 되더라도 그건 세상의 능력 덕분이고, 밥상을 차려준 사람들의 노고 덕분이라는 것. 결코 내가 잘나서가 아니다(그런 생각을 하는 놈들은 공부가 부족한 것인바 곧장 'X카바'로 들어가야 한다). 이크, 공이 벌써 날아오고 있다!..

07.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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