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아니면 사기꾼'이란 평을 듣는 덴마크의 문제적 영화감독 라스 폰 트리에 특별전이 열린다고 한다. 말은 '특별전'이지만 고작 세 편의 영화를 상영한다고 하니 괜히 나까지 머쓱하긴 하다. 더구나 신작 <오 마이 보스>를 제외하면 이미 DVD 타이틀로까지 다 나와 있는 영화들이어서 '발견'의 새로움을 기대하기도 어려울 듯싶고. 개인적으론 그의 영화 <브레이킹 더 웨이브>를 인상적으로 본 기억이 있지만 이후에 나온 영화들을 다 챙겨보진 못했다(<킹덤>이나 <어둠 속의 댄서>, <도그빌> 모두 부분적으로만 보았다). 이번에 나온 신작 <오 마이 보스>는 예기치 않게도 코미디라고 하니까 그 중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도 싶다.
개인적인 기억을 하나 더 보태자면, (모스크바 통신에도 적은 바 있지만) 나는 러시아에서 라스 폰 트리에가 갖는 거장으로서의 위상에 좀 놀란 적이 있다(몇 년전 상황이긴 하나, 라스 폰 트리에, 왕가위, 기타노 다케시, 김기덕이 러시아에서 꼽은 '우리시대의 거장'들이었다). 그걸 웅변해주었던 건 지난 2004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키노텍스트'란 영화총서의 첫 권이 라스 폰 트리에에게 바쳐졌다는 점. 작품론과 함께 감독과의 인터뷰, 그리고 <도그빌>의 시나리오 등으로 구성된 책이었다(망설이다가 구입을 미루었던가?). 우리의 '키노텍스트'들도 보다 폼나게 나옴직하지 않을까?..
모아놓은 기사들은 <오 마이 보스>에 대한 리뷰와 라스 폰 트리에 특별전에 대한 소개이다.
경향신문(07. 06. 29) [영화 가로지르기]‘오 마이 보스’
‘오 마이 보스’(감독 라스 폰 트리에)는 가짜 사장으로 부임한 무명배우의 이야기다. 회사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해고를 책임지고 추진할 악역이 필요했던 진짜 사장은 가짜 사장으로 하여금 그 일을 맡도록 한다.
‘오 마이 보스’에는 라스 폰 트리에의 고유한 인장이 찍혀 있다. 도그마 영화에 대한 감독의 신념이 대사에까지 등장하고, 형식미에 있어서도 관객과의 심리적 거리를 확보하는 개성적 편집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영화에 자신의 모습까지 드러내는 감독은 점프 컷(두 장면 사이를 부자연스럽게 단절시키는 편집기법)을 이용하여 관객의 정서적 이입을 적절히 견제한다. 편집의 위력을 생생한 형태로 보여주는 점프 컷에는 영화라는 매체의 독자적 정체성이 간직되어 있다.
‘오 마이 보스’는 전문성의 신화를 재치있게 조롱한다. 첨단 IT기업의 경영자로 행세하는 무명배우 크리스토퍼의 모습은 허상에 의해 미화된 기업가들을 상징한다. 그래서 ‘오 마이 보스’는 단순한 가짜사장 소동이 아니라 능력에 비해 명성과 위신이 턱없이 부풀려져 있는 기업가 모두에 대한 풍자로까지 읽힌다. 가짜 사장을 둘러싼 소동에는 지위와 능력의 상관관계에 대한 근본적 회의가 내장되어 있다. 영화는 능력이나 전문성에 대한 일반적 믿음이 일종의 신화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크리스토퍼(젠스 알비누스)는 전통적 의미의 능력 때문에 고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 라운(피터 갠츨러)의 평판관리 혹은 이미지메이킹을 위해 고용되지 않는가.
한편 ‘오 마이 보스’의 직원들은 자본의 모든 대리인들에게 본능적으로 공손하다. 그들은 회사의 냉혹한 조직문화에 거부감을 보이면서도, 실제 소유주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정체불명의 ‘사장님의 사장님’까지 등장하지만, 직원들은 그 익명의 권위마저도 충실히 추종한다. 자본가에게 부여된 지엄한 권위 앞에서, 그들은 권위의 허상을 직시하려는 일체의 노력을 포기한 채 권위가 수반하는 화려한 후광에 현혹되고 만다. 그들이 사장의 비정한 행태에 대해 묵인하거나 회피하지 않았다면 사장의 정체가 그렇게 오랫동안 은폐될 수 있었을까. 감독은 자신의 앞날을 자본가에게 위탁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일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반응을 놓치지 않는다.
'오 마이 보스’의 대사처럼, 배우에게 관객은 법이고 무대는 법정이다. 그러나 배우가 단지 현실로부터 격리되어 무대에 유폐된 존재라면, 그가 과연 관객을 감동시킬 수 있을까. 관객과의 소통이 운명인 배우가 밀폐된 자의식의 세계에 갇힌 은둔자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창하는 예술지상주의는 자칫 예술가의 나르시시즘에 불과할 수 있다. 크리스토퍼가 자신의 역할모델로 숭배하는 ‘감비니’는 실존 배우가 아니라 라스 폰 트리에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트럭의 이름이다. 가상의 인물 감비니를 원용하여 자신만의 연기론을 변호하는 크리스토퍼는, 현실에서 유리된 채 예술지상주의의 포로가 되어버린 예술가들을 상징한다.
배우의 진정한 임무란 과연 무엇일까. 가짜 사장 크리스토퍼는 자신의 배역과 대사에만 관심이 있다. 그가 직원을 해고하는 악역을 맡지 않으려는 것도 배우로서의 자존심 때문이지 해고의 부당성에 대한 확고한 자각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그는 직원들의 해고를 초래할 매각계약서에 마침내 서명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크리스토퍼는 자신이 숭배하는 배우 감비니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충동적으로 계약서에 서명한다. 해고된 직원들의 운명에는 아랑곳없이 자신만의 예술에 몰두하는 크리스토퍼의 마지막 모습은, 자폐적 순수예술이 결국 자본가와 권력자들의 이익에 복무할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준다.
볼테르는 진실보다 평화가 더 소중하다고 충고한다. 반면 셰익스피어는 연극의 목적은 자연을 거울에 고스란히 비추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어쩌면 예술가의 숙명은 평화로운 거짓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롭지 않은 진실을 증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 마이 보스’에는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서글픈 자화상이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권위에 맹종하는 직원들, 가공된 이미지로 자신을 체계적으로 미화하는 자본가, 그리고 자신만의 관념적 예술세계로 도피한 예술가까지. 사람을 진실의 거울에 비추는 것이 예술이라면, 자본주의 사회의 부속품이 되어 버린 우리들의 초상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의 몫일 것이다. 그것을 거부하고 ‘순수예술가’라는 호사스러운 칭호만을 탐한다면, 결국 크리스토퍼처럼 힘 있는 자들의 충직한 공모자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다.(황승현 영화평론가)
경향신문(07. 06. 28) 하이퍼텍 나다 ‘라스 폰 트리에 특별전’
대학로 하이퍼텍나다 극장에서 ‘도그만 선언’으로 유명한 덴마크의 거장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특별전이 28일부터 7월 4일까지열린다. 6월14일 개봉한 그의 최신작 ‘오! 마이 보스!’의 개봉을 기념해 열리는 이번 상영이벤트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독창적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번 특별전은 첫 장편 데뷔작으로 비쥬얼리스트로서의 그의 감성과 단 한번의 NG 없이 2주 동안 모든 촬영을 마무리 지으며 연출력을 선보인 장편 데뷔작 ‘범죄의 요소’(1984) 가 눈에 띈다. 또 2000년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으로 여주인공 비요크에게 칸느영화제 여우주연상까지 선사했던 2000년작 ‘어둠 속의 댄서’(2000)와 1995년 ‘도그마 선언' 이후 다시 장르영화로 돌아와 관객과의 직접적이고 친밀한 소통을 위해 만든 코미디 영화 ‘오! 마이 보스!’(2006)까지 총 3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상영작 소개-
<범죄의 요소>(1984)
은퇴해 카이로에서 생활하고 있던 피셔 형사는 경찰학교의 스승이었던 오스본과 동기 크레이머의 요청으로 유럽으로 돌아온다. 피셔가 13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것은 3년 전에 종결된 것으로 알았던 연쇄살인사건이 재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범죄의 요소'라는 책을 쓰기도 한 오스본은 복권을 파는 아가씨들만을 골라 토막살인을 저지르는 일명 복권 살인사건의 수사를 포기한 채 현실 감각을 잃은 듯이 행동하기 시작하고, 범인이라고 생각했던 인물 해리 그레이는 차 사고로 죽음을 맞게 되는데...
<어둠 속의 댄서>(2000)
공장에서 일하는 셀마는 시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자신을 닮아 역시 눈이 멀어가는 아들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체코에서 이민 온 그녀는 아들이 13살이 되기 전 눈을 고쳐주겠다는 소망 하나로 밤낮을 가리지 않으며 고된 노동에 몸을 맡긴다. 그녀의 유일한 삶의 기쁨은 뮤지컬 배우를 꿈꾸며 춤과 노래의 상상 속에 빠지는 것. 이 행복한 상상은 늘 고통스런 현실로부터 셀마를 지켜주는 버팀목이 된다. 그러나 평온하던 그녀의 일상은 사치스런 아내 때문에 힘겨워하는 집주인인 경찰관 빌과 가까워지면서 예상치 못한 비극을 맞이한다.
<오! 마이 보스!>(2006)
지난 10년간 직원들과 동고동락하며 자신이 회사의 보스라는 정체를 숨기고 평직원처럼 지낸 라운! 회사를 매각하기로 결정을 했지만 동료들을 생각하면 미안해진다. 그래서 그는 엉터리 배우를 섭외해 회사 매각을 위한 가짜 보스를 만들어낸다. 보스를 직접 만난 적이 없는 10년 근속의 직원들은 그가 진짜 보스인줄로만 안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이 보스, 직원들의 눈엔 무언가 수상해 임무를 다그치는 라운과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직원들, 이 사이에서 어설픈 가짜 보스는 과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07. 06. 29.
P.S. 영어권에서도 지난 2005년에 라스 폰 트리에 인터뷰집이 출간됐다(그보다 먼저 2003년에도 비슷한 포맷의 인터뷰집이 출간된 바 있다). 영화학도들에겐 필독서가 됨 직하지만 번역된다면 일반독자들에게도 흥미로운 읽을 거리가 되지 않을까? 가장 최근에 나온 책으론 잭 스티븐슨의 연구서 <라스 폰 트리에>(2005)도 눈에 띈다...